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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가족

  • 작성일 2023-10-25
  • 조회수 597

유령 가족

이은정


   남편이 진짜 죽을 줄은 몰랐다. 진짜 죽을 작정인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유서를 사표처럼 재킷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취기에 담배 개비를 꺼내 들 때와 같이 마침내 혼자일 때만 유서의 무게를 직감한다. 남편의 옷에서 유서를 발견할 때마다, 그 내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안심했다. 두서없이 쓴 일기 같았다. 스스로 무게를 감지하고 가슴팍에 넣어 둔 한때의 다짐에 다시 손을 댈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자살할 위인이 못 되었다.

   어쨌거나 남편은 죽었다. 팬티만 입은 채로 어느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하였다.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아파트 주차장에서 속옷만 입고 눈은 희멀겋게 뜬 상태로 발견되었다. 영안실에 놓인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슬픔보다는 깊은 절망이 먼저 왔다. 죽을 작정이었으면 나와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어떤 가정을 꿈꿔 왔는지,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정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남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너지고 말았다. 남편이 없는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쓸모없는 조각이었다. 도대체 남편은 왜 죽었을까.


   침대 맡에서 수면제 한 알을 이제 막 삼킨 자정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가 자정 넘어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길함이 감돌았다. 수화기 너머에는 다급한 남성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편이 12층에서 추락하여 응급차에 실려 가는 중이라고 했다. 함재훈. 내 남편이 맞는지 물었다. 그런 착오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물었다. 위독하다는 단어가 반복되었고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말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화기 스피커를 찢었다. 위독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산다는 말인지 죽는다는 말인지 헷갈렸다. 다급한 걸 보면 죽음 쪽으로 기울었을까. 멍하니 앉아 이케아 조명 아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 수면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스틸녹스 10mg.

   욕실에 서서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절기상 겨울은 지났지만, 아직 봄꽃이 피지 않은 3월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썼다. 어금니가 달달거리는 소리를 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면제는 곧 내 신체 전반에 제 약효를 과시할 것이었다. 어떡해서든 정신을 차리고 운전을 해야 했다. 위독하다는 말은 어떤 조건에서든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남편이 옮겨지고 있다는 병원은 인천이었다. 인천에는 왜 갔을까. 죽으러 갔을까. 머리카락의 물기만 대충 닦아 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 가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차에 앉아 몸의 상태를 가늠했다. 졸리지 않았다. 졸려도 가야 했지만, 약효가 달아난 기분이었다. 수면제는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이니, 이렇게 큰 충격이 왔다면 효능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아야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찬 바람이 가냘픈 빗물과 함께 다가올 운명처럼 들이닥쳤다. 차량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으로 병원을 검색했다. 한 시간 십 분 거리. 딸아이가 깨어나는 여덟 시까지는 돌아와야 했다. 위독이 죽음과 가깝기는 하나 동의어는 아니므로, 상황만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나는 차를 몰았다.

   운전대에 몸을 바투 붙여서 한적한 도로를 삼십 분쯤 달렸다. 3월의 저문 도시는 얼음 왕국같이 차가웠다. 한기에 노출된 신체 부위들이 감각을 잃어 갔다. 입안에 숨어 있는 혓바닥까지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결코, 잠들 수 없는 상태였다. 운전석 창만 반쯤 열어 놓고 나머지는 닫았다. 비 내리는 심야라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초행길이었다. 상향등을 켤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내비게이션 화면이 사라지고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조성숙이라고 떴다. 남편의 전 와이프였다. 이 여자가 왜. 지금 왜.

   “여보세요?”

   “조성숙입니다.”

   “그런데요?”

   “남편이 방금 운명하셨어요.”

   여자가 말하는 문장이 이상했다. 누구의 남편을 말하는 것인지. 그러나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응급차를 같이 타고 왔거든요.”

   남편이 조성숙과 함께 있었다는 말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전 와이프와.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쪽도 말해 놓고 좀 그런 모양인지 침묵으로 이어졌다. 조성숙의 수화기에서는 차량이 달리는 소리만 들릴 것이었다. 통화의 공백이 이어지자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남편이 죽었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실은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이 시간에 조성숙이 직접 전화해서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가고 있었고, 지금 가지 않아도 반드시 가게 되어 있었고, 모든 기관에서 가장 먼저 연락할 사람이 나였다. 이 여자는 무슨 속셈으로 남편의 죽음을 내게 알리는 것일까.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뭘까. 

   속도를 높였다. 150, 160, …200.

   “당신이 죽였어요?”

   묻고 싶었다. 그래서 속도를 계속 높였고 화를 내듯 목소리도 높였다. 당신이 죽였어요?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뭐라고요? 내가 왜!”

   “진실은 당신만 알겠지.”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다시 내비게이션 화면이 떴다. 나는 속도를 줄였다. 

 

   조성숙은 남편과 사는 내내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포악하게 변했다. 남편은 모욕적인 말들을 듣거나 폭행당하기도 했다. 조성숙은 가위로 커튼을 찢어버리는가 하면, 부엌칼로 가죽 소파에 난도질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경악할 공포를 느꼈다. 그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갓난쟁이였지만, 엄마가 필요한 아기였지만, 조성숙의 곁에 아이를 둘 수 없었다. 산후우울증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출산하기 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조성숙은 이혼에 합의하지 않았다. 이혼 소송에서 패소할 것이 명백함에도 협의 이혼은 해 주지 않았다. 조성숙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아이의 양육은 남편이 하되, 남편은 조성숙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남편이 이혼 소송을 하는 중에 나를 만났다. 나는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었고 남편은 의뢰인이었다. 상황을 알게 된 나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협의 이혼을 하라고 조언했다.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은 조성숙의 행실과 인격으로 보아, 소송에서 이기고 갈라서도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아서였다. 낙지나 문어의 생존에 필수 기관인 흡반처럼 남편의 인생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여자가 분명했다. 흡반은 죽은 먹잇감보다 살아 있는 먹잇감에 달라붙을 때 흡착력이 네 배나 강해진다. 그러니 남편이 죽기 전까지 남편에게 달라붙은 조성숙의 흡반은 강도가 약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표현을 남편에게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남편도 이미 염려하는 바였다. 다행히 조성숙에게 생활비를 줘도 경제적 문제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고민하던 남편은 조성숙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조성숙에게 아이의 친권을 포기하라는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것도 내가 일러 준 궁리 중 하나였다. 조성숙은 결국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여 친권을 포기하고 협의 이혼을 했다. 조성숙은 매달 생활비 명목의 유흥비를 내 남편에게서 얻어 썼다. 괜찮았다. 그때는 남편과 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딸아이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지만, 증세는 미미했고 아직 너무 어려서 정확하게 진단하기 힘들다고 했다. 잘 웃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완벽한 엄마만 생긴다면, 남편에게 현명한 아내만 생긴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건 나밖에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남편은 조성숙과 이혼 후, 그리고 나와 재혼한 후에도 불안 증세를 보였다. 우울증과 공황 장애약을 처방받아 먹었다. 가정 폭력과 불화의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없었던 병이 그것을 벗어나자 생긴 것이었다. 남편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수성가해서 이룬 프랜차이즈 사업도 문제없이 잘 꾸려 가고 있었고, 부부 사이라든가 아이 문제라든가 어디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따로 만나는 친구나 지인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 대신 스트레스도 적었다. 그런데 그는 계속 우울하고 괴로웠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직후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죽으려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건 알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쉬게 해 주고 싶어서 내가 대신 사업을 책임졌다.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보거나 보모가 집에 올 때는 어디론가 외출을 하곤 했다. 이따금 내가 퇴근한 후 집을 나서기도 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그의 밤 외출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 외부 활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영안실 앞에서 알게 되었다. 남편이 밤마다 조성숙을 만나러 다녔다는 사실을. 조성숙의 집에서 조성숙의 술친구가 되어 주고 과격하게 변하는 조성숙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과거의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도, 그러면서도 남편은 조성숙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함께 있었지만 뛰어내리는 건 보지 못했다는 조성숙을 향해 나는 정성을 다한 따귀를 후렸다. 조성숙이 그것을 되돌려 주었고 나는 주먹을 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기다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조성숙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남편은 말이에요. 그걸 좋아했다고요. 불안해하면서 즐겼다고요. 그렇게 이어지는 섹스를 경험하면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요.”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죽은 남편은 파렴치한 이중인격자였다. 평온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면서 위험한 섹스를 그리워한. 그가 그리워한 것은 내가 줄 수 없었던 것임이 분명했고 그건 이상적인 가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입장을 들을 수 없으니 조성숙의 말만으로 남편을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이 죽었으니 타깃을 바꿔 내 인생에 흡반을 들이댈 요량으로 그런 말을 지껄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고 그 사람의 시신이 바로 저기에 있는데도 조성숙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망자를 모욕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내 가정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알았더라면, 나는 조성숙 따위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흡반 기관을 잘라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영안실 입구에서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와 경찰과 셋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턱은 반쯤 꺾인 상태였다. 그래서 입을 바보처럼 크게 벌리고 있었다. 눈은 왜 뜨고 있는지. 하얀 장갑을 낀 의사는 남편의 사인(死因)을 의학적으로 설명했다. 머리통이 박살 나서 죽었다는 말을 어렵게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없었다. 바람피우다가 죽은 남편 앞에서, 모든 걸 무너뜨려 놓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의문 또한 풀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경찰 두 사람이 내 앞에 섰다.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망 현장에 조성숙이 있었기 때문에 타살의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자살이라면, 남편이 속옷만 입고 있었던 것에도 의문이 든다고 했다. 부검 동의서에 사인하면서 속옷 차림의 남편이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나는 사인한 동의서를 경찰에게 건네며 물었다. 탈상 전에 넘겨주시나요? 뱉고 보니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런 경우는 길어야 이틀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과 동행하는 조성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 세 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으면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 전에 사망 판정을 받은 남편의 시신을 방금 확인한 아내에게 그런 매정한 목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남자가 이끄는 사무실로 동행했다. 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장례 절차를 매듭짓고 딸아이한테 다녀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보모는 아침 11시에나 출근하는데, 그 전에는 학교 수업이 있다는 걸 알기에 오전에 아이를 부탁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장례식장에 도착해야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그의 누나, 함정희였다. 그녀는 내게 상황을 캐물었다. 나는 조성숙의 집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 나의 무표정과 담담한 목소리에 함정희는 화를 내었다. 마치 이 사태를 기다린 사람 같다고도 말했다. 당신의 남동생이 전 와이프의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죽어서 왔다는 사실보다 내 태도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장례식을 왜 인천에서 하느냐고, 왜 마음대로 결정하느냐고, 함정희는 계속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함정희의 전에 없던 시누이 행세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장례지도사가 내가 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머리에 꽂을 핀도 주었다. 이런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입을 기회가 있었지만, 입지 못했다. 남편 때문에 입게 될 줄이야. 상주 노릇은 집에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빠르게 손님이 들이닥쳤다. 주로 남편의 가족이었고 사업 파트너들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치마와 검은 저고리, 그리고 하얀 리본 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함정희가 나를 쏘아보았다.

   “그 손톱 좀 어떻게 해!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고 티 내는 거야?”

   나는 열 손가락을 펼쳐서 손톱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손톱이 부러지는 바람에 퇴근길에 네일숍에 들렀었다. 여자 몸에 빨간색을 지니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던 숍 마스터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나는 새빨간 손톱을 선택했다. 기분 전환에는 그것만 한 것이 없었다. 이 손톱이 남편 잡아먹은 여자로 보이다니. 내가 남편을 잡아먹었단 말인가. 구워 먹었나 삶아 먹었나. 저런 말들은 어느 시대부터 내려왔을까. 남편이 먼저 죽으면 남겨진 아내들은 모두 잠재적 살인자가 되는 것일까. 시누이가 저런 표현을 쓴다면 남편의 어머니는 어떤 악담과 원망을 퍼부을지, 앞으로 닥칠 피곤한 장면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쨌든 빨간 손톱이 상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네일숍이 문 열 시간은 아니었다. 


   창밖에는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상복을 입은 채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고 어차피 돌아와서 다시 갈아입어야 했다. 상복은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면 못쓴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도 있었다. 오전 여섯 시 이십 분. 마음이 다급했다. 여덟 시까지는 줄곧 자는 아이였지만, 아이들에게 변수는 항상 존재했다. 러시아워에 걸리면 곤란했다. 

   목이 타서 장례식장 건너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생수와 커피와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누군가는 차창에 고개를 빼꼼히 내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상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장례식장에 있어야 했다. 장례식장에 있어도 저런 시선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반쯤 줄어든 담배를 끄고 다시 차에 올랐다.

   코너를 돌아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차선이 하나로 이어지는 구간이었다. 이곳을 지나가야 큰 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차 헤드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직진하는 차들이 아슬아슬하게 앞차와의 거리를 당겼다. 나를 끼워 주지 않으려는 수작이었다. 나는 계속 밀어 넣었다. 누군가는 나 하나쯤 끼워 주겠지. 그러다가 1톤 트럭과 차체가 거의 맞닿을 뻔했다. 트럭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내 차로 다가와 창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나는 창을 아주 조금 열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어떡해! 이 여자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여기저기 클랙슨이 울렸다. 나는 창문을 끝까지 내린 후 말했다.

   “그래야 하는 상황도 있어요.”

   남자는 내 차림새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보다 재수 없지는 않으실 텐데.”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차로 돌아간 남자는 내가 앞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배려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동정? 그거라면 익숙하게 받아 온 마음이었다. 배려가 동정에서 비롯된다면 동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동정할 이유에는 입성만 한 게 없다. 그것 또한 낯설지 않은 시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선입견. 나는 그런 마음들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남자가 내어 준 길을 따라 골목을 빠져나왔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손을 펼쳐 보았다. 빨간 손톱을 보자 웃음이 났다. 평생 상복을 입고 살면 인생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아서. 

   속도를 높였다. 130, 150, 160. 올 때와는 달랐다. 그때도 지금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는 죽은 사람이었고 지금은 산 사람이었다.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창고에서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작은 가방에 아이의 여름옷들을 담았다. 신발도 담았다. 좋아하는 장난감들도 모조리 담으려다가 애착 인형만 넣어 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짐을 하나도 챙기지 않고 몸만 떠나고 싶었다. 하와이에서는 하와이다운 것들이 필요할 테니까. 

   인기척에 아이가 깬 모양이었다. 이불에 몸을 비비적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켜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 어디 가?”

   나는 아이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쓸어 주며 말했다.

   “아빠한테.”

   아이가 크게 하품을 했다.

   “엄마는 오늘 왜 검은색이야?”

   “아빠가 죽었거든.”

   “죽는 게 뭐야?”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것.”

   아이는 울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았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양치질을 시작했다. 

   남편의 재킷들을 뒤졌다. 안쪽 주머니에서 유서 두 개가 나왔다. 역시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너무 우울하다는 내용.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 미안하다는 말들. 아마 그가 죽던 날 입고 나간 재킷에도 유서가 있었을 것이다. 그 유서는 조성숙의 손에 있거나 경찰이 가져갔을 것이다. 남편이 진짜 죽을 작정으로 조성숙의 집에 갔었다면 그 유서는 진정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다. 그는 나와 사는 동안 매일 죽고 싶었으니까. 평온과 안전이 확보된 완벽한 가정 안에서 그는 늘 죽고 싶었으니까.

   입가에 허연 자국을 남긴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내 머리에 꽂힌 핀을 만지작거렸다.

   “예쁘다.”

   “갖고 싶니?”

   “응.”

   “곧 갖게 될 거야.”

   나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양말을 신겼다. 마지막으로 여권까지 가방에 챙겨 넣은 후 다시 집을 나섰다. 보모는 오늘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장례식을 끝낸 후, 아이와 함께 하와이에 있는 친정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건 상복으로 갈아입으면서 결심한, 그러니까 불과 몇 시간 전에 결심한 마음이었다.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삶의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 우선 쌓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쌓아야 할 것들을 공부하고 만들어 가느라 연애는 뒷전이었다. 훗날 가난한 부모도 무식한 부모도 되고 싶지 않아서 누구보다 애면글면 살았다. 악바리, 독종이라는 별명이 생겨도 그보다 더한 단어로 불리길 바라며 삶에 단 한 번의 요령도 피우지 않고 청춘을 보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학력과 커리어는 내가 갖지 못한 배경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그놈의 출신.

   남편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조성숙 때문에 힘들어할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건 나였다. 남편이 나와 비슷한 꿈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완벽한 가정. 아이를 원했지만 낳고 싶지는 않았던 나, 자신의 아이를 현명하게 키울 수 있는 여자를 원했던 남편, 우리에게 완벽한 가정은 가능할 거라 믿었다. 도대체 남편에게 부족했던 건 뭐였을까. 조성숙만이 줄 수 있는 게 뭐였을까. 조성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어지는 섹스를 경험하면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요. 그게 뭐였을까.


   장례식장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오전 열 시가 가까웠다. 그사이 조성숙이 풀려났고 남편의 사인은 자살로 종결될 것 같다고 경찰이 말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 주지 않았다. 전 와이프의 집에서 팬티 차림으로 투신한 남자에게 타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자살일 수도 있겠지. 죽고 싶었던 사람이 죽어도 되는 곳에서 죽은 것일 수도. 내가 남편에게 만들어 주었던 안정적인 가정이 결국 맞지 않는 옷이었을지도. 남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빈소 옆 방 안에서 아이에게 상복을 입히고 있는데, 함정희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함정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몇 번 쓰다듬다가 남편의 생명보험에 관해 물었다. 자살이어도 나오는 돈이 있다고 말했다. 역시 사람의 본색은 누군가를 상실했을 때 드러나는 것일까. 함정희는 자신의 집에 압류 딱지가 붙던 순간까지 우리에게 돈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렵게 재혼한 동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결국 압류 문제를 해결해 준 남편이 말했었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남편이 죽어서 나오는 보험금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함정희에게 돌아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것이었다. 

   “보험 관련해서는 몰라요. 변호사가 처리할 거예요.”

   “그럼 결과가 나오면 알려 줘.”

   “왜요?”

   “왜라니? 내 동생인데 당연히 알아야지.”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함정희의 낯빛이 울긋불긋해졌다. 함정희는 논리적이고 차분한 사람한테 이기는 법이 없었다. 이기지 못해서 늘 목소리만 높였다. 그런 성격은 조성숙과 너무나 닮아서 두 사람이 불붙으면 총만 없었지 전쟁터 같았다고 남편이 말했었다. 그런 함정희가 명색이 고모라고, 아빠 잃은 조카 앞이라고 험한 말은 삼가는 노력이 엿보였다. 남동생이 결혼을 두 번이나 하고 죽었는데도 아직 자신의 친정 소속인 줄 아는 건 무식한 걸까 뻔뻔한 걸까. 

   “어쨌든 나중에 얘기해.”

   함정희가 나간 후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조성숙을 만났다. 빈소에 들어갈 용기는 없었는지 구석 틈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조성숙은 자신의 딸을 보고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도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유서를 남겼더라고요.”

   “그래서요?”

   “중요한 내용이 있으니 보셔야 해요.” 

   “관심 없어요.”

   “이래도요?”

   조성숙이 들이민 종이에는 조성숙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이를 그녀에게 돌려주라는 문장까지 읽었다. 어떤 경로로 쓴 유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의 필체가 맞았다. 

   “아이를 키우시게요?”

   나는 조금 비아냥거렸다.

   “아이 아빠가 죽었으니, 아이를 데려가고 양육비를 총합해서 받아야겠어요. 우리 몫의 보험료도요.”

   “소송하세요.”

   “뭘 그렇게까지 해요. 죽은 남편이 남긴 유언인데, 모른 척할 거예요?”

   “돌아가세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잖아요.”

   “소송하라면 못 할 줄 알아?”

   “하시라고요.”

   “나쁜 년. 그러니 남자가 마음을 못 잡고 우리 집에 드나들었지. 잘난 집안 딸이라고 고고한 척, 깨끗한 척했겠지만, 함재훈은 날 그리워했어. 내 몸을. 너만 없었으면 우린 재결합하고도 남았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이유도 있었지만, 조성숙이 나와 싸워 이길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상복 입을 자격이 없는 여자가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는 건 누가 봐도 불리한 입장이었다. 조성숙은 그걸 아는 사람이라 말이 많은 것이다. 불리한 사람은 성급하고 말이 많다. 유리한 쪽은 쓸데없는 말로 속내를 보일 필요가 없다. 내가 지금 가져야 할 태도는 남편을 잃어버린 여자다운 슬픔을 머금고 나를 향한 시선을 향해 애도를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장례식장이 분주해지자 조성숙은 사라졌다.

   남편의 어머니인 고달자가 왔다. 황망한 몸짓으로 입구에 들어선 고달자는 신발을 벗자마자 방바닥에 엎어져 통곡을 했다.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여자 잘못 만나서, 착하고 착한 내 새끼… 고달자가 애달픈 울음소리와 함께 내뱉는 말들은 이해할 만했다.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여자가 곡하는 모양새는 문상객들의 눈시울을 자극했다. 고달자는 방바닥을 두드리며 몸을 비틀었다. 잠깐 까무러치는 행동도 잊지 않았고 그때마다 가족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고달자가 상복 입은 주은이를 발견했다. 고달자가 주은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나는 주은이의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고달자는 주은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이 어린 것이 이런 옷을 입고, 복도 없는 내 새끼… 주은이가 불편한 표정으로 고달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달자의 품에서 아이를 해방시켰다. 그때 고달자는 나를 처음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여우 같은 년, 내 새끼 사업도 다 빼앗고, 멀쩡한 남자를 집안 살림이나 부리고, 이 죽일 년, 이제 손주까지 훔쳐 가려고… 뿌질뿌질 울화가 치민 고달자가 주은이의 한쪽 손을 붙잡아 당겼고 나는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고 결국 주은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 시선이 화살촉처럼 뾰족해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딸아이를 지켜야 했다. 

   조성숙은 남편의 발인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 눈에 띄면 머리채가 남아나지 않을 거란 걸 본인도 아는 것이다. 장례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게 요구사항을 말해 두었으니 내가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속해서 연락하거나 협박을 일삼을 여자였다. 그러나 법적으로 받아 낼 수 있는 돈은 없었다. 조성숙은 세상 사람들 모두 죽은 남편 같은 줄 알거나, 떼쓰고 협박하는 게 아무에게나 통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죽은 남편의 전 부인을 상대로 고민할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돈 때문에 친권까지 포기했던 여자와 상대할 가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발인이 끝나고 상복을 반납한 후 고달자에게 말했다. 아이와 함께 하와이로 가겠다고. 기력이 다 빠져나간 고달자는 순순히 허락했다.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시기상조 같기도 했지만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의 가족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고달자의 고분고분한 태도는 이미 예상했었다. 말로는 내 새끼, 내 새끼, 하지만 주은이를 맡아 키울 자신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주정뱅이 조성숙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내가 어디로 데려가서 키우든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 한국보다 하와이가 낫겠지. 거기에 에미 친정 식구들이 있으니까 주은이한테 가족도 생길 테고, 친정이 잘산다고 하니까 애 교육도 잘 시킬 테고, 훨씬 낫겠지.”

   고달자는 마치 주은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듯 말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가 당신 손주를 데리고 타국에 가서 살겠다고 하는데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다. 핏줄 타령은 자신에게 득이 될 만한 게 있을 때만 들이대는 무기였다. 

   내 친정을 들먹이는 건 결혼 전부터 그랬다. 걸핏하면 조성숙과 비교하면서, 조성숙의 집안과 비교하면서 나를 며느리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조성숙의 집안이 최악인 건 아니었다. 춘천에서 닭갈비 매장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여동생이 있었다. 적당히 평범한 집안이었지만, 내가 들려준 나의 집안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고 그래서 고달자는 나를 탐했다.

   “그래도 사위가 죽었는데, 너희 부모님은 오지도 않고. 결혼식 때도 코로나 때문에 못 왔는데, 너무 냉정하구나. 지금은 비행기를 탈 수 있을 텐데. 하기야 딸 시집보낼 때도 안 왔는데 과부 된 거 보러 오겠어. 못 오지. 하와이가 멀기도 멀고. 얼마나 멀어?”

   고달자는 얼마나 멀어,를 말하며 함정희를 쳐다보았다. 함정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몰라서 그러는 건지 대답하기 싫은 건지 인상만 썼다. 고달자와 나의 대화에, 주은이를 데리고 하와이로 가겠다고 말하는 상황에 함정희가 끼어들지 않는 건 의외였다. 다들 아는 거였다. 주은이를 맡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막상 본인들이 어떤 책임을 떠안게 될까 봐 꼬랑지를 내리는 것이었다. 

   고달자의 질문에 대답은 내가 했다.

   “항공으로 아홉 시간쯤 걸려요.”

   내 말에 고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멀긴 멀어.”

   나는 하와이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그곳에 아는 사람도 없다. 서류상으로 나는 가족이 없었다. 조실부모라도 너무 조실이라 기억나지도 않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사내도 아니고 계집애라 친가에서는 외면했고, 신혼부부였던 이모네가 맡아서 키우다가 자신의 아이가 생기자 내다 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어린이날과 생일날에는 선물을 보냈다고 했다. 그마저도 몇 년 가지 못한 죄책감. 피를 나눈 가족이었지만 이촌이 남긴 어린 삼촌에게는 정이 채 들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교회 복지관에서 자랐다.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고 말이 없는 아이로. 거짓말을 진짜처럼 할 줄 아는 아이로.

   남편과 그의 가족을 속이는 건 쉬웠다. 내게 이미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는 배경을 의심하지 않았다. 온화하게 살아온 듯한 미소를 지을 줄 알고, 단정한 옷차림과 예의 바른 말투는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랐을 거라는 추측을 상대가 먼저 하게 만들었다. 그런 조건을 만들어 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만약 내가 복지관에서 자란 고아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남편도 그의 가족도 나에게 기죽어 살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쉽게 내 삶의 이정표를 바꾼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죄책감도 없었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나인데, 어째서 나는 내 배경에 의해 사랑받을 수도 천대받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건 그런 사람들 잘못이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첫사랑을 잃었던 날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유령 가족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나의 가족은 하와이에 살기도 했고 중국에 살기도 했고 캐나다에 살기도 했다. 부모님의 직업은 사업가였다가 교수가 되기도 했고, 자매가 생겼다가 남매가 되기도 했다. 오늘까지 내 가족은 하와이에 살았고, 부모님은 사업가였고, 나에게는 오빠가 있었다. 이제 그들은 사라져도 좋을 시간이 왔다. 


   요셉이 찾아온 건 발인하는 날이었다. 장지까지 동행해 주었고 모든 장례가 끝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 회사의 자문 변호를 맡은 사람이었다. 같은 복지관에서 자란 우리는 복지관의 자랑이었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에 요셉은 변호사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때문에 억울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공부했다. 내가 하와이 출신이라는 거짓에 신뢰를 얻게 해 준 일등 공신도 바로 요셉이었다. 때로 내가 괴로워할 때마다 요셉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 힘들다면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우린 사랑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느냐고.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만 있었고 연인이 되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는 요셉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하는 삶이 고달팠다. 알고 보면 유령 가족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사람들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가족을 두고 유령 가족을 들먹이기도 했다. 몇십 년, 몇백 년 전에 죽은 조상을 내세워 자신의 집안을 과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물색없는 짓인가 싶지만, 실제로 조상이 스펙이 되기도 했던 시절에 나는 청춘을 살라 공부만 했다. 그러나 매번 그들에게 지고 말았다.

   남편은 요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업적인 판단을 너무 쉽게 한다고 말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요셉이 고아라는 사실을 남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말들이 거슬렸다. 결혼과 이혼을 일 년 안에 끝낸 요셉은 성격이 급하긴 했다. 요셉이 만들어 낸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가족이라는 걸 알게 된 요셉의 아내가 요셉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요셉은 무릎 꿇고 빌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요셉의 아내가 소송을 취하하고 협의 이혼을 선택한 것은 그동안 요셉이 너무 잘해 줬기 때문이었다. 요셉은 내가 봐도 완벽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아무리 완벽해도 완벽한 가족이 없다면 완벽한 게 아니었다. 

   내가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요셉은 법적인 문제들을 처리해 주었다. 남편의 사망 신고, 집을 처분하는 일, 보험과 관련된 것들을 전부 맡아 해결했다. 주은이와 나의 하와이행 항공권도 준비해 주었고 하와이에서 지낼 집도 계약한 상태였다. 나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 며칠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업은 하와이로 본사를 옮길 계획이어서 도착하자마자 만날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주은이의 손을 잡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오자 우리를 발견한 요셉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보는 눈이 많아서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내 새끼 잘 부탁한다. 에미야. 사돈한테도 안부 전하고. 도착하면 연락할 거지?”

   함정희의 손을 붙잡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고달자가 핍진한 얼굴로 말했다. 빈말을 할 수는 없어서 나로서는 마지막이 될 인사를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건강 잘 챙기시고요.”

   고달자는 주은이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챙기지는 않았다. 그건 함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정 떼려는 마음들이 가득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요셉의 차가 먼저 출발했고, 나도 주은이를 태워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입구에서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처분해 줄 사람이었다. 남편의 차였지만, 처분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요셉은 차를 처분한 후 수화물까지 해결하고 우리가 있는 라운지로 왔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이든 지금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무래도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는.

   요셉이 내게 비닐봉지 하나를 건넸다. 경찰에게 받은 남편의 유품이라고 했다. 비닐봉지 안에는 휴대폰과 하얀 종이가 몇 개 들어 있었다. 남편의 지긋지긋한 유서인 것 같았다. 이걸 내가 꼭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요셉이 대답했다. 그것도 자신이 처리해 주겠다고. 뭐든 말만 하라고. 그래도 안 보기는 찝찝해서 종이 하나를 펼쳤다. 늘 보아 왔던 일기 같은 유서들. 그 속에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나는 늘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껴야 했고’라는 부분이었다. 그가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게 나라는 사람을 향한 열등감이었을까, 내가 만든 유령 가족 때문에 생긴 열등감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내게 열등감을 느껴서 밤마다 조성숙을 찾아갔다는 건 변명이고 비약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주은이를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나도 자리에 앉았다. 주은이의 손을 꼭 붙잡았더니 그 손 위로 다른 손이 얹혔다. 비로소 편안한 표정의 요셉.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다짐 같은 것. 이를테면, 좋은 남편이 되겠다거나 이상적인 가정을 꾸려 보자는 얘기들이 느껴졌다. 이제 주은이에게는 진짜 하와이에 사는 부모가 생길 것이었다. 서로 다른 혈액을 가진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 버림받은 우리는, 지긋지긋하고 허망한 핏줄 관계에서 벗어나 완벽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수면제 한 알을 삼키고 휴대폰을 비행기 탑승 모드로 바꾸려고 하는데, 조성숙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한 조성숙. 남편을 죽였는지 죽게 만들었는지 본인만 알고 있을 진실. 진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진실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는 것을, 숨겨야 할 진실로는 어떤 협박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조성숙. 그녀의 발광하는 모습이 파름한 하늘 아래로 낙하하는 걸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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