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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쪽방촌」외 6편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2,065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제 몸속 가시로 몸을 찌른다

찔러도 죽지 않는 건 물소리다

물속에 가만히 누워 기다렸다

닳아진 어스름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찔린 물고기들이 찔린 채로 흘러간다 


닳아진 어스름 속에서 수평선을 지우고

왜가리 한 마리 강가에서 

금빛 모래에 몰래 눈물을 떨어뜨린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야 

찔린 채로 물고기는 흘러간다






강정 강가에서



강을 건너오는 십이월의 빛은 차다

논둑 따라 덜컹대는 수레를 가로지르며 불어온 강정 바람도 차다

늙은 호박 한 덩이 찹쌀 두 되를 실어도 수레는 끄떡없다

재래시장은 늘 그 날짜에 장이 서고 

아버지의 쇠잔한 몸을 데리고 수레는 장에 간다


강 건너의 집집 굴뚝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하얀 연기

오늘도 허기진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가끔 수레 속에 박하사탕 한 봉지를 싣고 오던 아버지

철사로 칭칭 마음을 동여매고

십이월의 어스름한 강 건너를 마주 보고 섰다

눈 오는 날이면 뒷골목 허름한 빈대떡집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던 아버지


오늘 내가 앉았던 의자에 어제 아버지가 나처럼 앉아 있다






곶감



푸른 그녀의 꿈이 가지 끝에 매달려 햇볕과 벌레와 사투를 벌이고 있어요 비가 오면 좋을 텐데 햇볕이 짱짱한 하늘을 올려다봤어요 구름이 발목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네요 바람이 불면 꿈의 잎사귀가 설레곤 하지요 


고지 가위로 한껏 뽐내고 있는 그녀의 분홍 꿈을 휘감아 따네요 하나 둘 옹 종종 모여든 그녀의 꿈이 바구니 가득 넘치네요 발목을 휘감던 구름과 귓속말을 주고받던 바람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껍질을 벗기자 꿈의 알몸이 달콤한 속살을 드러내네요 찬바람 무서리가 내 꿈을 꽃 피우네요 어느 날 정갈한 제사상에 귀한 몸으로 모셔지거나 호랑이보다 무섭게 우는 아이 달래는 겨울밤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되겠지요






석류



곽촌에서 페르세포네를 만났다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투명하게 박힌 노을보다 더 검붉게 물든 365개의 침묵들이 슬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머니의 침묵이 속내를 드러냈다 어머니의 침묵은 잊혀지지 않아서 투명했고 정이 깊어서 이해되지 않았다 황폐한 실어증의 계절은 길었다 땅은 메말라서 아팠고 곽촌의 옥수수 밭은 시들어서 슬펐다 곽촌에서 페르세포네를 만났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쪽 하늘에 365개의 별이 뜨고 어머니의 침묵 속에 붉은 석류가 한입 가득 익어 갔다 








신발을 신고 잠들었다 신발은 치마를 입은 새들을 꿈꾸었다 새들에게 날개 달린 신발을 주지 말아요 물과 바람이 가는 길에 황소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 그의 마른 입술이 대지에 입술을 대고 열매를 따 먹는다 구부리기가 힘들어요 잠든 구두를 깨우려고 애쓰지 마 잉크같이 찍힌 미간 사이는 피그말리온의 살과 뼈의 영토이다잠을 자고 싶다면 패도라를 쓰고 구두의 잠으로 오세요 당신의 잠을 맡기면 노래를 가르쳐 줄게요 고행처럼 매달리는 저 아무 뜻 없는 몸과의 불행한 동침 이제 깨끗이 지워 버려요 잠의 신 히프노스에게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의 자비를 얻어 오세요 모름지기 잠에 취한 구두 날개 달린 구두만 생각해요 토스카니 기억력을 가진 모르는 것이 더 많아 불 보듯 뻔한 둥근 발작도 긴 잠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예컨대 피그말리온과 둘만의 시간으로 사람답게 잠들어요


잠이 없는 구두는 언제나 수상하다 선방 문으로 드나드는 새의 저녁처럼 할 말이 많은 구두를 신고 다리를 접질리듯 으슥한 골목 벽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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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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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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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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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시리우스
    감동했어요

    t시인이 살아오면서 느꼈던 진한 외로움과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그리고 살아오면서 이루고 싶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시 속에 드러나 있어 읽는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울리는 내공이 느껴집니다.

    • 2023-11-23 16:10:41
    시리우스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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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물망초
    공감합니다

    '곶감'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가을이 빨갛게 익어가는 장면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며 시인의 꿈이 바구니 가득차니 나의 마음에도 꿈이 가득 찹니다.독자에게 작은 희망을 주며 따뜻한 감성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 2023-11-20 16:54:45
    물망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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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선화
    감동했어요

    '강정강가에서' 라는 시 속에는 노쇠한 우리모두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마음 속 깊이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와 오버랩시키면서 슬픔 감정을 올라오게 한다

    • 2023-11-18 12:45:09
    수선화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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