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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 작성일 2023-10-13
  • 조회수 871

귀가

박현옥


   이른 아침부터 엄마가 포항에 다녀오자며 법석을 떠는 통에 잠을 설쳤다. 죽도시장에 가서 오징어와 고등어를 사 와야 한다고 했다. 

   “굳이? 오늘?”

   나야 며칠 쉬러 내려온 터라 상관은 없었지만, 엄마와 아버지는 달랐다. 나와 민영이 결혼한 이듬해 부모님은 서울의 설계사무소를 접고 문경으로 내려왔다. 서울 집을 전세로 돌려놓고, 시골집 하나를 매입한 뒤 거기서 살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새로 사업자등록을 한 다음 신축이나 리모델링을 몇 건 맡아 했는데, 작년부터는 인건비를 줄여야겠다며 엄마를 데리고 다녔다. 엄마는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면서도 기어이 아버지를 따라 현장으로 나갔다. 주로 현장 청소를 하거나 인부들을 챙기는 등의 일을 했는데, 간혹 무겁지 않은 자재를 나르거나 페인트칠 같은 잡무도 도맡아 했다.

   “네 아빠가 현장에서 바로 일당을 계산해서 현찰로 준다.”

   간밤에 엄마가 막 도착한 나를 따로 불러 20만 원을 건넸다. 서울로 올라가면 민영과 외식이라도 하라면서.

   “민영인, 많이 바쁘대?”

   오만 원짜리 뭉치를 쥔 엄마의 엄지손톱 절반이 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나는 민영이 집을 나갔다는 말 대신 회사 일이 많다고,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고 얼버무렸다. 엄마에게 뭘 하다가 다쳤느냐고 물었더니 방부목 데크를 나르다가 손가락을 짓찧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현장에다가 나무 바닥으로 된 테라스를 만드는 중이라고 신이 나서 설명했다.

   야외작업을 할 수 없을 만큼 비가 내리거나 콘크리트를 양생하는 게 아니면 두 사람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아버지는 천변에 카페를 하나 신축하는 중이었고, 오늘은 바닥 온수관에 덧바른 시멘트를 굳히는 날이었다. 목공 팀이 오후에 가서 건물 외부를 작업하는 것 말고는 일이 없었다. 늦가을에 비가 온 뒤로 모처럼 쉬는 날이기도 했다.

   “날도 추운데 무슨 포항까지 가서 생선을 사….”

   엄마는 이런 날일수록 누워 있기보다는 그간 못 들른 데를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내려와서 누워만 있다가 가면 아쉽지 않겠느냐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엄마에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옷을 꿰어 입었다. 실로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내 차로 가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미 당신 차에 시동을 걸어 놓았다고 했다. 아버지 차는 차폭이 넓고 길이도 길어 운전 경력이 짧은 내가 몰기에 녹록지 않았다. 엔진을 예열하는 동안 엄마는 작은 아이스박스에 각종 간식과 커피믹스 따위를 챙겼다. 뭘 그렇게 많이 담느냐고 핀잔을 줬는데 아버지가 운전하는 동안 간식을 찾는다고, 편도로 한 시간도 넘게 가야 하는데 출출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너도 배고플 거 아니냐.”

   “이 새벽에 배가 왜 고파.”

   “참, 기다려 봐.”

   엄마는 뭔가 잊은 게 있다며 주방 뒷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손에 곶감이 몇 개 들려 있었다. 뒷집 할머니가 가을에 딴 감으로 만든 반건시라고 했다.

   “너 이거, 어렸을 때 잘 먹었잖아.”

   그건 내가 아니라 형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엄마는 죽은 형과 나를 자주 착각했다. 생전에도 이름을 바꿔 부르는 건 부지기수였고, 오래전 수능 땐 도시락 반찬을 바꿔서 싸 준 적도 있었다. 형과 나는 쌍둥이였지만 고등학교를 각기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친구도 다르고 수능 고사장도 달랐다. 반찬통에 든 두부조림을 보고 재수를 직감했다는 이야기를 민영은 흥미롭게 듣곤 했다. 민영은 우리가 다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엄마가 형과 나를 착각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한번은 엄마에게 이게 다 두부조림 때문이라고,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고 체하는 바람에 외국어와 수리 영역을 망치지 않았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민영이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그걸 왜 억지로 먹어서 체하냐고, 그래 놓고 엄마 탓은 왜 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런 식으로 형과 엄마에 대해 떠들다 보면 민영의 기분도 슬그머니 풀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형과 나를 착각했다는 이야기로 풀어질 만한 것도 아니었다. 민영이 유산을 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유산을 했던 만큼 오래, 간절히 기다린 아이였다. 안정기가 될 때까진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반드시 지켜 내서 자랑스레 밝히자고 다짐했었다.


   신혼 초에 민영과 나는 몇 가지 생활 수칙을 만들곤 했다. 겉옷과 속옷은 따로 세탁한다거나 분리수거는 돌아가며 맡는다는 식의, 배달 음식은 한 달에 최대 두 번까지만 시켜 먹자는 내용을 종이에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공동생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규칙 말고도 싸울 땐 존댓말을 쓴다거나 싸운 뒤의 앙금은 24시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 등등, 남들이 보면 귀엽네, 하고 웃을 법한 것도 있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결혼 생활 내내 극복 가능한 시련만 겪을 거라는 낙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는 첫 유산과 두 번째 유산을 그런대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운이 나빴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충분히 쉬고,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먹자, 조급해하지 말고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겨 보자…. 그런 말로 서로를 달랬고 또 그게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그런 게 다 무색하리만치 오래도록, 심각하게 싸웠다. 할 수 있는 가장 모진 말로 서로를 할퀴고 모욕하고 책임을 전가했다. 

   “나는 이제 더는 못해.”

   “그럼 하지 마,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잖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지금 나 혼자 난리 치다가 이렇게 됐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여?”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도 어느새 다시 불이 붙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젠 제발 그만 싸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현듯 다시 서로를 저주해야 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우리에겐 오직 우리뿐이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엔 민영이 당분간 떨어져 지내자고,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내가 그러자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민영은 이튿날 짐을 싸서 친구네 집으로 가버렸다. 현관을 나서면서는 가급적 연락을 자제하자고, 무엇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인지 신중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보자고 말했다.

   민영 없이 혼자 지내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 붙여 놓은 생활 수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겉옷과 속옷을 분리해서 세탁하고 배달 음식도 시켜 먹지 않았다. 그러는 것만으로 우리의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거라고 믿은 건 아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 없이도 그런대로 남들처럼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 주 금요일의 분리수거 당번이 민영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참아 왔던 감정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식탁에 엎드려 오래도록 울었다. 아니구나, 안 되는구나. 민영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민영은 내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았다. 내가 아는 민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


   엄마도 아버지도 모두 들떠 보였다. 차가 막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아버지의 입에 인절미를 하나씩 넣어 주었다. 아버지는 기어박스에 콩고물이 떨어지는데도 군말 없이 떡을 받아먹었다. 아버지의 볼이 불룩 솟았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아침을 먹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볼이 미어져라 떡을 먹는 아버지가 대단했다. 내비게이션엔 목적지까지 한 시간 이십 분이 소요된다고 나왔다. 엄마가 봉지에서 떡 하나를 꺼내 뒷자리에 앉은 내게 건넸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엄마는 밥을 직접 찧어 만든 것이니 먹어 보라고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떡을 받아먹었다. 밥알이 꽤 많이 씹혔다. 떡을 먹는 것인지 콩고물 묻힌 밥을 먹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콩고물 때문에 목구멍이 깔깔했다.

   두 사람은 떡을 먹으며 현장 인근 주민들을 흉봤다. 착공 무렵에는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이 카페 외관이 완성되어 가니까 슬슬 텃세를 부리더라는 것이었다. 발전기 소리 때문에 낮잠을 잘 수 없다거나 먼지가 날려 창문을 열 수가 없다는 둥.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일 수 있도록 카페 정원에 평상을 놓으라는 요구까지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기어이 분기점에서 도로를 갈아타는 것도 잊어버렸다. 내비게이션에서 경로를 이탈했다는 음성과 함께 도착 예정 시간이 이십 분 늘어났다. 


   모르는 새에 잠깐 졸다가 깼는데 어느새 시가지를 달리는 중이었다. 낡은 상가건물 벽에 각종 상회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거의 다 왔으니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 바다 냄새 같은 게 날까 싶어 창문을 열었는데 내륙과 별다르지 않아서 여기가 정말로 포항이 맞나, 잠시 생각했다. 도로 표지판에 ‘죽도시장’이라고 적힌 게 보였다. 시장 근처에 다다르자 도로가 차로 붐볐다. 공영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차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길 위에서 삼십 분을 허비하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설 주차장을 찾아 들어갔다. 얼핏 항구가 보이는 곳이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면서 놀란 기색이었다. 엄마가 주차장 요금소에 가서 차량 번호와 입차 시간을 적어 놓는 동안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썼다. 얼마 전에 엄마가 홈쇼핑으로 주문해 준 거라며 자랑했다.

   모텔이 늘어선 골목을 빠져나오니 시장 입구가 나왔다. 위판장과 회 센터를 겸하는 거대한 건물 주위로 아케이드가 빽빽했다. 아버지는 우선 시장을 돌아본 다음 횟집에 가자고 했다. 건어물 파는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어시장이 보였다. 골목 양옆으로 소쿠리와 고무 함지에 물고기와 조개 따위를 담아 놓고 파는 좌판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좁은 길에 무척 많은 사람과 오토바이까지 지나다녀서 우리는 일렬로 서서 움직여야 했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내가 앞뒤로 서서 걸었다. 상인들이 우리에게 차례로 호객하는 말을 던졌는데 내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는지 아는 모양새였다.

   “슬슬 배가 꺼진다.”

   “벌써?”

   “이제 회 먹으러 가자.”

   아버지의 말에 우리는 위판장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지층은 새벽 경매가 끝나면 좌판이 깔리고 시장으로 쓰였다. 그곳에 오징어와 고등어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간혹 아귀와 갈치와 삼치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오징어와 고등어였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고등어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파는 가게 앞으로 갔다. 고무 앞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고등어 배를 가르고 내장을 빼서 소금을 쳤다. 그 와중에 틈틈이 호객까지 했다. 부산 고등어라고, 살이 단단하고 기름이 올라 지금이 딱 제철이라고. 엄마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고등어를 쿡쿡 찔렀다. 나는 엄마의 옆에 서서 아버지를 찾았다. 저 앞에서 혼자 횟집을 찾아 가고 있었다. 우리가 뒤에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뭐 해? 배고프다니까.”

   어느 순간 아버지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당신 먼저 가고 있어 봐. 고등어 좀 사 가게.”

   “아 좀, 이따가 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유난이냐.”

   아버지가 짜증을 내자 엄마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하여간 니 아빠랑은 아무것도 못 해.”

   엄마가 손가락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저럴 때 보면 아주 얄미워 죽겠다. 또 시작이구나, 싶으면서도 내심 나 역시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게 뭐라고. 고등어를 먹어 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러다가도 맛집을 찾아보자는 말을 무시하고 혼자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버리는 아버지를 보니 다시금 엄마 편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일까. 종래엔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매일 현장에 함께 나가나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전 열 시였고, 아마 민영도 일어나 있을 터였다. 위판장 사진을 하나 찍어 민영에게 보냈다. 부모님과 고등어 사러 포항에 왔어,라는 말과 함께. 그런 말로 뭔가를 되돌릴 리 만무한데도.


*


   점심시간인데도 횟집엔 손님이 두 테이블뿐이었다. 가게 앞에서 삼만 원짜리 회를 맞춰 놓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종업원이 우리 쪽으로 와서 술이나 탕은 안 시키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아버지가 회만 먹고 갈 거라고 대답했다.

   “왜, 나 매운탕 먹고 싶은데.”

   “이따가 출출해지면 시장에서 간식 사 먹으면 되지 뭔 밥을 그렇게 미어져라 먹으려고.”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내게 매운탕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사실 회도 탕도 그다지 당기지 않아서 어물거렸더니 엄마가 이 집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투덜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벽에 달린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육십이 되면 반드시 산에 가서 혼자 살 거라고 했었는데, 벌써 아버지의 나이가 예순다섯이었다. 아버지가 여전히 그런 꿈을 꾸고 있나 문득 궁금했다.

   “좋겠다.”

   아버지가 작게 감탄했다. “진짜 좋겠다.” 엄마도 나도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회를 기다리는 동안 반찬으로 나온 나물이며 도토리묵 따위를 먹었다. 나도 엄마를 따라 밑반찬을 조금 집어 먹었다. 조미료를 잔뜩 넣었는지 시금치고 콩나물이고 모조리 같은 맛이 났다.

   “너, 아빠 친구 상준이 아저씨 알지.”

   아버지가 TV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알지.”

   “걔가 작년에 산에 들어갔다. 걔는 자기 산이 있거든.”

   아버지는 친구가 살고 있는 컨테이너에 가서 멧돼지 고기를 얻어먹은 적도 있다고 자랑했다. 멧돼지는 겨울이 제철이다, 뱃살이 가장 맛이 좋다더라. 엄마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는데도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종업원이 식탁에 회 접시를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썰린 광어, 전어, 밀치가 빽빽하게 담겨 나왔다. 엄마가 종업원에게 멍게는 없냐고 묻자 종업원이 서비스로 줄 만큼 멍게가 넉넉지 않다며 사과했다.

   “시장 인심도 다 옛날 말이네.”

   주방으로 돌아가는 종업원의 뒤에 대고 엄마가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나는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텐데 나온 거나 먹자고 엄마를 달랬다. 아버지는 여전히 TV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연인이 땅에 묻어  놓은 김장독에서 묵은지를 꺼냈다. 양념도 별로 없이 노랗게 삭은 김치는 군내가 날 것처럼 보였는데, 아버지는 그런 걸 보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이따금 아버지가 엄마에게 김치를 썰어서 내놓지 말라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손으로 길게 찢어 먹어야 맛있다고.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준 적이 없다. 그게 더 번거로운 일임에도 매번 김치를 가로로 썰어서 내왔다. 그러면서 내겐 반찬 타박하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남편도 없다고, 민영에겐 절대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엄마가 생각하는 우리 부부의 위기가 고작 그 정도라니 괜히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삼만 원짜리 회치고 양이 꽤 많았다. 한 뭉텅이씩 집어 먹어도 티도 안 날 만큼 많았다. 엄마도 아버지도 상추쌈을 싸서 부지런히 먹었다. 아버지가 잠깐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동안 엄마는 내게 매운탕을 먹지 않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엄마 먹고 싶으면 시키라니까.”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고.”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자 엄마가 종업원을 불러 매운탕과 공깃밥을 시켰다. 밥은 한 공기만 시키려고 했는데 엄마가 나서서 두 공기를 주문했다. 엄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탄수화물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있었다. 곡기를 먹지 않으면 끼니를 해결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세대 어른들이야 으레 그러기 마련이라고 치부했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당뇨를 진단받은 뒤부턴 오히려 그런 게 다 무모한 짓으로 보였다. 오전 작업을 마치고 칼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허기가 져서 밥까지 말아 먹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너무 안일한 게 아닌가 염려됐다. 어째 나이가 들며 몸이 둔해지는지 크고 작은 부상도 늘어가는 것 같았다. 엄마의 엄지손톱도 그랬다. 쉬는 날인데 굳이 밖에 나다니는 것까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 같았다.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횟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올라와야 하는데 아버지는 신발을 신은 채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른 와서 마저 먹으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얼른들 먹고 일어나. 돌아가야 돼.”

   “지금? 다 먹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우리 매운탕도 시켰어.”

   “그걸 또 왜 시켜? 빨리 가야 된다니까. 현장에 일 터졌어. 난리도 아니래 지금.”

   “왜? 무슨 일인데?”

   아버지가 받고 온 전화는 목공팀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팀원들을 데리고 현장에 나와 봤더니 동네 주민 몇 명이 입구에 오물과 쓰레기를 무더기로 버리고 있더라고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팀장의 말에 주민들은 현장을 돌리고 싶으면 책임자를 불러오라는 말만 거듭했다고. 현장 주인이 카페 주차장으로 쓰려고 매입한 부지에 마을 진입로가 일부 포함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까지 가야 돼? 당신만 가도 되잖아. 얘도 모처럼 내려왔는데….”

   엄마가 말하는 동안에 종업원이 테이블에 휴대용 버너를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종업원을 흘겨봤지만 종업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광지에 와서까지 다투는 노부부를 수도 없이 봐 왔을 터였다.

   엄마는 완강했다. 매운탕도 못 먹었고 오징어도 고등어도 못 샀으니 지금 바로 갈 수가 없다며 버텼다. 아버지는 시외버스나 기차도 없는데 남아 봤자 어쩔 거냐고, 현장에 갔다가 다시 여기에 오려면 한밤이나 될 텐데 그때까지 자기를 기다릴 거냐고 따졌다.

   “해물이야 다음에 또 와서 사도 되잖아.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매운탕부터 무르고, 회나 좀 빨리 먹어. 지리산 갔을 때 생각 안 나?”

   아버지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내 쪽을 쳐다봤다.


   오래전에 가족 여행으로 지리산에 간 적이 있었다. 입구 근처에 산청군 특산물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곳에서 파는 표고버섯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가게 주인이 건네주는 생표고를 씹으며 향이 좋다고, 이런 건 국물 요리에도 좋고 그냥 볶아서 먹어도 좋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버지와 형은 그런 엄마를 뒤로하고 산으로 걸어갔고, 나는 산에 다녀와서 사도 늦지 않을 거라며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날 엄마는 등산하는 내내 표고버섯 타령이었다. 아무래도 사서 오는 게 나았을 것 같다, 그새 문을 닫으면 어쩌냐, 초조해했다. 한 시간 정도 산을 올랐을 무렵, 엄마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형이 곧장 엄마를 따라갔고, 아버지와 나는 삼십 분쯤 더 산을 오르다가 형의 전화를 받고 걸음을 돌렸다. 엄마가 하산하던 길에 발목을 삐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예약해 둔 펜션에 결국 가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는 차 뒷좌석에 앉아 표고버섯 상자만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냐고 소리치는 아버지를 애써 외면하며 발목의 통증을 견뎌 냈다.

   엄마는 내가 언제 그랬냐, 기억도 안 난다, 쏘아붙이고선 밑반찬만 먹었다. 회를 놔두고 반찬만 자꾸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버지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형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지리산에 다녀온 이듬해에 형이 죽었으므로. 

   언제부턴가 셋이서, 결혼한 뒤론 민영까지 넷이서 어딘가에 가노라면 우리는 어느 순간 꼭 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숙연해지곤 했다. 형 때문에 우리의 나들이는 번번이 망했다. 민영은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엄마를 열심히 달래곤 했다. 본 적도 없는 형을 ‘아주버님’이라 일컬으며 그럴수록 당신들이 더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떠드는 민영에게 매번 미안했지만, 우리 중에 그런 말을 할 사람은 민영밖에 없었다. 나도 형이 무척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누가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종업원이 매운탕 냄비를 든 채 식탁 옆에 서 있었다. 놓든 무르든 빨리 좀 결정하라고 채근하는 듯했다. 엄마가 종업원에게 탕을 놓아 달라고 손짓했다.

   “남의 차 얻어 타고 오든가 걸어서 오든가 알아서들 해라 그러면. 난 간다.”

   아버지가 횟집을 나갔다.

   “저 인간은 늘 저런 식이지.”

   엄마는 버너 스위치를 돌려 불을 댕겼다. 잔뜩 남은 회와 매운탕을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됐다. 나는 이제라도 엄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매운탕이 끓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아버지가 돌아와 엄마에게 사정사정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넌 네 아빠를 그렇게 모르냐, 말하며 접시에 매운탕을 덜었다. 나는 그제야 휴대폰으로 포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검색했다. 하루에 두 번 시외버스가 있긴 했지만 구미를 경유해서 가느라 네 시간이 넘게 걸렸다. 고등어와 오징어를 들고 네 시간이나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엄마는 매운탕을 먹느라 바빴다. 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제발 오지 말아라. 그 핑계로 이혼이나 하게.”

   나는 마지못해 매운탕을 한 입 먹었다.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 맵기만 하고 조미료 맛도 너무 강했다. 엄마가 정말로 맛있어하는 건지 맛있어하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순간에도 나는 엄마가 혹 서울로 가자고 말하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텅 빈 집에 가서 왜 민영이 없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묻는 엄마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까. 민영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


   결국 회도 매운탕도 반 넘게 남기고 말았다. 우리는 남은 회를 포장해서 횟집을 나섰다. 엄마가 이제야 마음 편히 시장을 구경하겠다며 신나 했다.

   “아까 거기 고등어 파는 데 있었잖아, 거기로 가자.”

   우리는 다시 위판장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대게와 홍게를 잔뜩 쌓아 놓고 파는 집들이 나왔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이 지금 주문하면 즉석에서 바로 스팀으로 쪄 준다고, 포장도 가능하고 택배도 가능하다고 말을 붙였다. 엄마는 그중 어느 한곳에 멈춰 서서 가격을 물어봤다. 대게는 한 마리에 십만 원이 넘어갔고 홍게도 그에 미치진 못해도 값이 꽤 나갔다. 엄마는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배딱지를 손끝으로 눌러 보고 등딱지를 훑었다. 어떠냐는 물음에 좋아 보인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오겠다며 가게를 떠났다. 엄마에게 게를 살 생각이냐 물었더니 엄마가 아까 게값이 얼만지 못 들었냐며 펄쩍 뛰었다.

   “니 아빠는 그리고 게 별로 안 좋아해. 내륙 태생이라 해물 맛도 몰라. 아니면 한 박스 삶아서 민영이 갖다줄래?”

   나는 됐다고 말하며 엄마를 잡아끌었다. 먼젓번의 고등어 가게 앞은 사람들로 버글거렸는데, 가만 보니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고무 앞치마를 입은 젊은 남자가 고등어 가게 앞에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었고, 고등어 가게 직원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남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왜 남의 가게 앞에서 지랄이야. 그런다고 고등어 사러 온 사람이 갈치를 사겠냐?”

   여자의 말에 남자는 욕으로 맞받아치며 물을 뿌려댔다. 어느새 엄마는 다른 관광객들과 상황을 공유하고 있었다. 엄마가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린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리러 올 거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 마치고 데리러 가야지 별수 있냐. 하여튼, 너네 엄마는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지금 뭐 하고 있다니?”

   싸움 구경 중이라고 일러 주자 아빠가 그 여자답다, 하고 대답했다. 생전 미안하다고 먼저 말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혹시 민영이도 그러냐? 하는 질문엔 아니라고, 이따 보자고 대답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어느새 가게 옆에 서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피해 가며 고등어를 사고 있었다. 가게 직원이 노란 봉투에 열 마리 가까이 고등어를 넣어 엄마에게 건넸다. 이제 오징어를 사러 가자고 말하는 엄마의 바짓단이 물 튄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저렇게 산 고등어의 절반은 아버지 몫일 터였다.


   오징어까지 사고 난 뒤 엄마와 나는 가까운 카페에 가 있기로 했다. 15분 정도 되는 거리였으므로 오징어와 고등어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걸었다. 봉투가 적잖이 무거워서 걸을 때마다 묵직하고 물컹한 게 흔들리며 다리에 툭툭 닿았다. 위판장을 나와 길을 건너니 좁은 바다에 배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다라기보다는 하천 같아 보였다. 

   카페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새 해가 지기 시작해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오려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난방을 한참 틀어 두었는지 카페 안 공기가 덥고 건조했다. 엄마는 거기서도 바닥에 내려놓은 오징어와 고등어가 상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 틈틈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여 봉투를 주물럭거리며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고 안도했다.

   “엄마.”

   진동벨이 울려 커피를 찾아온 다음 엄마에게 말했다. “형 죽었을 때, 그다음부턴 어떻게 살았어? 기대나 목표 같은 거, 뭐가 있었어?”

   엄마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와 현장을 그럭저럭 마무리 짓고 포항으로 가고 있다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테니 어디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천천히 커피만 마셨다.

   형의 죽음엔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형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난데없이 차에 치였다. 누구도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형을 들이받은 그 사람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장례식장으로 비척대며 걸어 들어온 그 사람은 아버지 또래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빈소에서 절을 한 뒤 우리 앞에 엎드려 오래전 아내와 사별하고 외동아들을 키워 왔다고, 화물트럭을 운전하며 그럭저럭 먹고살 만큼 살다가 회사가 어려워지며 일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대리운전이며 신문 배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도 했다. 어느 순간엔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다시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아 5년 전에 작은 고깃집을 하나 냈다고 했다. 아들도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은 군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남자는 죄송하다, 경황이 없었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언젠가 민영은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던 중이었는데, 그래서 그 사람은 징역형을 받았냐, 아니면 설마 형사 합의를 해 준 것이냐,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다. 나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민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해? 죄를 지었으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지, 어쩌자고 그걸 용서해? 어머님 아버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거래?”

   나는 민영에게 그때 우리가 느낀 건 화나 분노가 아니라 슬픔과 허탈함이었다고 오랜 시간을 들여 설명했는데, 민영은 좀처럼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민영의 손을 슬그머니 내 쪽으로 끌어다가 주무르며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게 때로는 더 큰 고통일 수도 있어…”라고 말했을 때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내게서 손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아마 나는 그때 민영은 이 감정에 대해 평생 알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영원히 평행을 이룰 수밖에 없겠지, 끝내 어떤 접점도 만들지 못하겠지, 그렇게 단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민영도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에게 ‘합당한 처벌’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남은 건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영영 잃었다는 불변의 사실뿐이라는 걸.


*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상어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위판장에 상어를 파는 곳이 있었다고, 한 마리뿐이었으나 1미터도 넘는 큰 상어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가격은 15만 원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아이스박스에서 치즈를 꺼내 아버지의 입에 까 넣어 주었다. 아버지는 배가 고팠는지 그걸 얼른 받아먹었다. 회도 매운탕도 거의 먹지 못했으니 종일 굶주렸을 것이다. 둘은 재잘거리며 먹을거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엄마는 “너도 봤지?” 하며 내게서도 동의를 구했다. 나는 알은체를 했지만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보다도 밤의 어시장에서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솥을 닦는 사람들이었다.

   시장 바깥쪽에 문어를 파는 집들이 있었다. 망에 담긴 문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상인들이 가게 앞에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쉼 없이 문어를 삶아 내어 스티로폼 상자에 담았다. 어느 집은 여태 문어를 삶았고, 또 어느 집은 일을 마치고 솥과 아직 삶지 않은 문어를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한 집에서 아주 나이 많은 사람과 아주 나이 어린 사람이 함께 솥을 닦는 광경을 보았다. 나이 많은 사람은 팔십은 족히 넘어 보였고, 나이 어린 사람은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나는 그들을 할아버지와 손자라고 생각했다. 나이 어린 사람이 호스로 솥에 물을 뿌리고 있었고, 나이 많은 사람이 몸을 숙인 채 솥 안을 솔로 닦았다. 둘은 호흡이 그리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나이 많은 사람의 얼굴과 몸에 물이 마구 튀었으니까.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무라거나 혼내거나 하지 않고 묵묵히 솥을 닦았다. 나는 그 광경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저씨, 문어 사시게요?”

   내가 거슬렸는지 나이 어린 사람이 솥에서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그냥 구경하는 거라고 말하고서 그 자리를 벗어나 엄마를 찾아갔다.

   그 순간 나는 민영을 생각했다. 아마 과거에 민영과 이곳에 왔다면, 서로 팔짱을 낀 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문어 파는 광경을 더 오래 구경했을 것이다. 그러다 한 마리를 샀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서 썰어 먹자고, 소주도 마시자고 들떠서 얘기했겠지. 만약 그때 우리가 말다툼을 한 뒤였다면 문어를 사 들고 돌아오면서 슬그머니 화해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도, 대신 손등을 살살 쓰다듬는다든가 민영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준다든가 하는 식으로도 충분히 응어리를 덜어 냈을 텐데. 어쩌면 냉장고에 붙여 둔 규칙에 몇 가지 새로 적을 만한 것들을 논의했을지도 모른다. 정작 심각한 상황이 도래한 순간엔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급적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부부 관계를 만들어 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겐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손등을 쓰다듬고 규칙을 정돈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할 만큼, 우리가 입은 상처는 크다.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결혼한 사람들의 조언을 찾아 듣거나, 상담이나 치료 같은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혼을 하는 게 서로에게 가장 이로운 방법은 아닐까. 우리가 서로를 더욱 원망하고 미워하기 전에, 상실감이 사랑을 완전히 앗아가기 전에 멈추는 게 그나마 우리를 더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뜻하든 뜻하지 않든, 이별엔 언제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엄마에게 돌아갔고, 아버지의 차를 기다렸다. 문득 민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포항에 오던 길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간식을 우물거리며 동네 사람들을 욕했고, 길을 한 번 잘못 들기도 했다. 내가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날 일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회사 생활은 할 만한지 묻기도 했다. 내가 그럭저럭 괜찮다고 대답하자 뭔가를 더 물으려다가 이내 거둬들였다. 낮 동안 나눈 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반복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저녁을 차릴 때 김치를 썰지 말라고 부탁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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