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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인문학

  • 작성일 2023-10-18
  • 조회수 1,032

팬티 인문학

장마리


   프롤로그


   ‘20**년 상반기 인턴 직원 이너웨어 디자인 평가회’ 

   현수막이 거치되었고 마네킹이 세워졌다. 마네킹에 인턴들이 제작한 이너웨어를 입혔다. 검은 천을 씌워 디자인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오전 10시가 되자 언더웨어, 파운데이션, 란제리 부서의 팀장이 회의실에 입장했다. 검은 천이 벗겨지고 상품이 공개되었다. 한 시간 후 결과 발표였다. 발표 자리에 부장, 평가를 받는 세 명의 인턴, 인턴의 사수, 그 외 팀원이 참석했다. 발표는 선임 팀장이 했다.

   “속옷의 기원설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에 입었다는 창세기 설과 수치심 때문에 입은 것이 아니라 속옷을 입음으로써 아무것도 안 입은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반대의 설인데, 모두 수치심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미 발표한 두 인턴과 그 소속 팀원들이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있었다. 분홍의 소속 란제리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 너무들 하시네! 우리 팀 발표 중인데······.”

   헤라의 정 직원이 되려면 상․하반기 디자인 평가를 거쳐야 했다. 상반기는 팀장들 점수가 후했다. 평가 과제도 선배들이 치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각자가 지역이나 대상을 선정하고 시장 조사하여 그 표본으로 디자인하라.’였다.

   분홍이 선택한 지역은 동대문 도매상가였고 대상은 도소매업을 하는 중장년 여성들이었다. 사수가 동대문 속옷 도매상가로 실사를 나갈 때 데려갔다. 헤라의 재봉을 맡길 하청 업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 매출순으로 다섯 곳을 선정했다고 했다. 제일 마지막에 들린 곳이 이오였다. 

   ‘란제리 도소매점 이오’라고 A4 크기의 흰 아크릴 간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곳은 속옷의 기능과 디자인, 용도를 구분하지 않고 란제리로 통칭해서 사용했다. 분홍이 봉제라면 남한테 빠지지 않았지만 나설 자리가 아니라서 사수가 건네는 물건을 챙겨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따라다녔다. 분홍이 보기에 이오가 브라의 핵심 바느질인 쓰리 스티치와 이본침, 편이본과 편삼본의 봉제가 제일 깔끔했고 어깨끈과 옆선, 뜯어짐을 방지하는 마무리 바느질의 빠텍도 훌륭했다. 하지만 사수는 매출이 가장 높은 업체를 시장조사 결과보고서에 넣어 제출했다. 

   분홍은 동대문 속옷 도소매 상가의 중장년 여성 상인 100명에게 설문지를 돌리고 다음 날 수거하러 갔다. 설문지를 작성해 준 사람은 15명뿐이었다. 이오 사장은 신상품을 마네킹에 입혀 놓고 매무새를 정리하다가, 이웃 매장에서 쫓겨나 한숨을 쉬는 분홍을 발견했다. 한 달 전에 헤라의 직원을 따라왔던 인턴이 틀림없었다. 

   “저기요!”

   분홍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순과 눈이 마주치자 쪼르륵 달려갔다.

   “분홍 씨?”

   “아, 네에.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분홍 씨 서울 처음이지?”

   “아, 아뇨! 대학 때 친구들이랑 명동에 놀러 왔고, 그 전에 역사 체험으로 덕수궁이랑 종묘도 왔었어요.”

   “서울살이가 처음이냐는 뜻이야.”

   분홍이 네에, 라고 대답했다. 어디 살아? 반말로 물었다. 분홍이 시선을 피했다. 오순이 한숨을 작게 쉬고 말했다. 

   “새벽에 와. 세 시 넘어서.”

   그 시간 때면 지방에서 물건을 하러 올라왔던 도매상들이 빠져나가 한가해진다. 대부분 주인이 자리를 지키다가 지루해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졸거나 한다. 이때 말벗하듯 설문 내용을 물으면 될 거라고 했다. 분홍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순의 말대로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와서 100명의 표본을 얻어 속옷을 디자인했고 제작했다.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동기 소영은 신촌의 여자 대학생을 표본으로 했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또 다른 동기 대니엘은 아이돌 남녀 연예인을 대상으로 했다. 전북 옥산 대학 의상디자인학과 출신 분홍이 한국 대표 이너웨어 회사 헤라의 인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대학생 이너웨어 디자인 공모〉에서 입상했기 때문이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선임 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속옷의 기원설까지 말한 이유는 란제리 팀 김분홍 씨 때문입니다. 백색과 면으로만 된 저 속옷을 입고 사랑하는 연인 앞에······ 수치스러울 것 같습니다.”

   누구도 분홍의 표본이 동대문에서 낮과 밤을 바꿔 일하는 중장년 여성임을 감안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두어 평 남짓 공간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물건을 쌓아 놓고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운다. 새벽이 되면 발목을 죄는 양말의 고무줄도 견딜 수 없어 벗어 버린다. 계절과 상관없다. 처진 가슴의 볼륨을 살리고 늘어진 뱃살을 넣어 주는 파운데이션이나 란제리를 만들고 판매하지만 그런 속옷을 자신들은 입지 않는다고 했다.

   유명 남자 개그맨이 감각적이고 관능미 넘치는 에로티시즘을 강조한 제품으로 대박을 쳤다. 섹시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자 연예인이 패셔너블한 속옷을 홈쇼핑에 직접 입고 출연함으로써 완판을 기록했다. 몸매 보정 효과가 있는 맞춤 속옷까지 열풍이었다. 그야말로 속옷 시장은 호황이었다. 파격적이고 도발적이며 감각적인 상품 개발에 대처하지 못한 팀장들은 날마다 깨지고 있었다. 전북 소도시 대학 디자인학과 출신 김분홍은 이 같은 헤라의 니즈를 파악하지 못했다. 


 

   비너스 가옥


   금자는 옷장 문을 열고 진보라색 비로드 정장을 꺼냈다. 선반 위, 모자도 꺼내려고 손을 뻗는데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해도 소용없었다. 복도로 나섰다. 발이 선득하여 덧신 신을 때였다. 방 네 개가 나란히 이어진 다다미의 긴 복도에 한 뼘 정도 햇빛이 침투해 있었다. 작업실 문 앞까지 닿으면 처서였다. 복도를 넘고 안쪽 미닫이문 아래에서 아침 내내 머문다면 동지였다. 그 햇빛에 젖은 발을 내놓고 앉아 있는 흰 무명 저고리에 검정 몽당치마, 상고 단발머리를 한 자신과 금성 언니가 소환되었다. 금성은 1층 재봉소 청소를 끝내면 2층에서 오야지(주인)가 볼일을 보러 내려올 때까지 양 무릎을 끌어안고 햇빛에 젖은 발을 내놓고 쉬었다. 

   금자는 일어나자마자 금성 언니를 찾았다. 어디에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재봉소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에 발을 쬐고 있다가 바깥 미닫이문이 열리자 화들짝 놀랐다. 금성이 검지를 입술에 댔다가 떼고 얼른 들어오라는 신호로 손을 까불었다. 금자는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첩보원처럼 민첩하게 검정 고무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왔다. 언니처럼 양 무릎을 끌어안고 자그마한 발을 햇빛에 내놓았다. 새벽부터 물질하느라 손과 발이 벌게진 금성이 가려움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면 금자가 언니의 발을 감싸 쥐었다. 금성에게 그 온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졸음이 오는 건 금자였다. 눈을 부릅떴다. 어리지만 이 넓고 큰 재봉소가 자신들의 공간이 아님을, 야마다 다로(山田太郞)라는 빼빼 마르고 얼굴이 허여멀건 일인(日人)의 공간임을 알았다. 휴식은 짧았다. 후원 별채 부엌에서 자신을 찾기 전에 주인의 아침 밥상 차리는 것을 거들어야 했고 식모가 끓여 놓은 녹두죽이나 전복죽에 오이지, 무장아찌를 곁들여 소반에 담아 2층 주인에게 가져다주어야 했다. 

   어쩌면 금자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언니와의 추억 때문인지 모른다. 이 정도면 비너스 가옥을 잘 지켰다. 재봉틀을 돌리면 궁색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페달을 밟으면 철커덕······ 철커덕······ 돌림 바퀴가 돌아가면서 노루발이 움직이고 박음질이 되면서 저고리, 치마, 원피스가 완성되었다. 이제 페달 밟는 무릎과 발목이 저리다. 돋보기도 꼭 써야 한다. 그래도 작업실에 있으면 편했다. 

   금자는 최대한 햇빛 선을 밟으며 작업실까지 갔다. 응접실이라고 쓰인 낡은 나무 팻말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문은 여러 꽃잎이 돋을새김된 불투명한 유리가 위에 붙어 있는 밤색 문이었다. 손을 넣는 홈이 반질반질했다. 힘들이지 않아도 레일을 타고 부드럽게 열렸다. 작업실로 들어선 금자는 왼쪽 옆 마당 커튼을 젖혔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에 먼지가 날렸다. 

   근대 유물과 유산이 많고 잘 보존이 되어 있어서 옥산이 구도심 재생 사업의 성공사례로 꼽혔다. 영화도 곧잘 찍는데 대한제국 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대박을 치자 관광객들이 더 몰려들었다. 이곳을 떠난 토박이들의 자식과 손자들이 돌아와 부모나 조부모의 장사를 잇거나 업종을 바꾸어 돈벌이했다. 비너스 가옥은 근대화 거리가 막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구도심 재생 사업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는데 지붕 낮은 집들이 죄다 헐리고 길이 생겼으며 상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그러니까 비너스 가옥은 원래 ‘ㅁ’ 자로 출입구가 세 곳이었다. 구도심 재생 사업 때 왼쪽 탱자나무 담장과 쪽문을 없애고 보행자를 위한 길을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주막처럼 변한 공간에서 금자는 현기증을 느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관광객들은 비너스 가옥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당까지 성큼 들어와 구경했다. 금자는 철창 안에 갇힌 원숭이가 되었다. 암막 커튼을 달아도 소용없었다. 다음 날 문화예술관광과를 찾아갔다. 과장은 시(市)에 매각하고 아파트를 얻어 편히 살라고 구도심 재생 사업 때 한 말을 또 했다. 금자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확, 불을 싸지르거나 불도쟈로 밀어 버려야 당신들 속이 시원하것지?”

   다음 날 왼쪽 담장 공사가 시작됐고 사람들 시선에서 차단되자 살 것 같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가릴 것은 적당히 가리고 숨길 것은 또 숨겨야 했다. 

   뭐들라고 여그를 왔으까? 

   넉 대의 재봉틀을 둘러보며 작업실을 왜 찾았는지 금자는 생각했다. 검정과 옥색 재봉틀은 몸통 아래에 영문자 S가 빨간 원 안에 새겨져 있었다. 여성이 재봉틀 앞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었다. 이 싱거 검정 재봉틀은 재봉소 여교사였던 엄마 명옥이 쓰던 것이었고 옥색 재봉틀은 비너스 양장점 간판을 걸 때 엄마가 금자에게 사 준 것이었다.

   “인자, 이놈 주인은 너여.”

   금자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지금도 사용하는 데 문제없었다. 늘 닦고 조이고 기름칠했기 때문이다. 흰색은 오버록용이고 회색은 일반 재봉틀인데 둘 다 전기 재봉틀이었다. 오버록 재봉틀이 없을 때는 바이어스를 덧대어 박거나 일일이 손바느질했다. 옆으로 눈을 돌렸다. 입체 패턴 드레스폼에서 광목천을 씌운 재단대를 훑으며 무엇 때문에 작업실에 왔는지, 다시 생각했다. 재봉틀 앞 의자에 앉으려다 아, 의자! 의자가 필요히서 가지러 왔지. 혼잣말했다. 

   의자를 들고 안방으로 걸었다. 삐그덕, 마룻장이 성급하게 걷는다고 소리쳤다. 의자를 딛고 옷장 선반에서 모자를 꺼냈다. 작업실로 되돌아왔다. 스웨터와 모직 점퍼스커트를 벗었다. 정장을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어깨가 처지고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살이 내렸고 허리가 굽은 탓에 등허리 밑단이 슬쩍 들렸고 풍만했던 젖가슴이 밋밋해져서 앞단이 가랑이에 닿았다. 옷맵시가 나지 않았다. 모자 또한 볼품없었다. 테두리에 하얀 수국 코사지가 촌스럽기만 했다. 이 비로드 정장은 분홍의 대학 졸업식에 가기 위해 해 입었으니 십 년이 넘었지만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폼나게 고쳐 입고 민화반에 가면 김 여사와 박 여사가 리폼을 맡길지 몰랐다. 그녀들은 한때 자신에게 양장을 맞춰 입었는데 지금은 바지나 치마의 기장, 허리를 줄여 달라거나 늘려 달라는 게 고작이었다. 날이 더워지면 모시나 지지미(ちぢみ)*로 파자마나 원피스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아직은 있었다. 김 여사가 리폼도 하느냐고 물었을 때 냉큼 대답 못 했다. 재봉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묻는 말이었다. 금자가 구식 재봉사라는 의미였다. 

   어떻게 고칠까? 양쪽 옆구리에 세 겹의 잔주름을 넣고 얇은 벨트를 할까? 처진 어깨는 뽕을 넣고 앞섶 처짐은 뽕브라로 살릴까? A라인 치마 기장이 발목까지 닿았다. 그때는 긴 기장이 유행이었다. H라인으로 고칠까? 오금에서 뒤트임을 넣을까? 민망혀. 혼잣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재봉 도구 서랍, 제일 위 칸에서 시침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핀 하나를 입에 물었다. 오른쪽 옆구리 여백과 왼쪽 여백을 잡고 꽂았다. 상의를 벗어 입체 패턴 드레스폼에 입히고 두 번째 서랍에서 가장 두툼한 보정 패드를 꺼내 어깨에 넣고 시침 핀으로 고정했다. 단추를 채우고 라인을 살폈다. 음······ 고개를 끄덕였다. 벨트를 만들기 위해 치마 밑단을 뒤집었다. 2센티미터의 얇은 벨트면 될 거라 5센티미터를 자르기로 하고 치마를 벗어 재단대에 올렸다. 줄자로 길이를 재고 초크로 네 군데 표시하고 안으로 접어 핀을 꽂았다. 치마를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음, 되앗네. 한기가 들어 벗어 놓은 모직 점퍼스커트와 스웨터를 서둘러 입었다. 전기 포트 스위치를 누르고 녹차 티백를 꺼내 머그잔에 담갔다. 

   녹차가 우러나자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손에 쥐고 온기를 느꼈다. 마당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졌다. 나가려는데 근대화 거리 쪽이 왁자지껄했다. 커튼을 살포시 젖혔다. 월요일 오전인데 셀카봉을 든 앳된 여자아이 서너 명이 대문 옆 비너스 동상을 모델로 사진을 찍었다. 시청에서 비너스 동상 앞에 벤치를 갖다 놓고 길바닥에 카메라를 그려 놓았으므로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은 없었다. 카메라 표시가 된 곳에서 인증샷을 모두 채우면 상가나 펜션 이용에 할인이 주어졌다. 


                  이곳은 개인 주택으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으니 

                  사생활 침해의 행동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옥산시청장 白-


   팻말을 세웠지만 그 말을 따르는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500평의 대지에 2층으로 된 근대식 일본 주택이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독특한 나무 대문, 그 옆에 짧은 단발머리의 소녀상, 저고리와 통치마를 입은 모습은 평화의 소녀상과 닮았다. 조각이 세심하지 않고 윤곽이 또렷하지 않아 투박하지만 커다란 눈이 서글퍼 보였다. 문패처럼 붙어 있는 비너스 양장점이라고 쓰인 세로 나무 현판도 눈길을 끌었다. 

   “와아, 신기하다······ 이것 봐 봐!”

   연신 조잘거리던 한 여자아이가 대문 앞까지 바짝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눈을 창문에 대고 안을 살피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같은 호기심을 가진 아이였다. 손차양하며 눈을 창문에 댔다. 잘 보이지 않자 게걸음으로 빠르게 작업실까지 건너왔다. 금자는 얼른 커튼을 손에 쥔 채,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 아이가 벌어진 커튼 틈으로 이마를 갖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디밀었다. 

   “아아악······ 까아악······.” 

   까마귀처럼 우렁차게 소리치며 달아났다. 동행자도 덩달아 괴성을 지르며 내뺐다. 금자는 머그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했다. 비너스 동상 앞 벤치에 앉았다. 멀찍이 허리를 접고 숨을 고르며 그들이 금자를 바라보았다. 

* 신축성(伸縮性)이 많은, 가스사로 짠 면직물의 한 가지. 여름에 입는 속옷감으로 흔히 쓰는 일본산 베이다.


   분홍의 귀향


   분홍은 캐리어를 고속버스 짐칸에 깊숙이 집어넣고 객석 위로 올라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월요일 저녁 옥산으로 가는 마지막 우등 고속버스였다. 근대화 거리나 경암동 철길, 시간여행 축제와는 관심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 동행인 없이 띄엄띄엄 열댓 명이 앉아 있었다. 백팩을 벗어 옆자리에 놓고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이너웨어 전문 생산 업체 이오

   디자이너 김분홍


   분홍은 사무실을 나오면서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도 헤라에 미련이 남은 거니? 당장, 꺼져!

   오순의 말이 아직도 또렷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팔 년 전 헤라에서의 인턴 때를 떠올렸다. 


   부장이 누런 봉투를 인턴들 앞으로 내밀었다. 하반기 인턴 평가 과제라고 고딕체로 쓰여 있었다. 수험생이 된 얼굴로 인턴들이 봉투를 들고 부장실을 나왔다. 부장이 분홍을 불렀다. 

   “열심히 일한다는 얘기 들었어요. 이런저런 말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해 봐요.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이번에 A를 받아도 분홍은 탈락이었다. 동료와 동기들은 빤한 결과가 아니냐, 왜 그만두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지방대의 뚝심이라고 뒷담화했다. 상반기 평가를 마친 후부터 분홍은 줄곧 혼자 밥을 먹었다. 분홍은 부장의 말을 확대하여 해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라는 부장의 말이 구제의 신호 같았다. 인턴이 세 명이라 회사에 중차대한 사고만 치지 않으면 정 직원이 될 확률이 99퍼센트라고, 헤라의 인턴으로 뽑힐 정도면 평가에서 모두 A를 받을 확률도 99퍼센트라며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근무하라고 입사 첫날 부장이 말했다. 그럼, 1퍼센트는 뭐야? 신의 개입이겠지. 신의 개입? 응, 신은 너무 바빠. 우리한테 관심 없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휴게실에서 포트폴리오를 공유했다. 분홍은 그들의 화려함에 기가 죽었다.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대니엘은 부장과 이사의 조카였고, 소영은 그림 한 점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의 딸이었다. 전부 눈부신 흰 티를 입고 있는데 자신만 회색 티를 입은 느낌이었다. 소영은 고상하기까지 해서 가까이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대니엘은 헤픈 성향이라 대하기가 나았다. 부장과 이사가 삼촌이라고, 회사 프런트의 해석 안 되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의 주인이 소영 엄마라고 했다. 마치 이 집 김치찌개는 별로고 된장찌개는 괜찮다고 말하듯이. 소영이 점심을 먹다가 숟가락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니, 당신과 밥 같이 먹으면 내가 박소영이 아니라 김소영이야!”

   소영이 식당을 그렇게 나가 버렸다. 그 후 혼자 밥을 먹었는데 더 좋았다. 이들의 만원이 분홍에게는 십만 원과 맞먹었고 회색 티가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이 없었다. 


   분홍이 하반기 평가 과제가 든 봉투를 들고 사무실이 아닌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이 홧홧거렸다. 찬물에 세수했다. 기대 따위는 버렸다. 단지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인턴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는 부장의 말이 가슴에 박혀 버렸다. 사무실로 뒤늦게 돌아왔지만 퇴근 시간이 지나 팀원들이 없었다. 잘됐다는 생각에 봉투를 개봉했다. 


   국내 트렌드 정보 연구원들이 발표한 4가지 이미지의 테마를 참고해서 아이템을 찾고 2가지를 선택하여 디자인하라.


   첫 장을 넘겼다. 태극 모양이 그려진 부채 사진에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고 주제어가 쓰여 있었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 노트와 만년필이 찍힌 사진에 주제어는 과거와 현대의 기록이었다. 세 번째 장은 힘차게 내리뻗는 폭포 사진에 자연의 힘과 에너지가 주제어였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림 한 장뿐이었는데 소영 엄마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벽이 막혀 있었지만 열린 문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고 노란색 카펫에 햇빛이 비쳤다. 굵직한 윤곽을 색칠해 놓은 듯한, 커다란 나무의 가지를 바짝 전지해 놓은 듯한 낯선 이미지의 그림이었다. 멍했다. 너무 난해했다. 

   똑똑. 데스크 가림막을 대니엘이 노크했다. 

   “호퍼야. 알아?”

   분홍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무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책상 앞에 놓인 인턴 과제가 든 누런 봉투를 눈으로 가리켰다. 분홍이 아직 이해를 못 한 것 같았다. 

   “호퍼의 〈바다가 보이는 방〉이라고. 소영 엄마의 그림이 아니라.”

   아! 고마워! 라고 했다. 대니엘이 손을 흔들고 사라지자 진짜 그런 줄 알았는데······ 라고 혼잣말했다.

   수화에 관심 없던 사람이 수화를 배우려는 것처럼 4가지 이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뭘 이해해야 속옷을 만들지? 모르겠다! 자리에 눕자 오만가지 디자인의 속옷이 둥둥 떠다녔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디자인 북을 펼쳤다.

   두 번째와 네 번째의 테마를 선택했다. ‘과거와 현대의 기록’의 주제어를 여성성에 초점을 두어 여자아이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엄마로 신체가 변화하는 때의 속옷을 제작했다. 소녀가 생리를 시작함으로써 여성이 되는데 이때 입는 위생 팬티였고 제품명은 ‘소녀의 설렘’이었다. 생리혈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방수 내장재를 넣고 흰색 면 소재의 브래지어도 제작했다. 주니어용이므로 팬티는 검정 스판덱스 원단에 딸기 문양을, 브래지어는 흰색 면 원단에 딸기 문양을 넣어 세트로 만들었다. 

   또 다른 기록으로 여성에서 엄마가 되는 임부용 속옷을 디자인했다. 제품명은 ‘엄마의 설렘’이었다. 복부를 감싸는 폭이 넓은 팬티에 빨간 하트 문양을 넣었다. 태아가 엄마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빨간 하트 문양만 봐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배가 불러오는 시기에 맞춰 품을 늘릴 수 있도록 고무밴드에 단추와 단춧구멍을 만들었다. 브래지어는 끈이 아닌 민소매 셔츠로 제작했고 가슴을 편하게 받쳐 줄 수 있도록 컵 안쪽에 이중 패널을 넣었다. 답답한 와이어 대신 패널이 가슴을 밑에서 한 번, 옆에서 한 번, 모아 주었다. 남성 트렁크 팬티 중에 고환을 그물망에 넣어 통기성 및 피부 짓무름을 방지하는 디자인을 참고했다. 또한 복부가 조이지 않도록 원단은 쫄쫄이로 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을 프린트해서 벽에 붙였다. 벽은 왜 만들었을까? 벽 너머의 빨간색 소파 모서리, 밤색 옷장 옆면, 노란 프레임의 액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야? 햇빛이 노란 카펫 위로 가득 쏟아지니 참 따뜻하다, 열린 문으로 바다가 보이니 그래, 참 평온하다, 잠옷 차림으로 차 한잔 마시면 행복하겠다, 언제 그런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로잉을 시작했다. 실내에서 노팬티로 입을 수 있는 7부 파자마였다. 원단은 폴리에스테르와 레이온, 스판이 섞인 혼방이었다. 부드러우면서 구김이 없는 원단이었다. 노팬티로 입을 수 있도록 안에 면을 덧댔다. 한 장 넘겨 여성용 파자마는 밑단에 레이스 처리했다. 색상은 인디 핑크와 마린 블루였다. 마린 블루에는 호주머니를 달았다. 인디 핑크는 레이스를 달았다. 굳이 남녀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레이스를 지웠다. 커플 파자마로 바꾸고 앞장을 펼쳐 제품명에 ‘코지(cosy) 실내복’이라고 썼다. 주요 표시하고 커플 파자마라고 적었다. 디자인 구상을 하느라 시간을 너무 썼다. 제품 제작 시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회사 작업실에서 이틀을 꼬박 새웠다. 

   팀장들이 극찬했다. 이번 시즌 론칭 때 점주들에게 샘플을 보이고 반응을 보자고 했다. 부장 보고 후 생산부로 오더를 넘기자고도 했다. 분홍이 기대했다. 부장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라고. 동기들은 여전히 관능미 넘치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헷갈리는 제품으로 조형미만 강조한 디자인이라는 평과 유행하는 타 사 제품과 변별력이 없다고 평했지만 모두 A를 받았다. 최종 발표가 하루 늦춰졌다. 분홍 때문이었다. 

   규정은 규정이라며 부장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팀장이 회의를 다녀와 분홍에게 말했다. 퇴사 한 달 전에 디자인 양도에 동의하라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소녀의 설렘과 엄마의 설렘은 생산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코지 실내복은 출시하지 않기로 했다. 

   이오에서 오 년을 근무하는 동안 수없이 헤라의 홈페이지를 기웃거렸다. 대니엘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던진 말에 혹했고 끌려다녔다. 디자인 샘플북을 넘겨준 것은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뭔 일이여? 내 새끼 얼굴이 반쪽이네. 글찮혀도 꿈에 보이더랑게. 어서 오니라, 할 것이다. 일단은 좀 쉬자. 분홍은 눈을 감았다. 

   버스 기사가 옥산 나들목에 들어서자 실내등을 켰다. 자정을 지나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항구도시 옥산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든 옥산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선창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이 밀물과 썰물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요람처럼. 적어도 아침까지는 이 같은 평화가 지속되었다. 날이 밝으면 선창은 드세고 사나운 기운에 휩쓸려 언어는 거칠어지고 행동은 난폭해졌다. 이곳을 다들 떠나고 싶어 했다. 난폭하고 사나운 기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나 떠나는 순간, 돌아오고 싶어 안달하는 곳이 옥산이었다. 분홍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고민도 많았지만 도착하니 편안했다. 

   캐리어를 끌고 택시에 탔다. 째보 선창을 지날 때 창문을 내렸다. 갯내가 확 끼쳤다. 신흥목재소를 지나치는데 불이 환했다. 



   이너웨어 디자이너


   분홍은 헤라에서 계약 해지 되었지만 옥산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의상 디자인 학원 속옷반에 등록했다. 12주 커리큘럼이었다. 원장은 헤라를 빗대어 우리나라 속옷 전망을 이야기했고 자신의 입김이면 99퍼센트 취업을 보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료했을 때 이력서를 내 보라고 추천하는 곳은 동대문 속옷 도소매 업체나 맞춤 속옷을 운영하는 샵이었다. 99퍼센트 행운보다 1퍼센트 불운으로 또 자신의 운명이 갈렸다. 헤라는 그해 인턴을 다섯 명 선발했다. 목줄로 묶어 놓고 그 앞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주인처럼 대니는 감언이설을 남발했다. 쫀득하고 구수하고 부드러운 육질의 맛을 잘 알고 있으므로 한 입만 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주인은 말했다. 

   “기다려! 아직 때가 아니야. 뭐 좋은 거라고 인턴을 두 번씩이나 해?”

   분홍은 손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훔치며 그러게. 뭐 좋은 거라고, 속으로만 대꾸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인턴 생활을 두 번 하고 싶지 않았지만 채용만 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때 분홍의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대니엘이 했다. 

   “특채로 들어오면 되잖아.”

   특채? 언제? 내가 그 조건이 될까? 조건이 되니까 대니엘이 저런 말을 하겠지? 대니엘이 누구던가? 이사와 부장을 삼촌으로 둔 실세가 아니던가? 목줄이 묶인 개는 주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기다리다가 오 년을 보냈다. 대니엘 몰래 비비라와 에로스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내고 면접을 봤다. 두 곳 다 합격했다. 하지만 비비라도 인턴 생활을 일 년간 해야 했고 에로스는 매해 재계약해야 했다. 대니엘이 신경 쓰고 있으니 기다려 보자. 

   의류 디자인협회에서 주최하는 이너웨어 디자인 공모를 보았다. 친환경과 웰빙이 대세였다. 잘 살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므로 주말이면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고 산을 찾았고 퇴근 후에는 피트니스에서 근력 강화에 힘썼다. 이 트렌드에 맞춰 여성들을 위한 와이어리스의 탑 브래지어와 5부 레깅스를 디자인 북에 드로잉 했다. 레깅스에 휴대폰을 보관할 수 있도록 허벅지 바깥에 주머니를 달았다. 주머니는 고탄력 스판덱스였고 뛰거나 걸을 때 움직이거나 빠져나가지 않도록 미니 벨트로 고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음악을 들으며 러닝머신이나 덤벨이 가능했다. 카터 벨트를 응용한 디자인이었다. 하나 더 드로잉 했는데 프린트가 진한 직물 팬티 겸 반바지였다. 엉덩이에 주머니를 달았다. 집에서는 반바지로, 산행 때는 레깅스 위에 덧입는 반바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작이 문제였다. 속옷 제작이 가능한 공장을 찾아갔다. 샘플 제작은 불가했고 가능한 곳은 너무 비쌌다. 학원으로 갔다. 원장이 알선하는 업체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내지 않았으므로, 이상만 높은 촌뜨기로 여겼으므로 반기기보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말을 돌려 봤자 원장의 잔소리만 이어질 게 빤해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모전에 출품하려고요. 비용을 낼 테니 샘플 좀 제작하게 해 주세요.”

   “비용은 당연히 내야지. 공모전? 아! 협회 주관 공모전? ······근데 회원이 많아서 분반했어. 작업실이 안 빌 텐데.”

   “원장님, 수업 전에 제가 미리 사용하거나 수업 끝나고 사용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이. 자꾸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자기가 원장인 나보다 먼저 작업실을 쓰겠다는 게 말이 돼?”

   “아,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분홍이 고개까지 수그렸다. 

   “근데, 성격이 좀 바뀐 것 같네. ······아홉 시에 종강이니까 내가 수업 준비할 때 쓰고 그 대신 청소······.”

   “네에, 당연히 제가 해야죠. 청소.”

   “그래, 디자인 한번 볼까?”

   원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디자인 북을 살피다가 물었다. 

   “주머니 벨트가 인상적이네. 어디서 얻은 아이디어야?”

   본홍은 제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원장이 콧방귀를 뀌더니 내일부터 작업실을 쓰라고 했다. 눈칫밥 먹으면서 공모전에 참여했는데 장려상을 받았다. 취업 때 스펙으로 쓸 수 있었지만 어차피 헤라가 아니면 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다. 백만 원으로 술이나 마실까? 대니엘에게 전화했다. 만날 얻어먹었으니 한번 사겠다고 했다. 그런데 술이 정신을 지배하자 자폭하고 말았다. 

   “대니, 이 돈이 뭔 돈인지 아냐? 너, 지방대 출신이라고 나 우습게 보는데······ 그래, 장려상 받았다.”

   “뭔 소리야? 장려상? 너 혹시······.”

   “그래! 이너웨어 공모전에 출품했다. 상금으로 백만 원 받았다. 어쩔래?”

   대니엘이 빈 맥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 나 못 믿니?”

   “못 믿고 못 기다리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지. 벌써 일 년이 지났는데······.”

   “상품 좀 보자. 실물 좀 보자고.”

   “실물? 집에 있는데.”

   “아, 참! 너 어디 살아?”

   분홍은 빈 맥주 컵을 세게 내려놓았다.  

   “씨팔! 왜 나만 보면 어디 사냐고 묻냐? 어디 살겠냐?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살지. 서울에서 사니까 위대한 헤라의 디자이너 강 대니얼과 술도 마시는 거지. 내 주머니에 백만 원 있다!”

   상금이 든 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 뜨니 모텔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자였다. 백만 원부터 찾았다. 백팩 속에 있었다. 대니얼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자신이 없었다. 웬만해서는 고시텔 출입을 훤할 때는 자제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전철에서 내려 숙취에 도움이 되는 음료수를 마시려고 고시원 골목 구석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알바를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았다.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할머니와는 일주일에 두세 번 통화하는데 내용은 항상 똑같았다. 

   “밥은?”

   “먹었어.”

   “아픈 디는?”

   “없어.”

   “에미는?”

   “아직.”

   “염병한다. 니가 혀!”

   “알았어.”

   엄마와는 원래 친하지 않았다. 안 맞았다. 할머니는 뭐든 그려, 혀! 하는데 엄마는 안 돼! 하지 마! 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분홍은 재봉틀 앞에 앉아 손수건을 만들어 친구 생일에 선물했다. 장학관이 방문한다고 해서 갑자기 학급 미화를 했다. 찢어진 커튼을 붙잡고 담임이 한숨을 쉬었다. 분홍이 커튼을 떼주면 박음질을 해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의 옥색 재봉틀 발판이 안 닿아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친 채 철커덕······ 철커덕······ 페달을 밟아 돌림 바퀴를 돌렸다. 금자는 작업실이 훤했고 철커덕······ 철커덕······ 재봉틀 페달 돌아가는 소리에 작업실 문을 열었다. 

   “시방 뭐혀?”

   분홍이 조그마한 손수건이 아니라 커튼을 재봉하고 있었다. 금자가 깜짝 놀랐다. 

   “내 새끼, 천재가 따로 읎네.”

   금자는 할 수 없이 엄마의 검정 싱거 재봉틀 앞에 앉았다. 며칠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분홍이 옆에서 옥산 고등학교 교복을 수선했다. 강아지, 손 안 다치게 조심혀, 라며 수시로 쳐다보느라 제 일을 못 했다. 그때 작업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야아아!”

   분홍이 깜짝 놀라 작고 연한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이 커튼과 함께 톱니에 말려들어 바늘에 찔리고 말았다. 미홍이 엄마의 생일이라 서울에서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작업실이 훤해서 문을 열었다. 엄마뿐만 아니라 분홍도 재봉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훌쩍이는 분홍의 손가락을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로 동여매면서 금자는 염병한다! 를 연발했다. 미홍이 소가지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상자 뚜껑을 닫으며 금자가 말했다. 

   “시상 사람이 머시라고 혀도 젤로 행복한 것은 지 하고잡은 거 할 때여.”

   “엄마는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얘가 보고자란 게 있어야지.”

   “염병, 지랄한다. 니 꼴이 어쩐디? 미싱이 어쪄서? 노력과 노고로 먹고사는 일이여. 그것만큼 정직한 일이 어딨어? 시상은 돌고 도는 거시여. 유행도 글잖여. 분홍이가 니 나이 때가 되믄 이 직업도 괜찮을 것이여. 너무 고시랑거리지 말어.”

   “아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너!”

   분홍이 놀라 움찔하더니 딸꾹질했다. 금자가 물을 떠다 주며 도끼 눈으로 미홍을 노려보자, 미홍도 엄마의 못된 성질머리를 닮았으므로 같이 맞대응했다. 

   “한 번만 더 재봉틀 앞에 앉기만 해! ······엄마도 그러면 인연 끊을 거야!”

   “염병한다! 그만 연설하고 저거나 박어! 분홍이 내일 학교에 가져가야 된디야.”

   커튼이 재봉틀에 그대로 물려 있었다. 연미색 커튼에 빨간 핏물이 배어 있었다. 확 짜증이 일었다. 미홍은 그대로 집을 나갔다. 택시를 타고 익산까지 가서 밤 기차로 서울로 올라갔다. 분홍은 밤새 훌쩍댔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이 아파서가, 엄마가 서울로 그대로 가 버려서가 아니라 제가 박음질을 마무리 못 해서였다. 

   엄마와의 충돌과 갈등은 이것이 예고편이었다. 명절 때 두 번, 금자 생일에 한 번, 분홍의 생일에 한 번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시끄러웠다. 금자는 경조사가 있을 때면, 미홍이 집에 온다고 하면, 분홍에게 절대 재봉틀, 아니 작업실 근처도 얼씬 말라고 했다. 단속 덕분에 분홍이 고등학생 때까지는 순조롭게 지냈다. 

   미홍이 여름휴가라며 갑자기 내려왔다. 휴가라서 집에 온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홍은 자신의 경고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하고 싶었다. 

   “대학서 뭐 전공할 거냐?”

   분홍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로맨스 소설을 더 크게 킥킥거리며 읽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야, 안 들려?”

   “들려. 아주 잘.”

   분홍도 못된 엄마의 성질머리를 물려받았으므로 돌직구를 던졌다. 속옷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금자의 말처럼 좋아서 하는 일이라 신이 났다. 신이 나는 일을 평생 하면 성공한 삶 아닌가? 엄마의 바람대로 교사나 은행원이 되면 행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자신은 절대 아닌데.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말했다.

   “디자이너가 될 거야. 속옷 디자이너.”

   “뭐? 디자이너? 속옷 디자이너?”

   “응. 옥산 대학 디자이너학과에 갈 거야.”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 미홍은 한숨을 쉬며 금자를 째려보았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는 듯이. 금자는 얼음을 띄운 미숫가루를 후르륵 그릇째 들고 마시다가 설탕을 더 넣어야겠다며 일어났다. 싸움은 상대가 상대를 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상대를 안 해 주니 최후의 한 방을 날리고 또다시 집을 떠났다.  

   “너와의 인연은 끝이야!” 

   금자가 염병한다! 라고 후방을 날렸지만 미홍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집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엄마의 소식은 할머니를 통해 전달했으며 전달을 받았다. 분홍도 엄마가 그렇게 나오니까 어디 두고 봐! 오기가 생겼다. 할머니는 분홍이 헤라의 정 직원이 안 된 것을 알고 옥산으로 내려오라고 자꾸 유혹했다. 

   “니가 있으문 여고상들이 교복 맞추러 오것지. 할미는 늙어서 찾지를 않혀. 비너스 양장점이 언제쩍 이름이냐면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지랄들을 한당게. 너 대학생 때 여고상들이 언니, 언니, 함시롱 엄청 들락거렸잖냐. 등록금도 다 해결 안 힛냐.”

   “할머니, 바뻐! 전화 끊어.”

   금자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분홍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언제까지 옥산에서 똑같은 패턴의 교복이나 박아야 되겠는가? 여튼 올해만, 올 안으로 대니엘이 해결해 주겠지. 

   분홍이 대학 다닐 때 옥산 중고등학교 교복 제작에 참여했다. 비너스 양장점의 제3 전성기였다. 하지만 아이돌 연예인들이 브랜드 교복을 입고 광고하자 손님이 뚝 끊겼다. 간혹 할머니나 할아버지, 2대8 가르마의 아버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남방을 입고 종아리까지 닿는 치마를 입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오는 학생들이 간혹 있었다. 분홍이 말했다. 

   “아그들아, 우리 비너스 양장점은 고객이 원하믄 언제든 수선은 무료여.”

   여기서 교복을 맞추면 핏이 안 산다고 죽을상을 하던 얼굴이 곧바로 웃는 상으로 바뀌고 제 몸을 마음대로 재단하라며 몸을 맡겼다. 사실 브랜드 업체의 교복도 펑퍼짐했으므로 핏 살리는 수선을 따로 했다. 수선비도 따로 받았지만 아이들은 연예인이 광고하는 교복을 입고 싶어 했다. 

   분홍이 없을 때 교복 기장을 줄여 달라고 여학생 둘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아이가 입은 교복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어디를 줄여? 맞춤 맞고만. 더 줄이믄 빤스 보이것는디? 윗도리도 더 줄이믄 허리랑 배때기 나오것어. 여자는 자고로 여그가 따땃혀야 혀. 허리퉁아리를 그리 내놓고 다니믄 쓰간디!”

   한 아이가 그냥 다른 데로 가자고 했지만 다른 아이는 공짜로 수선해 준다고 했다며 가자미 눈으로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그때 분홍이 들어왔다. 단박에 사태를 파악하고 아이를 전면 거울 앞으로 이끈 후 줄자로 길이를 재고 초크로 표시하고 시침 핀을 꽂고 아이가 원하는 길이와 핏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 표정이 바뀌었다. 

   “언니가 내일꺼정 해 놓을랑게.”

   “참말이어요? 와아. 적어도 이삼일은 걸릴 줄 알았는디. 고맙습니다, 언니!”

   분홍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들한테 널리 알리라고 했다. 여기서 교복을 맞춘 아이들은 공짜로 기장을 줄여 준다고. 하지만 품을 줄이고 핏을 살리는 수선은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저희도 돈 내야 혀요?”

   “당연하지. 근디 너희들은 그냥 해줄랑게 친구들한티 소개 많이 혀, 알았지?”

   “네에!”

   두 아이가 합창했다. 아이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너스 양장점을 나가자 금자가 쯧쯧 혀를 찼다. 분홍이 곧바로 정신 교육에 들어갔다.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비너스 양장점의 디자이너께서 왜 이러실까이? 경력 단절이 솔찮히 길더만 감이 좀 떨어지셨으까?”

    궁합과 호흡이 잘 맞는 관계여서 분홍의 말귀를 금자는 금방 헤아렸다. 하지만 어린 중고등생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분홍은 여기서 종결하지 않고 심화 과정으로 넘어갔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같은 드라마만 보지 말고 〈가요톱텐〉이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것을 좀 보랑게. 그리야 요새 아그들 유행을 파악한당게.”

   분홍이 이렇게 심화 정신 교육을 마쳤고 금자는 세뇌되었다. 현수막에 ‘교복 수선 전문’이라고 해서 아예 걸었다. 


   분홍은 편의점 물건 정리가 끝나자 디자인 북을 꺼냈다. 아까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와 삼각김밥과 컵라면, 캔맥주 하나를 사 갔다. 하체가 튼실한 편이라 레깅스 위로 팬티 자국이 드러났다. 그 여자가 입어야 할 미니 삼각팬티가 아닌 사각형 노라인 팬티를 드로잉 했다. 원단은 햄이었다. 

   아이보리 시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시스룩 패션인데 속옷을 너무 신경 안 쓴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진통제와 생리대를 사 갔다. 검정 시폰 슬립을 드로잉 했다. 아이보리 시폰 원피스에 검정 시폰 슬립을 받쳐 있으면 아주 세련돼 보일 것이었다. 길이는 허벅지 정도로 완성했다. 

   남색 아웃도어 면티에 흰색 린넨 바지를 입은 중년 아저씨가 들어왔다. 우후, 저런 저런······ 분홍이 자신도 모르게 뒷모습을 보이며 진열대로 걸어가는 아저씨의 엉덩이에서 눈을 못 떼고 고개를 저었다. 색 진한 직물 사각팬티를 입어서 부주의하여 흙바닥에 앉았다 일어난 것 같았다. 아저씨는 참이슬 두 병과 컵라면을 가지고 와서 계산했다. 그 부주의한 아저씨가 나가자 남성용 사각 쫄팬티를 드로잉 했다. 원단은 햄이었고 배가 좀 나왔으니 아웃밴드보다 인밴드로 했으며 색상은 베이지였다. 얼마면 될까? 만 원대에 두서너 장으로 팔 수는 없는데······ 딸랑, 종이 울리고 출입문이 열렸다. 사장이 편의점에 나타났다. 분홍이 얼른 디자인 북을 덮었다.  

   “줘!”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분홍이 아니······ 불쌍하게 보이도록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얼른 줘.”

   사장이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입술에 댔다가 땠다. 

   “아, 담배?”

   분홍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첫날 사장이 금연을 선언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도저히 못 참겠다며 전자담배로 바꾸었다. 그것도 잠시, 정산하면 던힐 두 갑이 비었다. 비굴한 표정으로 금연은 원래 주위에서 도와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분홍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당신 부인이나 토끼 같은 딸에게 도와 달라고 하세요! 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노력하고 있어.”

   결국 못 참고 두 갑째 피우기 위해 편의점으로 왔다. 하루가 가려면 12시간이나 남았고 새벽 시간에 혼자 편의점을 지켜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실패라고 봐야 했다. 사장이 던힐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림 그리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냥······.”

   속옷 디자이너라고 하면 위아래로 훑을 것 같았다. 사장이 식품 진열대로 갔다. 까만 머리가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혜자 도시락 두 개를 계산대에 올리고 이것까지 처리하라고 했다. 편의점 탁자를 고갯짓하며 점심 먹자! 라고 했다. 분홍이 사장을 따라 나갔다. 혜자 도시락을 먹는다는 것은 회식이었으므로 나무젓가락을 쪼개 사장 앞에 공손히 놓고 나머지 한 개를 쪼갰다. 

   “어떤 화가를 좋아해?”

   분홍이 하마터면 밥알을 품을 뻔했다. 얼른 미소 된장국을 꿀꺽 마셨어도 사레가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흰 붕대로 꽁꽁 싸맨 정신병을 앓았던 고흐 말고는 아는 화가가 없었다. 번뜩,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호퍼! 에드워드 호퍼요.”

   사장이 아, 대답하며 미소를 띠고 아직 도시락을 반도 안 먹었는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 보자는 제스처였다.  

   “어떤 작품을 좋아해?”

   작품이라니? 그림이 아니고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분홍은 헛기침하고 이번에는 물을 마셨다. 묻는 말에 답을 하기보다 오히려 질문을 던지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사장님도 호퍼 좋아하세요?”

   “나는 고독과 상실을 그리는 추상주의는 안 좋아해. 그런 삶은 싫어! 왜 예술가들은 고독하고 외롭고······ 그래야 돼?”

   “그러게요. 혹시 사장님, 예술가?”

   사장이 다소곳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좀 짠한 마음이었다. 

   “부모님이 반대를 심하게 했어.”

   아······ 분홍은 정말 안 됐다는, 마음으로 사장을 보았다. 

   “미술관 큐레이터라도 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고.”

   큐레이터만큼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아직 혜자 도시락은 반이나 남았는데 사장은 밥에는 관심이 없었다.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바다가 보이는 방〉이요. 저는 그 작품이 좋더라고요.”

   사장 얼굴이 하회탈로 바뀌었다. 분홍이 민망해서 얼른 수저로 밥을 듬뿍 떠 입에 넣고 불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면서 달짝지근한 양념이 할머니의 손맛 같았다. 그때, 새벽까지 공부하고 이제 일어나 아점으로 도시락을 사러 온 자주 드나드는 분홍의 이웃 청년 중 한 사람이 편의점으로 왔다. 분홍이 그 청년을 따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 후 편의점에 디자인 북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독특한 디자인이나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면 손 카메라로 찍고 머릿속으로 저 옷에는 아마 이런 속옷을 입고 있을 거야, 또는 아, 보정 속옷을 입어야 되겠다, 등의 품평만 했다. 

   사장은 교대 한 시간이나 일찍 편의점에 왔다. 캔커피를 앞에 놓고 파라솔 아래에서 예술론을 강의하기 위해 항상 기다렸다. 사장은 그림뿐만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 찬미자로서 월 1회 등산이나 축구, 야구 관람이 아닌 클래식 연주나 오페라 공연, 미술 관람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청강생이 생겼으므로 최선을 다해 강의하는 열정 넘치는 강사로 변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대니가 클래식 연주회 티켓을 내밀었을 때 그래, 가자! 라고, 거부감없이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술론을 청강한 덕분이었다. 

   드로잉을 못 하니 지루했다. 하품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 기억할까? 여기 동대문.”

   “아, 이오? 사장님?”

   “단번에 맞추네. 잘 있었어?”

   잘 있느냐는 그 한마디에 분홍이 갑자기 목이 콱 멨다. 서울살이 삼 년째였는데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엄마한테 연락하고 싶었다. 오기가 굳어지면 강철만큼이나 차갑고 단단해지는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목록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지워 버렸다. 헤라의 인턴이 되었다는 것을, 헤라에서 잘렸다는 것을 할머니한테 들었을 테지만 엄마도 문자 한 번 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연락해야 했지만 거 봐! 내가 뭐랬어? 그럴까 봐 버티는 중이었다. 버티다 보면 둑이 무너져 폭포수와 같은 감정이 터져 나오겠지만 어떤 계기로 균열이 생기고 아무렇지 않게 균열이 메워지기도 하겠지만. 

   “언제 밥이나 먹자?”

   오순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오늘, 오늘 먹어요.”

   조금 당황한 듯 음······ 소리를 길게 내더니 올래? 라고 물었다.

   “좀 늦어도 오늘 안으로만 가면 같이 밥 먹는 거죠?”

   “그으럼, 우리 밥 참 자주 먹어.”

   분홍이 전화를 끊자 예찬자(예술 찬양주의자)가 강의를 준비해 놓고 파라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술 청강을 빠지면 제때 저녁을 먹을 수 있었지만 현실은 성난 개보다 무서운 것이었으므로, 청강자가 자신뿐이었으므로, 강사가 열정이 대단했으므로, 분홍이 편의점을 나와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사려 깊은 예찬자는 시급을 한 시간 더 계산해 주었다. 때문에 강의에 빠질 수도 없었다. 서론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띠리릭 문자가 왔다. 분홍이 은혜를 아는 청강자라서 문자 따위는 확인하지 않았다. 강사는 열정을 다해 강의했지만 다른 때보다 지루해서 두 번 더 꼰 다리 방향을 바꿨다. 

   공덕시장은 언덕에 있었고 고층 빌딩보다는 5층짜리 건물과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큰길 건너 크레인이 솟아 있었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오 사장은 동대문이 아닌 공덕시장으로 오라고 했다. 시장 입구에 슈퍼와 신발 가게, 종합 속옷매장이 있었지만 곧 개발될 구역이라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분위기가 썰렁했다. 5층짜리 공덕 맨션 A, B, C를 찾았다. 맨션 A동에서 ‘란제리 도소매업체 이오’라고 쓴 돌출 아크릴 간판을 보았다. 백팩을 한번 추켜 메고 A동으로 걸었다. 반지하 출입문에 간판과 똑같은 상호를 발견했다. 한 뼘 정도 문이 열려 있어서 노크하지 않고 슬며시 당겼다. 일렬로 늘어선 여러 대의 재봉틀과 재단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스팀다리미의 긴 선,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5단 선반, 그 선반 맨 위에 여러 색깔의 원단, 선반 한 칸마다 색색의 재봉실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투명 비닐봉지에 완성된 팬티와 브래지어가 담겨서 칸을 채우고 있었다. 삼단 옷걸이 봉에도 색색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진열되어 있었다. 아, 이곳이 속옷 생산 공장이구나. 혼잣말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났고 안쪽에서 오순이 청소기를 밀고 나오다가 분홍을 발견하고 전원을 껐다. 그 자리에 서서 크게 소리쳤다.

   “야, 나와 봐!”

   안쪽 다른 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니, 왜? 엄마가 거기서 나와!”

   미홍이 집 나간 딸을 맞이하듯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엄마 미홍을 분홍이 세게 끌어안았다. 



   신흥목재소


   수는 둥그렇고 주먹만 한 열쇠 통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감아 놓은 쇠사슬을 제거하고 신흥목재소 철문을 밀었다. 끼이익 마찰음을 내며 밀렸다. 마당 한 곳에 통나무와 제재목을 쌓아 놓고 주황색 방수포를 씌어 놓았는데 햇빛과 비바람에 색이 바랬고 아래는 찢어져 바람에 펄럭였다. 외부인이 들어온 흔적도 있었다. 불에 타다 만 목재가 나뒹굴었고 술병과 과자봉지, 일회용 라면 용기, 부탄가스가 흩어져 있었다. 길고양이도 터를 잡았다. 노란색과 까만색 고양이가 낯선 주인을 피해 잽싸게 방수포를 씌운 목재 밑으로 기어들었다. 수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목재를 집어 한쪽으로 던져 놓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작업장도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손에 든 열쇠 꾸러미에서 작업장이라고 쓰인 열쇠를 찾아 구멍에 넣고 돌렸다. 슬라이딩 철문을 옆으로 밀었다. 찬바람이 훅 끼쳤다. 차단기를 올렸다. 천장에서 조명등이 파파팟 켜졌다가 등 한 개가 깜박였다. 낯선 주인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전등의 스위치를 찾아 껐다. 정적이 찾아왔다. 긴 톱, 둥근톱, 띠톱, 대패, 홈파기, 절단기, 익숙한 공구들이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에어콤프레샤에 전원을 넣었다. 위이잉······ 폭풍 같은 소음이 몰아쳤다. 에어건을 들고 공구 위를 쓸었다. 피이쉬이이······ 먼지들이 소리에 놀라 날뛰다가 창문 밖으로 도망쳤다. 붉거나 노랗거나 검정의 본질의 색이 나타났다. 바닥도 에어건으로 대충 쓸었다. 문밖으로 먼지들이 쓸려 나갔다. 

   뒷문으로 나가자 조립식으로 지은 다섯 평 남짓의 숙소가 있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고 그 가지에 매달린 샌드백은 옆구리가 터져 속이 보였다. 그 아래 벤치프레스도 등받이가 말린 생선 비늘처럼 일어나 있었다. 샌드백 앞에서 주먹을 쥐고 잽을 날렸다. 샌드백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의 신호에 호응했다. 185센티미터에 100킬로그램의 육중한 몸놀림이 의외로 가벼웠다. 검은색 정비복과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 까만 천 워커를 신은 모습이 남달랐다. 어깨를 가로질러 멘 보스턴 백을 벗어 바닥에 던져 놓고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날리고 샌드백 공격을 피해 허리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때, 무언가가 툭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앗, 소리를 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밤송이였다. 발밑으로 알밤이 빠져나와 도르륵 굴렀다. 알밤을 줍고 워커로 밤송이를 문지르자 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여러 개 밤송이와 알밤이 굴러다녔다. 밤송이는 발로 툭툭 쳐 수돗가로 모으고 알밤은 주어서 그 옆에 놓았다. 정확히 이십이 년만이었다. 밤나무만 그대로였다. 아니 목재소를 떠날 때 밤나무는 당시 수의 키만 했다. 

   숙소 현관문 비밀번호는 수의 생일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센서 등이 켜졌다. 보스턴 백을 소파 위로 던져놓고 보일러와 냉장고 전원을 넣고 청소기를 돌렸다. 배가 고팠다. 식당을 찾아 근대화 거리로 나섰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이 너무 많아 당황스러웠다. 교토(京都) 같기도 했고 벳푸(別府市) 같기도 했다. 걸음을 멈췄다. 비너스 가옥이었다. 대문 쪽으로 걸었다. 비너스 동상이 있었고 비너스 양장점 간판이 그대로였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있었다.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왁자지껄 몰려와 비너스 동상 앞 벤치에 앉았다. 수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수는 그녀들의 사진사가 되었다.

   “한 발만 옆으로 가 보세요. 자, 찍습니다. 기무치!”

   여러 컷 사진을 찍고 휴대폰을 건네자 사진사 실력을 곧바로 확인했다. 

   “아효, 잘 찍었네! 총각도 찍어 드릴까?”

   수가 정비복 바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그녀들처럼 비너스 동상과 가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누군가 말했다.

   “조종사신가? 정비사신가?”

   “아니요. 아닙니다.”

   “잘 생기셨는데 배우신가? 아니면 예술가?”

   다른 관광객이 다가왔다. 뒤이어 젊은 연인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뒤에 대기했다.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많은 아줌마들과 이별할 수 있었다. 식당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걷다가 멈췄다. 

   “신흥 족발집.”

   원래 식당 아니었나? 이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민구? 민석? 민호? 민철이······ 아, 민철이. 그도 체격이 컸다. 그래서 수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도시락 반찬을 돼지고기 장조림이나 볶음을 싸 왔다. 김치, 계란말이와 바꿔 먹자고 했다. 수가 민철이 반찬을 제일 많이 얻어먹었다. 걸음을 빠르게 걷다가 강산 부동산 간판을 보았다. 이강산. 저녁 7시였다. 식당이나 카페는 불야성이었지만 가게는 문 닫을 시간이었다. 

   수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일 년 전이었다. 간경변으로 흥수가 수술해야 했다. 의사는 나이가 많아 수술을 권하지 않았고 흥수도 원치 않았다. 수가 넉 달간 간병했다. 요양원으로 옮겨 육 개월을 버티다가 세상을 떴다. 흥수가 병원에 있을 때 강산의 아버지 대한이 찾아왔다. 그는 강산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기억했다. 강산이 특별한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이 수를 버티게 했기 때문이었다. 강산은 자그마했고 늘 징징댔다. 그가 군복차림으로 권총을 들고 학교에 왔다. 

   “우리 아들, 이강산을 건드리는 놈은, 총살을 당할 줄 알아라!”

   여학생 전부가 울었고 남학생 몇 명도 훌쩍거렸다. 그 권총이 장난감이었다는 것은 학교에서 이 사실을 알고 대한을 소환하여 심문하자 밝혀졌다. 그 후 강산을 놀리는 아이는 없었지만 혼자 도시락을 먹고 혼자 등하교했다. 대한이 환갑인데 그때처럼 등을 곱게 펴고 절도 있게 걸었고 종결형 어미, 다와 까로 끝나는 말투가 여전했다. 전라도 사투리도 쓰지 않았는데 무식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흥수를 찾아온 이유는 병문안이 아니라 신흥목재소를 팔라고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형님, 좋은 일 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흥수는 귀찮다는 듯 자리에 눕겠다고 했다. 수가 침대 높이를 낮추고 베개를 머리에 괴어 주었다. 대한이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자신이 사 들고 온 비타민 음료를 꺼내 단번에 마셨다. 

   “최 의장께서 요양원을 지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환원하겠다고 하시는데 형님께서 협조를 못 하시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세를 쳐서 사겠다는데 왜 안 파시는 겁니까? 막말로 이제 목재소도 운영 못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 애가 하겠습니까? 일본에서 예술가로 활동한다면서요.”

   옆에 앉은 수를 훑으며 말했다. 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책에 눈을 두었다. 

   “어떤 자식이 요새 부모를 돌봅니까? 돈 없는 노인을 위해 무료 요양원을 짓겠다는 최 의장을 우리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면 되겠습니까?”

   그의 말은 일방적이었다. 병실에 다른 환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흥수는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누웠다. 잠자코 책을 보던 아니 눈만 책에 두고 있던 수가 물었다. 

   “저, 강산 아버지. 그곳이 예술인의 마을인지, 거리인지, 된다면서요?”

   “아, 그래.”

   “그런 곳에 노인 요양원을 지어도 됩니까? 시끌벅적해서 요양이 될까요? 건축 허가가 나올까요?”

   “최 의원이니까 가능하지. 노인 요양원이라고 꼭 산속에다 짓겠다는 편협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 지들 좋다고 하는 거지. 송장 칠 때나 들여다보고 쯧쯧······ 그런 것을 막자는 취지 아니냐. 노인들도 젊은이들이랑 같이 어울려야 덜 외롭지.”

   값을 톡톡히 받아 주겠다, 지금껏 이 일을 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돈을 벌게 해 줬다고 했다. 수가 일어나 병실 문을 열고 공손하게 두 손을 받쳐 보였다. 헛기침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가며 말했다. 

   “죽은 후에 작품을 인정받는 예술가도 있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실용적으로다 생각해라.”

   수는 강산 부동산 간판을 보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근대화 거리에 와보니 요양원을 짓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런 일에 문외한이었지만 호텔이나 유흥에 관한 건물을 지어야 맞을 것 같았다. 신흥목재소에서 무엇을 할까? 목재소로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구경도 생각도 배를 채우고 난 후 일이었다. 족발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바쁘게 포장하며 말했다. 

   “여기 대기표 들고 기다려 주세요. 자리 나오면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가 건넨 대기표를 받았다. 낯이 익은 듯도 했다. 민철이 여동생일까? 누나일까? 전혀 닮지 않고 체격이 왜소한 것을 보면 민철네 유전자는 아니었다. 아내인가? 그때 헬멧을 쓴 앳된 배달원이 들어와 두서너 개의 포장된 족발을 받아 들고 나갔다.

   “저어, 배달도 되나요?”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했다. 수는 그럼 배달시키겠다고 하자 여전히 쳐다보지 않고 배달이 밀려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며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포장해 주시면 제가 가져갈게요.”

   “그러면 바로 해 드릴게요. 삼천 원 할인해 드려요.” 

   수는 포장한 돼지족발을 들고 목재소로 돌아왔다. 수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족발 맛을 알게 된 것은 이곳에서 살 때였다. 목재소 단골 밥집이 신흥 식당이었다. 민철 아버지가 돼지 도축장에서 일했다. 부산물을 가지고 왔는데 민철 어머니는 그 부산물을 요리해 손님 밥상에 내놓았다. 그때는 돼지족발이 메뉴에 없었다. 푹 고아서 곰국으로 내거나 삶아서 술안주로 제공했다. 

   술을 그닥 즐기지 않지만 한잔하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렀다. 소주를 한 병 집고 1+1로 파는 즉석밥, 봉지 김치도 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금성이 아홉 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하기로 했다.

   “약은 드셨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신경 쓸 거 없다. 뭐 했는지 말해 봐라.”

   수는 지난 일주일에 대해 말하고 중고로 트럭을 한 대 살 거라고 계획도 말했다. 

   “트럭을 사겠다는 건, 거기에 눌러앉겠다는 뜻이냐?”

   “아직은요. 할아버지 장례식 때 대목장을 만났어요. 소나무 뿌리를 얻으려면 오라고 했어요.”

   “비너스 가옥에는 다녀왔냐?”

   “아직요.”

   전화를 끊고 아까 비너스 가옥 앞에서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포장해 온 족발을 펼쳤다. 겉절이에서 고소한 참기름 내가 풍겼다. 고기에 겉절이를 얹어 한 입 넣었다. 꼬들꼬들한 족발과 겉절이 배합이 예술이었다. 소주도 따라 한잔 마셨다. 



   호두까기 인형은 노팬티


   시장의 손녀, 장미가 전학을 왔다. 장미는 전주까지 관용차를 타고 발레를 배우러 다녔다. 발레를 배우는 아이는 시장 손녀 장미가 유일했다. 학예회를 앞두고 학급 회의를 했다. 장미가 이름도 생소한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자고 했다. 아이들 모두 장미를 쳐다보았다. 학급 회의를 주도하던 반장 수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장미가 콧방귀를 뀌더니 촌스러운 너희들과는 얘기를 못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을 찾으러 갔다.

   호두까기는 수가, 클라라는 장미가 맡았다. 체격이 크다는 이유로 민철이 대왕 쥐, 다른 아이들은 생쥐였다. 분홍은 기분이 상했다. 수가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냉큼 장미의 파트너를 하겠다고 했다. 분홍은 쥐 따위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는 춤은 딱 질색이여. 그리서 공연서 빠지고 무대 의상을 맡을랑게. 너그들도 알지? 비너스 양장점 손녀가 내라는 것을.”

   담임도 분홍이 의상 담당을 하겠다고 하자 허락했다. 집에 온 분홍이 할머니에게 안겨 울었다. 금자는 분홍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어쩌서 우리 강아지가 이러코롬 서럽당가?”

   분홍이 자신의 편인 할머니에게 고자질했다. 

   “오뉴월 숙주나물도 아닌디 고로코롬 맴이 후딱 변한당가. 이 썩을 놈을 가만 안 두어야 쓰건네.”

   분홍은 오버하는 할머니 덕분에 눈물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근다고 할매꺼정 나설 일은 아니여. 나가 알아서 할랑게 할매는 모른 척 혀.”

   학급 문고에 책이 없었다. 분홍이 의상 준비 때문에 책이 필요하다고 하자 장미가 다음 날 가지고 왔다. 『호두까기 인형』을 슥슥 넘겨 보더니 표지를 덮으며 분홍이 말했다.  

    “니 의상은 따로 준비할 것이 읍것네?”

   장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에게 허락을 받고 책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책과 요술공주 미미가 그려진 스케치북을 들고 재봉틀을 밟고 있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스케치북에 할머니가 사용하는 굵은 매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3학년 1반 학예회 발표 작품 

   호두까기 인형 무대 의상


   겉장을 넘겼다. 하얀 도화지에 출연진 의상이라고 쓰고 호두까기, 클라라, 대왕 쥐, 생쥐들이라고 썼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 4B연필로 호두까기 인형의 의상을 책을 참고해 그렸다. 그다음 장은 클라라의 무대 의상이라고 썼지만 패스했다. 그다음 장은 쥐의 의상이었다. 금자가 말했다. 

   “우리 강아지 의상 연구 중이라 배고픈 줄도 모르네이. 강아지 좋아하는 풀치 쫄였는디.”

   다음 날 분홍이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무대 의상에 대해 발표했다. 쥐 의상에 대해 먼저 말했다. 흰색 체육복에 꼬리를 달 것이니 내일 모두 바지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분홍의 발표를 듣던 담임이 얼굴에 수염만 그리면 완벽할 것 같다고 했다. 호두까기 무대 의상은 아직 완성이 안 되었다고 했다. 수는 분홍이 변한 것 같았다. 전에는 봄날이었다면 지금은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이었다. 그래서 언제 되느냐고 묻지 못했다.

   의상 제작은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한복 속치마와 속바지를 만들고 남은 흰색 폴리에스터 원단을 동그랗고 길게 박음질하고 솜을 넣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온 체육복 바지 엉덩이에 손바느질로 달았다. 담임이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주인공 호두까기의 의상은 제작하여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이틀 후 호두까기 의상 중 상의만 공개했다. 흰 와이셔츠에 빨간색 반짝이로 계급장을 만들어 양팔에 박음질했다. 책 속의 호두까기 의상이라기보다 옥산고 군악대 의상과 비슷했다. 담임이 웃으며 잘 만들었다고 수에게 입혀 보라고 했다. 막상 입으니 어른 옷이라 어깨가 축 처지고 허벅지까지 기장이 내려왔다. 장미가 씩씩한 군인이 아니라 바보 같다고 짜증을 부리자 분홍이 쏘아붙였다.

   “가봉을 혀야 본봉을 할 거 아니여?”

   그 말에 선생이 웃었고 장미는 입을 샐쭉거렸다. 분홍이 가방 속에서 시침핀 통을 꺼냈다. 핀 하나를 입에 물고 수 앞에 서서 어깨에 뽕을 넣고 꽂았다. 목깃도 반 접어 꽂았다. 소매를 덮던 길이가 올라가긴 했지만 손등을 덮었다. 단을 안으로 접어 그 역시 핀을 꽂았다. 허리는 벨트를 할 거라며 양쪽 주름을 잡고 그곳에도 핀을 꽂았다. 수가 거울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담임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분홍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했다. 

   “분홍인 커서 의상디자이너 하면 되겠다!”

   “그럴라고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있던 장미가 물었다. 

   “글믄 바지는 언제 되냐?”

   “연구 중이여.”

   장미가 체······ 하고 본심을 드러냈다. 담임이 모두 연습을 서두르자며 강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쥐꼬리를 흔들며 강당으로 뛰어갔다. 분홍은 의상 가방을 챙겨 제일 늦게 갔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안 갈 수 없었다. 

   수가 장미의 손을 잡고 빙그르 돌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장미의 허리를 수가 붙들었다. 힘에 못 이겨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뭐가 좋은지 까르륵댔다. 분홍은 강당을 나왔다. 돌멩이가 눈에 띄자 냅다 걷어찼다. 

   진즉 호두까기의 하의를 완성했지만 공개하지 않았다. 공연 날까지 버텼다. 공연이 시작되었어도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2학년 2반 공연이 끝나 박수가 쏟아지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제 3학년 1반 차례였다. 모두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의상을 못 갖춘 수만 대기실에 있었다. 분홍이 가방에서 네모난 선물상자를 꺼냈다. 뜬금없는 선물상자라 수가 어리둥절해했다. 분홍이 뚜껑을 열어 보라고 고갯짓했다. 수가 빨간색 타이즈를 들어 올렸다. 마치 뱀의 꼬리를 붙잡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를 어쩌코롬 입어야?”

   분홍이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가방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꺼냈다. 표지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근디 너무 작은 거 아니여? 니 꺼지?”

   그때 담임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준비됐느냐고 물었다. 분홍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다. 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흰색 체육복 바지를 벗고 주저앉아 빨간 타이즈를 다리에 꿰려 하자 분홍이 말했다.

   “아니여! 빤스를 벗고 입어야혀. 봐! 호두까기 인형은 노팬티여! 빤스자국이 전혀 읎잖여!”

   담임이 얼굴을 내밀고 다시 재촉했다. 분홍이 되돌아섰다. 부스럭······ 부스럭······ 수가 됐다고 했다. 분홍이 천천히 돌아섰다. 두 발 뒤로 떨어져 점검했다. 어깨에 뽕을 넣고 노란 수술을 달았고 양팔에 갈매기 모양으로 계급장도 달았다. 목깃을 세워 파란 반짝이를 둘렀다. 듬직한 군인의 모습으로 손색이 없었다. 마지막 검정 가죽 벨트를 허리에 채웠다. 쫙 붙는 빨간색 타이즈 덕에 호두까기 인형으로 완벽했다. 수가 대기실을 나갔다. 담임과 아이들이 와! 환호성을 질렀다. 장미도 만족한 듯 웃었다. 

   커튼이 올라갔다. 장미가 음악에 맞춰 빙그르르 돌며 무대로 먼저 종종종 뛰어나갔다. 잠시 후 여러 마리 생쥐들이 쪼르르 나갔다. 한바탕 놀았다. 이제 수가 나설 차례였다. 분홍은 수가 무대로 나서자 대기실을 나왔다. 수를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득히 우아,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멀어졌다. 

   수의 동작이 어색해지고 있었다. 장미와 한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고 장미의 허리에 손을 얹고 옆으로 같이 깡충깡충 뛰어가야 하는데 수가 장미의 허리를 놓았다. 장미에게 잡힌 한 손은 위로 향하고 있었지만 허리에 얹혀 있어야 할 한 손은 사타구니에 있었다. 구석까지 달려간 그들이 이제 다리를 높이 쳐들고 게처럼 옆으로 총총총 뛰어 무대 앞까지 간 다음 다리 들기를 해야 했는데 수가 장미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게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더니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클라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담임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장미는 데굴데굴 굴렀다. 담임은 서둘러 막을 내렸다. 

   수가 갑자기 무대 뒤로 사라진 이유에 대해 아는 건 분홍뿐이었다. 분홍이 자신의 작은 타이즈가 수의 커다란 몸을 견디지 못할 것임을, 거친 움직임에 조금 뜯어 놓은 가랑이의 솔기가 뜯어지게 될 것임을······ 장미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였다. 

   수는 그날 이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할아버지를 졸랐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비너스 가옥에서 분홍과 같이 숙제하면 할머니는 간식은 물론 저녁도 챙겨 주었다. 장미네는 물밖에 주지 않았다. 장미가 다이어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집이 근사하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편했다. 장미 할아버지나 아빠도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숙제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비너스 가옥을 오래 쳐다보았다. 분홍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늦어 버렸다.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어서 모른 척했는데 이제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일본에 사는 할머니한테 가서 살 거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일본으로 오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분홍은 아빠와 같이 안 살아도 생일이면 아빠한테 선물을 받았다. 분홍의 생일 선물 중에서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가 제일 부러웠다. 일본 편은 집에까지 가져와서 보았다. 갑자기 왜 엄마 생각이 간절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자신의 결정이 잘못이라고 느낀 건 할아버지가 자신을 떼 놓고 떠날 때였다. 

   수가 뭐라 말하면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기가 죽어 목소리가 작아졌는데 집에서 금성도 마찬가지였다. 체육 시간에 수영을 배웠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는데 팬티를 벗고 수영복을 입을 수 없었다. 팬티 위에 수영복을 입었더니 아이들이 달려들어 더러운 새끼라며 팬티를 벗기려고 했다. 선생이 수영복은 팬티를 벗고 입어야 한다고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선생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라커룸에 있으라는 벌을 줬다. 아이들은 수가 가까이 오면 더러운 새끼! 라고 했다. 

   수는 한 번씩 숨이 막히는 증상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숨통을 막아 버린 듯 호흡 곤란을 겪었다. 의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라고 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자리에 눕거나 앉아서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했다. 하나둘셋······ 숨을 들이마셨다가 하나둘셋······ 천천히 아랫배를 볼록하게 부풀리며 하나둘셋······ 후우 숨을 내쉬고 하나둘셋넷······ 숨을 들이마셨다가 하나둘셋넷다섯······ 아랫배를 볼록하게 부풀리며 하나둘셋넷다섯여섯······ 후우우우. 아침에 일어나면 삼십 분 정도 복식호흡을 했다. 지금도 꿈을 꾼다. 모두가 사라진 수영장 라커룸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꿈을. 사방이 꽉 막힌 공간이나 몸을 죄는 옷과 속옷도, 팬티도 입지 못한다. 위아래가 붙은 정비복이 평상복이고 외출복이었다. 팬티를 입지 못하는데 정비복 소재가 면보다는 폴리에스테르 섬유가 많이 함유된 원단이라 사타구니에 땀이 차면 피부 발진이 생기고 악화했다.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는데 자다 보면 앞이 벌어져서 당혹스러웠다. 

   교토에서 건축일을 할 때 작업반장은 휴일이면 트럭을 몰고 다니며 버려진 나무뿌리를 캐 오거나 얻어 왔다. 세척하여 그늘에 건조한 후 생활용품을 만들어서 유원지나 시장에서 팔았다. 수는 따라다니다가 재미 삼아 조각했는데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수의 물건도 제법 팔렸다. 물건이 팔리면 수는 돈을 반장에게 주었다. 불치병을 앓는 아이가 있었다. 그가 거절하자 수가 말했다.

   “반장님, 모르셨죠? 제가 야마다 방직 회사의 손자예요.”

   그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깔깔거리자 건강보험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수는 국민보험이 아닌 야마다 방직회사의 직원으로 사회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뿌리가 곧고 잔뿌리가 거의 없는 분홍빛이 도는 나무뿌리를 얻었다. 산호초 같았다. 한 달 넘게 건조한 후 분홍색 도료를 살짝 뿌려 색을 살렸다. 빛살처럼 흩어지는 얇은 잔뿌리가 많은 뿌리를 얻었다. 허공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바닥에 천 개의 쇠를 박은 후 그 뿌리를 일일이 쇠에 고정하여 휘지 않도록 건조했다. 석 달이 걸렸다. 건조가 끝나자 은색 도료로 질감을 달리해 입히고 오일 스테인리스로 마무리했다. 마치 하늘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작업반장이 감탄했다.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아봤지만 예술적 감각이 있는 것은 미처 몰랐구나. 작품이다! 작품명이 뭐냐?”

   수가 빙그레 웃었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육지에 핀 산호초〉라고, 그 옆 뿌리는 〈환상의 빛〉이라고 대답했다. 작업반장이 엄지를 추켜세우며 너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했다. 휴대폰으로 찍어 전송하고 그와 한참을 통화했다. 도쿄 공예가의 〈뿌리를 만나다〉 기획 전시에 수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평가가 좋았다. 뿌리 공예가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업장에 작업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었다. 뿌리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작품을 형상화했으므로 애호가들이 있었다. 이곳을 전시관으로 만들까? 창작 공간과 전시관이 없는 예술인을 위한 레시던시 공간으로. 첫 전시회를 해 볼까?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밥때는 금방 찾아왔다. 신흥 족발집에 배달시켰다. 족발도 맛이 좋지만 겉절이가 일품이었다. 해가 넘어가니 쌀쌀해서 낮에 만들어 놓은 탁자를 밤나무 아래로 옮기고 드럼통에 불을 피웠다.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도 틀었다. 혼자지만 만찬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민철이 배달 오면 이번에는 알은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일 배달은 주인이 직접 했다. 넙데데한 얼굴과 쌍꺼풀이 짙고 커다란 눈이 예전 그대로였다. 카드 전표에 대표 고민철이라고 씌어 있었다. 좀 오래 쳐다보자 민철이 말했다.  

   “어쩌서 그렇게 쳐다보쇼?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아니오. 아닙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깜빡했다는 듯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절이나 고택을 건축하는 대목장과 제재소는 상생 관계였다. 할아버지와 오랫동안 거래했다는 대목장이 이번에 양양에 국보급 사찰 건축을 맡아 직접 벌목까지 진행한다고 했다. 신흥목재소에 제재를 맡기려고 했는데 아쉽다고 장례 때 말했다. 수는 직업의식이 발동해 소나무 뿌리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소나무는 뿌리가 원체 깊고 많아서 쉽지 않은데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었다. 명함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내려놓았다. 한 여자가 족발을 들고 쭈뼛대며 걸어왔다.

   “너, 수?”

   “너, 분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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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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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건

  • 소리
    최고에요

    다음 내용이 너무나 기대되네요

    • 2023-12-24 09:36:52
    소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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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들레
    최고에요

    앞으로 진행될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무척 궁금해진다. 배경이 익숙한 지역이라 더욱 흥미롭다.

    • 2023-10-24 18:36:15
    들레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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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쟤크

    다양한 에피소드로 인한 인물 형상화가 잘 되어있고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다. 분홍과 수의 로맨스도 있으려나?

    • 2023-10-23 15:22:18
    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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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은평
    감동했어요

    분홍과 수, 금자와 흥수, 비너스 양장점과 신흥목재소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다음 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23-10-20 10:31:23
    은평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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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이울
    최고에요

    제목, 첫문장, 스토리 전개까지...장편의 일부분만 읽었지만 눈길을 돌리지 못하도록 확 잡아챈다.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 역시 장마리^^

    • 2023-10-19 09:52:38
    김이울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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