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숙희의 미래

  • 작성일 2023-08-25
  • 조회수 1,387

숙희의 미래

김본


   속도위반

   미래 씨가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을 무렵, 미래 씨의 삶에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자동차를 마련한 것. 다른 하나는 엄마의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미래 씨의 이름은 미숙이었다. 당시에는 미숙이나 영자 같은 이름이 흔했다. 미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수나 탤런트가 있었더라면 미래 씨도 자신의 이름을 ̄어쩌면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미숙이었던 미래 씨는 가수도 아니었고 탤런트도 아니었고 심지어 예술가나 아나운서도 아니었다. 미래 씨가 태어나기 전 엄마와 아버지는 미숙과 미정과 미자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미래 씨는 셋 다 거기서 거기인데 어째서 고민했을까 궁금했다. 미숙이 아니라 미정이나 미자가 되었다고 해도 똑같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정이나 미자였어도 미래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시절의 미래 씨는, 다가올 미래에 미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숙은 이름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다. 요즘에는 서연이나 민서 같은 이름이 많다. 그 이름들의 어떤 부분이 그것들을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숙이나 영자보다는 확실히 세련된 이름들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세련됨을 미래 씨가 아니던 시절의 미숙은 동경했다. 동시에 미숙은 평범한 이름을 동경했다. 평범한 이름은 세월이 지나도 튀거나 질리지 않았다. 미숙이라는 이름은 유독 촌스럽게 느껴졌다. 미숙은 언젠가 개명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고를 수 있다면 중성적인 이름이 좋았다. 선우나 지호 같은 이름들, 남자들도 쓰는 이름들. 몇 가지 후보가 있었다. 선우, 정아, 이현, 정완. 그러나 어떤 것도 자기 이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이름으로 바꾼들 주변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숙이라고 불릴 것만 같았다.

   결국 그 시기에 미숙은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 어떤 이름을 택하는 게 좋을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방법원에 가기로 마음먹은 날 엄마가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당뇨 합병증이 사람의 몸을 서서히 좀먹는다는 걸 미숙은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의 몸은 다쳐도 다시 새살이 돋아나지 않았다. 회복도 매우 더뎠다. 엄마는 평소에는 죽은 듯이 잠만 잤고, 일어나 있는 시간에는 가만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이따금 미숙을 불러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부축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엄마는 정신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이불이나 바닥에 대소변을 지리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자랑거리 삼았다. 자랑거리 삼았다, 라는 말은 미래 씨를 울게 만든다. 미숙은 엄마의 자랑거리였으니까.

   이제 와서야 미래 씨는 당뇨가 엄마의 첫 징후였고, 모든 것이 그 병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엄마의 몸을 잠식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그걸 막을 수 있었을까? 당사자인 엄마도 막지 못했는데 엄마와 피와 살로 분리된 미래 씨라고 무슨 도리가 있었을까? 엄마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미래 씨는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할 수 있었다.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면 가슴팍 중앙, 피부가 가장 얇고 만지면 곧바로 뼈가 만져지는 곳을 송곳으로 쿡 찌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는 이십 년이 넘었다. 슬픔은 찰나였고, 미래 씨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게다가 엄마가 죽어 가던 시절보다 죽은 지금이, 더 좋은 삶은 아니지만 적어도 더 나쁜 삶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은 종종 엄마가 보고 싶었다.

   미숙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의 수발을 도왔다. 어차피 그만두려고 했어. 과장 꼴 보기 싫어서. 미숙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생활은 단숨에 궁핍해졌다. 백수였던 남동생과 ̄동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백수였다 ̄번갈아 가며 엄마를 한의원에 데려가고,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실로 부축을 했다. 미숙은 삶이 점점 닳아 가는 것을 느꼈다. 엄마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위해 이만 엄마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엄마가 영영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그러다 돌아보면 동생이 미숙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엄마의 퉁퉁 부은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미숙은 동생의 코를 후려쳐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기도 했고, 그 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꽉 껴안으며 함께 울고 싶기도 했다.

   미숙의 유일한 외출은 동생이 집에 있는 날 새로 산 자동차 ̄빨간색 프라이드였다 ̄를 끌고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이었다. 미숙은 홀로 프라이드를 몰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곤 했다. 처음에는 한 바퀴, 그다음에는 두 바퀴, 그다음에는 열 바퀴도 돌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돌아왔다. 그날도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기의 끝까지 질주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한 경찰이 미숙의 차를 세웠다.

   속도위반하셨습니다.

   앳된 얼굴의 순경은 미숙을 흘깃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미숙은 벌금을 내거나 면허가 정지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무엇보다 드라이브를 나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싫었다. 아저씨, 저 진짜 처음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미숙은 저도 모르게 애교 섞인 말투로 부탁했다. 미숙은 이런 태도가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벌금을 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모자 아래로 그늘진 경찰의 멀끔한 얼굴이 미숙을 향했다. 잠깐의 침묵 동안 미숙은 후회했다. 뻘쭘해진 미숙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헛기침을 했다. 미숙을 가만 보던 순경은 벌금 종이에 뭐라고 휘갈겨 쓰더니 그것을 단번에 뜯어 미숙에게 건넸다. 건네받은 종이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미숙은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거기에는 경찰서의 주소와 기울어진 숫자 열 개가 적혀 있었다. 미숙은 순경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순경이 뻘쭘한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는 이미 가지런한 모자를 고쳐 쓰고는 말했다.

   거기 적힌 주소로 커피 사 오면, 벌금 안 받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모자 아래 순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미숙은 순경을 향해 슬며시 미소를 짓고 차를 출발시켰다. 외곽도로를 향해 매끄럽게 굴러가는 차 안에서 미숙은 방금 자신이 무언가를 지나쳐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그저 톨게이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어느 한 시기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훗날 이날 밤에 대해서, 이날 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던 무언가를, 그 건네받음의 순간을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숙희 1집

   숙희는 가수이다. 아니, 실은 가수였다. 홑꺼풀의 삼백안을 가진 숙희의 얼굴은 평범했고 숙희가 만든 음악들도 그만큼 특색이 없었다. 숙희의 1집 제목은 《지하세계의 희죽거림》이고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제목은 《지하세계의 멜랑꼴리》였으나,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작업실 동료이자 작곡가인 료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이름에 멜랑꼴리라는 어휘를 들먹이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지하세계의 멜랑꼴리》같은 제목은 겉멋 든 인디밴드가 내자마자 사라진 앨범의 제목 같다고 비난했다. 숙희는 그러는 너야말로 일본인도 아니면서 료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료는 재료의 료를 썼다 ̄더 웃기고 망할 인디밴드 같다고 쏘아붙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크게 다퉜고, 그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숙희의 1집 발매 시기는 한 달여나 더 미뤄졌다. 앨범에 들어갈 총 여섯 곡의 노래 중 네 곡을 료가 작업했을 뿐만 아니라, 타이틀곡은 아니지만 타이틀곡만큼이나 비중이 큰 노래가 아직 작업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료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숙희는 그때 망할 예술가가 아니라 이미 망한 예술가라고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숙희는 언제나 뒤늦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그게 억울해서 숙희는 이건 부당해, 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부당하다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건 부, 부··· 하고 더듬거리다가 부조리해, 하고 내뱉었다. 그저 부당하다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가장 비슷한 단어를 고른 것인데 어쩐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한 것 같아 스스로가 좀 창피해졌다. 숙희는 소파에 누워서 계속해서 부당하다, 라는 단어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부조리하다와 비슷한 그것, 이라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숙희가 계속 부, 부··· 하고 있자 숙희가 누워 있던 소파 옆에서 엄마가 빨래를 개다 말고 말했다.

   너 부조리가 뭔지 알어?

   부당하다랑 비슷한 말 아냐?

   그렇게 말하고 숙희는 부당하다, 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것에 놀라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너 까뮈 안 읽었어?

   뭔 내용인데?

   부조리.

   아니 줄거리가 뭐냐고.

   그냥 부조리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마저 갠 빨래를 옷장에 넣어 두러 자리를 떴다. 숙희는 엄마도 까뮈 안 읽었나 보네, 하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숙희의 1집은 영영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숙희와 료는 화해했다. 내심 료가 작업실을 빼면 보증금과 월세를 혼자 감당해야 할까 봐 불안했던 숙희는 료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척했다. 숙희는 료에게 1집이 잘되면 2집 역시 잘 부탁한다고 말했으나 2집을 낼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숙희는 이렇게 말할 때마다 그것들이 정말 자연스러운 것인지 의문스러워지곤 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져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이전 같지 않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먼 훗날 숙희의 2집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을 때, 료는 언젠가의 밤에 ‘숙희. 2집 발매를 축하한다. 다음에 시디에 사인이라도 부탁해’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숙희는 그가 먼저 연락을 하다니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차오르는 의문, 어쩌다가 료와 이런 사이 ̄연락하는 것도 어색할 정도의 사이 ̄가 되었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으면서 뻔뻔스럽게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고작 사인 시디를 부탁하는 일이라니. 좀 짜증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연락을 하지 않은 건 자신도 매한가지이고, 그가 축하한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풀어졌다. 숙희는 ‘그래, 다음에 볼 때 줄게’라고 답장했다. 물론 그 후로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었고, 숙희가 료에게 2집 사인 시디를 주는 일 또한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숙희는 그보다 더 먼 훗날 그 문장을 떠올렸다.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었으나 숙희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저 영영 일어나지 않은, 확률 제로의 상황이 되어버린 삶의 여러 국면을 떠올렸다.


   시티팝

   본래 미숙은 그런 뻔한 수법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런 종류의 귀여운 대시를 여러 번, 아마도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미숙은 그들과 쉽게 만남을 가지거나 하는 종류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건 대시를 하던 남자들이 영 미숙의 마음에 차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고 곧바로 따라가는 게 민망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숙이 도도하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미숙은 벌금을 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 순경을 찾아가질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난 싸가지가 없었거든. 후에 미숙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미숙은 쪽지가 집 안을 굴러다니도록 내버려 뒀다. 그러다가 여느 때와 같이 엄마를 화장실로 부축해서 변기 위에 앉히고 엄마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화장실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동안, 그 쪽지를 발견했다. 그날 입고 갔던 코트 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었다. 미숙은 쪽지의 정체에 대해 한참 생각해야 했다. 그 일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순경의 붉어진 얼굴을 떠올리고 나서도, 쪽지에 적힌 주소가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미숙은 경찰서에 찾아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미숙은 쪽지를 그대로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러나 엄마의 몸을 씻기고 다시 이불 속에 옮겨 놓은 후, 담배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충동적으로 쪽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다. 그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니고, 정말로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나 가까운지 알고 싶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찾아가지 않은 건 너무 심한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정말로 아무런 의도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간 것이기도 했다.

   쪽지에 적힌 주소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동네 파출소 ̄에 도착했을 때 미숙은 망설임 없이 투명한 경찰서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서는 한가했고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경찰이 몸을 반쯤 일으켜 무슨 일로 찾아오셨냐고 물었다. 미숙은 잠시 멀뚱히 거기에 서 있었다. 그곳에 어쩐 일로 방문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 안쪽 문을 열고 그 남자, 미숙에게 되지도 않는 작업을 걸었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미숙은 아, 하는 소리를 내었고 작업을 걸었던 순경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미숙을 보고 똑같이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순경은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미숙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역시 미숙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이었다. 미숙의 앞에 선 그는 그때처럼 붉어진 얼굴로 이미 가지런한 모자를 바로 쓰고 헛기침을 한 후 밖으로 나가지 않겠냐고 정중히 물었다. 미숙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본래 미숙은 남자에게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는 종류의 여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솟아나는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상기된 표정을 보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졌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미래 씨는, 그런 종류의 충동이 지금의 삶까지 자신을 이끌었다고 느꼈다.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은 앞만 보며 한참을 걷다가 ̄미숙은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따라갔고, 한참 따라가다 그 역시 미숙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면서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순경이 불쑥 말했다. 저도 그래요. 미숙이 답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목적지 없이 걷다가 다시 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다. 순경은 아까보다 더 시뻘게진 얼굴로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집에 바래다줄 줄도 모르는 남자의 상기된 얼굴을 본 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진짜로 커피 사 올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종종 만났다. 미숙은 엄마를 재우고 난 후 담배를 사러 나오면서 늘 그를 만나러 갔는데 그럴 때마다 서 일대를 한 바퀴, 때로는 몇 바퀴씩 돌다가 담배를 살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다음에는 꼭 사야지, 하다가도 그를 만나러 가면 또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그렇게 요상한 이유로 금연을 하게 된 미숙은 얼마 지나지 않고부터는 차를 끌고 그를 데리러 갔다. 처음 미숙의 차를 탄 날, 순경은 웃었다. 왜 웃냐고 묻자 순경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이 차를 타게 될 줄은 몰랐네요.

   두 사람은 때가 탄 미숙의 새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한강 일대를 돌다가, 한적한 곳에 멈춰 볼품없는 야경을 바라보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차에는 재떨이만 놓여 있을 뿐 담배꽁초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찾아가지 못할 한강의 어느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길바닥에 나란히 앉았을 때, 저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어딘가의 상점이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묵직하거나 클래식한 맛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경박하고 가볍게 들리는 멜로디가 여러 겹 겹쳐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겹쳐짐의 상태가 아주 감미롭게 들렸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멜로디에 미숙은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티팝이네요.

   순경이 불쑥 말했다. 미숙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숙을 마주 보거나 하지 않고 앞만 보며 언제나 그렇듯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시티팝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얻은 부로 쌓아 올린 도시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미숙은 그런 건 몰랐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다. 갑자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따위의 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러기엔 노래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너무 좋네요. 따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순경은 서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콧소리를 섞어 아주 나직이. 거의 들리지 않게. 노래는 멀어지지 않았고, 그렇다면 누군가의 움직이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아닌 듯했다. 그냥 거기에 멈춰 서 있는 소리인 듯했다.


   궤도

   숙희의 1집과 2집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숙희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생활을 지탱할 만한 힘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숙희 스스로 음악적인 원천이 바닥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지금도 숙희는 그것이 정말 고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메마른 땅에 귀를 대고 있다가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곡괭이로 대지를 내리쳐서 마침내 솟구치는 폭포를 발견한 사람처럼, 음악적인 영감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영감의 샘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사 그것이 아무리 깊다 한들,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에는 그 영감이라는 게 한정적인 자원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희는 별다른 출구를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더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기를 포기했다.

   그 이후 숙희는 여러 일들을 했다. 마트 캐셔, 시식코너 직원, 학원 청소부, 시내버스 기사, 맞춤 정장만을 취급하는 양복점의 조수, 여성안전귀갓길 도우미, 버블티에 들어가는 타피오카 펄을 삶는 제조원까지. 2집을 만들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한 일은 미장 작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집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이기도 했다.

   숙희는 본래 직업이란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음악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도 숙희는 별달리 실망하지 않았다. 음악은 좋아했지만 음악을 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폼 나진 않았고, 그저 불행하고 가난한 예술가인 척하는 것 ̄실제로 숙희는 불행하고 가난했지만 또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그렇게 불행하고 가난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것이 숙희를 못 견디게 했고, 그 못 견뎌 한다는 사실이 또다시 숙희를 못 견디게 했다 ̄에 익숙해지기만 했다. 마침내 음악을 만드는 걸 그만두고 집에서 가까운 대형 마트의 캐셔로 일하게 되었을 때는 어떤 안도감마저도 느꼈다. 종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을 하고 나면 숙희에게는 노동한 만큼의 임금이 쥐어졌다. 터무니없는 액수였지만 음악을 할 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런 종류의 단순 노동이 나오지도 않는 ̄혹은 않을 ̄결과물을 기대하며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덜 우아하고 고상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건 그들의 착각이다. 오히려 단순 반복 작업이 시간 대비 훨씬 생산적이었다.

   다 거기서 거기지만 말이다. 숙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트에서 발행한 멋없는 ̄특별히 레트로하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은 ̄메모지에 그 말을 적었다. 전부 다 거기서 거기. 그리고 그 종이를 찢어 마찬가지로 멋없는 유니폼 조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음악을 만드는 일을 그만둔 뒤에도 뭔가 획기적이거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면 언젠가 써먹을 순간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받아 적는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것들을 획기적이고 참신하다고 느끼는 것이 순전히 숙희 혼자만의 감상인지, 실제로 획기적이고 참신한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쑤셔 넣었던 종이는 직원들의 유니폼들이 섞이는 과정에서 분실하고 말았다. 높은 확률로 쓰레기통에 들어갔을 메모의 내용을, 그러나 숙희는 잊지 않았다. 잊지 않고 종종 곱씹었다. 심지어 숙희는 그것을 자주 곱씹다 못해 습관처럼 내뱉기도 했다. 숙희의 주변인들이 그 말의 자조적이고 불운해 보이는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한 나머지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후에 그 메모는 2집의 제목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원형이 된다.

   2집 앨범의 커버에도 비슷한 내용의 쪽지가 있다. 물론 그것은 과거에 숙희가 진짜로 써서 조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가 보관해 온 쪽지가 아니다. 그건 숙희가 나중에 자취방 계약을 위해 방문한 동네 부동산에서 비슷해 보이는 메모지를 한 장 뜯어 기억에 의존해 휘갈겨 쓴 것이다. 원본이 사라졌어도 그 문장은 숙희의 뇌리에 또렷이 남았다. 그것은 계시나 영감 무엇도 아니었고, 그냥 숙희가 하도 중얼거려 입버릇이 되는 바람에 기억에 남은 것뿐이었다.

   부동산의 진흙색 소파에 앉아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숙희는 그것을 겉옷 주머니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쑤셔 넣었다. 그것이 원래의 것과 온전히 똑같지 않더라도, 숙희 외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상관없었다. 에이, 됐다.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 말은 또한 수록곡 중 하나인, 숙희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짧은 노래, 〈전부 다 거기서 거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숙희는 노래를 아주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정은 흔들리고 발음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기타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오히려 숙희의 ‘망한 인디밴드’ 같은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고, 실제로도 망한 전적이 있었던 탓에 숙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노래를 좋아했다. 찌질하고 멋없는 노래라고 숙희는 생각했다. 그리고 숙희의 노래를 듣는 많은 사람들도.

   2집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타이틀곡은 〈우리 함께 미래를 도모하자〉이다. 누군가는 그 노래를 줄여 ‘우함미도’라고 불렀지만 숙희의 모든 팬 ̄이라고 해 봤자 소수의 사람들 ̄이 그런 별명을 즐기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치고 돌아다니다가 그 제멋대로의 ̄그러나 어쩐지 미묘하게 잘 줄인 것 같은 ̄줄임말을 접한 숙희는 홀로 우함미도, 우, 함, 미, 도,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 어감이었다. 아주 소수인 숙희의 팬 중 다수가 그 제목을 좋아하고, 그것을 제멋대로 줄여 말하고 있단 사실은 숙희를 아주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숙희가 그 노래를 만들고 처음에 붙였던 제목은 〈미래 다음에 올 미래〉였다. 그러나 그 제목을 들은 주변인들 ̄이라고 해 봤자 숙희보다 더, 혹은 덜 망한 인디밴드들 ̄은 모두 완곡하게, 혹은 완고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숙희는 노래의 제목을 〈미래 다음에 도래할 미래〉, 줄여서 〈미다도미〉라고 붙였는데 이번에는 이전에 완곡하게 반대하던 사람들까지도 전부 완고하게 부탁했다. 제발 노래에 그런 제목을 붙이지 마. 그리고 그걸 줄이는 건 더더욱 하지 마. 숙희는 어쩐지 고집을 부리고 싶었지만 곧 관두었다. 그런 고집을 부리기에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는 가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뭐, 어지간히도 구린가 보지. 그러니까 다들 반대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숙희는 ‘미래’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 단어가 아주 중요한 노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평소에 유달리 집착하거나 애정을 느끼는 단어도 아니었는데도 ̄꾸역꾸역 미래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새로운 제목을 지었다. 이번에도 주변인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만 전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숙희는 용기를 얻어서 덜컥 음반을 내버렸다. 숙희는 어쩌다 이렇게 음악에 사활을 걸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돌이켜 보면 오랜 생활고와 고갈된 영감에도 숙희가 예술 활동을 재개하도록 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그저 충동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여섯 개의 곡만 수록된 1집과 달리 2집에는 타이틀곡을 포함한 열세 곡이 실렸다. 그것들은 숙희의 일기장이나 어디서 공짜로 얻은 메모장에 휘갈긴 낙서들과 가사도 없이 핸드폰에 녹음해 둔 흥얼거림을 모은 결과물이었다. 숙희는, 이런 식으로 평생을 모아도 무언가 뜻깊고 의미 있는 작업물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날들, 절망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런 날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숙희의 손에는 2집이 들려 있었다. 숙희는 다가올 미래의 날들을 예상하지 못했던 이전의 날들을 떠올리며 자조적이고 불운해 보이는 그녀만의 특허 있는 말,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죄와 벌

   미래 씨가 아직 미숙이던 시절, 그녀는 온갖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들장미 소녀 캔디』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그리고 수많은 해적판들. 그런 것들을 어떤 순서나 질서도 없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대부분 미숙의 아버지가 헌책방에서 얻어 오는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베르사유의 장미』와 『작은 아씨들』, 『로빈슨 크루스』와 황미나, 『토지』와 『북해의 별』 같은 것들을 노끈으로 엮어 부지런히 날랐다. 그것들을 읽으며 미숙은 공책에 『캔디』와 『백조』의 주인공들을 그렸다. 공책은 앞에서부터는 여러 과목의 토막 난 필기가, 뒤에서부터는 일본 해적판 만화의 복제품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때 읽었던 것들 중에서 기억이 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읽었다’는 감각만이 남았다. ‘읽었다’는 감각에 활자가 빠져 있다는 것이 미래 씨를 불온한 감정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정말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므로, 미래 씨는 곧 그 불온한 감정마저 별것 아닌 것처럼 잊어버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것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이나 그린다는 거였다. 한참 역정을 내던 아버지는 씩씩대더니 그림을 빤히 쳐다보고는 공책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이런 건 또 뭣 하러 잘 그려가지고. 미숙은 요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칭찬도 아니고 경멸도 아니었다.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것도 같았고, 그것들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 같기도 했다. 미숙은 그것의 정체를 영영 알지 못한 채 캔디의 복제품들, 복제품들의 복제품들을 딱딱한 지우개로 지웠다. 지우개에 묻어 있던 흑심이 공책에 얼룩을 남겼다. 미숙은 그 위에 또 다른 캔디의 복제품을 그렸다.

   어느 날 엄마의 방을 정리하다가 책과 책 사이에 껴 있던 공책이 먼지 뭉치와 함께 예고도 없이 툭, 미숙 앞에 떨어졌다. 먼지를 털어 내고 펼치자 그 안에는 똑같이 생긴, 그러나 조금씩 다른 캔디의 초상화 다발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둔 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미숙은 지금 그림을 그리는 것도, 대학 시절에 하던 공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 순간 자신의 처지가 못 견디게 사실적으로 다가와서, 미숙은 공책을 닫아서 책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때쯤 엄마의 정신은 이전 같지 않았다. 합병증을 막는 약은 독해서 그걸 먹으면 온종일 아기처럼 잤고, 깨어 있을 때도 허공을 흐릿하게 응시할 뿐 미숙을 똑바로 쳐다보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엄마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거나, 야단이나 호통을 쳐 준다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숙은 한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왜냐하면 그래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점점 이 삶에 지쳐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애써 떨쳐 내려고 노력했는데, 그건 마치 엄마에 대해 지쳐 가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경과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에는 엄마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밤의 도로를 달릴 때, 열어 둔 창문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바람에 묻혀 미숙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숙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시티팝을 흥얼거렸다. 그러고 나면 삶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면 여지없이 엄마는 흐릿한 눈과 미묘하게 뒤틀린 입꼬리를 하고 이불에서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어디론가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췄다는 듯이. 그러기 위해서 꿈틀거린 흔적이, 구겨진 주름이, 이불에 부질없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의 다리 사이와 이불이 오물로 젖어 있었다. 엄마는 몸과 입을 미세하게 떨며 미숙이 아닌 곳을 쳐다보았다. 미숙은 엄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안방에서 뛰쳐나갔다.

   남동생은 부엌 싱크대에 기대어 헤드셋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미숙은 헤드셋을 거칠게 벗겨 냈다. 남동생이 예상했다는 듯 왜, 엄마 실수했어? 하고 물었다. 미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것이 무책임한 남동생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남동생의 지친 얼굴을 보듬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누워서 어떻게든 홀로 화장실에 가 보려고 몸을 비틀었을 엄마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남동생이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미숙도 숨을 고르고 여전히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엄마의 양팔을 동생과 잡고 일으켰다. 화장실로 끌려가는 내내 엄마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아니 이미 언어도 아닌 그 무언가, 목을 비틀어 간신히 내는 소리들, 으, 아! 어어, 같은 소리를 냈다. 미숙과 남동생 그 누구도 쉽사리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는 상심한 듯 으어어, 하고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미숙은 그 소리를 들으면 여느 때보다도 서글퍼지고 눈물이 났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고 고무호스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뜨끈해지기를 기다렸다.

   화장실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이따금 엄마가 내는 소음에 가까운 탄식,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소리와 남동생의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역시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본어의 노래만이 들렸다. 남동생이 헤드셋을 목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는 꼭 남동생의 성대나 노래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동생은 그것을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그게 번안된 가사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붙인 가사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그러나 어째서. 사랑한 이후에는 이렇게 따끔한 것인지, 알 수 없느은 플라스틱 ̄러부. 음역대가 높은 여성 가수를 흉내 내느라 우스꽝스러운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면 어느새 엄마는 발음도 잘 되지 않는 노래를 으어어, 허, 하며 따라 불렀다. 그러면 남동생은 웃으면서 엄마와 하나도 맞지 않는 화음 ̄오로지 엄마가 목을 긁어 소리를 내고, 남동생은 가성을 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두 사람 다 깔깔대며 웃어버렸다. 미숙은 등을 돌려 그들과 함께 웃으며 기분을 풀 때도 있었고, 결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분노를 삭이며 노랫소리를 무시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그것은 말야, 플라스틱 ̄러 ̄부. 남동생이 과장해서 공연하듯 마지막 가사를 내뱉으면 엄마는 기분이 좋아진 듯 웃었다. 웃는 건 다른 말을 하는 것보다 쉬웠다. 미숙은 그 마지막 가사를 들으며 순경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을 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했던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털었다. 호스에서 나온 물이 어느새 따뜻해졌다.


   염소

   미장은 고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여느 노동이 그렇듯, 익숙해지고 나면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그러는 동안 숙희는 아주 많은 생각들을 했다. 대부분이 쓸모없고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모든 반찬을 국에 말아 먹고 토하던 옆자리 남자애. 혹은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멸감을 주던 육학년 선도부장. 수업 도중 교실을 가로질러 빈 우유갑을 버렸다는 이유로 꼴도 보기 싫다는 악담을 퍼부은 담임선생. 그런 것들을 털어놓았을 때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혼이 났겠지, 라던 엄마의 반응. 그런 기억들은 순서도 연관도 없었고 특별히 숙희에게 깊은 내상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반죽을 바르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순간에, 숙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밀쳐 내거나 고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했다. 토하던 남자애를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비난, 실내화 주머니를 두고 집을 나섰던 찰나, 앞으로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기로 결심했던 시간. 그런 선택과 결심은 대부분 이뤄지지 않았다. 숙희는 어째서 그런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르는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유를 알았더라면 애초에 떠올리지 않는 법도 않았을 테니.

   숙희는 몰랐지만 미장을 택하게 된 데는 외삼촌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컸다. 외삼촌은 숙희가 아는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인생이 예상한 것처럼 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외삼촌은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스크림콘에 끼운 종이 껍질을 씹어대고 있었다.

   숙희가 빤히 올려다보자 외삼촌은 종이를 오물거리며 왜,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숙희가 물었다.

   삼촌, 그거 왜 먹어?

   외삼촌은 턱의 상하좌우 운동을 멈췄다. 이거 먹는 거 아냐? 숙희의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는 황당하게 물었다. 너 그거 왜 먹어? 외삼촌은 삼 초 전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이거 먹는 거 아냐? 하고 물었다.

   외삼촌에 대한 기억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외삼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외삼촌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숙희가 열일곱이 되던 해,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무렵 숙희는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려 했으나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숙희가 소속감을 느껴야만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좀 외로운 일이었다. 외롭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을 실컷 저주하고 비꼬았지만 ̄“고작해야 학교 밴드부 주제에!” ̄그러다가도 ‘고작해야 학교 밴드부’에마저 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숙희를 좌절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밴드를 결성하려는 숙희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숙희는 기타도 피아노도 칠 줄 몰랐고 장기라고 한다면 기름기를 쫙 뺀 담백한 목소리가 유일했는데, 좋게 말해 담백하지 바꿔 말하면 특색 없고 평범하단 뜻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능이 부족했다.

   밴드를 결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숙희는 어릴 적 다녔던 성당의 성가대원, 마찬가지로 밴드부 오디션에 떨어진 동급생, 심지어는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때때로 묻는 말에도 무시로 일관하는 짝꿍에게까지 합류 제안을 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날라리 동급생들에게까지 물어보았다. 숙희는 내심 그들을 무시하는 한편으로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웠다. 그들은 수련회나 학교 축제에서 무대에 서는 것을 즐겼지만 그저 튀고 싶은 것뿐, 진지하게 음악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숙희에게 도움이 된 것은 그들이 유일했다. 그중 한 명이 건너 건너 디제잉을 하는 조용한 녀석 ̄숙희는 음침하다고 자동변환해서 받아들였다 ̄을 안다며 소개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료와 만나게 되었다. 숙희는 기대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왜냐면 지나친 기대는 언제나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들뜨는 마음은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완전히 실망했다. 료는 그저 멋으로 머리를 길러 로커 흉내를 낸 평범하고 말라빠진 고등학생 남자애였다. 료 역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고, 디제잉과 작곡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초보 수준이라고 고백했다. 그나마 허세가 없다는 게 료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두 사람은 학교 근처의 분식집에서 만났는데 떡볶이는 불어 터지고 어묵은 시뻘겋기만 하고 국물이 전혀 배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는 료의 물음에 숙희는 그게 말야, 어, 나는, 내가 밴드를 해 보려고 하는데···까지 얘기하고 스스로 천하의 머저리처럼 느껴져 입을 닫았다. 료는 “밴드를 하는 것은 유익한 생각이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는 이상 시작할 수가 없지 않아?” 하는 당연한 말을 충고랍시고 건넸다.

   그래, 니 말이 맞네. 숙희가 허망하게 대꾸했다. 그때 뜨거운 어묵 국물이 담긴 그릇이 료가 앉아 있는 쪽으로 미끄러졌다. 료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나트륨 섭취에 민감해서.” 숙희는 이런 놈이랑 밴드를 하느니 그냥 망하고 만다, 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그릇을 자기 앞으로 끌고 왔다.

   숙희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상심과 짜증, 실망과 경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료가 탐탁지 않기도 했지만, 료 외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아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숙희에겐 료가 최선이자 최악인 선택지인 동시에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숙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식탁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뭘 좀 먹었냐는 질문에 숙희가 뭐 대충, 하고 대답하자 엄마는 식탁 위를 가리켰다.

   안 먹었으면 이거 먹으라고 하려고 했는데.

   식탁 위에는 테이프로 묶여 있는 냉동식품 세 봉지가 놓여 있었다. 조잡한 포장지에는 마찬가지로 조잡한 글씨체로 ‘갈비만맛두’가 띄어쓰기 없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웬 만두.

   니 삼촌이 베트남에서 가져온 거.

   숙희는 말없이 ‘갈비만맛두’ 앞에 앉았다. 포장지 뒷면에는 전자레인지에 이 분 사십 초만 돌리면 노릇노릇하게 익는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 어설픈 그림 그려져 있었다. 뭐 이런 걸 선물로 보냈나 싶었는데, 식탁 옆 의자에는 그런 묶음이 한 박스 가득 있었다.

   베트남에서 사업하는 친구만 믿고 갔는데 잘 안됐다고 하더라.

   그럼 그렇지. 외삼촌이 뭘 제대로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숙희는 염소처럼 종이를 씹어 먹던 외삼촌을 떠올렸다. 그렇게 의심 없이 종이를 씹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한 입이 아니라 아주 여러 번 곱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베트남에서 ‘갈비만맛두’ 사업을 하잡시고 꼬시는 친구에게 거절을 못 할 만도 했다. 숙희에게 삼촌은 언제나 실패하는 사람, 그리고 종이를 씹어 먹던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기억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삼촌은 하는 것마다 족족 안 되네.

   그러게나 말이다.

   엄마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애는 착한데. 보통 칭찬으로 안 쓰이지 않나, 그런 말··· 숙희는 엄마의 기분을 생각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엄마가 읊조리듯 말했다.

   어째서 우리는 늘 안 좋은 쪽으로만 가는 걸까.

   어느새 엄마는 삼촌이 아니라 우리 ̄숙희는 거기에 자신도 속하는지 궁금했다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갈비만맛두’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숙희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았다. 숙희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언제나 나쁜 선택만 하는 것에 대해서. 나쁜 선택을 한다는 건, 어찌 됐든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거니까. 숙희는 식탁 위의 갈비만두를 너덜거리는 상자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삼촌은 요즘 뭐 하는데?

   미장일하고 그런다더라. 엄청 고된 건데 그거.

   숙희는 미장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고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했다. 숙희는 뭔가 납득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엇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저 삼촌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선택을 했기를 속으로 바랐다.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숙희는 언제나 나쁜 선택만 하는 여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책장을 뒤져 안 쓰는 공책을 펼쳐서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종이에 적은 다섯 어절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으로도 발음해 보았다. 그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활자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숙희는 볼펜으로 글자를 툭툭 치다가 핸드폰을 꺼내 반복해서 읽는 소리를 녹음했다. 아주 천천히도 말했다가, 매우 빠르게도 말했다가, 스타카토처럼 일부러 한 음절씩 힘을 주어 말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삶이 우리를 더 나쁜 쪽으로 데리고 갈 거야.

   숙희는 녹음기를 끄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아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멜로디는 마음에 들었다. 숙희는 그것을 료에게 보냈다. 용량이 커서 문자를 전송하는 데 한참 걸렸다. 마침내 전송에 성공하고 얼마 안 있어 답장이 도착했다.

   ―좋은 걸. 언젠가, 이 노래를 정식으로 만들게 된다면 내게 프로듀싱을 맡겨 주겠어?

   웃기는 말투였다. 숙희는 픽 웃고는 ‘그러든가’ 하고 답장했다. 방문 너머에서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갈비만맛두’를 튀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숙희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마치 엄마를 노래의 소재로 사용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에게서 비롯되긴 하지만, 이 여자는 엄마가 아닌걸.

   이윽고 온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숙희는 배가 고파지는 바람에 생각을 관두고 가사가 적힌 공책을 덮었다.

   뭐 실제로 있든 없든 숙희의 노래 속 여자는 그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토마손

   미숙은 자신이 끊어진 계단이나 완성되지 못한 예술품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처음 그 생각을 한 것은 결혼식 전날 밤이었다.

   엄마는 결혼식 사흘 전에 죽었다. 미숙은 엄마를 보지 못했다. 결혼 전에 장례를 치르면 큰 화를 입는다며 순경 집안에서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영영 엄마를 볼 수 없는데 큰 화를 입은들 무슨 소용일까? 미숙은 생각했다. 남동생은 곧 사돈 될 집에 책잡히는 것이 싫다며 장례는 알아서 치를 테니 며칠만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했다.

   미숙은 가장 친한 친구 ̄이젠 연락도 되지 않은 사이였다 ̄의 집에서 머물렀다. 결혼 전야에, 미숙은 친구가 꺼내 준 이불을 덮고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침대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미숙은 생각했다. 엄마의 말을 생각했다.

   결혼식은 하루 전까지 엎을 수 있으니까, 영 아니다 싶으면 쪽 좀 팔리고 관둬.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를 흘겨봤다. 아버지는 날짜가 지난 조간신문을 읽는 척하며 시치미를 뗐다. 말은 그렇게 해도 두 사람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미숙은 그런 걸 보면서 컸다. 엄마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엄마의 경련하는 허벅지, 부축하던 어깨를 짓누르는 팔, 엄마의 괴이한 웃음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던 남동생의 노랫소리. 아프기 이전의 엄마가 어땠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미숙은 오늘이 선택을 번복할 수 있는, 되돌릴 수 있는 단 하루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숙은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었다. 미숙의 집에서 쓰는 것과 전혀 다른 섬유유연제 향이었지만, 잘 정돈된 가정집 특유의 편안한 냄새가 났다. 미숙은 이불을 돌돌 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은 완성되지 못한··· 같다는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삶이 한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은 아이를 가지고 난 후에 더 심해졌다. 이전까지 미숙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미숙이 아이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오직 단 하나, 자신처럼 촌스런 이름은 절대 물려주지 말아야지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후보를 만들었다. 시우, 준서, 지후 같은 이름들. 대부분 그녀가 개명을 위해 엄선해 둔 이름의 후보들이었다. 중성적이고 세련된 이름들. 그렇지만 어느 것도 쉽게 고를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마음껏 바꾸지 못했는데 아이의 이름이라고 쉬울 리가 없었다.

   미숙은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를 이어야 한다든가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 줘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도 역시 해 본 적 없었다. 무엇보다 손주를 볼 부모는 모두 죽고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려도 더는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완성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이따금, 이제는 남편이 된 순경으로부터 문지방을 밟지 말라거나 밥을 베어 먹으면 복이 달아나니 깨작거리며 먹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면 미숙은 결혼식 전날 밤, 낯설고 편안한 냄새에 둘러싸여 익숙한 것들을 잊어 가던 밤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결혼은 곧 책임이야.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던 무렵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 우리 가족을 소개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을 때, 미숙은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단 표정으로 미숙을 쳐다보았다. 미숙은 빨래를 마저 개며 그러니까, 하고 말을 이었다.

   뭐든 섣불리 믿지 말아야 해.

   문지방을 함부로 밟지 않고, 산모는 거울을 보지 못하게 하고, 밥을 베어 먹으면 재수가 옴 붙으니 한입에 먹어야 하고, 결혼식 전날 친엄마의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는 남자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라는 뜻이야. 미숙은 아직 아이가 거기까지 알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말했다.

   노래 한 곡 들려줬다고 뿅 가지 말란 뜻이야.

   아이는 미숙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결혼 전 엄마의 직업은 뭐였어?

   아이가 교과서를 보며 물었다. 미숙은 골똘히 생각했다. 결혼 전에는 작은 무역회사에서 잠시간 일했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하반신을 비벼 오는 발정 난 노인들을 참기 힘들어 기필코 차를 장만하겠다고 결심해 놓고 정작 차를 산 건 직장을 때려치운 이후였다. 그때 장만했던 프라이드는 결혼 후 방치하다가, 몇 해 전 이사를 할 때 중고로 팔았다. 세월에 때가 타서 새빨간 색이었던 차는 팔 무렵에는 적갈색이 되어 있었다.

   미숙은 처녀 적에 타고 다니던 프라이드를 떠올렸다. 순경을 옆자리에 태우고 하던 드라이브. 위험하다는 순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느껴지던 바람. 무작정 달리다가 도달한 이름 모를 휴게소에서 산 불법복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엄만 직업 없었어.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

   그런 걸 찾으려면 생을 다시 시작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자, 미숙은 자신의 삶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잘 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니면 애초부터 길을 이탈해서 엉뚱한 곳을 걷고 있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길 같은 것 없던 건지도 몰랐다. 한때 유행하던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끝없는 궤도를 따라 달리는 별 같은 거야. 미숙은 캔디의 복제품이 던져졌을 때 느꼈던 기분, 더 자라고 나서는 그동안 보고 듣고 읽어 왔던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감각만이 남았을 때, 분명히 차곡차곡 쌓아 왔다고 믿었던 것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을 때 휩싸였던 불온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 엄마 아빠의 본관은? 본관이 뭐야?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말하는 거야.

   아이는 미숙의 말을 받아 적었다.

   엄마와 아빠의 한자 이름은 어떻게 써?

   엄마 이름은 촌스러워. 적지 마.

   엄마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응, 마음에 안 들어.

   아이는 힘을 주어 마음에 안 든다, 라고 적었다.

   그럼 엄마는 무슨 이름 하고 싶어?

   미숙은 아주 오래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새로운 이름으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 머리를 스쳐 가는 이름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평범했고,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특별했다. 그 무엇도 미숙보다는 나았지만 수많은 이름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숙과 미정, 미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보다도 까다로운 일 같았다.

   미숙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떠오르는 게 없어.

   아이의 교과서에 답변하지 않은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미래를 상상해 보아요. 아이는 질문 아래 빈칸에 ‘엄마는 더 나은 이름으로 바꾼다’고 적었다. 또박또박 쓰려 했지만 뒤로 갈수록 글씨가 솟구쳐서 ‘바꾼다’는 거의 수직으로 쓰였다.

   정말 그럴까?

   물론이지. 그렇게 되고말고.

   아이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해서 미숙은 순간적으로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머리카락을 기르고 키가 자라듯 아주 당연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미래 씨가 마침내 개명에 성공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십일 년 후이다. 결혼 생활을 십구 년이나 지속한 이후였다. 조금 전까지 미숙이었던 미래 씨는 지방법원을 나서며 아이에게 멋쩍게 물었다. 

   너무 어린애 같지 않니. 겉멋 들어 보이지 않어?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 주책 같어.

   미래 씨는 아이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언제라도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골목을 돌기만 하면 그곳에서 미래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숙희 2집

   숙희의 1집은 쫄딱 망했지만 그중에서도 소소하게 사랑을 받았던 곡이 하나 있다. 노래의 제목은 〈언제나 나쁜 선택만 하는 여자에 대하여〉이다. 그 노래가 무슨 연유로 소소한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는 숙희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 숙희가 만든 음악을 어떤 경로로 발견하고 거기에 매혹되는지, 혹은 매혹되지 않는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취향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시장의 원리라고 했지만 숙희는 그런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닌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을 취향이고 시장의 순환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성공도 자신의 실패도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니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저 조금 운이 없었을 뿐이니까.

   운 없는 숙희는 노래를 만들지 않는 동안 많은 일을 했다. 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학원 강사의 권유로 1종 면허까지 따버린 것이다. 당시 숙희는 강사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씩씩댔지만 덕분에 시내버스 기사로 일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춘 셈이었다.

   시내버스를 몰다 보면 다양하게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한번은 승객에게 욕설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차 벨을 눌렀는데도 정차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처음에 숙희는 승객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잔뜩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이드미러 속에서 발을 구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승객은 괴상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다른 세계의 난쟁이처럼 보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숙희는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승객의 요구를 무시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운행을 했고, 그 바람에 자신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며 열을 냈다. 승객은 온 탑승객이 쳐다볼 정도로 화를 내다가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숙희는 어리둥절했다. 하차 벨이 울리지 않았을 뿐더러 만일을 대비해 하차 벨이 눌리면 운전석 앞의 모니터에 빨간색 ‘하차’ 글씨가 뜨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당연히 별다른 알림은 뜨지 않았고, 정류장을 지나칠 동안 누구 하나 ‘내립니다!’ 하고 외치지도 않았다. 숙희가 음악이나 라디오를 듣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류장을 지나쳤으니 내려 달라고 요구해도 숙희는 들어줄 수 없었다. 한번 정류장을 지나치고 나면 다음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숙희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려 애썼다.

   차고지에 도착해 살펴보았으나 하차 벨은 멀쩡히 작동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고 욕을 먹은 이상 차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야 했다. 그것이 숙희에게 주어진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사소한 신호를 무시하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참사 앞에서 무력해지기 마련이었다. 너무 늦은 뒤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뜬 눈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숙희는 부당하다고 느꼈으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 부당하다, 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부조리하다, 로 대체해 보려 했던 ̄그러나 결국 실패했던 ̄걸 떠올렸다. 숙희는 핸드폰을 꺼내 부당해고, 부조리, 라는 말들을 두서없이 메모장에 적었다. 그 일이 있고도 숙희는 오 개월하고도 엿새를 더 운수업체에서 일했다.

   그때까지도 숙희는 꾸준히 무언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떠오르지 않으면 않는 대로 전부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 쓸 만한 것들은 많지 않았다. 재료 소진, 이라든가 오죽하면 오뚝이 같은 의미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재미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봤을 때 구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숙희는 우선 적었다. 그건 습관에 가까웠다. 그렇게 쓸모없는 메모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한편으로, 시멘트를 다루는 일에 날로 능숙해졌다.

   처음에는 숙희에게 반신반의하던 베테랑 아저씨들도 이젠 숙희가 현장에 찾아오면 오, 숙희! 하고 반갑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게 마치 숙희의 이름이 오숙희, 인 것처럼 들려서 숙희는 그 인사를 좋아했다. 만약 5집 앨범이 발매된다면 그 앨범의 이름은 《오! 숙희》로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숙희는 놀랐다. 다시는 음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만들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음악적 영감을 찾아 헤매던 때처럼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숙희가 방심할 때마다 자꾸만 익숙한 기대와 헛된 희망이 끼어들었다. 그럴 때면 지금 하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미장은 쉬워 보이지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시멘트 사이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게 잘 채워 넣어야 했고, 그런 다음에 표면을 매끈하게 닦아야 했다. 시멘트가 굳기 전에 쇠 날로 표면을 긁어내면 기분이 말끔해졌다. 그런 다음 나무로 된 프레임을 씌우고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 굳는 것을 기다리는 데도 인내심이 필요했다. 마침내 시멘트가 단단해지면 프레임을 제거했다. 이때 기존 바닥과 단차가 생기면 안 되므로, 아주 정밀한 기술을 요했다. 숙희는 단차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그런 건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명백히 재능이었다. 숙희는 기뻤다. 예술이니 창작이니 하는 것들을 할 때는 발휘하지 못했던 재능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하다니.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행운아였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평생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 죽는 인생들도 태반이었다. 혹은 재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삶도 있었다. 그런 삶에 비하면··· 숙희는 또다시 생각을 깊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털었다. 눈앞의 임무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포가 생기고, 단차가 생기고, 재능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따금 숙희는 벽에 곰팡이가 피거나 바닥이 훼손된 가정에 방문했다. 그런 집안들, 보수 공사를 미루지 않는, 고장 난 것을 고치는 데 여념이 없고 불편과 타협하지 않을 여유가 있는 가정들은 연장을 들고 찾아온 숙희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했다. 집안에 아이가 있다면, 때때로 여자가 저런 일도 하네, 하고 무심코 말하기도 했다. 어떤 부모는 여자도 할 수 있어, 하고 말했고 어떤 부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숙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숙희의 업무는 시멘트로 바닥을 메우고 단차가 생기지 않게 하는 거니까. 간격이 커질수록 난감해지니까. 상황을 수습하려다가 더 나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거니까.

   본격적으로 미장에 매진하기 위해서 숙희는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은 진지하게 이 일을 업으로 삼겠다는 ̄물론 숙희는 언제나 모든 일에 진지했지만 ̄것처럼 느껴져 숙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숙희는 이미 한 차례 망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평생을 음악에 종사하며 살리라 생각했던 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망했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결말이 반복될지도 몰랐다.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순간 덮쳐 올 책임감과 의무감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일은 단순명료했다. 근육을 쓸수록 정신이 환기되는 기분이 들었다.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쓸 때는 느껴보 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숙희는 인터넷에 미장 전문가가 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검색했다. 미장, 도배, 장판 따위를 검색하던 숙희는 곧 연관검색어를 타고 타다가 전혀 상관없는 결과물에 도달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라는 분류로 묶여 있긴 하지만 숙희에겐 전혀 관계없는 것들. 필요 없는 것들. 완성되지 못하거나 본래의 필요에서 멀어진 것들에.

   숙희는 도중에 잘린 계단이나 이 층에 매달린 문, 한쪽 다리가 철거된 육교의 사진을 보았다.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니고 어떤 것은 예술이다, 라든가 잘린 계단에는 철학이 있다, 따위의 제목을 단 기사와 건축물만큼이나 의미 없어 보이는 블로그 게시물을 둘러보았다. 그런 것들의 이름은 토마손이라고 했다. 계단이면 계단이고 뚝 끊긴 계단이면 뚝 끊긴 계단이지 그 안에 뭔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고 이름이 있나 싶었다. 누구에게도 소개되지 못할 미완성품으로써의 건축물 사진을, 숙희는 무심하게 클릭했다가 페이지를 빠져나와 또 다른 사진을 클릭했다. 이런 게 예술이라니, 예술 하는 놈들 참 이상하다. 저런 걸 발견하는 게 일종의 유행인 것 같기도 했다. 숙희가 찾았을 땐 그마저도 지나버린 듯했지만. 숙희는, 결국 누가 먼저 선수를 쳐서 변기나 안경 따위를 예술이라고 부르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서마저 뒤처졌다는 것도. 재빨리 손을 들고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마저도 실패했다고. 그렇다면 숙희가 그토록 열심히 단차가 생기지 않기 위해 애쓰던 나날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숙희는 문득 억울해졌다. 누구도 발 디딜 수 없는 계단. 열어 봤자 허공인 문. 완공되지 못한 건물. 토막 난 것들.

   토막 나서 토마손인가. 숙희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고 본능적으로 메모장을 켜 그 말을 적은 후 한숨을 쉬었다. 한 치의 발전도 없었다.

   숙희가 미장을 관두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의뢰인 중 하나가 단차가 생겼다고 컴플레인을 걸었기 때문이다. 사실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공사야 다시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아저씨들은 숙희를 꽤 애정했고 또 믿었기 때문에 ̄영문은 숙희도 알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둘 필요까진 없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 완벽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거라며 위로하는 아저씨들에게, 숙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완벽한 건 의미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온 숙희는 기진맥진해 씻지도 않고 드러누웠다. 땀 냄새가 밴 이불에 코를 박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하게 씨엠송을 좀 만들어 줄 수 있냐는 선배의 부탁이었다. 대단한 일거리는 아니었지만 지역 라디오에 쓰일 대리운전 광고에 삽입될 거라고 했다.

   선배, 나 음악 관뒀어. 숙희가 웅얼거렸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급하게 펑크가 나서 말야, 내가 연락할 곳이 너밖에 없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빨리 좀 부탁해. 숙희는 설명하길 관두었다. 그래서 아무거나 넘겨야지 하는 심산으로 아주 오랜만에 작업하던 곡들을 들어보았다.

   숙희는 끈기 있는 성격이 못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에 뚝 끊기거나 곡조가 괜찮을 만하면 갑자기 구려진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제 와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예술가인 척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개중 그나마 나은 걸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 파일이나 열었다. 그런데 그건 노래가 아니었다. 짧은 대화의 녹음본이었다.

   ―내가 해 보니까, 결혼은 그런 거드만. 책임이라는 거드만.

   그건 숙희의 노래 중 소소한 인기를 끌었던 곡 〈언제나 나쁜 선택만 하는 여자에 대하여〉를 만드는 과정에서 숙희가 엄마를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노래의 마지막에 이 음성이 삽입될 예정이었지만, 갖은 회의 끝에 ̄또 료의 잠수로 인해 촉박해진 앨범 발매 일정에 ̄후반 작업을 거의 포기하고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쓰이지 못했다.

   ―결혼은 말야, 하루 전까지는 뒤집을 수 있다고.

   그건 엄마의 오랜 레퍼토리였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듣다가 지쳐버린 숙희는 마침내 음악으로 만들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엄마는 마치 몸 안에 녹음기를 심어 놓은 듯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야.

   그렇게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뒤집으면 되잖아. 숙희의 목소리가 엄마의 것보다 조금 더 작게 들렸다. 지금은 늦었지. 섞여 드는 소음. 왜? 잡음 때문에 숙희가 묻는 소리가 왜? 인지, 뭐? 인지 헷갈렸다.

   ―한 오 년만 어렸어도 확 뒤집었을 텐데.

   엄마 오 년 전에도 그 말 했었어. 숙희의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가 잦아드는 웃음소리. 엄만 오 년 후에도 그 소리 하고 있을걸. 숙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엄마는 조금 힘 빠진 소리로 웃었다. 이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혀 차는 소리. 녹음기 건드리는 소리. 모든 소리가 좀 더 또렷해지고,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침묵.

   ―뭣 하러 돌아가.

   잡음이 이어지다가 녹음은 거기에서 끊겼다. 숙희는 처음으로 돌아가 녹음본을 다시 들었다.

   ―엄마 결혼은 미친 짓이야?

   ―일하는데 정신 사나와, 절루 가.

   ―아 이거만 말해 줘, 중요한 거라고.

   다 듣고 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숙희의 첫 질문과 마지막 질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쉼 없이 말했지만 정작 숙희의 질문에는 하나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숙희는 몇 번이고 녹음본을 다시 들었다. 어느 것에도 답하지 않고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숙희는 그것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그날 저녁 선배에게 다시 전화가 왔을 때 숙희는 이렇게 물었다.

   “선배, 내 2집 제목 말야, 수키손 어때?”

   ―뭔 손? 그보다 내가 연락 달랬잖아. 문자 못 받았어?

   “수키손. 선배 토마손 몰라?”

   ―몰라, 뭐야 그게.

   “그러니까, 완성되지 못한 건축물에서 발생한 그, 원래는 야구선수 이름인데··· 아, 아니다. 아무튼 수키손, 어때?”

   ―토마손인지 뭔지 따라 해서 수키손이야?

   “응.”

   ―손은 알겠는데, 수키는 뭐야?

   “내 이름. 숙희.”

   ―···구리다.

   왜, 다 거기서 거기지. 전매특허인 그 말을 중얼거리며 숙희는 갑작스럽게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의 혹평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고갈되지 않는 샘물이나 바다 깊은 속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터져 나오는 화산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만드는 일을 평생 멈추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숙희의 2집에는 수키손이라는 제목의 노래는 없다.


   숙희의 미래

   숙희가 일곱 살이던 시절, 유치원에서 돌아와 변기에 앉아 똥을 누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 내 이름은 왜 숙희야?

   그 시절의 숙희는 장 활동이 활달해 변비에 시달리는 법이 없었다. 미래 씨는 숙희가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봐도 더럽다고 타박하지 않았다.

   완전 촌스러. 할머니 이름 같아.

   니 이름이 뭐 어디가 어때서.

   나는 숙희 싫어. 이왕이면 미미나 나나 같은 이름이 좋아.

   그런 건 빨리 질린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나 숙희가 어른에 가까워졌을 때, 체육 시간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딱딱하고 거대한 부피의 변을 엑스레이로 보여주며 의사가 심각하게 말했다. “변비로도 사람이 죽어요. 죽는다고요.” 나중에 숙희는 이 경험을 노래로 만들게 된다. ‘변기에 앉아 화장실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마룻바닥을 바라보는 것, 이름을 바꾸고 싶어 라는 말에 누구도 답해 주지 않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의 제목은 〈주주와 미미〉이다.

   진료실을 나와 미래 씨는 숙희에게 오백 밀리리터짜리 우유를 두 갑 사 주었다. 그것들을 한 번에 들이켜려고 애쓰는 숙희의 옆에서, 분주한 응급실의 정경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은 채 미래 씨는 넌지시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변비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데. 어쩜 이렇게 다르니.

   이게 다 입시 스트레스라는 거야.

   나 학교 다닐 땐 아침마다 화장실에 갔어. 아침에 볼일을 못 본 날에는 학교 가는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서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서 쌌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또 하나 알아버렸군.

   숙희는 윗입술에 묻은 우유를 교복 소매로 닦아 내며 말했다. 응급실은 주인을 알 수 없는 이름을 향한 호명,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들의 신음, 구급대원이 무전기에 대고 지르는 고함으로 분주했다. 이 병원에는 변비같이 보잘것없고 밝히기 쑥스러운 병명을 가진 사람은 숙희 하나인 듯했다. 누구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은 더 중요하고 위급한 것으로 가득했고 숙희와 미래 씨는 아슬아슬하게 그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거나 이미 빠져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 탓인지 숙희와 미래 씨는, 분주하고 소란스런 저 너머의 세상과 단 한 뼘만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차분하고 고요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세계에.

   나도 어릴 땐 장 건강했어. 지금은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지.

   니가 스트레스 받을 게 어딨어. 맨날 빈둥빈둥 놀면서.

   언제부터 똥 누는 게 이렇게 힘들어진 걸까.

   숙희는 짐짓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우유를 마셨다. 우유갑의 뾰족한 입구가 숙희의 입술을 찔렀다. 숙희는 우유를 싫어했다. 아마도 그렇게 많은 양의 우유를 한 번에 마신 것은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었을 것이다.

   너 유치원 다닐 때는 집에 오면 곧바로 화장실 가고 그랬는데.

   문 열어 놓고 쌌잖아.

   그래.

   미래 씨는 추억에 잠긴 듯 말이 없어졌다. 만약 미래 씨가 자신이 똥을 누던 시절의 추억에 잠긴 거라면 좀 더러울 것 같다고, 숙희는 생각했다. 한동안 물속에서 물 밖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응급실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앉아 있었다. 사람 사이에 또렷하게 들리는 거라곤 숙희가 우유를 꼴딱꼴딱 마시는 소리밖에 없었다.

   너 그때 이름 바꿔 달라고 한 거 기억나니?

   기억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숙희는 그것을 잊어 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숙희는 아주 잠깐, 혹시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있던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우스워 조금 웃었다. 미래 씨는 숙희가 그 시절을 떠올리다가 웃은 것으로 착각했는지 같이 웃으며 숙희를 돌아보았다.

   니가 이름 바꿔 달라고 했잖아, 미미로.

   그랬었나.

   그때 미미나 나나로 바꿨으면 어쩔 뻔했어?

   그랬으면···.

   숙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주 천천히, 두 사람 너머의 세계로 향한 막이 걷히고 조금씩 저 너머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랬으면 숙희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겠지.

   그렇지 않은 나는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 삽입된 노래의 가사 일부는 다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로부터, 토마손은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초예술 토머슨』으로부터 빌려왔다.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