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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1,034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발을 내려다보던 개는 

발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핥는다


발을 핥는 자리마다  

발은 계속 생겨났다


개로 사는 일이 늘 나쁘진 않았다

누구도 개에게 미래를 묻진 않았기에 

어떤 불안도 준비할 필요 없이 그저

집 주변을 어슬렁대는 하루하루를 

맹렬히 짖어 멀리 쫓아 버리면 그뿐


가끔 목줄을 찬 채로 높이 뛰어오르면 

허공의 목을 캑캑 조르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날은 공을 물고 뛰고 또 뛰었다

숨찬 허공이 헐떡대는 재미가 있었다


이것저것 다 싫증이 나는 날에는 

개 밖으로 조용히 혀를 뻗었다


시간에서는 투명한 강물 맛이 났고 

혀는 과거와 미래를 제멋대로 핥다 

슬그머니 돌아오곤 했다


개 속에 머물렀던 건 

개를 사랑해서가 아니었지만 


당장 개를 관두면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짧고 뭉툭한 발톱을 손톱처럼 기르고 

민숭민숭한 앞다리를 양팔처럼 휘두르는 개가

내게 목줄을 채우고 주인처럼 두 발로 서서 걸을 때 

숨통을 끊어 놓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은 그래서였다


개자식- 하고 조용히 으르렁거리다 만 것도 

아직은 서로 들킬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였다






멧돼지보다 김



이 농장 농민들은 사과 깨나 먹어 본 민족으로  

전문가는 아니지만, 문외한도 아니라는 

사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았다 

서로의 사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개개의 사과가 무시되거나 다치는 일 없이 

각자의 농토 안에서 굳건한 가지를 뻗어 갔지만

좋은 사과의 요건과 등급 선정의 기준을 놓고 

사과 본래의 달콤함을 지켜야 한다는 자와  

품종 개량을 통해 달콤함을 개선하자는 자와   

이국의 우수한 단맛을 그대로 들여오자는 자와 

근대화된 고랭지로 아예 이식하자는 자가 있었다 

생소한 토양으로 인해 뿌리 변형이 생기더라도 

세계적인 사과를 위해서 거칠 관문이라고 했다 

이식된 사과는 본래의 사과가 아니라고 하는 자와  

이식된 덕분에 더 좋은 사과로 거듭날 거라는 자와 

이식기술의 전수 대가로 농장 지분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대뜸 김이라는 자가 자주 거론되었다    

그는 대략 반만년 내내 이 농장에 머물렀고 

농장주와 농장의 상호가 수없이 바뀌는 동안 

교과서 개정에 맞추어 조선 사과 상고사를 발표해 왔다  

그는 자신을 사과 맛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허공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는 연구에 매진 중으로 

농장 규모 확장의 공로를 인정받아 아직 열리지 않은

미래의 사과로 품평회에서 대상을 탄 이력은 사실이나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사과나무를 뽑고 다니는 기행으로   

멧돼지보다 더한 농장의 골칫덩이가 되는 중이었는데  

이번 농장주는 사과 복지 관리사에 번번이 낙방하는 이력이 

김의 농단 덕분에 묻힌다며 여기저기 술자리에서 좋아하였다






딸기 냄새를 풍기는 룸펜



언젠간 나도 그렇게 되겠지   


이렇게 평등한 햇살을 두고 

바구니 가득 밀린 빨래를 두고

말라붙은 식탁의 얼룩을 두고

만기가 남은 적금을 두고 


다들 덜컥 사라졌듯 그렇게


너덜너덜한 이름 하나 돌에 새기고  

처음으로 벗어 보는 이 한 벌의 몸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옷 속에 갇혀 

평생 두근댔던 건 도대체 뭐였을까


그런 눈으로 경계하지 말았으면 

나는 그저 그런 룸펜이 아니다   


의지가 시간을 앞지를 때까지 

방 구석구석 뒹굴고 눌어붙는다 


어쩌면 한 번쯤 내가 생각한 대로

나를 살아 낼지도 모르지 않나


비록 콧잔등에선 딸기 냄새가 나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딸기 냄새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는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에 대한 궁금증은 생겨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라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들은 그의 한 가지를 한 번은 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어쩌면 우리가 묻지 않아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한 가지에 귀 기울이는 게 아니겠냐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 날에는 이만하면 우리도 괜찮다고 

소외된 것과 타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저는 오늘도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필코 오늘은 그 한 가지를 듣겠다 생각하지만

어느새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변에 빠져들고 만다 

어쩌면 그는 그 한 가지를 말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한편에서는

그 한 가지가 무엇인 줄 알고 함부로 듣겠냐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하루하루가 꿈결처럼 흘러갔기 때문이다 


자,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죠

사람들은 안심했다 오늘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오늘도 그 한 가지만은 몰라도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시인으로 지낸 어느 한 해



사람으로 지내던 어느 느지막한 해에 나는 

이제 좀 내가 내게 걸맞은 옷처럼 여겨졌다 


목을 구부리자 목이 구부러지고

양팔을 펼치자 양팔이 펼쳐졌다   


나와 나는 한 몸 안에서 정확히 포개졌다 

비유를 사용하는 일이 특권처럼 자랑스럽고 

소통할 의지를 지닌 우리가 새삼 사랑스러웠다 


사유와 지성과 발전의 미래를 믿고

반전 캠페인에 동참하고 친자매의 소송에 잠시 관여했으며  

어머니를 위해 날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순애보도 경험했고

동료에 대한 시기를 존경으로 위장하는 법도 알게 됐으며

덕분에 총무를 맡고 객관적이라는 평도 얻었다


무엇이든 원래 없다는 걸 그때에는 모르고

눈만 뜨면 세계는 생겨나길래 그런 줄 알고 


종일 책상에 앉아 투명한 글씨로 허공을 썼다


불안을 곧추세운 소년 소녀들이 술을 마시고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늑대처럼 울부짖을 때

그들이 쫓아내려던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머리가 지구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사람이 평생을 바쳐 허공을 떠도는 까닭이 

내게도 있을 것이다 


다시 책상에 앉아 한 줄 허공 속에 

나의 처음과 끝을 동시에 써넣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시인이라며 쑥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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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숨쉬듯가볍게
    감동했어요

    그런 눈으로 경계하지 말았으면. 그 순간이 너무 전해지는 듯 하네요 ㅠㅠ슬프지만 따뜻한 순간이길 바랍니다.

    • 2023-11-23 19:08:18
    숨쉬듯가볍게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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