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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밥」외 6편

  • 작성일 2023-11-10
  • 조회수 704

구메밥*

명은애


그는 늘 강의실 뒤 끝자리에 앉았다

함께 섞이는 호흡과 분리되고

강의와도 무관한 모습으로 창밖을 보며

바람 뼈 자라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해진 청바지에 낡은 군화

멋지지 않았으나 멋지게

내 동공을 빛나게 했던 그는

점심시간이 되면 벚꽃과 눈 맞추며

밥을 술 마시듯 삼키고도 취하지 않았다

니체를 눈에다 스케치하고

바람에 쓸리는 낙엽에 솜털 세우며

강의실에서 식당까지 걸음 수를 세던 철학 노트가

최루탄에 젖던 날

그는 학장동 벽돌 담장 안에 발자국을 가뒀다

삼월이 시월로 뜯긴 날들은 복원되지 않고

학우들이 넣어주는 구메밥*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선배 빈 도시락은

내내 취하지 않았다


* 구메밥 :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벽 구멍으로 몰래 들여보내는 밥.




포노시트*



사천 서포 해안 그늘집

사그락담 너머 들려오는 가락은

청도댁 정수리에 달이 걸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창문 높이만큼 쌓인 이력

턴테이블 바늘 등뼈가 달빛에 휘고

농아인 그녀 눈에

남편 것인지 그녀 것인지 모를

닫힌 가사들이 쌓인다

궁핍한 생활에 입술은 허기져도

노래가 밥 인양 배불리 듣던 남편이 어느 날

노래 한 장 옆구리에 낀 채 집을 나갔다

소리 없는 그녀 절규에

문풍지 스미던 바람도 숨을 죽였다

둘레를 잴 수 없는

검은 몽우리를 품고 산 지 오십 년

그녀는 남편이 모아둔 포노시트*를 보며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소리 나이테에 쌓인 먼지만 닦는다


* 포노시트 : 보통의 레코드판보다 얇고 부드러운 비닐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음반




은행알로 남기



서면 문화로 은행나무 아래

발걸음이 향기를 피한다

어깨를 움츠리거나 날 선 까치발로

은행나무와 도피 거리를 만든다

여름내 햇살에 쌓아온 순결이

노랗게 숙성되는 시월

나무는 만삭을 풀기 시작한다

갈마바람 빌딩 숲을 손에 쥐고

해코지에 떨어지는 은행알 숨이 가쁘다

밤새 쌓인 지독한 저주는

해독되지 않은 모스 부호를 띄우고

새벽을 닦는 미화원 싸리비에 발굴된다

손끝에서 살 털리는 시린 알들

눈시울에 황달이다






해미 깊은 날



추자도가 기침 포말에 잠긴다

파도가 치지만 섬은 흔들리지 않는다

집어등 따라가는 갈매기 등 뒤로

기척 없이 저물녘이 온다

그늘진 하늘에서

낮달 부스러기 손등에 떨어지고

밤은 멀었지만 눈을 뜨면

눈썹 자락에 초승달이 자란다

등대

동공을 밝히자 뱃길 지워진 물 위를

냉갈시럽게 걷는 검푸른 갈피가

갯가에 소금 비늘을 떨군다

하늘을 향해

바다는 넓게 눕고 나는 좁게 목을 뺐다

발 묶인 선창에 혀를 비비자

수평선 너머로 돌아오지 못할 비늘이 빠져나간다

추자도는 얼굴 큰 부표다






은행나무 낙서



떨어진다

몸부림치다 떨어진 냄새 하나

은행알이다

울음을 박제하면 두엄 향 짙어지고

그림자는 젖은 바닥에서 마른다


물든 잎

불국사 디새 틈에 낀 잎 하나

은행잎이다

발톱을 버리고 발자국도 지운 채

어둠에 지워지는 햇살 갈피를 놓지 않는다


사랑한다

다시 한번 만날 듯한 사람 있어

은행잎에 이름을 새긴다

갱지 같은 사랑이라도 남아 있다면

물든 잎 옆구리 찔러보고 싶다






노을을 입다



어둠이 짙어지면

웅크리고 있던 통증이 눈꼬리를 치켜뜬다

관절마다 바늘이 숨어있다

나를 품은 시트 자락엔

흩어진 실밥이 복병으로 매달려

연음을 바느질한다

알약으로 구겨진 어둠을 펴고

마른 꿈을 다독이지만

눈에 스며들지 않는 불면은 몸집을 부풀린다

파도 갈피를 물어와 뒤척이는 갈매기

창틈을 드나들며 통증을 키우는 바람

습한 모음이 천 개 혓바늘을 세워

아린 혀끝을 태워도 재는 보이지 않는다

잠이 앉아 있는 동안 밤은 하얗게 늙고

헝클어진 눈이 훑고 간 이불을 털자

밤새 주광 빛에 절은 관절이 죽은 물비늘로 떠오른다

통증은 서둘러 흩어진 얼굴을 주워 들고

박음질 된 시트를 버린다






구메밥 2



눈보라에 갇힌 추풍령을 넘었다

천안은 눈안개로 그늘지고

자동차 경적으로 삼거리는 귀가 먹었다

답사 못 한 눈시울이 눈꽃 핀 시침을 방목해

구메밥 먹던 그를 찾았지만

수신되지 않은 편지가

삼거리 로터리를 맴도는 중이라

나는 중얼거린다

차창 너머 미로

한 겹 지나면 또 한 겹

마른 나무껍질 사이 자퇴가 푸른 얼굴로 서 있다

손가락 닿지 않는 출렁거리는 눈빛이

겨울 어귀 두고 간 발자국에

눈이 쌓인다

차 안도 파묻힌다

흰빛 적막은 남자의 얼굴을 쉽게 놓지 못한 채

붙박이 의자에 오롯이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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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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