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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무인텔

  • 작성일 2023-10-18
  • 조회수 428

스타 무인텔

이아타

 

   몸통과 연결된 밧줄의 걸림쇠를 풀면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연회색을 지나 검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건 순간이었다. 검은 하늘이 크고 묵직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머리에 쓴 랜턴에서 밝은 불빛이 퍼져서 일몰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했다. 잠시만 더 하자고 생각한 게 한참이 지났다. 광케이블선 인입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신도시 아파트 한 블록이 그의 몫이고 조만간 일을 끝내야 했다. 다음 주부터 입주가 시작되고 주말에 비 예고가 있어서 늦장을 부릴 수도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여섯 시에서 십오 분이 지났다. 관리실에서 독촉 전화가 이내 걸려 올 것이다. 마무리 설비를 점검하는 인부들과 인테리어 작업 중인 사람들은 저녁 여섯 시 전에 이곳을 나가야 했다. 

   진성은 높은 전신주에서 안전장치를 하나씩 거두며 천천히 내려왔다. 어두울 때는 신중해야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발밑이 어두웠다. 밑창이 두툼한 작업화를 신은 발바닥이 사다리 계단을 디뎌도 허공을 밟는 기분이었다. 알루미늄 계단을 한 칸 내려올 때마다 어둠이 한 칸씩 깊어지는 듯했다. 지나간 불운이 그렇듯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사이에. 

   땅에 내려서자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시고 안전모의 랜턴 빛을 바닥에 비췄다. 벗겨진 피복과 장비들이 말라비틀어진 벌레와 짐승의 가죽 같았다. 그다지 목이 마르진 않았다. 처음 일을 배울 때 선배 기사를 따라 작업을 시작하고 마칠 때 긴장하면 물을 마시던 게 습관이 돼 버렸다. 해가 저물면서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지나갔다. 사람들이 봄이라고 말해도 봄은 아직 멀었다.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노래의 후렴구 같은 게 봄이었다. 앞 소절은 긴가민가하고 중간이 불쑥 생각났다가 후렴구만 선명한 노래, 요즘의 봄이 그랬다. 

   혼자가 된 후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무얼 잘못했나. 한순간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은 있을까. 부지중에 입에 붙은 후렴구처럼 처량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운전 중에도 밥을 먹다가도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떠올랐다. 진득한 후렴구를 털어 내려고 그는 주말과 야간에 인터넷 강의를 듣고 학원에 다녔다. 사람들이 유망 직종이라고 말하는 것을 수강해서 수업 일수를 채우고 때가 되면 시험을 치렀다. 어디에 쓰일지 막연해도 틈틈이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성향을 발견했다. 자신은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가능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종일 혼자서 말없이 손을 사용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성향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내면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처음엔 목공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전기 기사 자격증반에서 알게 된 사람에게 광케이블 설치 기사에 대해 듣고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내일은 광케이블 인입을 끝내고 통신단자함으로 포설까지 마쳐야 했다. 장갑을 벗고 광케이블 피복 조각들을 그러모으고 장비들을 챙겼다. 종일 손에 힘을 주고 일해서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렸다. 어스름한 아파트 단지 곳곳에 센서 등이 문득문득 켜졌다. 밤하늘에 간간이 박힌 별처럼 외로움을 밝히는 불빛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 사이로 사람이 지나간 자취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인부들이나 실내 공사를 끝낸 차량이 인공지능에 포착된 거였다. 그와 동료 설치 기사들이 어제부터 이틀 동안 작업한 결과였다. 폐쇄회로 영상과 연결돼 움직임이 포착되면 작동하는 시스템이었다. U시티를 표방하는 신도시는 삼만 세대로 십만 명 가까운 인구가 유입된다고 했다. 유비쿼터스,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한다.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아파트 단지 내 모든 사람과 일상이 통신망과 사물 인터넷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였다. 흙과 나무와 풀밖에 없던 시골 변두리 땅이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해서 최첨단 도시가 들어서는 거였다. 

   건너 단지에서 작업 중인 후배가 광파워메터 측정 사진을 보내왔다. 어둠 속에 초록 불빛이 선명했다. 한 달 전부터 작업에 투입된 후배는 신기하고 놀랍다고 사진 아래 메시지를 남겼다. 진성 역시 그랬다. 그동안 기존 아파트 단지와 공장이나 관공서 등에 광케이블 작업을 수없이 했지만 새로 건설된 신도시 단지는 그도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람들이 연결될 통신망을 설치하는 작업은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생명체가 살지 않는 척박한 화성에 감자를 심는 기분이었다. 

   장비가 든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었다. 외부 출입 차량의 주차장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다. 길을 따라 가로등이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땀이 식으면서 으슬으슬 추웠다. 세찬 바람이 공동 사이를 맴돌며 쇳소리를 내었다. 전자 상가와 가구 단지 광고 따위의 현수막들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뒷좌석에 가방을 부리고 운전석에 들어서자 콧속이 매캐했다. 휴지로 콧속을 닦자 흙과 돌가루가 뒤섞여 새까맣게 묻어 나왔다. 원래 이 땅이 흙과 돌이었으니 바람에 떠다니는 것은 당연했다. 차량 거울에 비친 얼굴도 거무튀튀했다. 관리실에서 보낸 독촉 문자를 보고 그는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서둘러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는 일몰의 저녁 하늘처럼 애잔해 보였다. 해가 지면 슬퍼지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진성의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래서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잔소리도 빼먹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인생의 회한을 옆으로 밀어 두고 자식 걱정으로 저녁의 공허를 채우는 어머니를 보며 진성은 도돌이표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걱정과 공허가 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인생.

   새로 닦인 넓은 도로로 몇 대의 자동차와 트럭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지 신호에 멈춘 그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를 멀거니 바라봤다. 마천루에 브랜드를 알리는 불빛만 군데군데 총명하게 빛날 뿐 며칠 후의 신도시는 희끄무레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삼 년 전까지 이곳은 그렇고 그런 야트막한 야산과 고추와 마늘 따위를 기르던 밭이 거의 전부인 땅이었다. 그에게도 이 땅이 오랫동안 그런 곳이어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손수 광케이블 작업을 하고 있어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평선 멀리까지 번쩍거리는 브랜드 불빛마저도 검고 붉은 땅이 빛을 내뿜는 듯 보였다. 

   재개발로 신도시가 들어설 거라는 소문과 기대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막연하게 기다리다 지친 노인들이 논밭을 팔기 시작할 무렵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언제까지고 결혼도 못 할 것 같던 사람의 청첩장을 손에 쥔 듯 눈을 깜빡이며 논밭을 건설회사에 판 계약서를 품에 안은 사람들은 돈을 쓰러 다녔다. 진성의 이모부가 그랬다. 평생 가져 보지 못한 큰돈이 생기자 이모부는 생기가 돌면서 말수가 늘었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다녔다. 사 년이 지난 그의 이혼을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호기심과 끈끈한 정이 넘치는 친척들은 그의 어머니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아들의 이혼 사유가 며느리의 외도이거나 아들이 불완전한 남자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진실을 묻는 어머니에게 그들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그는 단 한마디만 했다. 이후로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던 친척 모임에 일절 나가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아들은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어려웠다. 더구나 통 말이 없는 아들은 그녀와 연결돼 있으면서 연결돼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곧잘 하는 표현으로 내 속에서 나왔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사는 소도시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량이 몰리며 체증이 시작됐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이 몰릴 시각이었다. 오늘보다 삼십 분 일찍 마친 어제는 상습 정체 구간인 이곳을 수월하게 통과했으나 오늘은 꽤 막힐 것 같았다. 시야 멀리까지 늘어선 차량의 빨간 꼬리 불빛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실시간 내비게이션도 도착 예정 시간을 두 시간 정도로 예측했다. 그는 인근 도로 사정에 밝았고 이럴 땐 판단이 빨라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진성은 바로 위 차선에서 국도로 길을 꺾었다. 한적한 길을 따라가다 천륜산 아래 동네에서 저녁을 때우고 갈 생각이었다. 예전에 자주 갔던 식당 두어 개도 생각났다. 주말이면 아내와 천륜산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산 아래에서 오리고기나 순대국밥에 시큼한 막걸리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올 때 아내가 운전했고 그는 조금 취한 눈으로 밋밋한 산자락과 심심한 시골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삶이 나쁘지 않던 때였다. 아마도 아내가 곁에 있어서였을 것이다. 

   국도로 접어들자 저녁의 어스름이 균질하게 퍼져 나갔다. 드문드문 사료 공장과 화학비료 공장 따위가 보일 뿐, 시야에 둥그스름한 산자락과 뭐가 자라는지 알 수 없는 밭들이 어둠을 흡수하고 있었다. 조금 열어 놓은 창틈으로 인근 양계장에서 날아오는 퀴퀴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차창을 닫고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퇴근할 때면 거의 매일 틀어 놓는 올드 팝 채널이 지직거렸다. 주파수 자동 맞춤 버튼을 누르자 몇 칸을 건너뛰어 뉴스 채널로 바뀌었다. 대통령 소식과 정치권 뉴스가 흘러나왔다. 분명 처음 듣는 내용인데 기시감이 들었다. 웅얼웅얼 흐르는 정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뻔한 창밖 시골 모습과 수없이 되풀이되는 세상살이가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자연현상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주식 시황과 스포츠 뉴스 다음에 지역 뉴스 보도가 잠깐 이어졌다. 비 소식이 궁금해서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사리라는 단어가 들렸다. 오늘이 사리이고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해일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해안가 저지대 침수를 우려하는 보도였다. 달과 지구와 태양은 일직선이다. 어릴 때 무턱대고 외운 한 문장이 기억 저 아래에서 기어올랐다. 달과 태양으로 받는 인력. 조석 간만의 차. 사리의 반대는 조금이다. 이곳에서 차로 이십 분 남짓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게 진성에겐 새로운 소식 같았다. 어릴 때 해수욕도 하고 스무 살 무렵엔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고 몇몇 여자들과 데이트를 하던 곳. 그곳을 몇 년 동안 가지도 않았고 떠올리지도 않았다. 가까이 있어도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파도가 높고 거친 바다를 조만간 보고 싶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인 식당에 가까웠음을 알려 주었다. 오가는 차량이 뚝 끊긴 국도변은 한순간 깜깜했다. 비낀 하늘에 작은 보름달이 보였다. 일부러 오려 붙인 듯 샛노랗고 동그란 달이었다. 깜깜한 시야의 끝에 흰 건물과 역시나 샛노란 불빛이 기시감으로 번쩍였다. 스타무인텔. 한적한 국도변에 있는 무인텔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사리나 조금이라는 말이 그렇듯 스타무인텔은 해묵은 기억 어딘가에 걸쳐 있다가 몸통을 감은 밧줄처럼 단단하게 그를 붙잡았다. 진성은 처음 목적지가 무인텔이었다는 듯 작은 돌이 깔린 무인텔 주차장으로 곧장 들어섰다.



   그는 꼭대기 층의 방을 결제하고 기계에서 미끄러져 나온 카드키를 받았다. 서른 개의 방은 모두 비어 있었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로비를 둘러보니 진회색 소파와 크고 작은 녹색 식물들이 보였다. 그곳에 놓인 지 얼마 안 된 새것 같았다. 아마도 이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모양이었다. 소파 옆 테이블에 커피머신이 있었고 비닐도 뜯지 않은 종이컵으로 미루어 오늘 이곳은 방문자가 없던 모양이었다. 벽 모서리에 놓인 자판기로 가서 신용카드를 넣고 맥주 캔 두 개를 눌렀다. 종일 흙과 돌가루를 마셔서 목구멍이 답답했다. 소파에 앉아 캔 하나를 따서 마셨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고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켜자 포만감이 들었다. 불필요한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다는 게 무인텔의 좋은 점이었다. 이 시간 외진 국도변의 별모텔에 사람이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무인의 공간에 홀로 있다는 건,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을 거부할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뭔가 홀가분했다. 캄캄한 마음속에 별이 쑥 들어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진성은 두세 달에 한 번 무인텔을 이용했다. 자신의 인간성을 위한 작은 의식이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며 작업하는 일이 잦은 그에겐 도시 외곽이나 국도변에 무인텔은 쉽게 눈에 띄었다. 정해진 날짜는 없었고 굳이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차를 몰다가 눈에 띄는 무인텔이 보이고 그러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그저 차를 주차장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혼자 보낼 거라서 누군가와 의논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검은색 카드키 앞뒤를 돌려보곤 맥주 캔 하나를 가방에 넣고 승강기에 올랐다. 꼭대기 층에서 승강기 문이 열리자 베르가못 향의 방향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은 짙은 녹색의 벨벳 카펫이 깔려 있고 벽은 옅은 녹색 바탕에 기하학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벽지와 바닥이 온통 녹색이라 무중력 상태로 몸이 뜬 느낌이 들었고 불빛마저 후텁지근해서 답답했다. 진성은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에서 인공의 향료 냄새와 함께 여전히 흙냄새와 먼지 냄새가 났다. 양옆으로 방이 늘어선 복도는 좁고 길었다. 복도 양쪽으로 복제화와 영화 속 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자 아크릴 액자에 불빛이 비치면서 ‘봄날의 연인’, ‘사랑과 우정 사이’, ‘유럽의 사랑’ 따위 문구가 깜빡였다. 

   스타무인텔 1101호, 방 위쪽에 옅은 불빛이 깜빡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흙먼지로 부연 작업화를 벗고 키를 꽂자 방에 은은한 불빛이 들어왔다. 우주의 별은 머물 것 같지 않은 익숙한 방이었다. 침대, 텔레비전, 작은 테이블과 소파. 목욕용품이 담긴 파우치, 흰 수건과 흰 가운, 작은 생수병 두 개. 어디서나 엇비슷한 비품이었다. 진성은 사람에게 겨우 이 정도가 필요하다는 게, 사람의 마음은 먼지 더께에 흙투성이인데, 겨우 이 정도 갖춰진 작은 방에서 한 남자가 잠시나마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게 여전히 의아했다. 그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더러운 점퍼를 벗어서 닦고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옷을 다 벗어 깔끔하게 접어서 소파에 두었다. 욕실로 들어가 의식적으로 세심하게 몸을 씻었다. 광케이블선 피복을 벗겨 내느라 손톱 밑이 새까맸다. 그는 비누 거품을 손톱 틈새로 밀어 넣어 손톱을 하나씩 정성스레 닦았다. 이렇듯 완벽하게 깨끗해야 몸이 편안해졌고 성적 흥분이 가능했다. 

   처음 무인텔을 찾은 것은 이혼하고 반년쯤 지나서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국도변은 어두웠고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도로 끝에 무인텔의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는 너무도 피곤했고 잠시 쉬고 싶었다.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그곳의 객실 하나에 들어가 한 시간 남짓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천장의 낮은 부분 조명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깔려 있을 뿐, 사방이 어두웠다. 자기 위로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한밤중도 아닌데 인근 산에서 날카로운 새소리가 들렸다. 청명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성기를 그러쥐었다. 새들의 지저귐에 맞춰 손을 움직였고 입술 사이로 낮은 울음 같은 탄성이 흘렀으나 새소리에 묻혀 희미했다.

   그 후로 그는 무인텔에서만 약간의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일 년 전쯤 일주일 작업 비용에 맞먹는 비용을 감수하고 인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찾아가기도 했으나 남성성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남성성은, 아니 인간성은 감응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혼자 생각으로 그는 성적 흥분을 인간성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자신의 인간성은 꽤나 예민한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까다로워져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 징후는 아주 조금씩 넓어지는 이마처럼, 돌에서 솟아나는 형체처럼 생활의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화기와 메뉴판에 붙은 번호를 연결하면 마사지 업소로 위장한 곳에서 여자를 보낼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진성에게 낯선 여자는 상황을 더욱 낯설게 할 뿐이었고 돈으로 여자를 구해야 할 만큼 그의 인간성은 절박하지 않았다. 위로는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혼자만의 의식이었다.

   작은 조명들을 하나씩 끄고 침대 한가운데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노란 달빛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깜깜하진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친구의 소개로 사진만 서로 확인한 상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문자로 약속을 정했다. 주말이었고 북적거리는 스타벅스 매장은 사람들 말소리로 웅성거렸다. 진성은 출입문이 보이는 쪽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 정각에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 순간부터 주위의 소음이 사라졌다. 처음 만났는데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와서 커피잔을 마주하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고요했고 갸우뚱한 표정이 혼자만의 생각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를 마주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음이 찰랑거렸다. 그가 알고 지내거나 만난 여자들과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미모나 외모는 아니어도 아내의 얼굴은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붙잡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하고 있었고, 진성은 그녀의 말을 알고 싶었고, 그의 눈은 늘 아내를 향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두 달쯤 될 때였다. 결혼 전에 오랫동안 만난 사람이 있었고 그 남자와 헤어진 직후 진성을 만나 결혼한 거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결혼하면 상대를 잊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잊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진성은 그 남자를 지금도 만나냐고 물었고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결혼한 후론 연락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상대도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슬프지만 안도하면서 진성은 그럼 괜찮다고, 차차 나아질 거라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내는 고요하고 갸우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물에 잠긴 돌을 응시하듯 단단하고 맑은 눈빛으로. 

   다시 한 달이 흐르고 그녀는 말수가 줄었다. 석 달이 지나자 아내는 작고 단단한 돌이 돼 버렸다. 맑고 서늘한 물이 찰랑거리는 강가에 슬쩍 놔두면 언제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진성은 화를 냈고 그녀는 미안해서 같이 살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더 화를 냈고, 그녀는 당신과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여행도 할 수 있지만 몸을 섞을 수 없다고 잔잔하게 읊조렸다. 강박적으로 깔끔한 여자였다. 끝이었다. 진성은 다 끝났다는 걸 인정했다. 이혼 서류가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문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사 년 전이 아닌 지금 그는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노랗고 선명한 달빛이 스며드는 방. 그녀의 벗은 몸이 노르스름하다. 가방에서 작업용 밧줄을 꺼내 그녀의 발목과 손목을 묶는다. 몸이 동그랗게 말린 그녀가 바닥에 엎어진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눈이 빨갛다. 그가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틀어쥐고 턱을 세게 당긴다. 하얀 볼에 동그랗게 침방울을 떨어뜨렸다. 밧줄을 말아 쥐고 그녀의 등과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이런 상상은 처음이었다. 그는 흰 가운의 허리 매듭을 풀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인간성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 왔고 그는 손을 거둬들였다. 한 세대가 지나간 듯한 슬픔과 안도감이 명치 아래로 밀려들었다.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의 더께가 흙먼지투성이 마음을 덮었다. 



   멀리서 들리는 쿵, 하는 둔중한 소리에 눈을 떴다.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미세하게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미미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얼마 전 일본 남쪽 바다에 진도 6.8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한밤중에 침대의 작은 요동을 느끼고 잠이 깬 그였다. 그는 얼른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방은 도로 쪽이 아닌 천륜산 방향이었다. 소리의 방향도 분명 산 쪽이었다. 

   밖은 어느새 암흑이었고 아무 기척도 없었다. 국도변에 홀로 덩그러니 무인텔 건물만 있을 뿐이어서 근처에 다른 건물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아 소요가 있다 한들 알 수도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 ‘지진’을 검색해 봤다. 지진은 아닌 듯했다. 실시간 검색에도 없고 며칠 전 일본의 지진 관련한 한 줄 기사가 있을 뿐이었다. 

   짙은 회색 산은 검은 밤하늘과 경계가 흐렸다. 산이 밤이 되는 시간이었다. 여기선 보이지 않아도 천륜산 너머가 새로 만들어진 신도시였다. 오늘 산 너머에서 광케이블 작업을 하고 산을 옆으로 돌아 그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데 기분이 묘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산자락 끝에서 일하고 산을 돌아와서 몸을 씻고 인간성을 위로한다. 사람살이가 이게 다인 것 같았다. 사리나 조금이라는 단어처럼 해묵은 기억 어딘가에 있으면서 낯선 정서였다. 아마도 과거이면서 미래의 이야기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이곳 주위에 밭과 농장을 소유한 사람들은 여기가 신도시에 들어가지 못한 게 천륜산 때문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굴곡지게 길게 이어진 천륜산 등허리는 늙은 개의 그것처럼 헐거워 보였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마당에 있던 누렁이는 늙어서 죽었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늙은 개는 늘 기운 없이 누워만 지내다가 어느 날 죽었다. 어린 누렁이 한 마리를 사서 함께 살아 볼까. 산이 밤이 되듯이 사랑 없는 혼자의 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다. 슬픔이 밤이라면 외로움은 아침이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울렸다. 저녁까지 다른 단지에서 일하던 후배였다. 오늘 작업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메시지를 열었다. 광파워메터의 녹색 사진 아래 저녁에 봤던 메시지가 있었고 그 아래 방금 들어온 메시지가 보였다. 인근에 운석이 떨어졌고, 자신은 친구들과 함께 천륜산 일대를 수색할 것이며, 형님도 시간 되면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일대에 사는 친구나 후배들이 운석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로 인스타그램에 난리가 났다고 덧붙였다. 진성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메시지 창에 떠 있는 광파워메터의 눈부신 녹색 사진과 신기하고 놀랍다는 두 시간 전의 메시지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운석이 무엇이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간, 조금 전의 쿵 소리를 떠올리곤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불과 십 분 사이에 녹색 포털 사이트에 운석, 유성체, 별똥별, 천륜산과 함께 신도시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었다. 저녁 8시 9분경 전국 각지에서 유성체가 포착됐다는 속보 한 줄뿐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켜서 종일 뉴스를 들려주는 채널을 틀었다. 초저녁에 들은 대통령 소식과 정치권 뉴스가 반복되고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가끔 느끼는 거지만 뉴스를 24시간 보도하는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다른 사이트에 접속하려던 그는 뉴스 아래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을 읽었다. 속보. 한국 수도권 남부와 경북 상공에 유성체 포착. 유성체 궤도에 따라 경남 남해안 인근에 운석 추락 가능성 있어. 현재, 피해 소식은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 현재로선 운석의 크기는 알 수 없어. 곧이어 머리가 벗어져 이마가 훤한 중년의 앵커가 관련 뉴스를 차분하게 알렸고 영상들이 올라왔다. 전국 각지에서 불덩어리를 포착한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주로 도로의 카메라와 차량 블랙박스 영상들이었고 이따금 시청자 제보 영상도 섞여 있었다. 연이어 참고 영상으로 십 년 전 러시아에 떨어진 거대한 유성과 운석 화면이 이어졌다. 원자폭탄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거대한 불덩어리는 1만 톤에 달하는 운석을 지상에 떨어뜨렸고 수십 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했다.

   잠시 후 지질학자와 항공공학과 교수들이 전화로 연결되었다. 행성 간 공간에 혜성이나 소행성이 남긴 파편들이 떠돌아다니다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로 끌려 들어오면, 초속 10~70km의 속도로 지구 대기로 진입하고 대기와 마찰로 가열되어 불덩이처럼 빛나는 유성이 되었다. 금속 또는 석질 물질인 유성체가 지구 대기를 통과하는 동안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지면에 떨어진 행성 간 입자나 덩어리가 타다 남은 암석이 운석이었다. 그래서 운석을 별똥돌이라고도 하고, 일 년에 2000개쯤 지구로 떨어진다고 했다. 한마디로 별이 모두 다 타지 않고 지상으로 떨어진 것이 운석이었다. 

   그는 다시 창문을 열고 천륜산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한층 짙어져 산과 하늘이 경계가 없었다. 우주에서 떨어진 별똥돌이 저곳에 있었다. 후배에게 나도 운석이 떨어진 소리를 들었다고 알려 주려다 마음을 바꿨다. 며칠 후면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리라. 이 순간만큼은 혼자 품고 싶었다. 밤이 되자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새소리가 깊어졌다.

   “별이 땅에 내려와 돌이 되었다.” 진성이 마치 옆에 듣는 사람이 있다는 듯 말했다. 

   어느 밤, 하늘에서 신비한 돌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박혁거세 설화가 품고 있는 신비가 껍질을 벗는 밤이었다. 눈부신 광채가 하늘로부터 내리뻗은 후 그 자리에 놓인 거대한 알. 그것은 알이자 돌이며 뜨거운 별이었다. 별스럽지 않은 산자락 아래의 밤, 신화가 현실의 경계로 넘어오는 밤이었다. 

   켜 놓은 텔레비전에선 여전히 유성과 운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과학 전문 기자가 컴퓨터 영상 분석으로 유성체의 낙하 경로와 운석의 추락 방향을 설명했다. 유성이 대기권을 비스듬히 진입하는 과정에서 쪼개져 낙하하게 되면 가장 가벼운 것은 대기와의 마찰로 속도가 빨리 느려져 가장 먼저 낙하 경로상의 지상에 떨어진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것은 가장 먼 곳에 떨어지게 된다. 그는 뉴스를 다시 보기 위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흰 가운의 허리끈을 풀어 헤친 채로 반은 벗은 상태라는 것도 잊었다.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어도 실내 온도가 높아 춥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영상으로 운석의 낙하 경로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운석은 일직선 낙하 경로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 정도의 타원형 지역에 떨어졌다. 뉴스에서 전해 주는 낙하 경로와 예상 추락 위치를 보면 오늘 저녁 그의 동선과 거의 흡사했다. 그가 한 시간 전에 들은 쿵 소리는 크고 무거운 운석이 떨어진 소리였다. 소리의 방향과 크기 그리고 땅의 미세한 진동음으로 미루어 스타무인텔에서 직선거리로 몇 킬로 정도의 천륜산 속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들은 광케이블을 설치한 신도시와 인근 도로, 거기서 반원을 그리며 돌아온 사료 공장과 화학비료 공장과 논밭이 있던 국도, 스타무인텔 인근 그리고 천륜산 일대 어딘가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벗어진 머리의 앵커는 운석 전문가의 설명을 잠시 끊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글과 영상을 소개했다. 남해안의 하안시와 천륜산 일대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제보 전화도 연결됐다. ‘선생님께서 들은 소리가 운석이 떨어진 소리라고 확신하십니까?’ 앵커는 심드렁하게 제보자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우주와 지구와 돌은 일직선입니다.” 진성이 고개를 돌려 이마가 벗어진 앵커에게 말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샛노란 달이 보였고, 혈액이 핏줄을 타고 인간성에 흘러들었다. 한순간 작고 연약한 인간성은 곧게 뻗어서 달에 닿을 듯했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도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늘은 사리이고 바다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해수면이 높다. 끌어당기는 힘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밤 샛노란 달이 떴고 우주에서 불덩이가 추락해 지상에 돌이 되어 떨어졌다. 달과 지구와 태양은 일직선이다. 우주와 지구와 돌도 일직선이다.”

   얼핏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투 같았으나, 진성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새기고 있으면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그의 목구멍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대답이 있을 리 없었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답을 알았다. 삼백 번도 넘게 본 그녀는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에게 삼백 번 넘게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목구멍 언저리에 걸려 있는 걸림쇠가 탁 풀어지면서 몸통 위쪽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서서히 가라앉아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아랫배가 후끈거리며 갈증이 났다. 손을 뻗어 생수병을 집어 뚜껑을 열고 작은 병 하나를 다 마셨다. 



   스타무인텔 로비로 내려온 그는 바깥의 소리에 멈칫했다. 출입문 가까이에 차체가 높은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섰고, 안에서 남자 넷이 내렸다. 그들이 재바르게 차 트렁크에서 크고 묵직한 가방을 꺼내 입구로 들어섰다. 몸 쓰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동작이었다. 문을 나서려던 진성은 살짝 비켜섰다. 그들이 주고받는 간단한 말로 미루어 운석을 찾으려고 밤길을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전문적인 운석 사냥꾼일지도 몰랐다. 저들의 가방 안에는 막대기 끝에 자석을 붙인 도구나 금속 탐지기 같은 게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중 하나가 진성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른 하나가 천륜산 아래 민박이 있지만, 가장 가까운 모텔은 여기밖에 없다고 투덜댔다. 스타무인텔 안으로 들어선 일행 중 하나가 생각보다 시설이 좋다며, 뒤따르는 동료에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게 밖에 들렸다. 

   자갈을 밟으며 자신의 차로 가던 진성은 빠른 속도로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소형차에 당황했다. 작은 돌이 몇 개 튀었고 뒤로 주춤 물러선 그는 저도 모르게 검은 승합차 옆에 붙어 섰다. 소형차는 주차장 안쪽, 건물의 기둥이 있는 모서리 쪽에 주차하고 차에서 이내 두 명이 내렸다. 그의 자동차가 주차된 곳에서 두 칸 건너였다. 구석이라 흐릿하긴 해도 이십 대 커플 같았다. 하나는 짧은 머리에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단발머리에 키도 작고 체구가 자그마했다. 키가 큰 회색 실루엣이 작은 실루엣을 끌어당겼다. 훅 딸려간 작은 체구가 휘청하는가 싶더니 모서리 기둥에 붙었다. 둘은 번개처럼 키스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둘 다 젊은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키스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입술과 혀의 길고 긴 애무는 서로의 밑바닥까지 힘껏 끌어당기려 했다. 그녀들은 오늘밤 한사리였다. 어쩔 수 없이 승합차에 몸을 가린 그는 그들을 지켜보며 몸을 떨었다. 큰 여자가 작은 여자를 친친 감듯이 끌어안았다. 기둥에 기댄 작은 여자의 몸이 조금 솟구쳐 올랐다. 그녀들의 다른 애무가 시작됐고 짧고 간결한 탄성이 천륜산 새소리처럼 흘렀다. 그들은 이곳 어딘가에 흩어진 운석 따윈 아랑곳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뜨거운 존재가 되어 자신을 잊었다. 어린 연인의 뜨거운 피가 광케이블을 타고 그에게로 연결되었다. 헐떡이는 혈액이 기가바이트 속도로 흘렀다. 

   어린 그녀들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불덩이였고 추락하는 별똥별이었다. 마흔 살 넘게 살면서 처음 엿보는 뜨거움이었다. 스스로 불이 돼 본 적도 없었다. 그랬다. 불 이후에 남은 것이 돌이었다. 아내는 한때 불이었고 자신을 태운 채 작은 돌이 되어 나를 만났을 뿐이었다. 배 속에 쿵 소리가 났고 배꼽 주위에서부터 명치까지 진동이 울렸다.

   휴지부도 길었다. 작은 여자가 큰 여자의 얼굴과 목과 가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큰 여자는 꼿꼿이 서서 작은 여자의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몸을 떼고 손을 잡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왔다. 진성은 슬며시 출입문 앞으로 다시 가서 이제 막 무인텔을 나온 사람처럼 그들을 지나쳤다. 그녀들의 얼굴을 볼 수도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접어들었다. 좁은 국도는 빨갛게 꼬리를 문 차량들로 꽉 막혀 있었다. 세상은 너무 빨랐다. 뉴스 보도가 나간 지 겨우 두 시간 남짓인데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작은 운석 하나를 찾으면 횡재고 금값의 열 배 혹은 수십 배라고 했다. 바위만큼 큰 운석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도 했다. 그는 가장 큰 운석이 떨어진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여기서 차로 5분 정도 달리면 바로 천륜산 등산로와 이어졌다. 등산로 인근에 스무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이나 작은 가게를 꾸리는 주민 중 누군가는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금쯤 랜턴을 들고 산을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천륜산은 가파르지 않아도 야생 멧돼지가 서식할 정도로 깊었다. 후배와 그의 친구들은 지금 어둠 속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진성은 유턴 차선으로 천천히 끼어들었다. 천륜산 방향이 아니라, 저녁에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도로 몰려든 차량들은 모두 산으로 향하는 듯했다. 지역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운석이 천륜산에 떨어졌다는 소문이 났을지도 몰랐다. 유턴 신호에서 그는 차를 돌렸다. 반대 방향은 차량이 거의 없어 캄캄했다. 반대 차선에서 다시 돌아가던 그는 샛노란 불빛을 뿜어내는 스타무인텔을 온전히 보았다. 차량 세 대가 연이어 스타무인텔로 들어갔다. 이 소란이 끝나면 다시 스타무인텔은 한적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 배 속에 뜨거운 돌을 품은 사람들이 이따금 저곳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는 저녁에 왔던 길을 되짚어 밤길을 달렸다. 반경 수십 킬로미터가 운석의 낙하 예상 구역이었다. 천륜산과 주변, 사료 공장과 화학비료 공장과 양계장이 늘어선 국도변 일대, 그리고 며칠 후면 사람이 살게 될 신도시 일대. 스타무인텔 방향의 반대편 차선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시야 멀리까지 붉은 전조등이 반짝였다. 꼬리를 물고 길게 띠를 이은 전조등 빛은 오랜만이었다. 어쩐지 번잡스러운 긴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곧 편히 쉴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안도감. 시야에 둥그스름한 산자락과 무언가 자라고 있는 밭들이 보였다. 산과 밭은 그저 어둠이었다. 아무 말도 보탤 필요가 없는 그대로 어두움. 차창을 열자 냄새가 밀려들었다. 양계장의 닭똥 냄새가 진했다. 그는 냄새가 스스럼없이 퍼져 나가는 그저 어두움이야말로 사람이 없어도 별이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곳은 사람들로 붐빌 터였다. 며칠 내로 신도시 작업을 끝내야 하는 그로서는 내일 아침부터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들로 도로가 막힐 게 걱정됐다. 

   고속도로 진입 표지판이 보이자 그는 차선을 바꾸려고 오른쪽 백미러를 봤다. 그가 사는 소도시로 향하는 도로였다. 보조석에 놓인 광파워메터 기계에 녹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천륜산 깊은 곳 어딘가에, 화학비료 공장 옆 밭들 사이 어딘가에, 혹은 그가 광케이블을 연결한 신도시 어딘가로 떨어졌을 우주의 돌은 지금, 아무도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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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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