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멜들다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950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재게 놀려 뜰채를 휘둘렀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벌써 멜 떼는 반대쪽으로 사라져 버리고 빈 뜰채만 덜렁 올라왔다. 파도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멜 떼를 보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마을 사람 누구보다 멜을 많이 건졌을 거였다. 어머니는 손이 빨랐다. 작년 가을에 멜이 들어왔을 때는 다섯 포대 넘게 건졌다.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요양원에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자 정순은 멜을 건지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이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집에 먹을 사람도 없는데.’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멜이 해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큰 고기 떼가 해안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강 선주네가 멜을 안주 삼아 술추렴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바닷사람들에게 큰 고기 떼가 들어오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열 세 가구가 전부인 소도리 포구에서는 가을 한 철 동안 갈치를 잡아 일 년 살림을 살았다. 지금처럼 갈치가 끝난 철엔 주낙으로 돔이나 우럭을 잡아서 생활을 유지했다. 주낙은 일일이 낚싯줄을 하나씩 매서 낚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갔지만, 고기비늘이 벗겨지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로 넘길 수 있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다에 고기 씨가 말라 돔이나 우럭도 잡기 어려웠다. 매일 빈 깡통으로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니 오늘처럼 멜이 들어오면 돔이나 농어 같은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에 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정순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수평선을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적당히 부는 바람과 요람을 흔들 듯 조용히 움직이는 파도. 작업하기 좋은 날씨였다. ‘이번에는 꼭 출항을 해야지.’ 정순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순은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첫 출항을 나갈 계획이었다. 지난주 이미 해양호 바닥의 녹장을 밀고 페인트칠까지 마쳤다. 이제 바다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정순은 수평선에서 시선을 거두고 포구 안쪽에 있는 해양호를 바라보았다. 계선주에 홋줄로 맨 해양호 옆으로 아홉 척의 어선들이 촘촘하게 정박해 있었다. 파도가 밀려들어올 때마다 어선들은 가볍게 흔들거리며 서로 어깨를 부딪쳤다. 

   해양호는 포구에 있는 어선 중에서 가장 작았다. 배가 크면 선원을 많이 태울 수 있고, 그러면 선원의 어획량에서 수임을 떼는 선주는 돈을 더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순의 형편으로는 더 큰 배를 살 수 없었다. 정원이 두 명에 불과한 해양호도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꼭 배를 사야 크냐?”

   정순이 어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 어선 사는 것을 말렸다.

   “너까지 뱃사람으로 만들고 싶진 않다. 아직 동네에서 보는 눈이.”

   정순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정순이 아버지 배에서 화재가 난 것 때문에 포구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도리 포구는 어선 열 척이 겨우 정박할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게다가 포구 앞에 여가 있어 수심이 얕았다. 밀물이 되어야 포구 안에 바닷물이 차올라서 배를 운행할 수 있었다. 썰물 때에는 고만고만한 어선들이 쓰러질 듯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서 정박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번처럼 배 한 척에 불이 나면 순식간에 옮겨 붙는 사고도 간혹 생겼다.

   늦은 새벽에 선실에서 치솟은 불길을 한 시간 만에 껐는데도, 아버지의 배는 물론 양 옆에 정박해 있던 강 선주와 박 선주의 배까지 전소됐다. 조사 결과 화재 원인은 누구의 잘못이 아닌 누전으로 밝혀졌지만, 화재가 정순이 아버지 배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로 인해 소실된 어선들에 대한 보상은 오롯이 정순이 아버지가 물어야 했다. 강 선주와 박 선주는 정순이 아버지가 제시한 보상금이 적다며 소송을 걸었다. 삼 년이 넘게 걸린 소송 기간 동안 아버지가 뇌출혈로 떠나고 어머니마저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보상금으로 강 선주와 박 선주는 새 배를 지어 왔고, 새 배를 짓기 전까지 작업 못한 것에 대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정순이 아버지를 여전히 원망했다.

   땅을 팔고 하나밖에 없는 집을 담보 잡아 보상금을 다 물어준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순은 바다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죽은 오빠를 대신해 정순은 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배를 탔다. 정순은 뱃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아버지도 없고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부양하는 가장이 된 지금, 정순이 할 수 있는 일은 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 멜 : '멸치'의 제주 방언


   정순은 슬그머니 포구에서 빠져 나와 마을 입구에 있는 어촌계 사무실로 갔다. 정순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어촌계장이 얼굴을 구겼다. 어촌계장은 언짢은 기색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정순은 못 본 척하고 책상에 앉아 있는 김 양에게로 갔다.

   “아직도 전화 없어요?”

   고지서를 정리하던 김 양이 고개를 저었다. 정순은 선원이 구해지지 않아 김 양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인데 여태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어코 배를 몰겠다는 거네. 가뜩이나 좁은 포구에서.”

   어촌계장 맞은편에서 술을 마시던 최가 불콰한 얼굴로 한 소리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정순은 최를 무시하고 김 양에게 출항신고서를 달라고 했다.

   “출항 전에 작성해서 여기로 가져오면 되죠?”

   “네, 제가 받아서 파출소에 전달할게요.”

   김 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순이 출항신고서를 들고 어촌계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회색 연기가 자욱했다. 사무실 옆 담벼락에서 최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최의 발밑에는 이미 담배꽁초가 여러 개 뒹굴고 있었다. 최는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피우지 않고 바로 새 담배를 꺼내 피우는 버릇이 있었다. 때문에 최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와 불이 덜 꺼진 채 버려진 꽁초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서로 얽혀 어지럽게 난무를 추었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정순의 이마에 골이 새겨졌다. 정순은 잔뜩 짜증난 걸음으로 최 앞을 지나갔다.

   “어디 여자가, 재수 옴 붙게시리.”

   뒤통수에서 들리는 최의 말에 정순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최는 정순이 아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미쳤냐. 당장 집에 들어가!”

   최가 휴대폰 속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정순은 휴대폰 속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미얀마에서 온 최의 아내 쑹야는 얼굴이 까맣고 몸집이 자그마했다. 목각인형처럼 비쩍 마른 체구의 그네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다. 최가 술에 취한 날이면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한번은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도망 나온 쑹야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다. 정순이 냉수를 주자 단숨에 마신 쑹야는 “난 집 없어. 엄마, 아빠, 동생 다 없어. 그래서 갈 데 없어.”라며 엉엉 울었다. 휴대폰을 든 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심한 욕설이 이어졌다. 쑹야에게 퍼붓는 최의 욕설이 정순의 가슴에도 매섭게 날아들어 상처를 입혔다.


   집에 도착한 정순은 창고에서 주낙바퀴를 꺼내 주낙을 매기 시작했다. 긴 모릿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짓줄을 달고 끝에 낚싯바늘을 매단 주낙을 주낙바퀴 테두리에 두른 탄성 패드에 나란히 꽂으면 돔 주낙 채비가 끝났다. 이렇게 장만해 두면 바다에서는 주낙바퀴에 꽂은 바늘만 살짝 들고 미끼를 끼워 바다에 던져 넣으면 됐다. 고기란 게 어떤 때는 몇 시간 동안 한 마리도 입질을 안 하다가도 갑자기 낚싯줄을 잡아 챌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몰려오는 습성이 있어 주낙을 많이 챙겨도 부족할 때가 있곤 했다. 특히 지금처럼 주낙에 능숙한 아버지 없이 정순이 혼자 주낙을 던지면 낚싯줄을 끊어 먹는 일도 다반사라 정순은 할 수 있는 한 주낙을 많이 매두어야 했다. 

   그렇게 네 개째의 주낙바퀴를 채웠을 때였다. 수런대는 말소리와 함께 긴 그림자가 대문 안으로 드리워졌다. 정순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쓴 모자챙을 접고 인기척이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김 양과 얼굴이 까만 남자가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아, 옹, 입니다.”

   아옹은 삼 년 전에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왔다. 아옹의 아버지는 호수에서 조각배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어릴 때는 휴일에 쉬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는 일이 지겨웠는데, 한국에 와서 공장 일 하다 보니 물고기를 잡던 때가 그리워 소도리 포구로 왔다고 했다.

   아옹의 차분한 말투와 반듯해 보이는 인상이 맘에 들면서도 정순은 불안했다. 자신도 서툰 주낙 작업을 호수에서 그물 던지는 게 전부였던 아옹이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정순은 옆에 있는 김 양을 슬쩍 살폈다. 정순의 의도를 눈치챈 김 양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정순도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도리 포구 인근 지역에서 여자가 모는 어선을 타고 작업에 나갈 남자는 없을 거였다. 정순이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아들을 대신해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나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 없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 여전히 바다에서는 통했다. 아버지도 정순을 배에 태우면서 시집가기 전까지만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여자를 태우고 다니던 아버지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니 정순이 배를 타는 것을 반기는 마을 사람은 없을 거였다.

   정순은 아옹의 어깨 너머로 파도가 찰랑거리는 포구를 보았다. 선주 몇이 배에 올라 닻줄을 정비하는 데, 포구 안쪽에 모로 기울어 있는 해양호가 보였다. 다들 바쁜 와중에 해양호의 시간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쉴 수는 없었다. 은행에서 대출금 독촉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정순은 결심을 굳히고 아옹에게 내일 오후에 포구로 나오라고 했다. 임금은 아옹이 잡은 작업량의 60%를 주겠다고 했다. 3개월이 지나면 70%로 올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양과 아옹을 마을 어귀까지 배웅하고 정순은 주낙바퀴를 들고 배에 올랐다. 선실에 주낙바퀴를 차곡차곡 쌓아 두고 배를 둘러보았다. 아직 정식 출항하지 않은 새 배라 낯설었지만 배 곳곳에 있는 어구에는 아버지의 손길이 가득했다. 어느 하나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배 이름도 일부러 아버지를 따라 해양호로 지었다. 불에 타 버리기 전 아버지의 해양호는 작지만 동네에서 가장 많은 어획량을 올렸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기 전까지 배를 다시 타고 싶어 했다. 이 배마저 잃으면 정말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을 거였다. 


   출항하기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맑고 푸른 하늘과 머리카락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바람. 사람들은 바람이 한 점도 불지 않는 날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적당히 바람 부는 날이 조업하기에는 더 좋다. 요즘은 워낙 엔진의 기동력이 좋아서 파도 위를 넘나들며 달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어군이 모인 포인트에 도착해 정박하고 조업할 때엔 집어등의 열기를 식혀 주는 바람이 필요했다. 

   정순은 드디어 첫 조업을 나서게 됐다는 설렘으로 잔뜩 긴장한 채 포구로 나갔다. 아옹이 포구 앞에 서 있다 정순을 보자 반색했다. 아옹에게 다가가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니 최를 비롯한 남자 서넛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아옹과 정순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순이 출항하는 게 영 마뜩찮은 것이었다. 게다가 포구 전체에 근본도 모르는 타국에서 온 남자랑 둘이 탈 거란 소문이 퍼져 분위기가 더 좋지 않았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정순은 마음을 가다듬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고기만 잘 잡으면 된다. 정순은 주먹을 굳게 쥐고 해양호에 발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정순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해양호 갑판에 며칠 동안 열심히 맨 주낙들이 마구 엉키고 잘린 채 널려 있었다. 정순은 기가 막히고 다리에서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 소행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뻔했다. 뒤에서 따라 오던 아옹이 당황해 끊어진 주낙을 서둘러 주워 모았다. 

   정순은 소도리 포구 입구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마을 남자들이 그 자리에 서서 정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순은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지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지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정순은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추슬렀다. 

   “아옹, 괜찮아요. 바다에서 새로 매면 돼요.”

   정순은 아옹에게 애써 웃었다. 선실에 새 낚싯줄과 낚싯바늘이 있었다. 주낙은 다시 매면 된다. 정순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포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바다로 나가면 조금 편해질 것 같았다. 정순은 선실에 들어가 키를 꽂고 레버를 돌렸다. 엔진이 크르릉 거리며 우렁찬 굉음을 냈다. 정순은 서둘러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군탐지기를 켜고 무전으로 출항을 보고한 뒤 배를 몰았다. 이미 생각해 둔 포인트도 있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적어 온 작업 일지 덕이었다. 아버지의 작업 일지엔 낚시 포인트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배를 타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마치 노련한 건축사의 도면처럼 상세하게 어종 별로 포인트 자리를 그려 넣었다. 정순에게는 아버지의 작업 일지가 보물 지도나 다름없었다. 정순은 평생 바다 사나이로 살았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닻을 내리고 망가진 주낙바퀴들을 한데 모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마무리해야 했다. 정순은 잠시 고개를 들어 먼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시퍼런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금방 타오를 듯 붉은색으로 이글거렸다. 이제 곧 붉은 하늘이 사라지고 짙은 어둠이 하늘을 덮을 것이었다. 

   가짓줄을 매단 낚시 바늘을 주낙바퀴 패드에 꽂는 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선실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던 아옹이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았다. 아옹의 검은 얼굴 위로 노을이 일렁였다. 

   “쉬라니까 고기 몰려오면 앉을 틈도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앉을 틈 없이 고기가 몰려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옹은 대답 없이 손을 뻗어 주낙을 매기 시작했다.

   가짓줄에 낚싯바늘을 세 번 꼬아 단단히 묶고 주낙바퀴 테두리 패드에 꽂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낚싯줄이 투명하고 가늘어 집중하지 않으면 실이 엉키거나 바늘이 빠져 나가 버렸다. 눈과 손이 피곤한 작업이었다. 아옹은 눈썰미가 좋은지 이내 정순이 매는 방식을 습득했다. 둘이 함께 하니 주낙바퀴 한 통이 금세 채워졌다. 두 번째 주낙바퀴를 반쯤 채웠을 때 주변이 어둑해 왔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뒤로 하고 아옹이 나직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콧소리 같기도 하고 아이를 재우는 자장가 같기도 한 노래가 꽤 구슬펐다. 

   “무슨 노래야?”

   “그냥 어렸을 때, 아빠 부르던 노래인데, 바다 보니 생각나요.”

   “바다와 호수는 다르지?”

   “네. 나 살던 호수는 파도 없어요. 그물 던지고 고기 기다리면 끝이에요. 그때 아빠가 노래 불렀죠.”

   정순은 마주한 아옹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옹의 눈동자에 까맣게 물드는 바다가 비쳤다. 아마 호수에서 고기를 낚던 아옹 아버지의 모습이 이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옹은 한국에 왜 왔어?”

   정순이 묻자 아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 호수에서 물고기 낚지 못해요. 아빠, 엄마, 다 떠났어요. 거긴 이제 쇼 해요.”

   TV에서 본 미얀마의 호수 풍경이 떠올랐다. 호수에 몰린 관광객을 위해 어부들이 물고기를 낚지 않고 아크로바틱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 호수에 쪽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한 발로 노를 젓거나 구릿빛 어깨를 느리게 움직이며 나선형 그물을 물 위로 투망했다 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관광객은 환호를 지르며 돈을 던졌다. 그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쇼 때문에 물고기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호수에서 사라졌다. 물고기만이 아니다.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아옹 아버지와 같은 진짜 어부들도 물고기가 폐사하는 호수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아옹은 그렇게 밀리고 밀려 이 머나먼 소도리 포구까지 밀려왔을 거였다. 정순은 손이 서툴러 낚싯바늘에 찔리면서도 묵묵히 주낙을 매는 아옹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어라, 이건 뭐라. 돔을 낚는 게 아니라 남자를 꼬셤신게. 낯짝도 두껍네.”

   갑자기 거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양호 옆으로 칠성호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정순은 그냥 지나가려니 하고 무시했는데, 칠성호가 아예 닻을 내리고 정박할 준비를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기다 배를 세우면 어떡해요!”

   화가 난 정순이 벌떡 일어났다.

   “무사? 이 바당이 이녁 꺼라? 남이사 배를 세우든 화장실을 세우든 상관 마라게.”

   강 선주는 해양호보다 훨씬 큰 칠성호를 기어코 해양호 뱃전에 바짝 붙여서 세우려고 했다. 정순은 화가 났다. 돔은 수면의 상황에 매우 민감한 어종이었다. 배가 두 척이나 나란히 붙어 있으면 입질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정순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 선주는 정순을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장비들을 꺼내 낚시할 준비를 했다. 큰 배와 바짝 붙어 세우면 전적으로 작은 배가 불리했다. 집어등 숫자가 적어 큰 배보다 어둡고 흔들거리는 진동도 더 심해서 그나마 수면 가까이 올라온 돔도 죄다 큰 배 쪽으로 향할 게 분명했다. 이건 마치 정순이 아버지의 돔 낚시 포인트 자리에 세울 거란 걸 알고 기다렸다 일부러 붙여 세우는 것 같았다. 정순은 속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선원이 일곱 명이나 되는 칠성호를 상대로 싸워 봤자 이길 도리가 없었다. 정순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 선수를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자 칠성호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순은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위협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짜증나고 불쾌했다. 


   새로 옮긴 포인트에 주낙을 드리웠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입질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낙을 던지고 입질을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어선들이 빠른 속도로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일부러 속도를 올리고 정순의 배에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와서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물보라가 정순과 아옹을 덮쳤다. 머리는 소금물에 젖고, 바닷물이 눈 안에 들어가 빨갛게 충혈 되고 따가웠지만 정순은 피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꼿꼿이 뱃전에 서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에 몰두했다. 힘겨운 기 싸움이었다. 기 싸움에서 지면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는 것을 정순은 알고 있었다. 한 동네에서 삼십 년 넘게 함께 지냈는데도 정순은 그들에게 동료가 아닌 밥그릇을 뺏으려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잔챙이만 몇 마리 잡고 포구로 돌아왔다. 피곤해 보이는 아옹에게 반찬으로 챙겨 주고 갑판을 청소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주낙을 거두고 양동이로 바닷물을 퍼 바닥을 밀었다. 밤사이 미끼들을 자르느라 더러워진 바닥이 물에 씻겨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자 조금 개운해졌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양동이를 치우는데 갑자기 해뜩한 물체가 날아왔다. 멜이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멜들이 해양호 갑판에 내동댕이쳐져 꿈틀거렸다. 말끔했던 바닥이 금세 희끗희끗한 얼룩으로 지저분해졌다. 정순은 멜이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최가 웃고 있었다.

   “하나도 못 잡은 거 같은 디. 그거라도 주워 먹으라고. 크크크.”

   최가 피우다 만 담배를 휙 던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최의 담배꽁초가 정순의 갑판 위로 떨어졌다. 덜 꺼진 담배꽁초에 덴 멜이 고통스러워하며 파닥거렸다. 큰 고기 떼를 피해 해안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에게 죽어 가는 멜의 모습이 담배꽁초처럼 하찮아 보였다. 정순은 고무장갑을 끼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멜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양동이에 담았다. 그리곤 양동이를 들어 최의 배를 향해 던졌다. 양동이가 뱃전에 떨어져 깨지면서 뱃전에 닿지 못한 멜들이 바다로 떨어졌다. 정순이 던진 양동이에 맞을 뻔한 최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해양호로 올라왔다.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너나 많이 처먹어라.”

   정순은 최를 피하지 않고 따졌다.

   “뭐? 이 년이 정말! 네 년 때문에 다들 깡통 차고 들어왔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최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최는 당장 한 대 칠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배를 내밀었다. 

   “그래, 쳐 봐. 쳐! 이 미친놈아!”

   정순은 최의 코앞에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뭐? 미친놈? 이 년이 정말….”

   최의 손바닥이 정순의 얼굴을 향했다. 정순은 얼굴로 날아드는 손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치기만 해 봐. 그땐 정말 가만 두지 않겠어.’ 

   “아윽!”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정순이 아니었다. 정순이 눈을 뜨자 바닥에 쓰러진 아옹이 보였다. 아옹이 정순과 최 사이에 끼어들었다 얼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아옹은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행여 정순을 때릴까 봐 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최는 달라붙는 아옹을 떼기 위해 발을 놀리다 아옹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아악!”

   다시 한 번 아옹의 비명 소리가 갑판에 울리고 그때까지 구경만 하던 강 선주가 황급히 다가와 최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만하게. 그만. 이러다 큰일 나겠어.”

   최는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며 아옹과 정순을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한 번만 더 개기면 그땐 정말 여자고 뭐고 없어.”

   최는 침을 뱉고 사라졌다. 정순은 양팔로 배를 감싼 채 웅크린 아옹을 내려다봤다. 덩치 큰 최의 절반밖에 안 되는 체구로 자신을 지키겠다며 막아서다니. 정순은 선실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와 아옹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정순은 괜찮다는 아옹을 일으켜 함께 병원으로 갔다. 아옹이 진찰받는 동안 정순은 최를 떠올리며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끝까지 지키려 한 배였다. 정순은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절대로 누구한테도 뺏길 수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늦가을 폭풍이 불어닥쳤다.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가기 전, 기온이 급작스레 떨어지면 한 번씩 큰 폭풍이 찾아와 소도리 포구를 뒤집어 놓았다. 벌써 며칠째 시원한 입질 한 번 없던 중에 폭풍 예보까지 들리니 정순의 마음엔 시커먼 먹장구름이 잔뜩 꼈다. 정순은 날씨가 더 나빠지기 전에 배 단속을 하기 위해 포구로 향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꽤나 거칠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쏠릴 정도로 몰아쳤고,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짙은 잿빛으로 변한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조업을 나갔던 어선들이 모두 귀항하니 작은 포구가 꽉 찼다. 포구 안에 어선들이 촘촘히 매어져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선체 옆에 매달아 놓은 충격 방지물이 서로 부딪혀 삐걱거렸다.

   저녁이 되면서 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정순은 해양호를 단단히 매고, 어구들을 안전하게 옮긴 것을 확인했는데도 불안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어부의 딸이었지만 배를 직접 모는 입장이 되니 스치는 바람 한 줄기도 무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폭풍이 온다는 예보에는 편안히 엉덩이를 붙이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면 폭풍이 오는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피해 없이 지나기를 기도하는 것이 전부인 나약한 인간이란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다. 몇 번이고 포구를 돌고 또 돌아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정순의 발걸음을 거친 바람이 떠밀었다. 바람 끝이 얼마나 매운지 정순은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향했다.

   “어이, 아줌마. 집에 가서 밥이나 하지. 뭐 하러 여기서 얼쩡거려. 시발, 재수 없게 시리.”

   정순은 걸음을 멈추고 욕설이 들리는 곳을 쏘아보았다. 최가 풀린 눈으로 정순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취해 거센 바람 앞에서 쓰러질 듯 허청거리며 담배를 빠는 폼이 위태로워 보였다. 정순은 최를 무시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재수 없는 년 때문에 망조가 들어 고기 씨가 말라 버렸어. 씨발.” 

   최가 더 큰 목소리로 욕설을 했다. 정순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신발을 벗어 냅다 최를 향해 던졌다. 

   “어쿠쿠!”

   신발에 얼굴을 얻어맞은 최가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

   “미친놈아. 한 번만 더 그 터진 주둥이로 여편이니 재수 없느니 소리 해 봐. 성희롱으로 경찰에 확 신고해 버릴 테니까.”

   정순은 넘어진 최 옆에서 신발을 챙겨 신으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홱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도 쉬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정순은 어릴 적부터 봐 왔던 일이라 이골이 날 법한데도 여전히 여자라고 무시하는 일부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다. 최의 어머니는 해녀였다. 남편을 일찍 잃고 홀로 물질을 해 최를 키웠다. 자신의 어머니가 바다에서 벌어 온 돈으로 먹고살았으면서 여자는 배에 타면 절대 안 된다고 우기는 최가 이해되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뒤척였다. 그사이 바람이 거세져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정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괜히 두려움이 엄습했다. 폭풍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질 거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처럼 몰아칠 때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선수와 선미에 홋줄을 걸어 계선주에 단단히 매 놓았지만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휘청대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결국 정순은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세찬 바람 끝에 덧창까지 들썩거렸다. 정순은 덧창을 한 뼘쯤 열고 포구 쪽을 내다보았다. 

   이상했다. 어둠에 싸여 캄캄해야 할 포구가 환했다. 정순은 창을 완전히 열고 내다보았다. 포구 중간 지점에서 검회색 연기와 함께 붉은 기운이 치솟고 있었다. 불이었다. 배에 불이 났다. 정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방서에 신고하고 서둘러 포구로 뛰어갔다.

   “불이야! 불이야!”

   정신없이 달리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쇳소리가 목에서 새어 나왔다. 신발을 제대로 신지 않은 발바닥에 뭔가 날카로운 것이 밟혔지만, 쳐다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달렸다. 포구에 가까워지자 짙고 무거운 연기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매캐한 냄새에 코와 목이 따가웠다. 정순은 양팔을 뻗어 연기 속을 휘저으며 다시 “불이야!”를 외쳤다. 누구라도 듣고 빨리 와 줬으면 싶었다. 오늘처럼 배들을 촘촘히 정박해 놓았을 땐 불이 쉽게 번질 수 있었다. 배에는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설상가상 기름 탱크들이 포구에서 머지않은 방파제에 설치되어 있었다. 불이 기름 탱크로 번지면 정말 큰일이었다. 불길이 더 커지기 전에 꺼야했다. 정순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불은 선미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갑판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이 검은 연기를 포구 안쪽으로 밀어붙이자 불꽃이 화라락 춤을 추었다. 그때였다. 거센 바람 끝에 불꽃이 일순간 한쪽으로 밀리고, 불꽃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옹이었다. 집에 간 줄 알았던 아옹이 그곳에서 소화기로 불을 끄고 있었다. 언제부터 했는지 아옹의 주변은 이미 하얀 분말 가루가 흩뿌려져 있었다. 집에 가 있어야 할 아옹이 왜 거기에 있는 지 의아했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순은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최의 배에 올랐다. 아옹을 도와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담요에 물을 적셔 주변에 뿌렸다. 다행히 기름통까지 이어지지 않고 불꽃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정순의 소리를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불을 끄는 것을 도왔다.

   “으악, 여기, 여기. 사람!”

   불이 꺼져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른 쪽을 보니 최가 선실 입구에 누워 있었다. 서둘러 최를 방파제로 옮기고 어깨를 두드렸다. 의식을 잃은 최는 꼼짝하지 않았다. 박 선주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심폐 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압박하고 인공호흡을 하는 박 선주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박 선주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이자 강 선주가 박 선주와 교대를 했다. 소방차가 도착하고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박 선주와 강 선주는 번갈아 가며 심폐 소생술을 계속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쑹야와 얕게 숨을 쉬기 시작한 최를 구급차에 실어 보내고서야 정순과 마을 사람들은 한시름 놓았다. 박 선주와 강 선주는 땀이 범벅된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정순은 무릎에서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순에게 다가왔다. 정순은 가만히 아옹을 올려다보았다. 아옹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정순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아옹의 눈동자가 복잡하고 어두워졌다. 아옹은 슬픈 눈으로 정순을 바라보다 말없이 배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경찰이 사건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정순을 찾아왔다. 정순은 처음 화재를 목격해 신고하게 된 경위와 불을 끄고 최를 옮기는 과정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경찰은 별다른 질문 없이 정순이 말하는 것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정순은 일부러 아옹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옹이 나오는 부분에 이르면 숨을 고르는 척하면서 불을 끄는 데 집중하느라 누군지 확인을 못 한 것처럼 모호하게 말했다. 경찰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들었는지 별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찰이 가고 아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많이 놀랐을 텐데.’ 정순은 아옹이 걱정됐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옹은 왜 최의 배에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석연치 않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틀 동안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폭풍이 피해를 입히지 않고 지나갔다. 선주들은 새벽부터 포구에 나와 폭풍이 지난 자리에 남은 쓰레기를 치웠다. 기상청에서 발효한 주의보가 해제되면 바다로 나갈 채비를 하려고 제각각 분주했다. 정순도 배에 올라 선실을 돌아보는데, 최가 포구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최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고, 연기를 마신 탓에 폐에 염증이 생겨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했다. 정순은 최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꼭 자신과 다툰 일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였다. 정순은 최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느라 떠들썩한 포구 사람들 틈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주낙을 매고 창고에 넣어 둔 어구를 꺼내 손질하는데, 전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이제 정말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바다로 나가는 일이 두렵기까지 했다.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정순은 자꾸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누군가 현관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현관을 내다보니 쑹야가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언니!”

   쑹야가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정순을 부르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쑹야가 내민 봉지 안에는 푸른색 사과가 다섯 개 들어 있었다. 정순은 커피를 끓여 쑹야와 마주 앉았다. 싱크대에서 사과를 씻고 접시에 내려놓자 쑹야가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겼다.

   “언니, 고마워요. 언니 덕분에 살았어요.”

   서툰 발음으로 인사하는 쑹야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순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혹시, 최하고 아옹이….”

   정순은 주저하면서도 아옹 이야기를 꺼냈다. 쑹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빠하고 아옹 괜찮아요. 아옹이 병원에 왔었어요. 아빠가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쑹야는 경찰이 CCTV에서 술에 취한 최가 담뱃불을 끄지 않고 잠들어 화재가 시작된 걸 확인했다고 했다. 그것을 해양호에 있던 아옹이 보고 달려와 살려 줬다는 것이었다.

   “아옹이 해양호에는 왜?”

   “폭풍 부니까.”

   그제야 정순은 아옹이 그 시간에 포구에 있던 게 이해됐다.  그날 밤 마지막으로 본 아옹의 눈이 생각났다. 아옹은 자신의 맘을 알아주지 않는 정순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정순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니, 아빠가 많이 미안하대요.”

   쑹야가 돌아가고 정순은 아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옹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옹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순은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아옹, 미안해. 널 믿지 못해서. 내가 잘못했어.”

   여기까지 말을 하고 정순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덧붙였다.

   “아옹, 바다에 가자.”

   아옹은 답이 없었다. 정순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폭풍주의보가 해제되고, 들까불던 바람이 잠잠해지니 바다는 평온해졌다. ‘폭풍이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며칠 작업을 망친 폭풍이 지나가면 고기들이 올라오는 법이란다. 폭풍이 지나면….’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순은 주낙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골목 입구에 최가 서 있었다. 정순이 다가가자 최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문 선주.”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정순은 ‘선주’라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정순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둘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 포구로 향했다. 

   포구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나와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리 중인 최의 배를 지나 해양호로 갔다. 주낙을 내려놓고 엔진을 점검하는데, 포구 앞쪽에서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야! 멜 들어왔쪄! 멜!”

   선실에서 나와 내려다보니 바닷물이 은빛으로 번뜩였다. 오랜만에 비치는 햇살 아래 은빛 멜 떼와 뒤섞인 푸른 파도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 멜이다! 멜!”

   정순도 사람들을 따라 고함을 질렀다. 멜이 들어왔으니 고기도 따라 들어오고, 고기가 들어오면 뱃사람들도 따라 들어올 거였다. 아옹이 처음 포구에 온 날도 멜이 들어온 날이었다. 아옹은 분명 돌아올 거였다. 정순은 포구 앞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텅 빈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멈추고 은색 모자를 쓴 남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 남자가 시리도록 하얀 주낙을 어깨에 메고 포구를 향해 걸어왔다. 남자의 은색 모자가 파도처럼 포구로 밀려들어 왔다.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달의 마중

달의 마중 서경희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여자가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딸기우유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까뜨린느?” 여자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연락해온 사막여우였다. 지금껏 작가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단편 시나리오는 주로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하려고 샀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얼굴은커녕 실명을 밝히기도 꺼렸다. 사막여우는 달랐다. 작년에 사들인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 팔 거죠?” 사막여우가 계산대에 바싹 달라붙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느긋한 척했다. 눈을 내리깔고 사막여우의 손을 훔쳐봤다. 네일아트를 화려하게 한 손톱은 미러볼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가운뎃손가락엔 팥알만 한 진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내 오른손을 슬그머니 계산대 아래로 내렸다. 어렸을 때 화상 사고를 당해 엄지를 제외한 손톱이 전부 녹아버렸다. 운 좋게 절반이 남은 엄지손톱은 하얗게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돈이 적어서 그래요?” “이번 건 제가 찍을 생각으로 쓰는 거라서요.” 시나리오를 팔기 힘들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여지는 남기느라 말끝을 흐렸다. 사막여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을 실룩거렸다. 이쯤 되면 칼자루는 나한테 넘어온 셈이다. 미친 듯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시나리오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찍고 싶어서였다. 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큰 경력이 될 것이고 감독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단편 시나리오는 못해도 한 달에 한 편은 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사막여우한테 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없었다. 사막여우는 골이 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듯했다. 사막여우가 까뜨린느, 라고 부르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편의점 안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나도 덩달아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카드 결제를 했다. 담배를 팔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덴마크 요구르트는 원 플러스 원 상품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에 편의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음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가할 터였다. 나는 사막여우가 건네준 딸기우유를 쭉쭉 빨았다. “100만 원 드릴게요.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사막여우는 마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나는 막장 드라마의 악녀처럼 머리를 굴렸다. 5분에서 15분 사이의 단편 시나리오는 딱히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저번에는 1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 요금을 냈는지 쌀을 사는 데 보탰는지. 교통카드를 충전하느라 없애버렸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