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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3-10-25
  • 조회수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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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경


   시월의 마지막 날 밤에 소희는 현관 신발장의 맨 위 칸에서 열쇠를 발견했다. 사 개월 전 이사 온 이후 들여다본 적 없는, 간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황동색 원형 문고리 네 개를 넣어 두다가 손끝에 금속 재질의 작고 납작한 물건이 스쳤다. 소희는 열쇠라는 물건 자체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아마 연호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열쇠로 잠그는 무언가가 없었다. 소희는 부엌으로 가서 연호에게 열쇠를 보여 주었다.

   “저 방 열쇠인가?”

   연호는 설거지를 하면서 복도 너머를 눈짓했다. 소희는 부엌을 나와 복도를 지나 현관 맞은편으로 갔다. 연호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따라왔다.

   “뭐 해?”

   “맞는지 보려고.”

   문고리의 구멍에 밀어 넣은 열쇠는 끝까지 들어가 맞물렸다. 그대로 비틀어 잠긴 문을 여는 대신 소희는 주아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사이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호의 고무장갑에서 떨어진 물이 복도에 점점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연호가 설거지를 마치는 동안 소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지 않는 주아에게 카톡을 보냈다. 열쇠를 찍은 사진도 첨부해서. 그러다 습관처럼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커다란 성당 앞 광장의 분수대에 선글라스를 쓴 주아가 걸터앉아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소희는 검지와 중지로 화면 속 사진을 늘려 보았다.

   그곳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라는 건 십 분 뒤에 알게 되었다. 주아는 쾌활한 목소리로 일주일 뒤에 귀국해서 열쇠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통화가 끝난 뒤 소희는 현관에 간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신발장 맨 위 칸, 네 개의 문고리 옆에 열쇠를 넣어 두었다.


*


   소희와 연호는 주아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희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간간이 주아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필 사진이 바뀐 친구를 친구 목록의 상단에 올려 두는 카톡의 서비스가 주아의 순간순간들을 보여 주었다. 새로운 사진 옆에 떠 있는 빨간 점이 사진을 눌러 보게 했다. 눌러 보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빨갛고 작은 점이. 소희는 모텔에서 연호가 씻는 사이 침대에 누워서 주아의 사진을 보곤 했다. 그럴 때면 검지와 중지로 사진을 늘려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어디일까. 간혹 뒤에 찍힌 유명한 건축물을 알아볼 때도 있었다. 에펠탑이나 루브르박물관 같은.

   소희는 파리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공식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A시와 B시에도 가 보지 않았다. 복지와 정책부터 문화 축제의 일정도 줄줄이 읊을 수 있고 유원지의 주차장 요금까지 꿰고 있지만 축제의 길거리 음식은 어떤 맛인지, 그 근처의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매번 포스팅을 쓸 때마다 아름다운 도시 A시에 놀러 오세요, 라는 말을 꼭 썼다. 가끔 댓글에 모르는 질문이 달리면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A시 주무관은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고생이 많다며 A시에 오면 꼭 대접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소희는 그럼요, 꼭 한번 갈게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반년 전이었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의 사진을 걸어 놓는 것만으로 소희의 친구 목록 한 칸을 차지하고 있던 주아가 대화 목록에서도 한 칸을 가져갔던 게. 소희는 연호와 프랜차이즈 빙수 전문점에서 인절미 빙수를 먹다가 주아의 메시지를 받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연호는 고개를 빼고 주아와 소희의 대화 창을 보았다. 

   너희들 집 구하고 있다며?

   이 메시지를 보고 연호는 신기해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애들이 말했겠지. 소희는 시선을 휴대폰에 둔 채 말했다. 충분히 예상됐다. 그 애들은 소희와 연호가 집을 구한다는 것만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소희가 당첨된 청년 주택에서 동거하더라, 그 집은 1인 가구용 1.5룸인데 몰래 같이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이 년 전부터 전해 왔겠지. 그리고 그 거주 기간이 만료되어서 이제 나가야 한다더라, 라는 최근 소식으로 업데이트됐을 것이다.

   그 애들은 소희에게도 주아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번엔 어딜 갔더라, 뭘 샀더라, 하는 말들을. 이십 년 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단기 임대 숙소로 운영한다는 것도 그 애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소희는 그 숙소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숙소 이름은 연희 할머니 집이었다. 연희동에 있는 따뜻하고 정겨운 할머니 집이라는 레트로 컨셉이라고 프로필에 설명되어 있었다. 정작 가격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고 다정하고 친근한 설명 아래 사무적인 문장이 전부였다. 가격은 DM으로 문의 주세요. 그 옆에는 기도하는 손 모양의 이모티콘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자 정사각형 3열로 배열된 사진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때 본 사진들이 카톡으로 들어왔다. 주아는 한국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운영이 번거롭기도 하고 귀찮아지기도 해서 세를 주려고 한다고 했다. 

   너희가 들어오면, 동기들이니까 좀 깎아 줄게.

   그럼 얼마인데?

   토독토독, 두 엄지로 자판을 두드려 메시지를 쓰면서, 소희는 마치 디엠을 보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아의 답장이 왔다.

   음.

   이후 몇 초 동안 답이 없었다. 소희는 으음, 하고 시선을 내리까는 주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게 만들던 그 표정.

   일단 와 볼래? 같이 보면서 얘기하자.

   가격은 DM으로 문의 주세요. 기도, 기도. 그 문장과 떠오르는 대답이었다. 다이렉트 메시지도 아니고 다이렉트 미팅이네. 그런 생각도 했지만 연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연호는 녹아 가는 빙수를 먹고 있었다.

   주아는 주말 정오에 오라고 시간을 정해 주었다. 체크아웃 시간 열한 시와 체크인 시간 세 시 사이여서 투숙객과 마주칠 일 없는 시간대였다. 앞치마를 두른 청소부가 집을 청소하는 동안 주아는 그들에게 집을 보여 주었다. 현관 옆의 거실 화장실부터 짧은 복도를 지나 왼쪽의 부엌, 오른쪽의 거실과 그 끝의 안방, 안방 욕실, 그 옆의 작은 방까지. 

   집은 더할 나위 없었다. 건물은 노후했지만 집은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었고 거기다 풀 옵션이었다. 냉장고, 세탁기, 방마다 달린 에어컨은 물론 식탁과 의자와 붙박이장과 텔레비전과 소파, 심지어 더블 침대까지. 주아는 이 모든 것을 보여 준 뒤에야 보증금과 월세, 관리비를 알려 주었다. 소희는 머릿속으로 대출 금액과 이자에 대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아파트니까. 완전한 풀 옵션이니까. 무엇보다 누구나 탐낼 만큼 예쁘고 잘 관리된 곳이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내 볼 만했다. 

   그런데 저 방은 뭐야?

   소희와 주아를 따라다니기만 하던 연호가 물었다. 현관 쪽의 거실 화장실을 보고 난 뒤 복도로 가기 전 지나친 방이었다.

   아, 저 방은 잠겨 있어. 내 물건이 있거든. 너희도 방 두 개 정도면 되지?

   주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간 거주했던 그 집은 부엌도, 거실도 이 아파트보다 훨씬 작고 방과 화장실도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 집에서 아웅다웅 잘 살았다. 방이 두 개, 화장실이 두 개고 거실과 부엌이 널찍한 이 집에서는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방은 처음부터 없는 방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유월 말의 이사 날에는 짐이 많지 않았는데도 정리가 마무리되자 자정이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누운 소희에게 연호가 제안했다.

   소희야, 우리 산책할래?

   산책? 안 피곤해?

   나 산책로가 있는 아파트에 살아 보는 거 처음이야.

   대체로 침착하고 무던한 연호가 가끔 들떠서 뭔가를 해 보자고 할 때 소희는 대부분 거절하지 못했다. 그들은 카디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차림으로 산책로를 조금 걸었다. 산책로는 생각보다 어두웠고 사람이 없어서 을씨년스러웠다. 십 분 정도 걷다가 돌아온 그들은 단지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이제 우리 여기 주민이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연호가 중얼거렸다. 소희는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섯 번도 넘게 와 본 집인데 그 순간에는 기분이 묘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에는 설레기까지 했다. 신발을 벗은 뒤 화장실과 현관 맞은편 방을 등지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그들은 집을 구경하러 온 손님처럼 새삼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 집의 매력 포인트는 요즘은 다 없애는 체리 몰딩을 그대로 살린 부분이었다. 두껍고 색 진한 몰딩이 거실 천장의 샹들리에, 진한 고동색 마룻바닥과 어우러져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냈다. 자줏빛 소파와 이젤에 거치한 46인치 텔레비전이 거실의 포인트가 되었고 주방의 6인용 원목 테이블이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안방에는 페르시안 문양의 극세사 러그를 깔고 원목 침대 헤드에는 은은한 간접 조명을 달았다. 침대의 양옆에는 빈티지 협탁을, 맞은편에는 각종 오브제를 진열한 장식장을 배치했다. 옷방 겸 서재로 쓸 작은 방에는 붙박이장 앞에 책장과 컴퓨터 책상을 넣고 원목 선반 위에 크고 작은 소품을 두었다. 내가 손님이라면 이 집에 정말 살고 싶을 거야. 소희는 생각했다. 연희 할머니 집의 인스타그램의 계정에 들어가 보자 마지막 피드에 영업 종료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이사한 뒤 한동안은 인기 많은 숙소에 여행 온 기분을 느끼며 지냈다. 때때로 보이는 풍경마다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하얀 이불 시트와 격자무늬 창문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연호가 꽃을 사 와서 거실 테이블의 화병에 넣어 두었을 때. 배달로 시킨 음식을 그릇에 담고 원목 테이블에 플레이팅 했을 때. 

   그 방이 다시 눈에 들어온 건 문고리 때문이었다. 이 집의 문고리는 체리 몰딩과 마찬가지로 요새 보기 힘든 황동색 원형 문고리였다. 작은 구 모양의 손잡이를 쥐고 손목을 써서 돌려야 열리는 방식이었는데, 지난주에는 안방에서 문고리가 저절로 잠기고 말았다. 연호가 업자를 불러오는 두 시간 동안 소희는 안방에 갇혀 있었다. 

   출장 온 업자는 이런 이유로 원형 문고리는 요새 거의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쇠가 문고리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보관을 잘못해 잃어버리면 열쇠를 복사하기도 번거롭고, 한번 잠긴 문고리는 일반인이 열 수 없어서 손목이 약한 어린이나 노약자가 갇히는 일이 많았다고. 레버형 문고리는 젓가락 같은 긴 막대로도 열려서 잠기더라도 쉽게 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갈 때 원상 복구만 하면 뭘 하든 상관없댔지? 문고리 바꿔야겠다.

   업자가 가고 난 이후에 연호는 바로 말했다. 소희는 으음, 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주아가 괜찮다고 했다니까. 연호가 재차 말했다.

   아니, 그냥 아쉬워서.

   뭐가?

   저 문고리가 이 집이랑 잘 어울리니까.

   레버형 문고리도 잘 어울리는 게 있을 거야.

   그들은 십 분 만에 무광 금색 문고리를 골랐다. 그리고 주문 개수를 정할 때 의견이 갈렸다. 소희는 문고리를 바꾼다면 통일감을 위해서 모두 바꾸고 싶었다. 쓰지 않는 방이라도 그 방만 문고리만 다르면 두고두고 거슬릴 것 같았다. 연호는 저 방은 주아의 방이니 아무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방 문고리 바꾼다는 건 네가 주아한테 말할 거야? 그런 말까지 하면서. 소희는 주아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통일감을 위해서야. 주아는 뭐라고 대답할까?

   안방과 서재, 화장실 두 개의 문고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그 방을 자주 흘끔거렸다. 저기에 뭘 뒀을지 추측해 보기도 했다. 명품 가방과 시계.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험담을 적은 노트.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다는 친어머니-동기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의 유품. 탈세-이것도 소문으로만 들었다-를 위해 묵혀야 하는 현금 다발. 모두 타인에게 세를 준 집에 둘 물건은 아니었다. 차라리 범죄 현장을 은폐한 게 아니냐는 가설이 제일 유력했다. 

   그러면 저 안에 피 묻은 시트랑 범행 도구가 있는 거야?

   그건 좀 무서운데.

   그럼 어떡해?

   그래도 살아야지. 그냥 생각하지 말자.

   그들은 상상을 그만두었다. 다행히 그 방은 거실이나 부엌, 안방과 서재와는 동떨어진 현관 앞에 있었으므로 자주 생각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문고리가 다른 그 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의 집에 있는 방문이 아니라 옆집의 현관문처럼 느껴졌다. 늘 보이지만 열어 볼 수는 없는.


*


   그런데 열어 볼 수 있게 된 거잖아? 저녁에 이를 닦으며 소희는 문득 생각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주아가 오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았다. 잠깐 열어 보고 닫은 걸 주아가 알 방법은 없을 텐데. 소희는 욕실에서 나와 그 문을 바라보고 섰다. 이 문은 옆집의 현관문이 아니라는 걸 방금 깨달았다는 듯이. 차가운 금속 열쇠를 손에 쥐어 보고, 문고리의 구멍에 맞춰 보고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 방은 그들의 집 안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하나였다.

   “넌 안 궁금해? 저 방에 뭐가 있는지.”

   연호와 거실에서 빨래를 개면서 묻자 연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희를 보았다.

   “저 방이 궁금해졌어? 왜?”

   소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열어 볼 수 있으니까.”

   이전까지 그 방을 열어 볼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그게 불가능해서였다. 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에게 열쇠가 있었고 그들이 열어 본 걸 알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연호는 회의적이었다.

   “괜히 봤다가 갖고 싶어지면 어떡하게.”

   “내가 주아 물건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그럼 왜 보고 싶은 건데?”

   “그냥 궁금하잖아.”

   그게 다였다. 주아 같은 애가, 이런 집을, 데면데면했던 동기 커플에게 임대하고 잠근 방에는 뭐가 있을지가 궁금했다. 빨간 점이 뜬 사진을 눌러 보는 호기심과 비슷했다. 눌러 보지 않으면 친구 목록 상단에서 계속 보이는 게 문제였다. 확인되지 않은 무언가가 자꾸 시야에 걸리니까.

   “그 방 안에 CCTV가 있으면 어떡해?”

   “거기에 CCTV가 왜 있어?”

   “귀중품을 둬서 달아 놨을 수도 있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럴듯하기도 했다. 주아는 그들에게 연락하기 전까지 생판 남에게 세를 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소희는 자세를 고쳐 앉아 빨래를 각 잡고 개기 시작했다. 하지 못할 이유가 생기면 빨리 포기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연호가 웃으며 말했다. CCTV는 이래서 필요한가 봐.

   그런데 CCTV가 정말 있을까? 다음 날에도 소희에게 이런 생각이 때때로 비집고 들어왔다. CCTV까지 들여서 관리해야 할 물건이라면 애초에 그 방에 두지도 않았을 텐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열어 보기엔 좀 께름칙했으므로 소희는 결국 현관의 간이 의자를 밟고 올라서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이 호기심에서 해방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드디어 주아에게 그 열쇠를 줘 버릴 수 있고, 저 방문은 다시 옆집 문이 될 거라고.

   일주일에서 하루가 더 지나도 주아는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소희가 보낸 카톡도 읽지 않았다. 소희는 연호와 이야기하다가 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거? 그냥 거기 놔둬! 내가 요즘 바빠서 거기까지 갈 시간이 없네.

   어디에 있는지 수화기 너머가 시끄러웠다. 연호를 힐끗 본 소희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주아야, 그러면 그 방 말이야, 문고리만 바꿔도 될까?”

   연호가 눈을 크게 떴다. 문고리? 되묻는 주아에게 소희는 찬찬히 설명했다.

   “방 문고리를 다 바꿨는데 그 방만 못 바꿔서. 별거 아니지만 거기 하나만 다르니까 거슬리더라고.”

   -그래, 상관없지! 나갈 때 원상 복구만 하면 돼!

   주아 근처의 음악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목소리를 높이는 주아를 따라 그래! 고마워! 소리 질러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러자 거실이 유난히 적적하게 느껴졌다. 상관없지. 소희는 주아의 말을 되뇌었다. 그건 그 방에 귀중품이나 범법과 일탈의 증거물이 있는 것도, 범죄 현장이 은폐된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쓸 수는 없는 방. 연호가 말했다.

   “문고리는 네 개만 샀잖아.”

   “하나 더 사면 되지.”

   소희는 바로 문고리를 주문했다. 두 번 결제한 배송비는 문고리 하나의 값과 비슷했다.

   이틀 뒤 연호가 퇴근하면서 손바닥만 한 택배 상자를 들고 왔다. 소희는 현관에서 간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신발장 맨 위 칸의 열쇠를 꺼냈다. 연호는 왜인지 긴장되는 얼굴로 택배 상자를 뜯었지만 소희는 주아가 상관없지! 했을 때부터 방 안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긴 문을 열쇠로 열었을 때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방 안의 물건은 딱 세 가지였다. 실내 자전거, 진녹색 빈백과 큼직한 전신 거울.

   “진짜 그냥 물건들이네.”

   뒤에서 연호가 김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는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가 붙박이장까지 열어보았다. 유행이 지난 명품 가방과 코트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주아의 창고였구나. 펜트리나, 다용도실 같은. 버리긴 애매한데 시야에서는 치워 두고 싶은 물건을 보관하는. 소희는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주아는 여기보다 훨씬 넓은 집에서 살잖아. 혼자.”

   “그래? 나는 잘 모르지.”

   “거기도 공간은 많을 텐데 왜 굳이 이 방에 뒀을까?”

   “아무리 넓은 집이어도 집 안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 두고 싶을 수도 있지. 왜, 요즘에는 세대 창고도 있잖아.”

   연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은 안쪽에서 문 잠금쇠를 누르고 나온 뒤 문을 닫았다. 연호는 택배 박스를 정리하고 소희는 신발장 맨 위 칸에 원형 문고리 하나를 더 넣어 두었다. 이 년 반을 함께 살면서 그들은 눈앞의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즉시 나눠서 해 왔다. 청년 주택에 살던 때부터 몸으로 익혀 온, 둘이 살기 비좁은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방법으로. 주아에게는 이런 게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몇 번 타다가 귀찮아진 실내 자전거,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으나 취향에 맞지 않는 빈백과 거울을 세를 주는 집에 두는 것. 그냥 버리지. 돈도 많은데 다시 사면 되잖아. 소희는 연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연호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 것 같아서였다. 버리지 않고 싶을 수도 있지. 사실 소희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럴 수 있다면 그랬을 테니까. 버리기도 애매하고 갖고 있기도 싫은 물건을 남는 집에 두고, 세입자에게 이 방은 쓸 수 없다고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세입자 역할을 맡고 있는 건 소희와 연호였다. 소희는 문고리를 통일하면 그 방도 이 집에 완전히 속하는 느낌이 날 줄 알았다. 긴 막대 열쇠 하나로 모두 열리는, 한 집의 세 방 중 하나로. 그런데 왜 이 집이 그 방에 딸린 것처럼 느껴질까? 그 방뿐만이 아니라 이 집 자체가 주아의 창고인 것처럼. 그냥 창고가 아니라, 뭐라더라. 소희는 연호가 언급한 그 고유명사를 기억해 냈다. 

   그들은 이 집에 오기 전 집을 보러 다닐 때 세대 창고라는 걸 처음 보았다. 예산이 안 된다는데도 구경만 하라는 공인중개사를 따라간 신축 아파트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인중개사는 그들을 지하 주차장에 데려갔다. 주차장 안쪽에 사람 키만 한 사물함들이 늘어서 있었다. 캠핑 용품이나 계절 이불 따위의 부피가 크고 사용 빈도가 적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공인중개사가 설명했다. 넓은 집을 더 넓게 쓰는 거죠. 그런 말도 했다. 칸마다 달린 문에는 호수가 적혀 있었고 그런 칸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어서 마치 아파트 단지를 줄여 놓은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문을 열면 텐트와 낚싯대 옆에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럼 우리는 세대 창고에 사는 거야?”

   연호가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발견한 표정으로. 소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되나, 하고 얼버무렸다. 흐음. 연호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돌려 거실과 주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산뜻하게 말했다.

   “창고가 32평 아파트라면 누구든 살고 싶어 할걸.”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모든 세입자는 임대인의 남는 방, 남는 집에 사는 거였다. 안방과 서재도 있고 화장실도 두 개나 된다면 남는 집이든 창고든 무슨 상관이겠어. 소희는 혼자 생각했다. 연호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맞는 말을 해서 다행이라고. 소희를 바라보던 연호가 놀리듯이 말을 걸었다.

   “거봐, 열어 보면 갖고 싶어질 거라고 했지.”

   “난 자전거나 빈백 같은 거 필요 없어.”

   “그 방이 갖고 싶어졌잖아.”

   소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아까 전부터 목이 말랐다. 한 잔을 다 마시고도 갈증이 남아 있었지만 물병 뚜껑을 닫았다. 

   그 이후로 사나흘 간 소희는 자주 자문했다. 나는 정말 그 방을 갖고 싶은가? 그들에게는 청년 주택에 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었다. 방이 하나 더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정작 다른 공간을 쓸 수 있다면 거기서 뭘 하면 좋을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 방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주아는 아직도 그 방을 잘 사용하고 있었다. 주아가 연락했을 때 소희는 사무실에서 B시 주무관에게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무관은 B시에서 매년 말에 주최하는 지역 축제 홍보 이벤트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한 뒤 통화가 끝나기 전에 말했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사람이 올 거예요. 제가 출산 휴가에 들어가게 되어서요.

   소희는 B시의 주무관이 임산부였다는 걸 전혀 몰랐다. 평일에 거의 매일 통화하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지금까지 점점 불러 오는 배를 안고 출퇴근을 해 왔다고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인사에 주무관은 사무적으로 웃고는 구십 일 뒤에 봬요, 하고 끊었다. 구십 일이구나, 출산 휴가가. 중얼거리던 소희는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발견했다.

   소희야 지금 집에 있어?

   뭐라고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뭐 좀 가지러 가려고!

   소희는 얼떨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가고 나서야,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빈집에 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끊을까 망설이는 순간 주아가 전화를 받았다. 주아는 실내 자전거를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해체부터 운반까지 그 친구가 알아서 할 테니 문만 열어 주면 된다고. 어어, 그래그래, 하고 통화를 끊은 뒤 소희는 이것이 주아가 이 방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이틀 뒤 토요일 오후에 주아는 짙은 금발의 백인 남자를 데리고 왔다.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그 남자는 피부가 그을려 있었고 덩치가 컸다. 그가 소희와 연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하이, 하왈 유 두잉, 하자 연호는 반사적으로 목례를 건넸다. 주아가 호탕하게 웃었고 소희도 따라 웃었다.

   소희는 거실장에서 긴 막대 열쇠를 가져와 그 방을 열었다. 남자가 실내 자전거를 분해하고 해체하는 동안 주아는 주방에서 물을 마셨다. 연호가 물병을 냉장고에 넣으며 주아에게 물었다.

   “남자 친구야?”

   “뭐? 아니야.”

   주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서서 식탁 건너편의 소희와 연호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많은 게 다른, 미지의 존재를 보는 눈이었다.

   “너희는 왜 결혼 안 해?”

   그 질문조차 인터뷰 같았다. 소희는 자신을 보는 연호의 시선을 느꼈다.

   “그냥, 아직 생각 없어.”

   “결혼하면 혜택도 많은데, 왜.”

   “너도 안 하면서.”

   “난 할 사람이 없잖아.”

   주아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복 받은 줄 알고 결혼해. 너희 둘 다 서로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들이야. 아이 가질 생각하면 더 빨리해야 하고.”

   “아이 방도 없는 걸.”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소희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주아는 음,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아이 낳으면 저 방 써.”

   소희는 멍한 얼굴로 주아를 봤다. 

   “아이가 생기면 방이 세 개는 되어야지, 당연히.”

   주아는 그렇게 말했다. 이후 분해한 실내 자전거를 커다란 가방에 챙긴 남자와 집을 나섰다. 

   그날부터 연호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혼부부 혜택이 정말 많긴 하더라, 라는 식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툭 던지는 말투였다. 어느 사무관님 딸이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정말 귀엽더라, 힘들긴 해도 그렇게 행복하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틈틈이 했다. 그렇구나. 소희는 모든 대답을 그렇구나로 통일했다. 이럴 때는 먼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네가 예민한 거 같아,를 말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평소에는 소희가 자주 졌다. 원체 연호가 생각이 많지 않고 무던한 편이어서였다. 둘 사이에서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를 자주 말하는 건 연호 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다더라를 연호가 맡았고 그렇구나를 소희가 맡았다. 그렇다더라와 그렇구나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그렇다더라였다. 그렇구나는 계속 그렇구나여도 되지만 그렇다더라는 매번 새로운 그렇다더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이 난 그렇다더라가 링 위에 흰 수건을 던졌다. 십이월의 첫날이었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네 얘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얘기잖아.”

   “우리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소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돌아서서 거실과 주방의 경계에 서 있는 연호를 보았다. 주아가 이쯤에 서서 그들을 보았을까? 이 정도 거리였나. 주방은 어둡고 거실은 밝아서 연호가 너무 환하게 보였다.

   “생각해 보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잖아.”

   연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연호는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 9급에서 8급으로 승진했다. 사오 년 안에는 7급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평균치가 그렇다고. 

   “나는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

   “우리 사이가?”

   “그런 말이 아니야.”

   소희가 부정했지만 연호는 이미 울 것 같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방과 서재 쪽을 보며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어디든 들어가 방문을 닫고 싶은데 마땅한 방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재로 들어간 연호는 외투를 들고 나와서 집을 나가 버렸다.


*

 

   연호가 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건 삼 년 전 B급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였다. 소희는 그 자리가 연호의 첫 월급날을 축하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 9급 공무원의 월급으로 무리한다 싶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철밥통의 밥을 먹게 되어서 든든한가 보다, 그렇게 여겼다.

   코스 요리의 마지막 순서에서 차와 디저트가 나온 뒤 연호가 자주색 벨벳 케이스를 내밀었을 때 소희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전까지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야깃거리일 뿐이었다. 잠깐 상상해 보면 즐거운, 당장 할 일이 아니어서 편안한, 재미있게 대화하고 바로 잊어도 되는 이야기. 소희는 케이스를 열어 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알았다. 처음에는 반짝이겠지만 몇 달만 지나도 귀찮고 번거롭고 짐이 될 모든 생활. 그것만은 열어 보고 싶지 않았다. 자라며 봐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연호는 케이스를 집어넣으며 눈물을 닦았다. 직원들이 소리 내지 않고 걸어 다니는 홀 한가운데서 소희는 연호를 달랬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리는 너무 어려. 이렇게 성급하게 하면 너도, 나도 후회하게 될 거야. 몇 분이 지나고 연호는 붉은 기가 남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식은 차를 바꿔 주었고 그들은 따뜻해진 차를 천천히 마셨다.

   며칠 뒤 연호는 그때 자신이 뭔가에 씌었다고 말했다. 소희와 같이 살고 싶었고, 독립도 하고 싶어서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수가 틈만 나면 당장 프러포즈하라고 부추겨서 넘어간 게 컸다. 요즘 세상에 공무원이면 결혼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고, 지금 당장은 벌이가 적어도 일단 결혼하면 어떻게든 살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네, 네, 했을 연호가 소희의 눈앞에 그려졌다.

   소희는 연호가 순해서 좋았다. 대학교 때부터 그랬다. 목소리 큰 동기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묵직한 백팩에 전공 서적을 한가득 넣어 다니던 연호. 캠퍼스 벤치에서 소희가 무릎을 베고 잠든 삼십 분 동안 주먹만 쥐었다 펴면서 기다리던 연호. 가끔은 너무 답답하거나 따분해지면 몇몇 동기들의 말을 떠올렸다. 소희야, 이제 보니까 네가 진짜 위너다. 그렇게 자아 없는 남자가 남자친구로 최고더라. 요새 주식 코인 안 하고 맨스플레인 안 하고 여자 친구한테 페미 하냐고 안 물어보는 남자가 어딨니?

   소희도 그 말에 동의했다. 연호 같은 남자는 정말 드물었다. 연호를 놓치면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과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엇갈려 부딪혔다. 

   우선 같이 살아 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날 오전에 청년 주택의 슈퍼 싱글 침대에 누워서 소희는 생각했다. 일상은 공유하고 월세나 생활비도 절약하면서 서류로 얽매여 있지는 않은 상태. 서로 맞춰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감정으로만 묶여서 관계의 긴장감은 유지할 수 있는 생활.

   그다음 주에 연호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소파 베드에 깔 이불 패드를 사고 붙박이장 옆에 둘 행거를 조립했던 게 동거의 시작이었다. 

   연호는 남자 친구보다 동거인으로서 더 훌륭했다. 이불과 베개만 있으면 소파 베드에서도 잘 잤고 한 군데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대로 반나절은 보내는 식이었다. 소희는 침실에 누워 있다가, 식탁에서 노트북을 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와도 그 자리에 있는 연호를 보면서 화분을 하나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화분은 집안일도 하고 월세와 관리비도 분담했다. 그러면서 전입 신고도 할 수 없고 몰래 살아야 한다는 데 보상 심리를 품지도 않았다. 우리는 정말 잘 맞는 것 같아. 같이 살면서 네가 더 좋아졌어. 소희는 화분에 물을 주는 기분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 연호는 조금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청년 주택 거주 기간이 만료되어 갈 즈음 벨벳 케이스를 아직 갖고 있다는 말을 농담하듯 흘리는 연호에게 소희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럼 언제인데? 묻는 말에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소희는 이사를 준비하던 시기에 주임을 달았다. 말이 주임이지 좀 더 오래 다닌 사원이라는 뜻이었다. 대표와 경리 외의 열 명 남짓한 직원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에디터 팀은 중소 규모 도시 시청의 주무관과 소통하며 공식 SNS를 운영하고 디자인 팀은 에디터 팀에서 요청하는 카드 뉴스를 만들거나 계절마다 블로그의 디자인을 교체했다. 모든 직원은 저마다 맡은 도시에 관한 일은 알아서 관리했다. 이 회사에는 직급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표가 입사 순으로 직급을 정리해 제일 오래 다닌 사람은 과장, 그 아래는 대리, 그 아래는 주임, 그 아래는 사원이 되었다. 그중에서 임신하고 떠나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대표 아래의 직원들은 전부 여자였다.

   앞으로도 소희는 구십 일간의 휴가를 보내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유원지가 아름다운 A시와 지역 축제가 풍성한 B시에 가 볼 일이 없듯이. 전철과 시외버스를 갈아타서 가도 사람은 북적거리고 길거리 음식은 값비쌀 것이다. 혹은 뜻밖의 좋은 날을 보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위해서 주말 하루를 투자할 수는 없었다. 삼 개월 휴가 때문에 인생을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소희가 제대로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많은 게 불확실했다. 여기서 대리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의 평균치는 얼마일지, 그 시간도 엄마가 되면 의미가 없어지는지.

   이런 것들을 연호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럼 아이를 안 가지면 되잖아, 그렇게 합의하려 할 거고, 그러면 소희는 그게 다가 아니야, 라고 대답해야 할 테니까. 결혼을 하는 순간 언제든 사직서를 낼 수 있는 ‘잠재적 애엄마’가 되는 소기업에 대해서, 그리고 사실은 자신도 옆자리 주임을 그렇게 봤던 일에 대해 말하는 대신 소희는 정말 결혼을 원하면 헤어지자고 했다. 연호는 그때도 외투를 챙겨 입고 집에서 나가서 반나절 뒤에 돌아왔다. 그들은 다음 날부터 부동산에 찾아가 집을 보러 다녔다.

   왜 자신을 떠나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연호는 소희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나도 몰라. 그건 소희의 나도 몰라와는 달랐다. 연호는 답을 알고 있었고 그 답은 당분간은 연호만의 것이었다. 소희는 언젠가는 그 답을 듣게 될 것 같다고 막연히 짐작해 왔다. 마침내 결혼할 때, 혹은 마침내 이별할 때.


*


   그때와 달리 연호는 삼십 분 만에 돌아왔다. 눈가와 귓가, 뺨까지 모두 빨갰다. 소희는 미리 컵에 따라 놓았던 우유를 데워서 건넸다. 거실에서 연호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소희는 그들의 맞은편에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이젤에 거치된 검은 화면에 그들이 비쳤다. 주변의 조명과 몰딩, 어두운 벽지까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주인이 한 땀 한 땀 그려 놓은, 어떻게 되더라도 원상 복구의 의무가 있는 그림. 그들은 거기 안에 있었다. 정적 속에서 소희가 연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재밌는 거 할까?”

   연호는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다. 화는 안 풀렸지만 들어는 보겠다는 제스처였다. 소희는 연호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주아가 저 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는 안 했잖아. 계약서에도 그런 말은 없어.”

   맞닿은 어깨에서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 그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던져진 화두에 잠시 고민하던 연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은 안 했지만… 우리한테 방 두 개면 되냐고 물어봤잖아. 우린 그렇다고 했어. 그때 우리는 저 방을 안 쓰는 데 동의한 거야.”

   “그땐 그랬지. 그땐 방 두 개면 됐어.”

   소희는 연호처럼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방 두 개가 충분하지 않아.”

   삼십 분 만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연호가 눈을 들어 소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소희는 연호가 다시 반박할 줄 알았지만 연호는 그러지 않았다. 소희는 연호와 눈을 맞추며 한 번 더 말했다.

   “우린 다른 게 필요해. 안 그래?”

   소희는 소리 내서 말한 뒤에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삶의 대부분이 불확실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게 필요하다는 것. 소희는 현관의 신발장이 아닌 거실장으로 걸어갔다. 간이 의자를 놓고 올라서지 않고 허리만 살짝 굽혀 서랍을 열어 막대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불을 켠 뒤에 그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고 제의한 쪽은 소희였지만 소희 역시 이 방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연호가 나가서 무선 청소기를 가져왔다.

   “일단 청소부터 하자.”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방이라 쌓인 먼지가 육안으로도 보였다. 연호는 청소기를 돌리고 소희는 창문을 열어 빈백의 먼지를 털었다. 청소를 끝내고 빈백과 거울을 구석으로 몰아 둔 뒤에 그들은 깨끗해진 바닥 한가운데 누웠다.

   “애 낳으면 이 방 쓰라고 했는데.”

   연호가 지레 찔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소희는 코웃음을 쳤다.

   “선녀와 나무꾼이야? 애 낳으면 주게.”

   그 동화에서도 선녀는 떠나고 나무꾼은 버려졌다. 소희는 그때부터 이 방에 어떻게든 들어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 낳으면 이 방을 쓰게 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이 사회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 출생률 저하 문제의 원인인 채로 이 방에 들어와 눕고 싶었다. 

   “애초에 선녀의 옷이긴 했지.”

   연호가 혼잣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소희에게 덧붙였다.

   “나무꾼이 숨긴 옷 말이야. 원래 선녀의 옷이었다고.”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도 계약 기간에는 그들의 방이었다. 계약서에 그들이 이 집 전체를 빌린 거로 되어 있으니까. 이건 우리 방이고, 나무꾼이 우리 방을 숨긴 거야. 소희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연호에게 질문을 건넸다.

   “넌 방이 하나 더 생긴다면 무슨 방으로 만들고 싶어?”

   “어, 글쎄.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이 안 나네. 영화 보는 방? 그런데 우리는 어차피 영화 잘 안 보고. 그냥 옷방이랑 서재를 분리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

   고민하며 대답하는 연호 옆에서 소희는 두 달 전을 떠올렸다. 문고리가 잠겨 안방에 갇혔던 날 업자가 오기까지 소희는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문 너머에 보호자가 있고 내 공간을 누구도 오가지 않는 상태. 그때부터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같이 자는 안방, 같이 쓰는 옷방 겸 서재가 아니라, 용도도 없고 이름도 없이 두 시간만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이.

   “그런데 그냥 누워 있기만 해도 괜찮네.”

   정적 속에서 연호가 중얼거렸다. 소희는 고개를 돌려 연호를 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빈티지 소품도 없고 우리 짐도 없는 방은 여기뿐이잖아.”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가 몸을 일으켜 불을 끄고 다시 소희의 옆에 누웠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어둑한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약 이 방을 창고로 쓸 수 있다면, 소희는 생각했다. 가장 먼저 이 방에 둘 것은 제대로 듣지 못한 연호의 대답이라고. 그건 정말로 결혼식장에서 듣게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소희는 아주 로맨틱할 게 분명한 그 대답을 계속 모르고 싶었다. 적어도 이 집에 있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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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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