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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새들은 어디로 갈까

  • 작성일 2023-09-13
  • 조회수 467

비가 오면 새들은 어디로 갈까

비숲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조금 위축되었다. 후드 티에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니는 녀석은 잘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헐렁한 모자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툼한 입술은 한겨울처럼 버석하게 말라 있었고, 입술 각질을 뜯었는지 피가 굳어 있었다. 눈은 며칠씩 못 잔 것처럼 퀭했지만 눈동자에는 어떤 광채가 번득거렸다. 게다가 보통의 학생들과는 다른 시간에 나다녔다. 나는 어쩐지 녀석과 엮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녀석이 사는 곳은 다름 아닌 산새 마을. 도심 바로 옆 산자락에 위치한 산새 마을은 이름처럼 어디서나 새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식당이나 카페는 고사하고 그 흔한 편의점도 없었다. 유일한 버스인 09번 마을버스를 타고 이십여 분을 내려가야 그와 같은 상업 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젊은 사람들이 사진 촬영지로 찾아들었다. 이곳에서만 수십 년 살아온 한 할머니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아침에 방문을 열었는데 마당으로 들어와 사진 찍는 사람하고 마주쳤단 말이지. 나는 그건 무단 침입인데 왜 웃으시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이야기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불필요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산새 마을에서 나는 넉 달째 마을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원래는 택시를 하다가 취객들이 싫어서 마을버스로 갈아탔던 것이다. 처음에는 25인승 버스를 모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혼잡한 지하철역에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거쳐 산 밑에 있는 종점까지 하루 열 차례씩 운행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노면이 미끄러워서 초긴장 상태가 되곤 했다. 정류장 가까이에 승용차라도 서 있으면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을까 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승객을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길이 막혀 늦어질 때면 승객들의 표정에 짜증이 역력했고 승객 중 누군가는 이렇게 내뱉곤 했다. 여자가 겁도 없이 버스 운전이야! 나는 길이 막히는 것과 여자가 무슨 상관인지 따지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승객의 대부분이 노인인 지역의 특성상 마흔 넘은 여자가 버스 기사라는 게 낯설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런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면서 마을버스 기사로서 적응해 나갔다.

   그래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있었다. 바로 요금통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 새로 나온 디지털 단말기라면 괜찮겠지만 우리 회사는 아직 기존의 요금통을 달고 다녔다. 나는 원래도 소리에 민감했지만 매일 동전 소리를 듣자 더욱 예민해졌다. 백 원짜리는 일정하게 탁탁탁, 오십 원짜리는 그보다 약하게 틱틱, 오백 원짜리는 백 원짜리보다 무겁게 툰, 하는 소리를 냈다. 만약 오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를 넣었다면 틱탁, 오백 원짜리 하나와 백 원짜리 두 개를 넣었다면 툰탁탁, 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동전을 내는 학생 중에 간혹 장난을 치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런 녀석들은 일이 초 뜸을 들이다가 백 원짜리나 오십 원짜리를 교묘하게 섞어 재빨리 집어넣었다. 한눈에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분명히 부족한 금액이었다. 웬만한 기사들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지만 원칙적인 성격의 나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내버려 두자니 녀석들이 나를 물로 보는 것 같았고, 신입 기사인 만큼 회사 눈치도 보였다. 그렇다고 일일이 단속하기도 어려웠다. 운전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싸움이 날 수도 있었다. 나는 매번 속으로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후드 티 모자를 쓴 녀석도 그런 녀석들 중의 하나였다. 턱없이 부족한 요금으로 어른의 세계를 속여 보려는 객기인지, 차비조차 아껴야 할 만큼 어려운 형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녀석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기에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몇 주 전인가, 오후 교대를 하고 두 번째 운행 중이었다. 십여 미터 앞에 정류장을 두고 황색 신호등이 깜빡였다. 속도를 내면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젠가 황색 신호가 적색 신호로 바뀔 때 사거리로 진입했다가 경찰에 걸린 뒤로는 여간해선 무리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교차로에 차를 멈추고 앞쪽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보퉁이를 인 할머니와 후드 티 모자를 쓴 녀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후드 티 저놈! 문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여자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생각했다. 오늘도 녀석이 동전으로 장난질을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엊그제 들었던 미령 씨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요즘 애들은 절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돼요, 자칫하면 큰일 나니까 성질 죽여야 해요. 미령 씨는 스물여덟 밖에 안 됐지만 회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원으로, 신참인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미령 씨 말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녀석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네 나이에는 이런 게 재밌을 수도 있어, 부정 승차하면 벌금이 얼만 줄 아니?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들고났다. 그러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클러치를 떼면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잠시 뒤 브레이크도 밟았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버스가 멈췄다. 할머니 앞에 세운다는 게 공교롭게도 녀석 코앞에 세워 버렸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녀석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기어를 닦는 척 곁눈으로 요금통을 주시했다. 그런데 녀석이 평소와 다른 패턴을 보였다. 동전을 잽싸게 넣는 대신 주머니를 뒤지는 것이었다. 언뜻 버스 카드라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꼼수를 쓰려고 시간을 버는 것 같았다. 이 녀석, 딱 걸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때 녀석의 뒤쪽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기사 양반! 서울은 노인들한테 지하철이 공짜던데 이런 버스도 그라요?”

   보퉁이를 인 할머니였다.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일었다. 저런 말을 하는 할머니들은 대개 둘 중의 하나였다. 그냥 태워 달라고 무작정 올라타거나, 기사 눈을 피해 도둑 승차를 하거나. 성의껏 답하면 귀찮아질 수 있기에 나는 요금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충 대꾸했다. 

   “공짜 아니에요. 천삼백 원 내셔야 해요.”

   할머니는 워쩌지, 하는 말만 반복하면서 버스에는 올라타지 않았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면서도 요금통에서 눈을 떼진 않았다. 녀석이 바로 이런 순간에 꼼수를 쓸 게 뻔했다. 녀석도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과 나의 소리 없는 대결이 시작된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마른침만 여러 차례 삼키며 기다렸다. 이제 녀석은 주머니를 넘어 가방까지 뒤적이고 있었다. 그래 봐야 시간은 나의 편, 녀석을 따끔하게 가르치고 그간의 행적까지 추궁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쿵쿵. 쿵쿵.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마침내 녀석이 입을 뗐다. 저기요. 역시 나의 노련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녀석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이상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곧이어 녀석이 승차 단말기에 버스 카드를 갖다 대며 말했다. 

   “할머니 것까지 계산요!”

   녀석의 말투에 오만과 조소가 깔려 있었다.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어쭙잖게 어어, 하면서 요금을 정산했다. 녀석에게 역공을 당한 것인지, 다른 뭔가에 말린 것인지, 뭔지 모를 기분으로 문을 닫았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고도 녀석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고, 녀석은 말없이 성큼성큼 뒤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버스를 출발시키며 지난 몇 달을 돌아보았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녀석을 오해했었나?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나는 고개까지 저으며 내 생각에 확신했다. 어쩌면 이 또한 어른을 대표한 나에게 날리는 ‘빅엿’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꺼림칙한 마음으로 두 개의 차선을 연이어 바꾼 뒤 좌회전 차선에 멈췄다. ‘오십칠 분 교통정보입니다!’ 라디오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녀석과의 암투에 허비한 시간은 고작 일이 분이었지만, 괜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녀석은 분명 나를 별것도 아닌 아줌마로 깔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흘깃 룸 미러를 쳐다보았다. 

   하필 그때, 녀석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화라도 난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도전적이었다. 문득 신입 교육 때 들었던 ‘묻지 마 폭행 사건’이 떠올랐다. 중학생 무리가 기사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던 사건이었다. 나는 재빨리 운전자 방해 시 대응 매뉴얼을 떠올려 보았다. 머리가 하얘져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녀석은 운전석 뒤로 바짝 다가섰다. 나는 녀석의 거친 숨소리와 룸 미러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귀부터 어깨와 등까지 뜨거운 기운으로 확 달아올랐다.

   그때 밖에서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거의 동시에 녀석도 목청을 높였다. 

   “왜 안 가요? 신호 바뀌었잖아요!”

   나는 너무 놀라서 급하게 출발했다. 승객들이 앞으로 쏠렸지만 다행히 서 있는 승객은 녀석뿐이었다. 녀석은 손잡이를 꽉 잡았는지 흔들리지도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나는 녀석이 운전을 방해하거나 꼬투리를 잡는 식으로 시비 건다는 생각에 더욱 가슴이 조였다. 가속 페달과 클러치를 밟고 있는 두 발 모두 후들거렸다. 녀석이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챈다면 나를 더욱 우습게 볼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산새 마을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새소리만으로도 피로가 어느 정도 풀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좁은 언덕길이 시작되었다. 언덕길 운전은 아직 미숙했는데 가뜩이나 녀석까지 옆에 있으니 손에 땀이 배었다. 나는 재빨리 바지에 손을 문지르고 클러치를 살짝 뗐다. 차가 덜덜거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버스 운전을 하면서 최대의 위기가 온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브레이크를 떼면서 빠르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절로 기도가 나왔다. 종점까지만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세요. 착하게 살겠습니다. 양옆으로 낮은 지붕을 얹은 집들이 스쳐 갔다. 얼마 뒤 마을 중간에 위치한 정거장에 다다랐다. 뒷문으로 사람들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마지막 승객까지 내렸을 때 대뜸 녀석이 물었다.

   “이런 버스 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는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룸 미러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태연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뒷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분명 시답지 않은 질문을 던진 의도가 있을 거라고. 미령 씨 말대로 이 또한 어른을 이겨 보려는 술수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버스를 출발시켰다. 잠시 뒤 녀석이 보란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원동기 면허증 땄거든요.”

   녀석은 자기 말이 만족스러운 듯 개폼을 잡고 다리를 건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뭔가에 홀렸다가 빠져나온 것처럼 맥이 탁 풀렸다. 녀석의 모습이 영락없이 동생 현수와 닮았던 것이다. 현수도 저만 할 때 원동기 면허를 땄다고 거들먹거리곤 했었다. 지금은 연락조차 끊겼지만 당시의 현수는 일곱 살 위인 나에게 사소한 것까지도 이야기했었다. 수능이 끝나자 겨우내 일해서 오토바이를 샀고, 무서워서 안타겠다는 나에게 헬멧을 씌워 주며 자기 허리만 꽉 잡으면 안전하다고 했다. 제법 어른처럼 굴었던 현수를 떠올리자 나는 금세 아련해졌다. 녀석은 거드름을 있는 대로 부리며 말했다. 

   “한 번에 따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고딩을 두고 나 혼자 오버했다는 생각에 허무하기까지 했다. 녀석도 현수와 다를 바 없는 무구한 아이일 텐데, 어떤 이유로 버스 요금이나 속이며 사는지 궁금했다. 긴장이 풀리자 하품이 나왔다. 크게 하품을 하고 나자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었지만 조금 전의 도심과는 완전히 달랐다. 낡은 벽에는 며칠 전과는 다른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고, 플라스틱 화분마다 맨드라미와 국화 같은 가을꽃들이 피어 있었다. 푸른 슬레이트 지붕 위에 잿빛 고양이가 졸고 있었고, 그 윗집에는 가지가 휠 정도로 감이 열려 있었다. 손만 뻗으면 딸 수 있을 정도였다. 담도 없는 집의 빨랫줄에는 그 집 할머니의 취향인 듯한 꽃무늬 옷들이 널어져 있었다. 그 옷들 위로 가을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현수의 오토바이에서 맡았던 그때의 냄새가 났다. 녀석도 바람을 쐬는지 잠잠하게 서 있었다.

   드디어 종점에 도착했다. 녀석을 포함해서 서너 명의 승객이 내렸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멀어져 가는 모습 또한 현수와 닮아 있었다. 훈련소 가던 날 현수의 뒷모습도 저런 모습이었다. 현수는 가족들에게 여행 잘 다녀오겠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훈련소로 향했다. 나는 늦둥이 동생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현수도 제대했다. 운전병으로 전역한 현수는 자동차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쳐 있는 정도로 차에 빠져 있었다. 달리는 차의 뒷모습만 보고도 제조사나 차종, 세대는 물론이고 엔진 룸을 열었을 때 각 부분의 이름과 기능까지 맞출 정도였다. 현수는 비록 중고일지라도 드림 카를 사서 튜닝 하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렸다. 바로 과외 하는 중학생 아이를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썼던 것이다. 

   언젠가 현수가 과외를 갔다가 아이 엄마는 없고 아이도 자고 있어서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하필 그날 아이가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아이 엄마는 현수를 의심했다. 나중에 남편의 소행을 알게 된 뒤에도 진술을 바꾸지 않았다. 게다가 자동차 동호회 친구까지 현수의 자백을 받았다며 거짓 진술을 한 탓에 현수는 범인으로 특정되었다. 평소 현수에게 질투를 느끼던 친구의 모함과 아이 엄마의 거짓으로 여지없이 누명을 썼던 것이다. 그 일로 현수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부모님이 누명을 벗기는 데 결정적 단서를 찾았고 진범이 잡히면서 아이 엄마와 친구도 처벌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가족은 사회적인 인격 살인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차갑게 등을 돌렸고 나 역시 결혼식을 앞두고 파혼을 당했다.

   사실 더 끔찍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현수의 무죄를 확신했던 부모님은 수사기관보다 적극적으로 증거를 찾아 나섰지만, 나는 오히려 현수를 원망하고 의심했다. 현수가 왜 그런 일에 휘말렸는지,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게다가 누군가 우리 가족을 해칠 것 같은 불안으로 정신과 약까지 먹으며 힘들어했다. 오 년에 걸친 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나는 불신과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나보다 더 괴로웠을 현수는 수년간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가슴이 저렸다. 현수에게 그 모든 일이 얼마나 상처였을지, 누나인 내가 믿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나도 결국 집을 떠나 떠돌게 되었다. 현수에게 속죄하는, 나 자신에게 벌주는 그런 마음으로. 

   오랫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일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승객들이 오기 전에 울적한 기분을 털어 내기 위해 창문을 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느 가지에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다른 날과 달리 처량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에도 종점은 새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새소리들을 가만히 들어 보았다. 참새, 까치, 직박구리 그리고 가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산비둘기 소리도 들렸다. 내가 새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 키우던 새, 연두와 이별한 뒤부터였다. 현수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 마당에는 새장이 있었다. 그 안에는 연두색 새 한 마리가 있어서 나는 틈만 나면 그 앞으로 가서 연두야, 하고 부르며 놀았다. 그때마다 연두는 삐익 쪼르르르르, 하는 소리를 냈는데, 나는 그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웬일로 연두가 지저귀지도 않고 모이도 먹지 않은 채 날갯짓을 하느라 창살에 머리를 부딪쳤다. 새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어른들 몰래 새장 문을 열어 주었다. 연두는 새장을 빠져나가면서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날아가면서도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연두가 날아간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아름답고도 가슴이 뛰었는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연두의 지저귀는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내 안에 감도는 기쁨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아프면서도 또 싫지 않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 그 뒤로도 나는 종종 어디선가 연두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오랜만에 떠올린 연두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게다가 자정까지 일하고 바로 오전 조로 나와서인지 온몸도 찌뿌듯했다.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었다. 그런 상태로 정면을 응시했다. 가장 먼 곳에 희미한 바위산이, 그 앞에는 숲이 보였다. 숲 사이사이에는 두세 개의 송전탑이 있었고, 송전탑 앞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종종 산안개가 아파트 전체를 덮을 때면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성처럼 아파트 전체가 어디론가 떠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남달랐다. 현수가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무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을 에워쌌다. 나는 그 느낌이 싫어서 깍지 낀 손을 더 힘껏 뻗었다. 찌릿한 느낌이 손목을 거쳐 어깨까지 전해졌다. 그대로 잠시 버티다 깍지 낀 손을 서서히 풀고 허리에 얹었다. 그런 상태로 상체를 마을 쪽으로 돌렸다. 

   시멘트가 갈라진 내리막길이 보였다. 내리막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집들이 있었는데, 이쪽에서는 오른쪽 집들이 보였다. 중간쯤에 위치한 낡은 기와집 지붕에는 나이 든 아저씨가 기와를 수리하는지 올라가 있었다. 그 옆집은 나무로 된 대문 밖으로 호박 넝쿨이 늘어져 있었다. 그 호박 넝쿨 집과 낡은 기와집 사이에 얼핏 봐서는 그냥 지나칠 만한 좁은 골목이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후드 티 녀석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녀석의 집이 골목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골목 안쪽을 보려고 까치발까지 하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혹시라도 골목을 나오는 녀석이 이런 나를 보고 시비를 건다면 할 말이 없을 거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볕이 한 달 전보다 확실히 동그스름해졌다.

   얼마 뒤 발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신기하게도 저만치에서 후드 티 모자를 쓴 녀석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신경 쓰지 않는 척 스트레칭을 계속했다. 녀석은 버스 문 쪽으로 갔다가 닫힌 것을 보고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곤 조용히 건너편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어 달라고 할 만도 한데 별말이 없었다. 나는 전날처럼 과도한 의심을 하지 않기 위해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운행 시간이 다가오자 급한 마음에 “이 동네는 편의점도 피시방도 없는데 불편하지 않니?”하고 아무 말이나 던져 버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바로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듣기 싫은 말일 것 같았다. 그런데 녀석은 나를 보지도 않고 대충 고개만 가로저었다. 다른 뭔가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멋쩍어서 다시 스트레칭에 집중했다. 팔을 늘어뜨린 채 반동을 이용해서 양쪽으로 홱홱 허리를 돌렸다. 그러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눈을 피했다. 퀭한 녀석의 눈이 잔상에 남았다. 녀석이 갑자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자꾸 제 눈치를 봐요?”

   나는 순간 뜨끔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녀석이 또 물었다. 

   “마을버스 기사 되려면 어떻게 하는 거냐고요?”

   녀석의 말투에 불만이 배어 있었다. 나는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어제에 이어 재차 묻는 걸 보니 녀석에겐 꽤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어린아이한테 설명하듯 차분하게 일러주었다. 먼저 1종 대형 면허를 따고 나서 운전자 적성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해. 그런 뒤에 버스 운전 자격시험인 필기시험을 보면 돼. 그런데 그건 왜?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한숨과 함께 욕설처럼 내뱉었다.

   “시험? 와, 좆나 싫다!”

   녀석의 불량스러운 말투에 나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녀석의 ‘좆나 싫다.’라는 표현만은 왠지 시원하게 들렸다. 나는 외국어를 발음하듯 ‘좆나 싫다.’를 중얼거려 보았다. 몇 번 되뇌다가 나도 모르게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뭔가 처음 해 보는, 재밌는 일에 공모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은 그런 내 모습이 의외였는지 움씰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내가 웃음을 멈추지 않자 그제야 녀석도 키득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퀭하게 보이던 녀석의 눈이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녀석을 볼 때마다 들었던 불길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랜만에 웃는 이 뜻밖의 상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웃을수록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등과 척추가 바로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그날 저녁까지도 키들키들 새어 나왔다.

   그렇게 녀석과 안면을 트자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버스 기사로서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녀석이 요금을 제대로 내면서 신경 쓸 게 줄어든 것이었다. 그리고 종점을 찍을 때마다 녀석과 시간이 맞으면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녀석이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녀석은 어느 신파 드라마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체증을 풀 듯 쏟아 냈다. 나는 녀석이 딱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듣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고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면서 이야기를 끊으려 했지만, 녀석은 눈치 없이 계속 떠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녀석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을 기피하며 살았던 나로선 녀석의 이야기를 다 듣는 게 일종의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열지 말지 가늠해 보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녀석의 이름은 우태경! 열아홉이었지만 중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으니 학생은 아니었다. 녀석은 어릴 때 엄마와 아빠, 16년 터울인 친형과 친척 누나까지 같이 살았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 아빠는 진실을 밝히겠다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녀석이 졸졸 따라다녔던 친형과 누나는, 사실은 친아빠와 새엄마였고, 부족한 살림에도 늦둥이라고 아껴 주었던 엄마와 아빠는, 실제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내막은 이랬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녀석의 부모는 녀석을 미숙아로 낳았는데, 불행히도 친모는 출산 중에 죽었다. 의사는 녀석도 살리기 어렵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데려와 호적에 올렸다. 다행히 녀석은 건강하게 자랐다. 어린 나이에 사별한 친아빠는 녀석이 아기 때 애인을 데려와 살았는데, 녀석 이외의 가족들은 그런 가족사에 대해서 쉬쉬했던 것이다.

   녀석은 갑자기 알게 된 가족사로 인해 깨지 않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녀석의 할아버지는 평소 말수가 없다가도 술만 먹으면 막말을 하곤 했다. 못 키우겠다! 나가 죽어라! 그때마다 녀석은 할아버지가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나마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땐 녀석을 감싸 주었는데, 이제 그럴 사람이 없어졌다. 녀석은 할머니가 없는 집도, 할아버지의 막말도, 노인들만 있는 산새 마을도 싫어서 무작정 분가한 아빠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새엄마와 갓 태어난 동생이 살고 있었지만, 녀석을 맞아 주진 않았다. 심지어 녀석에게 집 열쇠도 주지 않아 녀석은 매일 퇴근하는 아빠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늦은 밤이면 아빠와 새엄마가 녀석을 거론하며 다퉜고, 전학 간 학교에서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녀석은 결국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두 달 만에 산새 마을로 돌아왔고, 그 무렵 학교도 그만두었다. 그 뒤로도 할아버지와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방황했다. 그런 탓에 필요한 게 있어도 말하지 않았고, 지난봄에는 친구 몇 명과 술을 마시고 편의점을 털다가 붙잡혀 수강 명령까지 받은 상태였다.

   솔직히 나는 녀석의 이야기가 소설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지나온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각색하곤 했으니까. 만약 녀석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힘든 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의 체증, 그러니까 내 안에 눌러놓았던 어떤 것들이 건드려지는 것처럼 답답한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공감이나 위로 같은 것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랬기에, 녀석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나는 너무 가까워지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도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인 주말에 녀석을 초대까지 해 버린 건 지나치게 충동적인 일이었다. 얼마 전 녀석이 할아버지와의 불화를 이야기하다가 은근슬쩍 고기 타령을 했었다. 맥락에는 맞지 않았지만 낙담하는 분위기에서 하는 말이었기에 나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동생 현수를 떠올린 탓이었다. 어쨌든 녀석만 초대하기에 어색해서 미령 씨도 불렀다. 미령 씨는 사회성 없는 나를 회사에서 유일하게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 신경이 쓰였다. 

   초대한 당일, 나는 아침부터 마트에 가서 고기와 상추, 소주와 콜라를 샀다. 대청소도 했다. 이사 와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평상을 닦으며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청소를 마치자 미령 씨와 녀석이 차례로 도착했다. 녀석은 웬일로 후드 티 대신 흰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나름 멋을 부린 것 같았다. 미령 씨는 여러 번 와 봤던 사람처럼 옥상 난간에 서서 너스레를 떨었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시원하고 좋네요. 뷰 맛집으로 인정할게요. 녀석과도 대번에 말을 트고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는 그런 미령 씨의 붙임성이 부러웠다. 미령 씨가 녀석에게 주방에서 평상으로 옮길 것들을 알려주자 녀석도 곧잘 따랐다. 둘은 스스럼없이 녀석의 절도 이야기까지 주고받았다.

   “정말 걸릴 줄 몰랐어? 편의점에 CCTV가 얼마나 많은데. 작은 매장이라도 최소 네 대는 설치돼 있다고. 카운터, 뒷문 근처, 매장 구석구석.”

   “술김에 했는데 뭘 그런 걸 따져요. 쩨쩨하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쩨쩨하다고? 그건 범죄야, 범죄! 그런데 미령 씨는 녀석의 대답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오호!”하며 눈을 반짝였다. 녹색 방수제가 발린 옥상 표면도 햇빛에 반짝였다. 주인 할머니가 널어 놓은 고추 역시 잘 말라 반짝였다. 반짝이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평상에 녀석과 미령 씨를 앉게 하고,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쏴, 하는 소리에 녀석과 미령 씨가 탄성을 질렀다. 고기가 익자마자 녀석은 고기 두 점에 마늘과 김치까지 올린 쌈을 입에 넣었다. 평생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먹었다. 내 눈에는 녀석이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먹는 것처럼 보였다. 미령 씨가 소주 한 잔을 홀짝이며 녀석에게 물었다. 수강 명령 끝나면 뭐 할 건데? 녀석은 입에 고기를 가득 채운 채 말했다. 전국 일주요, 관광버스 기사 돼서. 애걔? 겨우? 미령 씨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러곤 녀석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자, 한잔하고 싸돌아다니고 싶은 이유나 말해 봐. 타당하면 인정해 줄게. 녀석은 술잔을 받아 들곤 나를 쳐다보며 슴벅슴벅 눈을 껌벅였다. 마셔도 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비웠다. 어쭈? 학교는 안 가도 술은 잘 배웠네. 그래, 뭐 하나라도 잘하면 됐지. 미령 씨가 상추 끝을 똑 부러뜨리며 말했다. 녀석은 대답 대신 입에 고기를 욱여넣고 화장실로 갔다.

   녀석이 화장실 문을 닫자 미령 씨가 목소리를 낮춰 “쟤, 보통 녀석이 아닌데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런 미령 씨가 더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미령 씨가 고기 먹으니까 얼큰한 라면도 생각난다며 밉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가스 불에 물을 올린 뒤 라면 봉지를 뜯었다. 녀석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난데없이 “조심하세요.”하고 경고했다. 내가 “뭘?”하며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녀석이 다가와서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재수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친엄마도 할머니도 저 때문에 죽었어요. 친한 형도 저랑 인사하다 사고가 났고요. 아빠와 새엄마도 거의 저 때문에 싸우죠. 저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은 다 불행해져요. 그러니까 기사님도 조심하라고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녀석이 나와 친해졌다고 얘기하려는 것 같았으나, 눈빛에 절망과 외로움 같은 게 서려 있었다. 마음 같아선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고 그럴 땐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었다. 나는 말없이 라면에 수프를 넣고 면을 휘휘 저은 뒤 불을 껐다. 그릇을 꺼내는 사이 녀석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곤 냄비를 평상으로 옮기면서 분위기를 바꿔 활달하게 말했다.

   “기사님 원래 그래요? 얼굴 좀 확 펴요. 웃기지도 않는 일에는 죽어라 웃더니만.”

   “언니가 웃었다고? 네가 웃겼어? 나도 그건 안 되던데, 너 능력자구나. 인정!”

   미령 씨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녀석도 죽이 맞았는지 나를 소재로 재잘거렸다. 둘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자유롭게 옮겨 다녔다. 그제야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수강 명령이란 거 상담받는 거랬지? 어떠니? 상담은 제대로 받고 있어?”

   물어본다는 게 하필 수강 명령이었다. 라면 국물을 마시던 녀석의 표정이 달라졌다. 싫은 것을 억지로 할 때의 귀찮음과 짜증이 보였다. 녀석은 라면 그릇을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령 씨가 말할 땐 잘도 받아 주더니 이번엔 분위기부터 잡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고 내가 말하자 녀석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담 샘이 자꾸 감정을 물어요. 전 감정이 없거든요. 없는 걸 없다고 하는 게 이상해요?”

   “네가 뭐 AI니? 감정이 없게. 좀 전에 고기 먹을 때도 엄청 행복해 보이더라. 언니한테 얼굴 좀 펴라고 할 땐 걱정하는 것 같았고. 바보야, 그런 게 다 감정이야.”

   미령 씨의 말이 랩처럼 쏟아지자 녀석은 걱정한 적 없다고, 맘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열을 내면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애 봐라, 한 고집 하네. 미령 씨는 녀석을 흘겨보면서 가르치듯 얘기했다. 내가 얼마 전에 사귀던 놈한테 차였거든.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나를 차더라고. 내가 얼마나 분하고 비참했는 줄 아니? 언니가 한참 어린 나한테 존댓말 할 때마다 불편했거든. 그런 언니가 엊그제 고기 먹으러 오라는 거야. 나 여자 안 좋아하는데, 뭔가 심쿵하더라니까. 바보야, 이런 게 다 감정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내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놓치지 않고 미령 씨가 타깃을 나에게 옮겼다. 

   “언니 좀 봐 봐. 놀람, 이것도 감정이야. 없을 수가 없어. 아 참, 언니에겐 행복이 뭐예요?”

   미령 씨의 표정에 미소인지 조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묻는다는 여유 같은 게 실려 있었다. 나는 미령 씨의 뜬금없는 질문에 “행복?”하고 되물으면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에게 행복은 예전처럼 가족이 모여 사는 것,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뭔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도, 의미도 없는 일이 돼 버렸으니까. 녀석은 내 의중을 알아챘는지 나를 보며 행복? 하고 입 모양으로 되물은 뒤 허공에서 눈알을 몇 번 굴렸다. 그러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 다른 친구들보다 축구를 잘했는데, 그런 건가?”

   축구 잘했다고? 맞아, 그런 거야. 그런데 축구 선수들은 하체가 장난 아니던데. 미령 씨가 실눈을 뜨고 녀석의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눈빛과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녀석은 쑥스러웠는지 목덜미가 벌게졌다. 미령 씨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너 있잖아, 젤로 마음이 아팠던 적은 언제야?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 마음 같은 건 안 아파요. 남잔데 뭐가 아파요.” 했다. 뭐? 그러면 엄청 기분 나쁜 날엔 뭐 하는데? 미령 씨가 묻자, 녀석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냥 술 마시거나 잔다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녀석은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과 감정을 술과 잠으로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미령 씨가 곧바로 그게 그거라고 하자, 녀석도 끝내 그게 그거 아니라고 우겼다. 녀석과 미령 씨의 실랑이가 이어지자 나도 모르는 새 한숨이 나왔다. 내가 보기에도 녀석 안에 아픈 게 있는 것 같은데 녀석은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괜스레 그런 녀석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선지 평소에도 생각하지 않을 말을 해 버렸다. 마치 해야 할 말을 꼭 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태경아, 네가 엄마라는 말, 한 번도 못 불러 봤다고 했을 때 가슴이 먹먹하더라. 아빠가 너 때렸다고 했을 때도, 할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못 키우겠다고 나가 죽으라고 했을 때도. 할아버지가 왜 살렸는지 모르겠다며 뭔가 막 부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여기가 좀 아프더라.”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도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미령 씨도 녀석도 일시에 조용해졌다. 사방이 말도 안 되게 적막해졌다. 그리고 몇 초 뒤 신기하게도 그때까지 들리지 않았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장 난 가전제품 삽니다, 하는 확성기 소리도 들렸다. 주인 할머니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다시 얼마 뒤 그 소리를 뚫고 미령 씨가 쨍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호, 다른 사람한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전 언니가 MBTI에서 T인 줄 알았거든요, 이성 중심 사고형. 그런데 오늘 보니까 F였네요, 관계 중심 감정형.”

   미령 씨는 평소에도 툭하면 성격 유형 검사인 MBTI로 사람을 나누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녀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녀석은 미령 씨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멀건 눈으로 녹색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자 나는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녀석을 돕겠다는 게 괜한 말을 해 버린 것 같았다. 분위기 살리기에 실패한 미령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추를 널어놓은 난간 쪽으로 갔다. 나는 미령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막 부수고 싶도록 답답한 날, 그런 날 사람들은 뭘 할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녀석이 덤덤하게 입을 뗐다.

   “그런 날은 친구들 만나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요. 다들 힘들게 산다고 하니까.”

   “다들 힘들게 산대? 너는 어때? 어떻게 사는 것 같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림 액자 속 인물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힘들게 사는 것 같아요.”

   녀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얼굴을 빤히 보진 않았다. 대신 녀석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환하던 하늘은 어느새 분홍색 구름이 겹쳐지면서 보라색 노을을 빚어내고 있었다. 보라색이 이렇게도 오묘한 색감이었는지 새삼 놀라웠다. 놀라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을 피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노을 지는 이런 시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가슴 언저리가 일렁인다는 게 놀라웠다. 이 일렁임이 뭔지 정확히 규명할 순 없었지만 불안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며칠 뒤 늦은 오후, 운전석에 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 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날 나는 비에 젖은 거리를 운행하는 내내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지하철역도 산새 마을도 그대로였는데, 마치 세월이 훌쩍 지난 뒤에 찾아온 것처럼 낡고 휑한 느낌이었다. 가을비가 주는 슬픈 정서 때문이었는지, 녀석에 대한 혼란 때문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함께 고기를 먹은 뒤로 나는 녀석에게 더 신경을 써 주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일주일이 다 되도록 녀석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의 매일같이 보이던 녀석이 보이지 않자, 처음에는 내 근무 시간과 녀석의 외출 시간이 엇갈렸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며칠이 지나자 녀석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되면서, 급기야는 녀석이 또 사고를 쳤을 거라는 확신으로 번져 갔다. 인간에게 마음을 열어 봐야 소용없다는 평소 생각을 다시금 확인한 것 같아 씁쓸했다. 내가 담배를 피울 줄 알았다면 종점을 찍을 때마다 줄담배를 피웠을 것이다.

   비 때문인지 산새 마을은 그야말로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늘 들리던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생각 없이 레버를 돌렸다. 와이퍼가 거칠게 유리의 빗물을 닦아 냈다. 빠드득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우두커니 밖을 보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비 냄새와 빗방울 소리가 어우러져 스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바람도 한몫했다. 바람은 습하고 차가워서 금방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새들은 어디로 갈까? 생각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졌다. 비가 오면 새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새집으로 가겠지.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위가 뚫린 짚으로 된 집으로. 그런데 그런 집은 여지없이 빗물이 새어 들 테고 쉬지도 못할 텐데. 어쩌면 새들은 비가 올 땐 새집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지도 몰라. 어쩌면 녀석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무슨 기발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빗방울이 굵어졌는지 빗소리가 우두둑 내리쳤다. 룸 미러로 좌석들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빈 버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고속도로를 달려 바다로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짙푸른 바다를 옆에 두고 끝도 없이 달린다면? 상상만으로도 뭔가 통쾌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한 뒤 창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묵직하게 움직이자 나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크게 돌렸다. 그때 검정 우산을 쓴 남자가 버스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른 몸에 걸음걸이가 딱 봐도 녀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치이익, 소리가 빗속에서 요란하게 퍼졌다.

   며칠 만에 만난 녀석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내가 누구와 갔느냐고 묻자 녀석은 “걱정했어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그간의 걱정과 배신감이 떠올라서 어디 가서 뭘 했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그냥 픽 웃었다. 녀석도 웃었다. 세월이 지나 버린 것만 같던 낡고 휑한 산새 마을이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처럼 평화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몇 마디 나눈 뒤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녀석이 나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독백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여행에서 느낀 게 많았어요. 그간 제 얘기를 안 하고 살았었는데 친구들에게 할아버지 얘길 했어요. 아마도 기사님한테 했던 게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어쨌든 돌아와서 집 앞에 서 있는데, 시끄럽게만 들리던 새소리가 웬일로 듣기 좋더라고요. 더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할아버지가 저를 보고도 별말 없이 돌아서는 거예요. 그 뒷모습을 보는데 뭔지 모르게 예전과 다르더라고요. 웬일로 마음이 괜찮다고나 할까. 원래는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움츠러들었거든요. 제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다 쑥스러워서 그냥 돌아선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얼굴에 뭔가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무슨 말씀을 하려다 마셨을까? 내가 묻자 녀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잘 왔다!’ 이런 거요. 안 해 본 거니까. 그러곤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왠지 짠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여전히 편하진 않지만 오늘은 할아버지 구둣방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고요. 괜찮겠죠?”

   나는 녀석이 십 년은 훌쩍 커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룸 미러로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끝도 없는 방황의 길에서 밤하늘의 별을 본 사람처럼. 별을 보며 느꼈을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눈물지었을 순간들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방황했던 나보다 훨씬 나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정류장에 버스를 바짝 세웠다. 삼십 년 넘게 구두를 닦았다는 녀석의 할아버지가 있는 정류장이었다. 앞문으로 승객들이 타는 사이 뒷문으로 녀석이 내렸다. 사이드 미러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비쳤다.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품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처럼. 빗물 때문인지 그 아이는 오래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집에 다가왔을 때의 그 두근거림이란. 애초에 나는 산새 마을에서 그다지 오래 머물 계획은 없었다. 집은 언젠가는 꼭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을 뿐. 다만 마음속에서 이제는 됐어, 괜찮아,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괜찮아.”하고 나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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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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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베스
    최고에요

    오, 몰입감 최곱니다! 재밌네요~!! 글로 보는대도 영상이 선명히 남아요, 작가님 글 매번 챙겨보겠습니다! :)

    • 2023-09-14 08:47:39
    베스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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