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터뷰-패션모델 박민지 “모델은 비어 있는 육체, 요즈음의 아름다운 것들을 거기 채워 넣는 일”

  • 작성일 2018-04-01
  • 조회수 1,793

[기획 - 인터뷰]

 

 

패션모델 박민지
“모델은 비어 있는 육체,
요즈음의 아름다운 것들을 거기 채워 넣는 일”

인터뷰 일시: 2018년 3월 5일

 

 

소설가 박민정

 

 

 


* 코너 소개: 소설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취재하고, '팩트'와 '디테일'을 확보해서 그것을 변주할까? 본 코너에서는 소설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취재했던 직업인을 만나 작품 속 특정 직업에 대한 묘사와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이야기한다.   


 

 

    작년에 출간한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의 표제작인 「아내들의 학교」를 구상하던 2013년 여름, 나는 친동생에게 몇 차례 자문을 구했다. 「아내들의 학교」에는 동성혼 합법화가 이루어진 사회를 배경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파트너로 지내온 두 여자가 등장한다. 설혜와 선, 극 중 설혜는 가사를 전담하는 ‘아내’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대학 시절 돌연 잠적해서 설혜를 애타게 만들었던 선은 런웨이에 서고, 화보를 촬영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모델 지망생’을 연기한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퇴고했는데, 애초에는 설혜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그 행동 역시 무력했다. 완성작이 되어 출판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나는 어떤 부분들을 확신하지 못했다. 초고에는 두 사람의 중학생 시절이 더욱 길게 나왔고,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선’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고, 선이 오디션에 나간 후 설혜는 TV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만 있었다. 작중 중요한 플롯인 ‘여학생회’와 ‘협동조합’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마디의 말을 듣고 이러한 설정을 추가했다. “왜 설혜는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만 봐요?”
    두 사람 간의 격렬한 정념과 갈등 못지않게 내게는 설혜가 바라보는 선, 다름 아닌 ‘모델’ 선이 너무 중요했던 것이다. 요즈음에는 지난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사실 어떤 소설은 솔직히 설정이 이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이걸 믿고 만들어야 되잖아요.”1) 그런 생각을 하면 잠시 서글퍼진다. 「아내들의 학교」는 내게 등단 이후 처음으로 ‘설정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끔 해준 작품이다. 그러나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항상 뒤늦게 슬퍼진다. 두 사람이 욕을 하며 서로 치고받는 장면, 설혜가 여학생회 언니들에게 폭언을 듣는 장면을 떠올리면,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한다. 친동생인 패션모델 박민지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바라보이는 선, 이름을 떨치는 모델이 되기 위해 가족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선, 아내를 짓밟는 남편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 그 모든 선의 면면이 박민지의 일부이며 그녀의 캐릭터를 차용했다는 점, ‘패션모델’이라는 흔치 않은 직업인의 디테일을 취재하기 위해 내가 오랫동안 지켜본 그녀의 사적인 에피소드마저 참고했다는 점. 가끔은 용서를 구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녀는 내 가족, 내 친동생이다.
    박민지는 본래 미술을 공부했고, 디자인과에 재학 중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그녀는 가족 모두에게 까닭을 알리지 않고 종일 아르바이트에 전념했다. 돈을 모아 굴지의 패션모델 에이전시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수련 과정을 거친 후 에이전시의 전속모델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야 그녀는 가족에게 그동안 자신이 패션모델로 데뷔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때 언니인 나는 동생을 걱정했다. 디자인과에 진학하기 위해 고교 시절 내내 힘겹게 입시미술을 했는데, 이제와 나로서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상상도 되지 않는 ‘패션모델’이 되겠다니. 그때의 경험은 「아내들의 학교」에서 두 사람의 대학 시절, 갑자기 잠적한 선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선은 어느 날 유명 에이전시의 전속모델이 되어 돌아온다. 패션모델 대부분이 십대에 데뷔하기에, 스무 살이 넘은 대학생이 데뷔한다는 것은 그쪽 업계에서는 뒤늦은 출발이었다. 선택과 배제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업계,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선택받지 않으면, 더 이상 ‘청탁’이나 ‘주문’이 없으면 활동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곳. 박민지는 스물한 살이 되어 패션모델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스물두 살 봄에 서울 컬렉션 무대에 서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데뷔한 이후 TV에 출연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소설 속 선처럼 ‘드라마화’를 위해 무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무대나 스튜디오의 패션모델과는 사뭇 다른, 방송에 나가 TV에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 세계의 냉혹함을 경험했다. 자신과 닮은 캐릭터를 읽은 소감을 담은 인터뷰 내용을 직접 옮겨 본다.

  1)  박민정, 이경진, 「흥신소적 취미와 세대적 자의식」, 《문학과 사회》 2017년 겨울, P. 46

 


 

박민정: 소설의 디테일들 중에서 혹시 인물이 너무 도구적으로 쓰였다거나, 이런 건 없었어?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눈에 뜨일 만큼 키가 너무 크다, 우리 동네에선 내가 본 애들 중에 제일 예뻤는데 시장에 나가니까…… 예쁜 애들이 널려 있고 거기서 좌절하고.

박민지: 그게 사실이지.

박민정: 어릴 때부터 꺽다리같이 키가 큰 아이였다는 표현, 183cm라는 것도 강조되고, 이 아이의 외양이 어떻다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강조되는데, 현실적으로 모델로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와 닿았는지 궁금하고. 이십대 후반이 너무 나이가 많다는 설정은? 이런 오디션에 나갔기 때문에 결혼도 했고, 나이가 많다는 것 자체가 캐릭터가 되잖아. 십대 여자애가 저 언니랑 나랑 같은 커리어를 가졌다,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박민지: 실은 소설 속에서 일을 끊임없이 했다고 했는데, 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해서 모델의 커리어가 같다고 할 수는 없지. 중간에 일이 끊겨서 못하는 모델이 더 많으니까.

박민정: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중간에 일이 끊기면 자기 의지랑 상관없이 뜸해져야 해. 일이 안 들어오고 아무도 나를 안 찾아 주면 일을 못 하지. 모델인 자기 여자 친구, 애인,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매 시즌 런웨이를 보며 가슴이 벅차다던가, 하는 표현)은 어땠어? 선과 설혜라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소설이니까. 사실 둘 다 주인공이지만 초점 화자는 설혜이고 선은 등장인물에 가까워. 이 선은 ‘바라보여지는 선’이란 말이야. 너는 모델로서도 ‘바라보여지는’ 직업이잖아. 사진을 찍어도 그렇고, 무대에 서도 그렇고, 누군가 너를 지켜보고 바라보아야 하잖아. 그 대상으로서의 선을 그려낸 걸 본 느낌은 어땠는지?

박민지: 그건 언니가 나를 보는 느낌이었지.

박민정: 아, 이건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이 나를 보는 느낌이겠다, 그게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어?

박민지: 그냥 이런 느낌이겠구나, 그 정도였어.

 

    실제로 나는 박민지가 TV에 출연했을 때(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고 데뷔한 이후였다), 매일같이 꺼져 있는 전화기에 전화를 걸었는데, 소설 속 설혜가 선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는 장면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박민지에게 “서바이벌 오디션에 출연하는 여자를 소설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때 박민지의 대답은 소설의 결말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넌지시 “그 사람은 무조건 낙선하겠네?”라고 말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소설에 나오는 사람은 왠지 낙선할 것 같은데, 좌절할 것 같고…….”였다. 문득 내겐 아, 이 사람을 무조건 일등을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동생은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겐 이 말이 더 중요했다. 왜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은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을 했는지. 소설 속 캐릭터는 항상 무게를 지고 좌절한다는 편견도 재미있었다. 이것을 뒤집어 본다면? 이 소설에서 선이 1등을 했다, 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결국은 1등을 한다는 설정이 되었다. 동생이 생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란 것은, 낙선하고 절망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동생은 완성된 소설을 읽고, 낙선을 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나 이거 안 하면 일등 못 해’라는 그 말을 진짜로 하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드라마다’라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도 방송에서는 모델의 역량보다는 독특한 ‘캐릭터’나 ‘드라마’가 있어야 되는 거니까, 라고도 덧붙였다.
    소설의 설정은 지금-여기의 현실과는 달리 레즈비언, 게이 부부가 법적으로 동성혼과 아이를 입양해서 사는 게 가능한 사회이다. 그것을 드라마라고 명명하며 팔고 있는 설정인데 이것 역시 모델로서 자기 캐릭터를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일 수 있겠다, 싶었던 거냐고 물었더니, 박민지는 패션모델의 제반 업무와 비교하며 “방송이니까, 쇼 비즈니스니까.”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입양한 동성 부부까지는 모르겠지만, 오디션 프로에서 드랙퀸, 트랜스젠더가 나와서 자기 캐릭터를 상품화하기도 하니까……. 당연하게도 내게는 쇼 비즈니스의 냉혹함을 이해하고 있는 모델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사실은 소수자라는 건, 굉장히 힘든 과정을 거쳐서 자기 정체성을 삶으로 만들었는데 그걸 캐릭터로 만들어서 과장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불편함 같은 건 없었는지. 박민지는 그것이 이슈가 된다는 걸 알고 그들이 선택한 거니까, 라고 하면서도 대학 때의 경험으로 인해 아우팅에 대한 공포가 있는 설혜가 입양한 아이와 함께 출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강요받는 선택이며 ‘나의 성공을 위해 네가 희생해야 해’라는 주장과 더불어 관철되어야만 하는 요구라는 점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도 인생이 있고 방송이 다가 아닌데, 박민지는 말했다.
    그녀는 너무 미련하다, 고도.
    나는 질문을 바꿔 물었다. 질문은 길어졌다. 동성혼이 가능해진다면 동성애자가 행복해져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도 역시 자신의 캐릭터를 소비해야 하고, 그냥 지금이랑 똑같구나, 내가 저런 쇼에 나와서 드라마를 만들려면 내 상처까지 꺼내야 하고, 누가 강요하진 않았지만 사회 자체가 그게 가능한 사회니까 선은 그런 꿈을 꾸는 거잖아, 쇼 비즈니스 자체가 폭력적인 구석이 있기 때문이잖아. 실제로 염색을 안 하면 집에 가야 돼, 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한 것처럼 생각되게 만드는 현장이잖아. 내가 더 야망을 가지지 못해서 실패한 것처럼 만드는 세상인 거잖아. 얼마 전에 본 미국 드라마에서도 아빠 둘, 그러니까 게이들에게 입양되어 사는 동양 여자애가 나오는데, 아빠들이 이 애를 멋지게 키우려고 노력해. 아빠들은 직업도 좋고 돈도 많고 아침마다 신문 읽히고 논술 쓰게 하고. 그런데 이 여자애는, 아주 쿨하고 멋지고 다정한 게이 아빠들에게 키워지는 아이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어쩌다가 여자에게 끌렸어. 당연히 그것은 혈통과 유전과 상관없잖아? 그런데 그런 생각과 더불어 게이 아빠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내가 레즈비언이 되면 사람들이 더 욕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역시 게이 부부가 애를 키운다는 건 애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구나, 이렇게 욕할까 봐 자기가 여자한테 끌린다는 말을 못 해. 겉으로는 힙한 가족의 아이이지만 상처를 받고 있는 거잖아. 박민지는 짧게 대답했다. 사회와 결혼제도가 지금과 같은 이상 동성애자들이 결혼해도 행복하지 않겠구나. 그래서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구나. 어차피 유토피아는 결코 도달하지 않는 과정일 뿐이다.
    소설의 디테일에 대해 사후에 물어본 것이 있었다. ‘플래시 세례에 눈이 멀어버리진 않을까’란 표현, 나는 실제로 동생의 눈 건강을 걱정했다. 그런데 소설의 다양한 면면이 매우 현실적이라고 주장하던 박민지는 그 대목을 지적했다. 그건 플래시라기보다는 조명 때문이다, 플래시를 정면으로 보는 건 아니니까. 모델들이 바라보는 카메라는 플래시가 터지지 않으니까. 대각선으로 비추는 조명이 광대에 역삼각형으로 내려앉는다, 라는 표현은 굉장히 와 닿았다고 했다. 화장대에 앉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박민지는 자신의 직업을 정의해 달라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모델은 말 그대로 비어 있는 것,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 옷, 화장품, 스타일, 분위기, 트렌드를 보여주고, 이 시즌에는 이런 게 멋지다, 라는 것을 내 비어 있는 몸에 덧입혀 보여주는 것, 그런 멋진 디자인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는 것이다, 라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모델로서의 선의 모델’이 된 박민지가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하지 않았을까 염려했고 그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초연하게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그것은 결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내 가족이자 표제작의 모델이 되어 준 동생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소설 쓰기의 무게를 다시금 실감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것이 내 손을 떠나갔을 때 짓눌러 오는 죄책감과 서글픔에 대해서.

 

 

 

 

 

작가소개 / 박민정

1985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졸업.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가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