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에세이_사랑의 정치, 사랑의 윤리] 사랑 섹스 그리고 우정에 관한 몇 가지 고백
- 작성일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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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에세이_사랑의 정치, 사랑의 윤리]
섹스하세요?
- 사랑 섹스 그리고 우정에 관한 몇 가지 고백
최창근
지나온 청춘의 한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라는 남자는 연애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숫보기였다. 호감이 가는 여자가 생겨도 당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지 않으니 상대방이야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기 십상이고 그러니 도대체 남녀 간의 교제나 사귐이 진척될 리가 없다. 사랑의 감정은 마음속에만 간직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표현을 해야 이루어진다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저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피 끓는 젊음의 한때 연애다운 연애를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고 서툴게나마 연애가 시작되는 건 순전히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나왔을 때였다.
학교 다닐 때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친분이 있었던 여자 친구와 어느 비 오는 날 술을 잔뜩 마시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가서 같이 잠을 잔 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밤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때 일을 남자 친구들이 모여 있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털어놓게 됐는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친구가 측은하다는 듯 내 손을 꼭 잡고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창근아!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단다. 하나는 짐승 같은 인간이고 나머지 하나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데, 어쩌냐, 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난 그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하는.
그 후로는 순간순간의 내 감정에 솔직해지려고 한다. 특히 그동안 억눌러 왔던 몸이 원하는 바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연히 손을 잡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고 몸을 만지고 싶은 것이 생의 섭리인데 그걸 쑥스럽고 창피하다는 핑계를 대며 의식적으로 거부해 왔으니 제대로 된 뜨거운 사랑의 역사가 성사될 리 만무했던 것. 사랑은 몸으로 온다는 것을 뒤늦은 나이에 제대로 확인한 셈이다.
섹스도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스킨십의 하나임을 알게 되면서 내 생활에도 변화가 왔다. 나이 어린 여자 친구나 나이 많은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게 예전보다 덜 어색해졌다고나 할까.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섹스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 그렇게 우아하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늘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는 말처럼 섹스를 잘하기 위해서도 서로 간의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밥을 먹고 잠을 자듯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도 자연스럽게 여겨져야 할 텐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런 점에서 지독히도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내 경우만 해도 섹스 할 때 내는 신음소리나 몸과 몸이 침대에서 맞부딪치는 헐떡거림이 유독 짐승스럽게 다가와서 부끄럽고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마음가짐을 바꾸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남들의 이목이나 체면을 벗어던지고 가장 원시적인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응시할 수 있는 때가 사랑할 때 말고 또 있는가를. 인간도 모든 생명체처럼 자기가 건사해야 할 몸을 받고 태어난 동물의 한 종이라면 당연히 벌거벗은 자신의 민낯과 맨몸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섹스는 짐승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섹스를 하면서 점잔을 빼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내 몸에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자 어느새 나 역시 섹스를 즐기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게 됐다. 서투르게나마 이런저런 체위를 시도해 보면서 서로의 기호도 알게 되고 상대방의 욕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 여전히 섹스는 잘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많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남자로서의 내 몸의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어쩌면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말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수정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모르고 여자는 남자의 몸을 모른다, 로.
젊은 시절보다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하는 게 조금은 익숙해진 요즘도 종종 연애의 어려움에 대해서 지인들에게 털어놓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난 어쩌면 애인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는 남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섹스는 그냥 하는 거라는 사람도 있지만 섹스를 하면 생활의 활력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인간이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 주고 쾌락과 종족번식의 기능도 한다는 점에서 섹스를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이론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와 섹스를 해야 하는가. 한 친구는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만 하는 은밀하고 특별한 행위라고 했고 그 말을 받아 또 다른 친구는 그러니까 당연히 그 대상은 애인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바로 이렇게 응수하고 말았다. “섹스는 당연히 친구와 하는 거지. 그럼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섹스를 하란 말이야?” 내 말에 두 친구들은 짐짓 놀라는 눈치였지만 곧 바로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손을 잡고 그러다가 키스를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껴안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 육체적 사랑을 나눈 대부분은 이성 친구들이었다. 물론 보통의 친구들은 아니고 좀 더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 이를테면 애인 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 친구들이었지만. 스킨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친밀감, 우정 어린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들에겐 조금 이상하게 비쳐졌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좀 더 깊고 애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주 짙지는 않은 미묘한 경계의 언저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눈빛과 배려하는 보살핌과 어루만짐이 자주 오가다가 어느 날 아주 자연스럽게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듯 섹스를 하게 됐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섹스는 오히려 굉장히 도발적이고 격렬했다. 짜릿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쓱 훑고 다닐 때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사랑에도 정치가 있고 윤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섹스는 사랑의 정치와 사랑의 윤리 앞에 온다. 사랑의 감각과 사랑의 의지 앞에 있다. 사랑의 종류에도 동지애나 정치적 연대, 우정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의 섹스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몸으로 말하는 섹스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사랑의 최전선이다. 끝없이 부유하면서 헤매며 떠도는 어둠의 감촉, 고독의 질감 같은 것. 그리하여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문득 꽃 피는 세속의 신비. 어느 사소한 순간의 깨달음과 조용한 풍경 속의 통찰과 인식을 함께 포괄하는 것. 몸이 열리는 순간 마음도 따라 열리기 때문일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섹스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실은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에너지와 열정이 많이 소모되는 섹스는 오래 할 수도 없고 지속적이지도 않다. 섹스를 하고 나면 허기가 지고 기진맥진하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 내 몸의 일부를 떼서 상대방에게 나눠 주는 일종의 보시이자 노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호와 취향을 동반한 재밌는 놀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섹스는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의 향연이고 자비와 탐욕의 이중 계단이자 절제와 욕망을 오가는 용광로다. 그러나 섹스 하는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터득하게 된다. 무상은 탐욕에서, 숭고한 행위는 빼앗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대와 나 사이에 사랑이 불공평하듯 섹스 역시 평등하지 않다. 상대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 사랑이듯 섹스 역시 그러하다. 많이 사랑하는 쪽이 사랑의 게임에서 늘 지듯이 섹스 역시 더 많이 갈구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다.
하지만 그러한들 또 어떤가.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근원적 충동에서 비롯된 사랑의 관계에 나 역시 맘껏 취하고 싶다. 열정의 형식과 미학적 요소가 결합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온갖 말과 이미지가 적절히 혼합된 사랑의 지옥에 당당하게 발을 들여놓고 싶다. 괴로움과 슬픔에 목이 메고 기쁨과 즐거움에 살이 떨린다 해도, 그 모든 찬란한 장면은 단지 곧 있으면 지나갈 고귀한 한순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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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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