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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없는 소설

  • 작성일 2022-10-21
  • 조회수 1,22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소설 없는 소설




이상희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내가 쓴 소설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그 ‘아무도’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둬 버리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내가 바틀비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당신 책은 이미 출판되었으니까 내가 거기에 낄 수도 없고요.”
나는 엔리께 빌라 마따스의 책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내 무의식은 내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편이라서 『바틀비와 바틀비들』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내 손에 『바틀비와 바틀비들』이 들려 있는 식이다.
『바틀비와 바틀비들』은 바틀비증후군에 걸린 작가들을 추적한 책으로, 바틀비증후군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와 같이 ‘아니요.’의 병에 걸려서 글을 쓰지 않으려는 작가들이 걸린 병을 뜻하는 것으로, 이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문학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쓰여 있다.
나는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싱글 사이즈 침대 위에서 서로 어깨를 밀치며 옹졸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내 무의식이 로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 관계로, 그들이 내가 잠든 침대까지 날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템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너무 많은 소설이 나와 있어서 그 누구의 소설도 사실 굉장히 궁금하지는 않죠.”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말했다.
“미래 유령이랑 대화라도 해 보는 게 어때요? 그들이 굉장한 걸 썼을지도 모르니까 아이디어를 몇 개 훔치는 거죠.”
피에르 바야르가 말을 받았다. 그가 말한 미래 유령은 과거의 작가와 소통을 하는 미래의 작가를 의미하는데, 그는 종래의 표절 개념을 뒤집어서 과거의 작가가 미래의 작가가 쓸 작품을 표절한다는 개념으로 문학사를 새로 구성한 『예상표절』이라는 책을 썼다.
나는 밤이 새도록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를 붙들고 문학 이야기를 빙자한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쓰고 싶은 거냐면, 나는 감동과 유머가 버무려진 드라마를 쓰고 싶지는 않고, 기존의 서사와 관습을 해체하는 데 골몰하고 싶지도 않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천재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싶지도 않고, 재기 넘치는 말장난이나 언어 실험을 하고 싶지도 않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싶지도 않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인데, 그러나 동시에 그런 걸 다 하고 싶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징징거렸고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이렇게 해 봐라 저렇게 해 봐라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밤새 나눈 대화가 늘 그러하듯이 아침이 밝아오자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라 밤을 다 잡아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밤샘 토론의 결과로 나는 미래에 완성할 소설의 주석 노트를 쓰기로 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음의 주석 노트는 과거 유령이 범했던 실패담이자 미래 유령과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1) 미래 유령 중 하나는 ‘미래의 나’인데, 그것은 몇 달 혹은 몇십 년 후의 ‘나’가 아니라, 수백 년이나 수천 년 후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생각하겠지만, 코스미즘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코스미즘은 19세기 말 니콜라이 표도로프를 필두로 일련의 러시아 과학자와 예술가, 사회학자들이 지녔던 사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류 전체를 불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공동의 과업으로 삼았다. 죽음은 스스로 부흥할 능력이 없는 미성숙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학기술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의 진화적 발전이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스미스트들은 과거를 희생시켜 미래로 나아가는 착취적인 인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하여 불멸의 대상을 현재와 미래 인류뿐 아니라 과거 인류에까지 확장했다. 다시 말해, 죽은 조상들을 모두 부활시켜 그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는 것을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이라고 본 것이다.
코스미즘은 미래주의와 다윈주의와 공산주의와 러시아 정교를 때려 넣고 푹 끓인 것인데, 나는 이 황당한 스프에 한동안 완전히 꽂혀 있었다. 그래서 십 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근황을 물어보면 코스미즘을 간증했고, 직장을 그만둔 친구를 코스미즘 필름을 상영하는 <모두를 위한 불멸> 전시에 데려갔으며, 파혼 직전인 친구에게는 코스미즘 앤솔로지를 선물로 주었다. 근황이고 직장이고 결혼이고 간에 일단 불멸부터 해야 다음 직장을 찾고 다음 연인을 만나고 근황이 끊이지 않고,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아? 그때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꿈에서도 당당히 페테르부르크를 헤매고 다녔다.
페테르부르크는 잿빛 추위로 얼어붙어 있었고 나는 코스미즘 콘퍼런스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콘퍼런스는 지하철과 연결된 주상복합건물 꼭대기에서 열렸기 때문에, 낡고 복잡한 소비에트 지하철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꿈 지분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요제프 K가 된 꿈인가, 영영 콘퍼런스에 못 가나 싶었으나, 다행히 주상복합건물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요제프 K가 된 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건물로 들어가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건물 안을 뱅뱅 도는 것으로 꿈 지분의 15퍼센트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는 폐소공포증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이런 불상사를 예감했던지 소비에트의 건축가는 꼭대기 층의 벽 한 면을 통유리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유리 벽 앞에 바싹 붙어 숨을 몰아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건물 지붕이 보였는데, 지붕은 혁명가들의 두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라, 그런데 혁명가들의 두상이라니, 저들이 혁명가들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의문이 들었을 때, 비둘기 떼가 후두둑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들은 유전공학의 세례를 받았는지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았는지 독수리만큼 커서 주먹만 한 부리로 혁명가들의 머리통을 콕콕 쪼아 댔다. 그 기이한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생긴 러시아인이, 대충 근육질 대머리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비둘기들은 소비에트의 비둘기들로 1991년에 멸종이 되었으나, 이번에 러시아 국영 기업이 권력을 잡으면서 부활시킨 것입니다. 대체 무슨 헛소리시죠? 나는 물었는데, 블라디미르 근육 대머리는 비둘기들의 자태를 보라면서 나를 유리 벽 앞으로 바짝 떠밀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독수리만 한 비둘기들이 난폭하게 유리 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은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주먹만 한 부리로 유리 벽을 빠직빠직 찍어 댔다. 나는 신경이 빠직빠직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러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벽에 금이 갔고, 비둘기들이 충혈된 눈알을 부라리며 깨진 유리 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날개가 찢긴 비둘기가 피를 뚝뚝 흘리며 붉고 세모난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나 알람을 껐다.
알람을 끄고 나서도 망막에는 페테르부르크의 환영이 생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데이비드 린치가 소비에트 버전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걸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그럴싸한 소설이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꿈속이었고 다시 페테르부르크였다. 페테르부르크 길거리에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은 고프닉 청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구경하다가 그 애들과 어울려 보드카에 도시락 사발면을 먹었는데 괜찮은 조합이었다. 그런데 푸틴과 비둘기와 혁명가와 코스미즘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고프닉 청년이 물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이야기를 했나? 그런 꿈을 꾸었는데 그걸로 소설을 쓸 거라는 이야기를, 내가 했나? 그러자 청년은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별안간 보드카 병으로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꿈에서 기절을 하는 바람에 기절한 채로 꿈도 없이 이어서 잠을 잤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러한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잊었고 그래서 코스미즘 소설도 쓸 수 없었다.
고프닉 청년들의 공격을 받지 않은 다른 러시아 작가들은 코스미즘의 자장 안에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나 막심 고리키, 레프 톨스토이, 아나톨리 김 같은 작가들이 여기에 포함이 되는데, 보다 직접적으로 코스미즘을 투영한 작품을 써낸 작가는 예브게니 옙투셴코다. 옙투셴코는 『딸기밭』이라는 소설에서 러시아 우주공학의 아버지이자 코스미스트들 중 하나인 콘스탄찐 찌올콥스키를 등장시켜 그가 이렇게 말하게 만들었다.
“만약 사람들이 오늘날 적대적인 싸움에 쓰는 돈을 서로를 위하는 싸움에 쓴다면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도 정복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은 또한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바이러스를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먼 조상을 부활시킬 방법을 배우게 될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점심 식사를 하고, 푸시킨과 저녁밥을 먹고 싶지 않습니까?”1)
나는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나 푸시킨에게 특별한 애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찌올콥스키의 대사에 감동을 받아서 아무 때나 그 대사를 읊고 다녔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알렉산더와 산책을 하고, 푸시킨과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습니까? 죽은 조상들 모두를 부활시킨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위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는다니. 나는 오트밀과 그릭 요거트를 사이에 두고 소크라테스와 마주 앉아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아무래도 낯설 테니까, 내가 무슨 말이든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부활한 소감이 어떠세요? 이건 아니고. 알려진 것보다는 미남이시네요? 이것도 아니지. 철학자에게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신탁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가 제일 지혜롭다고 하면 어쩌지. 고분고분 동의를 해 주기 어려울 것 같은데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그냥 가십성 루머나 해소를 하는 게 낫겠다. 선생님이 문맹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예요?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자네 질문에 답을 하려면 자네가 생각하는 문맹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겠지? 그렇게 말할 거고,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잘못했다고 눈물을 쏟을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겠지. 그래서 오트밀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겠지. 아침부터 기분을 잡치겠지. 이러자고 소크라테스를 부활시켜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누구를 부활시켜야 하나.


2) 에마뉘엘 카레르는 <돌아온 자들>이라는 TV시리즈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것은 어느 날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부활한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도 모르고 죽기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 샤워를 하고 삼십 년 전에 자신이 살던 집으로 불쑥 찾아가는 것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에 따르면, <돌아온 자들>은 설정만 봐도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연출자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중도 하차했고, 카레르가 빠진 <돌아온 자들>은 그의 예감대로 성공해서 에미상을 받았다.
나는 드라마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카레르가 던져 놓은 미끼를 물어 <돌아온 자들>을 다운받아 봤다. 시즌 1은 흥미로웠지만 시즌 2로 가면서 어설프게 엉키는 이야기를 참아 주기 어려워서, 흰자위로만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시즌 2가 망한 이유는 카레르가 빠져서라기보다는 부활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밝혀서 이야기를 종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을 장편으로 늘리고 싶어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이유를 플래시백으로 집어넣는다면, 이유를 뭐라고 하던, 악마의 저주라고 하던 바이러스 감염이라고 하던 사실 벌레 탈을 쓴 것이라고 하던, 처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시즌 2를 만들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때로는 완성되지 않고 시작만 하는 이야기가 낫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아닌가? 뭐 어찌 되었든.
<돌아온 자들>에서 부활은 과학기술을 통해 의지적으로 이루어 낸 성취가 아니라 일종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그려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부활이 이루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떠나보냈던 자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살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고,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부활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과 경계를 없애는 것으로,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혐오감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부활했다면, 그들은 신인가? 신이 아니라면, 신의 아들인가? 그들이 죽기 전과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나? 어째서 그들은 다시 삶을 얻었나? 이제 기존의 윤리와 규범은 웃음거리가 된다. 살인이 나쁘다고? 왜 죽어도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텐데! 게다가 죽은 자들의 귀환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대상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죽은 자들과 경쟁을 하라니?
부활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은 중요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부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죽은 조상들 ‘모두’를 부활시킨다는 평등주의적 프로젝트나 초자연적 미스터리로서가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러면서도 신을 믿지 않았고 차라리 자연과학을 믿었고, 의미도 목적도 없는 냉담한 우주를 상상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는 코스미즘을 택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세나 천국을 믿는 대신 부활을 믿는 쪽을 택한 것이고, 내 죄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신 대신 코스미즘을 채택한 미래 인류를 믿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일으킬 사회적인 문제들, 그러니까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악인들까지 모두 부활시켜 발생할 전쟁 상태, 혹은 제우스를 믿는 사람들과 포스트휴먼이 뒤엉켜 사는 세계의 무질서 같은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부활은 집단적인 규모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고,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 부활되어야 했는데, 위인을 부활시켜서는 안 되었다. 왜냐면 위인의 부활은 위인의 훌륭함이 현대에도 발현될 것인지 여부에만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21세기에도 가장 현명한 사람일까?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을 현대사회는 어떻게 취급할까? 뭐 이런 식의. 그래서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되, 반드시 부활시켜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던 중에, 아주 우연히 방콕에서 그를 발견했다.


3) 고온다습한 짜증 나는 날에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리면 낡은 의과대학 건물들이 보였고 그 건물들을 헤치고 들어가면 더 낡은 건물이 보였는데 거기에 시리랏 의학박물관이 있었다. 건물 내부는 어두웠고 햇볕이 드는 자리에 안내 데스크가 놓여 있었다. 나는 입장료를 내고 장부에 이름과 출신 국가 같은 것을 적었다. 데스크 직원은 입장료는 의학 연구를 위해 사용될 것이며,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고 엄숙한 태도로 관람할 것이 요청된다고,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양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어정쩡한 걸음새로 중앙 계단을 올랐다. 긴 복도를 따라서 전에는 강의실로 쓰였을 것이 분명한 전시실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복도에는 오래된 선풍기들이 윙윙윙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고 있었고, 선풍기 사이사이에 해골과 장기가 무심하게 툭 던져져 있었다.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나서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숨을 조금 참았고, 거의 까치발로 복도를 통과해 전시실 내부로 들어갔다.
전시실에는 유리병에 담긴 샴쌍둥이 표본들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전시실이 아니라 급히 방부 처리한 시신들을 마구잡이로 쌓아놓은 대형 창고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죄책감과 흥분감이 혼재된 채로, 두려움과 호기심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이상한 감정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수백 개의 유리병에 담긴 샴쌍둥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들은 엉덩이, 등, 팔꿈치, 뒤통수, 얼굴 등 서로 다른 부분을 맞대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태아에서 갓난아기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그중에서 눈길을 잡아끈 것은 10~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태아 표본이었다. 그는 샴쌍둥이는 아니었고, 홀로, 포르말린 안에 잠겨서, 작은 씨앗 같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 까만 눈동자를, 뾰족한 턱을, 또 쫑긋하게 솟은 귀를 쳐다보았다. 권태로운 듯 보이기도 하고 조금 놀란 듯 보이기도 하는 작은 얼굴 앞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어째서? 어떤 기시감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으니까, 사진에서, 내가 아기였을 때 사진에서,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이 아이는 나를 닮았다, 아니 나인 것 같다, 이 아이는 자라서 내가 될 것이다. 왜냐면 이 아이는 눈을 뜨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고 말했는데, 사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궁에서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태아에게 오얏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오얏은 자신을 이루는 세포들이 사람의 형상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눈을 떴다. 그는 아주 어리둥절하여서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리둥절함은 갑자기 출현한 자신의 존재와 자궁이라는 세계의 미스터리에 기인했다. 나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지금은 여기에 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들을 더듬으면서 경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는 자궁에서 나오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갖기도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얏을 부활시키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오얏을 부활시키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부활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미래에 이루어질 나의 부활을 앞당겨 실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얏과 나는 서로 등을 붙이고 서로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자라다가, 어떠한 우여곡절로 인하여, 분리 수술 도중에 오얏만 숨졌다든가 하는 이유로, 나는 살았고 오얏은 죽었다. 그러나 어째서 오얏이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얏을 나의 잠재태라고, 실현되지 않은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밀착된 삶을 살지 못하고 구름 위를 걷듯이 살아가는 인물인데, 오얏을 본 순간 그가 잃어버린 나의 절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에서 벗어나 완전한 삶을 살고자 오얏을 부활시키는데, 어떻게 부활시키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소설에 나오지도 않고, 부활시키는데,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되냐면, 오얏은 아주 급속히 성장하여 내 삶을 점차 대체해 나간다. 절반의 현실감밖에 없었던 내 삶은 점점 축소되고 나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유리병에 갇힌다. 그런데 이건 너무 도플갱어 서사에 충실하지 않나. 오얏이 급속히 성장했을 때부터 어쩐지 나와 대결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것만 같지 않나. 그렇다면 도플갱어 서사를 뒤집는 것은 어떨까. 부활한 오얏이 나와 불화하지 않고 나의 의도대로 또 다른 나를 실현하며 살아가면 어떨까. 그러니까 나는 두 배로 노동하고 두 배로 자아를 실현하고 두 배의 일상을 누려 두 배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정신 나간 것처럼 발랄하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 과잉의, 그런. 그런 소설을 써 보면 좋겠다,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얏과 내가 두 배로 무언가를 한다니, 그런 상상만으로도 힘이 빠져서 타이핑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도플갱어 설정은 빼 버리는 것이 좋겠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오얏이 잠들어 있는 유리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생활에 치여 유리병을 방구석에 방치해 두는데, 방의 온도는 유리병이 부화하기에 아주 적합해서,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가 스르륵 빠지면서 오얏이 기어 나온다. 부활한 오얏은 나와는 닮지 않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래된 태국 사람이었다. 오얏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태국의 전통적 가치들과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나 유전과 양육 논쟁을 할 생각은 없으니 이것은 그냥 설정이다, 오얏과 나는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에는 타자가 곧 나라는 것을 깨닫고,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관용하고 공존하고. 그렇게 된다고? 그렇게 작위적으로 환대의 윤리를 전시하자고? 아니, 그럴 리가. 그럼 어쩌자고? 태국인 오얏은 좀 아닌 것 같다고.
문제는 오얏이 아니라 초점 화자로 ‘나’가 자꾸 등장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나’가 등장하는 순간, ‘나’와 오얏의 관계가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빼고 오얏을 단독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는 근미래의 어느 공장에서 시작되는데, 그 공장은 베이비 젤리를 만드는 공장으로, 베이비 젤리는 작은 태아 모양의 젤리로, 인공수정으로 만들어 낸 태아를 젤리화한 것이다. 복숭아 맛 젤리, 포도 맛 젤리, 레몬 맛 젤리, 이런 식으로 다양한 맛의 베이비 젤리가 있는데, 이 젤리는 태아가 지니고 있는 영양 성분을 그대로 농축했으면서도 과일 맛 젤리 형태라 태아를 먹는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을 없애 준다. 그러니까 생명과 시장에 대한 이야기, 소비하는 생명과 소비되는 생명, 유예되는 죽음과 유예되는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오얏은 젤리가 될 뻔한 태아인데 우연히 유리병에서 빠져나와 살아남게 된다. 오얏은 공장 안에서 베이비 젤리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 날 출고되는 베이비 젤리들 틈에 끼어 공장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되나? 오얏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킨다. 그는 두려움이 없고 긍정적이며 진취적이지만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나 상식을 학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얏에게는 소비되는 생명과 소비하는 생명을 구분하는 기준이 없으므로, 배가 고프면 유모차에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의 머리통에 이빨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나는 웬일인지 신이 나서 이런 종류의 에피소드를 잔뜩 써 내려갔는데, 오얏을 그렇게 자잘한 거리의 무법자로 남겨 두어야 할지, 히어로나 빌런으로 진화시켜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오얏은 길거리 생활에 심드렁해져서 제 발로 베이비 젤리 공장으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이 밖에도 오얏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성되지 못했다. 오얏은 개봉도 못 할 영화들에 무수히 출현하였고, 출연료 한 푼 받지 못한 채로 어느 날 생명을 다하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얏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오얏은 내 마음 안에서 그 자체로 비운의 배우, 도무지 영화 한 편을 이끌어 나갈 힘이 없는 배우가 되어 버린 것이다.


4) 나는 괜찮습니다. 오얏이 병상에 누워 시름시름 앓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대체 왜 계속 쓰려는 거지요? 나는 오얏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주면서 생각했다. 그러게, 대체 왜 쓰는 거지, 완성도 못 하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글을 쓰는 이유로 자기만족과 미학적인 욕구와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열망을 꼽았는데, 오웰은 자기만족과 미학적 욕구와 역사적 충동보다 점차로 정치적 열망이 더 커졌다고 말했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만족밖에 없지 않나 싶은데, 내가 뭘 만족을 했나 내내 불만족을 했지 싶어서, 대체 왜 쓰는 건가 생각했다.
책상에 엎드려서 노트에 쓰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적었다. 어이, 뭐하고 있어?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오귀스트 콩트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뭐죠? 나는 물었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답했다. 어서 일어나. 나가야지! 민중들이 기다리고 있어. 잊었어? 사회학의 임무는 피지배 집단에게 지배 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지적‧실천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라네. 피에르 부르디외가 나를 잡아 일으키려고 손을 뻗었다. 나는 다급하게 답했다. 근데 저 사회학 그만뒀는데요. 뭐라고? 저 소설 써요. 아니 쓰지 말아야겠다고 쓰고 있었지만 아무튼요. 피에르 부르디외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깃발이 펄럭였고 깃발에 그려진 오귀스트 콩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없네. 소설이라면 사회학의 하위 분과이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뿜었다. 소심한 오귀스트 콩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점차로 쭈그러들어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었고, 그 작은 점 안으로 깃발도 피에르 부르디외도 모두 다 빨려 들어갔다. 오귀스트 콩트는 학문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사회학을 두었고, 피라미드의 하부에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독립적이고 단순하고 보편적인 다른 학문들을 배치했는데, 그 학문들로부터 만들어진 자원을 동원하여 가장 실증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사회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학의 창시자였지만 동시에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사회학은 오귀스트 콩트가 아니라 에밀 뒤르켐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철학이나 정치학이나 인류학이나 문학이나 생물학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귀스트 콩트의 말과는 다르게 사회학이 만학의 제왕이어서가 아니라 근본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근본이 없기로 따지자면 소설도 비슷한 처지이지 않나.
사회학과 소설은 모두 근대에 태동한 신생 분과로 철학이나 시와 비교하면 정통성이 현저히 떨어져서, 유연함을 무기로 그러나 영토를 넓히는 것에 혈안이 되어 아무 데나 깃발을 꽂을 수밖에 없다. 다른 분과 학문이 먹고 남긴 찌꺼기에 사회학은 친절히 다가가 경제사회학, 정치사회학, 문화사회학, 과학사회학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준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맹랑하게도 경제학과 정치학과 문화와 과학의 성과를 평가할 권한을 사회학이 가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소설의 경우,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잡설로 뭉뚱그려질 수 있는 데다가 여러 가지 형식 실험들이 무수히 이루어진 결과로, 시로 쓴 소설, 에세이 소설, 서간체 소설, 르포르타주 소설, 논문 형식의 소설 등 아무 데나 소설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운문과 산문과 일상과 학문은 모두 소설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사회학과 소설이라는 힘없는 두 제국이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대치하는 경우에는, 소설이 사회학에 깃발을 꽂을까, 사회학이 소설에 깃발을 꽂을까. 참여 관찰로 쓰인 수디르 벤카테시의 『갱 리더 포 어 원 데이』나 『플로팅 시티』는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였더라면 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책이다. 논문을 쓰려고 시카고 대학 뒷골목 빈민촌에 잠입한 사회학자가 갱단과 얽히게 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라니, 갱 리더와 친구가 되고 그를 대신해서 하루 동안 갱단을 이끌기도 한다니,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 소설처럼 읽히지 않나. 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노벨문학상을 받지만 않았더라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작품들은 구술사 연구 방법이 적용된 여성 사회학이라고 우겨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물론 제국주의적 지배는 언제나 분할통치 전략과 함께하므로, 어떤 사회학자는 그 책은 사회학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어떤 소설가는 그 책은 소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결국에는 사회학자와 사회학자, 소설가와 소설가는 각각 사회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설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언쟁을 벌일 것이고, 언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사회학으로 규정되든 소설로 규정되든, 그것이 이 시대에 그리 대단한 영광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 시대에는 모든 경계가 흐물흐물 녹아 사라지는 것이 자연법칙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늘어놓고 나니 문득, 자기만족과 미학적인 욕구와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열망이라는 분과 학문적인 이유를 넘어서는 것을 써야겠다, 그런 것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돌연한 희망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희망은 먼 곳에서 아스라이 빛나고 있을 따름이었고, 희미한 빛은 깊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 어둠 속에는 나도 소설도 사회학도 그 무엇도 없어서, 나는 다시 미래의 코스미스트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5) 역사상 자신의 불멸에 골몰했던 사람은 무수히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사람은 진나라의 하급 관리였던 갈홍이다. 갈홍은 영생을 위하여 도교에서 말하는 장수법을 꾸준히 실천했고 불멸의 묘약을 개발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불멸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답게 그는 영생법이나 묘약 개발의 실패에도 대비했는데, 그것은 미래 세대가 자신을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급 관리에 불과한 갈홍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길 만한 명성을 쌓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쪽을 택했다. 300년대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사람은 갈홍밖에 없었고, 그의 천재적인 기획은 성공해서 170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까지 그의 이름과 존재가 전달되었다.
나는 조깅을 했고 코어 근육을 단련했고 귀리와 케일과 블루베리를 챙겨 먹었지만 그뿐이었다. 갈홍에 비하면 영생을 위한 나의 노력은 너무 하찮았고 그저 미래의 코스미스트들만을 믿고 있을 따름이어서, 이렇게 안일해서야, 나도 갈홍처럼 해볼까,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 볼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갈홍 이래로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겨서 영생을 꾀하는 전략은 자서전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이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서전에는 대필, 자랑, 과장, 클리셰와 같은 낯부끄러운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깟 꼬리표야 떼어 버리면 되지, 영생이 중요하지 싶기도 해서, 책장을 뒤져 꼬리가 짧은 자서전 몇 권을 찾아냈다.
살만 루슈디는 호메이니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일종의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던 십여 년의 시간을 회고하며, 『조지프 앤턴』이라는 자서전을 썼다. 자서전이라고는 하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감각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워낙에 대단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인지, 그의 책은 아주 소설적이다 못해 영화적이기까지 하다. 『조지프 앤턴』을 읽으면 자동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가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이다. 시작은 이러하다. 어느 날 아침 살만 루슈디는 방송국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깬다. 기자는 눈곱도 떼지 않은 살만 루슈디에게 이렇게 묻는다. “호메이니가 방금 선생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기분이 어떠세요?”2) 살만 루슈디처럼 대단한 드라마를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는 에르베 기베르도 있는데, 그는 3부작을 이루는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연민의 기록』, 『빨간 모자를 쓴 남자』을 통해서 에이즈에 걸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장까지 뒤집어 모조리 보여 주었다. 일종의 스캔들 같은 삶을 살고 그것을 기록한 책을 출판해 또 다른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을 살려면, 그러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호메이니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에이즈에 걸리고 미셸 푸코 같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고스란히 기록까지 하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적어도 몇 백 년은 더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고작 백 년 안에 그런 성취를 이루기는 힘들 것 같은데.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은 『조지프 앤턴』을 몇 배쯤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전체가 3,622페이지라고 하니 이 작가가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대단할 것 없는 자신의 일생을 유년 시절부터 시간순으로 담담한 어조로 묘사했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은데 피식거릴 수 있는 일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칼 오베가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 것을 공산당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아버지가 민망해 했다는 일화, 해변에서 좋아하는 여자애와 놀면서 자신의 육체를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신이라고 느끼는 일화 같은 것들. 나는 1권만 읽고 더 읽고 싶지는 않았는데, 일상을 세밀하고 진솔하게 써 내려간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 모양이다. 그럴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자기 고백이 나는 좀 쑥스럽고, 아무리 문학이 중요해도 내 개인사와 가족사를 모두 까발려서 친척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고초를 겪고 싶지는 않다.
조 브레이너드는 ‘나는 기억한다’는 기억장치를 이용해서 서랍 구석에, 미끄럼틀 밑에, 하수구 아래에 흩어져 있던 기억 조각들을 긁어모아서 천오백 개의 기억들을 나열한 『나는 기억한다』는 책을 썼다. 이 책에 대해서 폴 오스터는 “배꼽 잡게 웃기면서도 마음 깊은 곳을 휘젓는 걸작”이라고 했다는데, 그러나 60년대에 미국에서 미술을 했던 게이 청년의 기억 조각들이 나를 웃기거나 마음 깊이 감동을 주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와 나는 너무 다른 배경에 속해 있었다. 그가 긁어모은 기억들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이 책을 쓰는 도중에 지인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일부이다. “꼭 성경을 쓰고 있는 신 같은 느낌이랄까. 내 말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로 인해 글이 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는 겁니다. 또한 이게 나에 관한 얘기일 뿐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이들에 관한 얘기라는 느낌도 드는군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내 말은 내가 모든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겁니다.”3)
에두아르 르베는 조 브레이너드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자화상』이라는 책을 썼다. 『자화상』은 자신과 관련된 사소한 사실, 생각, 인상을 무작위로 나열한 책이다. 나의 경우에는 조 브레이드너드보다는 에두아르 르베 쪽이 배꼽 잡게 웃기면서도 마음 한편을 휘저었는데, 내가 쓴 건가 싶은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들. “나는 미국의 어떤 흑인 급진주의자와 프랑스의 여성 사회학자 사이에 난 아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이 사람은 레디메이드군.’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만나는 여자가 내가 짓는 표정들을 짓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반복되는 악몽을 꿨는데, 중력이 사라지고 인류가 뿔뿔이 흩어지고 내 가족은 내게서 멀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모든 사람이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의 중심이 되는 꿈이었다.”4) 그러나 나는 에두아르 르베와 달리 『자살사용법』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고, 『인생사용법』이 사는 법을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이고 길게도 쓰셨구만,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계속되는 무』는 일종의 찢어진 자서전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없는 책으로, 나는 보르헤스와 달리 아버지로부터 마세도니오와의 우정을 물려받지 못하였으나, 보르헤스와 마세도니오에 대한 존경심을 공유할 수는 있었다.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서전을 비롯한 전기는 가장 허황된 예술 형식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 어떤 장르의 글에서보다 많이 변조되어 있기 때문으로, 그래서 자서전의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가 쓰는 자서전은 일상을 조직하는 관습적인 논리를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을 재구성하여 공상을 늘어놓고 농담을 주절대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농담들 혹은 공상들. “죽음이 언제나 오늘처럼 가장 최근의 사건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시대에는 부활이 이용되기도 했다.” “영원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계속 존재하는 대신, ‘죽음’으로 인해 사라졌다가 ‘부활’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존재’는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럴 바에는 ‘절약’의 원칙이 적용되는 죽음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살다가 간혹, 아니 자주 느끼는 바지만, 무엇이든 망가지고 찢어진 곳을 여러 번 고쳐서 결국 누더기로 만드는 것보다는 아예 새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고 돈도 절약되니까 말이다.”5) 나는 마세도니오의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읽으며 웃었고 그러나 오래 웃지는 못하고 그의 농담을 곱씹으며 공상에 빠졌다. 마세도니오는 자기 일생을 나열하거나 자기 고백을 늘어놓지 않고 자기 나름의 형이상학을 중얼거리는 것에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러한 방식으로 픽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6) 나는 이런저런 자서전 혹은 자전 소설을 읽으면서 글을 쓰지는 않았는데, 자료 조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은 또 들어서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한동안 코스미즘을 간증하며 친구들을 괴롭힌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잠자코 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자서전의 파편들이 떠돌아다녔고, 덕분에 알코올에 얼큰하게 절여진 새벽녘에는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말았다.
어렸을 때 내가 살았던 집은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었는데 마당 한쪽 구석에 깊은 구멍 같은 것이 있었어. 밭에서 키우는 옥수수 껍질이나 시든 호박잎, 연탄재 같은 것들을 묻어 두는 구멍이었는데, 너비는 일 미터가 안 되었고 깊이는 이 미터 정도 되었지. 어느 날은 옆집에 사는 빈이랑 그 구멍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어. TV 만화로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보고 나와서 괜한 모험심에 불탄 상태였거든. 가위바위보를 하고 빈이 먼저 구멍에 들어갔어. 쿵 소리가 나서 괜찮으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는 거야. 할 수 없었지. 구멍에는 쓰레기들이 부패하면서 만들어진 유독 가스가 고여 있었으니까. 119가 출동했지만 이미 늦었고, 빈이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은 나를 붙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다그쳤어. 나는 입이 안 떨어져서 아무 말도 못 했지. 그 후로 빈이 가족은 얼이 빠진 채로 살다가 이사를 갔어. 나는 아직도 가끔씩 내가 그 애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꿈을 꿔. 아니면 그 애가 구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나오거나. 그 애가 아니라 내가 먼저 구멍에 들어가는 꿈을 꾸지.
난데없는 나의 고백에 친구들은 할 말을 잃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었고, 앤드류 포터의 단편 『구멍』을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배경으로 변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내가 실제로 그런 일을 겪은 것 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래서 빈이가 죽었다는 부분을 말할 때는 매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마냥 울컥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위로를 받고 있을 수는 없어서 친구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런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감정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알아서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았다고. 친구들은 눈 뜨고 코라도 베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얘가 하다하다 별걸 다하는구나, 하는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써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내 이야기와 엮어서 쓰면, 내 기억이 들어가 있되 나의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농담이기도 하고 공상이기도 한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7) 그렇게 해서 나는 「계속되는 자서전」을 쓰게 되었는데 「계속되는 자서전」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기억한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소리, 싸늘한 공기, 피 냄새, 소독약 냄새, 찰싹, 엉덩이가 화끈거리고,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낯선 손길이 까슬까슬한 면직물로 나를 감싸고, 스테인리스 기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울음을 삼키고 눈을 떴지, 처음 들어 올리는 눈꺼풀, 뿌옇고 흐린 시야, 녹색 가운, 붉은 피, 예리한 메스. 탈진한 짐승, 드러누운 여자, 내 어머니….
나를 내려다보는 열두 명의 요정들,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왼쪽에 있는 요정이 입을 열었다. 한 음절도 흉내 낼 수 없는 웅얼거림. 그리고 그 옆에, 두 번째 요정이 또 웅얼거림, 기도 같은, 주문 같은. 세 번째, 네 번째… 요정들은 한 명씩 순서대로 질서 있게 말했는데,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군. 이런 경우, 나는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건가. 열한 번째 요정의 웅얼거림이 끝나고, 열두 번째 요정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불쑥 끼어든 열세 번째 요정. 틀림없이 요정은 열두 명밖에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고. 열세 번째 요정은 자정에 파견된 것이 탐탁지 않은 듯, 물론 그렇겠지, 누가 야근을 좋아하겠어,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열세 번째 요정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한 말은 바로, 너는… 죽을 것이다. 열두 명의 요정들은 돌멩이를 삼키기라도 한 듯 사색이 되었고. 열세 번째 요정은 무덤덤한 얼굴로 사라졌다. 나는 열두 번째 요정을 바라보았다. 열세 번째 요정의 저주를 풀어 주는 것은 당신의 몫이지 않나.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열두 번째 요정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백 년 후에 긴 잠에서 깨어난다거나, 뭐 그런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아? 나는 열두 번째 요정을 채근하는데….
따님입니다. 간호사가 나를 안아 든다. 아니 잠깐만요, 열두 번째 요정의 말을 못 들었다고요. 그러나 내 말은 간호사의 귀에 응앵응앵으로 번역될 뿐이라서, 나는 드러누운 어머니의 가슴에 내동댕이쳐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요정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고. 나는 절망적이고. 어머니, 저주를 받았어요, 어쩌죠? 나는 어머니의 살결에 코를 묻고 흐느낀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지. 귀여운 아가, 잘 자라, 우리 아가….


내 삶의 기억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엮어 쓰고 보니, 모두가 아는 이야기 속에 잠입해 여기저기 지문을 남겨 놓은 것 같은, 그래서 후대에 전해질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요정들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으면서 태어나서,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던 날에는 키 큰 왕자님의 꾐에 빠져 그를 따라갔는데, 갑자기 왕자님이 끈적거리고 지저분한 개구리로 변신해 나는 신고 있던 유리 구두를 벗어 던져 그를 몰아냈고, 집으로 돌아와서 조금 훌쩍이다가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끼 제비의 다리에 밴드를 붙여 주었는데, 그 대가로 군부독재가 막을 내렸지만 우리 집 살림살이는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나는 그런 일들이 정말로 생각이 나서 자기 전에 일기를 쓰듯이 「계속되는 자서전」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이어질수록 내 경험과 기존의 작품을 억지로 엮어 쓰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파일을 닫고 멍하니 책상에 앉았다. 책장에 꽂힌 로버트 쿠버가 자기 작품을 읽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듯이 헛기침을 해 댔다. 그래, 뭐 까짓것 어려울 것도 없지. 로버트 쿠버가 쓴 『잠자는 미녀』를 펼쳤다. 소설 속에서 잠자는 미녀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고, 덤불을 헤치는 왕자는 영원히 성에 도달하지 못하였는데, 미녀의 꿈과 왕자의 모험은 시작부만 서로 다른 버전으로 영원히 반복되었다. 이 작품이 되게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은 그러고 보니 내가 쓴 것도 되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예상치 못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상한 에피소드를 빼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꾸며 쓰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희망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파일을 다시 열었고 에피소드를 몇 개 더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다시 자신이 없어졌고, 이번에는 진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 날름 그만두었다.


8) 이렇게 폴더 속에 처박혀 잊히는 소설들이 자꾸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문체 때문이다. 문체는 정말 골치 아픈데 내 기분에 따라서 문체가 너무 달라지기 때문이고 기분에 따라서 이전에 써 놓은 문장이 다른 목소리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썼던 문장을 가다듬다 보면 모든 문장을 새로 써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점차 모든 문장과 이야기에 대한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이럴 때 내가 나와 타협하는 방법은 글꼴을 계속해서 바꾸는 것이다. 바탕체로 읽었을 때는 지루해 보였던 문장이 고딕체로 읽으면 깔끔해 보이고, 그러다 문장이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 돋움체로 바꾸어 보는데, 그러면 똑 부러지는 인상이라 괜찮아 보이고, 그러나 다시 보면 문장이 뚝뚝 끊기는 것 같아서, 글꼴을 또 바꾸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양재샤넬체양재와당체 같은 그림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게 된다. 그제야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나 한심해하면서 글꼴 바꾸기를 그만둔다.
레몽 크노는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한심한 짓은 하지 않았고 대신 버스와 광장에서 같은 남자를 두 번 마주친다는 별것 없는 일화를 아흔아홉 가지 문체로 변주해 『문체 연습』이라는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을 프랑스어본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번역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이라고 보아야 할지 번역자인 조재룡의 문체 연습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으나, 시제를 바꾸는 단순한 작업에서, 희곡, 고문, 동요 투로 바꾸는 걸로 모자라서, 맛이나 소리로 표현해 내고, 소네트에 집합론에 기하학에 난리도 아니었다. 아니 이걸 이렇게 쓰나, 기가 막혀서 깔깔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에는 와하하 만세! 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몽 크노 만세! 조재룡 만세! 소설 만세!
조재룡이 역자 해설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주제도 추악한 주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밝혀낼 수 있을 뿐이며, 문체 오로지 그 자체만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방법이다.”6)
현대 소설의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는데,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나. 이야기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문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상한 것 같아서 포기하려던 소설의 도입부를 다른 문체로 고쳐 써 보기로 했다.


―객관적인 이야기
절두산 성지를 산책하려고 한강변을 따라 걷는데 유람선 한 척이 양화철교를 통과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하얀색 삼각돛 두 개를 단 유람선은 빠른 속도로 잠두봉 선착장에 안착한다. 나는 잠두봉 선착장 앞에서 유람선을 올려다본다. 비둘기들이 낮게 날아 시야를 어지럽히지만 유람선 갑판에 중절모자를 쓴 남자가 보인다. 그는 부산스럽게 주변을 살피다가 검정색 트렁크를 들고 배에서 내린다. 작고 야윈 남자는 콧수염을 길렀고 동그란 안경을 썼다. 나는 그가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것을 알아본다.


―머뭇머뭇
절두산 성지에 가는 길이었던가, 선유도 공원에 가는 길이었던가, 정확하지 않지만, 한강변을 따라서 걷고 있었는데 아니 뛰고 있었나…. 그런데 유람선 한 척이, 그러나 그것을 유람선이라고 할 수가 있나, 하얀색, 아니 검정색이었던가, 삼각돛 두 개를 달고 있는데, 하나인지도 모르는데, 제법 빠른 속도로, 유람선이 다 그렇게 빠른지도 모르겠지만, 잠두봉 선착장에, 그게 절두산 선착장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도착한다. 나는 선착장 앞에서 유람선을 쳐다보는데, 비둘기들이 많고, 아니 어쩌면 비둘기가 아니라 기러기였을지도! 유람선 갑판에 남자가 보이는데, 중절모자를 쓰고 있나, 아니면 검정색 트렁크를 머리에 이고 있나, 정확하지 않지만 검정색 무언가가 머리통 위에 있고, 남자는 배에서 내린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는데, 아니 말라서 작아 보였나, 그랬을지도. 콧수염을 기른 것은 분명하고, 그러나 턱수염이 있는지는 모르겠네, 안경을 썼던 것 같은데, 안경이 동그랬나, 네모났나. 나는 그 사람을 아는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페르난두 뭐였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페페….


―정확하게 따져서
절두산 성지를 산책하려고(산 척하려 했다는 것이 아니고) 한강변을 따라(한강변을 따라했다는 게 아니고) 걷는데, 유람선 한 척이(유랑선 한 척이 아니라) 양화철교를 통과해(한강철교도 통과했겠지만 정확하지는 않고)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하얀색 삼각돛(검정색은 아니고 사각돛도 아니고) 두 개를 단(두 마리의 개를 매달았다는 게 아니고) 유람선은 빠른 속도로(바른 손 뒤로가 아니라) 잠두봉 선착장(상암 선착장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고)에 안착한다(착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나는 잠두봉 선착장 앞에서(날고 있는 잠두봉 선착장이 아니고) 유람선을 올려다본다(유람선에 올라간 것은 정말이지 아니다). 비둘기들이(기러기들은 아니고) 낮게 날아(낮에 난다는 것은 아니고) 시야를 어지럽히지만(어질렀다는 것은 아니고) 유람선 갑판에(유람선에 가판을 벌였다는 것이 아니라) 중절모자를(중이 절모자를 썼다는 것은 아니고) 쓴 남자(씁쓸한 남자라는 것이 아니고)가 보인다. 그는 부산스럽게(부산광역시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아니고) 주변을(난데없이 주번이 아니고) 살피다가 검정색 트렁크를(트렁크 팬티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들고 배에서(가슴 아래 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내린다.(지퍼를 내린다는 것도 값을 내린다는 것도 아니다.) 작고(돌아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야윈 남자는 콧수염(턱수염은 아니고)을 길렀고(길을 냈다는 건 아니고) 동그란 안경을 썼다.(머리에 썼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그가 날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페르난두 페소아(배를 탄 두 명의 배수아는 아니고)라는 것을 알아본다.(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게 문체 연습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정말로 바틀비가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언제부터 아버지 말을 잘 들었다고 삼촌이 쓴 문체 연습장을 흉내 내고 있나.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플로베르의 말을 고쳐 썼다.
아름다운 주제도 추악한 주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문체도 추악한 문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체는 그저 문체일 뿐이다. 사물을 절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소설을 쓰는 행위 그 자체다.


9)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서 완성하지도 못할 글을 자꾸 쓰는 것으로 따지면 페르난두 페소아를 빼놓을 수 없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 안에서 수십 개의 이름을 끄집어냈는데, 그 이명들은 각자 고유한 삶의 스토리가 있었고 모두 다른 스타일로 글을 썼다. 페소아는 진정 자기 자신이 되는 데 골몰하며 자기 자신만을 숭배했고,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이 과도한 자의식은 많은 현대인들의 내면에 들끓고 있는 것이라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존재를 아는 사람치고 이 사람을 동시대인 혹은 영혼의 친구라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여섯 살 때부터 이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가 만든 첫 번째 이명은 슈발리에 드 파였다. 슈발리에는 페소아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보냈고, 페소아는 슈발리에의 생일을 달력에 적어 놓았다. 페소아는 슈발리에를 비롯한 이명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져서 그들이 어떤 얼굴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눈앞에 보일 지경이라고 했다. 밀란 쿤데라는 자기 소설 속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다만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는 자기 자신으로, 그들을 서로 다른 실존적 상황에 몰아넣고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탐구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페르난두 페소아에게 실현되지 않은 다른 삶이란 다만 다른 종류의 글을 쓰는 삶이고, 이명들을 통해 다른 종류의 글을 쓰는 삶을 사는 형식으로 소설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오얏의 실패 이후로 나는 다른 가능성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페소아와 달리 내 안에는 내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어설프게 뭉쳐진 세포 덩어리로서 유리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페소아의 영혼을 빌려 볼까. 페소아를 여기로 불러내 볼까. 아니 어차피 빌리는데 페소아만 빌려 올 필요는 없지. 나는 마구잡이로 초대장을 뿌렸고 어렵지 않게 많은 영혼들을 합정동과 망원동 일대에 풀어놓을 수 있었다. 물론 페르난두 페소아를 포함해서 말이다.
페소아는 리스본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배에 태웠다. 테주강에서 출발한 배는 바스쿠 다가마 코스를 따라서 희망봉을 돌고 인도에 다다르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참을 내달려 한강으로 흘러들어 왔다. 버전에 따라서는 페소아가 유령으로서 유령선을 타고 오기도 했고, 바스쿠 다가마가 탔던 범선을 타고 온 적도 있었고, 어쩐 일인지 한강 유람선 이랜드 크루즈에서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버전에서 페소아는 결국에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갔는데, 페소아와 나는 둘 다 내성적이라서 서로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선착장에 검정색 트렁크를 두고 간 탓에 트렁크에서 페소아의 이명들, 즉, 알베르투 카이에르, 알바루 드 캄푸스, 리카르두 레이스가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마포구에 떨어진 가엾은 그들을 거둔 것은 안토니오 타부키였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한동안 페소아의 이명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으나, 성산대교 아래에서 익사체가 발견된 후에는 익사체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나는 물었는데, 타부키는 아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 일에 어째서 그렇게 매달리는 거냐고 물었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듯 연거푸 에스프레소만 들이켰다. 그는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에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무슈부부 커피스탠드에서 만났다. 타부키가 에스프레소 잔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긁어 먹으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7)
안토니오 타부키는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주문하면서 바리스타에게 한강에서 발견된 익사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세 잔이나 마신 대가로 손을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편함에는 마포구청에서 보낸 독촉 고지서가 꽂혀 있었는데, 이 고지서는 벌써 대여섯 번은 받은 것이었다. 고지서의 수신인 자리에는 내 이름이 아니라 Mary Sulhee Spino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사 오기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일 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세금을 안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미납한 세액은 6,780원이었다. 이 정도면 고지서를 보내는 데 들인 비용이 Mary Sulhee Spino가 미납한 세액 6,780원과 비슷하지 않을까. 괜스레 오지랖을 부려 보고 싶어서 마포구청에 전화를 걸어 Mary Sulhee Spino는 더 이상 이 집에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로와 무사안일주의에 찌든 마포구청 공무원은 심드렁한 말투로 그럴 경우 고지서를 찢어 버리면 된다고 답했다. 마치 별것 아닌 것까지 구청에 문의를 하는 진상 민원인을 다루는 것처럼.
진상 민원인은 독촉 고지서를 책상 한쪽에 밀어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썼더라. 그러니까 홍상수는 원당 국수 잘하는 집에서 영화 관계자와 함께 잔치국수를 먹고 있었다. 잔치국수를 먹고 있었지만 스테인리스 컵에는 소주가 채워져 있었고 두 사람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감독님, 이번 영화는 서사가 완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가 새로 시작되는 걸로 진행이 되는데요, 뭔가를 계속 기다리는 그런 장면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그게 영화가 됩니까?”
영화 관계자는 흥에 취해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영화가 그렇게 찍기를 요구해서 그렇게 찍었으니까요. 그러면 그게 영화겠지요.”
홍상수가 느릿느릿 답했다. 나는 잔치국수를 먹으면서 두 사람의 혀 꼬부라진 발음을 옆 테이블에서 엿들었다. 국수를 다 먹고도 계속 앉아 있고 싶었는데, 그러다 술에 취한 그들과 말을 섞게 되고, 나도 소주를 마시게 되고, 불현듯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며 낯 뜨거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될까 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를 두드리면서 가게에서 나와 한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망원초록길 입구 따릉이 대여소에서 마르코발도가 따릉이를 반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따릉이 바구니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정색 비닐봉지가 담겨 있었다. 마르코발도는 따릉이를 타고 한강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쑥이나 냉이 같은 것들을 캐 오고는 했다. 그는 딸린 식구가 많았기 때문에 식비가 많이 들었고 그래서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은 가급적 직접 마련하는 것을 선호했다.
“안녕하세요. 마르코발도 씨.” 나는 마르코발도에게 알은체를 했다. 마르코발도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마르코발도는 나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고 검정 비닐봉지를 열어 보여주었다. “으악. 이게 다 뭐에요?” 나는 뒷걸음질 쳤다. 비닐봉지 안에는 죽은 비둘기 서너 마리가 들어 있었다.
“애들이 자꾸 치킨 먹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마르코발도는 히죽거리면서 비닐봉지를 다시 묶었다.
“그걸 잡은 거예요?”
“잡았지요. 그물 덫을 설치해 놓고, 뻥튀기를 뿌려 놓으니까, 녀석들이 마구 몰려오더라고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어차피 비둘기는 유해 조류로 지정되어 있어서 잡아도 상관없으니까요.”
마르코발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비닐봉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망원정사거리 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한강 공원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무심하게도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었고, 그래서 화창한 한낮의 지옥이었다. 나는 공원을 걸으면서 오래된 기름 냄새, 조금 부패한 고기 냄새, 느글느글한 라면 냄새 같은 것으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최소한도로 숨을 쉬었다. 글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목청 큰 이야기꾼의 목소리, 하하하하하 웃음소리, 웍웍웍웍웍 개 짖는 소리, 이야약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아이들의 비명 소리 같은 것들이 나를 공격해서, 나는 사람들을 피해, 개를 피해, 자전거를 피해, 킥보드를 피해, 끊임없이 경로를 수정해야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저소음과 저밀도일 뿐이어서, 나는 살아 있는 자들, 육체를 가진 자들로부터 도망쳐 절두산 성지로 향했다.
절두산 성지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데, 야윈 남자가 남종삼 동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가 로베르트 발저라는 것을 알았는데, 때때로 발저가 이 일대를 산책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발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까치발로 조용히 걸으면서도 집요하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왼손에 작은 종이를 올려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발저는 그 소리에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고 종이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십자가의 길을 빠져나갔다. 그가 떨어뜨린 종이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걸 읽으려면 돋보기가 필요할 정도였다.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으려는데, 그 순간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나는 놀라서 뒤로 넘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떤 남자가 “요르고스!”라고 외치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 사이에 맹랑한 개는 발저가 떨어뜨린 종잇조각을 혓바닥으로 날름 낚아챘고, 나는 “안 돼!” 비명을 질렀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켰다. 그는 골똘하게 맹한 얼굴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콜린 파렐이었다.
“요르고스, 제발 좀!”
콜린 파렐은 개의 목줄을 쥐고 그것을 거칠게 당기면서 말했다.
“그런데 요르고슨지 뭔지 그 개가 제 종이를 집어 먹었어요. 삼켰나요? 중요한 건데.”
콜린 파렐은 요르고스의 입을 벌려 입 안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르고스는 하품을 하듯 입을 벌려 빈 혓바닥을 내밀었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형이 활자 중독이라서요.”
“형이요?”
나는 재채기라도 하듯이 반사적으로 물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우선적으로 물어야 했던 것이 저 개가 그의 형이라는 부분인지 활자 중독이라는 부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콜린 파렐의 말에 따르면 요르고스는 그의 형이었다. 오랫동안 혼자 살던 요르고스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개가 되는 쪽을 택했는데,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활자가 적힌 종잇조각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먹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콜린 파렐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콜린 파렐도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요르고스는 계속해서 침을 흘렸다.
그 상태에서 나는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나와 콜린 파렐과 요르고스는 내가 대사를 주기만을 기다리며 멀뚱거렸는데, 나는 그들에게 대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다음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아니라 대략 정해놓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쓰기 싫을 때다. 쓸 이야기가 있는데 쓰기 싫은 이유는 그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것을 내 몸이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 분명한 작가들이 책장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부른다. 이번에는 공살루 M. 타바리스였다. 그가 쓴 『작가들이 사는 동네』는 책장 맨 아래 칸에서 다른 책들에 눌려 찌그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 책이 있었지. 언젠가 저 책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작가들이 사는 동네』는 말 그대로 작가들이 사는 동네에 대한 이야기로, 이탈로 칼비노나 로베르트 발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열 명의 작가들이 그들의 캐릭터대로 동네를 누비면서 산책을 하고 대화도 하는 그런 내용인데, 미니멀 하면서도 재치 있고 우아한 에피소드들이 나열되어 있다. 나는 책장에 꽂힌 『작가들이 사는 동네』를 쳐다보면서, 내가 쓴 소설과 타바리스의 소설을 머릿속으로 교대로 읽어 보았고, 그러면 안 되었는데 그렇게 하였고, 그런 결과로 다시 콜린 파렐과 요르고스에게 돌아갈 힘을 잃었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구기고 누웠다. 아무래도 나는 침대에 편하게 누울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누웠는데, 염치없게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게 속닥거리는 소리였는데 귀를 기울이자 점차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를 찾아줘. 여자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 줘.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퍼지면서 소름이 돋았지만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찾아 달라니 찾아 주어야겠다는 순종적인 생각을 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가위에 눌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가위에 자주 눌려서 이럴 때는 몸을 움직이려 애쓰지 말고 눈동자를 굴리는 게 낫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Mary Sulhee Spino 앞으로 온 독촉 고지서가 놓여 있었다.


10) 메리 설희 스피노, 마리 술리 스피누, 메어리 설리 스파이노…. 나는 돌림노래를 변주해 부르듯이 독촉고지서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 W빌라 301호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 사람, 고지서에 적힌 낯선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사람, 그러나 틀림없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나는 이 고지서를 받은 것에,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살게 되고 그가 지방세를 납부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는 독촉 고지서의 형태로 불쑥 출현한 나의 신, 나의 히로인, 나의 인지망에 포획된 적이 없는 미지의 현실, 살과 피를 가진 비어 있는 텍스트…. 그렇게 해서 나는 그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텅 빈 무대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그 무대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이 단락은 너무 많은 수정과 삭제가 이루어져 누더기가 되어 버린 단락. 이 단락은 메리 설희 스피노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추적하는 탐정소설이었고, 마리 술리 스피누를 둘러싼 위험과 음모가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스릴러였고, 메어리 설리 스파이노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정을 나누는 모험소설이었으나, 개연성과 핍진성이라는 소설의 장르적 규칙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모조리 실패작이라는 판결을 받고 삭제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맙소사. 정말 기막히게 재밌었는데. 재미로 말할 것 같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는데. 불운한 독자들은 그 재미를 맛볼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더기가 되어 버린 단락 사이에 남아 있는 흔적을 살펴보면 그래도 간신히 읽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한 소설이다. 그것은 실제로 Mary Sulhee Spino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으로, 결국에는 그를 찾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또 대단한 서스펜스가 있을 가능성은 낮지만, Mary Sulhee Spino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과정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 것으로, 내 두 발로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말하자면 삶을 바쳐서 소설을 쓰는 것으로, 나의 일상이 곧 소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집을 계약할 때 중개를 맡았던 부동산을 찾아갔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Mary Sulhee Spino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젊은 여자 두 명이 그 집에서 살기는 했었는데, 그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요즘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과 교류를 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은 두 명 다 그러니까 상당히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증언: 젊고 말 없는 여자와 함께 살았던 역시나 젊고 말 없는 Mary Sulhee Spino.
그리고 W빌라 주민들에게 301호에 살던 Mary Sulhee Spino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정말이지 대답하기 귀찮은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어딜 가서 그를 찾나. 동네 카페나 빵집, 식당 같은 데를 돌아볼까 생각하였으나, 누가 자기 이름을 대고 커피를 사고 빵을 먹나, 가뜩이나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데, 싶어서 그만두었다.
구글에 Mary Sulhee Spino를 검색하는 편이 낫겠다. 요즘 사람들은 길바닥보다는 온라인에 개인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편이니까. 그러나 Mary Sulhee Spino는 품행이 방정한 편인지, 그의 이름이 모두 포함된 웹 페이지는 고작 세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그레이트 저니’라는 몬트리올에 있는 여행사의 홈페이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평온한 작별’이라는 네덜란드 상조 회사의 홈페이지였다.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게시물이 하나도 올라와 있지 않았고 팔로워도 팔로우도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그의 긴 이름만이 적혀 있어서, 비어 있는 텍스트로서의 그의 존재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그레이트 저니’ 여행사의 홈페이지는 여행사가 폐업을 했는지 열리지 않았는데, 구글 검색 페이지에서 미리 본 바로는 ‘귀여운 마트료시카를 기념품으로 받아서 감사’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지만, 그래서 뭐 귀엽고 감사하구나 싶을 따름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평온한 작별’ 상조 회사에 달려 있었다. 상조 회사는 폐업을 하지 않았고 비어 있는 텍스트도 아니었으며, 네덜란드어를 사용했지만 다행히도 구글은 열띤 번역을 제공했다.
평온한 작별 상조 회사는 삼 대째 이어져 지역사회에 유서 깊다. 유가족들이 망자의 명복을 빈다.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데 집중하기 위하여. 당신은 슬퍼-우리는 걱정해. 우리는 장례 절차를 정성껏 고품격 서비스 제공한다.
나는 당신은 슬퍼-우리는 걱정해, 라는 문장을 중얼거리면서 홈페이지를 구경했다. ‘평온한 작별’ 상조 회사는 장례와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유골을 담을 항아리, 시신을 담을 관, 무덤을 장식할 꽃 및 기념품을 망라한 다양한 상품들을 제공하였고, 유가족들의 애도를 돕기 위한 심리 상담 프로그램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차, 그런데 상조회사를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Mary Sulhee Spino를 찾으러 왔지, 그러니까 그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는 곳은 장례 등록 페이지였다. 장례 등록 페이지에는 망자들의 사진이 온라인 납골당처럼 혹은 사후 세계를 위한 앨범처럼 정렬되어 있었는데, 사진을 클릭하면 애도의 글을 쓸 수 있었다.
Mary Sulhee Spino는 살바토르 문디라는 사람에게 남긴 애도의 메시지들 중 하나에 언급이 되어 있었는데, 그가 직접 글을 남긴 것은 아니었고, 섬유 회사의 부대표가 쓴 글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살바토르 문디는 사려 깊은 사람 뛰어난 리더. 그에게 도움을 받은 우리 함께 추억해. 마리 설희 스피노, 빔 세가르트, 욜라 마리세가 애도하다.
나는 스크롤을 내리면서 애도의 메시지들을 읽어 나갔다. 그 메시지들은 살바토르 문디를 증언하는 기록과 같았고 그래서 상조 회사 홈페이지는 망자들의 영혼을 보관하는 온라인 박물관, 언젠가 도래할 부활의 날을 위한 기억 저장소처럼 느껴졌다.
살바토르 문디. 독수리처럼 빛나는 눈에는 지혜가 가득 진리가 가득. 아름다운 외모에 카리스마. 그와 나누었던 농담이 그리워요. 유쾌한 사람 또한 열정적인 사람. 주변 사람들의 재능을 자꾸 발견하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능력이 우월했다. 뛰어난 카리스마를 지닌 진정한 기업가. 모든 정치인은 그를 숭배하라 국내 및 국제적으로. 임금 평화 노조에 따르면 살바토르 문디는 농업과 농업 기계화의 아이콘이었다. 사랑스러운 성격에 친구이자 이웃. 확고하고 명료하며 공정하고 맞춤형입니다. 우리는 가지가 없구나, 죽음도 돗자리도 없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또 보자! 우리는 서로를 생각할 때 연결됩니다. 항상 재회가 있지요. 살바토르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애도를 표합니다. 농업 원예 학교, 오래된 트랙터 클럽, 브뤼셀의 농업 박람회 등 많은 아름다운 추억이 확실히 보존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잘생기고 쾌활한 사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 소외, 그는 온 세상을 주었습니다. 시대를 현시대 좋은 사람.
트랙터에 걸터앉아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살바토르 문디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살아온 세월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때 지난 애도의 메시지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사람들이 남긴 애도의 문장들밖에 없어서, 나는 그 문장들을 다만 재조합하는 것으로밖에 그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잘생기고 지혜로 가득 찬 트랙터 클럽은 온 세상을 주었습니다. 브뤼셀의 농업 박람회에는 죽음도 돗자리도 없었지만 그와 나누었던 농담이 그리워요. 국제적으로 우월한 이웃을 자꾸 발견하고 임금 평화 노조는 유쾌하고 열정적인 맞춤형 네트워크. 우리는 서로를 생각할 때 또 보자! 시대를 현시대 아름다운 추억, 항상 확고하고 재회가 있지요…. 그를 증언하고 그리워하는 문장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생성될 수 있을 텐데, 그 생성 안에서 어쩌면 그는 영구히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Mary Sulhee Spino를 찾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글쎄, 뭐 그랬지, 그랬는데, 그러니까 Mary Sulhee Spino는 체납 세금 6,780원으로 인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트랙터를 사려고 은행 대출을 알아보던 중에 세금을 체납한 사실이 알려져 인터폴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살바토르 문디는 공정하게 맞춤형으로 그를 도와주었는데, 살바토르 문디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11) 한동안 나는 내 몸이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설들 사이를 유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기억이 나는 것은 에트가르 케레트의 소설로 들어갔을 때인데, 그곳에는 다른 소설들로 무한히 진입할 수 있는 연결 통로 같은 것이 있었다.
거기서 엘라를 만났다. 엘라는 비밀을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키랑 키스를 하는데 날카로운 쇠붙이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거야. 그래서 치키가 잠들었을 때 그의 입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 내가 뭘 발견했는지 알아? 지퍼. 치키 혓바닥 밑에 아주 작은 지퍼가 달려 있었어.” 엘라는 망설임 없이 지퍼를 내렸다. 지퍼를 내리자 치키 몸이 두 쪽으로 쫙 벌어지더니 안에서 유르겐이라는 독일 남자가 튀어나왔다. 엘라는 유르겐과 환상적인 밤을 보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유르겐은 멍청한 인종주의자였던 데다 음악을 한답시고 밤낮없이 꽥꽥거렸고 못된 말을 일삼았다.
어째서 엘라는 유르겐을 가만히 둔 것일까. 유르겐을 제거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데. 나는 엘라를 대신해서 유르겐을 처리하기로 했다. 유르겐이 술에 취해 더러운 말을 지껄이며 난동을 피울 때, 일전에 배웠던 크라브 마가를 이용해 단숨에 그를 제압한 것이다. 팔이 꺾인 유르겐이 아아아,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조금의 연민도 없이 지체도 없이 신속하게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유르겐의 몸이 집업 카디건처럼 쫙 갈라졌고, 안에서 톰 킹이 튀어나왔다.
톰 킹은 삼십 대 중반 정도로 전성기가 지난 권투 선수였는데, 비리비리한 치키나 유르겐과 달리 잘 단련된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다. 톰 킹은 시합 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음식을 먹어 댔다. 내 몫까지 몽땅 먹어 치우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툭하면 단백질 타령을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소를 먹이듯이 톰 킹을 먹였다. 어쩌면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권투장에서 그가 승리의 기쁨에 들떠 내 이름을 부르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마치 내가 챔피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톰 킹은 그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애송이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스테이크, 스테이크를 딱 한 장만 더 먹었더라면…. 그놈한테 딱 한 방만 제대로 먹였으면 됐는데, 힘이 달렸어.”
톰 킹은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바닥에 코를 휑 풀었다. 내 인내심은 한계치를 넘어섰는데, 톰 킹은 눈치가 없었다. 마침 우리는 어둑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 입 좀 벌려 볼래? 입 안에 혈자리가 있거든. 거길 누르면 기운이 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고, 톰 킹이 눈물을 마저 훔치고 입을 벌렸을 때 단숨에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벗겨진 톰 킹을 둘둘 말아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번에는 프랑수아였다. 사실 나는 프랑수아를 보자마자 입을 좀 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사실 그리 호감을 느낄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했으며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던가. 그러나 입을 벌려 달란다고 벌려 줄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프랑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당신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어?”
프랑수아는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린 채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꼬장꼬장하고 골치 아픈 스타일.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무슨 마트료시카 같은 소리야?”
프랑수아가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듣고 보니 마트료시카랑 비슷하기도 했다. 마트료시카처럼 귀여운 러시아 여자들이 층층이 들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밤공기가 찼고 언제까지고 공원 벤치에 앉아 프랑스 대머리의 짜증을 받아 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프랑수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프랑수아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면서 “뭘?”이라고 물었다. 프랑수아는 나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 소파에 제집처럼 턱 걸터앉았다.
“당신은 문학 애호가이거나 허언증 환자야.”
프랑수아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면서 뭔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양립 불가능한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둘 다인 걸로 해 그럼.”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잡동사니를 치우면서 건성건성 답했다. 프랑수아가 집요하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휴우, 그에게 관심을 주기로 했다. 프랑수아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비교문학을 전공했어. 대학교수라고.”
“자기소개를 하자는 거야? 알다시피 난 문학 애호가에 허언증 환자야.”
“전체적인 서사는 에트가르 케레트의 『지퍼열기』에서 빌려 왔군. 『지퍼열기』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일을 반복해서 일어난 일로 변형했고. 유르겐은 『지퍼열기』 소속이고, 톰 킹은 잭 런던의 『스테이크 한 장』 소속이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프랑수아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가만있자. 그럼 나는….”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알을 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수아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아는 것이 많았고 그래서 그를 통해서 괜찮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뭐, 일종의 퍼스널 쇼퍼를 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나 외출을 했다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을 때, 프랑수아는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핏덩이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프랑스인이고 대학교수라는 걸 고려하면 그리 생경한 조합은 아니었다.
프랑수아는 벌거벗은 채로 집안을 서성이며 “다 설명할게.”라는 말을 반복했다. “못 볼 꼴 보이지 말고 옷부터 입어.” 나는 프랑수아에게 가운을 던져 주었다. 프랑수아는 가운을 걸치고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잔에 와인을 채웠다.
“이 상황이 끔찍해 보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고작 금기를 좀 깨뜨렸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아주 덧없는 문명의 금기…. 아니, 문명의 금기도 아니지.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데다가 소녀와 결혼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헛소리를 하려면 정성이라도 좀 들여. 이슬람이 뭐 어째? 잊어버렸나 본데 여기는 한국이야. 이슬람 신자가 1퍼센트도 안 된다고.”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이슬람이나 유교나, 중동이나 극동이나 다를 게 없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어떤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몽땅 무너져 내렸어. 신이 죽은 지는 아주 오래됐고 인간 이성도 주체도 다 죽었지. 내가 살려면 뭐라도, 그게 뭐라도 꼭 움켜쥐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극동의 어린 여자애 엉덩이를 움켜쥔 거야?”
“아,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줘.”
“좋아. 대신 당신은 이 집에서 추방이야. 내 집에선 내 뜻에 복종하지 않는 짐승은 무조건 추방이니까. 하지만 저건 다 마시고 나가 줬으면 좋겠어.”
나는 핏덩이를 꾀어 분위기를 잡으려고 산 것이 분명한 보르도 와인 두 병을 가리켰다. 프랑수아는 맥이 빠진 듯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그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 와인을 들이켰다. 나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취해 곯아떨어지면 지퍼를 열어야겠다. 비닐장갑이 남아 있던가. 내 손에 침을 묻히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프랑수아의 지퍼를 열고 또 누구의 지퍼를 열었더라. 하여튼 헨리에게 정착하기 전까지 몇 명의 남자들을 더 만났지만, 헨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엉망이었다. 나는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먼저 헨리의 작은 엉덩이를 토닥였다. 내가 엉덩이를 검지 끝으로 톡톡 치면 그는 앙증맞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춤을 추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빵이며 우유며 초콜릿이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너무 쉬웠다. 먹다 남긴 것을 던져 주면, 그것만으로도 헨리는 포식을 할 수 있었으니까. 헨리의 키는 1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몸무게는 글쎄 500그램은 되려나. 나는 헨리를 집어 물티슈로 그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닦았다. 헨리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헨리의 단점이 있다면 매번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눈물을 흘리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헨리의 머리통을 가랑이 사이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오, 헨리. 얼마 후 나는 헨리를 꺼냈고 달콤하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헨리가 보라색 구슬이 달린 머리핀을 쥐고 내 왼쪽 가슴 아래에 서 있다. 내 머리핀이 왜 그의 손에 들려 있나.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헨리는 내 가슴에 귀를 댔다가 몇 걸음 옆으로 옮기고 다시 귀를 댄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키보다도 큰 머리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다. 머리핀이 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구멍을 낸다.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이 들고 나는 숨을 쉬지 못한다.
나는 발작하듯 잠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몸이 축축이 젖었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몸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헨리는 내 가슴에서 굴러떨어져 배꼽 옆에 넘어져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보라색 구슬이 달린 머리핀이 쥐어져 있었다. 어디서 저런 못된 걸 배운 거지. 헨리는 허둥지둥 머리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내 배를 찌르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 몹쓸 것을 집어서 방바닥에 내던졌다. 심장이 날뛰었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가만히 긴 숨을 몰아쉬고 방바닥을 확인했다. 헨리는 목이 완전히 꺾인 채 죽어 있었다.
나는 침대 밑, 서랍 속, 가방 귀퉁이, 쓰레기봉투 안을 뒤졌다. 구겨진 종이처럼 말려 있는 유르겐, 톰 킹, 프랑수아…를 꺼내 판판하게 펼쳤다. 그들과 보냈던 지난날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피곤했지만 생각을 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머리카락을 뽑아서 바늘에 꿰었다. 그리고 유르겐, 톰 킹, 프랑수아…를 꿰매고 접고 뒤집고 다시 꿰매기를 반복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애도와 창조의 시간이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나는 그것을 헨리에게 입혔다. 작은 헨리는 커다랗고 멋진 탈을 썼다. 보기가 아주 좋았다. 이제는 내가 시험에 들 차례였다. 나는 내 혓바닥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 지퍼를 쭉 내렸다.


12) “이건 너무 레디메이드 아니야? 소설이 레고 블록도 아니고.”
토머스 트웨이츠가 말했다. 그는 ‘토스터 프로젝트’ 이후에 슬럼프에 빠졌고 그래서 우울하다고 말했는데, 내가 쓴 소설에 대해 악평을 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레고 블록 같은 레디메이드 소설을 쓰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원래 창조는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배치하는 데서 나오는 거야.”
“으음. 패러디든 패스티시든, 그런 건 이제 낡았어.”
나는 토머스 트웨이츠의 말이 좀 짜증스러웠다.
“리얼리즘은 더 낡았는데 왜 뭐라고 안 해?”
“그거야 뭐….”
나는 토머스 트웨이츠와 더 이상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아직도 토스터 프로젝트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었다. 토스터 프로젝트는 토스터를 원재료에서부터 직접 만드는 프로젝트인데, 그는 토스터를 만들겠다고 구리를 직접 캐러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몇만 원밖에 안 하는 조그만 토스터에는 무려 사백여 개의 부품이 들어 있었고, 원재료부터 직접 만들어 낸 수제 토스터의 생산 가격은 무려 이백만 원이 넘어서, 그 조잡한 토스터는 소비와 환경과 노동의 문제를 담고 있는 문제적인 토스터로 전시되었고, 심지어는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 했다. 그래서 토머스 트웨이츠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 나는 토스터 하나 만들려고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탔는데 너는 방구석에 앉아서 남의 소설이나 가져다가 뭘 하는 거냐, 뭐 이런 것이겠지.
“아니, 다른 소설들이 그냥 네 소설을 위한 재료로만 사용되는 것 같아서. 사실 며칠 전에 헌책방에 갔었거든. 그 왜 있잖아. 우리 어렸을 때 자주 다녔던 로트만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헌책방.”
토머스 트웨이츠는 로트만 헌책방에 갔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로트만은 오래된 햇볕과 먼지가 묻은 낡은 책들에 파묻혀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토머스 트웨이츠가 로트만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눈꺼풀을 조금 꿈틀거렸는데, 토머스 트웨이츠를 알아보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로트만은 마른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천천히 자기 안에 고여 있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책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기록되어 있다네. 아무리 거짓을 기록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네. 왜냐면 인간은 진실을 담은 문장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네. 그게 뇌과학적으로 그렇다네. 신학적으로 그렇다네. 사회학적으로 그렇다네. 그래서 나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있지. 나는 신이 존재했다고 믿네. 제우스와 헤라와 예수와 야훼와 알라와 브라마와 시바와 같은 그런 신들이 모두 존재했다고 믿네. 못된 장난을 하는 마귀와 마녀가 지배했던 시절도 있었지. 마녀를 붙잡아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났었을지도 모르지. 물론 애먼 여자들을 잡아다 마녀로 몰았다고도 믿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신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 신은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언한 순간에, 사람들이 그 선언을 따라 읊조린 순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신을 잃었고….”
토머스 트웨이츠는 로트만의 우스꽝스러운 장광설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로트만은 수십 년간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고 그래서 자신의 손을 스쳐간 모든 책들을 믿었다.
“몰라. 이상하게 마음이 벅차오르더라고. 토스터 프로젝트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거창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녀서 그런지도 모르지.”
토머스 트웨이츠는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남을 깔아뭉갤 생각 따위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토머스 트웨이츠가 다시 말을 이었다.
“로트만의 말을 듣고 나니까 거기 있는 오래된 책들이 좀 다르게 보였어. 먼저 산 사람들의 삶과 말이 압축된, 거대하고 숭고한 무덤처럼 보였다면, 뭐 물론 과장이겠지. 그렇지만 한번쯤은 로트만처럼 그들이 한 말을 믿고 그 말에 따라서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싶더라고.”
토마스 트웨이츠가 입맛을 다셨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럼 책에 따라서 한번 살아 보는 건 어때? 책을 믿고 책에 따라서 책을 재현하면서 사는 거지.”
“무슨 책?”
“글쎄.”
나는 멀뚱히 토머스 트웨이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했는데, 무슨 책을 따라 살아야 할지 고르려면 신념 같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 뭐 그런 것일 텐데, 그것조차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거대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것, 다만 우연적인 것. 그런 것밖에 없지 않나.
“로트만 헌책방에 가서 눈을 감고 거기 있는 책들 중에서 아무 책이나 고르는 건 어때? 그리고 그 책에 따라서 사는 거지.”
그리 깊이 고민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말을 뱉고 보니 그게 또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토머스 트웨이츠도 같은 느낌인 듯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손바닥을 내밀었는데, 뭐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서둘러 로트만 헌책방으로 갔다. 로트만은 헌책방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안경을 코에 걸치고 책을 읽으며 졸고 있었다. 나는 로트만을 십 년 만에 보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때보다 조금도 늙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백 년 전부터 혹은 이백 년 전부터 내내 저 얼굴로 헌책방을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자, 가 볼까?”
토머스 트웨이츠와 나는 눈을 감고 더듬더듬 책장을 더듬으며 각자의 운명이 적힌 책을 찾았다. 점자를 읽듯이 손가락 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책등을 쓸어 만졌다. 뻣뻣하고 눅눅하고 성기고 단단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면서, 또 비에 젖은 박스나 콧물이 묻은 휴짓조각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냄새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나의 미래를 감각해 보려 애썼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골랐어?”
토머스 트웨이츠가 물었다. 딱히 뭘 고른 건 아니었지만 뭘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손에 걸린 책을 고른 걸로 하기로 했다.
“골랐어.”
“그럼, 이제 눈 뜨는 거다. 하나 둘 셋.”
우리는 눈을 떴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토머스 트웨이츠는 이내 자신이 고른 책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가 고른 책은 『알프스의 염소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이었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펼쳤다. 광활한 알프스 목장에서 풀을 뜯는 염소들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다. 알프스의 염소라, 그러고 보니 토머스 트웨이츠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린이 책 코너였다.
“넌 뭐야?”
토머스 트웨이츠가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내가 고른 책을 들어 보였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침을 뿜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음, 불길한 반응이군. 어디 보자, 나는 내 손에 들린 책을 쳐다보았다. 그 책은 그러니까… 『아기 똥의 여행』이었다.


13) 토머스 트웨이츠는 『알프스의 염소들』을 성경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토스터 프로젝트에 이은 염소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었다. 골치 아픈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 알프스 목장을 누리는 염소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토머스 트웨이츠는 염소 목장과 수의대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염소의 해부학적 특성과 생태를 조사했고, 염소의 관절 구조를 모방한 의족을 제작하겠다면서 의료기기 업체와 협업을 시작했다. 또 알프스에 있는 염소 목장들에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메일을 보냈으며, 염소 프로젝트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받기 위하여 프로젝트 계획서를 쓰고 서류를 떼러 다녔다. 그가 염소로 변신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아기 똥이 되기 위하여 똥의 구성 성분을 연구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를 똥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장의학과와 식품영양학과의 자문을 받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기 똥이 되어서 변기를 타고 내려가 정화조에 머물렀다가 오수 처리장을 떠도는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의미가 사라진 이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인 ‘우연’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똑똑히 알아듣기는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말씀 해 달라고? 이상적인 삶이 뭐고, 네 존재의 의미는 또 뭐냐고? 그건 바로 똥이란다! 뭐 이런 식으로 날 우롱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아?”
나는 염소 의족을 팔에 끼고 나타난 토머스 트웨이츠에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똥이 되어 보라고는 나도 차마 못 하겠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염소 의족을 낀 손을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근데 소설을 쓸 수는 있잖아. 로트만 헌책방에서 네가 눈을 감고 고른 책이 『아기 똥의 여행』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면 어땠을지 말이야.”
토머스 트웨이츠는 염소 의족에 정신이 팔려서 건성건성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런데 책을 재현하는 삶을 사는 인물에 대한 소설이라, 나쁘지 않은 것 같네. 다음 날 나는 다시 로트만 헌책방을 찾았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어린이 책 코너를 피하려 책방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가 책 먼지가 콧구멍을 간질여 재채기가 나왔을 때, 에취,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책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고른 책은 김우중이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였다. 맙소사.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글로벌 경영인이 되자고 세계를 떠돌면서 탱크 같은 세탁기를 만들어 팔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 지금 세계 경제 상황이 탱크 같은 세탁기를 팔아서 성공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아하 망하는 것까지 자동으로 재현이 되는 건가. 나는 재빨리 책을 도로 꽂아 넣고 손을 털었다. 손을 털면 방금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고 책장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홍정욱의 『7막 7장』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이제 와서 하버드라도 가라는 건가, 아니면 아버지를 영화배우로 만들라는 건가. 나는 책을 아무렇게나 밀어 놓고 또 손을 털었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책을 뺐다 꽂기를 반복해서 내가 고른 것은 『어린 왕자』, 『가시고기』, 『개미』 같은 책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바닥이 얼얼해서 더 이상 책을 뽑을 수 없어졌을 때 나는 허탈하게 책방을 나왔다.
그날 밤 나는 토머스 트웨이츠와 로트만 헌책방에 가는 꿈을 꾸었다. 어제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더 나누었고 다시 또 눈을 감고 책을 골랐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이번에도 『알프스의 염소들』을 골랐다. 그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면서 기뻐했고 팔과 다리를 반으로 접어 사족보행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그는 한 마리 건강한 염소가 되었고, 음메, 하고 기운찬 울음을 토해내며 책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토머스 트웨이츠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러니까 경쾌하게 춤추는 그의 작은 꼬리를 보면서, 내가 고른 책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래서 그게 뭐였는데?”
토마스 트웨이츠가 물었다. 염소로 한 달 살기를 위해 알프스 목장으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는 길이었다. 꿈에서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은 일기장이었다. 검정색 비닐 표지가 덮인, 클래식한 디자인의 일기장. 그러니까 나는 일기장에 적힌 대로, 일기장을 따라서 살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트웨이츠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는 옥수수수염으로 만든 염소 가죽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일기장이라, 그걸 어디서 구하지?”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나는 가방에서 검정색 비닐 표지가 덮인 일기장을 꺼냈다.
“뭐야? 어디서 구한 거야?”
토마스 트웨이츠가 눈을 부릅뜨고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놀라는 거야? 알파문구에서 샀어. 뭐, 드림디포에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게 단순한 일기장이 아니라 셀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장치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들어 봐. 소설을 쓰려면 일단 일기장을 소설 속으로 던져 주어야겠지. 그러려면 이 일기장부터 채워야 할 거고. 여기서 나는 일기를 쓰고 저기서 나는 일기장을 줍고 일기에 적힌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삶을 사는 거지. 그렇게 내 삶은 두 번 반복되는 거야. 현실에서 한 번, 소설에서 또 한 번. 소설의 구성에 따라서는 영원히 반복되도록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내 삶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거야. 말하자면 영원회귀랄까.”
“영원회귀라고? 그게 구원이라는 거야? 영원회귀가?”
“그거야 당연하지.”
나는 검정색 비닐 표지 일기장을 쓰다듬었다. 이 일기장을 성경 말씀처럼 끼고 다닐 소설 속 나를 생각하니 기분이 야릇했다.
…그래서 영원회귀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 되었냐면, 잘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잘되지 않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계획대로 나는 일기를 계속 썼지만, 소설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일기는 여전히 연재 중이어서 완결된 삶을 보여 주지 못했고, 완결되지 않은 일기장을 헌책방에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14) 지난 실패담을 끄집어내서 주석 노트를 쓰다 보니 점차 실패에 중독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나도 바틀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남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중얼거리다가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자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아이디어를 하나 던졌다. 지금까지 쓴 주석 노트를 제본해서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브라우티건 도서관이요?”
“네.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출간되지 않은 원고만을 소장하거든요.”
엔리께 빌라 마따스는 그렇게 말하고 피에르 바야르의 허벅지 아래에 깔린 자신의 다리를 꺼내 주무르면서 코에 침을 발랐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또 다시 내 침대 발치에 꾸깃꾸깃 앉아 있었다. 자꾸만 좁은 침대 위로 불러들여서 미안했지만, 엔리께 빌라 마따스의 제안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소장된, 실패한 종잇장들 사이에 내 주석 노트를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는 당황한 듯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미래 유령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피에르 바야르가 무릎을 세워 앉으면서 말했다.
“어떻게요?”
“그러니까 주석 노트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요. 지금은 당신 영혼이 노트에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미래 유령이 노트를 들여다보기 힘들고 당신에게 말을 걸기도 힘들죠. 반면에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말하자면 유령들이 떠돌기 좋은 곳이죠. 잠재적이고 유령적인 가능성들이 고여 있는 장소니까요. 유령들 틈에 당신 원고를 던져두고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다시 가 보면, 원고 사이에 미래 유령들이 메모를 끼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다음번에 진짜 대단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요.”
“바로 그거예요. 그게 브라우티건 도서관의 존재 이유죠.”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덧붙였다.
우리는 밤새 좁은 침대에서 자세를 몇 번이나 바꿔 앉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있었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버몬트 주 벌링턴 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벌링턴 시에서 브라우티건 도서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링턴 시는 인구가 몇만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석 노트 세 권이 제본되어 있는 트렁크를 들고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갔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의 사서는 바이다라는 여자였는데, 해사한 얼굴로 커다랗고 둥근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바이다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출간되지 못한 원고를 껴안고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도서관에는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출간되지 못한 원고의 저자들은 간절한 혹은 이미 패배한 얼굴로 자신이 쓴 원고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바이다는 그 말을 곰곰이 듣고는 두꺼운 장부에 원고의 제목과 저자를 적었다. 그러고 나면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서가에 원고를 꽂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더벅머리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은 남자 뒤에 줄을 섰다. 그는 갓난아기를 안듯이 자기 원고를 살포시 안아 들고 있었는데 그는 아마도 워터멜론슈가 같은 데서 송어낚시를 하고 온 것 같았다. 그에게서 비린내가 은은하게 풍겨서 나는 숨을 아껴서 쉬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려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책을 보관할 자리는 없을 거요.”
그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지저분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보시다시피 책장이 꽉 찼으니까요. 내 책이 마지막일 겁니다. 더 이상은 받지 않아요.”
나는 까치발을 들고 책장을 훑어보았다. 금방이라도 원고 더미를 토해낼 듯이 책장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시죠? 도서관에서 그렇게 안내를 했나요?”
나는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도서관에는 바이다 외에는 도서관 직원이라고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안내를 하지는 않았지만,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거요. 믿을 만한 데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누구한테서 들었는데요?”
“유령들한테서.”
“유령들이요?”
“그렇소. 저기 화장실 뒤쪽, 저기에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오.”
“교차통신 기계라면….”
나는 기억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는데, 워터멜론슈가에서 송어 낚시를 하고 온 남자는 고개를 까딱하고 더 이상의 친절은 베풀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그러니까 교차통신 기계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두 세기 전에 영국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기계인데, 그 기계를 사용하면 자동기술기법으로 유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죽은 사람들을 이 땅에 부활시키려고 했다면 영국의 지식인들은 죽은 사람들이 있는 저 세계에 가닿고 싶어 했다. 여기에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고? 나는 목을 쭉 빼고 화장실 뒤쪽을 쳐다보았으나 시야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 원고를 받아 줄 자리가 없다니, 그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출간되지 않은 원고라면 그 어떤 원고라도 받아 주는 것이 운영 원칙이니까.
“죄송하지만 더 이상은 원고를 받을 수 없어요. 보시다시피 도서관이 폭발 직전이거든요.”
바이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워터멜론 송어 남자는 곁눈으로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원고를 들고 서가를 누볐다.
“그럼 어쩌죠?”
“브라이티건 도서관은 이제 온라인으로 운영될 거예요. 도서관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면 온라인 공간에 저장될 겁니다.”
바이다는 나에게 도서관 이메일 주소가 적힌 작은 종잇조각을 건넸다. 그러나 온라인은 유령들이 거주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지 않나. 온라인에 저장된 원고에 미래 유령들이 무슨 수로 메모를 남기나. 고작 이메일 주소를 받자고 미국까지 날아왔다니.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바이다에게 뭐라고 따질 수는 없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바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에 줄을 선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말한 것과 동일한 안내를 했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말을 다시 한번 들었다. 워터멜론 남자가 후련한 얼굴로 서가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안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화장실 뒤쪽, 그러니까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듯이 가리키고는 얄밉게 멀어져갔다. 이제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교차통신 기계를 써 보는 수밖에. 미래 유령이든 과거 유령이든 누구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수밖에.
교차통신 기계는 전화박스 같은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얼핏 사각형 금고처럼 보였는데, 금고 맨 위에는 긴 자 같은 것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철제 피아노선 같은 것이 반원형으로 달려 있었으며, 본체에는 알알이 뜯어낸 키보드 자판 같은 것이 사열 횡대로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쓰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 워터멜론 남자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고,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바이다와 눈이 마주쳤다. 바이다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낸 것 같은 얼굴이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바이다를 제외하고는 딱히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건 교차통신 기계가 아니에요.”
바이다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럼 뭐죠?”
“타자기에요. 빈티지 타자기죠. 폴 오스터가 사용했던 거랍니다.”
나는 교차통신 기계를, 아니 폴 오스터가 사용했다는 빈티지 타자기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락없이 타자기처럼 보였다.
“폴 오스터가 이걸로 소설 속 캐릭터들의 영혼을 불러냈으니까 교차통신 기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바이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를 달래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바이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이것은 교차통신 기계가 분명하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워터멜론 남자가 내 원고가 보관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데. 나는 바이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땀방울은 바이다가 닦아 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솟아올라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아마 바이다의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까 폴 오스터는 교차통신 기계를 타자기로도 썼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많은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 폴 오스터는 교차통신 기계에 손을 얹고 유령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썼을 것이다. 마치 필경사처럼. 그 순간 바이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바이다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말했다. 나는 바이다가 몸을 내게 기댈 수 있도록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병원에 전화 좀 해 주세요!”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완성되지 못한 원고의 저자들을 향해 외쳤다.
“자, 천천히 심호흡을 해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바이다와 함께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흐읍, 산소를 들이마시고, 후우,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흡입한 산소는 혈액을 타고 돌아 뇌세포에 도달했고, 활력을 되찾은 뇌세포는 내게 명령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면 교차통신 기계를 들고 얼른 도서관을 빠져나가. 그러니까 바이다가 아기를 낳는 동안 너는 소설을 끝내는 거지.


1)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민속원. 56쪽.
2) 살만 루슈디, 『조지프 앤턴』. 문학동네. 13쪽.
3) 조 브레이너드, 『나는 기억한다.』 모멘토. 252쪽.
4)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은행나무. 12쪽. 23쪽. 77쪽.
5)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워크룸. 168쪽. 131쪽.
6) 레몽 크노, 『문체 연습』. 문학동네. 165쪽.
7) 안토니오 타부키, 『수평선 자락』. 문학동네. 45쪽.












이상희
작가소개 / 이상희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래빗쇼>로 등단을 하였는데, 그리고 뭘 소개해야 하나, 아, 지금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을 소개하겠습니다. 가제는 <애도 일기>로, 존재했다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에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제 3의 종류에 나름의 방식으로 속합니다, 라는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의 대사로 시작되고요, 지금으로서는 이것이야말로 소설인 기분이고요, 제법 상당히 재밌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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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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