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시극특집] 화장실극

  • 작성일 2015-07-17
  • 조회수 3,905

 

[시극 특집]

 

 

화장실극

 

 

 

석지연

 

 

시극_화장실극2

 

ㆍ등장인물

 

여장 남자 1
여장 남자 2
남장 여자 1
남장 여자 2
청소부

 

 

ㆍ무대

 

현대식 여자 공중화장실

 

 

    1장

 

    막이 오르면 남자1이 무릎에 레이스 팬티를 걸친 채 변기에 앉아 있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히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다 이내 고개를 푹 떨군다.

 

 

남자1 지독한 고독이군. 얼마나 잔인한 고독인지 항문이 찢어질 지경이야. (훌쩍이듯 코를 킁킁거리며)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무대 오른편에서 힐을 신은 남자2 빠르게 등장. 그는 매우 초조한 표정으로 바지 지퍼를 내린다.
남자2 (잠긴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빨리! 빨리! 빨리!
남자1 (안쪽에서 문을 두 번 두드린다)
남자2 한 개밖에 없는 칸을 잠가 두면 어쩌자는 거야, 썅! (발로 문을 세게 찬다)
남자1 안에 사람 있어요. 노크하는 법 몰라요?
남자2 어머, 죄송해요. 너무 급했어요. 부디 용서하세요. (문을 쾅쾅 두드리며) 빨리! 빨리! 빨리!
남자1 재촉하지 마세요. 재촉하면 항문이 긴장해서 말을 못 해요. 내 항문은 조지 6세라고요.
남자2 어머,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큰 실례를 범했네요. (배를 움켜쥐고 천천히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하는 국왕 폐하, 언제쯤 문 밖으로 나오시겠습니까? 미천한 이 몸을 위해 속히 자비를 베푸소서.
남자1 지, 짐의 고독이 꽤, 꽤, 깊구나……. 미, 미천한 내, 네가 이 고독을 어찌 아, 알겠느냐.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남자2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남자1 노력해 볼게요. 여기서 평생 살 순 없죠.
조명이 남자1에게만 비춰지고 그는 최선을 다해 엉덩이에 힘을 준다. 짐승처럼 포효하고, 벽을 긁고, 발을 동동 구르다 별안간 변기에 앉은 채로 사지를 늘어뜨린다. 다시 무대 전체에 조명이 켜지면 남자2가 서 있다.
남자2 해치웠어요?
남자1 (숨을 헐떡이며) 만만치 않네요. 곤욕스럽군요. 아, 내가 굳센 대장이었다면!
남자2 희망을 잃지 마세요. 똥이 나올 만한 생각을 해봐요.
남자1 희망이 나를 매일같이 변기에 앉힌 거예요. 오늘은 반드시 똥이 나올 거라고 악착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남자2 그럼 똥이 나오지 않을 만한 생각을 해봐요. 신문을 본다든가.
남자1 (쓰레기통 속 휴지를 집어 신문을 읽듯이) 윤 일병 가해 병장에 징역 45년 선고, 제2롯데월드 실내서 금속 부품 떨어져 방문객 다쳐, 40대 원 모 씨가 남몰래 찾아간 강남 고급 주택에선……. (방귀소리) 세상에, 방귀가 나왔어요!
남자2 거봐요. 하면 되잖아요. 방귀가 잦으면 똥 싸기는 쉬워요.
남자1 부끄럽군요. 앞으로 방귀를 몇 방이나 터뜨려야 할까요?
남자2 숨 막힐 정도로요. 악취에 중독돼야 해요. 악취에 약한 인간들이 똥을 못 누곤 하죠. 그럴수록 제 몸속에서 더 들끓을 뿐이에요.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방귀를 트면서 친밀해지거든요. 서로의 냄새를 나누고, 서로가 공범자임을 확인하고, 냄새가 고약할수록 낄낄대면서……. 이봐, 오늘은 악취가 유독 심하군. 나 몰래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은 거야?
남자1 그리고 어느 날 방 하나 딸린 화장실에서 함께 살게 되고, 서로의 냄새에 진절머리를 치고, 서로를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냉전이 지속될수록 이 모든 게 화장실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이봐, 오늘은 악취가 유독 심하군. 나 몰래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은 거야?
남자2 (문을 쾅쾅 두드리며) 당장 나와! 빨리! 빨리! 빨리!
남자1 재촉하지 마세요. 재촉하면 항문이 긴장해서 쓰질 못해요. 내 항문은 다자이 오사무라구요.
남자2 어머,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큰 실례를 범했네요. (배를 움켜쥐고 문에 귀를 바싹 대며) 존경하는 소설가님, 언제쯤 문 밖으로 나오시겠습니까? 기다리는 이 우둔한 독자를 위해 속히 작품을 끝내 주십시오.
남자1 (우울해서) 자네는 수치스러운 생애가 어떤 것인지 잘 몰라……. 그것은 말일세, 잊을 만하면 황소가 달려와 기억의 창자를 뿔로 받아버리는 것과 같다네. 예전의 죄와 부끄러운 기억들이 눈앞에 샛노랗게 펼쳐지면서…… 뿡! 하고 소리치게 될 것 같은 공포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이지…….
남자2 (문 앞에 주저앉으며) 배가 아파요, 배가…….
남자1 인간의 창자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남자2 (흐느끼며)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남자1 노력해 볼게요. 이렇게 평생 살 순 없죠.
조명이 남자1에게만 비춰지고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배를 세게 때린다. 신음하고, 벽에 낙서하고, 변기 위에 웅크려 어깨를 들썩이다 별안간 사지를 늘어뜨린다. 전체 조명이 들어오면 남자2가 서 있다.
남자2 걸작이에요?
남자1 전혀요. 점점 배변이 어려워지니 괴롭군요. 아, 내가 천재적인 창자였다면!
남자2 천재는 그 시대의 증후군이죠. 천부적인 똥이 나올 만한 시기를 노려요.
남자1 시기가 나를 매일같이 변기에 앉힌 거예요. 지금 이 순간 똥이 나올 거라고 악착같이 속고 또 속고…….
남자2 그럼 똥이 나오지 않을 만한 타이밍을 노려요. 오락을 한다든가.


남자1 (쓰레기통 속 휴대폰을 꺼내 오락을 하며) 미미는 가터벨트를 입히고, 쥬쥬는 고스톱을 치고, 어이, 바비. 너는 첫 판부터 장난질이냐? 슬슬 기관총을 준비해야겠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죽으란 말이야……. (풍덩 소리) 세상에, 피가 나왔어요!
남자2 (활짝 웃으며) 이런 변이 있나! 얼른 정신병원에 가봐요.
남자1 부끄럽군요. 앞으로 피를 몇 방울이나 쏟아야 할까요?
남자2 기절할 정도로요. 비린내에 중독돼야 해요. 비린내에 약한 인간들이 똥을 못 싸곤 하죠. 그럴수록 제 몸속에서 더 썩을 뿐이에요.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구취를 트면서 친밀해지거든요. 서로의 냄새를 나누고, 서로가 공범자임을 확인하고, 냄새가 고약할수록 낄낄대면서……. 이봐, 오늘은 구취가 유독 심하군. 나 몰래 어디서 딴 놈이랑 칼질이라도 하고 온 거야?
남자1 그리고 어느 날 화장실 하나 딸린 정육점을 함께 차리게 되고, 서로의 냄새에 진절머리를 치고, 서로를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냉전이 지속될수록 이 모든 게 정육점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이봐, 오늘은 비린내가 유독 심하군. 나 몰래 어디서 딴 놈이랑 칼질이라도 하고 온 거야?
남자2 (문을 쾅쾅 두드리며) 당장 결백해! 빨리! 빨리! 빨리!
남자1 (호소하며) 저는 정말 똥을 싼 적이 없어요. 이것 보세요. 제 다리에는 쥐가 났잖아요. 믿어 주세요.
남자2 (바지를 내리며) 사실 확인을 위해 화장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겠소.
남자1 안, 안 됩니다! 팬티 차림인데.
남자2 왜 이래, 장사 한두 번 해봐? 내 사정도 좀 봐줘.
남자2가 문을 박차고 들어감과 동시에 암전. 남자1의 비명이 들리고 남자2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조명 밝아지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변기에 앉아 있다. 바닥에는 휴지 조각들이 어질러져 있다.
남자1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기.
남자2 응?
남자1 (풀이 죽어) 아무것도 아니야.
남자2 왜? 말해 봐.
남자1 자기한테 이런 말까지 차마 안 하려고 했는데. (뜸 들이며) 나 똥이 좀 급해.
남자2 (안타까워하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남자1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사채업자한테 빚을 지셨거든. 일전에는 그놈이 나한테까지 찾아와 당장 빚을 갚지 않는다면 내 장기를 대신 팔아버리겠다며 협박하는 거야. (울먹이며) 내 장기는 하나씩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남자2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일단 경찰에게 알리자.
남자1 안 돼! 그럼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욕하겠어? 더군다나 자기는 저명한 철학자잖아. 이 일이 알려지면 학생들은 더 이상 당신의 수업을 듣지 않을 거야. (코웃음 치며) 저 새끼, 말은 설사같이 하더니 결국 자기 여자 똥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할 줄 알았다니까!
남자2 안 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어떡하지?
남자1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일단 사채업자를 부르자.
남자2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
남자1 그에게 광고를 세뇌시키는 거야. 드릴 똥이 없어서 일단 아랫배를 상쾌하게 뚫어 드릴 변비약이라도 준비했어요. 희망을 자꾸 맛보면 절망은 배출하기 쉬운 것이라고 착각하지. 하지만 대기업이 이득 없는 희망을 뭣 하러 팔겠어? 희망은 단지 절망을 늘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화장실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때! 마침내 그는 우리를 동지로 여길 수밖에 없을걸.
남자2 참 멋진 계획이다. 너같이 똑똑한 애인을 두다니, 나는 마치 햄버거 700개, 피자 500개, 치킨 220개, 도넛 1700개, 라면 890개, 핫도그 600개, 통조림 300개를 한꺼번에 삼킨 기분이야.
남자1 (포옹하며) 사랑해.
남자2 (포옹하며) 나도 사랑해.
남자1과 남자2가 입을 맞춤과 동시에 암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교성이 들린다. 잠시 후, 조명 들어오면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 변기에 앉아 있다.
남자2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기.
남자1 응?
남자2 (풀이 죽어) 아무것도 아니야.
남자1 왜? 말해 봐.
남자2 자기한테 이런 말까지 차마 안 하려고 했는데. (뜸들이며) 나 똥을 좀 지렸어.
남자1 (안타까워하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남자2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늙은 창부와 곱창집을 하셨거든. 일전에는 그년이 나한테까지 찾아와 당장 곱창집을 내놓지 않는다면 내 장기를 대신 구워삶겠다며 협박하는 거야. (울먹이며) 내 장기는 하나씩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남자1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일단 사채업자에게 알리자.
남자2 안 돼! 그럼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욕하겠어? 더군다나 자기는 저명한 수학자잖아. 이 일이 알려지면 학생들은 더 이상 당신의 수업을 듣지 않을 거야. (코웃음 치며) 저 새끼, 술값은 변비같이 치르더니 결국 자기 여자 똥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할 줄 알았다니까!
남자1 안 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어떡하지?
남자2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일단 늙은 창부를 부르자.
남자1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
남자2 그녀에게 광고를 세뇌시키는 거야. 드릴 장기가 없어서 일단 아랫배를 상쾌하게 막아 드릴 설사약이라도 준비했어요. 하지만 대부업이 이자 없는 절망을 뭣 하러 꾸어 주겠어? 절망은 단지 희망을 배로 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화장실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때! 마침내 그녀는 우리를 동지로 여길 수밖에 없을걸.
남자1 참 멋진 계획이다. 너같이 교활한 애인을 두다니, 나는 마치 햄버거 700개, 피자 500개, 치킨 220개, 도넛 1700개, 라면 890개, 핫도그 600개, 통조림 300개를 한꺼번에 토하는 기분이야.
남자2 (등 떠밀며) 혐오해.
남자1 (등 떠밀며) 나도 혐오해.
남자2 지옥에나 떨어져라!
남자1 똥 한 덩이도 안 떨어지는데.
남자2 한 개밖에 없는 칸을 잠가 두면 어쩌자는 거야, 썅! (발로 문을 세게 찬다)
남자1 안에 사람 있어요. 노크하는 법 몰라요?
남자2 어머, 죄송해요. 너무 급했어요. 부디 용서하세요. (문을 쾅쾅 두드리며) 빨리! 빨리! 빨리!
조명 어두워지고 빗자루를 든 청소부 등장.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 바닥을 쓴다. 허리춤에는 열쇠 꾸러미가 걸려 있다.
남자1 (속삭이듯) 자백해야 할까?
남자2 (놀라며) 무엇을 자백해?
남자1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남자2 (벌벌 떨며)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남자1 아무 짓도 안 하고 말았지.
남자2 저 인간은 누구지?
남자1 철학자.
남자2 사채업자.
남자1 수학자.
남자2 늙은 창부.
남자1 청소부.
남자2 청소부. 청소부는 무엇을 하지?
남자1 청소부는 세상에 쓰레기를 치우러 오지.
남자2 (청소부를 향해 킥킥거리며) 문이 잠겨서 어쩌나.
남자1 아무 짓도 못 하지.
청소부 퇴장과 함께 서서히 암전.

 

 

    2장

 

어둠이 서서히 밝아지면 거울 앞 남장 여자1, 2가 화장을 고치고 있다. 여자1이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면 여자2는 더 크게 입가를 칠한다. 서로 눈치 보고 견제하는 동안 두 사람의 얼굴이 피에로로 분장된다.
여자1 그래, 저녁은 먹었니?
여자2 (한참 고민하다) 아! 특제 스테이크를 대접 받았지. 포크부터 와인까지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어. 역시 애완견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는 부잣집은 대접도 최고급이라니까.
여자1 (콧방귀를 뀌며) 생색내기는!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해봤어. 스테이크는 비린내…… 비린내가 나지?
여자2 (콧방귀를 뀌며) 그건 비프스테이크가 아니라 포크스테이크겠지. 비프스테이크는 자르면 피가 나거든.
여자1 피가 난다고? 어쩜 그렇게 잔인한 말을!
여자2 최상급 대우를 받으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피범벅이 돼서야 아이가 처음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1 허탈하군. 태어나는 일처럼 허탈한 것은 없어. 허탈한 나머지 으앙으앙! 울게 된다니까.
여자2 그러게 웬 비프스테이크였는지. 간에 기별도 안 가게시리 말이야.
여자1 최상급 똥일수록 원래 비싼 법이지. 세계에서 제일 비싼 커피가 고양이 똥인 것처럼. 그 망할 고양이가 똥을 몇 번 안 싼다잖아.
여자2 누가 그랬는데…… 똥 중에 고양이 똥이 제일 구리다고.
여자1 똥 주제에 이름은 루왁이라니. 그렇다면 내 항문은 모차르트다.
여자2 똥 쌀 때 터키 행진곡 같아서?
여자1 아니, 모차르트는 농담을 즐겨 썼거든. 친애하는 오줌싸개 사촌 누이에게. 잘 자요. 하지만 먼저 침대에 터져 나오도록 똥을 싸세요. 잘 자요, 내 사랑. 추신, 당신의 입속으로 당신의 항문을 밀어 넣어요.
여자2 (황홀하게) 참 낭만적이다. 역시 모차르트다운 농담이야.
여자1 인생은 상스럽다 못해 거룩해지니까.
잠시 침묵.
여자2 그래, 저녁은 먹었니?
여자1 (음부를 긁으며) 오, 소불알을 먹었어. 얼마나 장대하던지 입속이 터질 지경이었다니까. 나는 그토록 불뚝거리는 불알을 맛본 적이 없거든. 심혈을 기울여 힘줄 하나하나 혀로 쓰다듬어 줘야 했지. 소가 서운하지 않게끔 말이야.
여자2 소불알을 핥았다고? 네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
여자1 미식가는 언제나 독특한 향에 대한 갈증이 있지.
여자2 원산지는 어디였어?
여자1 미국산. 우리 같은 젊은 남녀들은 미국산에 대한 환상이 있거든. 미국산은 대물일 것이라는…….
여자2 죽여줬어?
여자1 웬걸. 요란한 간판에 완벽히 속았어.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지만.
여자2 고기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입맛을 다시며) 말고기라면 또 모를까.
여자1 말 갈 데 소 간 꼴이군. 나는 말 갈 데 소 갈 데 다 떠돌아다녀서 이젠 그 소가 그 말인지 구분조차 안 돼.
여자2 너는 말하는 게 영락없이 음유시인이야.
여자1 모르는 소리 말아. 시인이란 작자들은 자신이 도축한 소를 경배한다더군. 칼로 찌른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죽은 소가 다른 형식으로 내 영혼이 된다고 믿는대.
여자2 마치 옛 애인같이.
여자1 그래, 마치 옛 애인같이. 나는 옛 애인이 없어. 옛 애인 없는 시인 봤어?
여자2 말장난 치다 내게 한 방 먹은 녀석 말이야? (킥킥대며) 그놈 참 물건이었는데. 내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더군. 이봐요. 내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몸이지만 당신처럼 산수화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제발 내게 당신을 음미할 기회를 주시오.
여자1 그래서 뭐라 했는데?
여자2 선불이에요!
여자1 호호호,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프다.
여자2 그제야 그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더군. 이 갈보 같은 년아! 당장 내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으면 네 음모를 몽땅 불태워버리겠어!
여자1 그래서 뭐라 했는데?
여자2 제 산은 민둥산이에요!
여자1 호호호, 너무 웃겨서 배가 찢어지겠다.
여자2 하여튼 남자들이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덤빈다니까. 사랑 따위를 논하려 들다니.
여자1 껌 씹듯이.
여자2 껌 뱉듯이.
여자1 우린 그저 맛보고 싶을 뿐이지.
여자2 카악, 퉤!
여자1 애꿎은 바닥에다 왜 침을 뱉어?
여자2 영역 표시야.
여자1 어쩌다 우리가 남성스럽게 변했지?
여자2 ……완전히 남자이기를 꿈꾸면서 동시에 여자로 살았으니까.
긴 정적.
여자1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비 꼰다)
여자2 가만있지 못하고 웬 방정이야?
여자1 침묵이란 놈이 나를 고문하거든. 쇠망치를 이빨에 들이대면서, 당장 아무 말이나 지껄이라고 압박하지. 있는 힘껏 반항도 해봤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 침묵이 어색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아.
여자2 인간들은 말할 상대가 없어도 침묵하지 않지.
여자1 혹은 침묵하지 않아도 말할 상대가 없지.
여자2 (여자1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자1 (이가 아프다는 듯) 아, 아, 아야! 그만 해! 그, 그, 그 소문 들었어?
여자2 (분노하며) 세상에, 정말 나쁜 년이네!
여자1 갈보 같은 년. 입방정 떨 때부터 알아봤어.
여자2 왜? 말해 봐.
여자1 치근대는 놈이 있다더니 거짓말이었어. 오히려 정반대였지. 젖가슴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고서 이봐요, 내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몸이지만 당신 앞에서 내 가슴은 산수화예요. 제발 당신에게 저를 음미할 기회를 주세요.
여자2 그래서 그놈이 뭐라 했는데?
여자1 민둥산은 내 취향이 아니라오.
여자2 호호호,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프다.
여자1 그제야 그년이 본색을 드러내더군. 이 남창 같은 놈아! 당장 내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으면 네 음모를 몽땅 불태워버리겠어!
여자2 그래서 그놈이 뭐라 했는데?
여자1 내 산은 아까부터 불기둥이었소!
여자2 (꺽꺽거리며) 호호호,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난다.
여자1 하여튼 여자들이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덤빈다니까. 사랑 따위를 논하려 들다니.
여자2 침 삼키듯이.
여자1 침 뱉듯이.
여자2 ……. 그나저나 그 소문은 어디서 들었지?
여자1 글쎄 말이지……. 그놈이 내 남편이래.
여자2 마음고생 심했겠다. 내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
여자1 너야말로 내 편이 돼줘서 고마워.
여자1 , 2 무표정으로 포옹한다.
여자1 에, 이제 무슨 말을 하지?
여자2 에에…… 회상하지.
여자1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언제더라?
여자2 모르겠어. 아마 화장실이었을 거야.
여자1 내 대가리가 변기에 빠졌던 날 기억해?
여자2 (감상에 젖어) 오……. 우린 내내 취해 있었지.
여자1 네가 문을 세게 두들기면서 악을 썼지. 빨리! 빨리! 빨리!
여자2 오줌통에 맥주가 가득 차서 바지가 줄줄 흘러내렸어.
여자1 나는 도피 중이었는데 네가 막았지.
여자2 그래, 너는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다며 흐느꼈어.
여자1 그러자 네가 문을 세게 두들기면서 악을 썼지. 정신 차려! 다음 사람을 위해 당장 나와! 빨리! 빨리! 빨리!
여자2 네가 짐을 혼자 지려고 드니까 안타까워서.
여자1 겁약한 나는 간신히 물을 내렸지. 내 대가리가 빠졌던 변기를 누군가가 쓰게 할 순 없잖아?
여자2 엄청난 실례지. 머리카락 한 올에도 불신이 끼어드니까 말이야.
여자1 그래서 몇 번이고 물을 내렸지.
여자2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어. 변기의 원리에 따라 물은 다시 고이니까.
여자1 하필이면 그날 변기가 막히다 못해 넘쳤지.
여자2 몰상식한 놈들이 그전에 똥을 얼마나 싸놓은 건지.
여자1 배수관도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건데.
여자2 똥을 퍼질러 싼 놈은 아마 철학자였을 거야.
여자1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여자2 변비약에 중독돼 있으니까. 똥을 산더미같이 싸놓고 떠들어대지. 자, 지금부터 보시는 것은 시대의 문제입니다. 문제란 단어만 보면 인간들은 일단 회피하기 마련이지.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하니까 말이야.
여자1 변기를 막히게 한 주범은 아마 수학자였겠지.
여자2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여자1 설사약에 중독돼 있으니까. 치밀하게 하수관을 계산했겠지. 왠지 모를 쾌감에 전율을 느끼면서, 이쯤 똥을 풀면 다음 차례엔 변기가 막히겠군. 인간들은 문제가 미제로 남아 있을 때를 더 좋아하거든.
여자2 희망적이군.
여자1 사채업자 같군.
여자2 늙은 창부 같아.
여자1 피에로 같군.
여자2 에, 이제 무슨 말로 웃기지?
침묵. 여자1, 2 안절부절못하다 괴상한 몸짓을 하기 시작한다.
여자1 (여자2의 머리채를 잡으며) 나쁜 년! 네가 내 남편을 홀렸지!
여자2 악! 눈 뜨고 보라고! 연기에 속아 넘어간 놈이 장님이지!
조명 어두워지고 대걸레를 든 청소부 등장. 여자1, 2 재빨리 화장을 고치는 시늉 한다. 청소부는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 바닥을 닦는다.
여자1 (속삭이듯) 누구지?
여자2 걸레. 걸레가 아닐까?
여자2 (눈살을 찌푸리며) 볼품없는 모양새야.
여자1 자백해야 할까?
여자2 (놀라며) 무엇을 자백해?
여자1 우리가 내내 취해 있었다고.
여자2 (벌벌 떨며)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여자1 아무 짓도 안 하고 말았지.
여자2 걸레는 귀가 없어.
여자1 혹은 지나치게 귀가 밝지.
여자2 우리가 입을 가리면 못 듣지.
여자1 (코를 막으며) 저 여자한테 악취가 나는 것 같지 않니?
여자2 비린내에 가까운데.
여자1 마치 청소부 같군.
여자2 청소부. 청소부는 무엇을 하지?
여자1 청소부는 세상으로부터 고용되지.
여자2 이 화장실은 너무 춥고 답답하군.
여자1 이 화장실 말고 저 화장실로 가야겠어.
여자2 그 화장실 물이 그렇게 좋다며?
여자1, 2 청소부를 비웃으며 퇴장. 청소부는 화장실을 구석구석 쓸고 닦는다.
청소부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 그 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신명기 23장 14절
조명 서서히 어두워지며 암전.

 

 

작가소개 / 석지연(시인)

- 1992년 서울 출생.
2012년 《작가세계》로 등단

 

 

   《문장웹진 7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