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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극특집] 나비잠_제1막

  • 작성일 2015-07-14
  • 조회수 2,122

 

[시극 특집]

 

 

나비잠(sleeping butterfly)

[명사]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
[명사] 날개를 편 나비 모양으로 만든 비녀. 새색시가 예장(禮裝)할 때에 머리에 덧꽂는다.

 

 

김경주

 

 


 

 

   【 때 】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 4대문과 도성 축성이 이루어지던 어느 여름의 시기를 다룬다. 왕은 대목장으로 하여금 4대문의 축성 감독을 맡긴다. 이 시기 백성들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몇 년째 전국에서 민정들이 징발되어 도성 축조 공사에 부역을 해야 했다. 인부들은 숙소도 없이 노숙을 하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노역에 시달린다. 도성은 돌성(석성)과 토성(흙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공사 구간 길이는 5만 9500여 척이나 되었다. 징발의 약속대로 1차 축성으로 몇몇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으나, 이러한 도성의 과도한 노역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성문 밖으로 달아나는 인부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성안은 흉흉한 소문들에 둘러싸였고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 시/공간 】
    인물들은 불면에 시달리는 듯, 낮인 듯 밤인 듯
    구별이 안 가는 시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듯하다
    마치 백야 속에서 움직이는 구름들처럼 혼몽하다

 

   【 인물 】
    대목수
    악공
    제사장
    스님
    달래
    노파
    망루 병사1. 2
    천문사관
    장수
    실루엣
    마을사람들 4
    병사, 마적, 인부
    엄마혼령
    흙의혼령
    마적대장
    맹인천문관
    어린 왕
    늙은 신하

 

 

1막 흥인문

 

1장 동문 도성 안

 

자정

 

멀리서 들려오는
축성공사 소리들
망치소리
마른 바람
못이 박히는 소리
마른 바람
정이 돌을 깨는 소리
마른 바람에
돌가루가
성곽에서
성안으로 날린다.
마루에 쌓이는 돌가루
잠든 사람들의 이마 위에
쌓이는 뿌연 돌가루들

 

어느 초가. 방

 

호롱불
흔들린다
여인
비를 바라본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알강 달강 잘도 잔다
누렁이는 앞발 베고
눈꺼풀에 달이 온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눈을 감고 달로 가라
우리 집은 달이 밝아
이마 위에 달이 산다
나비 들이 물고 간다

 

- 자장가1

 

 

아비 문 앞에서 비를 털고
지게를 내려놓고
자장가 소릴 듣고 있다
여인 자장가를 멈추고
아기를 가만 가만 흔들어주다가
꾸벅 꾸벅
존다
아비 (조용히) 자나?
깨어나는 여인
방문을 열고 비를 털고 들어오는 아비
아비 더워
여인 덥네
아비 목이 말라
여인 아이도 목이 타
아비 그만해. 누 아인 줄도 모름서
여인 아가일 뿐이야
여인 이 애는 젖이 필요해
아비 니 젖은...
여인 내 젖이 왜?
아비 그만, 그만 이제 그만해
여인 해봐야 알지
아비 소용없는 짓이야
침묵
아비 내 버려. 위험해
여인 그럴 수 없어
아비 내 말 들어
여인 그런 말 말어
아비 내가 버릴 거여
여인 그러기만 해. 그날로 나도 우물로 빠져 버릴 거여
아비 우린 할 만큼 했어...
여인 이 애를 키우면 돼...
아비 병든 애야. 전염병이 들었을 거야
여인 그런 말 말어. 당신이 어떻게 알어?
아비 오래 못 가고 다 죽잖아...
여인 아이의 귀를 막으며
여인 애가 들어... 듣잖아...
사이
아비 온 지 삼 일째야
애가 자지를 않아
울지도 않고 웃고만 있어
역병에 든 거야
여인 곧 잠들 거야
아비 살아도 문둥이가 될 거야
여인 이 아인 잘 살 거야. 내 젖을 먹일 거야
아비 무슨 젖
여인 내 젖
침묵
여인 아이를 어른다
여인 젖도 한 번 못 물렸어
아비 우리 아인 죽었어
아비 당신 잘못이 아니야
여인 사람들이 젖을 돌려 물리면 살릴 수 있어
아비 아이를 빼앗은 후 여인의 가슴 저고리를 올려주며
아비 당신 젖은 물이여. 봐. 그냥 멀건 물이여... 이건 젖이 아니여. 애가 물고만 있잖아
여인 곧 나올 거야. 아가가 물기 시작하면... 곧... 나올 거야
아비 당신은 젖이 안 나와
도성에 젖이 다 말랐어
여인 의원이 아가가 물면 젖이 나온댔어...
아비 바보야 애가 나와야 젖이 돌지
눈물이 나온다. 그런 말 말어
아비 흐느낀다
아내도 흐느끼며 아이를 가만가만 흔든다
새근새근 웃다가 눈을 감는 아이
호롱불
바람에 흔들린다
침묵
아비 자자. 늦었어
여인 (아이를 보며) 이제 잠들었네


이불을 까는 아비
아이를 가운데 눕히는 여인
눕는 아비
눕는 여인
호롱불을 끄는 아비
침묵
어둠속
일어나는 아비
여인 왜 일어나?
아비 그냥
여인 잠이 안 와?
아비 일이 좀 남았어. 먼저 자
아비 짚신을 엮는다
여인 아이 쪽으로 돌아 눕는다
가만가만 아이 가슴을 두드려준다
아이 눈을 감은 채 숨 쉰다
잠드는 여인
아비 아이를 조용히 안아든다
막이 내린다

 

 

2장 처마 아래

 

돌아가면서 젖동냥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사람들

 

여인 저고리를 연다
할아버지 저고리를 연다
소년 저고리를 연다
노파 저고기를 연다

 

젖을 물린다
저고리를 연다
돌아가면서
나란히 서서

 

〈노래/노동요처럼〉 코러스

 

저고리를 열어
젖무덤이 열리네
젖이 흐른다
엄마의 숨 냄새가 난다
엄마의 살 냄새가 난다
아이의 머리칼이 자란다

 

빗속에 서서
가마니를 등에 지고
뱃속에 베개를 넣고 다니는 노파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3장 지붕

 

자정을 틈타 성문을 열고
나무를 지러간 지게꾼들
역병에 걸려 죽은 아이들을 지게에 넣어 데려왔다
구덩이를 파고 아이들을 버리는 지게꾼들
파 묻는다
뒤들 돌아보며
성안으로 뛰어가는 사람들

 

성 바깥. 숲
새벽. 동문 도성 안
지붕 위

 

소 울음소리
잠든 인가들
아비가 잠든 아이를 강보에 안고 지붕 위에 있다
가만히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달려간다

 

반대편
탈을 쓰고 나타난 광대
지붕 위에 서 있다
다가와 아이를 안아
가만히 흔들어준다
강보 속에 아이가
새근새근 웃고 있다
코러스

 

광대 아이를 안아 달래는 듯
지붕을 왔다 갔다 걷는다

 

광대 아이를 안은 채
춤을 추며 아이를 달래는 듯한
자장가 같은 몸짓
달을 입에 넣고 웅얼거리듯
흔들림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들어
달을 바라본다

 

어둠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탈
지붕을 왔다 갔다 걷는다

 

반대편 성곽 망루
성곽을 지키는 어린 병사 형제
가마니에 비를 피하며
꾸벅꾸벅 졸다가 깨다가 졸다가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갤 숙이고

 

 

병사 형 자?
병사 동생 졸려
병사 형 자면 안 돼
병사 동생 알았어
병사 형 더워
병사 동생 더워
병사 동생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봐
병사 형 몰래 죽은 아이들을 내다 버린대...
병사 동생 무서워. 우리도 버릴까?
병사 형 우린 아이들이 아니야. 병기를 들고 성을 지키잖아
병사 동생 맞아 우린 병사야
병사 형 하지만 몰라
병사 동생 무슨 소리야?
병사 형 우리가 병들거나 죽으면 어른들이 숲에 버릴지도 모르지.
병사 동생 우린 아이도 아닌데
병사 형 병이 들면 우리도 아이로 볼걸
병사 동생 난 아프지 않을 거야. 난 여기서 오랑캐를 발견하고
적이 오면 싸울 거야
병사 형 그래 . 공을 세우면 아무도 우릴 어린이로 보지 않을 거야
멀리 잘 봐. 뭐가 보이면 말해
병사 동생 응. 형. 난 눈이 좋으니 잘 볼게. 근데... 형...
병사 형 왜.
병사 동생 엄마는 언제 와?
병사 형 엄마는 안 와.
병사 동생 아빠는?
병사 형 아빠는 엄말 찾으러 갔어
병사 동생 엄말 찾았을까?
병사 형 모르지. 엄말 찾았다고 해도... 오지 않을 거야
병사 동생 왜? 우리가 여기 기다리는 걸 알잖아
병사 형 우린 다 컸어. 둘이 잘 살아야 해
병사 동생 엄마 보고 싶어. 형은 안 보고 싶어?
병사 형 바보야. 우리가 더 크고 이 다음에 다 커도 엄만 보고 싶은 거야. 참는 거야
병사 동생 왜 참아?
병사 형 눈물이 나오면 사람들이 아이처럼 볼 테니까
병사 동생 우릴 내다 버릴까봐 두렵구나
병사 형 아무도 우릴 버리지 못해. 넌 내가 돌볼 거야
병사 동생 나도 형을 돌볼 수 있어.
병사 형 바보야 돌보는 건 어른이 하는 거야
병사 동생 형은 눈물을 자주 흘리니까 아직 어른이 아니야
병사 형 그래... 알았어. 배고프다. 말을 많이 하면 배만 고파
병사 동생 나처럼 손가락을 빨아. 아니면 엄마 머리칼 냄새를 떠올려
병사 형 그건 배고플 때 애가 하는 짓이야
병사 동생 형도 엄마 손가락을 빨면서 잠들었잖아. 그리고
인부들도 배가 고파 손을 빨고 있던데...
병사 형 그런 건 보지 마. 저기 멀리 지평선이나 수평선만 봐야 해
흙속에서 먼지가 생기면 나팔을 불러서 알려야 해.
병사동생 지평선과 수평선만. 둘은 형제야?
병사형 떨어져 있지만 형제야
침묵
병사동생 형?
병사 형 왜?
병사동생 성 안으로 몰래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
병사 형 위에 보고 해야 하지
병사동생 지붕 위를 걷고 있어
병사 형 지붕 위를 걷고 있다면 도적이 틀림없어
병사동생 뭘 안은 채 지붕 위를 걸어다녀
병사 형 뭘 훔친 거야?
병사동생 모르겠어. 뭘 소중히 품에 안고 있어
병사 형 이방인이야! 적의 염탐꾼이 확실해. 보고를 해야겠어
병사동생 나팔을 불까? 소릴 듣고 달아날 텐데. 왕도 갑자기 깰걸. 우린 처벌받을 거야.
병사 형 활로 맞출 수 있겠어?
병사동생 응 아마도.
병사 형 떨어뜨려
병사 동생 지붕 위의 이방인을 목격하고 활을 겨눈다
팔에 화살을 맞고 아이를 안은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대
광대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아이
광대 기어가서
아이를 당겨 안으려고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숲의 유령들 아이의 그림자를
바구니에 가져가려 한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땅을 적신다
바람소리
노파가 다가와 아이를 발견한다
히죽히죽 웃는다
노파 헤헤 헤헤
아가 이가 없다
이가 없다 아가
달에 그믐이 쌓인다
구렁이가 한 마리 성 문이 닫히기 전
미끄러지듯이 문틈으로 빠져 나간다
성문이 닫힌다
빗속에 서서
베개를 버리고
노파 아이를 뱃속에 넣어
숲 속으로 사라진다.
퇴장
성 밖. 숲 속
희미하게 우는 소
울음소리
삽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비
소 울음소리
희미하다
곡괭이로 구덩이를 파고 있는 늙은 아비
울기 시작한다
달구지 뒤에 앉아
치매 걸린 노파
히죽히죽 웃고만 있다.
괭이를 내려놓고
노모를 안아 구덩이에 넣는다
쭈그려 앉아 우는 늙은 아비
아비 엄니 죄송해유
편한 데로 가세유
지도 바로 따라 갈게유
울 엄니. 울 엄니
울 엄니 너무 불쌍해
엄미 절 용서하지 마세유
노모 헤헤. 춥다
헤헤
아비 자장 자장 우리 엄마
잘도 잔다 우리 엄마
시름 없이 달로 가소
여긴 두고 웃고 가소
어미 조금씩 잠든다
삽을 들어 어미를 내려치려 하다가
삽을 내려놓는다
오열하는 아비
눈 감고 웃는 노모
건너편에서 노래소리
노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아비 두리번거린다
저편에 아이를 안은 채 노파가 보고 있다.
4대문 밖에 버려진 시체들의
머리칼을 가위로 잘라 바구니에 모으고 있다
유령들도 시체들 옆에서 머리칼을 바구니에 담고 있다
아비 어 뭐 뭐야! 죽은 사람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잖아. 다...당신 뭐하는 짓이야?
아비 노모가 볼까봐 눈을 두 손으로 가린다
노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이것아 어서 삽으로 끝내
두 사람 머리카락 기다리고 있잖아
노모 헤헤 헤헤
아비 미, 미쳤어... 미친 거야
소달구지에 노모를 싣고 달아나는 늙은 아비
달구지를 버리고 노모를 등에 업은 채
성 쪽으로 달아난다
수년이 경과한다.
(계속)

 

 

◆ 작가소개 / 김경주(시인)

-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 창작과(대본 및 작사 전공) 전문사(MFA) 과정을 공부했다. 몇 년간 야설 작가와 유령 작가로 지내다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연극실험실(혜화동 1번지)에 연극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시극 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고래와 수증기』가 있고, 희곡집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와 산문집 『밀어』 『펄프극장』 『자고 있어 곁이니까』 등을 썼으며, 옮긴 책으로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존 레논 레터스』 『어린 왕자』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과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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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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