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룹(LOOP)

  • 작성일 2022-10-14
  • 조회수 1,40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룹(LOOP)




이서안






당근 마켓에 그것이 올라왔을 때 두 눈이 섬광으로 치켜떠졌다. 몇 달 동안 머리를 감을 때마다 대여섯 줄기씩 빠져나가던 긴 머리카락이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아 심장은 설레발로 콩닥거렸다. 혹여 누가 잽싸게 낚아챌까 봐 나는 엄지로 핸드폰을 초스피드로 작동시켰다.
약속 장소로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들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여러 번 실패를 맛보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나를 구원해 줄 마지막 카드인지 몰라. 역사 공원 2호선 2번 출구는 전에 와 본 적이 있어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출구 오른쪽 빌딩과 학교 뒷문 사이 좁은 길목에는 벚꽃들이 난분분했다. 눈이 부신 이 봄날에 나는 사라지는, 닳아지는, 잊혀지는 그 뭔가를 찾으러 판매자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늘진 나무 벤치에 키 작은 소년이 배낭을 메고 앉아 있었다. 볼 헤어 커트 머리에 빨간 야구점퍼 차림이었다. 나는 2번 출구 바깥을 한 번 휘둘러보고 다시 가로수를 접한 학교 담벽을 쳐다보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이 둘러싼 전나무들 사이로 호기롭게 퍼져 나왔다. 도로 맞은편에는 하얀 벚꽃 나무들이 길을 따라 풍성하게 이어졌고, 일상은 늘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하루를 펼쳐 보였다. 약속 장소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소년에게 시선이 아예 가지 않았을 거다. 하나 아무도 없었고, 그 소년뿐이었다. 기껏해야 초등 4학년 정도의 남자아이였다. 원래 약속 시간 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다시 주변을 바쁘게 훑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가슴 높이쯤 들고 나는 뚜벅뚜벅 다가갔다. “혹 당근이신가요?” 그러자 그 꼬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대뜸 눈빛으로 먼저 알은체를 하며 “영화 입장권 당근이시죠?” “네, 맞아요.” 내가 그다음 말을 못 건네자 아이는 바삐 둘러맨 배낭을 벤치 위에 놓고는 배낭의 지퍼를 쓱 열었다. 녹슨 부분이 대부분인 철제 박스가 안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겉으로 봐도 제법 묵직해 보였다. 소년은 뚜껑을 열어 입장권의 상태를 보여 주었는데 노란 고무줄로 여러 다발이 칭칭 감겨 오랜 시간을 머금고 저장돼 이제 막 빛을 쬐는 것 같았다.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냄새가 공원의 꽃 냄새에 섞여 훅 끼쳐 왔다. “3만 원이라고 했죠?”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지갑을 열어 3만 원을 건넸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돈을 받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아이를 세워 두고 묻고 싶은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입장권을 모았니?’ 하고 서둘러 묻고 싶었으나 혹여 의도하지 않은 대답이 들려올까 봐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꽃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아이가 앉은 벤치에 앉아 녹슨 철제 박스를 천천히 열어 보았다. 고무줄로 묶인 입장권을 대충 손가락으로 튕겨 봐도 한 묶음에 수백 장은 족이 넘어 보이는 입장권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의 궤적에 묵은내가 구릿하게 풍겨 왔다. 득템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러 녹슨 케이스를 지그시 끌어안아 보았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다 보면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다가도 곧잘 본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재미있는 작품들이 생긴다는 또라이 교수의 말까지 떠올랐다. 군데군데 찌그러져 녹슨 틴 케이스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벚꽃 잎들이 말간 햇살 속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같아 발걸음은 성큼 인도를 내디뎠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마음이 마냥 부풀어 올랐다.


몇 달을 시틋하게 보내다 보면 의욕이고 기대고 몽땅 사라져 버린다. 특이한 교수인 건 몇 학기 수업을 통해 익히 알았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순전히 내 열패 의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소과의 대부분 학생이 또라이라고 결론지었기에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좀 더 접근해 말하면 프렌치 감성에 절어 있는 또라이였다. 그는 유학 시절을 그리워하는지는 몰라도 프랑스 미술이나 영화에 등장한 인물의 대사들을 종종 인용했는데 이번에는 넷플리스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시즌에 꽂혀 있었다. 그는 크루아상이나 샴페인이라고 말해도 될 것을 굳이 샴퍄뉴~ 크와상~이라고 비음에 전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할 때도 최선을 다해 프랑스어로 여지없이 주절댔다. 나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달콤한 속삭임으로 들릴 뿐, 그 빠른 세기에 한글 자막을 따라 읽기 바빴다. 그가 프랑스어로 느리게 발음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불레 부 당씨?(voulez-vous danser? 나랑 춤을 출래요?)로 달달하게 다가왔다. 우리들의 눈빛을 알아챈 교수는 한국어를 프랑스어 속도로 날름 내뱉고는 스스로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여주인공과 그의 연인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졸업 작품 주제를 정했다는데⋯ 어찌 됐든 교수는 간간이 개인 전시도 여는 촉망 받는 아티스트였고, 특유의 위트가 담긴 작품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위트가 없는 우리의 작품은 점수를 받기 힘들었고 리포트조차 풍자와 재미, 위트가 남긴 신선한 작품을 매번 요구했다. 요약하자면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닳아지는, 잊혀지는 것들을 찾아 작품으로 만들라고⋯ 신선하며 재미있는 작품들을 기대한다며 그가 말을 맺자마자 나는 소재가 안고 있는 주제들이 하나도 신선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이것저것 찔러보고 있을 때 과 선배가 소개한 갤러리의 전시는 소재를 찾고도 막막했던 작품의 밀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했다. 소재를 잘 다루는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전시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나뒹구는 철 그물망을 비틀어 다른 색감과 질감으로 바꿔 놓았다. 다른 전시회에서 알루미늄 그물로 조형물을 만든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알루미늄보다 더 단단하고 원형이 가진 특징과 변형까지 살려 재해석한 작품은 재질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물질과 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할 줄 아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등을 굽혀 해머를 두드리는 남자의 전체 조형물은 실제 사람의 크기보다 커 보였다. 그물의 자연스러운 암영으로 녹슨 부분을 살려 입체감을 주었고 순간 포착을 살린 동작은 역동미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가상 인체가 툭 튀어나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기 완성된 작품이 손님들을 새롭게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한 작품이야,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어, 라고 비아냥거림을 관람 후기에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의 부피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것 같은 반짝이는 알루미늄의 메시브함은 마치 내가 두들겨 맞는 느낌마저 주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찬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차라리 급작스러운 사고로 조형물을 지지하는 지지대가 내 앞으로 엎어져 깔려 죽은 비운의 어린 아티스트라도 되고 싶었다. 소재 찾기에 급급했던 나 자신의 초라한 현실이 대비되어 나를 더욱 오그라들게 했다. 찬사와 감탄이 아닌 사람들의 안타까움이라도 내 생에 얹어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꽤 성공한 아티스트가 아닐까.
7월에 내 작품 면담 차례인데 아직 콘셉트도 미확정인데다 주제도 마찬가지니⋯. 연수에게 졸업을 유예하면 어떨까 하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아, 그럼 엄마 아빠에게는 뭐라고 둘러대나? 그러자 담당 교수에게 온갖 원망을 돌리고 싶어졌다. 다른 학교는 졸업 작품에 교수가 주제를 정해 주지 않고 자유롭게 하라고 한다는데⋯. 처음에는 주제의 폭을 좁혀 줘 좋게 여겼는데 좁아진 만큼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와 그게 딱 좋은 것만 아니었다.
당근 마켓에서 철제 박스 매물을 봤을 때 필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절박함이 가져다준 귀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녹슨 박스는 녹슬었던 시간만큼 나를 매료시켰다. 무엇보다도 그 박스 안에 수천 장의 영화 입장권은 내 주머니를 탈탈 털게 만들어도 좋을 만큼 신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쿰쿰한 입장권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당근으로 채팅 알림이 왔다.
어제 입장권 판 사람인데요. 죄송하지만 그 입장권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판매 금액의 10배로 배상하겠습니다.
입장권을 판 소년의 문자는 새벽녘에 겨우 잠든 내 의식을 깨워 괴롭혔다. 정확하게 말하면 암막 커튼 뒤로 해가 뜨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초등학생이 보낸 문자로 보기에 사뭇 어른스러웠다. 귀찮아질 게 뻔해 답장을 보내지 않고 폰을 끄려고 할 참이었다. 연이어 두 번째 채팅 알림이 왔다. 누나, 돌려주세요. 제발요. 필요 없는 줄 알고 모르고 판 거예요.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팔지를 말든가. 판다고 당근 마켓에 올릴 땐 언제고 다시 돌려달라니, 판매 금액의 10배를 더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 못지않게 내 상황 역시 절박했다. 이미 소재 기획안을 제출한 뒤라 무를 수도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깬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판매자를 누르고 거래 환불 분쟁 절차를 밟아 신고했다. 계속 채팅 알림이 올 것 같아 판매자 역시 차단했다. 소년의 사정을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당한 거래였다.
연수의 집요한 선택은 늘 주효했다. 잘 돼 가? 아니. 너는? 전에 내가 말했었지? 썩은 나무 말이야? 응. 아무래도 그걸로 밀고 나갈까 봐. 나무 둥치? 응⋯. 작품에 기선을 잡은 연수는 몸 전체가 상기돼 보였다. 썩은 나무를 옮기며 생긴 연수의 팔 근육마저 작품 같았다. 우리 집 마당에 썩은 나무로 꽉꽉 차 있잖아. 엄마 아빠가 냄새난다고 눈살을 찌푸려. 연수가 하는 말들이 도통 내 귓가에 머물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대화가 비주얼 라이징이 된다면 말들은 블러 처리가 되는 거였다. 솔직히 연수가 부러웠다. 콘셉트도 확실히 정해졌고 주제를 향해 여러 다양한 아이디어로 하나하나 완성을 향해 갈 게 분명했다. 거기에 위트만을 한 방울 떨어트려 준다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미 연수는 마 쉐리(ma chérie)로 불리는 교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3학년 과제 때도 칭찬을 도맡아 받았다. 문득 원룸에 움직이기도 불편하게 차지하고 있는 박스 안에 갇힌 소품들이 떠올랐다. 이것저것 손대다 박스에 갇히고 만, 켜켜이 일그러져 쌓인 박스에 담긴 작품들이 빛을 볼 수나 있을까. 담당 교수는 주제를 정해 설명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러 번 바뀐 소재에 대해 조금은 우려를 드러냈다. “우리 피차 알잖아, 뛰어넘지 못할 바에는 시도를 안 하는 게 낫지?” 담뱃갑 소재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 금연과 환경문제를 연상하게 만든다고- 마땅치 않아, 라는 말만 거듭했다. 교수의 고개는 연신 갸웃거렸다. 오늘은 타깃이 나구나. 적절한 모티브를 활용 못할 때 비판을 즐겨 하는 교수의 입을 떼는 데 한몫거든 셈이었다. 재료 소재부터 아웃되다 보니 가만히 서 있는 데도 두 발은 영화 〈겟 아웃〉의 주인공처럼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걸터듬다 보면 반드시 찾게 돼 있어. 그 과정은 꼭 필요한 거야.
그래도 교수는 자신의 교수다움을 뽐내고 싶었는지 대화의 끝에 불쑥 마지막 말을 집어넣었다. 볼품없었던 누더기 천에 꽤 볼만한 천을 기워 넣은 듯 어색했지만 자꾸만 마지막 말을 곱씹게 되었다.


딱히 입장권으로 당장 무엇을 할지 정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엄연히 존재했었던 그 뭔가에 나는 매료되었다고 봐야 했다. 녹슨 철제 상자에는 묵은 시간의 냄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원룸 바닥에 통을 탈탈 털어 가며 퍼질러 놓으니 참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입장권과 - 제목, 연, 시, 금액이 기재된 - 발행 숫자들이 신기하게 시간을 돌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입장권은 몇천 장이 아니라 족히 만 장은 넘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입장권을 모은 걸까? 아니 그리고 왜 이걸 버리지 않고 모아 둔 것일까? 우표 수집은 발행된 곳과 날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니 오래 묵힐수록 돈이 되지만 철 지난 영화 티켓은 딱히 경매로 팔리지도 않는데 굳이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간들이 압축되어 수많은 입장권으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대부분의 티켓은 구겨져 있었고 인쇄된 부분들이 번져 있기도 했다. 입장권 중 몇백 장은 관람한 티켓이었다. 다른 티켓들과의 공통점이라면 연도와 시간대, 영화 제목이 같은 티켓들이 각각 2장씩이었다. 즉 한 사람이 두 장씩 구입했던지 아니면 두 사람이 한 장씩 구입했다는 말인데 티켓을 구입한 사람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다면 지금의 이 티켓들은 마땅히 사용되어야 했다. 몇백 장을 제외한 티켓들은 뜯긴 흔적들이 거의 없었다. 영화 티켓을 샀으나 영화관에 들어가지 않는 영화마니아? 말이 되지 않았다.
12평의 원룸에는 이제 더 쟁여 놓을 물건들이 없을 정도로 꽉 차 버렸다. 창고나 작업실이 따로 없기에 이 모든 공간이 작업실이고 창고였다. 호기심을 갖고 당근 마켓이나 을지로 주위 상가를 찾아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았지만 그렇다고 이 쌓인 물건들이 모두 작품 소재가 되지는 않았다. 앞에 몇 번을 실패하고 던져 버린 결과물이 구석에서 나에게 버림당한 서러움을 안고 째려보는 듯했다. 짧게, 깔끔하게, 죽을 수 있었으나 어쩌다 운이 없어 나에게 걸려들어 구질구질한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고통스럽게 수명을 연명하는 것 같았다. 돈이 없기에 스위스로 보내 안락사를 시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좁아터진 이 방에 갇혀 전시에 나갈 수 없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그럼에도 죽을 수도 없는, 작품이 된 거였다. 이번 입장권은 5번째로 시도하는 작품이었다. 이 친구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나의 졸업은 유예되고 또 하나의 죽을 수 없는 작품을 만들게 되는 꼴이었다.
막상 만 장이 넘는 입장권을 원룸 바닥에 펼쳐놓자 펼쳐 놓은 입장권 수보다 더 큰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그 소년을 만날 때만 해도, 이 녹슨 철제 박스를 가방에 넣어 올 때만 해도, 여러 아이디어가 솟구쳤지만, 무더기로 펼쳐 놓자 구터분한 냄새에 어찌할 바 모르는 내가 입장권과 세트로 퍼질러 있었다. 소년이 정확한 장수를 모른다고 해서 일단 손으로 세어 보기도 했다. 암산이 자꾸 버벅대자 어깨와 손가락에 이어 뒷목마저 아파졌다. 그 소년이 세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이 그냥 흘린 말이 아니었다. 두 손에 입장권을 가득 담아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단순히 구터분한 냄새라고 치부했지만 종이마다 야릇한 냄새들이 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불빛에 반사를 시켜 보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며 낙엽처럼 수천 장의 입장권을 뿌려 보았다. 아래서 위로 뿌려 보고 식탁 위에 올라가 뿌려 보았다. 그때 분분히 떨어지는 입장권 사이로 메케한 먼지가 흐릿한 영상처럼 코로 들어왔다.


모를 일이었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중에 티켓이 모자라거나 또 곁들일 소재가 생겨날 수도 있었기에 나는 당근 마켓에 혹시나 싶어 다시 ‘영화’라고 검색을 시도해 봤다. 두 장에 9천 원. 지금 상영하는 영화 티켓들만 계속 넘기던 중에 저번에 산 것과 비슷한 느낌의 티켓 더미가 담겨 있는 틴 케이스가 있었다. 설마 같은 판매자? 아닐 거야. 확인해 보니 거래할 동네도, 이름도, 판매한 상품의 기록도 달랐다. 판매한 상품이라고 해 봤자 고작 나눔 2개였다. 판매자에게 채팅을 걸어 보았다. 몇 번의 조회는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대기자가 없었고 나는 바로 거래할 수 있었다.


효창공원 앞 3번 출구는 탁 트여 있었다. 주변의 복잡한 사거리들과는 다르게 조금 한산한 느낌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키 큰 노인에게 시선이 갔다. 그의 차림은 다른 노인들과 다르게 밤색 중절모에 베이지색 계열의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요새 어르신들은 패션 감각도 남다르구나. 나중에 혹시 소재로 쓰일까 싶어 소리가 안 나게 살짝 어르신의 모습을 폰으로 찍었다.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베이지색 셋업 안에 연한 블루의 셔츠를 매치했다. 땀에 전 매쉬한 등산복 소재의 옷을 입고 구부정한 허리로 팔자걸음을 걸으며 큰 소리로 얘기하는 일반적인 노인들과는 좀 달라 보였다. 어르신의 손에 시선을 옮겼을 때 그의 손에 들고 있는 틴 케이스가 보였다. 패션 감각이 좋은 어르신이 판매자였다니! 이따가 거래 끝나면 옷을 정말 잘 입으셨다고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어르신에게 다가가 물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익숙하면서도 달큼한 냄새가 훅 끼쳤다.
“혹시 당근 마켓 영화 티켓 판매자 맞으신가요?” 노인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잠시만 기다려 보겠어요? 하더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슬쩍 통화 내용을 들으니 누군가에게 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전화를 끊자 엘리베이터 반대편으로부터 소년이 나타났다. 처음 티켓을 샀던 그 바가지 머리의 소년이었다. “할아버지, 저 누나 맞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쟤가 여기에 나타난 거지? 분명 다른 판매자였고 처음 티켓을 샀던 동네와는 다른 곳이었다.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뒤로 빼는 나를 향해 노인은 “아가씨, 미안해요, 입장권 좀 돌려줘요. 도통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들리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작정하고 완전히 속인 것인가? 영화 티켓을 돌려받으려고? 내가 낚인 것인가? 그래도 오해를 할 여지가 있을 수 있으니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들고 계신 틴 케이스 안에 영화 티켓은 없는 건가요?” 불쑥 소년이 끼어들었다. “누나, 원래 파는 게 아닌데 제가 모르고 그랬어요. 죄송해요, 티켓 좀 돌려주세요. 여기 돈도 있어요. 다시 돌려드릴게요.”
효창공원까지 오는 길이 그리 수고스럽지는 않았다. 한 번의 환승이었고 환승하는 구간도 길지 않아 많이 걷지도 않았다. 출구로 나왔을 때 불어오는 바람도 선선했고 온도도 적당했다. 굳이 여기까지 시간을 내어 오기가 힘들 만큼 바쁜 하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를 속인 것에 대한 분노와 이 사람들의 무례함이 뒤섞여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노인네가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나이가 저렇게 어린애가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이 사람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저한테 사기 치셨네요. 당근 마켓에 신고할 거예요. 다신 이러한 일로 불러내지 마세요.” 자리를 뜨려고 하자 노인은 다짜고짜 거세게 내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놓으세요, 어르신, 경찰 부릅니다, 지금.” “아가씨, 자그마치 30년이 넘도록 모은 거예요, 부탁이니까 제발 돌려줘요” 오가던 사람들이 주위에 멈춰 서서 여기를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 끝에 경의선 숲길 길목에 사람들이 많았다. 저 안으로 휩쓸려 사라지면 나를 찾지 못할 터였다.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때 도로 앞 신호가 바뀌는 게 보였다. 노인의 팔을 뿌리치고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너 숲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화를 신고 오는 게 아니었다. 밑창이 평평한 신발을 신고 당근 거래를 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발바닥이 얼얼하게 아파져 왔다. 얼마쯤 뛰었을까. 마포역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보였다.


내 경우에는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편이었다. 며칠 전 진우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는데도 신호는 가도 받지 않았다. 조형 예술대 행정실을 지나가는데 맞은편에 진우 선배와 잘 아는 오 조교가 왼손을 흔들며 웃고 다가왔다. 졸업 작품은 잘 돼 가? 아뇨, 방향도 제대로 못 잡았어요. 이러다 전시 기간에 제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심정이라면 딱 내년으로 유예하고 싶어요. 그러자 오 선배는 내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치며 다들 그렇게 하다가 제출하게 돼, 라며 눈웃음으로 격려했다. 가볍게 목례하고 스쳐 지나는데 오 조교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진우, 프랑스로 유학 간 건 알고 있지? 몰랐다는 게 창피해 엉겁결에 아, 예, 라고 둘러대며 복도를 멍때리며 걸어 나왔다. 전화가 안 된 것도, 문자가 안 된 것도, 그럼 유학? 폰을 꺼내 최근 통화 내역 스크롤을 급하게 내려보았다. 마지막 전화를 건 지가 2주 전이었다. 선배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만 남기기엔 머쓱해 많이 바쁘시죠?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라는 문자를 같이 남겼다. 그날엔 그랬다. 바쁘겠지, 라는 생각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구실이 되었다. 아니 사실, 그편이 더 편했다. 얼마나 작품에 몰두하기에 전화 오는 것도 모를 수 있는지, 작품을 대하는 선배의 몰입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했다. 어쩌다 학교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선배가 작업 중인 작품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엔 과 동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선배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도 내겐 소소한 행복이었다. 선배의 오며 가며 듣던 작품이 드디어 완성되어 전시를 열게 되었을 때 풍성한 꽃다발을 안고 전시장으로 걸어가던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해 축하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선배의 작품에 머무는 시간에 같이 머물고도 싶었다. 이렇게 유학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듣게 될 줄은⋯. 더 기분이 잡치는 건 인스타그램에 내 계정이 차단되어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손절 당한 셈? 물론 선배와 내가 섬 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차단당할 사이도 아니지 않나? 먼 거리감보다 더 쓰라린 건 그의 마음에 텅 비어 버린, 내가 머물 수 없는 공간마저 차단당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와 나의 관계가 차단이라는 사실에 자글자글 분노마저 끓어올랐다.
너는 재능이 많아,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온 말이었다. 어쩌면 그 말에 미혹돼 살아온 나날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재능이 없다는 말보다는 낫게 들렸기에 그 문장을 심히 확대하거나 과장하며 스스로 갇힌 시간이었을까. 모든 게 아리송하다. 재능이 많은데 재능과는 무관한 작품들이 완성돼 차곡차곡 쌓여 갔다. 졸업 전에 탄탄한 경력과 매 전시마다 각광을 받는 작품들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하는 은근한 부러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비슷비슷한 작품들인데 어떤 차이인지 몰라도 상을 받거나 높은 평가를 받는 선배들과 동기들이 눈에 늘어 가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진우 선배는 여러 번 주목받자 사람들과 손절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 버렸다. 연수의 이번 졸업 작품은 몇몇 갤러리와 교수에게 이미 낙점이 되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빈둥빈둥 손 놓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몇몇 작품전과 갤러리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 보기도 하고, 나도 저 정도쯤은 할 수 있어, 하고 달려들어도 보았다. 그런데 늘 미묘한 차이가 따라붙었다.
정당하게 물권을 소유했는데도 부채감이 떠나가지 않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노인의 간청을 뿌리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나도 썩 편한 것만 아니었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길래 공원까지 나를 불러내 모의해서라도 찾으려고 한 걸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었다면 처음부터 관리를 잘하던가. 몇십 년을 모았다는 노인의 말이 짐짓 까끌거렸다. 내 방에서 자유롭게 쏟아지던 영화 입장권들이 갑자기 낱장 하나하나 쇠고랑을 찬 듯 무겁게 느껴졌다. 소재 하나 찾으려고 이러한 일을 겪은 나 자신이 우습게도 느껴졌다. 다른 동기들도 소재 찾는다고 이러한 일들을 겪는 것일까. 아니면 쪽팔려서 말을 안 하는 것일까. 새벽이 오고 있었다. 몇 시간이라도 자야 했다. 암막 커튼을 다시 내렸다.


딱히 뾰족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소재 저 소재를 접목하면 할수록 정작 손에 잡혀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몇 달 작업실로 쓸 화실로 작업 소재들을 옮겼어도 집중도는 여전히 떨어졌다. 몇십 년을 모았다는 입장권에는 몇십 년만큼의 뭔가가 나를 자꾸 끌어당겼다.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얻으러 시도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디지털 매체를 접목시키는 것은 색다를 게 없었다. 여러 작품에서 응용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참신하면서도 색다른 위트가 필요했다.
23살의 나는 부푼 기대만큼 현실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졸업 작품 전시에서 그동안 숨겨 놓은 내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여야 하는데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손대다 전시일은 5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수천 장이 넘는 티켓을 어떤 것과 결합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티켓을 일일이 스캔해 종이를 빠르게 넘겨 그림이 움직이듯이 보이는 스토리 북처럼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석고의 모형에 이 티켓들을 같이 넣어 조각을 해야 할까. 당시의 개봉한 영화 타이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찍힌 날짜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방점을 찍듯 이거다 싶은 게 필요했다. 귀에 확 꽂히는 대단한 히트 곡은 아니어도 적어도 전주만으로 한 번의 힐끗한 시선을 가져올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더 이상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티켓을 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로 차 버렸다. 단지 종잇조각일 뿐이었다. 종이에다가 날짜를, 영화 제목을, 시간을, 그려 넣은 거였다.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는 그런저런 책들과 다름없는 구겨진 종이⋯. 하지만 왜? 의문을 조금이나마 덜려면 그 노인이 왜 입장권을 그토록 모았는지, 그의 서사가 필요했다. 나는 소년에게 차단한 계정을 풀었다. 한 달이 다 돼 갈 즈음, 나는 소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소년이 가르쳐 준 장소는 P 극장 앞이었다. 할아버지를 거기 가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는데 혹여 소스를 얻으러 갔다가 이 노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나는 거듭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 시간에 노인이 거기서 무얼 하는지는 소년은 일러 주지 않았다. 지난번 입장권을 돌려주지 않아 그 노인은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게 뻔했다. 노인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내 졸업 작품 얘기를 듣고 더 성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자신이 애써 모은 입장권을 기껏 졸업 작품에 쓴다고 하면 말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마음에 저녁 공기마저 답답하게 여겨졌다. 극장 옆 골목길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들이 머리카락과 얼굴에 배어들었다. 이 극장을 한두 번 왔던 기억이 났다. 과 동기들 몇 명과 몇 년 전에 〈토이 스토리 4〉를 보러 왔었는데 지하철로 바로 연결돼 편리했었다. 또 가족들과 근처에 밥을 먹고 영화를 보러 왔을 때 요즘엔 잘 볼 수 없는 네온사인 간판도 꽤 그럴싸하게 눈에 띄었었다. 극장 지하에서 유명 배우들의 친필 사인을 일일이 확인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바로 다가가서 내 필요를 설명하기가 그래서 일단 나는 그의 저녁 행동을 지켜볼 필요를 느꼈다. 저녁 7시가 넘어갔지만 주변의 네온사인 불빛과 맞물려 극장 앞은 대낮처럼 밝았다. 나는 단박에 그 노인을 찾았다. 큰 키에 거북목을 한 노인이 무대에서 마치 공연을 하고 있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노인은 극장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삐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마임 연기를 펼치며 돈을 버는 것인 줄 알았다. 주위는 온통 조명들이었고 영화관 앞은 광장처럼 펼쳐져 있었기에 그런 미시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극장 광장 옆 골목길에서 오징어와 쥐포 굽는 냄새가 밤공기와 뒤섞여 녹진했다. 그 중간에 토스터 굽는 달짝지근한 마가린 냄새가 저녁 어스름을 타고 내 코를 자극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극장으로 연결된 출구인데 노인은 지상의 극장 상가 광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모를 일이었다. 나조차도 이 저녁에 뭐 얻을 게 있다고 난데없는 일에 나섰는지 슬슬 지겨워졌다. 그는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사람이 나타나면 뭔가 곧 액션을 취했다. 나는 극장과 맞물려 튀어나온 옆 건물 카페 2층 창가에서 그를 관찰했다.
시간이 갈수록 노인의 행동은 선뜩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 혼자 오는 여자를 발견해 극장 상가 출입구 쪽으로 향해 가는 여자에게 달려가 뭐라고 말을 건네면 무시를 당하거나 몇 마디로 거절하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점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잘못 왔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노인에게 내가 무슨 사연을 듣자고 왔다는 말인가, 자조 섞인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 맥 빠진 것은 어떤 여자가 바삐 뛰어와 극장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노인은 거침없이 다가가 여자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자 뒤이어 따라온 남자가 노인을 향해 “할아버지, 곱게 늙어요!”라고 면박을 주는 소리가 카페까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점점 혐오감이 차올랐다. 성추행 같은 뉴스 기사들이 오버랩된 건 노인의 타깃이 대개 여성이었고, 혼자 영화를 보러 오는 여성이 대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오는 여자들을 발견하기는 드물었다. 한 달 전에 공원에서 내 팔목을 붙잡던 우악스러운 손이 떠올라 소름마저 끼쳤다. 그때 바로 신고했어야 했는데⋯. 추잡한 짓거리를 보자니 내가 낯이 뜨거워졌다. 이런 인간에게 졸업 작품을 부탁하려고 나온 내가 한심해졌다.
더 있을 필요가 없겠다고 일어서려는 찰나에 노인은 어떤 사내에게 다가갔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나 뭔가를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그 사내가 노인의 팔을 뿌리치자 입장권 크기의 종이 두 장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장면이 시야로 들어왔다. 무릎을 꿇은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그 종이를 주웠는데 아뿔싸, 영화 입장권이었다. 극장 앞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거절당한 그의 굽혀진 등에 어둠처럼 강한 외로움이 서성거렸다. 그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곧 영화가 상영될 시간인지 몰라도 어느 누구에게든 입장표를 들이밀며 막무가내로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보였다. 마지막에는 어떤 청년이었는데 그 청년도 노인을 무시하고 지하에 있는 극장으로 내려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시 거절당하는 노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국에 그가 극장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는 밤새 서성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의 기억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모를지도 모른다는 억측마저 들었다. 이 극장은 오래전부터 개축을 거듭했으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연극을 보고 온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사실 보고 온 연극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주인공은 말쑥한 차림의 키가 큰 노인이며 손에는 티켓 두 장을 들고 서성인다. 노인의 상대역들은 전부 엑스트라이다. 엑스트라 1, 엑스트라 2. 짝을 지은 엑스트라들은 노인을 흘끔 보며 지나간다. 혹은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거지? 하는 표정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여자 엑스트라 1은 도망가기에 바쁘다. 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남자 엑스트라 2는 노인네가 곱게 늙을 것이지 쌍욕을 퍼붓는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엑스트라 여자 3은 노망났네, 를 재차 말하며 혀를 차며 지나간다. 등산복에 절은 엑스트라 남자 4는 노인을 힘으로 뿌리치며 땅에 침을 뱉는다. 카페에서 흘러나왔던 이름 모를 재즈 음악과 노인의 거절당하는 행동들이 겹쳐졌다.
케이스 안에는 구겨진 입장권 수천 장이 널브러져 있다. 노인의 움켜쥔 손에서 거절당한 입장권들이었다. 몇십 년을 고스란히 거절당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손에 움켜쥐었던 티켓들이 지금 내 원룸 바닥을 뒤덮고 있다. 아니, 그가 한 번쯤은 손에 쥐었던 시간들이다. 갑자기 티켓에 적혀 있던 날짜들이 우르르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다. 삼십 년이란 시간은 내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내가 존재하기도 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으로부터 노인은 극장 앞을 서성였다는 것인가! 3만 원에⋯ 그 시간들을 사 올 순 없었다. 3만 원에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노인을 만나고 온 뒤의 부채감은 결국 시간의 값이었다.


찢지 않고 뭉개지 않고 원형을 보존해서 살릴 수 있는, 그 시대의 존재성을 살리고 싶어. 닳아지는 사라지는 잊혀지는 이 모든 것을 살리는 게 관건이야. 조금 자신감이 붙은 나는 연수에게 작품 취지를 설명했다. 연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사가 주제에 와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스토리를 어떻게 구현할지가 문제였다.


작품을 시작하면서 나는 노인이 매번 거절당했던 극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밤거리에는 레트로 풍의 가요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극장 앞은 늘 그랬듯 조명이 눈부시고 화려했다. 2층의 금은방이 상가의 조명과 어울려 번쩍였다. 노인이 없는 거리는 북적거렸지만 그가 없는 빈자리가 밤의 여백을 따라 휘휘했다. 다시 생각의 꼬리는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그가 왜 입장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간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수도 없는 시간을 거절당했고 수많은 사람을 스쳐 보냈다. 노인이 간청했던 엑스트라 중에는 살아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만큼 긴 시간이었다. 노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극장 속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간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떤 시점부터는 찢어진 티켓보다 온전한 두 장의 티켓이 수두룩했다. 노인이 거절당한 시간이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시간,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그때가 노인의 기억 속에서는 매일 오롯이 되살아나게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던 것일까. 내 눈앞에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입장권을 손에 쥔 젊은 남녀의 표정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두 연인이 눈이 시리도록 함빡 웃으며 그렇게 지나가고 지나갔다.


얇은 철판보다는 알루미늄판에 광석을 입힌 공간 지지대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체각을 따라 몇천 장의 입장권을 카드 섹션처럼 입체 효과를 살리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입장권마다 녹은 마가린에 입수를 시켰다가 건져 내기를 반복해야 했다. 마가린만으로 향이 부족한 것 같아 풍미를 더한 버터도 겸해 향을 더했다. 사실 노인에게서 풍긴 향이 버터 향인지 마가린 향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 작품의 색다른 위트라면 후각이었다. 길거리 토스터에서 나는 냄새는 싼 마가린이 대부분이었다. 안타까운 건 내가 맡은 향과 비슷해도 정확한 냄새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보면 시대를 아우르는 영화 입장권이지만 멀리서 보면 순간의 반짝임을 담고 싶었다. 입장권의 색깔이 다양했기에 빛이 반사되는 결정들에 입체적 음영을 포착해 담아냈다. 천장에 매단 기다란 두 줄을 따라 2미터 50센티미터의 다이아몬드 입체각을 세웠다. 아래 좌우는 거치대를 밑에서 쏘듯이 세워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는 팬을 타이머에 맞춰 돌아가게 했다. 입장권이 바람에 산들거리면 그럴 때마다 마가린의 풍미가 슬쩍슬쩍 풍겨 나왔다가 스러졌다. 부피를 떠나 광석의 무게가 흐르는 시간의 무게감을 대변했다. 입체각의 맨 아래에는 핸드폰을 붙였다. LOOP이라고 적힌 글자가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때로는 우리를 갇힌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 자리를 계속 헛돌다 보면 어느덧 선명했던 기억엔 반짝거리는 필터가 씌워진다.
노인은 오늘도 여지없이 거절당하는 마임을 계속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금요일과 토요일에 극장을 찾았다. 거북목을 한 그가 입장권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있었다. 네온사인 간판에는 〈여인의 향기〉 재방영을 알리는 포스터가 반짝였다. 영화를 검색하니 생각보다 별점이 높았다. 웬만한 고전 영화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저녁 첫 상영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여지없이 그는 나에게 극장표를 내밀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걸어가는 그 순간만큼은 왜인지 모르게 슬로우를 건 것처럼, 노인의 모습이 천천히 다가왔다. 여지없이 그는 나에게 극장표를 내밀었다.
아가씨, 티켓이 두 장인데 영화 같이 보실래요?
네. 같이 보죠. 입장표 주실래요?
네온사인의 불빛이 노인의 눈과 내 눈을 동시에 통과했다. 두 장의 입장권을 쥔 노인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한 장의 입장권만을 손에 쥔 채 남은 한 장의 입장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노인과 같이 극장 속으로 사라졌다.











이서안
작가소개 / 이서안

2017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과녁』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목포문학상 『풍경』 수상,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당선, 소설집 『밤의 연두』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가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