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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잡으면

  • 작성일 2023-10-27
  • 조회수 653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동시에 일을 저질렀으니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시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우리 부부는 돈을 대고 동서의 친정 오빠가 수습을 해 왔다. 무슨 조폭 중간 보스 찌끄레기쯤 되는 그는 그런 일에 전문가라고 했다. 나는 내 작업실을 아이에게 내줘야 했다. 전문가라는 분께서 실탄이 부족하다며 일을 질질 끌고 있으니 당분간 나는 거실과 주방을 떠돌며 비즈공예 작업을 해야 할 참이었다. 

   작업실에서 꺼내 온 비즈 재료들을 거실 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하는데 현관이 떠들썩해졌다. 조카아이는 큰엄마인 내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냉장고를 벌컥 열어 가지런히 놓인 음료들을 뒤지며 콜라가 없다고 툴툴댔다. 짧은 욕이 추임새처럼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딱 제 아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유기농 주스 병을 꺼내 입을 대고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그대로 토해 냈다. 남편은 얼굴을 찡그릴 뿐 아무 말 하지 않았고, 한솔이가 사촌 동생을 거실로 데려갔다. 사방에 튄 주스를 닦는데 울 엄만 맨날 그래, 맨날 죽는 척하다가 좀비처럼 살아나, 조카아이가 떠드는 소리에 이어 한솔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뛰어다니던 조카아이가 급기야는 탁자 위의 비즈 재료들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한솔이가 사촌 동생을 붙잡아 겜방 갔다 올게요, 하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한솔이에게 주었다. 몇 장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내 쪽을 돌아보고 멋쩍게 웃었다. 순간 조카애가 어지럽힌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갑을 챙겨 들고 저녁거리를 핑계로 집을 나왔다.

   그날 마트의 동물병원에는 고양이를 무료 분양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남편과 한솔이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짐승을 돌볼 시간에 한솔이 공부를 봐주거나, 비즈 작품을 만들거나, 청소를 한 번 더 하는 게 백번 낫다는 게 내 신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남의 새끼가 내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판에 내 새끼가 원하는 고양이 한 마리 못 키울까, 오기 같은 것이 들었던 거였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털이 제법 긴 흑백의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름 없는 잡종 유기묘겠지만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분양은 무료지만 예방접종을 하는 조건. 나는 고양이에게 주사를 맞히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고양이는 내 새끼가 아닌 조카애 차지가 되었다. 한참 신이 났던 조카애가 제 옷이 희고 검은 털로 범벅이 된 걸 깨닫고 고양이를 집어 던진 후에야 한솔이에게 차례가 왔다. 한솔이의 새 티셔츠에도 털이 달라붙었다. 검정색 소파와 흰 쿠션이라고 무사할 리는 없었다. 검은 소파에는 흰 털이, 흰 쿠션에는 검은 털이 엉겨 붙었다. 조카애는 사방에 붙은 털을 뜯어내 바닥에 눈처럼 뿌리며 놀았다. 나는 홧김에 고양이를 사 온 걸 후회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안 곳곳에서 고양이 털을 떼어 내야 했다. 고양이 냄새인지 잘 씻지 않은 조카아이 냄새인지 부지런히 환기를 해도 집안에는 미묘하게 악취가 났다. 평소에는 절대 쓰지 않는 인공방향제까지 뿌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가 만족했다. 한솔이는 속도 없이 사촌동생이 먹을 콜라를 사 들고 왔고 남편은 한솔이가 외동이라 외롭더니 동생이 와서 신났네, 하며 매일 일찍 집에 왔다. 

   그렇게 엿새가 지나 동서가 퇴원을 했고, 조카아이는 올 때보다 더 요란하게 현관을 나섰다. 남편은 어린애에게 지폐를 꽤 두둑이 쥐여 주었다. 한솔이도 아끼던 피규어를 선물로 내밀었다. 그걸 본 순간 뱃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발치에 있던 고양이를 답삭 들어 조카아이에게 내밀었다. 나는 좋은 큰엄마가 되고 더 이상 고양이 털이나 냄새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한솔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날 퇴근길 남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한솔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털 날리고 냄새나는 건 질색이라는 나를 생각한 절충안이었는지,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가 들어 있고, 그 안에는 빨간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전형적인 금붕어 세 마리와 눈이 툭 튀어나온 까만 금붕어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마트표 막금붕어, 한 마리 천 원짜리야.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눈치를 보는 남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농담처럼 눙쳤다. 

   -오올, 싸구려라 잘 살겠네.

   남편 말에 의하면 싸구려 금붕어라고 해서 비싼 금붕어보다 더 잘 산다는 법은 없다고 했다. 값이 비싼 것들은 그만큼 선별 과정을 거쳐 값이 매겨진 거고 이렇게 싸게 팔리는 놈들은 질병이나 기형에 대한 검증이 되지 않은 놈들이라나. 초보자인 남편은 그날 저녁 내내 어항에 매달렸다. 수질정화제, 박테리아제, 설명서를 읽어 가며 조심조심 약을 넣었다. 

   -박테리아를 일부러 넣어?

   -물잡이라고,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해. 깨끗하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

   물고기가 살기 시작하면 배설물에서 여러 가지 독성 물질이 생기는데 그 물질들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박테리아를 미리 만들어 주어야 물고기가 적응하기 쉽다나. 

   -대충 살라고 하지, 천 원짜리 금붕어에 약값이 더 들겠네.

   남편은 부정하지 않았다. 금붕어들은 열대어처럼 까다롭지 않고 잘 산다고 했다. 남편은 금붕어와 물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통째로 새 어항에 담갔다. 

   -하지만 물이 갑자기 달라지면 아무리 금붕어라도 충격 먹어. 온도라도 맞춰 줘야지.

   그리고 삼십 분 간격으로 봉지의 물을 조금씩 덜어 내고 어항의 물로 바꿔 주다가 마침내 금붕어들을 어항으로 풀어놓았다. 진짜 물잡이 과정은 금붕어를 넣은 이후에 시작되었다. 한동안 어항의 물은 뿌옇게 흐려졌다. 어항을 깨끗이 소독하고 물을 싹 갈아주고 싶었지만 그냥 기다리는 게 낫다고 했다. 물잡이에 필요한 박테리아 종류들이 적당량 번식하는 데 최소한 보름 이상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남편은 어항 관리를 도맡았다. 중간에 몇 마리가 죽는 일은 있었지만 그 후 꽤 오랫동안 금붕어들은 잘 살았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에도 잘 살던 금붕어가 지난 보름 사이 네 마리째 죽었다. 


-*-


   나는 죽은 금붕어를 건져서 편지 봉투에 넣고 꽃삽을 챙긴다. 아파트 마당 어두운 구석 땅을 파고 묻은 게 보름 새 네 번째, 그러나 오늘은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공지문에 주춤거리게 된다. 

   ‘고양이 학대 사건이 이어져 불안한 가운데 또다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어제저녁 105동 건물 근처에서 초등학교 여학생 피습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민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 짧은 글을 되풀이 읽는 동안 6층에서 아는 여자가 올라탄다. 한솔이 반 친구의 엄마다. 나는 얼른 봉투와 꽃삽을 등 뒤로 감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기 이야기에 급급하다. 딸내미 데려와서 저녁 먹이고 다시 영어 학원 데려다줘야 해. 바쁘다 바빠, 호들갑을 떤 후에 오지랖도 떤다. 

   -자기도 늦은 시간에 혼자 컴컴한 데 다니지 마. 어제저녁에 큰 사고 있었다잖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그녀는 전화로 얘기하자, 손으로 전화하는 흉내를 내보이며 먼저 내린다. 늦둥이 딸 학원으로 가는 걸음이 급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금붕어를 묻으려던 열의는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죽은 금붕어를 그대로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스마트 폰에서 아파트 입주민 밴드를 열어 보지만 정원의 단풍 사진이나 맛집 사진들이 있을 뿐이다. 컴퓨터를 켜서 입주자 카페에 로그인한다. 이웃과 교류가 없어진 후 이곳에서 주로 정보를 얻고 있다. 고양이 학대 사건의 범인이 어린 사이코패스라는 글도 이 게시판에서 보았었다. 연쇄살인범으로 성장할 애들이 벌레나 작은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걸로 시작해서 점점 큰 걸 목표로 삼는다던가. 엉뚱한 생각이지만 나는 그 글을 읽고 살짝 안도감이 들었었다. 고양이 학대 사건이 시작된 건 한 달가량 되었는데 금붕어가 죽기 시작한 건 보름 전이기 때문이다. 금붕어는 고양이보다 훨씬 작지 않은가.

   공지사항 게시판에는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던 안내문이 있을 뿐이고, 주민 자유게시판을 훑어보다가 ‘어제저녁 큰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라는 제목을 클릭해 본다. 시간은 아홉 시, 초등학교 3학년인 여자아이가 학원에서 귀가하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어두워서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170센티 정도의 키에 깡마른 남자였고, 이상한 소리를 외치며 다가오다가 아이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도망쳤다고 한다. 길지 않은 게시글에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다. 고양이 학대범과 체격이 비슷한데 같은 인물일까요? 혹시 범행 대상이 고양이에서 어린 소녀로 진화한 걸까요? 소름 끼치는 질문들과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지 말고 어린 자녀들 등하원에 동행을 해 주라는 조언, 그리고 ‘아무 피해도 없고 소리만 지른 거면 습격이라 할 정도는 아닌데 지나친 억측으로 아파트의 소문만 나빠지지 않게 조심하셨으면 합니다’라는 부녀회장 글까지 읽자 눈이 뻐근해진다. 

   봉투에서 죽은 금붕어를 꺼내 든다. 붕어를 들여다본다. 아무 상처도 없고 비늘 한 개 떨어진 곳이 없다. 볼록한 배에 손톱만큼 눌린 자국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기분인 것도 같다. 대체 언제 죽었을까. 집은 여전히 조용하다. 한솔이가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빈집보다 더 휑해 보인다. 남은 금붕어 세 마리가 웅성거리는 어항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팔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비즈공예는 내 취미생활이었다. 작고 정교하고 비싼 구슬들로 만드는 작품들은 퀼트나 뜨개질보다 고급스럽고 화려하다. 도안을 디자인하고 작품을 만들고 싶은 열정은 이제 사라졌지만 대신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꽤 큰 규모의 여성 사이트 메인화면에 핸드메이드 비즈팔찌 광고를 계약했으니 주문이 밀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무관하게 내 눈은 어항 속에서 돌아다니는 놈들을 하나씩 추적하며 찬찬히 뜯어 본다. 남아 있는 것은 세 마리. 처음 남편이 사 온 네 마리와 내가 사 온 일곱 마리, 열한 마리의 금붕어 중 네 마리는 일찍 죽었다. 나머지 일곱 마리는 탈 없이 살고 있었는데, 오늘 한 마리, 지난주에 두 마리, 지지난 주에 한 마리. 자꾸 죽고 있다. 지난해 여름, 남편이 죽은 금붕어들을 건지던 기억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남편은 집에 있었고, 한솔이는 사랑스러운 모범생이었는데.

   갑자기 죽은 붕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죽은 붕어를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린다. 휴대폰을 집어 든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신랑’은 ‘00’이 되었다. 연락처에서 00을 찾아 메시지를 하나 보낸다. ‘어항 좀 가져가.’ 

 

-*-


   어항을 들여놓고 반 년쯤 지난 작년 여름, 시동생이 또다시 폭행 사고를 저지르고 잠적해 버렸다. 동서마저 가출했다는 연락을 들은 남편은 식탁에서 일어섰다. 

   -저녁이나 마저 먹고 가. 그 애 외삼촌이 돌보고 있을 텐데.

   남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남편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조카아이가 먼저 들어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자기 방에서 공부하던 한솔이가 튀어나왔다. 어, 스테이크, 졸라 맛있어, 조카아이는 한솔이에게 자랑부터 했고 한솔이는 정말? 어디서 먹었어? 속도 없이 장단을 맞췄다. 식탁 위에서 물리지 못하고 세 시간을 기다린 저녁 밥상이 처량해 보였다. 쟤 며칠 있어야 하는데, 웅얼거리면서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작업실로 쓰는 작은 방을 치워 달라는 뜻이었다. 내가 인상을 쓰든 말든 조카아이는 와우, 금붕어다! 외치면서 어항으로 달려갔다. 

   -하나 둘 셋 넷, 네 마리네, 저 까만 붕어는 눈깔이 툭 튀어나왔어, 우헤헤.

   -출목금이라고 해. 눈이 돌출한 금붕어라는 뜻이지. 우리말로는 툭눈이 금붕어라고······

   남편은 기회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나 본데 설명 같은 걸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큰아빠 설명충! 하고 버릇없이 말을 막은 후 제멋대로 외쳤다.

   -그거 나 할래! 까만 건 나! 빨간 거 세 마리는 큰아빠, 큰엄마, 한솔이 형!

   -전에 가져간 고양이는 어떻게 하고 왔니?

   나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이는 어항을 두드리며 붕어들을 괴롭히느라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듯했다. 몇 번을 되풀이 물은 끝에 무성의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줙써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줬어요’로 들렸다.

   -누구 줬어?

   몇 번을 다시 물은 끝에 짜증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아우, 죽었다고요!

   아이는 계속 붕어들을 괴롭히며 어항 주변을 뱅뱅 돌았다.

   나는 작업실로 가서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작업대 위에는 구슬 백을 짜던 직조기가 놓여 있었다. 다음 달 아트페어에 내려고 공들여 만드는 작품이었다. 가지런히 날줄이 걸린 직조기에 구슬을 끼운 씨줄이 드나들며 무늬를 짜내고 있었다. 실로 베를 짜듯 잘디잔 구슬을 이용해 직조를 하는 것이다. 비즈 직조는 손이 많이 가고 집중력이 필요해서 대개들 지겨워하지만 나는 좋아한다. 제작 키트를 사서 만드는 것보다 스스로 디자인하고 구슬을 준비해 큰 작품을 만드는 걸 더 좋아한다. 단순 공예가 아닌 예술작품을 만드는 뿌듯함이 좋다. 직조기에 걸린 작품에 반쯤 그려진 연꽃무늬가 내 눈에도 예뻤다. 아쉽지만 할 수 없었다. 직조작품을 식탁에서 하기는 무리였다. 색깔별로 나누어놓은 구슬들을 삼각접시들에 나눠 담고 조심조심 작업대를 구석으로 밀었다. 소파베드를 펼쳐 잠자리를 꾸며주고 한솔이 방에서 작은 잠옷을 가져와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 지저분한 조카애에게 과분한 잠자리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서슴없이 방으로 쳐들어왔다. 저 작은 책상 위에 있는 건 큰엄마 작품 만드는 거니까, 절대 건드리면 안 돼, 라고 말해 주고 방을 나서기도 전에 엄마야, 비명과 함께 우당탕 작업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직조기에 팽팽히 걸려 있던 줄 몇 개가 끊어져 구슬들이 스르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료함도 바닥에 팽개쳐져 색색가지 구슬 수천 개가 떼구루루 끝도 없이 굴러가 방구석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조카애는 아씨발 좆됐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 있었다.

   구슬들을 쓸어 담아 거실로 나왔다. 한솔이와 조카아이가 함께 떠들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조용해진 후에도 나는 그 많은 구슬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식탁에서 직경 2 밀리미터짜리 구슬들을 종류별로 모으면서 머리가 띵하고 눈이 뻐근해졌다. 양손으로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두 눈이 단단하게 만져졌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내가 한 마리 출목금이 되는 것 같은 기괴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놈의 까만 툭눈이 금붕어가 있는 한 결코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조급해졌다. 

   나는 어항 속으로 손을 넣었다. 두 손이 만들어낸 우묵한 공간을 뜰채처럼 이용해 놈을 떠올렸다. 탁자 위에 올려놓자 펄떡펄떡 튀어 오르며 제풀에 탁자 가장자리로 밀려갔다. 탁자 모서리에서 다시 한번 펄떡 꿈틀거리더니 한순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룻바닥에 누워 입을 뻐끔거리는 금붕어를 주워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내가 내려다보는 동안 놈은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은 눈을 껌뻑이지도 않고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다가 섬뜩해졌다. 붕어는 어항으로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어어, 이거 떴어요. 까만 애, 죽었나 봐.

   조카아이가 수선을 떠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눈이 뻑뻑해서 잘 떠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비비는 손끝에 닿는 안구는 한결 부드러웠고 인공누액을 한 방울 넣자 상쾌해졌다.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 거실로 나갔다.

   -그러네. 빨간 붕어들 틈에서 까만 애 혼자 살기는 어려운가 보다.

   그렇게 말하고 조카애가 보는 앞에서 죽은 금붕어를 건져 변기에 버렸다. 

   그리고 그날 마트에 가서 금붕어를 일곱 마리 더 샀다. 모두 빨간 놈들로. 조카애는 까만 붕어가 없다고 툴툴거리며 어항을 두드렸다. 남편이 그러면 붕어가 힘들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날 저녁, 어항의 물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어항 앞으로 불렀다.

   -어항 한 번 봐 봐. 

   남편은 침울하게 말했다.

   -물이 깨졌어.

   -왜 물이 깨졌을까? 어항은 그대론데 붕어가 많아져서 그런 거 아닐까?

   내 질문에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튿날 커다란 어항을 사 왔다. 작은 어항은 버렸다. 담겨있던 물을 새 어항에 옮겨 부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수돗물에는 소독약이 있다고 들은 것 같아 아깝지만 생수를 채워 주었다. 조카아이는 큰 어항 주변을 뱅뱅 돌면서 어항을 두드렸다. 붕어들은 조카아이를 피해 다녔고 한솔이는 어린 사촌 반대편에서 붕어들이 도망쳐 오기를 기다리다가 어항을 두드려댔다.

   -저 애 온 후로 한솔이가 난폭해진 것 같지 않아? 

   대놓고 물어도 남편은 말이 없었다. 

   -저 애 외삼촌도 있는데 왜 항상 우리가 떠맡아? 

   목소리를 살짝 높였더니 남편이 웅얼댔다.

   -조폭질 하는 인간에게 어린애를 보내야겠어? 

   어이가 없었다. 

   -저 애, 그 사람 조카야. 

   그러자 전혀 뜻밖의 질문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한솔이에게 사람 패고 다니는 폭력배 조카라고 하면 좋겠니?

   -당신은 한솔이 아빠가 돼서, 그게 할 말이야!

   시동생은 집안의 돌연변이였다. 남편과 형제지간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인간 말종이었다. 동서는 한술 더 떴다. 집안에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사람이 없이 조폭, 사기꾼, 술집 여자만 수두룩했고, 동서 본인도 그중의 하나였다. 조카아이는 그런 유전자를 받아 그런 환경에서 키워진 그런 부모의 축소판이었지만, 한솔이는 전혀 달랐다. 한솔이는 성실한 부모 아래 청결한 집에서 유기농 건강식으로 키워진,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완벽한 모범생. 조카아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이였다. 내가 화를 내자 남편은 쪼그라든 소리로 말했다.

   -어린애잖아.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없어? 

   그 이튿날 아침 어항에는 금붕어가 세 마리나 떠 있었다. 

   -비싼 생수 넣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렇게 갑자기 어항을 바꾸고 물을 갈면 물이 깨져. 금붕어가 견디지 못한다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편의 말에는 비난이 섞여 있었다. 원칙을 무시하고 새 어항에 털어 넣었으니 아무리 생존력이 강한 금붕어라도 죽는 건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조카아이를 보자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쳐 돌아서 까만 금붕어에게 하던 짓을 저 아이가 빨간 금붕어들에게 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있어? 고양이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앤데? 

   남편은 뜰채로 죽은 금붕어를 건지려 했으나 붕어는 수류를 따라 흐르며 뜰채를 비켜났다. 남편은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조카아이가 킥 웃었다. 내가 노려보자 한솔이가 제 사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두 아이 모두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를 비죽거리며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


   어항 좀 가져가. 문자는 보냈지만 남편이 정말 어항을 가져갈 거라는 기대를 한 건 아니다. 맨몸으로 나간 곳이 고작 고시원 한 칸인데 어항을 둘 곳이 있을 리도 없다. 나는 작업실로 갔지만 팔찌를 만들지 못한다. 낚싯줄에 비즈를 줄줄이 꿰는 일조차 집중을 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본다. 당연히 남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한참 망설이다 6층 여자에게 전화를 한다. 어제 무슨 일 있었다며? 시치미를 떼고 물어본다. 그녀는 입주민 카페에도 올라오지 않은 최신 소식을 전해 준다.

   -어제 여자애 습격한 범인 말이야, 리셋증후군이라는 말 들었어?

   -리셋증후군? 사이코패스 아니고?

   -범인이 이상한 소리 질렀는데 그게 게임에서 쓰는 마법주문 같은 거래. 컴퓨터 게임하다가 리셋하면 싹 다시 시작하잖아? 게임하는 애들이 사람을 죽여도 단추 하나 누르면 게임처럼 다시 살아나겠거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리고는 ‘그 애들’처럼 게임방에서 사는 애들 아니겠냐고 했다. ‘그 애들’이라는 건 그녀의 아들을 때린 무리이다. 얼마 전 ‘그 애들’을 학교폭력으로 신고한 후 그 부모들과도 싸워야 했던 그녀는 아직 분을 풀지 못했다. ‘그 애들’은 전학 가서도 똑같대. 제 버릇 어디 가겠어? 그 동네 인간들, 부모부터 애들까지 다 똑같잖아? ‘그 동네’는 길 건너의 임대아파트 단지이고, 그 동네 아이들이 우리 아파트를 통과해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한 후로 갈등이 생겼다. 길을 돌아가야 했던 ‘그 애들’이 하필 아파트 후문에서 나오는 그녀의 아들과 마주친 후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오죽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겠어? 예전 같으면 맞장구를 쳤겠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아빠가 가출한 후 한솔이도 콩인지 팥인지 알 수 없는 외톨이가 되었고, 그렇게 엉망이 된 한솔이와 어울려 준 건 그나마 ‘그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솔이도 그 애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증언을 원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로서는 한솔이가 6층 아이 편을 들다가 ‘그 애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도, ‘그 애들’과 도매금으로 학교폭력위원회에 넘겨지는 것도 모두 두려울 뿐이었다. ‘그 애들’이 강제 전학을 간 직후 한솔이는 다시 모범생으로 돌아온 듯했다. 일찍 귀가하고, 더 이상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과한 용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동안 신발장에서 없어졌다던 새 운동화, 수시로 잃어버린 새 옷들, 피시방에 두고 왔다던 새 패딩, 그런 것들을 학폭위에 증언하는 게 나았을까, 후회도 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열흘도 지나지 않아 한솔이의 귀가는 불규칙해졌다. 아파트 주변에 고양이 학대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6층 여자는 학교에서 쫓겨난 ‘그 애들’ 소행이 틀림없다며 흥분했고 나는 그런 거 같아, 하고 말했다. 나는 한솔이가 누구와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캐물으면 한솔이는 대들고 반항하는 대신 몇 마디 틱틱 대충 얼버무리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나도 리셋증후군 걸렸나 봐. 단추 하나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녀는 아들이 아직도 정상 생활이 어렵다며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전화를 끊고 나는 오래 열지 않았던 서랍을 연다. 그 안에는 비즈 재료 세트들이 줄지어 정리돼 있다. 각각의 세트마다 색색가지 구슬들이 나뉘어 담긴 작은 지퍼백들이 들어 있다. 마지막 줄에는 미완성 작품들이 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든다. 구슬이 색깔별로 분리되지 않고 한꺼번에 담겨있는 봉지다. 여러 가지 구슬들이 뒤섞여 칙칙해 보이는 사이사이 진하고 옅은 핑크색이 언뜻언뜻 맑고 밝게 빛을 뿜는다. 봉지를 열자 한쪽 구석에 연꽃 몇 송이가 보인다. 단단히 웅크린 작은 봉오리부터 반쯤 벌어진 꽃송이까지, 짜다가 만 비즈 직조다. 활짝 핀 것들은 더 아래쪽, 아직 짜지 않은 부분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직조가 찢어지며 망쳐 버렸다. 커다란 이파리와 물속의 금붕어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채, 연꽃들은 허공에 떠 있다. 아직 나타나지 못한 만개한 연꽃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눈을 뜬다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면. 나는 삼각접시를 손에 쥐고 구슬들을 색깔별로 나누기 시작한다. 수십 가지 구슬을 따로 분리하는 단순한 작업이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새 도안을 구상한다. 나무뿌리에 휘감긴 채 되살아난 동남아 밀림 속 고대 도시의 수많은 사면불상들이 차례로 나타나 눈을 뜨고 감고 다시 뜨고, 세상이 새로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린다. 우리 가족이 함께 보았던 이국의 풍광, 잊지 않고 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우리 세 식구의 해외여행. 여행을 떠나던 순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었을지, 그것 역시 알 수가 없다. 


   지난해 여름 잠적했던 시동생이 구속되어 삼 년 형을 받고 동서가 지방 업소에 취직을 한다고 나가 버렸다. 다시 한 번 조카아이의 거취가 문제로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은 그 아이를 돌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이는 동서의 친정 오빠가 맡기로 했다. 시동생이 저지른 사고들을 해결해 준다며 우리에게서 돈을 갈취하곤 하던 문제의 조폭사돈이었다. 월 백이십만 원의 양육비를 요구하는 걸 구십으로 겨우 협상한 후 우리는 동남아 특가 상품을 예약했다. 힘들었던 과정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지만, 다달이 엄한 곳에 거액을 지출하게 되자 그동안 애면글면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온 게 억울해서였다. 그리고 기다리던 가족 동반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조카애가 이웃집 아이를 물어뜯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의 외삼촌은 합의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백만 원을 제시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남편은 머뭇댔지만 그 방면에 전문가신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어, 내가 속삭이자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다는 척,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조카아이가 다발성 장기 파열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외삼촌은 온 세상의 비난을 받고 감옥에 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남편에겐 하나뿐인 조카였고, 외동인 한솔이에게는 하나뿐인 사촌이자 동생이자 우리 집에 머물렀던 친구였다. 나에겐 버릇없고 무례하고 집을 어지럽히고 고양이를 죽게 하고 금붕어를 괴롭히고 비즈 작품을 망쳐 놓은 시조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아이는 여덟 살이었고, 제대로 양육을 받는다면 병원에 데려가 무슨 주의력 결핍 증후군 같은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를 아이였다. 아니, 설령 그 아이가 열여덟, 혹은 스물여덟 살이더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는 순수한 꼬마 악당이었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리 가족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작업대에 앉아 하루 종일 구슬을 꿰었지만 좁쌀 같은 구슬들은 질서 없이 바늘에 꿰어지고, 바늘은 제멋대로 내 손가락을 꿰뚫고, 저녁이 되면 쓸모없는 물건을 만들어져 있었다. 장을 봐서 저녁을 차린 기억은 나는데 가족이 식사를 함께 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마루와 가구가 닳아 없어지도록 문질러 닦았는데 그 집에서 쉬는 가족이 없었다. 내가 꽃밭처럼 가꾸었던 가정이 조카아이가 속했던 가정처럼 삭막한 사막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가족이 실재했던 걸까. 아마도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에 아이콘들이 단정하게 정렬했다. 아무것도 클릭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는 동안 모니터는 캄캄하게 죽어 버렸다. 퍼뜩 두려워져서 단 한 번 마우스를 건드리자 화면보호기가 작동하며 아름다운 풍광이 천지창조처럼 나타났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놀리면 그 아름다운 풍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아이콘들이 줄 맞춰 선 바탕화면이 나타나고, 나는 그 허망한 공간에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의 흔적을 찾았다. 사진 폴더 안에는 남편과 내가 만나 3인 가족을 이루어 온 과정을 날짜별로 깔끔하게 분류해 놓았다. 언제 들어온 걸까. 어쩌면 원래부터 집에 있었던 걸까. 남편이 내 뒤에 서서 같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사진 폴더들을 하나씩 열어 갔다. 한솔이가 태어나기 전 풋풋한 남편과 내가 만나고, 어느새 한솔이가 내 뱃속에 숨어 있고, 아주 작은 한솔이가 나타나 어엿한 중학생으로 성장해 가다가, 미처 이름도 짓지 못한 새 폴더에 이르렀다.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여행 사진들은 전혀 손대지 못한 채, 순서도 장소도 뒤죽박죽이었다. 그 모양을 보자 뒤엉킨 채 죽어 가던 기억이 숨을 쉬려 했고, 나는 그 뒤죽박죽 사진 중 하나를 클릭했고, 그리고 남편은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해선 안 됐으니까.


   컴퓨터를 끄고 끊어진 씨줄과 날줄들을 다시 이어 본다. 브라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 시답잖은 광고문구가 귀속에서 자꾸 울린다. 새로 시작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한솔이는 어제도 늦게 돌아왔다.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한 걸까. 실을 다 연결해 직조기에 다시 걸어 보려 했지만 씨줄이고 날줄이고 엉망이 되어있다. 머리가 아프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작업실에 웅크린 채 눈을 감는다. 명료한 정신에 가위가 눌린다. 생매장에 처해진 죄수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잠은 들지 않는다. 죽은 고양이와 금붕어들을 빠그작 빠그작 밟으며 누군가 어두운 집안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다시 달칵.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일까.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꿈이다. 환청이거나. 현실일 리가 없으므로 일어날 필요가 없다. 꿈인지 현실인지 다시 문이 열리고 다시 나가고, 열렸을 리 없는 문이 닫히고, 들리지 않는 발소리조차 멀리 사라지기를 되풀이 되풀이 귓속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꼼짝도 할 수 없던 나를 일으킨 건 6층 여자의 전화였다. 

   -딸애가 안 보여, 영어 학원 끝나고 데리러 갔는데 없어. 

   가위에 눌린 채 한밤을 다 샌 줄 알았는데 겨우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이다.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근처에 있겠지, 나도 나가서 찾아볼게, 6층 여자에게 말한다. 거짓말이다. 나는 한솔이의 방 앞으로 간다. 문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문 앞에 망설이며 서 있을 뿐 무엇이 무서운 걸까. 나는 결국 문을 열지 못한다. 나는 발길을 돌려 거실로 간다. 어항 속에 금붕어들이 살아 있다. 비닐봉지에 물과 금붕어들을 담아 들고 집을 나선다. 남편이 사는 곳은 알고 있다.    

   문 열어! 문 열라구! 소리 지르며 문을 두드리는 동안 줄줄이 늘어선 문짝들 안 어디선가 더러운 욕설이 몇 번 들렸다. 그러나 남편의 이웃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남편이 이 집 같지도 않은 방 한 칸에 틀어박혀 있는 건 분명하다. 닫힌 문을 연달아 걷어차자 문짝이 떨어질 듯 건들거렸다. 뒤늦게 손잡이를 돌려 본다. 입주자의 태반이 좀도둑일 것 같은 이 건물에서 남편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손잡이는 덜커덕 돌아가고 어이없게 문이 열린다. 

   한솔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170센티미터, 깡마른 몸집, 잃어버린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신들과 악마들의 전쟁이 화려하게 벌어지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 티브이 광고에서 몇 초 안에 끝나버린 전쟁이 그곳에선 오래 지속되고 있다. 가구라고는 컴퓨터 테이블과 싱글 침대가 전부, 방바닥에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이불 가운데는 작은 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 죽은 금붕어 떼나 고양이 토막이나 납치당한 여자애나 한솔이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지옥으로 통하는 그 무덤으로 한 걸음 다가간다. 문이 열리건 말건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던 한솔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삼십 년은 늙어 버린 한솔이가 나타난다. 아니다. 한솔이가 아니다. 한솔이가 남편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남편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한솔이는 자고 있어.

   내가 봉긋한 침대를 보자 남편이 다시 말했다.

   -여기에 없지. 집에서 자고 있어. 

   아. 그렇지. 그 안에 금붕어나 고양이나 여자애나 한솔이가 있을 리 없잖은가. 어이없을 정도로 명료한 답을 깨달은 나는 이불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민다.

   -금붕어가 자꾸 죽어.

   남편의 눈이 금붕어와 나를 번갈아 본다. 나는 고양이 학대 사건이 시작된 이후 내가 어항을 돌보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밥을 주지 않았고, 그리고, 물도. 남편의 충혈된 눈이 나에게 정착하고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물이 깨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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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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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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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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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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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마중 서경희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여자가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딸기우유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까뜨린느?” 여자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연락해온 사막여우였다. 지금껏 작가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단편 시나리오는 주로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하려고 샀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얼굴은커녕 실명을 밝히기도 꺼렸다. 사막여우는 달랐다. 작년에 사들인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 팔 거죠?” 사막여우가 계산대에 바싹 달라붙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느긋한 척했다. 눈을 내리깔고 사막여우의 손을 훔쳐봤다. 네일아트를 화려하게 한 손톱은 미러볼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가운뎃손가락엔 팥알만 한 진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내 오른손을 슬그머니 계산대 아래로 내렸다. 어렸을 때 화상 사고를 당해 엄지를 제외한 손톱이 전부 녹아버렸다. 운 좋게 절반이 남은 엄지손톱은 하얗게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돈이 적어서 그래요?” “이번 건 제가 찍을 생각으로 쓰는 거라서요.” 시나리오를 팔기 힘들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여지는 남기느라 말끝을 흐렸다. 사막여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을 실룩거렸다. 이쯤 되면 칼자루는 나한테 넘어온 셈이다. 미친 듯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시나리오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찍고 싶어서였다. 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큰 경력이 될 것이고 감독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단편 시나리오는 못해도 한 달에 한 편은 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사막여우한테 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없었다. 사막여우는 골이 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듯했다. 사막여우가 까뜨린느, 라고 부르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편의점 안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나도 덩달아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카드 결제를 했다. 담배를 팔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덴마크 요구르트는 원 플러스 원 상품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에 편의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음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가할 터였다. 나는 사막여우가 건네준 딸기우유를 쭉쭉 빨았다. “100만 원 드릴게요.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사막여우는 마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나는 막장 드라마의 악녀처럼 머리를 굴렸다. 5분에서 15분 사이의 단편 시나리오는 딱히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저번에는 1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 요금을 냈는지 쌀을 사는 데 보탰는지. 교통카드를 충전하느라 없애버렸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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