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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_별_소설] 빙글빙글 돌고

  • 작성일 2013-05-15
  • 조회수 538

빙글빙글 돌고

-알퐁스 도데에 향한 ‘웃픈’ 오마주

강 병 융


글틴삽화_01빙글빙글돌고

꽃이었습니다. 꽃! 오! 아름다운 그 모습!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제 눈은 지겨운 줄도 모르고, 다른 것을 볼 줄도 몰랐습니다. 오직 아가씨만 봤습니다. ‘쭉쭉빵빵하다’는 말 이외에 설명이 불가능한 152Cm의 키, 그리고 무지하게 아담한 132Kg 몸무게. 그리고 땡글땡글한 뿔테 돋보기안경에, 새까만 얼굴에 덕지덕지 애교 만점 여드름 덩어리들, 그 위를 뒤덮은 두터운 파운데이션.

上. 1

    제가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섬나라 스카리니아(Skarinia)의 그라(Goora)산(山)에서 ‘닭 치고’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몇 주일동안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하고, 닭떼를 지키며, 사냥 묘(猫)인 스호쉬 고양이(sfosi cat)를 상대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물론, 스호쉬 고양이는 인간의 말을 못했습니다. 야옹야옹거릴 뿐이었습니다.
진정 지루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이따금 가다키 구렁이(gadaki)가 능구렁이처럼 슬금슬금 기어와 닭떼를 노리는 일도 있었고, 마을 어른들 몰래 음주를 즐기는 ‘겁머리’ 없는 학생들이 드가(dga) 몇 병을 들고, 산으로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물도, 사람도 제게 말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좀처럼 입을 여는 일이 없는 순박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양치기와 착각을 해, 거짓말이나 일삼는 닭치기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저는 2, 3주에 한 번씩 보름치 양식을 실어다 주는 우리 농장의 노새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짤랑짤랑 방울 소리가 언덕너머로부터 들려오면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노새와 함께 꼬맹이 미아로가 올 때도 있었고, 노라드 아줌마가 올 때도 있었습니다. 누가오든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산 밑에서 보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습니다. 어느 집 어린이가 영세했는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느 집 하인이 바람났는지도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주인댁 따님에게만 관심이 무진장 쏠렸습니다. 스카리니아에서 가장 예쁜 스페타네트 아가씨.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이름을 조용히 불러봅니다.
스.페.타.네.트.
그 이름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스페타네트!
그리고 크게 티를 내지 않으며 은근슬쩍 아가씨의 동정을 물었습니다. 밤마실을 자주 나가는지, 드가-칵테일파티는 좋아하는지, 집적거리는 남정네들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노라드 아줌마가 “야! 산에서 닭 치는 주제에 그딴 거 알아서 뭐하게? 닥쳐!”라고 했더라도, 전 기죽지 않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 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고!
그리고 스페타네트는 지금까지 한평생 내가 보아 온 생명체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아름다운 스페타네트 아가씨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下. 1

    - 스페타네트? 이름이 그게 뭐냐? 그리고 뭐? 성스럽고! 순결하게? 뭔 개소리야? 별이 잠들어 있었긴, 뭔 잠이 들어 있어? 요즘 시대에 별이 어디 있다고? 아름답긴 뭐가 아름다워. 그렇게 생긴 여자들은 길거리에 차고 넘친다고! 그게 사랑이냐? 푸하하하하하하.
D의 입에서 평소에 듣기 쉽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음식물 덩어리도 함께 마구 튀어나왔다. 괜히 말했구나, 싶었다. ‘별과 아가씨와 그라산’에서의 내 추억은 그렇게 마구, 아니 간단히 짓밟혔다. 난 D의 방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사실 D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산 아래에는 아가씨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들 어쩜 저렇게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쭉쭉빵빵하다’는 말 이외에 설명이 불가능한 152Cm의 키, 그리고 무지하게 아담한 132Kg 몸무게. 그리고 땡글땡글한 뿔테 돋보기안경에, 새까만 얼굴에 덕지덕지 애교 만점 여드름 덩어리들, 그 위를 뒤덮은 두터운 파운데이션. 게다가 두툼한 살덩어리로 만들어진 삼중 턱. 뿐만 아니라 옆구리 밖으로 활화산처럼 터져버릴 듯 붙어있는 살점들까지. 그래도 그렇지.

    정권이 바뀌고 이상하리만치 조류 독감이 자주 발생했다. 다행이도 내가 돌보던 닭떼들은 문제가 없었다. 나에겐 잘못도, 문제도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농장주인, 그러니까 스페타네트 아가씨의 아버지는 나를 해고했다. 물론, 해고하기 전에 다양한 욕을 했다. 임금 체불은 두말나위 없고.
그리고 괴상한 소문이 나버렸다. 조류 독감의 원흉이 나라는 소문. 소문은 독감처럼 잘 퍼졌다. 거짓말 잘하는 양치기 소년이라고 오해받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조류 독감의 원흉이라는 누명은 너무 억울했다. 뿐만 아니었다. 오골계의 인기도 하락했다. 오골계는 거의 멸종 직전까지 이르렀다. 농장주인은 잘 크고 있던 그라산의 닭들을 싹 잡아 죽였다. 그래서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웠다. 가다키 구렁이나 스호쉬 고양이가 사라진 것처럼 오골계도 점점 줄어갔다. 마치 옛 술인 드가의 애호가들이 싹 사라져버린 것과 같이.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은 새로 나오는 것들에게 관심을 갖기도 바빴기 때문에. 그나마 위안은 나는 사라져버리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난 사라지지 않았고, 대신 하산했다.
스스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라산에서 일하고 있을 때, 가끔 내려왔던 마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뭔가 내적으로 더 강렬한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마을의 몇몇 지인들은 내게 공부를 좀 해보라고 했다. 이미 이십대 중반이었는데, 공부라니. 공부가 싫어 산에 올라갔던 것인데.
당시 정부는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특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난 다행스럽게도 그 프로그램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스카리니아 말 말고도 몇 가지 언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인들은 늘 그렇듯, 시시때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어를 많이 해야 취직할 수 있다는 말씀.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씀.
난 어르신들의 말씀대로,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라이베리아와 부르키나파소에서 쓰는 말들을 배웠다. 사실, 그 외에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몸을 쓰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또 다른 정부의 프로그램에 덕분에 시장에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취직한 곳은 24시간 음식을 파는 가게였다. 사람들은 이를 편의상 편의식당이라고 불렀다. 난 주로 야간에 일을 했고, 아주 가끔씩 라이베리아 사람이나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스카리니아 말을 곧잘 했기 때문에 내가 외국어를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외국어란 취직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취직한 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편의식당의 일은 외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기술도 특별히 필요 없었다. 닭치기 생활에 비하면, 몸도 마음도 편한 일이었다. 닭벼슬 모자를 쓰고 있을 필요도 없었고, 닭몰이용 채찍이나 닭잡이용 구식 엽총을 다룰 줄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음식이나 음료를 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말 못하는 닭들의 의중을 읽을 필요도 없었고, 날씨를 미리 예측할 필요도 없었고, 심심해서 손금에 관한 책이나, 혈액형에 관한 책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식당에는 초대형 텔레비전이 있었다.
음식들 중 일부는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질이 떨어지긴 했지만, 건강의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편의식당의 주인은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폭리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쥐를 구워 만든 고기를 라이버스(Raybus) 양꼬치라고 속여 팔아야 했다. 세상에 라이버스 양꼬치가 있을 리 만무했는데도, 그들은 그걸 믿고 맛있게 먹었다. 어쩌면 믿진 않고 맛있게만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덕분에 내가 아닌, 주인은 돈은 많이 벌 수 있었다.

    난 그렇게 시나브로 마을사람이 되고 있었다. 산 아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일을 다시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이미 조류 독감을 모두 잊고 있었다. 내가 조류 독감 때문에 하산했다고 했을 때, 몇몇은 그게 뭐냐고 내게 되묻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새로 다가올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컸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과거를 잊고, 편의식당에 앉아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일로 약간의 돈을 벌며 살아갔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주로 음악방송을 보면서.


上. 2

    식량을 기다리던 어느 금요일이었습니다.
눈, 코, 턱이 쏙 빠질 지경으로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짤랑짤랑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꼬맹이도 아줌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침나절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중요한 미사가 있어서 조금 늦는 걸 거야. 종교 활동은 신성한 것이니까.
점심때쯤이 되어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닭들은 난리가 났고, 스호쉬 고양이는 태연하게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우박이 그치면 올 거야. 노쇠한 노새가 우박까지 맞으면 안 되잖아. 우박에 맞아 죽어버릴지도 몰라. 노새를 생각하며 초조함을 달랬습니다. 구렁이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낮이었습니다.
드디어, 세 시쯤 내리던 우박이 싹 멈췄고, 거짓말처럼 구름들이 하늘 위로 쏙 빨려 들어갔으며, 찬란한 빛이 그라산을 쫙 덮었습니다. 살랑대는 바람에 나뭇잎이 팔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고, 이윽고 짤랑짤랑 방울 소리도 들렸습니다. 성탄전야에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산타 썰매에 달린 종소리 같았습니다. 그날따라 노쇠한 노새도 발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노새와 함께 보이는 사람이 꼬맹이 미아로가 아니었습니다. 아줌마 노라드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맞습니다. 아가씨였습니다. 스페타네트 아가씨!
아가씨가 노새 등에 탄 채 제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신비롭게도 아가씨가 가까이 올수록 짤랑거리는 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새들도 조용해졌고, 나뭇잎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멈췄고, 구름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던 빛도 멈춘 것 같았습니다. 아가씨를 제외한 모든 세상은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습니다.
꼬맹이 미아로는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 이가 아파서 누워 있고, 아줌마 노라드는 휴가를 내고 도망간 남편을 찾아 나섰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노새에서 내려 마을의 모든 소식 전해줬습니다. 오는 도중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늦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우박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가씨의 빨강과 파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깔모자가 아름다웠습니다. 분홍색 주름 미니스커트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회색 조끼에 초록색 체크 남방도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그건 분명 길을 잃고 고생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꽃이었습니다. 꽃! 오! 아름다운 그 모습!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제 눈은 지겨운 줄도 모르고, 다른 것을 볼 줄도 몰랐습니다. 오직 아가씨만 봤습니다. ‘쭉쭉빵빵하다’는 말 이외에 설명이 불가능한 152Cm의 키, 그리고 무지하게 아담한 132Kg 몸무게. 그리고 땡글땡글한 뿔테 돋보기안경에, 새까만 얼굴에 덕지덕지 애교 만점 여드름 덩어리들, 그 위를 뒤덮은 두터운 파운데이션. 게다가 두툼한 살덩어리로 만들어진 삼중 턱. 뿐만 아니라 옆구리 밖으로 활화산처럼 터져버릴 듯 붙어 있는 살점들까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너무.
사실, 전 그때까지 그렇게 가까이서 아가씨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일이 있어 마을에서 잠시 지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오다가다 잠시 봤을 뿐입니다. 아주 스치듯.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멀리서도 아름다웠던 아가씨. 스치기만 했는데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스페타네트. 그런데, 바로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제 앞에 서있던 것입니다. 그라산 정상에는 저와 아가씨밖에 없었습니다. 단 둘이. 물론, 닭떼들과 고양이가 있긴 했지만요.
상상해보세요.
우박이 다 내린 청명한 오후, 닭떼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저와 아가씨가 단 둘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야옹야옹. 산바람은 산들산들. 아가씨가 저를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하면 넋을 완전히 놓아도 괜찮을 상황 아닙니까?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노새에서 각종 식료품을 내려놓고 그라산 정상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아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닭들을 보고, 스호쉬 고양이도 쓰다듬었습니다. 고양이는 평소처럼 고양이의 언어로 인사를 했습니다. 아가씨는 분홍색 주름 미니스커트가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던지 조심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모습도 꼴사납지 않았습니다. 저는 닭들을 닭장에 몰아넣었습니다. 아가씨는 제 거처를 궁금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가씨를 ‘진짜’ 닭장 옆에 작은 ‘닭장’ 같은 방으로 모셨습니다. 아가씨는 닭 모피를 깐 짚자리며, 벽에 걸린 커다란 닭벼슬 모자, 닭몰이용 채찍 그리고 닭잡이용 구식 엽총 등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봤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스페타네트 아가씨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 헐! 진짜 여기서 살아요? 닭들이랑? 장난 아닌데요. 냄새도 쩌네요. 쩔어! 여기서 뭐해요? 멍 때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완전 대박!

    ‘늘 아름답고 아름다운 스페타네트 아가씨를 생각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아니 너무 당황해서 한 마디로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모에 한 번 놀라고, 말투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저 아름다운 입에서 튀어나온 보석 같은 단어들. 아마도 아가씨는 제가 놀라는 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재미있게 질문을 던진 같습니다.
- 혹시 저 닭들 중에 여친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쿄쿄쿄. 닭여친!
이런 말을 하면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는 그 귀여운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습니다. ‘닭’이라는 발음을 할 때, 살짝 볼 살이 떨리면서 얼굴이 더욱 동글해지는 것이 참으로 앙증맞았습니다.
- 잘 있어요! 닭치기! 전 그만 갈게요. 닭여친이랑 잘 노세요. 꼬끼오!
아가씨가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노쇠한 노새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저도 인사를 했습니다. 아가씨는 빈 바구니를 노새에 매달고 떠났습니다. 올 때와는 달리, 노새가 조금 힘겨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스페타네트 아가씨.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가씨는 떠나야 했고, 저는 있어야 했습니다. 아가씨가 산길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마치 꿈과 같았습니다. 아가씨가 떠나가고 몸에 긴장감이 사라진 탓인지 잠이 몰려 왔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그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잠이 들어버리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들이 차차 푸른빛으로 변하고, 닭들도 하나 둘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산정상은 조용했지만, 산 밑 어딘가에서 천둥소리가 들렸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없는 산 정상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니 더욱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下. 2

    D는 고시원 이웃이었다. 거의 유일한 이웃이었고,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스카리니아에서는 주요 요직이 모두 세습되었기 때문에 고시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고시원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방들을 마구 마구 만들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방을 고시원이라고 부른다고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댔다. 그 뒤로 사람들이 작은 방이 닭장처럼 모여 있는 곳을 고시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동양의 그 나라에서는 인구 대부분이 이렇게 좁은 방에서 사는 것처럼, 마치 그것이 대단한 선진문물의 유입인 양, 잘도 포장해, 수많은 사람들을 닭장 같은 고시원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D와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거기서 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고시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 형편이었다. D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정확히 생계수단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다. 쓴 글도, 글 쓰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앞으로 글을 쓸 계획도 말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전직 교사라고 소개하기도 했고, 참전용사이기도 했다며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역시 믿을 만하지 않았다. D의 아버지는 거대한 공장의 주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 역시 확인된 바 없었다. 적어도 그 때, D는 그냥 내게 D였고, 술친구였으며, 내 얘기를 귀담아 듣고, 잘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냉소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별과 추억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스페테네트 아가씨 이야기를 소상히 했던 것이다. 물론, D는 철저히 웃어넘겼지만.
D가 한 말과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성스럽고? 순결하게? 푸하하하, 푸하하하하!’
D의 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고시원의 방은 좁았다. D의 방도, 내 방도, 또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닭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대신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곰팡이 냄새는 부침이 있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때로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풍겼다.
작은 창을 열어두고, 잠시 걷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새벽 무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엔 이상하리만큼 별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D의 말대로 별이 없었다. 그래서 아가씨가 더욱 생각나는 밤이었다. 별이 없는 밤에 ‘별의 추억’을 가진 아가씨가 생각나네. 스테타네트 아가씨.
한 시간 쯤 걸었을까?


上. 3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푸른빛이 감도는 골짜기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환상 속의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가씨가 맞았습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죽상이었습니다. 노쇠한 노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박으로 엉망이 된 길 때문에 노쇠한 노새가 다리를 헛딛고 말았는지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짜증과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노쇠한 노새를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아꼈던 분홍색 주름치마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마을 농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가씨는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아가씨가 지름길을 알 리도 없고, 지름길을 아는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마을에 내려갈 리도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노새도 사라졌고. 닭들이야 닭장에 몰아넣고 아가씨와 마을까지 동행할 수도 있었지만, 홀로 외롭게 돌아온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산 위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인지, 가족들이 걱정할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가씨는 떨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가씨를 안심시키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 아가씨, 저 믿으시죠? 칠월이라 밤도 아주 짧습니다. 아가씨, 별일 없을 겁니다. 아가씨도 어른이시잖아요. 잠깐만 꾹 참으시면 됩니다. 성인이 되려면 한 번씩은 다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아가씨, 저 믿으시죠?
이렇게 아가씨를 살짝 달래놓고, 황급히 모닥불을 활활 피웠습니다. 그리고 땀에 젖은 옷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더러워진 주름치마를 벗기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닭똥집과 닭생간을 좀 갖다 줬지만, 아가씨는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보석 같은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만 저까지도 울고 싶었습니다. 스호쉬 고양이도 아가씨의 슬픈 얼굴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가씨는 장작불의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다고 했습니다.
- 아, 눈 따가워. 연기 좀 안 나게 피워줄 수 없어요?
밤이 왔습니다. 기어이 밤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산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별들이 많이 떠오르기 전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 한 점의 빛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서쪽 하늘에도, 동쪽 하늘에도 북에도, 남에도 빛줄기 하나 없었습니다. 저는 일단 아가씨가 '닭장' 같은 제 방에 들어가 쉬기를 바랐습니다. 닭 비린내는 좀 나겠지만, 나름대로 정돈을 해놓았고, 닭똥 냄새를 좀 풍기겠지만 일단 잠들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사적인 닭치기였기 때문에 아가씨를 방에 모시고,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 혹시 아가씨가 들어와보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 앞에서 간헐적으로 헛기침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어험. 어험.
아가씨는 제 존재를 잊은 것 같았습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씩 하늘을 빛났습니다. 밤 산도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창틈으로 닭 냄새가 진동하는 방구석에서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페타네트 아가씨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가씨를 그냥 그렇게 재우는 것은 몹쓸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살며시 방문을 열었습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놀란 닭 몇 마리가 날갯짓을 했습니다. 아가씨 옆에 살포시 누워보았습니다. 막상 방에 들어와 보니 둘이 있기엔 너무 좁은 것 같았습니다. 평소보다 닭 냄새가 더욱 진동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가씨가 눈을 떴습니다.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뱉었습니다.
- 헐!
전 긴장했고, 그래서 주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만일, 단 한 번도 밖에서 홀로 외로이 밤을 새워 본 적이 없으시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두려우시다면, 모든 인간이 곤히 잠든 이 시간에, 이 아름다운 밤에 또 다른 신비로움을 맛보기 위해 고독과 적막을 자연과 더불어 느껴보시는 것은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 시간에는 시냇물도 더 맑은 소리로 흐르고, 풀잎과 나뭇가지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마을에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니, 같이 밖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가씨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잠깐 들어왔다가 잠자리가 편안한지 한 번 살짝 누워보았는데, 어떤 오해가 있으신 것은 아니지요? 하하하. 산속의 밤은 별과 가까워지는 시간입니다. 하하하. 조금 무서우실 수도 있겠지만요. 이 안에서만 이 소중한 별밤을 다 보내실 생각은 아니시죠? 하하하하하. 저 하늘을 보세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니, 아니, 아가씨의 별. 하하하. 하하하.
아가씨는 황당하고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下. 3

    새벽 산책을 좀 하고 고시원으로 들어가려는 찰라, 난 황당하고도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유 없이 빙글빙글 도는 남자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돌았기 때문이었다. 식당일을 마치고, D와 술도 한 잔 한 상태였고, 거의 아침에 가까운 새벽녘이었으니까.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전봇대 앞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가 빙글 또 빙글 두 바퀴를 돌고 유유히 가던 길을 갔다.
그 남자는 왜 돌았을까?
고시원 방으로 돌아와 빙글 돈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창을 통해 새벽하늘이 보였다. 새까만 하늘엔 별이 한 점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별이 없어진 것일까? 잠이 오지 않았다. D의 냉소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TV를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잠깐 스페타네트 아가씨가 생각이 났다. 아가씨는 여전히 아름답겠지?
다음날, 평소처럼 오후에 일어나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시장에 나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줄었다. 사람들은 없었고, 누군가는 가게를 지켜야 했고. 그게 바로 나였고. 주중에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일을 해도 돈도 많이 벌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정당한 방법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간혹 주스를 마시러 찾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술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술은 팔지 않았다. 주인은 뭔가 시끄럽고 복잡해지는 것은 싫어하는 타입이었고, 나 역시 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남자가 망고 주스를 마시러 왔다. 그는 별 말없이 주스를 시키고, 아무 말 없이 주스를 단번에 마시고, 한 마디 없이 동전을 몇 개 내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았다. 몇 발자국 가더니 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가게 밖으로 나가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노쇠한 노새처럼 사라져버렸다.
망고주스 때문인가? 난 냉장고에서 망고주스를 꺼내 한 잔 마셔보았다. 하지만 난 돌고 싶지 않았다. 사라진 남자 대신 거리엔 다른 가게에서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여자들이었다. 여자 둘이 서로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빙글 또 빙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을 몇 명 더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왜 돌았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물어볼 틈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내겐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또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돌았다. 빙글빙글.
밤하늘은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았다.
고시원에 들어가서 D에게 왜 요즘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냐고 물었다. D는 피식 웃고 사라지려 했다. D를 따라가 다시 한 번 물었다. D는 스페타네트 아가씨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D는 피곤하다고, 자야겠다고 했다. 내가 계속 괴롭히자,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별을 왜 자기한테 묻느냐고 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미치도록 별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난 D가 말한 ‘미치도록’이 나를 조롱하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난 D의 뒤통수에 이렇게 대답했다.

    - 정말 산에 살 때는 별을 많이 봤다고, 어쩌면 거기 가면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미치도록 보고 싶다면 가보시든지! 난 왜 여기에, 이 마을엔 별이 없는지가 궁금하다고!

    D의 뒤통수는 말없이 내 눈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간 고시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D가 짐을 싸들고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다. 난 D에게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에 대해석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어쩌면 그 냉소적인 대답이 그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D가 사라진 것이 나 때문은 아닐까, 걱정도 조금 됐다.


上. 4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가씨는 결국 밖으로 나와 저와 함께 앉았습니다. 방의 답답함과 저의 답답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끔 들짐승의 울음소리도 났고, 찬바람이 쌩하니 불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후덜덜 떨면서 제게로 바짝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피곤했던지 꾸벅꾸벅 졸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가씨의 다리가 살짝 제 다리에 닿았습니다. 뭔가 짜릿한 기분이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하반신에 털이란 털은 다 일어서는 느낌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조는 모습도 환상적이었습니다.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대로 아가씨를 졸게 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좁은 방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인지.
그 때,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주 길고 처량한 울음소리였습니다. 아아아아아우우우! 그 소리에 졸던 아가씨가 깼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바로 그 찰라, 아름다운 유성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 대박! 저건 뭐예요?
스페타네트 아가씨가 물었습니다. 목소리에 졸음기가 싹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 천국으로 들어가는 아가씨를 닮은 아름다운 영혼일거에요.
저는 나름대로 멋지게 대답했다고 생각했지만, 아가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전 모른 척했습니다.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는 아가씨를 전 계속 못 본 척했습니다.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 아가씨가 혀를 차진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무심히 물었습니다.
- 근데, 닭치기들도 양치기들처럼 별에 대해 좀 알아요? 별점도 볼 줄 알고?
-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양치기들도 점을 못 봐요. 다 뻥입니다. 하지만 저는 손금이라든지, 혈액형으로 알아보는 성격 같은 것은 좀 알아요. 하루 종일 닭들이랑 놀다보면 심심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책들을 좀 읽었어요.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런 건 마을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멍하니 밤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수도 없이 박힌 별들을 보고 뭔가 감정이 동요한 듯했습니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습니다.
- 산에 올라오니 정말 별이 많이 보이긴 하네요. 밤하늘에 원래 이렇게 별이 많나요? 정말 졸라 많네요.
- 하하하. 그럼요. 원래 저 정도는 뜹니다.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지요. 제가 별에 대해 좀 말씀드리죠. 어떤 별을 먼저 이야기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저 하늘엔 별은 많고도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어떤 별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먼저 생각나는 별은 서쪽 하늘에 떴던 태지성(太地星)입니다. 이 땅[地]의 신보다 큰[太] 별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태지성은 주변의 두 별과 함께 세 아이 자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태지성이 너무 빛나 나머지 별들은 육안으로 잘 식별이 어려워 지금은 세 아이 자리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세 아이 자리는 그냥 닭치기들 사이에서만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어요. 참, 이런 별들도 있어요. 예전에는 가장 ‘뜨거운(HOT) 별들’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대부분 그 뜨거움이 사라졌어요. 별의 운명을 다한 것이지요. 몇몇 별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요. 별마다 운명의 시간이 다른 것이죠. 저기 9개의 별이 보이시죠? 저 별이 이 시간에 가장 빛나는 별들입니다. 가장 빛나는 알파별은 유나이무스로 알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9개의 별이 거의 골고루 빛나고 있어요. 목동들도 닭치기들도 모두들 좋아하는 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혼란한 시대를 밝혀주는 길잡이 별자리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전 별로예요. 사람들은 저 별들을 보면서 지루한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들 하는데, 제 눈에는 아홉 개의 별이 다 비슷비슷해서 큰 매력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별은 저 별입니다. 보이세요? 가장 조용한 별이라고들 하는데, 전 저 별을 보면 어떤 필(feel)이 와요. 보통 별들보다 수명이 10배는 길다고 하더라고요. 조용하지만 필을 주는 별. 그렇지만, 이 온갖 별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별은요. 제 생각에는……
제가 말꼬리를 흐렸지만, 아가씨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下. 4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D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고시원의 사람들이 D가 그라산에 올라간 것 같다고 말해줬다. D가 산에는 왜?
한 달 정도 지나자, 길에서 빙글빙글 돌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들이 빙글빙글 돈다는 것 이외에는 신기하리만치 다른 것들은 그대로였다.
가끔씩 외국인들이 주스를 마셨고, 평일 밤 편의식당에는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음악 방송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물론, 밤하늘에 별도 없었다. 그나마 달이라도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작은 위안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달도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달이 사라졌다는 사실마저, 혹은 달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사람들이 기억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망고 주스가 생각났다. 물론, 망고주스 따위를 마신다고 갈증이 완전히 사라질 리도 없었지만.
빈 식당에 앉아 별 없는 밤하늘을 보면서, 아가씨를 추억했다. 진짜 아가씨는 어디에 갔을까? 그리고 마을에 진짜 아가씨 대신 아가씨와 비슷한 가짜 아가씨들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꼬맹이 미아로와 노라드 아줌마는 잘 살고들 있을까? 인간의 말을 못하는 스호쉬 고양이, 능구렁이 흉내를 잘 내는 가타키 구렁이, 학생들이 즐겨마시던 드가, 라이버스는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러다가 스카리니아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말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조용히 느낌을 주던 별, 많은 닭치기들에게 위안을 줬던 아홉 개의 별들, 서쪽 하늘에서 크게 빛났던 별, 뜨겁게 밤하늘을 수놓았던 오성. 별들. 별들. 볕들. 참, 그리고 D는?
답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끔 식당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물론, 그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지나갔다.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거리가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똑바로 걸어야할 길을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빙글! 연인과 팔짱을 끼고, 빙글! 자동차를 주차한 뒤 차문을 닫고 나서 빙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 전에도 빙글! 빙글빙글 도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렸는데, 난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몸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것은 전염병처럼 마을을 뒤덮었다.
사라졌던 많은 것들 중에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하나 있었다. D였다.
D가 고시원으로 다시 돌아왔고, 반가웠다. 아는 사람 중에 돌지 않는 사람은 나 말고는 D가 유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고시원 좁은 복도를 빙글빙글 도는 몇몇이 보였다. D에게 물었다. 그가 친절하게 대답해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너는 왜 빙글빙글 돌지 않지? D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고작 그런 것이나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질문을 듣더니 빙그르 돌았다. 그런데 영 어설펐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D는 마구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으로 돌아봤다고. 내가 뿌루퉁한 표정을 짓자, 또 웃었다. 냉소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꽤 호쾌한 기운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한참을 웃더니 D는 자신은 별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별?
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을 보았다고? D는 웃으면서 별 볼일이 있었다고 했다.
- 그게 무슨 말인데?
솔직히 D의 농담에 살짝 짜증이 났다. 별이랑 빙글빙글 도는 것이랑 무슨 상관인데? D는 대답 없이 ‘거짓으로’ 빙그르 돌며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무 말도 없이.


上. 5

    아가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은….’이라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면, 아가씨가 ‘어떤 별인데요?’라고 물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전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히 ‘여기 계신 스페타네트 아가씨랍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가씨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그런데, 닭치기 정말 닭이랑 결혼했어요? 왜 이렇게 야리꾸리한 냄새가 나요?
- 네, 내내내앰새요? 겨겨결혼이요?
전 놀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이십대이다. 그리고 이건 제 냄새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냄새다. 그리고 아직까지 사랑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아직 젊은 편이다. 조금 노안이라서 그렇다. 산에서 살다보면, 좀 늙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냄새는 물론, 닭들이랑 있어서 그런다. 샤워하고 바디로션 깔끔하게 바르면 냄새도 없어질 것이다. 믿어 달라!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따뜻하면서 부들부들한 것이 살포시 제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아주 사랑스러운 묵직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졸음에 겨워 무거워진 아가씨의 머리였습니다. 졸음에 겹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왜 빨강과 파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깔모자는 쓰고 있었던 것일까요? 모자가 자꾸 얼굴을 찔렀습니다. 본격적으로 잠이 들면서 아가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코를 골기 시작했습니다. 드르렁 푸, 드르렁 푸. 잠자던 스호쉬 고양이가 깨어났습니다. 화가 난 표정이었습니다. 잠이 깊게 들면서 아가씨는 다리도 살짝 벌렸습니다. 짧고 더러운 분홍색 주름치마 사이로 하얗고 통통한 다리가 드러났습니다. 어깨가 아팠습니다. 욱신거렸습니다. 다시 고민을 했습니다. 그대로 참고 있어야 하나? 그 자리에 그대로 눕혀야 하나? 그대로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들 수는 있겠지?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습니다. 잠에서 깬 스호쉬 고양이가 다가와 신기한 광경을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 눈이 무서워 다른 뭔가를 하기도 꺼림칙했습니다. 저는 아가씨의 묵직한 머리를 한 쪽 어깨로 버텨내며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났던 수많은 별들이 마치 놀란 닭들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스페타네트 아가씨는 훤하게 먼동이 떠올라 별들이 해쓱하게 빛을 잃어할 무렵 머리를 반대로 돌렸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는 여전히 무너질 듯 아팠습니다. 가슴은 여전히 설렜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쉬는가 싶었는데, 아가씨는 바로 제 어깨에 그 무거운 머리를 재차 올려놓았습니다.
덕분에 저와 아가씨의 성스러운 순결함은 잃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잠결에 얼굴을 타고 내린 침을 대수롭지 않게 쓰윽 훔쳤습니다. 성스러운 순결함을 지킬 수 있었지만, 제 어깨는 지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이런 생각이 제 머리를 유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 저 수많은 별들 중에 가장 무겁고도 큰 별님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묵직하게 잠들어 있었노라고! 성스럽고! 순결하게!


下. 5

    여전히 산 아래 마을에는 별이 뜨지 않던 밤이었고, 편의식당 안이었다. 자정 이후에는 음악 방송을 보곤 했는데, 손님의 부탁으로 뉴스 채널을 보게 되었다. 유일한 손님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론 프로그램이 한창 방영 중이었다.
주제는 ‘빙글빙글’ 도는 사회현상.
화면 속에 몇 명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그룹이 찬반으로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해가 되나, 그렇지 않나,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 두 진영은 흥미롭지 않은 주장들을 지리멸렬하게 주고받고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것이 운동효과가 있다. 빙글빙글 도는 것 때문에 길이 혼잡해진다. 빙글빙글 도는 것은 새로운 문화이며, 이것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 주변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빙글빙글 도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진영은 준비한 내용들을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랠리가 긴 탁구 경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핑.퐁.핑.퐁.
전문가들의 긴 랠리 후, 방청객으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한 방청객이 말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방청객은 빨강과 파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분홍색 주름 미니스커트를 만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색 조끼에 초록색 체크 남방이 눈에 띄었다.
- 사람들이 별을 보고 싶어서 저렇게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방청객의 그 한 마디에 사회자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방청객을 잡고 있었다. 앉아 있었지만, ‘쭉쭉빵빵하다’는 느낌이 오는 몸매, 무지하게 아담한 100Kg 이상의 체구. 그리고 땡글땡글한 뿔테 돋보기안경에, 클로즈업했을 때 더 빛나는 새까만 얼굴에 붙은 덕지덕지 애교 만점 여드름 덩어리들, 그 위를 뒤덮은 두터운 파운데이션. 게다가 두툼한 살덩어리로 만들어진 삼중 턱. 그리고 호빵처럼 부푼 마이크를 쥔 손.
- 빙글빙글 돌면 별을 볼 수 있다고요! 그래서 저렇게 도는 것이라니까요!

    - 여기요! 계산이요!
방청객에 넋을 놓고 있는 나를 일깨운 건 목소리. 손님이었다. 그는 계산을 하겠노라 했다. 난 텔레비전에서 빠져나와 손님에게 돈을 받았다. 억양을 들어보니 부르키나파소 사람이었다. 인사를 하고, 다시 텔레비전을 보니, 이미 방청객은 화면에서 사라진 뒤였다. 난 다시 음악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폐점할 때까지 더 이상의 손님을 오지 않았다. 간혹, 빙글빙글 돌며 지나가는 행인들이 보일 뿐이었다. 퇴근길 하늘을 보니, 달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두렵지 않았다. D의 냉소적인 표정이 보고 싶었다. 왠지 D는 지금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았다.
스페타네트 아가씨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마디가 유성처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산에 올라오니 정말 별이 많이 보이긴 하네요. 밤하늘에 원래 이렇게 별이 많나요? 정말 졸라 많네요!

   갑자기 갈증이 밀려왔다. 망고 주스가 마시고 싶어졌다. 난 어느 덧 고시원 방향이 아닌 그라산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성스럽고, 또 꽤 순결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1) 독자의 기호에 따라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별』을 곁들여 읽으셔도 재미있습니다.


2) 그라산은 아프리카의 섬나라 스카리니아에 있는 유일한 산이다. 활화산으로 분류되며, 아직도 화산폭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975년에 화산폭발로 무려 2,541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 때는 영험한 산으로 스카리니아 사람들이 신성시하기도 했지만, 현재에는 거의 버려진 채 도심에 방치되어 있다. 전상훈,『아프리카 산행기』, 총명출판사, 2008, p.218.

3) 식육목 고양이과의 한 품종. 원래 페르시아가 원산지이나 지금은 아프리카와 북동유럽에 많이 서식했다. 생선만큼 과일을 좋아하고, 그 중에 체리를 무척 좋아한다. 버린 음식을 잘 먹지 않는 일반적인 애완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이 버린 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한때 최고의 반려동물도 각광 받았으나, 세계 경제위기 이후에 멸종위기를 받고 있다. 이정호,『고양이 대백과』,도서출판 오무, 2009, p.218.

4) 뱀목 코브라과의 파충류로 길이는 0.1~20m까지 다양하다. 주로 남아프리카와 중유럽에 살고 있다. 본래 육식을 즐기는 습성이 있었으나, 27년 전부터 아프리카 지역의 기근으로 서식지에서 육식을 할 수 없게 되자, 12년 전부터는 초식 동물의 습성을 띠며 살고 있다. 다른 뱀들을 잘 따라하는 습성 때문에 한 때, 아프리카의 동물원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전 세계적 야채 가격의 폭등으로 6,345 마리가 안락사되는 수난을 겪었다. 현재는 아프리카의 일부 동물원을 제외하고는 보기 힘들다. 류기청 저,『뱀에 관한 다양한 고찰-아프리카 편』,유니콘, 2012, p.27.

5) 그라산 자락의 계곡물과 인근 강변에서 자란 수중식물들로 만든 증류주이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스카리니아 사람들이 마시던 전통주인데, 예로부터 눈에 좋은 술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가가 시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발표가 나면서 그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 현재에는 스카리니아 국립 주류 박물관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 이무원,『세계 주류의 허와 실』,콜로라도프레스, 2006, p.120.

6) 라이버스가 기린과 양 사이에서 만들어진 개체라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대부분의 동물학자들은 라이버스를 단순한 돌연변이로 보고 있다. 라이버스의 겉모습은 다른 소목 소과 양속의 동물들과 달리 긴 목을 가지고 있다. 목살이 특히 맛있다는 이유로 한 때 아프리카의 대표 육류로 각광받았지만, 현재에는 거의 사라져 전설의 동물로 불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것이 1988년 수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광수,『양들의 외침』, 도시사, 2009, p.432.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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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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