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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제(祭)」외 6편

  • 작성일 2023-11-10
  • 조회수 569

루시제(祭)

이윤학


 세라마* 우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루시의 묽은 눈곱을 정리한 물티슈 서너 장 엄지 검지로 집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네. 벌떡 일어나 어쩔 줄 모르고 꼬리를 흔드는 루시에게 눈을 맞추고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바람이 전송하네. 저승에 가면 키우던 개가 제일 먼저 마중 나와 꼬리를 흔든다네. 왜 벌써 왔냐고 개는 짖지 못하고 마냥 꼬리만 흔든다네. 좀 더 가면 묵정밭이 드넓디 펼쳐진 언덕 위 평지가 나온다네. 세라마 달걀부침 같은 망초 꽃 만발한 저승의 입구에 도착한다네. 루시의 가죽 목사리 세라마 빈 우리 옆에 벗겨져 금이 가네. 언덕 위 평지 만발한 망초 꽃밭 가온에 자신을 껴안은 자세로 앉아 기다리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닭.




거기 앉은 섬



 블라인드를 걷고 슬라이딩도어를 접어 열었지. 새벽 어스름의 정원에 엎드린 거위 한 쌍 잔설의 섬이 보였지. 반 아름의 뽕나무 밑 자갈이 드러난 맨땅에 엎드려 서로의 날개에 머리를 맞교환한 엊저녁의 일을 알아차리곤 하였지. 푸른 철망 바깥에 오늘의 머리를 넣고 살진 몸을 내둘러보는 것이었지. 아무리 맞춰봐도 우리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 분명했지. 주인 여자는 머리를 내두르다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어 슬림 담배를 빼 물었지. 그러고는 돌아앉은 섬을 바라보며 생담배를 태웠지. 거기까지 가는 접이식 카약을 사야겠지. 거기까지 가는 동아줄을 꽈야겠지. 철심을 넣은 동아줄을 거기까지 연결해야겠지. 눈을 내리뜨고 알이 빠진 안경을 쓴 곰 인형에게 다짐을 전했지. 활주로를 이륙하는 제트기 굉음과 돌아앉은 섬 절벽으로 새벽 어스름의 파도 분수가 쏟아졌지. 너는 나를 온전히 나로 지켜내는 의지의 발로였지. 내가 어쩌지 못할 아픈 신경세포였지. 언제나 과분한 현재 사랑이었지. 둘이 가고 싶어 안달한 미래의 여름 수국 핀 언덕의 전망 좋은 전원주택지였지. 접이식 카약을 주문해야겠지. 돌아앉은 섬 앞으로 접이식 카약의 뱃머리를 몰아야겠지. 두 손으로 잔물결을 몰아내는 기도를 드려야겠지. 밤마다 거기 앉은 섬을 보고 와 눈을 붙여야겠지. 땅굴을 파고 들어앉은 당신. 문을 열고 나와 눈 감고 입 다물고 바위에 앉을 때까지, 초혼(招魂)의 피아노 연주 이어갈 수 있겠지. 






혼인관계증명서



 꽃사과가 익어가는 935번 지방도

 딸내미가 짰지 싶은 벨벳 모자를 쓴 할메 

 전동스쿠터 뒷자리에 영감을 태우고 간다.

 중절모를 쓴 영감. 할메 어깨께 인견 블라우스 

 살짝 쥐고 간다. 약 타러 도립병원에 간다.

 

 커브 길을 돌아 나온 덤프트럭 

 쌍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친다. 잽싸게 할메 허리를 감고 

 찰싹 등에 붙은 영감 꼼짝하지 않는다. 

 벨벳 모자 날아가 굴러가다 멈춘다. 

 

 전동스쿠터 비상등을 켜고 후진한다. 

 할메, 지팡이로 모자를 끌어당긴다. 

 할메, 들어 올린 모자 잡지 못하고 

 다시 들어 올린다. 달달 떨린다. 


 시내버스 비상등을 켜고 멈춘다.

 선글라스를 끼고 내린 버스 기사. 

 할메 벨벳 모자를 주워 씌워준다. 


 공터에 전동스쿠터를 세운 버스 기사. 

 할메와 영감을 부축해 태운 버스 기사. 

 고마 걱정 붙들어 매고 있으소. 

 이따 요기 내려줄 꼬마. 

 룸미러로 뒷자리 바라본다.






대숲

 


 조 박사 일가가 떠난 집에 갔다. 

 뒤꼍의 대나무가 퍼져 집을 에워쌌다. 

 집 안에도 대나무가 퍼졌다. 하늘은 

 안마당에 말을 안 담은 입 모양으로 남았다.


 플래시 건전지 속 흑연 심으로 

 그린 회벽의 그림 지우고 

 다시 그리는 댓바람 소리 들렸다. 

 바닷물이 들고 나가는 소리 들렸다. 


 샌들을 들고 개펄을 뛰어가는 여자애 

 조잘거렸다. 그만한 딸내미 숨소리 

 새소리 대숲을 흔들고 뒤졌다. 


 마루에 앉아 딸내미 머리를 빗겨 따는 

 어머니, 고뿔을 달고 사는 어머니 

 딸내미 갈래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울 속 딸내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봄날의 슬레이트 지붕, 댓 그림자 

 마루를 훔쳤다. 벼름박*에 걸린 옷을 매만졌다.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든 아이 방에 눕힌 어머니 

 잔기침을 참다 밖으로 나와 대숲에 들었다.

 

* 바람벽의 충청 방언.




파리는 왜 촛농에 빠지는가



 기름진 파리들, 

 순대 공장 천장에 떼로 밀착해 겨울을 난다. 

 버너에 가스 불을 붙인 여자 담배를 꼬나물고 

 오른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악다구니 쓰는 

 세 방향 알루미늄새시를 열어 재낀다.


 공장에 딸린 살림집에 들른 여자, 겹동백 

 화분을 들고 골목으로 나와, 물뿌리개 

 분무질을 한다.


 드럼통마다 김이 오르고,

 파리들 떼 제비로 삼거리 

 순대 공장 골목 근방을 난다.


 화장대에 켜둔 티라이트 캔들 

 미니 향초 용기마다 굳은

 촛농에 갇힌 파리들 타다

 멈춘 심지 위에 엎어져 있다. 


 여자는 위치 추적 앱을 누른다. 

 그니는 간이 녹기 전에 

 돌아오기 틀린 인간인데 


 촛농에 빠진 파리들

 한 번 더 꿈틀거린다.






꽃기린*

 


 낮잠 자다 눈을 비비고 나온 사람아 

 초음속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가 날아 

 농막의 복층 침상은 골조의 부분일 뿐

 배밭 농막에 웬 꽃기린을 사 오셨냐고 

 수돗가 옆 개집의 발바리 개와 강아지 셋과 

 어디서 굴러먹다 안착한 유기견 하나가 

 집단 마무리 체제로 짖어대고 

 배꽃은 향이 없어 섭섭하고 

 빗물이 우리는 배꽃 차 나비가 떠다닌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는 바람아

 술 먹고 술 사러 가다 꼬라박은 스쿠터 

 수습해 뒤꼍에 옮겨놓은 사람아 

 겨울 서너 달 의식불명의 남자 곁을 

 지켜낸 사람아 사기 화분에 분가한 

 꽃기린 농막 옆 하우스 탁자에 올리고 

 물을 뿌리는 사람아 노름을 끊는다는 

 남편이 전기 포트 물을 따라 훈김을 부는 모습 

 이번에도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람아 


* 솟아오른 꽃 모양이 기린을 닮았다.

 

 


아직, 파란, 밤송이



 식전부터 담배를 물고 산 할아버지 산소 

 상석에 북어포와 배 사과를 올린 아버지

 담뱃불을 붙이고 술을 따른다.


 참초*하다 집으로 줄행랑친 아버지

 머리에 왕텡이** 두 방 쏘인 아버지

 감긴 눈으로 낫을 쥔 손으로 

 어린 아들 손을 잡는 아버지

 

 지금, 아버지, 대가리 쩌개지는 것 같다.

 

 두 번 절하고 일어선 아버지

 눈을 찡그린 아버지

 생담배 흩어진 연기

 밤나무 생가지 멀거니 본다.


* 벌초의 충남 방언.
** 말벌의 충남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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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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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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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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