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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오후의 슬러시」 외 6편

  • 작성일 2022-10-28
  • 조회수 3,30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여름 오후의 슬러시




고선경






투명한 봉지 속에서 금붕어가 헤엄친다
너와 보도블록을 따라 걸을 때
슬리퍼가 너무 작다


슬러시에 꽂힌 빨대 하나로
너와 감기를 나눠 마시는 생각


왜 이렇게 기우뚱하게 걸어
금붕어도 멀미를 느낄까


나는 계단도 침착하게 굴러
달고 끈적이는 슬러시를 엎지르면서
가끔 얼음 알갱이가 씹힌다


아 시원해


교실 문을 열자마자 마루에 눕고 싶고
우리의 체육복은 지저분하다 땀과 흙이
점점 번지면서 체육대회를 지속하려 한다


열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경기이듯이
여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규칙이다


슬러시에서는 열대 과일 맛이 났다
맛이라기보다는 향에 가까운
우리는 기후를 베끼려 했다


몸에 판박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였고
잘 안 지워졌다


슬리퍼 한 짝이 음수대 위를 출렁거렸다
봉지만 벗어나면 익사하는 금붕어
금붕어는 죽다 말다 하면서 슬리퍼를 통과했다


증상인지 사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나의 멀미


오후와 주황빛은 잘 어울리고 아주 잘 어울리면
거의 투명해 보인다


너는 연장전에 지친 선수처럼 퇴장한다
종이컵을 우그러뜨리고


나이스 슛


쓰레기통이 기우뚱하더니
내용물을 쏟는다 퉁퉁 불은 한쪽 슬리퍼와 녹다 만 슬러시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날의 기분


계단에서는 언제나 짜디짠 냄새가 났다









결정적인 감염






영화가 끝난 뒤 티브이를 끄고 욕조에 눕는다 욕조는 희고 차가운데 어쩜 비가 내리네 갈비뼈 안쪽에서 따뜻한 비가 내린다 따뜻한 비에 젖다 보면 회상에 잠기기 좋은 상태가 된다 상태는 현상에 가깝다 결정적인 장면 없이 현상은 나타난다 이를테면 지난 여행 같은 것 그 여행에서 나는 형제를 잃고 좀비를 얻었다 좀비는 나를 사랑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뒤 티브이를 끄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함께 비를 맞았으므로 좀비와 목욕탕에 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핸드폰을 켜서 사진 찍었다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을 곁눈질했다 저 인간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목격하면 안 되는데 그러다 세계사에 기록되면 어쩌려고…… 좀비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나와 사진 속에서 나란히 늙어 갈 것이 좋다고 하였다 나는 사진은 늙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사진은 낡아 가는 것이야 아니 그마저 불가능할 것이야 왜냐하면 세계는 이미 데이터화되었다 오 그것은 축하할 일 일일이 회상에 잠기지 않아도 좋을 일 사진을 찍은 사람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축하는 우리의 몫이야! 냉정하게 말했다 목욕을 하는 동안 노래 흥얼거리면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누구냐 하고 고개를 들자 영화배우가 보였다 영화배우는 좀비 분장을 하고 있었다 좀비와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가 구분되지 않았다 영화배우가 사랑을 연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의 연기가 훌륭했으므로 그 장면은 결정적인 장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미래에도 회자되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좀비는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의 목덜미를 물었다 목덜미를 물린 쪽이 좀비인지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악문 이를 풀지 않았다 주인의 심정으로 좀비 또는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를 회유했다 그러다가 이 회상이 끝나면 어쩌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늙어 버렸다 핸드폰을 켜고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에는 나 대신 젊은 나의 형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여행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얼굴을 벗은 영화배우가 나를 분장하기 시작했다 데뷔를 축하해 넌 내게 고마워해야 해 좀비가 나의 갈비뼈 하나를 뚝 분질러 갔다 그것을 고아 먹은 좀비는 목덜미가 뜯긴 사람 되었고 세계적인 영화배우 되었다 먼 훗날 그리 기록되었다 덕분에 나는 욕조로 다시 태어나 그가 살아생전 찍은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연장전






온천에 가고 싶다.
한여름에 그렇게 말하니까 쪄 죽을 것 같은
더위가 입속까지 말려 들어오는구나. 열대야
열대야니까. 노상에서 과자 한 봉지 열어 놓고 캔맥주를 마신다.


너는 어떤 연습을 하고 있어?
밤공기 누그러뜨리기. 초식동물처럼
목이 길어질 것 같다.
회사를 다녀 볼까?
깨진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오가는 질문과
생각과 생각과 생각들
매년 연장되는 여름처럼
우리의 딴청은 길어지고 있어.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 젊은 날은 대개 비현실적으로 빛나고 아름다우며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삭임. 찢어발기고 싶은 종이들. 매미 울음소리 너무너무
맹렬한 건 뭐든 무섭지 않아? 그게 호의고 선의고
다정일지라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위기를
장악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싫고 기대가 되지. 폭우가 쏟아지길 기다리는 우산처럼
내진설계로 지어진 건물처럼


볼륨 좀 높여 봐.
그래 나도 이 음악을 좋아해.
너는 표정을 구기며 웃는다. 어디선가 희미한 불 냄새가 풍겨 온다. 건너편 옥상에서 흰 연기가 솟아오르다가 흩어진다.
맛있는 냄새야. 착각인가?
나는 맨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밟고 해변까지 걷고 싶은데
왜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걸까. 이러다
슬리퍼가 녹아 발이 땅에 눌어붙겠구나.
이 동네는 바퀴벌레가 많고
서울의 다른 곳들에 비해 별자리가 쉽게 관측된다.


있지, 너하고 같이 사는 일이 지겹다. 한여름에는 걷다가 거미줄과 마주치는 일이 흔하고
우리는 너무 엉켜서 거의 한 사람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의 덩어리로 보인다.


내일은 코인 빨래방에 들렀다가
냉장고 야채칸 속 샐러드를 꺼내 먹자.
너는 온천 따위는 금세 잊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과자를 집어 먹을 때마다 조금씩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린다.
나는 발에 힘을 주고서
슬리퍼 밑창을 조용히 눌렀다가 뗀다.
바퀴벌레 사체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얼룩 같다.


자동차 후미등 불빛 너무너무
붉고 환하다.









숨어 듣는 명곡






한때 응원했던 아이돌 그룹이 며칠 전 해체했다 모든 멤버가 자필로 적은 편지 말미에는 사랑해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어느 그룹은 해체하지 않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새로운 음악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지금 무슨 의미가 있어?


MP3에 들어 있던 옛날 노래들 그때도 옛날 노래였고 지금도 옛날 노래인
우리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는 했잖아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몰래 드나들던 피시방에서 나는 RPG 게임 고수였어 캐릭터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좋은 무기를 들려 주었으니까
가서 싸워야지 싸워야 경험치가 오르고 레벨이 오르고
그것이 육성 게임의 즐거움이다


스피커가 터지도록 울리던 효과음이 집까지 따라온 날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 때문에 부모에게 문책을 당했지 기분이 상해서 방문을 닫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메신저에 접속해 친구들과 채팅할 수도 있었지만
편지를 썼다


나의 아이돌에게


메신저를 다른 메신저가 대체하고 다른 메신저를 다음 메신저가 앞지르는 동안
기억은 충분히 아름다워졌지?


선배에게 얻어터진 다음 날에는 모든 동급생이 나를 피했다
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먹을 것을 사다 바치면서 빌었다


급식을 거르는 게 익숙해졌을 무렵 선생님이 나와 동급생들을 불러 모은 뒤 말했다
이제 그만 화해하렴



죽을힘을 다해 살아야 하지 죽을힘으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


나는 살아남아
시인이 됐다
처음으로
뭔가가 되어 봤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기세등등한 척 말하면
맞아도 싼가


이제는 어제 일도 가물가물하다


중고로 산 고가의 헤드셋이 사용한 지 일 년 만에 고장 났다 이 모든 게 적당한가 적당히 고장 난 헤드셋으로 해체한 그룹의 노래를 듣는다 그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우리를 화해케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화해라는 단어가
적당한가


무기한 무대에서 볼 수 없는 그들은
살아남아
일을 하거나 하지 않고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고
애를 낳거나 낳지 않고
노래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흥얼거리면서 부지런히 책장을 넘긴다 이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 전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 몇 개의 터널을 지나야 했는지 세어 본 적 없고
고속버스를 타면 정안 휴게소에서 한 번 멈춘다


매끈하게 잘 닦인 고속도로
달리다 보면 고층 아파트들이 일어서 있다


죽을힘을 다해 봐라
모기와 빌보드 차트 1위 가수의 무대는 나의 귓가로 동일하다


나의 무대에서
나는 부지런히 슬레이트를 친다
잡았나?
……
방구석에 웬 모기가 이렇게 많아


숨은 적이 없으니까


고장 난 헤드셋에서 음악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작동한다









토마토 젤리!







새로운 혼잣말을 하고 싶다


고민은 여러 번 빨래한 청바지처럼 물이 다 빠졌다


파란 개구리를 토하는 상상이 비닐하우스와 비닐하우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상상은 그대로


도시를 떠났다고 한다
꿈꾸는 표정으로 회상하던
아, 개구리의 식감


집집마다 토마토를 기르는 마을


마을에는 청바지 공장과 젤리 공장이 있다 나는 젤리 공장 공장장이 되고 싶을 만큼 젤리를 좋아한다


소다 맛 설탕 맛 돌고래 맛 혼잣말


밤의 단면은 탱탱하다
구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름


색소를 섞은 비가 내리네


비탈을 따라 토마토는 데굴데굴 구름


빨랫줄만 보면 뭔가를 널고 싶지 구름 젤리 토마토 개구리


물 빠진 청바지는?
충치 같던 나의 사랑은?


머릿속에 젤라틴을 붓고 식어 가는 광경 지켜보고 싶다


도시를 떠난 고민들


나의 우산에는 손잡이가 없다


고장 난 젤리 장난감 젤리 뭉개진 젤리
청바지 공장 공장장도 즐겨 먹는


개구리









세나 나나 나나세






세 사람은 같은 기차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그런데 세나의 앞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세나는 울적하다 나나세는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게 좋다 술도 좀 마시고 싶고 담배도 피우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다 자리가 넓으니까 막 드러눕고 싶다 나나의 앞자리 옆자리에는 나나세 세나 있지만 나나는 만화책 읽는다 낄낄 어두워서 잘 안 보여


세나는 슬픈 이야기를 잘하고 나나는 웃긴 이야기를 잘하고 나나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슬픈 이야기를 웃기게 할 줄 알고 웃긴 이야기를 슬프게 할 줄 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세나의 주머니 속에 녹다 만 초콜릿이 있고 나나는 초콜릿을 너무나 좋아해서 녹다 만 것도 핥을 줄 알고 나나세는 초콜릿이 더 잘 녹도록 손에 쥐고 있다가 홀랑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세나와 나나와 나나세는 초콜릿 묻은 손을 씻는다 세나는 엉엉 울며 씻는다 나나는 낄낄 웃으며 씻는다 나나세는 세나나나나나세……


창밖이 완전히 캄캄해지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하지만 부담스럽다! 세나는 녹다 만 초콜릿과 반쯤 남은 생수와 텅 빈 좌석만 봐도 슬픈걸 슬픔이 많은 사람이 슬픈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럽단 말이야 세나는 부담스러워 나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또 웃긴 궁리 하고 있을까? 생수를 빈 좌석에 붓고 아 누가 오줌 쌌어 말하는 상상 나나세는 조용히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재미있냐?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차는 한 방향으로
세나나나나나세


*


셋이서 시소 타는 법 알려 줄 사람


세나와 나나와 나나세는 동갑내기 친구들


셋이 놀기 좋아하지요


잘못 보관한 목걸이나 팔찌처럼 엉켜 버리기!


*


꼬인 줄을 풀 때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세나, 부탁할게!


좋아 나는 꼬인 줄을 힘겹게 풀어 왜냐하면 대체로 마음이 엉켜 있거든 그런 마음으로는 침착하기가 어려워 꼬인 줄을 한꺼번에 당기면 안 돼 제일 위에 있는 줄부터 차분히 씨발 주머니에 초콜릿 누가 넣어 놨냐? 야, 나나, 네가 해 봐


꼬인 줄을 꼭 풀어야 돼?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나세, 너는?


어라, 쉽게 풀리는데? 그냥 이 줄만 당기면 되는 거였네 그리고 초콜릿은 내가 넣어 뒀지 우리는 도돌이표잖아


기차에 다시 올라탈 때 세나와 나나와 나나세는 세나와 나나와 나나세이면서 세나나나나나세 나나세나나나세 나나세세나나나 세나나나세나나 나나나나세세 세나와 나나와 나나세의 리듬 리듬 리듬 기차처럼 도돌이표를 가졌지요 칙칙폭폭 치카푸카




아 누구야


나나가 뒤돌아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차 안에서는 정숙, 이라고 알려 준다









물속의 어항






눈 감고 구름 속을 걷는다고 생각하자 물의 계단이 나타날 거야 이것 봐 나의 건반은 파랗다 밟으면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하루 종일 거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퍼즐을 맞출 수 있겠지만 나의 눈동자로 유빙을 옮겨 오는 동안 너는 창틀의 벌레를 눌러 죽인다


내가 어지러움을 느낄 때면 너는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반으로 쪼개 줬잖아 그런 여름이 은색 단도처럼 반짝이는데 파충류는 등껍질의 서늘함을 알까 나는 알루미늄을 오려 가면을 만들고 싶다


페인트 사탕을 빨아 먹고 혀가 파래지면 다른 생물이 된 것 같았던 사춘기 나는 배우고 싶은 영법이 많은 학생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코피가 쏟아졌다 이제 얼굴과 목소리가 희미해진 선생은 사춘기의 방황이 일종의 멀미라고 말했다 황급히 자라느라 매 순간이 어지럽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비생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실험 관찰 또는 휴가


빙수 그릇에 수저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사랑했는데 네가 기르는 물고기는 발육이 좋구나 두근거릴 때마다 커지는구나 홑이불처럼 얇고 가벼운 슬픔이 한 계절 내내 사각거렸다


이토록 익숙하고 평범한 날들에 종말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 나겠지 이가 빠지도록 달고 차가워서 미련하게 자꾸 핥게 되잖아 우리는 골치 아픈 연인이야 그렇지 않니


물의 계단 아래 무엇이 헤엄치고 있을지 궁금해 들여다보면 모래 언덕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나의 심해가 저 먼 사막 한가운데에 잠겨 있다


나는 우산 속 날씨만을 믿었던 일에 대해 죗값을 치르는 것 같다 밖을 나설 때마다 거머리가 등에 달라붙는 상상을 한다 비좁은 오후를 견디다 보면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지만


나는 우리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가능성에 중독된 자들만이 불가능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까만 사체들이 흩어져 있는
형광등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어떤 포즈를 취할까 고민하다 우스꽝스럽게 찍힌 사진
그건 일생을 요약한 장면 같다













김종연
작가소개 / 고선경

1997년 안양에서 나고 전주에서 자람. 2022년 ≪조선일보≫ 등단.
itsboringbabe@naver.com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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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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