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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니아

  • 작성일 2023-10-25
  • 조회수 781

가드니아

임수정


   죽을 뻔했다.

   경자는 들고 있던 이불을 끌어안으며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 울렸다. 아파트 9층에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경자는 제멋대로 사지가 뒤틀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 갈 자신을 상상했다. 숨이 가빠왔다.

   세상은 고요했다. 하루가 멀다고 악다구니를 치는 옆집 여자의 목소리도 기침을 하는 노인도 캥캥거리는 강아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와 이마로 내려앉았다. 그대로 한참 동안 이불을 껴안고 숨을 쉬었다. 이불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가드니아. 경자는 향기에 붙은 이름을 되뇌었다. 

   가드니아. 낯선 음절과 짐작되지 않는 뜻. 경자는 가드니아라고 다시 중얼거렸다.

 

   하얀 홑이불은 털면 털수록 치자꽃 향이 나는 듯했다. 경자는 늘 같은 향의 섬유유연제를 썼다. 가드니아였다. 마트에서 치자꽃이 그려진 섬유유연제 라벨을 보고 반가워했다가 가드니아라는 이름을 읽은 후 어리둥절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은 경자가 아는 치자꽃인데 왜 가드니아일까 하고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희석되지 않은 향기는 역하기만 했다.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돌리고 나서야 경자는 고대하던 향기를 맡아 볼 수 있었다. 그 향기는 경자가 기억하던 치자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처음엔 베란다 밖으로 팔만 내밀어 조심조심 이불을 털던 경자는 아래층 여자를 떠올렸다. 먼지가 고대로 우리 집으로 들어오잖아요! 몇 달 전 새로 이사 온 아래층 여자는 지난번 경자가 이불을 털었을 때 집으로 찾아와 난리를 쳤다. 경자는 위층에서 아무리 이불을 털어 대도 한 번도 그 먼지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후로 경자는 자주 창가에 앉아서 창문으로 무언가 들어오나 살폈다. 한 번은 윗집 어딘가에서 밖으로 떨어 버린 듯한 모래가, 또 한 번은 오리털 같은 하얀 것이 살랑살랑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경자는 몸을 내밀어 그 털이 하늘로 날아가는지 아래로 떨어지는지 살폈으나 곧 사라졌다. 

   경자는 먼지를 더 멀리 날릴 심산으로 몸을 조금 더 밖으로 기울였다. 여름 아침 하늘에서 달콤한 향기가 불어왔다. 펄럭펄럭 이불이 나부낄 때마다 향기는 더욱더 진해졌다. 터는 팔에 힘이 붙었다. 경자는 무엇에 홀린 듯 더욱 몸을 빼고 팔을 휘둘렀다. 하얗게 나부끼는 이불과 향기가 경자를 취하게 했다. 그러다 휘청, 하며 균형을 잃었다. 가까스로 난간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경자는 이불을 끌어안고 기다시피 거실로 들어와 누웠다. 채광이 좋지 않은 거실은 어두웠다. 죽은 벌레가 유리 안으로 쌓여 얼룩덜룩한 거실 등이 보였다. 경자는 자주 그 모양이 바뀌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모양은 남편이 퉁박을 주던 자신의 삐뚤빼뚤한 글씨 같았다.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볼 수 없는 글자. 가슴이 조여들고 자꾸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일어서서 서랍장을 열었다. 빨간색 액상 우황청심원 병이 빼곡했다. 떨리는 손으로 병뚜껑을 열었다. 쌉싸름한 액체를 삼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숨을 골랐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의사가 가르쳐 준 대로 깊은숨을 내쉬고 들이켰다. 그래도 숨 쉬기가 버거웠다. 다시 우황청심원 병을 따서 마셨다. 이불을 깊이 끌어안았다. 치자꽃 냄새가 났다. 팽팽했던 신경의 끈들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몸은 노곤해졌지만, 정신은 말짱해졌다. 몸은 바닥으로 한없이 가라앉는데 생각은 바늘처럼 또렷해지는 느낌. 경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부딪혔다 떨어지는 눈꺼풀의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죽을 뻔했다.

   경자는 몸을 떨며 그 순간을 기억했다. 몸이 불현듯 휘청이던 순간 온 세계가 멈췄다. 눅눅한 공기 속 불어오던 한 줄기 바람도 이마로 들러붙던 성가신 머리카락도 아프던 팔다리도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한가지의 느낌만 벼려졌다. 죽음. 경자는 몇 번이고 베란다에서 몸을 내밀고 이불을 털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대던 순간의 공기 흐름과 주변의 빛깔, 소리 같은 걸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경자에게 죽음은 쌓인 시간의 당연한 결과였다. 시어머니가 그랬고 남편이 그랬다. 그들은 주어진 시간을 느릿하게 유영하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끌려가듯 떠났다. 경자는 그 두 사람을 보며 자신은 산뜻하게 세상과 작별하리라 생각했었다. 누구에게도 애원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음을 맞으리라고 생각했다. 

   경자는 오늘 경험이 특별했다. 누군가와 나누거나 어디엔가 기록해 두고 싶었다. 처음 죽음을 느낀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박경자 님이 평소에 하시는 생각을 적어 두시는 것도 도움이 되죠.

   상담사의 말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노트를 찾았다.

   노트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칸을 넘나들며 써 놓은 글씨가 가득했다. 경자는 죽음이라고 쓰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헛손질을 몇 번 하다가 결국 쓴 글씨는 가드니아였다. 가드니아. 해독되지 않는 이름.


   전화벨이 울렸다. 경자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었다.

   그래. 별일 없지?

   똑같죠. 뭐.

   일은 안 힘들고?

   네.

   난 괜찮아.

   경자는 새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안부를 전했다.

   나 죽을 뻔했어. 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들은 침묵했다. 둘 사이의 대화는 늘 이어지기 어려웠다. 아들은 철이 들고 나서부터 경자에게 예의 바른 빚쟁이처럼 행동했다. 경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하듯 ‘무조건 참으라.’는 말을 자주 했을 뿐인데 자신을 연민하지도 않는 아들이 서운했다. 아들은 혼자 세상에 태어나 혼자 큰 아이처럼 굴었다. 딱 한 번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죽고 경자가 구청 복지과 직원의 권유로 아파트 역모기지론을 신청한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아들은 참 어지간하시네요, 라고 씹어뱉듯 말했다. 꽉 깨문 턱 근육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경자는 감정을 드러내는 아들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없어도 먼저 끊지 못하는 아들의 성미가 자신과 닮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나 죽을 뻔했어. 여전히 목구멍 속으로 그 말이 뱅글뱅글 돌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경자는 겨우 긁어내듯 말을 뱉었다.

   궁금해서 걸었어.

   경자는 말을 뱉고는 풋 웃었다. 그녀는 늘 아들의 전화를 이편에서 받아도 버릇처럼 궁금해서 걸었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경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굴러나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들이 말했다.

   이따 잠깐 들를게요.

   경자는 잠깐 반가웠으나 곧 귀찮아졌다. 아들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잠깐 들르는 것으로 자식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들과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경자는 아들의 방문을 거절하려 했으나 전화는 끊긴 뒤였다.


   경자는 새삼스레 거실을 둘러보았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거실은 너저분했다. 벽을 등에 지고 놓인 큰 미싱 위로 쌓인 천 더미와 아래로 흩어진 잘린 천 조각이 보였다. 몸집이 큰 공장용 미싱이었다. 아들 돌 무렵 다니던 공장에서 월급이 몇 달 밀리자 남편이 우겨서 리어카로 실어 온 것이었다. 경자는 그걸로 사글셋방 주인집 여자의 옷가지를 고쳐 주고 남편이 가져온 옷도 고쳐 주었다. 남편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심 쓰듯 옷가지를 걷어다가 경자에게 던져 주곤 했다. 경자는 밤을 새워서라도 남편이 가져온 옷을 깨끗이 수선해 놓곤 했다. 

   남편이 살아 있던 때 집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시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간 후 경자는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집 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데 바쳤다. 밤이면 남편이 팔지 못하고 가져온 과일로 청을 만들었다. 설탕에 절인 과일들이 즙을 토해 낸 후 쭈글쭈글해지는 것을 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경자는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과정이란 것은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을 의미했다. 경자는 누군가가 지켜볼 때 더욱 숙련되고 정돈된 동작으로 모든 일을 해냈다. 그 동작은 과시와도 같이 거침이 없었다. 경자는 일을 다니면서도 남편과 아들의 속옷까지 다리미로 다렸고 이불호청은 사시사철 풀을 먹여 손으로 꿰맸다. 사 먹는 음식을 혐오했으며 자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보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노동의 의욕을 확실히 떨어트렸다.

   경자는 이제 종일 미싱과 한 몸처럼 앉아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었다. 덧버선, 소파 커버, 냉장고 손잡이, 밥솥, 전자레인지 덮개 따위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계속해 만들었다. 미싱 옆으로 경자가 보낸 시간의 결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경자는 아무리 미싱을 잘해도 옷 한 벌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와이셔츠 소매나 카라, 바지 허리 같은 그저 옷의 어느 한부분만을 미싱으로 박았을 뿐이었다. 공장 사장들은 일에 필요한 기술 외에 다른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경자는 자석처럼 미싱 앞에 앉았다. 잘라 놓은 누빔천의 테두리에 레이스를 박고 찍찍이를 달았다. 요즘은 팔이 아파서 만들기 쉬운 냉장고 손잡이를 만들었다. 시간을 견디는 데는 미싱질 만한 것이 없었다. 천 색깔에 맞춰 실을 골라 끼우고 하루 종일 아래위로 솔기를 박아 나가는 일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 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TV를 켰다. 몇십 개의 채널엔 매일 똑같은 프로그램이 나왔다. 별것도 아닌 음식을 먹으며 세상에서 처음 맛본 음식인 양 비명 같은 감탄사를 질러 대는 사람들, 음산한 목소리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불륜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하는 여자, 영혼 없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누더기 같은 천막이 멋지다고 반복하는 바보 같은 남자들. 다 남편이 좋아하던 프로그램들이었다. 

   경자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서로 웃고 떠드는 모습은 왠지 기억나지도 않은 과거를 추억하게 했다. 모든 드라마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엄마 아빠도 경자가 보기엔 젊은이였다. 경자는 젊은이의 얼굴 위주로 드라마를 보다가 그들에게 벌어지는 황당한 오해와 꼬리를 무는 가당찮은 우연과 행운, 휘몰아치는 감정을 구경했다.

   경자는 TV를 껐다. 지금 경자가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의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경자는 가드니아를 생각했다. 치자꽃은 뭐고 가드니아는 뭘까. 경자는 오바로크용 바늘로 드르륵 냉장고 손잡이 가장자리를 박으며 자신만 알 것 같은 단어를 생각했다. 오바로크는 오바로크고 자메스는 자메스고 나나인치는 나나인치다. 대신할 단어가 없다. 그런데 치자꽃은 가드니아다. 그것은 경자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경자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알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조여들었다. 

   경자는 생각을 쫓으려 다시 TV를 켰다. 원색의 옷을 입은 가수들이 경자의 젊은 시절 유행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미스터 트롯이 끝난 후 TV에서는 노상 가수들이 나와 흘러간 유행가를 불렀다. 저들은 저 노래가 나왔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뭘 안다고. 경자는 비뚠 마음이 들었다. 경자는 가수들의 얼굴을 보며 저 나이 때 어떻게 살았나 생각했다. 경자는 열두 살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울로 올라와 더부살이하다가 주인집 미싱 공장에 들어갔다. 경자는 그때 미싱이 지긋지긋했다. 잠을 쫓기 위해 계피를 씹어 가며 밤새도록 버선코를 둥글게 박았다. 졸다가 엄지손톱 위로 바늘이 관통해 콸콸 피가 났는데 주인집 여자는 바늘 상처엔 미싱 기름이 즉효라며 경자의 손가락을 잡아 기름에 푹 담근 후 굴러다니는 천을 칭칭 동여매 주었다. 버선에 피가 묻으면 물어내라는 엄포와 함께.

   채널을 돌렸다. 경자 또래의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강연 중이었다. 강연의 제목은 ‘후회 없는 삶과 사랑’이었다. 

   나는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순간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탓하지 마세요. 운명은 감내하고자 마음먹을 때 가장 강력한 나의 편이 됩니다.

   방청객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경자는 후회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저니와 내 삶은 어디서부터 달라졌을까.

   경자는 요즘 미싱사를 그만두던 날의 꿈을 자주 꿨다. 그날도 변함없이 아침엔 라디오로 김기덕의 골든디스크를, 오후엔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를 들으며 와이셔츠 카라를 박았다. 지하에 있는 공장은 계단을 내려 들어서는 순간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되었다. 날씨도 시간의 변화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미싱에 앉아 정해진 양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친 후 동료들과 한 번씩 손을 잡았다. 아이엠에프 때도 두 사람 몫을 해낸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던 경자였다. 그 대가로 경자는 서른 살 즈음에 오십견을 얻었다. 오래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언니가 없으면 우리 어떡해. 나중에 아들 결혼식 하면 꼭 불러, 하고 훌쩍거렸다. 경자는 밝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라 아직 해가 길었다. 경자는 사장이 조금 더 얹어 준 돈으로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인절미와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 거리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밥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시어머니의 입으로 잘게 자른 떡을 조금씩 넣어 주고 물김치 국물을 떠먹였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부드러운 것은 삼키고 딱딱한 것은 씹어 넘겼다. 세수하고 콜드크림을 바르고 어머니 발치에 누웠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끝이 났고 다음 날 경자는 갈 곳을 잃었다. 요즘 눈을 뜨면 경자는 지금 미싱사가 아닌 것이 슬퍼서 눈물이 났다. 

 

   시골에 혼자 살던 시어머니가 반신불수가 되고 나자 경자의 몫이 되었다. 누구도 경자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어머니를 데려왔다. 시어머니는 경자가 없으면 밥을 먹지도 않고 기저귀 갈기도 거부했다. 자신의 아들은 남자라서 싫다고 했다. 오직 경자만이 시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능숙한 조련사였다. 싫고 좋다를 때로는 반대로, 때로는 맞게 쓰며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시어머니는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원했다.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해 주어도 무섭게 화를 냈다. 진심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경자는 그렇게 7년을 병든 노인의 똥오줌을 받아 내고 삼시 세끼를 바로 한 밥으로 지어 바치고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들었다. 남편은 어머니 기분에 따라 경자의 하루를 평가했다. 경자는 눈 오는 날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자 비로소 시어머니에게서 해방되었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하루도 감당할 수 없었고 시동생들은 나 몰라라 했다. 어머니는 지방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떠나기 전날 밤 목을 매려고 넥타이를 매듭 지었다. 경자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았고 재빨리 넥타이를 뺏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자주 경자의 꿈에 나왔다. 그녀는 꿈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자에게 복수했다. 경자를 억지로 밥상에 앉혀 놓고 알록달록하고 번들번들한 옥춘 사탕이나 식어 굳은 떡을 먹으라고 자꾸 권했다. 어떤 날의 꿈에 시어머니는 냇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계속 씻고 있었다. 뭐 하세요? 가서 묻는 경자에게 시어머니는 말갛게 씻은 돌을 치마폭에 쏟아 주었다. 들큼한 목소리로 경자의 귓가에 너만 주는 거야. 하면서 계속해서 돌을 쏟았다. 경자는 무거워진 치마폭을 견디지 못해 물속으로 주저앉았고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어머니가 요양원 생활 삼 년 만에 죽자, 남편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집에서 죽겠다고 선언했다. 병원에서는 6개월을 선고했지만, 남편은 그렇게 삼 년을 더 살았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모든 악다구니와 생떼는 곧 죽을 사람이라는 사실에 가려졌다. 남편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자주 울었다. 그러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밥상을 엎었다. 

   세월이 흐르자 남편은 부처의 얼굴을 닮아 갔다. 귓불은 아래로 축 늘어졌고 체모가 사라진 다갈색 피부는 부드러웠다. 이빨이 다 빠져 쭈글쭈글해진 입으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배경음으로 틀어 놓고 침대에 누워 손만 까딱거리는 것으로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 어쩜 그 댁 아저씨는 그렇게 점잖으세요? 거듭되었던 입원 생활 동안 병실의 모든 사람은 남편의 인품을 칭찬했다. 남편은 부드러운 웃음을 띠는 것만으로 경자에게 모든 감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밤에는 가래 끓는 기침을 오래오래 했다. 처음에 경자는 남편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절부절못했지만 나중엔 눈을 꼭 감고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영생을 누릴 것 같던 남편이 죽고 난 뒤 경자는 후련했다. 이제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자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으며 즐겁게 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자에게 몇십 년간 미뤄 두었던 후회가 닥쳐왔다. 후회는 그림자처럼 경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경자는 손으로 피곤한 눈을 꾹꾹 눌렀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회색의 성근 머리카락 아래 흐리멍덩한 눈과 굳은 입매의 늙은 여자가 있다. 고개의 각도에 따라 처연해 보이기도 혹은 완고해 보이기도 하는 인상이다. 경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한참을 그 여자와 마주했다. 손자국으로 부옇게 된 창문은 어느 순간에 젊은 시절의 얼굴을 보여 주기도 했다. 경자는 그 순간을 찾아 하염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르신 저희 이런 거 받으면 안 돼요.

   앳된 얼굴의 접수대 여직원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왜, 이거 내가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래.

   경자는 웃으며 비닐 봉투 속에 든 걸 꺼내서 내밀었다. 하얀 꽃무늬 누빔천에 노란 레이스가 달린 냉장고 손잡이였다.

   저희 이런 거 못 받게 돼 있어요. 여기 일하는 사람들 커피 한 잔도 못 받게 돼 있어요.

   여직원은 경자의 손에 들린 물건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절했다. 경자는 무안해져서 돌아섰다. 

   구청 건물 지하에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는 한산했다. 구청에서 연결해 준 이곳에서 경자는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짧은 상담과 함께 가슴이 조여드는 증상에 대한 약을 받았다. 건강했던 그녀는 두 환자를 겪으며 고혈압과 관절염과 당뇨와 우울증을 얻었다. 경자는 이름 모를 약 한 움큼씩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연장하며 사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똑바로 바라보거나. 경자는 몰래 사람들을 살폈다. 오가는 사람들의 어딘가 불안해 보이거나 경계하는 눈빛을 보며 경자는 저 사람은 어디가 아프고 우울할까 상상했다. 

   몸집이 큰 여자가 유치원 정도 나이로 보이는 사내애와 같이 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고 제대로 빗지 않았는지 물기에 젖은 머리가 어깨에 얼룩을 만들었다. 여자는 핸드폰에 정신이 빠져 있었고 아이는 반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여자의 다리에 올려놓은 채 까딱까딱하고 있었다. 경자는 아이의 스타킹을 보며 아들과 함께 간 초등학교 소풍날을 떠올렸다. 새로 산 세라복 셔츠에 파란 멜빵 반바지와 흰 팬티스타킹을 입고 간 소풍에서 아들은 사라졌었다. 경자가 한참 후 아들을 발견한 곳은 공원 구석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 가면 늘 아랫도리를 다 벗어 버리는 버릇이 있던 아들은 평소대로 바지와 스타킹을 모두 벗었고 다시 입을 때는 도무지 순서가 기억나지 않았는지 이렇게 저렇게 입어 보다가 결국 바지 위에 팬티스타킹을 덮어 신고는 나오지 못했다. 경자는 엉엉 우는 아이의 등짝을 모질게 내리쳤다.

   남편도 그날 모처럼 일을 쉬고 소풍에 왔다. 경자는 거짓말로 하루 뺀 미싱 공장과 옆에서 계속 툴툴대는 남편이 신경 쓰였다. 남편은 어제 팔다 남은 과일을 걱정하다가 공원 앞 장사치들이 모두 도둑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날 밤엔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들여 술판을 벌였다. 그들 형제는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다 엉엉 울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형님. 우리도 한 세상 봐야지. 경자는 단칸방 구석에서 아들을 껴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공장에 갔다. 

 

   상담사는 아들을 닮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어릴 때 모습과 닮았다. 햇빛을 못 본 것처럼 하얀 낯빛에 동그란 안경과 기다란 손가락, 말할 때마다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아이가 화가 나서 삐죽대는 것 같았다.

   박경자 님은 뭘 좋아하세요?

   경자는 생각했다. 난 뭘 좋아하는가. 내가 뭘 말하면 앞의 남자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중 부끄럽지 않은 것. 토마토 화채, 꽃무늬 인견, 일일 드라마. 여러 단어가 맴돌았다. 상담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자의 답을 기다렸다.

   난 좋아하는 거 없어요.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좋아하는 음식, 색깔, 가수 그런 게 다 있죠.

   상담사는 인내심 가득한 얼굴로 경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자는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럼, 살면서 제일 화났던 일은 뭐예요?

   경자는 가만히 생각했다. 정말 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 적이 있었다. 그건 시어머니의 장례식 때였다. 시동생이 자신에게 흰 리본 핀을 주지 않은 것이다. 남편은 그런 시동생을 나무라지 않았고 경자에게 ‘네가 끝까지 모시지 않은 탓이다.’라고 비난하며 경자의 입을 막았다.

   경자는 상담사에게 그런 얘기를 하기 싫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죽을 뻔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담사는 손가락 새에 낀 펜을 돌리기 시작했다. 경자는 햇빛 한 번 받아 보지 않은 듯한 해사한 얼굴의 젊은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왠지 화가 났다. 상담사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늘 하는 얘기를 꺼냈다.

   박경자 님은 공부를 해 보시는 게 어때요. 요즘은 문해 교육이라고 어르신들에게 쉽게 글을 가르쳐 줘요.

   나 글 읽을 줄 아는데요.

   읽으실 줄 모른다는 게 아니고요. 사람들도 만나 보고 친구도 만들고 하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라는 얘기예요. 뭐든 배워 보시면 우울감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경자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공부를 하면 가드니아의 뜻을 알게 될까. 치자꽃이 왜 가드니아인지 알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단어들이 내게로 들어오게 될까. 경자는 하고픈 말을 접고 다른 말을 꺼냈다.

   선생님 집에 족보 있어요?

   의아해하는 상담사의 얼굴을 보며 경자는 쾌감을 느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에 불이 났던 날 족보만 챙겨 나온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금붙이도 집문서도 다 두고 족보만 가지고 나왔다며 영웅담을 얘기하듯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얘길 반복했다. 아들은 말도 배우기 전부터 그 얘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라고 경자는 생각했다. 지나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편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것이었다. 진짜 지켜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 채로 의무만 강요당한 사람들. 경자를 비롯해 같은 세월을 지난 많은 사람처럼. 그래서 경자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원망했다. 남편을 선택한 자신을. 어느 순간부터 경자는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은 큰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이라고. 그 죄는 두고 갚고 갚아야 없어지는 것이라고.

   경자는 자신을 미워해야 할 때 남편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던 날을 생각했다. 그날의 남편 얼굴은 아주 흐릿했다. 계절이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여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기억나는 건 그 날의 생생한 감정이었다. 남편은 경자와 짜장면을 같이 먹다가 불현듯 말했다. 당신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예고 없이 닥쳐 온 고백에 행복해지기보다도 경자는 무서웠다. 청혼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자는 자주 그 순간을 곱씹었다. 두 젊은이의 수줍은 얼굴이 드라마 속 그것처럼 낯설었다. 경자는 그 순간의 선택이 오직 자신에 의한 것이었음을 되뇌었다. 

 

   경자는 아파트 앞 새로 생긴 설렁탕 집에 들어서서 쭈뼛거렸다. 카운터에 있는 주인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입술만 웃으며 경자를 바라보았다. 경자는 주섬주섬 냉장고 손잡이가 든 비닐 봉투를 끌렀다.

   이거 두고 손님들 하나씩 주세요. 내가 만든 거예요.

   가게 주인은 차가운 눈으로 경자를 훑었다.

   안 사요. 잡상인 출입 금지예요.

   경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안 사요.

   경자는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내가… 오늘 아침에 내가 죽을 뻔했는데… 목구멍에서 하지 못한 말이 뱅글뱅글 작은 덩어리로 돌았다. 왜 사람들이 냉장고 손잡이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이 오면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앞에 선 장터에서 두부를 한 모 사 들었다. 청양고추도, 대파도, 흙이 묻어 싱싱해 보이는 당근도. 장터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경자는 어떤 날엔 인사를 하고 어떤 날엔 모른척했다. 어떤 날은 상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 어떤 날은 그런 건 왜 물어요? 하는 자세로 옷깃을 여몄다.

   뭐 이것저것 많이 사셨네?

   숨을 돌리려 벤치에 앉은 경자에게 누군가 물었다. 오다가다 마주쳐 얼굴만 아는 할머니였다. 경자는 할머니들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 때마다 속으로 놀라곤 했다.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또래가 되었다는 것과, 그들이 자신을 비슷한 또래로 본다는 사실 두 가지가 모두 놀라웠다. 

   여자는 치자꽃 화분을 들고 있었다. 활짝 핀 꽃 한 송이와 여물어 가는 봉오리가 탐스러웠다. 경자는 괜히 반가웠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가드니아를 알까?

   이거 무슨 꽃인지 알아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자잖아요.

   이거 가드니아예요. 가드니아.

   경자는 우쭐해졌다. 여자는 갸우뚱하다 상관없다는 듯 경자의 머리를 쳐다봤다.

   모자 어디서 사셨어? 나도 그런 거 사고 싶은데.

   경자는 모자의 챙을 만졌다. 예전에 만든 것이었다. 꽃무늬 마직을 잘라 박은 다음 챙에 심을 넣고 옆으로 수를 놓았다. 기분이 좋았다.

   집에 모자가 없는 건 아닌데 애들이 잔뜩 사다 줬거든. 미국에서 사다 준 것도 있고. 그런데 마음에 드는 건 막상 없으니까. 그런데 그건 딱 좋아 보이네. 챙이 넓지도 안하고. 색도 조신하고. 챙이 넓으면 그림자가 져서 또 안 보이고. 색이 마음에 들면 챙이 마음에 안 들고 챙이 마음에 들면 무늬가 마음에 안 들어.

   여자는 경자가 답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자신의 말을 이었다.

   요즘 뭐 해 먹어야 해요? 입맛이 통 없어. 그냥 누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은데. 참 이년의 팔자.

   여자는 흐흐흐 웃었다. 경자도 같이 웃었다.

   그냥 밥에 물 말아 김치 먹어요. 불 때는 것도 귀찮은데, 아들이 온대서 두부 샀어요. 그래도 찌개를 끓여 줘야 먹은 거 같으니까.

   우리 애들도 엄마한테 힘든데 사 잡수라고 사 잡수라고 해. 그런데 또 그게 되나. 사람은 늙으나 사나 그래도 움직여야 하거든. 

   여자는 한참 동안을 자신의 살림 규모와 자식들의 직업에 관해 이야기했다.

   경자는 나 오늘 죽을 뻔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자가 말을 끊기만을 기다렸다. 여자의 말은 들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과 그 옆의 주름만 보였다. 경자는 문득 냉장고 손잡이를 생각해 내곤 주섬주섬 비닐을 끌렀다.

   이거 내가 만든 건데. 냉장고 손잡이예요. 골라서 가져가세요. 많이 가져가요.

   냉장고 손잡이? 요새 냉장고에 손잡이가 어디 있어? 뭐하러 힘들게 이렇게 많이 만들었대?

   냉장고에 손잡이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열어요?

   그냥 다 열어져. 우리 집에 작년에 딸이 사준 건 누르면 그냥 탁 열려.

   여자가 호호호 웃었다. 경자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집에도 잔뜩 있는 냉장고 손잡이가 짐 더미처럼 느껴졌다. 냉장고에 손잡이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여자는 갑자기 벌떡 손을 들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화상, 뭣 헐러고 이 더위에 기어 나와서. 이구 조상님아 저 화상 안 데려가고 뭐 하셔요.

   여자의 말투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다정했다.

   일루 와 일루 와.

   여자는 궁둥이를 옮기며 노인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무슨 국을 끓여야 하나. 우리 아저씨는 삼시 세끼 국이 있어야 식사를 하셔. 아주 귀찮아 죽겠어.

   경자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경자는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어 김치 통을 꺼내다 때가 탄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경자는 그걸 홱 떼어 내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반찬을 놓고 밥을 크게 떠먹었다.

   가랑이를 찢어 죽일 년. 경자는 그럴 때마다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남편은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지독한 욕을 하곤 했다. 개랑 붙어먹을 새끼, 모가지를 뜯어 버릴 년 같은 소리였다. 그 욕은 경자를 제외하고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뿌려졌는데 청과시장의 오랜 거래처의 경리, 마을 슈퍼 주인, 옆집 할아버지 등으로 성별, 나이, 직업 대를 가리지 않고 매우 다양했다.

   남편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을 개똥이 약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경자에게 입버릇처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죄를 지었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나한테 달라 빚 장사했던 동재 엄마 그 개 같은 년 치매 걸렸단다.

   남편은 그들이 목을 맸거나 자식이 죽었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장애를 입는 식으로 벌을 받았다고 했다. 경자는 그 말의 사실 여부보다 남편이 그 말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남편의 모든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경자는 다리를 더욱 벌린 채 밥을 떠 넣었다. 쉬어 꼬부라진 김치가 침샘을 자극했다.


   경자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었다. 늘 그랬듯 섬유유연제 병을 끝까지 읽으며 치자꽃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여전히 없었다.

   가드니아. 경자는 노래하듯 입을 벌리고 가드니아라고 읽었다. 

   경자는 어린 시절 시골집에 피었던 치자꽃을 떠올렸다. 마당 한쪽에 엄마가 심어 놓은 치자꽃은 봄밤을 자고 나면 하얗게 피어났다. 경자는 다른 꽃잎들은 잘도 따서 돌에 찧고 그것을 물에 풀고 흩뿌리며 소꿉놀이를 했지만, 치자꽃은 함부로 딸 수가 없었다. 꽃잎 하나라도 따면 그 아름다움과 향기가 금방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꽃치자를 열매도 달리지 않는 쓰잘데기 없는 나무라며 벌레만 꼬인다고 흉을 봤지만, 경자는 열매가 달리는 홑꽃잎 치자보다 겹잎이 다복한 꽃치자가 더 좋았다. 

   이른 잠에서 깨면 경자는 치자꽃 앞으로 가 고개를 떨구었다. 노란 꽃술을 둘러싼 겹겹의 하얀 잎은 부드러웠고 달큰한 향기가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이 났다. 어린 게 뭐에 홀려서 여우짓을 하고 있어! 경자는 아버지의 호통을 피해 재빨리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치자꽃은 길게 피지 않았다. 봄밤이 몇 번 지나고 나면 한 잎씩 노랗게 물들어 떨어졌다. 진딧물이 끈끈한 점액을 흘려도 검은 벌레가 파고들어도 꽃의 향기는 여전했으나 때로는 몸서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치자꽃은 겨울을 나고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때가 되면 봉우리를 맺고 밤을 지나 꽃망울을 틔우고 마당 가득 향기를 뿌렸다.

   경자는 섬유유연제 병에 코를 갖다 댔다. 여전히 역했다. 그대로 세탁기에 등을 대고 앉았다. 거친 진동이 온몸으로 퍼졌다. 경자는 아까 여자가 들고 있던 치자꽃 화분을 생각하곤 자신만의 치자꽃을 한 번도 키우지 못했음을 생각했다. 집 앞 꽃집에서, 마트에서 늦은 봄마다 꽃치자 화분을 만났었다. 비싼 돈도 아니었는데 단 한 번도 꽃을 키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 후회스러웠다.


   초인종 벨이 울렸다. 아들이었다. 경자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하려고 들면 딱히 할 얘기도 없었다. 현관에 들어선 아들은 집 안을 눈으로 살핀 후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저녁 먹어야지. 빨리 밥 안칠게.

   배 안 고파요.

   아들은 저번에 봤을 때 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아들은 경자가 말해도 모를 일을 여러 개 거쳐서 지금은 전문 대학교 설비과에 있다고 했다. 전기선을 연결하거나 형광등을 갈고 수도꼭지를 가는 일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무기 계약직이 되었다고 했을 때 기뻐하던 경자에게 아들은 내뱉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길게 받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아들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나 남편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경자는 자신의 손재주를 아들이 닮았다고 생각해 속으로 기뻐했으나 남편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산다.

   남편은 어머니의 반대로 젊은 날 운전면허를 따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어머니는 점쟁이가 남편은 운전하면 죽을 팔자라고 했다며 절대 면허를 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남편은 트럭 대신 리어카에 과일을 싣고 그 많은 골목길과 골목길, 차들 사이를 누볐다.

   경자는 아들의 얼굴을 말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들을 처음 품에 안았을 때가 기억났다. 8개월 만에 나온 아들은 작고 작았다. 남편은 경자가 하루 종일 구부리고 미싱을 해서 아이가 자라지 못했다며 허리를 펴고 일을 했어야 한다고 나무랐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한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아들을 데리고 설을 쇠러 시골에 가야 했다. 새빨간 얼굴로 힘이 없어 젖을 빨지도 못하고 기진해 잠든 아이와 고집스레 바깥만 바라보던 남편의 옆모습이 생각났다. 지금 아들은 그 남편의 나이가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남편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자는 한 번도 자신에게 아들이 최우선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경자도 남편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너도 원망할 사람 하나는 있어야지. 아들의 붉게 탄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경자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동훈아 내가 아까 이불을 털다가 말이야. 죽을 뻔했어.

   아들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야. 진짜 죽을 뻔했어. 떨어질 뻔했거든. 휘청하는데 겨우 난간을 잡았어. 생쇼를 했어. 생쇼를.

   경자는 활극이라도 얘기하듯 과장된 표정과 동작을 섞어 가며 말했다. 펄럭펄럭 어깨를 사용해서 이불을 털다가 거꾸러지는 동작을 무언극 배우처럼 열과 성을 다해 연기했으나 아들은 보지 않았다. 조심 좀 하지 그러셨어요. 라는 말을 한 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경자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 아들을 보며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접어 두지 못한 이불이 바닥에 있었다. 경자는 이불을 들고 열린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털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몸이 휘청하더니.

   경자는 흰색 이불을 창밖으로 털기 시작했다. 붉은 석양이 하늘 아래로 녹진하게 내려앉는 중이었다. 경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펄럭펄럭 터는데.

   아들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경자를 바라보았다.

   경자는 기이한 활력이 생기는 걸 느꼈다. 아까보다 더 큰 몸짓으로 이불을 털었다. 팔에 힘이 붙었다. 하얀 이불이 하늘로 나부꼈다. 세상은 멈추고 오로지 경자만 움직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배었다. 

   아깐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경자는 아들의 시선을 느끼며 더욱 큰 몸짓으로 몸을 밖으로 내밀며 팔을 휘둘렀다. 

   이렇게. 아까는. 진짜로.

   순간, 바깥으로 반쯤 내민 몸이 균형을 잃었다. 치자꽃 바람이 불어왔다. 경자는 향기에 취했다. 짧고도 긴 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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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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