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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마중

  • 작성일 2023-10-27
  • 조회수 839

달의 마중

서경희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여자가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딸기우유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까뜨린느?”

   여자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연락해온 사막여우였다. 지금껏 작가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단편 시나리오는 주로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하려고 샀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얼굴은커녕 실명을 밝히기도 꺼렸다. 사막여우는 달랐다. 작년에 사들인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 팔 거죠?”

   사막여우가 계산대에 바싹 달라붙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느긋한 척했다. 눈을 내리깔고 사막여우의 손을 훔쳐봤다. 네일아트를 화려하게 한 손톱은 미러볼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가운뎃손가락엔 팥알만 한 진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내 오른손을 슬그머니 계산대 아래로 내렸다. 어렸을 때 화상 사고를 당해 엄지를 제외한 손톱이 전부 녹아버렸다. 운 좋게 절반이 남은 엄지손톱은 하얗게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돈이 적어서 그래요?”

   “이번 건 제가 찍을 생각으로 쓰는 거라서요.”

   시나리오를 팔기 힘들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여지는 남기느라 말끝을 흐렸다. 사막여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을 실룩거렸다. 이쯤 되면 칼자루는 나한테 넘어온 셈이다.

   미친 듯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시나리오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찍고 싶어서였다. 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큰 경력이 될 것이고 감독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단편 시나리오는 못해도 한 달에 한 편은 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사막여우한테 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없었다. 

   사막여우는 골이 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듯했다. 사막여우가 까뜨린느, 라고 부르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편의점 안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나도 덩달아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카드 결제를 했다. 담배를 팔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덴마크 요구르트는 원 플러스 원 상품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에 편의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음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가할 터였다. 

   나는 사막여우가 건네준 딸기우유를 쭉쭉 빨았다.  

   “100만 원 드릴게요.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사막여우는 마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나는 막장 드라마의 악녀처럼 머리를 굴렸다. 5분에서 15분 사이의 단편 시나리오는 딱히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저번에는 1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 요금을 냈는지 쌀을 사는 데 보탰는지. 교통카드를 충전하느라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단돈 10만 원에 꿈을 팔아먹었다는 것이 아팠다. 그때 팔았던 시나리오는 성형 중독인 여자가 계속된 성형수술로 인해 예전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였다. 사막여우는 그 시나리오로 단편영화제에서 은상을 받았다고 사흘 전 메일로 알려왔다. 시나리오도 없고 써줄 마음은 더 없으면서 사막여우를 편의점으로 부른 건 따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은 시나리오로 고작 은상밖에 못 받았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도 없었다. 

   사막여우의 수상 소식을 듣고 다시는 시나리오를 팔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사막여우가 100만 원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편의점 한 달 알바비와 맞먹는 돈이었다. 등록금의 5분의 1이고 단편영화 제작비의 10퍼센트였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 이름을 작가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작가로 입봉하면서 제작비도 벌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선우한테 카톡이 왔다. 

   -왔다 갔어?

   -응. 저녁에 만나. 할 얘기가 있어.

   점장이 몰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야,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점장은 심심하면 알바생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점장의 손이 옆구리에 닿을 때마다 징그러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화가 나도 참았다. 오랫동안 일했던 편의점이 폐점했다. 경기가 나빠져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곳으로 옮긴 지 아직 한 달이 안 됐다. 손님이 계산대 앞에 서서 껌을 고르자 점장은 슬쩍 자리를 피했다.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편의점 전체가 흔들렸다. 


   “황진미, 처음부터 끝까지 기울여서 찍는 영화가 어딨니? 오블릭 앵글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이따위로 할 거면 영화 때려치워. 집안도 어렵다면서 일찌감치 정신 차리고 돈이나 벌어.”

   10년 전,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찍은 1분짜리 영상을 본 교수의 평가였다. 요즘도 가끔 그때를 떠올릴 때가 있다. 독설을 퍼붓던 교수의 입꼬리에 번진 립스틱, 멀겋게 나를 쳐다보던 동기들의 눈빛, 울지 않으려 교수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이를 악물던 나. 그 풍경은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기묘했다.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촬영하는 게 힘에 부쳤다. 손이 무뎌서 카메라가 자주 흔들렸고 그때마다 피사체를 놓쳤다. 제때 피부 이식을 받지 못해서 고온에 일그러진 플라스틱처럼 기형이 되어버린 손으로 섬세한 촬영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학기가 끝나도록 영상은 좋아지지 않았고 촬영기초 과목에서 겨우 낙제를 면했다. 입학금을 모으느라 남들보다 5년이나 늦게 신입생이 된 나로서는 아쉬운 학점이었다. 그 후 학비 문제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말았다. 

   영화는 꾸준히 찍어왔다. 스마트폰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가운뎃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콘티를 그렸다. 콘티를 통해 인물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둔한 손의 감각을 그렇게라도 상쇄하고 싶었다. 나는 버섯 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밟히고 또 밟혀도 비 한 번 내리고 나면 다시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버섯. 살기 위해 화려해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일 수도 있는 독버섯 말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놀라게 할 엄청난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때가 되면 교수는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이 힘들어 영화를 포기하고 싶을 때면 중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우리 가족은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이상의 소설에서처럼 단칸방을 커튼으로 둘로 나누어 썼다. 그 시절, 화상 사고를 당했다. 나는 등교를 거부하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온종일 음악만 들었다. 아버지가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는 신라면 상자 대여섯 개를 들고 돌아왔다.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팔다 남은 것을 얻어왔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모여 앉아 까뜨린느 드뇌부 주연의 〈쉘부르의 우산〉을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 영화였다. 황홀할 만큼 근사한 손가락을 가진 여주인공이 장면이 바뀔 때마다 온갖 예쁜 옷을 다 입고 나왔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여자들만이 소화할 수 있는, 나 같은 건 죽을 때까지 입지 못할 그런 옷들이었다. 학교만 갔다 오면 몇 편을 보든 상관하지 않으마, 아버지가 말했다. 그날부터 영화는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보는 명동의 뒷골목은 필름누아르의 한 장면 같았다. 핸드폰 케이스를 파는 노점상의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청년은 등에 문신을 한 킬러일지도 모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스마트폰을 돌렸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음식물 쓰레기를 헤집고 있었다. 고양이한테 천천히 다가갔다. 고양이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마술처럼 화면에서 사라졌다. 쓰레기봉투에서 흘러나온 국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몸을 숙이고 화면을 클로즈업했다. 국물은 검붉은색이었다. 터질 것처럼 부푼 봉투 속에 든 것이 정말 음식물 쓰레기일까? 의문스러웠다. 웅성대는 소리를 따라갔더니 수십 켤레의 신발들이 어지럽게 잡혔다. 나는 로우앵글로 바꿔 관광객의 뒤를 따라갔다. 스마트폰이 심하게 흔들려서 범죄물의 추격 신을 찍는 듯했다. 관광객들은 도시를 장악하려는 좀비가 아닐까, 혼자 상상하며 그들이 전부 화장품 가게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화면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 건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스마트폰은 내게 안경과 같았다.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화면을 보고 걷다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무턱대고 따라갔다. 놓치지 않으려 뛰다가 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쫓는 사람만 보고 걷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스마트폰이란 필터를 거치면 사물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 아무리 평범한 연필이라도 영상에 잡히는 순간 화가의 정체성이 된다. 울퉁불퉁하게 깎은 연필 한 자루가 있다. 연필심은 뭉툭하니 끝이 거의 보이지 않고 이빨 자국이 가득하다. 이런 모양의 연필은 화가의 망가진 손과 불안한 심리를 표현했다. 

   발뒤꿈치가 쓰라렸다. 세일 때 산 작은 운동화가 문제였다. 골목 한 귀퉁이에 서서 신발을 벗었다. 물집이 터지고 피까지 났다. 나는 다양한 각도에서 상처를 촬영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대충 피를 닦고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선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대뜸 스마트폰을 선우의 얼굴에 들이댔다. 선우는 귀찮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밀어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선우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선우의 얼굴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해사하고 귀염성이 있었다. 나는 선우가 주인공인 로맨스 영화를 찍어서 스마트폰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촬영이 있던 날 선우가 잠적하는 바람에 영화는 엎어지고 꼬박 1년을 모은 돈만 날렸다. 선우는 내성적인 데다 낯을 심하게 가렸다. 은둔형 외톨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 애를 데리고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한 내 잘못이 가장 컸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선우를 처음 만났다. 겁먹은 얼굴로 할머니 뒤에 숨던 키 작은 아이가 생각난다. 선우는 말수가 적긴 했지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선 명랑한 아이였다. 그림을 잘 그려서 내가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런 선우가 왜 따돌림을 받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친구들을 찾아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어떤 일들은 이유 없이 일어나기도 했다. 

   선우는 편의점 앞에 멈춰 서더니 빈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마술하는 것처럼 주먹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손가락을 한 개씩 펴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엄지손가락을 펴는 것과 동시에 팔을 크게 흔들었다. 거짓말처럼 선우의 손에서 티아라 모양의 금목걸이가 나왔다. 나는 선물이라고 건네는 목걸이를 거절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주인이 자신의 가게에서 도둑질하는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다. 선우의 이야기였다. 선우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구멍가게를 물려받은 후에도 도둑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 가겐데 왜 도둑질을 해?

   이 세상에 내 게 어딨냐.

   컵라면을 고르고 있는데 선우가 들어왔다. 선우는 내 가방에다 슬쩍 목걸이를 집어넣었다. 나는 못 본 척 컵라면을 집어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누구랑 같이 있냐고 캐물었다. 엄마 옆에 앉아서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을 아버지가 그려졌다. 나는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고 엄마를 안심시킨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선우가 카톡을 보내왔다. 

   -어머니?

   “응.” 

   나는 말로 대답했다. 또 카톡이 왔다. 

   -나랑 있어서 어머니 화나셨어?

   선우는 같이 있어도 말을 않고 카톡을 보내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말로 해. 같이 있는데 왜 자꾸 톡을 보내.”

   나는 라면을 씹다 말고 화를 냈다. 

   -말은 거짓말을 하지만 글은 거짓말을 못 하잖아.

   카톡 알림음이 듣기 싫어서 진동으로 바꿨다. 

   “글이 거짓말을 못 한다고? 글로 사기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진동이 세 번 연속으로 울렸다. 

   -카톡으로 대화를 하면 오해가 안 생겨. 카톡엔 표정과 억양이 없잖아. 난 카톡으로 얘기할 때만 진심이 느껴져.

   나는 헛소리, 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생일에 뭐 했어?

   “삼겹살 구워 먹을 거랬잖아.”

   -맛있었어?

   그날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시장을 봐서 바로 집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임대 아파트에서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아파트는 종말 이후에 버려진 도시처럼 조용하거나 영화 속의 고담시처럼 온갖 범죄의 파열음으로 시끄러웠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이웃이 치고받고 경찰과 범죄자가 숨바꼭질하는 이곳에서 우리 가족만이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더러운 임대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백치 같은 웃음소리가 싫었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고기는?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상추를 씻고 있는 엄마의 등이 보였다. 가스레인지에서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술도 사 왔지?

   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웃의 할머니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상추를 내오던 엄마가 내 소매를 잡더니 앉으라고 했다. 나는 케이크 상자만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미야, 고기 먹어야지. 

   아빠의 목소리가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엄마는 방문이 잠긴 걸 알고 조용히 물러났다. 할머니들이 한껏 목소리를 줄여서 내 이야기를 해댔다. 

   손이 아직 덜 나았나? 

   영영 못 고친다잖아.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이웃들이 끔찍했다.

   생일 때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싫어서 사막여우 이야기를 꺼냈다. 

   “100만 원 주겠대.”

   라면 국물을 마시던 선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이?

   “얘깃거리가 필요해.”

   -뭐 해줄 건데?

   나는 선우한테 백번쯤 했던 약속을 다시 했다. 

   “내가 천만 감독이 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쇼핑센터를 지어줄게. 할머니의 구멍가게랑은 비교도 안 되게 클 거야. 넌 거기서 마음껏 훔치기만 하면 돼.”

   천만 감독이 된다고 해도 그만큼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입봉하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 또한. 선우와 나는 그냥 무대 위의 광대처럼 주어진 대사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떨렸다. 선우한테서 좋아. 생각해볼게, 라는 카톡이 이모티콘과 함께 왔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아버지가 코를 고는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복도가 보이는 관처럼 길쭉한 내 방으로 들어갔다. 거리를 촬영한 동영상을 터치했다. 갓 잡아 올린 빙어처럼 생기 가득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나는 인디밴드의 보컬이 되었다가 벽화를 그리는 미대생이 되기도 했고, 테라스가 예쁜 카페의 사장이었다가 쇼윈도에 걸린 세련된 정장을 입은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했다.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영화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부팅되는 동안 창작 노트를 뒤적였다. 별것 없었다. 쓸 만한 건 오래전에 시나리오가 되어 팔려나갔다. 소재 빈곤에 시달리면서 가족의 이야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훔쳐다 썼다. 아버지를 모티브로 해서 〈행복한 우리 집〉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다. 

   한과 공장이 부도가 나자 아버지는 유과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 노점에 내다 팔았다. 웰빙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벌이는 나쁘지 않았다. 대신 비좁은 단칸방에서 튀밥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튀밥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교복 주머니, 이불 밑, 교과서 사이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떨어졌다. 그날 아침 나는 짜증이 났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유과를 만든다고 좁은 방을 어질러놓았고 엄마는 먹기 싫다는 아침밥을 강요했다. 교복 블라우스는 다림질이 되어 있지 않았고 앞머리는 드라이가 안 먹었다. 학교에 가려는데 책가방에 튀밥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책가방을 흔들었다. 튀밥은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떼어냈다. 튀밥이 손가락에 옮겨 붙었다. 검지에 붙었던 튀밥이 약지로 중지로 다시 검지로 옮겨 다녔다. 튀밥을 떨어뜨리려고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다가 스타킹을 신은 발이 미끄러졌다. 나는 조청을 끓이고 있던 전기밥솥을 짚고 넘어졌다. 손가락이 조청과 함께 녹아내렸다. 아버지는 경비, 막노동, 공공근로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화상 치료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나리오의 제목과 달리 결말은 비극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소재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잡생각이 토네이도를 타고 날아다녔다. 모니터에서 껌벅거리는 커서가 다른 세계에서 보내오는 조난신호 같았다. 사막여우한테 내 이름을 작가에 올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사막여우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족을 위해 대학을 중도에 포기했다. 영화 찍는 것도 번번이 미뤘다. 이젠 가족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전기가 끊기면 일찍 자고 물이 끊기면 안 씻고 쌀이 떨어지면 굶으면 될 일이다. 앞으로는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 나는 독버섯이니까. 새 폴더를 만들고 파일명을 독버섯으로 정했다. 

   오디션 자료를 꺼냈다. 배우 모집 공고를 통해 모은 자료였다. 영화를 찍을 때를 대비해서 모았는데 엉뚱하게 시나리오를 쓰는 데 쓰였다. 프로필을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거기에 상상력을 보태면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프로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쓸 만한 프로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또다시 배우 모집 공고를 냈다. 제목이 없으면 안 되겠기에 생각 끝에 우산 가게, 라고 적었다. 제작을 적는 칸에는 개인 단편, 감독은 김선우, 캐스팅 담당자에는 내 이름을 썼다. 극중 배역은 떠오르는 남녀 이름을 두 개씩 적었다. 시놉시스는 보안상 생략이라고 적고 특이사항에 이번 영화의 목적은 국제단편영화제 출품입니다, 라고 썼다. 촬영 날짜, 출연료는 다 추후 협의로 했다. 몇 명이나 지원할지 모르겠다. 얘깃거리가 풍부한 사람 서너 명만 지원해준다면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다음 주까지 시나리오를 넘기는 조건으로 200을 주겠다는 메시지를 사막여우가 보내왔다. 자몽을 베어 문 것처럼 침이 고였다. 영화를 찍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현실적으로 집에 생활비를 전혀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의 결심이 무색했다. 200만 원에 이렇듯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 얄궂었다. 

   골치가 지끈거려서 복도에 나왔다. 새벽은 공포 영화에서 살인마가 나오기 직전의 침묵을 닮았다. 대충 구색이나 맞춰 써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혼자서 권투시합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허공을 향해 진이 빠지도록 주먹질을 해대다가 나가떨어지는 과정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는 남의 인생을 훔쳐다 쓴 시나리오를 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우한테 카톡을 보냈다. 

   -자?

   답이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하늘을 찍었다. 아무리 줌을 당겨도 별이 잡히지 않았다. 카메라를 아래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 자동차 전조등, 불 켜진 집에서 새어 나오는 빛으로 아파트가 환하게 빛났다. 도시가 잠들지 못하는 게 싫었다. 나만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만 소외되고 아프고 힘든 것 같았다. 기필코 감독이 되어서 이 어둠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래서 가진 것 없이 낙천적이기만 한 부모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야 말리라. 

   -꿈에서 할머니를 만났는데 가게에서 자꾸 물건이 없어진다고 걱정하더라고. 할머니 얘기를 쓰는 건 어때?

   나는 그 얘긴 벌써 써먹었다고 톡을 보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편의점은 한산했다. 판매용 비닐우산을 출입문 한쪽에 내다 놓았다.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날이 밝는 경우가 많았다. 먼동이 틀 무렵 선잠이 들었다가 7시면 일어났다. 7시에 일어난다는 건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극장을 나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8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섰고 9시에 일을 시작했다. 일을 마치면 소재를 찾아 번화가를 헤매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기를 반복했다. 나는 사막여우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쓰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당장은 어려울 듯했다. 하지만 언젠간 사막여우도 한 편의 시나리오가 되고 말 것이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가을비는 울음 끝이 짧은 아이 같았다. 비도 울음도 길면 환영받지 못한다. 

   대걸레로 빗물을 닦고 있는데 아빠한테 문자가 왔다. 

   -진미야, 100만 원만 어떻게 안 되겠니?

   아빠는 노점에서 호떡 장사를 한다며 중고 트럭을 살 돈을 보태달라고 졸랐다. 나는 안 된다고 딱 잘랐다. 그런데도 아빠는 지치지도 않고 돈을 달랬다. 점장이 우산을 접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카톡 안 했어?”

   점장이 옆구리를 꼬집으려 했다. 나는 얼른 몸을 피했다. 어쭈, 피했어, 라며 점장이 옆구리를 두 번 꼬집었다. 점장이 느끼하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조커처럼 혐오스러웠다.


   컴퓨터 앞에 앉은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모니터는 여전히 깨끗했다. 선우한테 카톡이 왔다. 

   -오디션 지원서 좀 왔어?

   -아니.

   -그냥 네 얘기 쓰면 안 돼?

   이 문장은 외국어처럼 해석이 필요했다. 나한테 무슨 이야기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거?

   -아무거나.

   -아무거나 뭐?

   -학교 때 얘기를 쓰든지.

   -학교 때 뭐?

   카톡을 주고받을수록 답답해졌다. 

   -나도 몰라.

   선우는 그렇게 남기고 카톡방에서 나가버렸다. 새벽 2시 20분이었다. 나는 카디건을 걸치고 10여 분 거리에 있는 선우의 옥탑방으로 뛰어갔다. 가을밤이라 바람이 제법 찼다. 따뜻한 유자차가 마시고 싶었다. 선우는 자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병이 가득했다. 박카스가 상자째 들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박카스를 마셨다. 빨래건조대에 속옷, 수건, 옷가지 등이 너저분하게 걸렸다. 싱크대 위에는 전기 주전자와 종이컵이 있을 뿐 그릇과 수저는 없었다. 두루마리 휴지, 라면, 즉석 카레, 한방 샴푸, 참치 캔 등이 방 한쪽에 쌓여 있었다. 죄다 훔친 물건이었다. 며칠 사이 물건이 더 늘었다. 침대 밑에 빨간 배낭이 놓여 있었다. 배낭은 선우의 여행용 가방이었다. 선우는 무작정 떠났다가 마음 내키면 돌아오는 떠돌이 생활을 좋아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 도벽이 사라진다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선우를 흔들어 깨웠다. 

   “뭘 쓰라는 거야?”

   선우는 눈을 감고 베개 밑을 더듬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방바닥에 던져버렸다. 

   “말로 해. 손짓도 하고 표정도 짓고 침도 튀겨가면서 말을 하라고. 언제까지 입 닫고 살래? 피해자 코스프레 언제까지 할 건데?”

   선우는 일어나지 못했다. 때려도 꼬집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겨드랑이를 살살 간질였다. 선우는 킥킥거리며 몸을 뒤척였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선우의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 주었다. 

   -몰라. 나도 모른다고.

   선우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서 과거에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특별한 건 모두 시나리오가 되어 팔려나가고 소재가 될 만한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자꾸 눈이 감겼다.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주위가 희뿌옇게 보였다. 선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옥탑방을 나왔다. 

   “어디서 외박이야?”

   엄마는 소리부터 질렀다. 

   “진미 엄마, 화낼 게 아니라 축하할 일이야. 진미야, 그냥 선우랑 결혼해. 조건 따질 거 없다. 엄마랑 아빠를 봐. 부족하지만 행복하게 잘 살잖니.”

   “아빠가 아무리 그래도 돈 못 해드려요.”

   “50도?”

   우리 집 장르는 블랙코미디였다.

 

   사막여우가 딸기우유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네일 컬러는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었다. 이제 막 1시가 되었다. 

   “딸기우유 원 플러스 원 행사 종료됐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사막여우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지하철이 들어오면서 건물이 흔들렸다. 사막여우는 딸기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마무리는 잘되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저냥요, 라고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사막여우가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 못내 불쾌했다. 

   “알바가 글 쓰는 데 방해되는 건 아니에요?”

   나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했다. 사막여우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핥았다. 한참 뒤에 사막여우가 물었다.

   “몇 시에 마쳐요?”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제가 마셔도 돼요? 하고 딸기우유를 가리켰다. 사막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딸기우유를 마시고 뒤늦게 대답했다. 

   “마치는 시간은 왜요?”

   사막여우는 말이 없었다. 분명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 시나리오 받으러 올게요. 까뜨린느 님 약속 꼭 지켜요.”

   사막여우는 방울 소리를 남기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시나리오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이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나는 빨대를 힘차게 빨았다. 음료는 나오지 않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점장이 창고로 부르더니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봉투를 바로 받지 않고 점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달 알바비.”

   안 그래도 월급날이 됐는데 계좌번호는 왜 안 물어보나 궁금하던 참이었다. 근로계약서도 안 썼는데 월급도 현금으로 주는 게 영 이상했다. 학생 때부터 꾸준히 알바를 해왔고 돈은 늘 계좌이체로 받았다. 그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민망했지만 나는 점장이 보는 앞에서 현금을 세기 시작했다. 액수가 맞지 않거나 했을 때 논란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점장은 그런 내가 불편했던지 괜히 물건을 체크하는 척했다. 

   “돈이 적은데요?”

   “뭐가 적어. 맞게 넣었는데. 넌 좋겠다. 맨날 카톡질하고 놀면서 월급은 챙기잖아. 나도 알바나 할까 보다. 요즘은 어떻게 된 게 주인보다 알바가 더 벌어.”

   “최저시급보다 정확하게 1000원씩 적게 계산됐어요.”

   “아, 난 또 뭔 소린가 했네. 너 같은 애는 원래 시급 1000원씩 낮게 줘. 알면서그래.”

   “너 같은 애라뇨? 제가 뭘?” 

   점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또 옆구리를 꼬집으려 했다. 나는 점장의 손을 소리 나게 쳐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옆구리 꼬집는 것도 성추행이라구요.”

   “뭐? 성추행?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사람 구실도 못 하는 병신 불쌍해서 뽑아줬더니 어디서 지랄이야.”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은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불쾌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점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선우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쪽 벽에 기대앉았다. 반투명한 창문은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석양을 막았다. 손을 멀리 쭉 뻗었다. 아무리 뻗어도 손은 정상이 되지 않았다. 화상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살이 핏줄과 같이 돌출되는 구축 현상이 생긴 손은 내가 봐도 징그러웠다. 날씨가 추워지면 손은 더 굳었다. 그 때문에 내가 찍은 영상은 화면이 심하게 기울었다. 기울어진 화면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날 닮은 그 모습이 싫어서 기를 쓰고 기운 화면을 똑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흉터가 있는 손을 촬영해서 폴더에 모아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촬영한 영상을 재생했다. 왼손으로 찍어서 화면이 더 흔들렸다. 손을 서서히 클로즈업했다. 화면 가득 손이 담겼다. 손은 인공위성이 찍은 달의 표면처럼 굴곡지게 보였다. 크게 키운 화상 흉터는 운석과의 충돌 때문에 달의 표면에 생긴 크레이터와 묘하게 닮았다. 

   〈달을 빚는 여자〉라는 시나리오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인물, 상황, 대사 등이 시퀀스로 머릿속에 빠르게 펼쳐졌다. 당장 쓰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신 하나가 끝나기가 무섭게 꼬리를 물고 다음 신이 떠올랐다. 백번쯤 들은 노래의 가사를 받아 적는 것처럼 술술 써졌다. 화상 사고로 손가락이 붙어버린 여자가 종이공예로 손을 만드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끝냈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시나리오를 유에스비에 옮겨 담고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늦게 눈이 떠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선우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에 있던 빨간 배낭이 없어졌다. 선우는 또다시 말 한마디 없이 떠났다. 선우와 이별하는 장면을 종종 상상했다. 우리의 이별에는 눈물이 없었으면 좋겠다. 미워하는 감정도 없었으면 좋겠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자연스러운 이별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까뜨린느와 기이의 이별처럼 말이다.

   〈쉘브루의 우산〉의 마지막 장면은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었다. 기이가 운영하는 주유소로 한 대의 차가 들어온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파리로 돌아가는 까뜨린느와 딸이 타고 있는 차였다. 까뜨린느가 묻는다. 행복해요? 기이는 쓸쓸한 표정으로 무척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까뜨린느는 기름을 넣고 주유소를 떠난다. 외출했던 기이의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고 기이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별마저 아름다운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사막여우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까뜨린느, 편의점인데 어디예요?

   나는 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편의점에서 8차선 도로를 건너면 통유리로 된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한 시간 뒤에 만나요.

   유에스비를 챙겨서 밖으로 나오는데 햇살이 눈을 찔렀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와 다름없는 해건만 더 뜨겁게 느껴졌다. 가파른 계단을 뛰어서 내려왔다. 선우와 자주 가던 편의점 앞을 지났다. 분식집을 끼고 도니 세탁소가 나왔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지나자 멀리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건널목 앞에서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거리가 거기 있었다. 나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안녕, 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통유리 너머로 호피 무늬 스카프를 두른 사막여우가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 든 유에스비를 움켜쥐었다. 사막여우한테 문자가 왔다. 

   -아직 멀었어요?

   -한 정거장 전이에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혼자서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사막여우한테 영화를 찍는 이유를 물었다.

   당연히 감독이 되고 싶으니까 찍죠. 영화감독 멋지잖아요. 한류스타들이랑 친분도 쌓을 수 있고, 성공하면 돈과 명예가 한꺼번에 생기잖아요. 그러는 까뜨린느 님은 왜 영화를 찍어요?

   사막여우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화상 사고를 당한 이후에 이상한 능력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하지도 않은 말들이 들리는 거예요. 쟤는 우리랑 달라. 저러고 어떻게 살아. 나라면 죽어버렸을 거야. 그때 저를 구원해준 게 영화였어요. 영화를 보면 상처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사막여우 님, 저한테 영화는요, 약이었어요.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약이요. 

   빌딩 숲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로우앵글로 한없이 늘여놓은 빌딩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곧 쓰러질 듯했다. 나는 손목을 꺾어가며 똑바로 세우려 노력했지만 화면 속의 빌딩은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8차선 도로 전체가 차량 정체로 꽉 막혔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서 색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파랑의 하늘,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 상가의 화사한 간판에서 색깔이 한 겹씩 사라져갔다. 도시가 회색이 될 때까지. 

   장애가 있는 손으로 종이 손을 만들어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 현실에 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했겠지만 영화는 다르다. 장애 때문에 성격이 일그러져 고립된 삶을 살거나, 비정상적으로 손에 집착해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 영화다. 영화는 삶이 아니고 프레임이다. 감독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된 허구의 세계인 것이다. 

   -다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게 있는 거야.

   나는 선우한테 어떻게 다 버릴 수 있느냐고 반문했었다. 

   전화가 왔다. 통유리 너머에서 전화를 거는 사막여우가 보였다. 나는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마트폰 화면을 거치지 않고 보는 거리가 현실 같지 않았다. 나무와 상점이 눈이 아프도록 선명해서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현기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켜고 카메라를 클릭해서 화면을 반대로 돌렸다. 화면 가득 내 얼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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