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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1,086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이해한다.

   4년 차, 열아홉 살 때 처음 데뷔 조에 들었다. 지상 연습실과 데뷔 조 숙소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 건 첫 일주일 정도였고, 그다음부터는 그저 지독하게 배가 고팠다는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회사가 요구하는 몸무게는 키에서 백이십을 뺀 만큼이었다. 그러니까 내 경우 사십팔 킬로. 그때 나는 사십칠에서 오십 킬로를 오갔다. 나는 생리 주기에 맞춰 몸무게가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몸무게 검사를 받으며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굶었지만 생리 직전이 되면 어김없이 몸무게가 늘었다. 내게 몸이 있다는 게, 밥을 먹으면 살이 찌고 생리 때면 부푸는 살아 있는 몸이 있다는 게 끔찍해졌다. 데뷔가 임박했을 때는 체급을 맞추려는 운동선수처럼 사우나에서 땀을 빼다가 잠시 기절한 적도 있고, 밥을 삼키면 살이 찌니까 씹다 뱉는 방법을 써 보기도 했다. 그러는 대신 씹어 삼킨 밥이 소화되기 전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토하는 애들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기 전에 데뷔 조에서 탈락했다. 

   데뷔 직전이었다. 이미 우리의 데뷔 과정을 담은 자체 콘텐츠도 촬영 중이었다. 이사님은 내가 회사에서 기획한 ‘콘셉트’에 ‘비주얼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 조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오면서 울었다. 그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겼다. 탈락하지 않은 데뷔 조 애들이 나를 끌어안고 같이 울어 주었다. 그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그중에는 먹은 밥을 전부 토하는 애도 있었다. 그런 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그 애가 토할 때마다 긴 머리카락을 잡아 준 일, 그때의 시큼한 냄새와 변기에서 올라오던 열기와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토하는 소리 같은 것들은 내 머릿속에만 남았다. 나는 내가 밥을 토하는 대신 씹어 삼켰기 때문에 데뷔 조에서 탈락한 걸까, 고민했다. 어떤 고통은 콘텐츠였지만 어떤 고통은 콘텐츠가 될 수 없었다. 카메라 뒤에서 더 고통스러웠다면 나는 카메라 앞에서 덜 고통스러울 수 있었을까. 

   대표실에 불려가 다음에 나올 걸 그룹의 첫째를 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걸 그룹의 첫째. 나는 이미 그 정도로 나이가 들어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새해 첫날의 새벽에는 나이를 먹는 게 무서워서 롱패딩을 뒤집어쓰고 영하 십칠 도의 성수대교를 건너면서 울었다. 귀가 떨어질 듯 시린 바람이 불었고 내 옆으로는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갔다. 그날 처음으로 차도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스무 살을 거쳐 스물한 살을 맞이할 때까지, 새로 데뷔 조는 꾸려지지 않았다. 나는 어느덧 6년 차 연습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게 다음 기회가 있을까? 이제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내 인생의 어떤 가능성은 이미 완전히 끝나버린 게 아닐까? 

   꿈, 성장, 도전, 용기, 희망, 미래······ 동료 연습생들과 회사 사람들은 그런 단어들을 즐겨 사용했다. 지금은 그런 시기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매일 끝을 생각했다. 


*


   그날은 월말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생리 이틀 전이기도 했다. 나는 배가 고팠고, 몸은 부어 있었다. 상위권 여자 연습생 여섯 명이서 준비한 짧은 퍼포먼스가 끝난 후,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연습실 한가운데에 모여 섰다. 대표님을 포함한 열 명가량의 회사 사람들이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6년 차인 내게는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그림이었다. 

   “소희부터 나와 봐.” 댄스 트레이너인 연지 샘이 말했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섰다. 아직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벅찬 숨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였다. 

   “너 연습한 지 몇 년 됐어.” 연지 샘은 물었다. 

   “6년이요.” 나는 헐떡이며 대답했다. 

   “네가 생각했을 때 그동안 네가 성장한 것 같애?” 

   회사 어른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했다. 어떻게 대답해도 혼날 수밖에 없게. ‘네’라고 대답했다간 반항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6년간 대체 뭘 했냐는 식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모욕을 주는 게 경제적이지 않은가? 굳이 내게 칼자루를 쥐여 주는 것보다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만 바라보았다. 숨이 가쁘고 입이 마르고 어지럽고 시야가 캄캄했다. 연지 샘이 다시 물었다. 지난 6년간 네가 성장한 것 같으냐고. 어디까지 온 것 같으냐고.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치를 보던 중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데, 그건 성장이 늘 어디론가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또는 위로. 간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 떠난다는 것은 뭔가를 남겨 둔다는 것. 나는 나를 남겨 두고 멀리 뛰어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들 어딘가로 가며 자기 세계를 넓혀 가고 있을 때에, 이층 침대 위의 어둡고 텁텁한 이불 속에서 질식해 가는 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는 기절했다. 

   완전히 블랙아웃은 아니었고, 끊길랑 말랑 하는 퓨즈처럼 의식이 깜빡, 깜빡, 깜빡거렸다. 내 양옆에 서 있던 다른 연습생 애들이 꺅 소리를 지르고, 작은 손들이 나를 잡고 흔들고, 119를 부르라는 말이 들리고, 주춤주춤 일어서려다가 다시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다시 비명이 들리고······. 마침내 내가 보는 장면들에 맥락이 생길 만큼 의식을 회복했을 때에 나는 구급차에 타고 있었고, 매니지먼트 팀의 혜림 팀장님이 내 머리맡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멍한 상태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분주한 응급실 한편의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링거를 맞았다. 차가운 액체가 들어오고 있어서인지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웠다. “너무 추워······.” 내가 중얼거리자 혜림 팀장님이 추워? 하고 묻더니 어디에선가 푸른색 담요 한 장을 가져다주었다. 담요를 덮어도 추운 건 똑같았지만, 무언가 내 위에 덮여 있다는 사실이 아주 작은, 작다 못해 궁색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춥고 배가 고프고 무섭고 외로웠지만 모두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이유라는 게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울지 마.” 혜림 팀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로 누운 채라 바스락거리는 베갯잇에 뺨이 마구 비벼졌다. “잘했어, 잘하고 있는 거야. 죽었다 생각하고 독하게 해야 돼.” 혜림 팀장님은 또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생각하고······ 데뷔하고 나면, ‘죽어 있던’ 시간은 없던 게 되는 걸까? 그럴 리 없었다.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어떤 의미로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살아 있는 내 몸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 소견은 없었다. 의사는 그저 빈혈이 아주 심하다고,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나는 혜림 팀장님의 눈치를 봤다. 덜덜 떨며 링거 한 통을 다 맞고 응급실에서 나오자 해가 져 있었다. 혜림 팀장님이 오만 원권 한 장을 주며 택시를 타고 숙소에 가서 쉬라고 한 뒤,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어두운 밤거리를 씽씽 달리는 차들을 보며 그 앞에 뛰어들고 싶다는 익숙한 충동을 느꼈다. 스무 살의 첫날부터 그 충동은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나를 엎질러 주기를. 죽어버린 나의 살아 있는 몸을 죽여 주기를. 

   나는 핸드폰을 켜고 택시 앱이 작동하기를 기다리다가 습관적으로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모르는 이름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김민정.’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소희야 잘 지내? 나 너랑 중 1, 2 때 같은 반이었던 김민정이야! 기억날지 모르겠다 ㅎㅎ 나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해 봤어 ㅎㅎ 계속 서울에 있어? 보고 싶다. 언제 만나서 밥이나 먹을래?’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김민정’이라는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랄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맞은 링거에 뭔가 잘못된 성분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간절했다. 죽을 만큼 간절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민정이?”

   ‘소희? 소희야?’

   “응, 너 혹시 어디에 살아?”

   ‘어? 나······ 어디라고 해야 하지? 마포구?’ 

   “혹시 나 좀 재워 줄 수 있어?”

   ‘오늘? 지금?’

   “응.”

   민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밖인지 주위가 시끌시끌했다. 나는 얌전히 거절당하기를 기다렸다. 민정이 나를 거절한다면 나는 정말로······. 

   ‘그래. 버스 타고 와?’

   “재워 준다고?”

   ‘응. 가까운 버스 정류장 알려 줄게. 바로 집 앞이라······.’

   얜 뭐지? 다짜고짜 재워 달라고 한 주제에 나는 잠시 민정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내 장기를 빼갈 만한 애인지 생각해 보았다. 역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편이 좋았다. 누구든 나를 엎질러 줄 수 있다면. 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택시를 타고 갈 테니 자취방 주소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택시 안에서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김민정, 김민정······. 흔한 이름이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이 비어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민정이 알려 준 오피스텔 앞에는 정말로 여자애 하나가 나와 있었다.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그 애가 다가오더니 “소희?” 하고 불렀다. 얼굴을 보면 뭐라도 떠오를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 애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이름만 흔한 게 아니라 얼굴도 흔했다. 묘사하기 어려운 얼굴. 특징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 민정아. 나 소희야.” 나는 어색하게 말했고, 그 애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민정에게서는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아니 소독약 냄새인지도. 사실 나는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좀 어려웠다. “밥은 먹었어?” 그 애가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 처음으로 고개를 저어 보는 것 같았다. 

   민정의 집은 원룸이었다. 크기는 데뷔 조 숙소의 방 하나와 비슷했다. 방의 한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다른 한쪽에는 프레임 없는 매트리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창을 가린 누르스름한 커튼 위로는 앵두 전구가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처량했다. 문이 열린 화장실에서는 락스 냄새가 났다. 

   “너 온다고 치웠는데 그래도 지저분하다. 쫌 민망하네······. 뭐 시켜 먹을까? 엽떡 좋아해?”

   “응. 좋아.” 나는 중얼거렸다. 민정이 외투를 벗다가 말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얼굴이 창백해. 꼭 시체 같애. 괜찮아?” 

   “추워서 그런가 봐.” 

   민정은 말없이 보일러를 올렸다. 

   우리는 나란히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엽떡을 기다렸다. 먼저 연락한 사람치고 민정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 별말이 없었다. 대신 그 애는 최근의 날씨와 선호하는 엽떡의 맵기 정도 같은 피상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역시 기세 좋게 쳐들어온 사람치고 소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응, 요새 갑자기 추워졌지. 아침에 일어나면 발이 시리더라구.” “나 엽떡 안 먹은 지 3년 넘었어.” 의미 없는 말들이 오갔다. 나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가 초인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그런 나를 보고 민정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애가 웃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상을 펴고 앉아 엽떡을 먹었다. 분명 순한 맛으로 시켰는데도 너무 매워서 땀이 줄줄 났다. 속이 무척 쓰렸다. 누군가 변기 솔 같은 걸로 위벽을 마구 긁는 기분이었다. 위장에 쥐가 난 듯한 고통 속에서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내가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자 민정이 자두 맛 쿨피스를 한 잔 따라 주었다. “너 매운 거 되게 못 먹는구나. 몰랐어. 다른 거 시킬걸. 중학교 때도 그랬나?” 민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쿨피스를 벌컥벌컥 마시고 대답했다.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근데 너 술 마시다 온 거 아냐? 나 때문에 나온 거야?” 

   민정은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래 보였어.” 

   “나 술 냄새 나? 많이 나?” 민정이 우왕좌왕하자 괜히 웃음이 났다. 

   “아니, 그냥 적당히 나. 괜찮아. 나 술 냄새 좋아해.”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헛소리를 했다. 

   “그냥 팀플 뒤풀이였는데 재미없었어. 너 덕분에 빠져나와서 좋았지 뭐.” 민정이 물티슈로 밥상을 훔치며 말했다. “팀플 뒤풀이······.” 나는 민정의 말을 따라 했다. “진짜 대학생 같다.” 민정이 허허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대학을 다니지 않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나 재수를 했어.”

   하고 말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냥 으응, 하며 엽떡 용기의 뚜껑을 닫았다. 

   “이거 남은 거 냉장고에 넣을까?” 

   “어, 내가 할게.” 민정이 내게서 용기를 받아들어 냉장고 안에 넣었다.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민정이 물었다. “맥주 마실래?” 

   “그러지 뭐.” 살 같은 건 이제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너무 매운 걸 먹었더니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동진에는 엽떡이 없잖아.” 민정이 말했다. 

   “그런가?” 나는 멋쩍게 웃었다. “너무 옛날에 서울로 와서 기억이 잘······.” 

   민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작년까지 동진에 있었거든. 독학 재수 해가지고. 고등학교 친구들 다 대학 가서 엽떡도 먹고 클럽도 가고 하는데······ 나는 동진에 남아 있었어. 혼자 엽떡 없는 동네에 남겨지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조명 없는 연습실에 ‘연습생’으로 남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없는 사람이 된 기분. 모두가 앞으로, 아니면 위로 나아갈 때, 그러니까 ‘성장’이란 걸 할 때. 혼자 남겨진 사람이 된 기분. 살아 있다는 게 염치없는 기분. 민정이 호로록, 맥주를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난 서울이 참 좋아. 한강도 있고, 서울숲도 있고, 새벽에도 뭐 시켜 먹을 수 있고······ 우리 뭐 더 시켜 먹을래?” 배가 터질 듯이 속이 쓰렸지만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시킨 치킨이 오기도 전에 나는 먹은 것을 죄다 토했다. 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서 맵고 시큼한 액체를 줄줄 뱉어 내자 민정은 무척 당황해하면서도 내 등을 두드려 주고 긴 머리카락에 토사물이 묻지 않도록 들어 올려 주었다. 언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미안해······.” 토하면서 나는 웅얼거렸고 민정은 “네가 뭐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했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떡과 오뎅 조각들이 사정없이 목구멍을 찔러 눈물이 찔끔 났다. 다 토하고 입을 헹구는 김에 세수를 했다. 그때 치킨이 도착했다. “먹을 수 있겠어?” 민정이 물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깔깔 웃었다. 

   우리는 상 위에 치킨을 펼쳐 두고 기진맥진한 채 바닥에 반쯤 누웠다. 술기운이 그제야 올라오는지 실없는 웃음이 샜다. 민정이 문득 말했다. “난 너랑 2년 연속 같은 반 돼서 진짜 좋았어.” 

   “왜?”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냥, 너 예뻐서 1학년 때부터 유명했잖아.” 민정이 흐흐 웃었다. 

   “뭔 소리야.” 내가 펄쩍 뛰자 민정은 더 크게 웃었다. 

   “너 얼굴 빨개졌다.” 

   “방금 토해서 그래.” 

   “알았어. 그런 셈 쳐.” 정말로 뺨이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얼굴에서 맥박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소희야.” 민정이 작게 나를 불렀다. 

   “응?”

   “너 혹시 그때 나 좋아했어?” 

   하하하.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져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웃은 것도 아니고 폭소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한참 배를 잡고 웃다가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묻자 매트리스에 팔을 괴고 머리를 기댄 민정이 성의 없이 항의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까지 웃어?” 

   “미안. 근데 웃기잖아.” 

   내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찍어 내는 동안 민정은 맥주를 마저 마시더니 이게 그새 미지근해졌다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민정은 엉금엉금 기어 새 맥주를 꺼내러 갔다. “맥주가 더 없네.” 민정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맥주가 없다고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 좋아했거든.” 

   “뭐라고?” 

   “나는 너 좋아했다고. 별건 아니야. 예쁜 애들은 한 번씩 다 좋아했어.”

   잠시 사고 회로가 멈췄다. 나는 민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애는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듯 심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 민정이 말했다. “난 술 좀 더 사 와야겠다. 너도 뭐 사다 줘?”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민정은 알았어, 하고 외투를 입더니 정말 나가버렸다. 

   나는 몸을 추스르고 앉아,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민정이라는 애를 기억해 보려 애썼다. 정말이지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민정 쪽에서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기에, 민정은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수가 있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토록 완벽히 기억에서 삭제해버릴 수가, 있을까? 나는 묵직한 의문 속에서 허우적대다 또 선잠에 들었다. 

   몽롱한 중에도 차가운 바깥 공기가 확 밀려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민정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왠지 나는 계속해서 자는 척을 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잠든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자니 정말로 다시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집 안은 고요했다. 규칙적인 내 숨소리와 그것보다 조금 밭은 민정의 숨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민정이 조심스레 내 곁에 다가와 앉는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 이불처럼 우리를 덮었다. 민정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시선만은 아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짚어 낼 수 없는, 그저 기억의 한 편린. 중학생 때였다. 초여름의 점심시간.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자고 있지 않았지만 자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나는 비참하고 배가 고팠는데, 항상 같이 밥을 먹으러 다니던 친구들이 나를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말랑말랑해서, 그렇게나 간단히 비참해질 수 있었다. 책상에 얼굴을 묻고 차라리 죽고 싶다, 중학교도 자퇴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나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 누군가는 자박자박 다가와 내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엎드린 정수리 위로 따끈한 입김이 닿았다. 뺨에 붙은 책상은 체온에 미지근해져 있었고, 두 무릎 사이로는 에어컨 바람이 들어왔다. 교복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분명한 시선, 끈질긴 시선의 감촉. 그는 아주 오래 나를 바라보았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끌어올려졌다. 아주 얕은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삶이 너무나 가느다랗고 연약해서 곧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 누군가의 긴 시선으로 붙잡히는 경험. 그런 건 잊히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너였니? 물어보려 했으나, 나는 내 생각보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지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어어우아’ 비슷한 소리뿐이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잠겨 도무지 열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민정의 숨에서 옅게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그 애가 속삭였다. “소희야, 여기서 불편하게 자지 말고 올라가서 자.” 나는 꿈틀거리며 매트리스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블랙아웃이었다. 

   다음 날 민정은 오전 수업이 있다며, 있고 싶은 만큼 있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매트리스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반수면 상태로 응, 고마워,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꿈을 꿨을 뿐 줄곧 자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일어나 보니 해가 중천이었고 민정은 집에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우리가 벌여 놓은 것들을 치우고, 이불을 개어 놓고 잠시 앉아 있다가 집을 나왔다.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을 뒤로하고 민정에게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재워 줘서 고마워!’ 

   답장은 회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받았다. 

   ‘반가웠다ㅎㅎ 또 놀러 와.’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마 다시 민정의 집에 놀러 갈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였다. 그러기에 어젯밤의 나는 너무 간절했고, 또 너무 지쳐 있었으니까. 나는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어떤 장면으로 남은 사람들,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어떤 마주침으로 남은 인연들에 대해 생각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고 이어 낸, 휑뎅그렁한 자취방의 앵두 전구처럼 초라하게 반짝이는 나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간밤에 찾아온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켜 갔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를 봐준 게 민정이라는 것을, 이번에는 꼭,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민정의 얼굴은 떠올리려 할수록 흐려지기만 했다. 


*


   결국 나는 데뷔하지 못했다. 내 의지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고, 일 년 후 다시 꾸려진 데뷔 조에서 탈락했다. 나의 실패는 이번에도 ‘콘셉트’니 ‘비주얼’이니 하는 모호한 말들로 설명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말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간절하고 싶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 나는 독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걸 그룹은 성실해야 했으나 독해선 안 됐고, 마르고 예뻐야 했지만 그러기 위해 먹은 것을 토해선 안 됐다. 그런 모순에 순응하는 것조차 하나의 자질이었다. 어쩌면 내게는 그런 자질이 없었다. 이번에는 공허한 약속조차 없었다. 나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다음 기회는 없었고, 내 인생의 어떤 가능성은 스물두 살에 완전히 끝났다. 나는 준비하고 연습하며 7년을 보냈으나 무엇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살아 있었고, 지금도 살아 있었다. 삶보다 죽음이 가까웠던 어느 밤과는 달랐다. 내가 견뎌야 했던 것들은 ‘성장의 발판’이 아니었다. 아픔은 아픔일 뿐이었고, 모욕은 모욕일 뿐이었다. 

   숙소의 짐을 정리하고 본가가 있는 동진으로 내려가며 나는 민정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그날 아침 이후 처음 연락하는 거였다. 

   ‘나 이제 다시 동진으로 가. 하던 일을 관두게 돼서. 혹시 동진 올 일 있으면 연락 줘!’ 

   답장은 없었다. 민정은 내게 실망했을까. 한강도 있고, 서울숲도 있고, 새벽에도 뭐 시켜 먹을 수 있는 서울을 떠난 내게. 끝내 반짝이는 세계의 일원이 되지 못한 내게. 

   동진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화장품 판매점에서 일했다. 진상을 만나면 퇴근하는 길에 좀 울기도 했지만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또 출근을 할 힘이 났다. 몸무게는 오십오 킬로그램이 되었고 생리 중에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머리가 띵해지는 증상이 사라졌다. 

   일하던 카페에서 우연히 중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주문을 받다가 그 애의 얼굴을 보자마자 번쩍, 하고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 동진중 박지윤?” 지윤이 깜짝 놀라며 되받아쳤다. “양소희?” 

   동진에는 대학교가 없다. 지윤은 대학에 가지 않은 애였다. 그 애는 암에 걸린 어머니의 간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엄마 죽고 나면 수능 봐서 대학 가려고.” 그 애는 담담하게 말했고,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커피로 목을 축였다. 

   “너는 뭐, 휴학했어?” 지윤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하던 일이 잘 안돼서 일단 내려왔어.” 생략된 게 많은 답변이었지만 지윤은 더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동진에 남겨진 사람들, 반짝이는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무기력이랄지 희끄무레한 패배감 같은 것. 

   “너 혹시 민정이 기억해? 김민정.” 나는 대뜸 물었다. 지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혹시 키 작은 단발머리? 아닌가? 쇼트커트?” 나는 민정의 키와 헤어스타일을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아.” 

   지윤은 “글쎄, 기억이 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며 한참이나 갸웃거렸다. “왜? 걔가 누군데?” 지윤이 물었다. 

   “나 그때 걔를 좋아했다?”

   지윤은 입을 떡 벌렸다. 

   “여자잖아?” 

   지금 그게 문제인가. 나는 하하 웃었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이제는 알았다. 민정을 만난 그 밤 나는 살고 싶었다는 것을. 죽도록, 나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그 애를 찾아갔지만, 사실 나는 살고 싶었다. 엎질러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붙잡히고 싶었다. 그러므로 내 삶은 이어졌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었다. 


   동진에 엽떡이 생겼을 때, 나는 오랜만에 민정을 떠올렸다. 여전히 비어 있는 프로필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없는 그 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동진에도 엽떡이 생겼어.’

   답장은 없었고, 나는 괜찮았다. 그 애가 없는 사람이어도, 이제 나는 괜찮았다. 민정도 괜찮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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