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똥침 한 방 어때요?

  • 작성일 2022-10-07
  • 조회수 1,68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똥침 한 방 어때요?




정해윤






1. 임비와 곰비


“쳇, 하필 헌책을 고르냐.”
검정 비닐봉지에서 누렇게 바랜 책이 나왔다. 책에서는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퀴퀴한 냄새가 났다. 혹시나 하고 나달거린 표지를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뻔하고 시시한 옛날이야기 책이었다. 루다는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전래동화인 『이야기보따리』 책은 정확히 쓰레기통에 거꾸로 박혔다. 루다는 이어폰을 끼고 바닥에 벌렁 누웠다. 더운 길을 걸은 탓인지 온몸이 푹 가라앉았다.
“임비야,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만이냐?”
“하도 오래돼서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어!”
“기막히고 코 막힌 시간이었어. 그렇지 않냐?”
“책장 사이에 끼어 있는 시간은 정말이지 엿 같았어. 곰비 너도 그렇지?”
“꽁청장이 나쁜 놈이지.”
귓속 이어폰에서 신나는 랩이 들려왔다. 어깨를 들썩이던 루다가 벌떡 일어났다.
“곰비, 임비, 꽁청장?”
루다가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뭐지?”
루다가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나른한 여름 오후가 쫀드기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진짜 조마조마했다니까”
소리가 나는 곳은 쓰레기통이었다. 루다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다짜고짜 쓰레기통을 들어 뒤집었다. 방바닥으로 코를 팠던 휴지랑 아이스크림 껍질이 우수수 쏟아졌다.
“임비야,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겠지?”
“실수란 있을 수 없지.”
그사이에도 랩은 계속되고 있었다. 쓰레기를 휘젓던 루다의 손이 딱 멈췄다. 랩은 고물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다가 고물 책을 집어 들어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책 중간쯤에서 손이 딱 멈췄다.
“도깨비잖아?”
루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 가운데 홀로그램이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도깨비들이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안녕, 루다야?”
“반갑다. 이루다.”
도깨비가 루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더니 밤톨이 튀듯 책 속에서 톡 하고 튀어나왔다. 도깨비는 머리에 도도록한 뿔이 나 있고, 커다란 초록 잎사귀를 들고 있었다. 강원도 어디 두메산골에만 자생한다는 도깨비부채였다. 너울대는 잎맥마다 부챗살이 날카로웠다.
“헐, 진짜 도, 도깨비야?”
루다가 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었다. 대낮에 헛것이 보이다니. 루다가 양 볼을 꼬집었다. 혹시나 하고 눈도 비벼 봤지만 역시나 도깨비였다. 도깨비가 루다 눈앞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많이 놀랐구나?”
“놀랄 만도 하지!”
“소개할게. 난 곰비고 이쪽은 내 동생 임비야.”
도깨비부채를 들고 있는 쪽이 말했다.
“진짜, 도깨비야?”
루다가 다시 물었다.
“허 참, 인간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그렇지 뭐.”
“이거야, 원. 우주선 타고 별나라 가는 건 당연하고 눈앞에 있는 도깨비는 볼을 꼬집어 보고서도 못 믿다니…….”
“정말 슬픈 일이야.”
“누구 탓을 하겠어. 모두 우리 탓이지.”
“우리 탓이긴,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인간들이 문제지.”
도깨비들은 주거니 받거니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들은 엄청난 실력의 래퍼 같았다.
“어쨌든 네가 우릴 구했어.”
“루다 네가 우릴 구했어, 구했고말고.”
“내가?”
루다가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래, 네가 공기동 책장에서 우릴 꺼내 줬잖아.”
“가슴에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어.”
“진짜 고마워.”
“눈물 나는 일이지.”
그러자 루다는 문득 한 시간 전의 일이 떠올랐다.


2. 피자 배달


루다는 아침부터 찌는 더위와 씨름 중이었다. 동향이라 그늘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방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거기다 지난 밤, 열대야로 잠을 설친 탓에 비몽사몽 졸음까지 몰려왔다. 그때 이모부한테서 문자가 왔다. 키가 땅딸막하고 팔다리가 짧아서 슬픈, 거기다 배가 툭 튀어나온 이모부는 피자를 밥 대신 먹었다. 하루에 세 판 이상을 거뜬히 해치웠다.
루다야, 피자 한 판 가져와라. 토핑 몽땅 올리고 도우는 말 안 해도 알지. 세상에서 가장 두툼하게 가져와!
“휴, 또 시작이야.”
이모부는 루다의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유는 딱 하나, 루다가 배달하는 피자를 먹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루다는 방학이 싫다. 아니 무섭다. 요번 방학도 이미 시작됐다. 여름 방학 내내 그럴 것이고, 당연히 배달은 루다 몫이며, 피자값은 더 당연하게도 공짜가 분명했다.
“아빠, 이모부가 또 피자 주문했어요.”
루다가 집을 나서면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피자야?”
“뭘 물어요. 토핑 왕창, 도우는 세상에서 가장 두껍게죠.”
루다는 이모부에게 받은 문자를 아빠에게 일러 줬다.
“에이씨,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배달이냐고요?”
“딸내미, 투덜대지 마라. 그나마 형님 덕분에 우리 가게가 유지되는 것 몰라?” 
맞는 말이다. 지금쯤 아빠의 피자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있을 것이다. 보나 마나 뻔했다. 요즘 여기저기 생기는 피자가게는 물론이고, 피자가게보다 더 많이 생기는 통닭가게 때문에 아빠 가게는 말 그대로 망하기 직전이었다.
“항상 날 부려 먹으니까 그렇죠.”
“그럼 딸이 가야지. 내가 가리?”
아빠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철이 오빠도 있잖아요.”
피자가게 문을 밀며 루다가 말했다. 가게 배달 맨인 철이 오빠는 탁자에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형님이 네가 가져와야 맛있다잖냐. 용돈도 벌고 얼마나 좋냐?” 용돈이란 말에 루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모부가 날 부려 먹는 건 악취미예요, 악취미!’
루다는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모두 아빠가 주는 용돈 때문이었다.
“루다야, 피자 나왔다.”
아빠가 갓 구운 피자를 내밀었다. 피자는 따끈따끈하다 못해 ‘어마얏’ 하게 뜨거웠다. 루다는 피자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배달 가야 하는 남구청은 아빠 가게에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모부는 남구청에서 제일 높은 구청장이고, 그래서 루다는 피자를 든 채 청장실을 드나든다. 또 이모부는 엄청 넓은 아파트에 살고 시골에 농장까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루다에게는 모두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루다가 뜨거운 피자를 들고 구청과 아파트를 드나들어도 용돈은커녕 냉수 한 잔 건넨 법이 없었다.
루다는 한낮의 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 너무 덥다. 그늘이 필요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다는 쉬지 않았다. 이렇게 더운 날,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서나 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리 목적지인 남구청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나았다. 청장실은 에어컨이 빵빵했고 그만큼 시원했다.
“똑, 똑.”
루다가 청장실 앞에서 숨을 골랐다.
“오, 피자다.”
이모부가 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피 냄새에 정신 줄을 놓은 좀비 같았다. 당연히 루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짜, 맛있겠다.”
이모부 입에서 침이 튀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볼까.’
루다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그사이에도 루다의 눈은 청장실 벽을 훑고 있었다. 벽에는 책이 가득했다. 책을 품고 있는 책장은 반질반질 윤까지 났다. 루다의 눈길이 책장 한곳에서 딱 멈췄다. 그곳은 모두 동화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모부, 동화책 한 권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안 돼!”
역시나 단호했다.
“왜, 자꾸 내 책에 욕심을 내는 건데?”
이모부가 루다를 향해 세모눈을 떴다. 그래 봤자 세모눈은 단춧구멍만 했다.
“여름 방학 숙제하려면 도서관까지 가야 한단 말이에요. 도서관은 다른 구에 가야 있고, 밖은 또 얼마나 더운지 아시잖아요?”
“그건 네 사정이고.”
이모부가 찬물을 끼얹었다. 루다는 화가 나고 서운해 눈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루다의 눈길을 쫓던 이모부가 이렇게 외쳤다.
“흐흐, 바보 같은 사람들!”
“뭐라고요?”
“글쎄,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줄 안다니까.”
“그래도 몇 권쯤은 읽지 않았어요?”
“아니, 전혀.”
“정말요? 정말로 저 많은 책을 한 권도 안 읽었어요?”
루다가 놀라 물었다.
“그렇다니까!”
이모부가 의자를 빙글 돌리며 얼음이 가득 든 콜라를 홀짝였다.
“이건 일급비밀인데 특별히 너한테만 말해 줄게. 나는 책 모으는 게 취미야. 뭐 모으다 보니 이렇게 많아진 거고.”
이모부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이모부가 빙글거렸다.
“책에도 기가 있는지,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책을 보자마자 기가 죽는다니까. 나는 그게 너무 좋아, 내 앞에서 설설 기는 그 모습 말이야.”
‘우아, 진짜 심하다. 책이 사람 기죽이는 용도라니!’ 루다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에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면 당연히 이모부는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른 말에 토 다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느냐’며 꼬장거릴 게 뻔했다.
“어, 잘 먹었다.”
순식간에 피자를 해치운 이모부가 꺼억, 하고 트림을 했다. 그때 비리, 비리, 비리, 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이모부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한껏 점잔을 빼며 전화를 받았다.
“아, 경찰서장님이세요?”
이모부가 상대를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세요. 내가 누굽니까 남구의 얼굴 아닙니까. 구청 행사인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이모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서장님, 지금 어디세요? 제가 그리로 바로 갈게요.”
이모부는 요란하게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루다야, 내일은 페페로니치즈피자다!”
이모부는 이 한마디를 남기더니 엄청 바쁜 척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루다는 내일도 피자를 배달할 생각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반짝하고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좋았어, 이렇게 많은데 알 게 뭐야.”
루다는 동화책이 꽂힌 책장 쪽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맨 아래, 제일 구석진 곳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책은 얼마나 꽂혀 있었는지 뻣뻣하다 못해 빳빳했다. 루다는 빨간색 피자 가방에 얼른 책을 넣고 찍찍이를 붙여 버렸다. 그리고 서둘러 청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스멀거리던 짜증이 쓱 내려갔다.
하지만 그때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최근에 나온 책을 골랐다면 이런 상황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도깨비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3. 맹세


“너무 속상해 말어.”
“너 아니었으면 우린 그대로 거기서 사라졌을 거야.”
곰비가 손을 내밀었다. 루다가 쭈뼛쭈뼛 도깨비 손을 잡았다. 곰비가 씩 웃으며 도깨비부채를 팔랑거렸다. 시원한 바람이 도깨비부채에서 새어 나왔다. 바람은 달콤했고 무더위에 지친 가슴이 뻥 뚫렸고 달랑대던 가슴이 진정됐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루다가 말했다.
“뭐든 물어봐.”
“궁금한 건 언제든지 물어봐.”
“혹시 꽁청장이 우리 이모부야?”
“그렇지.”
“당연한 걸 뭘 물어?”
“근데, 왜 이모부를 없애?”
“너도 알잖아, 몇십 년째 청장실에 갇혀 있는 친구들 말이야. 꽁청장, 아니 공기동 그 자식 때문에 우리 친구들이 책장에서 푹푹 썩고 있다니까.”
“썩은 게 다 뭐야.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임비가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고약한 입 냄새가 훅 끼쳤다. 루다가 코를 싸쥐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본 임비가 뒤통수를 긁었다.
“미안해. 갇혀 있는 동안 한 번도 양치질을 못 해서 그만.”
“양치뿐이야? 우린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럼 내가 생명의 은인이야?”
“맞아.”
“넌 생명의 은인이야.”
곰비와 임비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날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들을 세상에 불러내 줄 그때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일을 루다가 했다. 루다는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래도 책 주인은 이모부잖아?”
루다가 청장실 책을 떠올리며 말했다.
“너 말 한번 잘했다. 책 임자는 책을 읽는 사람이야.”
곰비가 발끈했다.
“자고로 책 주인은 책을 장식용이나 협박용으로 쌓아 두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꽁청장은 이야기보따리 속 꼬마 신랑보다 더 악질이라고.”
“꼬마 신랑보다 훨씬 악질이야.”
곰비와 임비는 진즉부터 복수의 칼을 갈았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꽁꽁 싸매 둔 채 세상으로 내보내지 않은 이모부를 처단하기로. 그게 바로 친구들을 구하는 일이니까!
“나도 이번 일에 끼워 줘.”
루다의 손가락에서 ‘따닥’ 소리가 났다.
“안 돼! 우리는 인간하고 일하지 않아.”
“이건 철칙이야. 거기다 너는 꽁청장 조카잖아.”
곰비와 임비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루다도 할 말이 많았다.
“조카면 뭐 해. 피자 배달이 얼마나 짜증 나는데. 나도 꼭 할 거야, 복수!”
루다가 속사포처럼 말을 쏘았다.
“그런가…….”
임비가 말끝을 흐리자 곰비가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루다는 이때다 싶어 이렇게 말했다.
“난, 생명의 은인이잖아!”
루다가 금방 들었던 은인 얘기를 디밀었다. 그러자 어떡하지 하는 얼굴로 임비가 곰비를 쳐다봤다.
“하긴, 우리를 그토록 길고 긴 시간 속에서 탈출시킨 것은 루다니까.”
도깨비부채를 쥐고 잠시 생각하던 곰비가 말했다.
“좋아, 그럼 맹세해.”
“맹세라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우리 존재를 발설하지 않기로 말이야.”
“그거라면 얼마든지.”
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맹세의 의미로 혈서를 써야지.”
“인간하고 맹세할 때는 혈서를 쓰는 게 우리의 전통이지.”
“혈서라고? 피로 쓰는 글씨 말이야?”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혈서라니! 루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곰비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도깨비부챗살을 하나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약지에 갖다 댔다. 부챗살은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때 루다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 하나가 지나갔다.
“잠깐만 기다려.”
루다가 후다닥 안방을 향해 뛰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손가락을 자르니. 다들 이걸로 하거든.”
루다가 안방에서 가지고 나온 건 다름 아닌 인주였다. 도장밥이라고도 불리는 인주는 빨개서 혈서 대신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도깨비 존재, 알아도 모름.
루다가 손가락에 인주를 듬뿍 묻힌 후 이렇게 썼다. 그리고 그 옆에 손도장도 보기 좋게 찍었다. 그러자 곰비가, 그다음으로 임비가 차례로 손도장을 찍었다. 빨간색 손도장 세 개가 사이좋아 보였다. 이것으로 혈맹이 완성됐다. 한마디로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루다는 어쩐지 신이 났다.
“루다야, 알지?”
곰비와 임비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요란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뭘?”
“원래 밤은 도깨비들의 시간이란 거 말이야.”
“오랜만에 세상 구경 좀 실컷 해야겠어.”
곰비가 임비의 입을 막았다.
“세상 구경은 무슨. 복수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러 가는 거라니까.”
“안 돼. 지금은 잘 시간이고 그건 도깨비도 마찬가지야.”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인간인 너는 자. 도깨비인 우리는 지금부터 활동을 시작할 테니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돼. 이 시간에 너희끼리 나가겠다고?”
루다가 정색을 했다.
“지금부터 도깨비들 시간이라니까.”
“그래, 이 시간이 딱 좋다니까.”
“너희 진짜 겁이 없구나.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그러다 길 잃어버리면 어떡할 건데?”
“그런가?”
곰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임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곰비를 쳐다봤다. 그러자 곰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랑 같이 가면 안 돼?”
“왜 안 되겠어. 좋지.”
사실 루다는 밤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별로 없다. 지금처럼 한밤중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루다는 곰비와 임비 말에 구미가 확 당겼다.
“하지만 너희 아빠가 한밤중에 너 없어진 거 알면 큰일 날 텐데.”
루다가 검지를 흔들었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었다. 아빠는 잠귀가 어두워도 너무 어두워서 도둑이 들어도 세상모르고 자는 양반이다.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아빠는 훤한 대낮에 도둑을 맞고 말았다. 피자가게에서 낮잠을 잔 때문이었다. 도둑은 대범했다. 바로 옆에서 코를 고는 아빠를 두고 금고를 털었다. 그런데 그 도둑님의 마지막 행동이 수상했다. 가게를 나가기 직전에 아빠의 다리를 툭툭 건드린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모르고 자는 주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CCTV를 확인하던 아빠가 ‘너무 적은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며 몹시 자존심 상해했다. 어쨌든 아빠가 잠에서 깼을 때는 상황 끝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아빠가 서둘러 금고를 확인했다. 하지만 도둑은 동전까지 싹싹 털어간 후였다. 아빠는 입을 헤벌리고 있는 금고를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러더니 ‘잠이 웬수여!’ 하며 한탄해 마지않았다.
루다가 아빠와 얽힌 사연을 마치자마자 곰비가 이렇게 말했다.
“좋아. 우린 피로 맹세한 사이니까.”
“우린 맹세도 했고 복수도 함께할 사이니까.”
그렇게 셋은 한밤중에 집을 나왔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주택가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밤거리는 휘황했다. 대낮에 보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네온사인이 환했다.
“세상에!”
“세상에나.”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세상이 변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대단하다. 이러니 도깨비가 발붙일 곳이 없지.”
“루다랑 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길 잃을 뻔했어. 역시 루다는 꼭 필요한 존재라니까.”
“그렇지!”
루다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어리둥절하기는 루다도 마찬가지였다. 밤에는 모두들 자는 줄만 알았다. 곰비와 임비가 본격적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매혹적인 카페를 지나치고, 돼지고기의 고소한 향이 풍기는 해장국집을 지나 편의점 앞을 지날 때였다. 곰비와 임비의 눈치를 살펴도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루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복수에 필요한 게 뭐야?”
사실 집을 나설 때부터 궁금한 것이었다.
“그게 대충 말이야…….”
곰비가 난처한 낯빛을 했다.
“사실 우리도 정확히는 몰라.”
임비가 뚱하게 말했다. 루다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필요한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복수라니. 기가 막혔다.
“다니다 보면 생각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럴 수도 있지…….”
임비가 거들고 나섰다.
“혹시 저기 가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곰비가 편의점을 가리켰다.
“어쩐지 우리가 찾는 것이 저곳에 있을 것 같아.”
“찾는 게 뭔지도 모른다면서!”
루다가 욱했다.
“도깨비 감을 믿어 봐.”
“도깨비가 감 하나는 끝내주지.”
루다는 별안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너희 돈은 있어?”
“돈?”
“돈은 왜?”
“돈이 있어야 필요한 걸 살 거 아냐.”
루다가 자기 가슴을 쳤다. 이대로라면 복수고 뭐고 모든 것이 꽝일 게 분명했다.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
임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디 있는데?”
루다가 곰비와 임비 앞에 버티고 섰다.
“곰비야 얼른 돈 내놔 봐.”
“좋아!”
곰비가 거리낌 없이 도깨비부채를 좌르륵 폈다. 곰비는 어딘지 흔쾌했다.


“돈아, 나와라.”
“돈아, 돈아. 많이 나와라.”
“돈아, 돈아, 돈아. 진짜 많이 나와라.”


곰비가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마치 스카이콩콩을 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부채를 접었다 폈다, 앞으로 뒤로, 흔들어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부챗살 사이에서 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 대박!”
루다가 돈을 줍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돈은 줍던 루다가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추고 이렇게 물었다.
“이게 뭐야?”
루다의 외침이 제법 날카로웠다. 꿰미에 꿰진 돈은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마치 도넛을 엮은 것처럼 보였다.
“뭐긴 뭐야, 네가 말한 돈이지.”
임비가 웃었다. 환하게 웃는 임비 얼굴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용용함이 어렸다.
“내가 못 살아.”
루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은 이런 돈 못 써.”
“왜?”
곰비가 콩콩 뛰는 것을 멈추고 부챗살을 접었다. 순간 쏟아지던 돈도 뚝 끊겨 버렸다. 그건 다행이었다.
“왜?”
곰비와 임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루다는 엽전 꾸러미를 말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텔레비전 사극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솜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쓴 장사치가 물건을 사거나 팔 때, 나그네가 주막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셈을 치르던 장면 등이었다. 그러니까 요즘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돈이라는 뜻이었다.
“왜긴 왜야. 세상 변한 게 안 보여. 그러니 옛날 돈을 어디에 쓰겠어?”
“그런데 좀 섭섭하다.”
임비가 말했다. ‘섭섭도 하시겠지’ 루다가 구시렁댔다. 그러자 넋을 놓고 있던 곰비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루다야, 우리가 믿은 건 이 돈밖에 없는데, 이제 어쩌지?”
“뭘, 어째.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루다야, 좋은 생각 있어?”
임비가 얼굴을 바싹 디밀며 물었다.
그사이 울상이 된 곰비가 다시 콩콩 뛰며 부챗살을 오므렸다 폈다, 앞으로 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돈아, 드가라.”
“돈아, 돈아. 빨리 드가라.”
“돈아, 돈아, 돈아. 진짜 빨리 드가라.”


곰비의 주문에 따라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돈이 순식간에 부채 속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루다가 결심을 굳혔다.
“저기는 온갖 물건을 파는 곳이니까 너희들이 찾는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일단 들어가 보자.”
루다가 앞장섰다.
“잘 살펴보자.”
“잘 찾아볼게.”
루다가 편의점 문을 밀었다. 문에 달린 방울에서 ‘딸랑’ 소리가 났고, 그 방울 소리에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알바생이 깼다.
“어서 오…….”
알바생이 인사를 하다 말았다. 알바생은 잠을 깨운 사람이 초등학생 꼬마란 사실을 확인하자, 인사도 잘라먹고 엉거주춤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다는 주스와 각종 마실 것이 들어있는 냉장고 쪽으로 갔다. 커피 냉장고를 지나고 탄산수 냉장고를 지날 때 곰비가 소리쳤다.
“루다야, 생각났어!”
“진짜? 뭔데?”
“저기 있는 까만 병 말이야. 저 병 속에 들어 있는 까만 물이 필요해.”
“콜라 말이야?”
“그래, 콜라.”
루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돈도 모르는 도깨비가 콜라를 알까 싶었지만 일단 의심을 접기로 했다. 의심은 모든 일을 방해하는 법이니까.
“콜라 찜.”
돈이 없으니 지금은 눈도장이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잘 기억해 뒀다가 내일 다시 와야 하니까. 루다는 곰비, 임비와 함께 도시락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고, 라면 앞을 스쳤다. 그리고 각종 소스가 있는 진열대를 지날 때였다.
“루다야, 여기도 있어.”
임비가 각종 소스를 가리켰다. 마라상궈 소스, 매운 폭탄 소스와 폰즈 소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루다는 소스도 눈여겨봐 뒀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잠깐만.”
곰비와 임비가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그러더니 루다 손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거면 될 것 같아.”
곰비와 임비가 가리킨 것은 고추냉이 가루와 후춧가루 그리고 노란색 겨잣가루였다. 모두 맵고 재채기가 나는 것들이었다.
“이제 다 됐어.”
“이거면 충분해.”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도깨비들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아. 저거면 충분하고말고.”
“그럼, 나가자.”
루다가 막 편의점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너, 괜찮냐?”
그사이 완전히 잠이 깬 알바생이 물었다. 루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슬쩍 알바생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알바생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루다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저 사람이 지금 루다 이상하다고 하는 거지?”
곰비가 물었다.
“루다야, 우리가 혼내 줄까?”
임비가 발끈했다. 루다가 그런 곰비와 임비를 말렸다. 느닷없이 한밤중에 도깨비의 공격을 받게 되면 자칫 알바생 머리가 이상해질 수 있었다. 깊은 밤에 알바 하는 것도 힘든데 머리까지 이상해지면 그건 정말 곤란했다.
“됐어. 그만 가자.”
루다는 곰비와 임비가 점찍어 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생각을 거듭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진짜 재미있다. 또 어디가 좋을까?”
곰비와 임비가 한껏 들떠서 물었다. 제대로 감 잡았다며 본격적으로 이곳저곳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곤란했다. 도깨비는 몰라도 초등학생인 루다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자칫 사고라도 나면 어쩔 것인가. 루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곰비와 임비를 어르고 달래 집으로 돌아왔다. 곰비와 임비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였지만 루다의 간곡한 설득에 넘어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셋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잤다.


4. 통장 아니고 텅장


“일어나.”
루다는 침대 발치에 누워 있는 곰비와 임비를 흔들어 깨웠다.
“어제 봐 둔 것들 사러 가야지.”
“돈은 있어?”
곰비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비상금이 조금 있어.”
루다가 통장을 흔들었다.
“이 통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루다가 울컥해 말을 잇지 못했다. 통장에는 아빠에게 받은 용돈이 오롯이 들어 있었다. 모두 이모부에게 피자 배달을 한 후 번 돈이었다. 루다는 통장에 찍힌 숫자마다 자신의 피가 알알이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장바구니가 어디 있더라?”
루다가 코를 훌쩍 삼켰다.
“루다야, 울어?”
“맞아. 루다 눈 빨게.”
“안 울어. 내가 왜 우냐?”
루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님 말고. 가자.”
“그래. 우린 준비됐어.”
장바구니를 든 임비가 앞장서 집을 나섰다. 아침이 한참 지난 도로에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덥냐?”
“이런 더위는 처음이야.”
“지구온난화 때문이야.”
루다가 말했다.
“지구온난화가 뭐야?”
“그게 말이야…….”
루다가 설명을 하기 위해 머뭇거리자 곰비가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지구온난화라는 게 지구를 굽거나 삶을 때 쓰는 거냐?”
“지구를 익힐 때 땔감으로 쓰는 나무구나?”
“으이구, 말을 말아야지”
루다가 발을 구르다 ‘엉’했다. 곰비와 임비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이 화석연료를 많이 써서 지구가 더워진 거니까 그럴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비와 곰비는 연신 벙싯거리며 골목을 돌아나갔다. 곧 큰길이 나왔고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열기를 내뿜으며 제 갈 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때 곰비와 임비가 발길을 딱 멈췄다.
“우와, 저게 뭐냐?”
곰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렇게 큰 벌레는 처음 본다.”
곰비가 자동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벌레가 사람을 삼켰나 봐. 벌레 속에 사람이 들어 있어.”
임비가 뒷걸음질을 쳤다.
“어휴, 저건 자동차야.”
“그러니까 자동차라는 벌레야?”
“수천 년을 살았어도 저런 벌레는 처음이야.”
“아휴, 저건 사람들이 빨리 이동하기 위해 만든 차라고.”
“진짜? 사람들은 벌레도 만들 수 있어?”
“벌레들은 그냥 엄마한테서 태어나는 거 아냐?”
장바구니를 든 루다가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저건 차라고 차!”
“그러니까 차. 어쨌든 진짜 놀랍다.”
“인간들 인정! 하지만 분하다.”
이번에는 임비가 발을 굴렀다. 그러더니 곰비와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구 깊숙이 숨어 들어간 것은 인간들 탓도 있지만, 자신들의 힘만 믿은 조상들 탓이 더 커.”
“노래만 좋아하지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도깨비방망이랑 도깨비부채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탓이야.”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조상들, 진짜 나빴어.”
곰비와 임비는 편의점 앞에 다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구시렁댔다. 한마디로 노래나 부르고 놀기나 좋아한 조상들을 까는 중이었다.
“다 왔어.”
그때 곰비가 편의점을 가리켰다. 편의점은 어제저녁보다 훨씬 겉늙어 보였다. 낡고 추레하고 어딘지 꼬질꼬질하기까지 했다.
“어제 봐 둔 거 털자.”
물건을 터는 건 아주 쉬웠다. 아니 물건을 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어제저녁에 봐 둔 것들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 두기만 하면 됐다. 스캐너를 든 알바생이 물건을 찍기 시작했다. 콜라, 마라상궈 소스, 매운 폭탄 소스와 폰즈 소스 등 각종 소스와 고추냉이, 겨자, 후춧가루가 장바구니로 들어갔다. 바코드에 찍히는 ‘삐’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루다의 가슴은 찢겨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 아깝다. 어떻게 번 돈인데…….”
루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이만한 희생은 각오해야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자 물건값과 통장에 든 돈이 딱 맞아떨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통장은 텅장이 되고 말았다.
“히잇, 얼른 가서 복수하자. 아니 약 만들자.”
“얼른 가자.”
곰비와 임비는 루다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거 너희가 들어.”
루다는 괜히 심통이 났다.
“진즉 주지.”
“그런 거라면 식은 죽 먹기지.”
곰비가 장바구니를 받아 부챗살에 걸었다. 그러자 장바구니는 물론 곰비, 임비까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이러기야.”
루다가 발을 굴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벌써 곰비와 임비는 바람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가만 안 둘 거야.”
길을 건너며 루다가 씩씩댔다. 그나마 장바구니를 들고 있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래도 집 앞에 다다르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루다가 대문을 거칠게 밀었다.
“어떻게 나만 두고 갈 수가 있어?”
루다가 소리쳤다.
“장난 좀 친 것 같고 뭘 그래.”
“너무 더워서 장난 좀 친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이. 의리는 죽 써 잡쉈나?”
루다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곰비가 루다를 위해 도깨비부채를 팔랑거렸다. 곧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었다. 루다는 그 앞에 앉아 땀을 식히기 시작했다. 한참을 땀을 들이던 루다가 벌떡 일어나 장바구니를 끌고 왔다.
“시작할까?”
루다가 장바구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비가 신중한 얼굴로 부챗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게 어디 있을 텐데…….”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곰비 손에 종이 한 장이 딸려 나왔다. 종이는 한눈에도 아주 오래돼 보였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법한 종이는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빳빳했다. 거기다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윽, 이게 뭐야?”
루다가 코를 쥐었다.
“그러지 마라. 이래 봬도 도깨비방망이에 버금가는 거야.”
“이것만 있으면 복수 따위는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고.”
임비가 으쓱해 말했다.
“복수에 필요한 모든 것이 여기 적혀 있다니까.”
곰비가 콩기름 먹인 한지를 방바닥에 펼쳤다.
“도깨비들 글잔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던 루다가 이렇게 말했다. 종이에는 낯선 글자들이 빼곡했다. 글자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처럼 꼬불꼬불한 것이 읽을 수가 없었다.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러자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몹시 한심하다는 듯이.
“와, 무식하긴. 이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이건 서너 살 먹은 애들도 다 알아.”
루다는 억울했다. 저렇게 오래된 글자는 아빠도 모를 것 같았다. 아빠가 다 뭔가. 아마 고고학자들이 와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흰 영어 알아?”
“영어?”
임비와 곰비가 동시에 물었다.
“잉글리쉬 말이야!”
“그게 뭔데?”
“그게 뭔데?”
“쳇, 지들도 모르는 거 많구만. 그건 말이지, 미쿡 말이야. 아니 아니 미국말.”
곰비와 임비가 얼굴을 마주 본 채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쨌든 너희들만 믿을게.”
“우리를 믿는다고?”
곰비와 임비가 또 동시에 외쳤다.
“식은 죽 먹기라며!”
“무슨 말이야? 이건 인간들이 쓰는 말이고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
“우린 아무것도 모르지.”
“어린애들도 다 아는 거라며?”
“그러니까!”
“내 말이.”
“와, 미치겠네.”
루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은 루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암호를 풀어야 해. 암호를 풀지 못하면 저건 그냥 종이 쪼가리야. 그러면 당연히 복수도 물 건너가는 거고. 그렇게 되면 여름 방학 내내 피자 배달을 해야 하는 거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루다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좀이 뭔가. 아주 많이 억울했다. 아끼고 아끼던 통장이 텅장이 됐는데 자칫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루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법을 찾아야 해.”
“무슨 방법?”
“방법이 있어?”
“이모부한테 가 보자.”
“이모부라니? 꽁청장 말이야”
“공기동한테 가자고?”
“그 방법밖에 없어. 우리 식구 중에 이렇게 어려운 글자를 아는 사람은 이모부뿐이야. 저번에 보니까 사인도 멋있게 하더라고.”
“그래도 그건 좀…….”
“그럼 복수를 포기할 셈이야?”
“그건 안 되지.”
임비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까 가자고.”
루다가 집을 나섰다. 먼저 아빠 가게로 가야 했다. 어제 이모부가 주문한 페페로니치즈피자가 필요했다. 루다가 앞장섰다. 그러자 그 뒤를 곰비와 임비가 벌레 씹은 얼굴을 한 채 졸래졸래 따라나섰다.


5. 암호를 풀다


“아빠, 페페로니치즈피자 주세요.”
루다는 어제 이모부가 했던 말도 잊지 않고 아빠에게 전해 줬다. ‘구청 행사에 쓸 피자 72판 굽는 거 잊지 말라고.’ 그러자 아빠의 입이 귀에 걸렸고 페페로니치즈피자를 재빨리 구워 줬다. 루다는 더 이상 무더위 속을 걷지 않았다. 모두 도깨비부채 덕분이었다.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활짝 폈고 그 아래로 들어가자 시원했다. 당연히 뜨거운 피자도 들지 않았다. 페페로니치즈피자는 도깨비부챗살에 걸려 대롱거리며 청장실에 도착했다.
“이모부, 피자 가져왔어요.”
루다가 탁자에 피자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지금 막 짜증이 날 뻔했잖아.”
“죄송해요. 아빠가 맛있게 구워야 한다고 해서요.”
“다음부턴 늦지 마라.”
이모부는 말을 마치자마자 허겁지겁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피자 한 판이 사라지는 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루다가 이모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이모부, 이모부는 남구의 얼굴이잖아요?”
“그렇지!”
그때 이모부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꺼억, 하고 트림을 했다. 한발 다가섰던 루다가 잽싸게 두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어려운 말도 많이 아시겠네요?”
“당연하지!”
“그래서 말인데요…….”
루다는 준비한 콩기름 먹인 한지를 이모부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러자 이모부가 흥미를 보였다. 이모부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종이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음, 보자. 이건 한글 초기본이잖아.”
이모부가 말했다.
“흠, 꽤 흥미로운걸.”
그러더니 코를 박고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루다는 얼른 준비한 수첩을 꺼냈다.
첫 번째, 탄산 약수에 간장 한 사발을 섞는다.
두 번째, 고춧가루와 후추 등 세상에 맵다고 하는 건 다 섞은 후 간장이 든 병에 붓는다.
세 번째, 간장병에 식초 한 사발을 흘려 넣고 마구 흔들어 준 뒤 이불에 싸서 하룻밤 묻어 둔다.
루다는 이모부가 읊은 대로 꼼꼼히 받아 적었다.
“무슨 레시피인가?”
제법 전문가 티를 내던 이모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루다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어렸다. 루다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이모부, 내일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급 피자로 구워 올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암호가 적힌 종이를 휙 던지며 이모부가 말했다. 루다는 콩기름 먹인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와, 공기동 무식한 거 아니었어?”
“공기동은 책 안 봐.”
“이모부가 책은 안 읽어도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제법 했대.”
곰비와 임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루다도 조금 놀랐다. 사실 이모부가 그렇게 쉽게 암호를 풀 줄 몰랐다.
“너희들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다가 말했다.
“뭔데?”
“뭐든 물어봐.”
“어제 편의점에서 고른 것들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어제 말했잖아. 순전히 감이라고. 사실 대대로 도깨비 세상에 내려오는 것들인데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런데 왜 만드는 방법은 몰라?”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필요도 없는 걸 배워서 뭐 해.”
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마치 모든 피자의 레시피를 줄줄 꿰고 있지만 만들지 못한 것과 같았다. 밖은 여전히 더웠지만 루다는 더 이상 덥지 않았다.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넓게 폈고 그러자 더위가 싹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루다가 양손을 비볐다. 긴장을 누르고 장바구니를 열어 복수에 필요한 재료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여기 없는 게 간장이랑 식초랑 고춧가루야.”
루다가 말했다.
“이거 간장 아니야?”
곰비가 콜라를 가리켰다. 맙소사! 어쩐지 어제 콜라를 안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건 탄산음료라고 하는 거야.”
“그럼 탄산 약수네.”
“콜라가 약수?”
루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 탄산이 들어 있다면서?”
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천만다행이었다. 루다는 자신이 약수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요즘 세상에 약수가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딘가 약수가 있다 해도 그걸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게 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곰비가 콜라를 간장이라 착각한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이지?”
루다가 곰비와 임비에게 물었다.
“지금이야!”
“지금 해야 약발이 제대로 먹혀.”
“콜라 줘.”
“여기 있어, 콜라.”
임비가 건넨 콜라를 받은 루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곰비와 임비도 루다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콜라는 페트병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것저것 섞으려면 얼마쯤 따라 내야 했다. 루다가 유리잔에 콜라를 따랐다.
“마셔.”
“싫어. 약수잖아.”
“후회할 텐데.”
루다와 곰비가 티격태격했다. 그사이 임비가 콜라잔을 들어 꼴깍거리며 마셔 버렸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캬, 좋다.”
“진짜?”
“너 안 마시면 내가 다 마신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곰비가 콜라를 빼앗아 쭉 들이켰다.
“세상에! 최고다.”
“인간 세상에는 별것이 다 있구나.”
곰비와 임비가 콜라병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곰비가 입술을 핥자 임비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더는 안 돼.”
루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둘은 루다에게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콜라를 안 주면 복수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루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복수 안 할 거야?”
루다가 쐐기를 박자 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첫 번째, 탄산 약수에 간장 한 사발을 섞는다.
루다가 메모를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임비가 콜라병에 간장을 들이부었다. 1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2단계로 곰비가 고춧가루와 후추를 콜라병에 털어 넣었고 차례대로 세상에서 맵다고 소문난 것들이 콜라병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 단계야.”
주방에서 식초를 가져온 루다가 심호흡을 했다.
“내가 하고 싶다.”
“내가 하면 안 돼?”
곰비와 임비가 징징대기 시작했다.
“안 돼!”
“쳇, 맨날 자기만 좋은 거 하겠대.”
“루다는 욕심이 많아.”
식초를 콜라병에 부으려던 루다가 멈칫했다.
“좋아.”
“나야?”
“나지?”
곰비와 임비는 서로 자기가 하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그만! 계속 그러면 내가 한다.”
“쳇, 또 자기래.”
“맨날 자기래.”
“그러니까 싸우지 말라고. 곰비가 식초 넣고 임비 너는 재료가 잘 섞이도록 흔들면 되잖아.”
루다가 식초 사발을 곰비에게 건넸다. 무릎을 꿇은 곰비가 콜라병에 식초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곰비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이제 내 차례지?”
마침내 콜라병 뚜껑이 닫히고 임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콜라병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임비의 입에서 랩이 아니 타령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꽁짜 좋아 꽁청장
이제 아주 끝장이야,
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지
북치기 박치기, 북치기 박치기


조카에겐 피자 배달
도깨비에겐 얄짤없어
앞차기 옆차기 메다꽂기
기다려라 꽁청장
북치기 박치기, 북치기 박치기


더 이상은 곤란했다. 임비를 그냥 뒀다가는 발사체가 된 콜라병과 함께 날아갈 것 같았다. 루다가 눈짓을 했다. 그러자 곰비가 임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사이 루다가 임비의 손에서 콜라병을 빼앗아 버렸다.
“아, 왜 그래. 한참 신났구만.”
임비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곰비가 임비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꾸러기 동생
복수는 안 할 거야?
그렇게 흔들다간
모든 게 끝장이야
북치기 박치기 북치기 박치기


곰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루다는 기막히고 코가 막혔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루다가 곰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이제 막 재밌으려고 하는데 왜 그래.”
곰비가 화를 냈다.
“정말 이럴 거야.”
루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정신 차리는 중이야…….”
“미안, 너무 신나서 그만…….”
곰비와 임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봐.”
루다가 콜라병을 들어 보였다. 콜라병 속에는 커다란 회오리가 몰아치는 중이었고 그 회오리는 모든 걸 날려 버릴 듯 거칠게 용트림하며 날뛰는 중이었다.
“이걸 우리가 했다고?”
“이보다 강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야, 아니 없어!”
“이제 마지막 순서만 남았어.”
루다가 자신의 애착 이불을 꺼냈다.
“중요한 시간이지.”
“이제 필요한 건 발효가 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야.”
루다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애착 이불로 콜라병을 감쌌다. 마치 자신이 콜라병을 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루다는 콜라병을 싸고 있은 애착 이불을 아랫목에 갖다 뒀다. 발효에는 뜨듯한 아랫목과 이불이 최고였다.
“완벽해.”
루다가 엄지척을 했다.
“이제 꽁청장은 끝이야!”
“복수는 우리 것이지!”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준비는 완벽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더할 나위 없었다. 루다와 곰비, 임비는 승리를 위한 하이파이브를 했다. 손바닥 소리가 경쾌하게 방 안을 울렸다.


6. 결전의 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곰비와 임비는 아침내 부산을 떨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할 때였다. 물색없이 까불다가 자칫 일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다는 눈에 힘을 모으고 둘을 째려봤다. 그러자 곰비와 임비가 수굿해졌다. 그때를 기다려 루다가 출발신호를 보냈다.
“가자!”
루다가 ‘으랏차차’ 배낭을 멨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배낭은 제법 묵직했다. 루다와 곰비, 임비는 집을 나섰다.
“날씨 한번 좋다.”
“정말 끝내준다.”
곰비와 임비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날씨는 어제처럼 덥고 후텁지근했다.
“덥지 않아?”
루다가 물었다.
“덥지. 더운데 복수에는 이런 날씨가 딱이란 말이지.”
“복수에는 엄청난 더위가 필요하거든.”
임비가 씩 웃자 누런 이가 보였다. 루다는 복수가 끝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바로 곰비와 임비에게 칫솔을 사 주는 일이었다. 마침 편의점 앞이었다.
“우아, 콜라 많다.”
그때 곰비가 편의점을 기웃대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면…….”
입맛을 쩝쩝 다신 임비의 눈이 아련해졌다. 아무래도 어제저녁에 마신 콜라가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복수에 성공하면 내가 얼음 동동 띄워서 평생 먹게 해 줄게. 아빠 가게에 콜라 엄청 많아.”
“정말이야?”
“공짜로 준다고?”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어느 때보다 눈이 말똥말똥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아빠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루다야!”
루다를 발견한 아빠가 손을 흔들었다. 아빠는 벌써 철이 오빠와 미니 봉고차에 피자를 싣는 중이었다.
“여기, 피자.”
아빠가 이모부에게 줄 ‘핫불피자’를 내밀었다. 핫불피자는 이름에 걸맞게 몹시 뜨거웠다. 새벽부터 피자를 구운 아빠는 조금 지쳐 보였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근데 이거 먹어도 형님은 괜찮을까?”
“이모부가 왜요?”
“아니, 이렇게 이상한 피자는 처음이잖아.”
“이건 이모부가 특별히 부탁한 레시피라니까요.”
“그래도 난 좀 …….”
아빠가 턱을 쓸었다.
“걱정 마세요.”
루다가 힘주어 말했다. 그때 미니 봉고차 뒷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이 오빠가 피자를 다 싣고 문을 닫고 있었다. 아빠가 운전석에 자리를 잡자 철이 오빠가 조수석에 탔다. 루다는 피자가 쌓여 있는 뒷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콜라 타령 중이던 곰비와 임비가 냉큼 차에 올랐다.
“우와, 차벌레 속이다!”
“우리가 차벌레 속으로 들어왔어.”
아빠가 미니 봉고차에 키를 꽂았다. 하지만 연식이 오래된 미니 봉고차는 부르르 몸을 떨 뿐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설마 끈적한 소화액을 뒤집어쓰는 건 아니겠지?”
“소화액에 절어서 녹아내리는 건 아니겠지?”
곰비와 임비의 걱정이 늘어졌다. 미니 봉고차는 한참을 징징거린 후에야 시동이 걸렸고 그제야 행사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비와 임비가 씩 웃었다. 차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둘은 빠르게 스쳐 가는 차창 밖 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창가에 매달려 헤헤거리기까지 했다.
“좋아?”
루다가 물었다.
“당연한 소릴!”
“루다야, 하나 마나 한 말은 삼가 줄래.”
곰비와 임비가 한목소리를 냈다. 그사이 미니 봉고차가 구청 입구에 도착했다. 구청은 회색빛이던 평소와 달리 번쩍번쩍했다. 애드벌룬이며 갖가지 풍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아이들이 모여들고 있어 까치발을 했다. 마치 애드벌룬과 풍선을 잡고야 말겠다는 듯이.
“복수는 나의 것!”
루다가 각오를 다졌다.
“각오를 단단히!
“아자아자, 복수에 성공하자.”
루다가 행사장 문을 힘껏 밀었다. 백일장이 열릴 행사장은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책장이 부챗살처럼 곡선을 그리며 서 있고, 앞쪽으로는 무지개색 소파가 물결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거기다 고소한 책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왔다. 가지런하게 꽂힌 책과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춘 책장도 딱 좋았다. 하지만 행사장 곳곳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다.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
이모부다웠다.
“어머, 첫 번째 어린이잖아.”
그때 안내 데스크에 있던 언니가 루다 일행을 맞았다. 언니 목소리에는 호들갑스러운 반가움이 묻어났다. 언니는 예쁜 한복을 떨쳐입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참가 신청해야지.”
예쁜 언니가 루다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참가 신청은 조금 있다가 할게요. 지금은 공기동 구청장님 피자 배달 왔거든요.”
“아, 피자! 이쪽이야.”
언니가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단상 옆 탁자에 종이 명패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구청장 공기동/ 경찰서장 이민수/ 대학 총장 김욱선’
루다가 ‘공기동’ 명패 앞에 핫불피자를 올려놨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사람들이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리본 커팅을 했는지 오색 테이프를 든 이모부가 들어왔다. 이모부는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명품 슈트에 윤이 나는 구두까지 모두 신상이었다. 하지만 이모부의 팔다리는 몹시 짧았고 빨간 나비넥타이 때문에 마치 펭귄이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기동이다!”
“짜식 드디어 만났군.”
곰비와 임비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학처럼 목이 긴 김욱선 대학 총장님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아.”
총장님이 마이크 테스트를 했다.
“지금부터 우리 구청의 자랑인 어린이 백일장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백일장 개최를 선언했다. 그러더니 더없이 점잖은 얼굴로 좌중을 훑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자 대학 총장님은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 지식을 뽐내던 모습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시인이며 작가입니다. 최선을 다해 역량을 발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 또…….”
“아무래도 길어질 모양이야.”
루다 곁에 있던 언니가 금세 재미없는 얼굴을 했다.
“그럴 것 같죠?”
루다가 언니와 눈을 맞추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언니는 세상에 다시없을 예쁜 웃음을 입가에 싱긋 물었다. 루다는 언니의 웃음을 본 순간 깨달았다. 지금이 복수를 시작하기 딱 좋은 때라는 것을.
“작전 개시!”
루다가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 신호와 함께 임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언니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언니의 이마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어맛, 뭐야.”
언니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다음!”
루다가 다음 작전을 지시하자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좌르륵’ 펴고 부채를 흔들자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바람은 약풍에서 미풍, 미풍에서 강풍, 강풍에서 초강풍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상에, 웬 바람이람.”
언니가 휘청대며 치마를 잡고 버둥댔다. 그때 임비가 언니를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도깨비에 홀린 건가?”
임비에게 밀리면서 언니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언니는 비명도 잊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더니 눈앞에 다가와 있는 화장실로 황급히 들어가 버렸다.
“시작해!”
안내 데스크를 차지한 루다가 배낭을 열었다. 콜라병에 3D 형광램프 발사체를 연결하자 회오리는 미친 용처럼 용트림했다.
“여기 독 받아.”
루다가 매니큐어를 임비에게 건넸다. 독이 든 매니큐어는 엄마 화장대에서 슬쩍한 거였다. 그때 곰비가 도깨비부채에서 부챗살을 하나 뽑아 들었다. 부챗살은 날카롭다 못해 사납게 번쩍였다.
“내가 부챗살 끝을 잡을게.”
곰비가 말했다.
“독은 내가.”
임비가 무릎을 꿇었다. 부챗살 끝에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는 임비의 손놀림이 섬세했다. 곧 부챗살이 빨갛게 변하면서 에나멜의 매운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에나멜은 니트로셀룰로오스가 주성분으로 다이너마이트의 주원료였다.
“독침 완성이야.”
“이보다 완벽할 수 없어.”
“근데 누가 똥침을 놓지?”
루다가 말했다.
“내가 해야지.”
곰비가 가슴을 내밀었다.
“당연히 똥침은 내 몫이지.”
임비도 지지 않았다. 루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분별없이 다투다가는 자칫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신중해야 했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다가 고개를 들었다.
“곰비, 넌 바람 담당이고 임비, 넌 발사체를 맡아.”
곰비와 임비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똥침은 내가 먹여!”
“안 돼. 넌 사람들 눈에 띄잖아.”
맞는 말이었다.
“미안하지만 루다 넌 빠져.”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임비야, 우리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
“순서를 정할 땐 가위바위보가 딱이지.”
“그런 게 어딨어.”
루다가 발끈했다. 하지만 곰비와 임비는 서로를 노려본 채 꼼짝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독심술!”
“루다 넌 조용히 해.”
곰비와 임비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안 되겠어. 동시에!”
“동시에.”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를 외치더니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둘은 처음에 똑같이 가위를 냈다. 그다음에는 바위, 그리고 그다음에는 보를 냈다. 가위가 다섯 번, 바위가 네 번, 보가 여덟 번이었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고 급기야 서로를 째려보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보다 못한 루다가 끼어들었다. 그때 마침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축사를 마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모부가 단상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어린이 여러분!”
이모부가 목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여기 책 보이시죠? 제 방에는 이런 책들이 아주 많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언제든지, 얼마든지 제게 와서 책을 빌려 가세요.”
선거 유세라도 하듯 이모부가 손을 흔들었다.
“저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답니다.”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박수를 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중에서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제일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구청장님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나요?”
“처음 듣는 말인데요.”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루다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똥침은 내가 먹여!”
루다가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루다는 주인공 욕심이 너무 많아.”
“맞아. 맨날 자기만 좋은 거 하겠대.”
또 그 소리였다. 이번에는 루다도 지지 않고 이렇게 받아쳤다.
“이모부한테 결정적 한 방이 어떤 건지, 너희들이 알아?”
“몰라.”
“당연히 모르지.”
“난 알아!”
곰비와 임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루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곰비와 임비의 가위바위보 때문에 똥침을 놓칠 뻔했다! 그때 길고 긴 축사를 끝낸 이모부가 진짜 필요한 말 한마디를 했다.
“여러분, 오늘의 글제는 ‘피자’입니다.”
이모부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핫불피자를 들어 보였고 여기저기서 ‘와’하는 환호성이 쏟아졌다. 몇몇 아이들은 풍선을 든 채 단상 주변으로 몰려들기까지 했다. 그때 언니가 화장실 문을 열고 안내 데스크 쪽으로 다가왔다. 언니는 몹시 쭈뼛대고 있었다. 루다가 그런 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언니는 루다를 향해 어떤 화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루다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주먹을 쥔 후, 검지를 앞으로 쑥 뺐다. 곧 손은 권총 모양으로 변했고 총부리를 대신할 검지는 어떤 것이라도 뚫어 버릴 것처럼 단단해졌다. 똥침 주먹을 한 루다가 단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모부 똥꼬에 강력한 똥침 한 방을 먹였다.
“윽.”
이모부가 엉덩이를 앞으로 쑥 집어넣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똥꼬가 아플까?”
이모부가 엉덩이를 만졌다.
“다시 치질이 도진 건가?”
“구청장님, 치질이 있으세요?”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물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엉덩이 쪽으로 가져갔다. 마치 ‘아, 나도 치질 있는데 조심해야겠다’ 하는 얼굴을 했다.
“임비야, 네 차례야.”
곰비가 임비를 떠밀었다.
“공기동 딱 기다려.”
임비는 그동안의 치욕을 씻으려는 듯 이를 부득 갈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독이 가득 묻은 독침을 이모부 엉덩이 깊숙이 꽂아 버렸다. 똥침 한 방에 엉덩이를 쏙 넣고 있던 이모부가 독침을 맞자 이번에는 엉덩이를 뒤로 쑥 뺐다.
“아구, 뭐지…….”
이모부가 몸을 배배 꼬더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벌건 대낮에 웬 놈의 별은 이렇게 많을까요.”
이모부가 끙 소리를 냈다.
“별이요? 구청장님은 대낮에 별 보는 능력이 있으세요?”
“거 모르시면 가만 좀 계세요, 서장님은!”
“아니, 나는 대낮에 별이 보인다길래…….”
“내가 할 말이…….”
이모부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이모부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보였다. 이모부의 팔과 다리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더니 곧 배가 부풀었다. 이모부는 아빠 가게 앞에서 ‘두르와 두르와’ 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바람인형처럼 변하고 있었다.
“됐어.”
“이제 공기동은 끝장이야.”
곰비와 임비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총장님, 제가 막 달리고 싶어지네요.”
그때 이모부가 갑자기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이모부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보통으로, 빠르게, 점점 빠르게, 미친 듯이 빠르게’ 점점 속도를 높여 갔다.
“구청장님, 진정 좀 하세요.”
학처럼 목이 긴 총장님은 점점 속도가 붙고 있는 이모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총장님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모부의 발은 어느새 안 보일 지경이 됐고,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모부 곁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곰비가 발사추진체를 이모부 허리에 묶어 버렸다.
“난다 난다, 나난다!”
그 말과 동시에 이모부가 빛의 속도로 날아올랐다. 아이들이 이모부 발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이들은 이모부를 쳐다보며 ‘난다 난다, 나난다’를 외쳐 댔다.
“구청장님, 이벤트 중인가요?”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몹시 부러운 얼굴을 했다.
“정말, 혼자만 이러긴가요?”
이모부를 잡으려 애쓰던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샐쭉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모부는 창문 앞에서 잠시 파닥거리더니 밖으로 빠져나가 구청 건물 지붕을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이모부는 구청 건물을 끝없이 돌고 또 돌았다.
“완벽해!”
루다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아니야.”
“그래, 아직 아니지…….”
곰비가 맞장구를 쳤다.
“무슨 말이야?”
“두고 보면 알아.”
“두고 보면 알 수 있지.”
곰비와 임비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총장님은 구청장이 날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묻자, “그럴 리가요. 저 양반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인가요.”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여전히 샐쭉해서 말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섭섭함을 토로했다. 아마도 이모부가 부러워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7. 가짜 이모부


“어, 어. 구청장님이에요.”
모두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언니가 행사장 문을 가리켰다. 이모부는 말짱한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사장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진짜, 구청장님이세요?”
얼굴이 불그죽죽한 경찰서장님이 눈을 비볐다.
“어디요, 어디?”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이모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음질쳤다.
“구청장님, 괜찮으세요?”
“저요? 제게 무슨 일 있었나요?”
이모부가 자기는 아무 일도 모른다는 천진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불그죽죽한 서장님이 난감해하며 하늘을 한 번, 이모부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야?”
루다가 놀라 물었다.
“설마 이모부가 벌써 반성을 한 거야?”
“공기동이, 그럴 리가 없잖아.”
“꽁청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뭐야?”
곰비와 임비가 양쪽에서 루다 귀를 잡아당기더니 귓속말을 했다.
“저건 공기동이 아니야.”
“꽁청장 분신이지.”
“뭐라고? 그럼, 이모부는?”
“아직 저기 있지.”
곰비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 위에서 열심히 반성 중이겠지.”
루다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자신이 모를 수 있다니 말도 안 됐다. 믿는 도끼에 아니 믿는 도깨비에 발등을 찍혀도 단단히 찍혔다. 이대로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들, 도대체 뭔데!”
루다가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렸다.
“이건 도깨비들끼리도 일급비밀이야.”
곰비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에게 발설했다가는 분신술이 제대로 안 되거든.”
“그리고 가짜 공기동은 시간제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가짜 공기동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똥침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공기동이 반성하지 않으면…….”
“않으면?”
“둘 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아무도 장담 못 해.”
“둘 다 사라질 수도 있지.”
루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이모부가 사라질 수도 있다니. 생각지 못한 결말이었다. 루다가 ‘이제 어쩌나’ 하고 있을 때 가짜 이모부가 루다를 불렀다. 루다는 가짜 이모부를 향해 걸음을 떼면서도 곰비와 임비를 째려봤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다는 눈이 빠지지 않을 만큼, 서운한 마음이 가실 때까지 곰비와 임비를 째려봤다. 그래도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루다야, 이거 모두 떼 버려.”
가짜 이모부가 책장에 붙여 둔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를 가리켰다. 그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루다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종이를 떼어냈다. 그사이 가짜 이모부가 단상에 오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어린이 여러분, 이곳에 있는 책은 이제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맘껏 골라 읽어도 됩니다.”
여기저기서 ‘와와’ 하는 환호성이 들렸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책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책 읽기에 마땅한 자리를 찾아 행사장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몇몇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기까지 했다.
“루다야, 따라와.”
가짜 이모부가 말했다.
“이번에는 어디 가는데요?”
“어디긴, 청장실이지.”
“거긴 왜요?”
“왜긴, 거기 있는 책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 구경을 못 했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모두 숨통을 틔워 줘야지”
“구청장님, 진심인가요?”
학처럼 목이 긴 대학 총장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총장님,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나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죠. 우리 구청장님이야 늘 사실 아니 진실만 말하죠.”
얼굴이 불그죽죽한 서장님이 학처럼 목이 긴 총장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움찔 놀란 학처럼 목이 긴 총장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시죠.”
가짜 이모부가 서장님과 총장님을 앞세우고 청장실로 향했다. 그 뒤를 루다와 곰비 임비가 또 그 뒤를 아이들이 따라왔다. 드디어 청장실 앞이었다.
“짜잔.”
가짜 이모부가 청장실 문을 힘차게 밀었다.
“여러분, 책을 모두 밖으로!”
가짜 이모부가 외쳤다.
“이제 모두 살았어.”
곰비가 책 친구들을 도깨비부채로 쓸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책 향기가 솔솔 풍겨 나왔다. 아이들이 책 향기에 코를 벌름거렸다.
“우리 친구들, 모두 살았어.”
책장 높은 곳에 있는 책은 어른들이, 책장 아래쪽과 동화책은 아이들이 나르기 시작했다. 책은 끝없이 밖으로 들려 나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책장이 텅텅 비었다. 그 대신 구청 마당에 책이 쌓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음, 시원한 공기.”
“이제 모두 살았어!”
구청 마당으로 나온 책들이 다투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가 좋겠어.”
“나는 저기.”
“우리는 저 나무 그늘 밑으로 가자.”
책을 든 아이들이 마땅한 자리를 찾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언니가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한복을 벗자 한결 시원해 보였다. 언니는 구청 마당에 쌓여 있는 책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등나무 아래로 갔다. 언니의 손에는 『모모』가 들려 있었다. 『모모』는 루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다.
“우리도 책 읽자.”
곰비가 말했다.
“저기가 좋겠어.”
임비가 등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루다가 한숨을 쉬었다.
“왜?”
“모두 잘됐잖아. 나는 속이 다 시원하고만. 뭐가 문제야.”
어느새 여름 해가 설핏 머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하루를 넘겼다간 자칫 이모부의 인생이 끝장날 수 있었다. 루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손으로 이모부의 인생을 끝장낼 수는 없었다. 루다가 서둘러 행사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너도 참 걱정을 사서 하는구나.”
“돈 주고도 못 살 성격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곰비와 임비도 못 이기는 척 루다를 따라왔다.
“꽁청장이다!”
행사장으로 들어서던 곰비가 소리쳤다. 루다가 곰비를 밀치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들어왔는지 이모부가 행사장 천장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목에 맨 나비넥타이가 삐뚜름해진 이모부는 반쯤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모부?”
루다가 다급하게 이모부를 불렀다. 루다는 차마 ‘이모부,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어쩐지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아서였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괜찮지 않아야 하고말고.”
임비가 흐흐 댔다.
“루다야, 내가 있잖아…….”
그때 이모부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이모부를 쳐다보고 있던 루다가 팔짝 뛰어 옆으로 비켜섰다. 하마터면 폭포수 같은 눈물에 빠질 뻔했다.
“나 이제 새사람 되기로 했어.”
“그럴 리가!”
곰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고말고.”
“진짜야!”
이모부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이죠?”
루다가 묻자 후르륵 콧물을 삼킨 이모부는 울음 끝에 물린 딸꾹질을 흐엉 꾹, 흐엉 꾹 해댔다. 세모눈은 짜부라졌고 눈동자는 천 리쯤 들어가 보였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
이모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스스’, ‘피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이모부가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펼쳤고 떨어져 내리는 이모부를 사뿐히 받아 냈다.
“휴, 살았다!”
이모부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루다야, 쟤들은 누구야?”
이모부가 곰비와 임비를 가리켰다.
“네 친구들이야? 친구라기엔 좀 별스럽게 생겼다.”
“그러니까 그게…….”
루다가 말끝을 흐렸다.
도깨비 존재, 알아도 모름.
이렇게 혈서 아닌 인주를 찍어 맹세까지 했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쟤들은 도깨비라고! 루다는 자신이 한 맹세를 스스로 깰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지.”
이모부 말에 어리둥절한 건 루다였다. 아무래도 이모부는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직 약효가 남아 있어서 그럴 거야.”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곰비와 임비가 낄낄댔다.
“아 참, 어릴 때 이야기하다 말았지?”
이모부가 또다시 울먹였다. 루다는 이번에도 이모부가 눈물을 터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이모부는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아냈다. 이모부는 한없이 진지했고 루다는 그런 이모부가 낯설기만 했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고물상을 했어…….”
“고물상이요?”
“그래, 낡은 물건 주워다가 되파는 고물상 말이야.”
루다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이모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끼니 잇기도 어려웠어.”
이모부가 푸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책 사서 볼 돈이 있었겠어. 가끔 고물상에 들어온 동화책을 읽는 게 고작이었지.”
“역시 공기동은 꼰대야 꼰대.”
“‘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 질색이야. 꽁청장 꼰대가 확실해.”
곰비와 임비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모부의 한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루다는 이모부의 한숨 속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곰비와 임비에게 더 이상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엄포를 놨다. 그러자 곰비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가 데려가 줄게.”
“어딜?”
“어디긴 어디야. 꽁청장 어린 시절이지.”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우리가 누구야?”
“어디로 가면 돼? 고물상으로 가면 되는 거야?”
곰비의 말에 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여행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곰비와 임비는 자못 진지했다.
“간단해. 공기동 손잡아.”
“진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루다의 말에 이모부가 뜨악한 얼굴을 하고 루다를 쳐다봤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설마 내 과거 아니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건 아니지?”
루다가 맞는 말이라고, 이모부 과거로 시간여행을 가는 거라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긴 왜 가는데?”
이모부가 말했다.
“왜긴, 꼭 필요한 순서니까!”
곰비가 말했다.
“맞아, 이게 복수의 마지막 순서면서 복수의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임비가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복수의 완성?”
루다가 물었다.
“복수의 완성은 상처 보듬기야.”
“꽁청장이 자신의 상처를 깊이 들여다봐야 반성이 되고, 진정한 반성만이 복수의 성공이거든.”
루다는 곰비와 임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둘의 말은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했다. 그런데 그때 이모부가 이렇게 말을 했다.
“싫어. 나의 어린 시절은 상처투성이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이모부는 완강하게 말했다. 루다는 곰비와 임비를 쳐다봤다. 둘은 난감하고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은 간데없고 어느새 울상이 됐다.
“시간여행은 시간여행자가 원하지 않으면 안 돼.”
“시간여행은 마음의 문을 여는 거야. 그래서 시간여행자가 싫다고 하면 할 수 없다고.”
어쩔 수 없었다. 루다는 이모부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싶어 이모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곰비와 임비도 루다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모부가 긴 망설임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주저주저 이모부가 입을 열었다.
“너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대…….”
“정말요?”
“루다야, 손잡아.”
이모부가 루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모부가 자신을 믿고 있다니! 루다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이모부의 손을 잡았다. 곰비와 임비가 손을 맞잡자 자연스럽게 원이 만들어졌다. 넷은 손을 맞잡은 채 빙글빙글 제자리 돌기를 시작했다.


8. 이모부의 어린 시절


돌고 돌아 돌아왔다
꽁청장 아기 시절로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공기동 어린 시절로


곰비가 선창을 하자 임비가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루다는 이모부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곰비와 임비의 랩을 듣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다음 순간 루다는 이모부가 살았던 시간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이모부의 어린 시절을 향해 나아가다 기억 속 어딘가로 뚝 떨어졌다.
“세상에, 내가 살았던 곳이잖아!”
이모부가 엉덩이를 털며 소리쳤다. 머리를 땅에 박은 루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넷은 낯선 공터에 도착했다. 동네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산비탈을 등지고 그만그만한 집들이 엎드려 있었다. 이모부가 앞장서 길을 따라가자 작은 슈퍼와 채소가게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타났다. 세탁소를 지나친 이모부가 야트막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그대로야.”
이모부는 ‘기동이네 고물상’ 앞에 멈춰 섰다.
“헉…….”
이모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고물이 쌓여 있는 마당을 지나 살림집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곳에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마루에 걸터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기동아?”
이모부가 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었는지 눈자위가 빨갰다.
“누구세요? 어떻게 저를 아세요?”
기동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더니 얼른 눈물을 닦고 콧물을 삼켰다.
“나는 그러니까…….”
이모부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기동이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기동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미래에서 온 또 다른 너야. 너를 만나서 꼭 한번 안아 주고 싶었어. 그래서 왔어.’ 그러자 기동이가 이모부를 쳐다봤다. 둘은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린 기동이도 기동이
늙은 기동이도 기동이
이 기동이도 기동이
저 기동이도 기동이


곰비가 랩을 하자 임비가 곰비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때 이모부가 기동이와 키를 맞추더니 이렇게 물었다.
“근데, 기동아 왜 울고 있어?”
기동이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내 책을 팔아 버렸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건데…….”
“그래. 우리 아버지가 그런 양반이지.”
이모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이야기책을 보면 가난하게 산다고 못 읽게 해요.”
기동이가 다시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맞아. 우리 아부지는 한사코 이야기책을 못 읽게 했지. 꼭 출세해야 한다고, 출세에 필요한 책만 읽으라고 했어.”
이모부가 시무룩하게 말하며 방 안을 살폈다. 어둑한 방 안을 책이 둘러싸고 있었다. 방 안이 다 뭔가! 마루며 시렁 위에까지 책이 그득그득했다. 모두 공부에 필요한 책들이었다.
“기동아, 네 책 다시 찾아 줄게.”
곰비가 앞으로 쓱 나섰다.
“걱정하지 마.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렇지 루다야?”
임비가 갑자기 루다를 보고 물었다. 루다는 그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자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스카이콩콩을 타듯 제자리 뛰기를 했고, 부채를 접었다 폈다, 앞으로 뒤로, 흔들어 댔다.


“돈아, 나와라.”
“돈아, 돈아. 많이 나와라.”
“돈아, 돈아, 돈아. 진짜 많이 나와라.”


부챗살 사이사이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 편의점 앞에서 보던 바로 그 돈이었다. 어느새 기동이 앞에 꿰미에 꿰진 엽전이 수북이 쌓였다. 루다는 갑자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몇십 년 과거로 왔지만, 이곳이라고 엽전 따위가 쓰일 리 없었다.
“우와, 이거면 됐어.”
이모부가 엽전을 보더니 무릎을 꿇고 허겁지겁 돈을 줍기 시작했다. 루다는 어리둥절했다. 이모부는 도대체 뭐가 됐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것만 있으면 기동이 책을 다시 찾을 수가 있어.”
“정말요?”
“정말이지. 정말이고말고.”
그러더니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다.
“기동아, 이제 됐다.”
이모부가 엽전 꿰미를 흔들었다. 그러자 기동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가지고 책 찾으러 가자. 아니지 일단 김씨 아저씨 집에 들러서 요즘 쓰는 종이돈으로 바꿔야겠다.”
“아버지한테 혼나는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이모부가 기동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골목을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골동품상을 하는 김씨 아저씨네였다. 마치 김씨 아저씨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모부와 기동이를 반겼다. 거기다 김씨 아저씨는 이모부가 내민 엽전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좋은 물건을 보았을 때 짓는 표정처럼 보였다. 이모부는 김씨 아저씨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흥정하기 시작했다. 엽전 열 냥에 종이돈 하나가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김씨 아저씨와 이모부의 흥정은 빈틈이 없었다. 곧 김씨 아저씨가 엽전을 종이돈으로 바꿔 줬다. 루다는 처음으로 이모부가 어른처럼 보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
기분이 좋아진 이모부가 돈을 흔들며 말했다. 골동품상을 나와 한참을 걷자 시장이 나왔다. 국밥집은 시장 끝에 있었다.
“우아, 국밥이 설설 끓고 있어.”
“배고플 땐 뭐니 뭐니 해도 국밥이 최고지.”
국밥이라면 루다도 좋아했다. 시원한 국물이 속을 풀어 준 데다 국물 속 구수한 돼지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서 아빠랑 자주 가는 단골집도 있었다.
“얼른 책 찾으러 가요.”
기동이가 마지막 국물까지 쪼르륵 마신 후 이모부를 졸랐다. 그러자 이모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모부의 미소는 마치 조각달처럼 빛났다. 미소 하나가 사람을 저렇게 바꿔 놓을 수 있다니 루다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책방이 어딘지는 알아요?”
루다가 수저를 놓으며 물었다.
“걱정 말어. 헌책방은 딱 한 군데뿐이니까.”
이모부는 거침없이 헌책방을 향해 갔다. 헌책방은 시장통 입구에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기동이 책은 아직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소곳이 책방 한쪽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 진짜 내 거예요?”
기동이가 끌어안은 책은 24권짜리 ‘전래동화’였다.
“당연하지. 내 친구들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렇지?”
이모부가 루다와 곰비, 임비를 쳐다봤다.
“맞아.”
루다가 말했다.
“그렇고말고.”
“곰비가 어린 기동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
곰비와 임비가 맞장구를 쳤다.
“집에 가자.”
이모부와 기동이가 손을 잡았다. 곰비와 임비는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루다는 발걸음도 가볍게 고물상으로 갔다.


9. 아이스께기


“이놈의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녀.”
고물상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고물상 입구에 세워진 손수레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높이 쌓인 고물 때문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곰비와 임비가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그다음에 기동이가, 그다음에 이모부가 그리고 루다가 차례로 굳어 버렸다.
“숙제는 다 했어?”
이모부하고 똑같이 생긴 아저씨가 기동이 쪽으로 다가왔다. 아저씨는 체구가 다부지고 작달막했다. 이모부하고 다른 점은 온몸에 털이 덥수룩했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안 들어가고.”
아저씨가 기동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기동이의 표정이 부루퉁했다.
“안 되겠어. 담판을 지어야지.”
루다가 말릴 새도 없이 이모부가 성큼 아저씨 앞으로 다가갔다.
“뭐요, 당신은?”
이모부를 본 아저씨가 눈을 부릅떴다.
“저는 아저씨 아들이에요.”
“당신이 내 아들이라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담판을 짓겠다던 이모부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을 했다. 별안간 나타나 아들이라니, 그것도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갑자기 아들이라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이모부는 생각보다 거짓말에 서툴렀다. 루다는 큭 웃음이 났다.
“이분은 기동이 선생님이에요.”
이번에는 루다가 나섰다. 그런데 그 말이 먹혔다. 루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저씨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이구, 선생님!”
이모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제법 선생님 같았다.
“선생님, 우리 기동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럴 리가요.”
이모부가 손사래를 쳤다.
“기동이가 좋아하는 이야기책을 제가 좀 가져왔습니다.”
이모부가 전래동화 24권을 아저씨 앞으로 내밀었다.
“이야기책을 보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아저씨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책을 밀어냈다. 그러자 이모부가 아저씨를 설득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책을 보면 똑똑해지는 것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해져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다. 그리고 부자도 될 수 있다’며 이런저런 말을 줄줄이 읊어 댔다. 아저씨는 이모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건 아니라는 듯이 중간, 중간 도리질을 했다. 이모부의 길고 긴 설득에도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고 기동이에게 이야기책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안 되겠어.”
“우리가 나설 차례가 분명해.”
곰비와 임비가 팔을 걷어붙였다.
“도깨비부채를 쓸려고?”
루다가 물었다.
“더 이상 도깨비부채는 안 돼.”
“안 되고말고. 루다랑 꽁청장 데리고 집으로 되돌아가려면 더 이상 도깨비부채를 쓰면 안 되지.”
곰비와 임비가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자칫 도깨비부채의 힘을 함부로 썼다가는 영영 이곳에 갇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약을 만들게?”
루다가 물었다.
“약은 약발이 중요한데…….”
“시간여행 중에는 약도 소용이 없어. 약발이 전혀 안 먹혀.”
곰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큰소리를 친 거야?”
루다는 어이가 없었다. 곰비와 임비는 루다의 다그침에 ‘어맛, 뜨거라’ 하는 얼굴을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일을 벌였지만 곧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루다 네가 해야겠어.”
“루다가 제격이야.”
“나?”
루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곰비와 임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다는 어른을, 그것도 황소보다 고집이 센 어른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아이스께끼 아저씨가 고물상 앞을 지나는 게 보였다. 아이스께끼 아저씨는 께끼통을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이모부, 돈 얼마 남았어요?”
“돈?”
이모부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돈은 120원이 남아 있었다. 루다가 급하게 아이스께끼 장수를 불렀다.
“아저씨, 아이스께끼 하나에 얼마예요?”
“한 개에 20원.”
“딱 맞아떨어지네. 여섯 개만 주세요.”
루다가 120원을 내밀었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네. 여기서 떨이까지 싹 팔아 치웠지 뭐야. 여기 남은 하나는 덤이다.”
아이스께끼 아저씨가 사람 좋게 웃으며 아이스께끼 일곱 개를 건넸다. 아이스께끼는 오렌지주스 맛과 팥물 맛이 전부였지만 시원하고 달콤해 보였다.
“아저씨, 먼저 드세요.”
루다가 팥물께끼를 아저씨에게 건넸다. 루다는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이스께끼 아저씨를 본 순간 입맛을 다셨고 팥이 든 아이스께끼를 보자 침을 흘렸다.
“그래도 될까?”
“되고말고요.”
아저씨는 아이스께끼를 받자마자 포장지를 벗겨냈다. 이모부가 공짜를 좋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빠인 아저씨를 빼닮은 거였다. 한마디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거였다. 아저씨가 아이스께끼를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포장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기동이도 방에서 나와 오렌지 맛 아이스께끼를 달게 빨아 먹었다.
“맛있죠?”
루다가 아저씨를 보며 물었다.
“맛있지!”
대답하는 아저씨의 표정이 많이 수그러져 보였다.
“아저씨?”
“응.”
“저기 말이에요…….”
아저씨가 아이스께끼를 물고 루다를 쳐다봤다.
“제가 기동이를 좀 아는데요. 기동이는 이야기책이 아이스께끼만큼 달콤하대요. 아니 그만큼 좋대요.”
“턱도 없는 소리. 이야기책은 안 된다니까!”
그러면서 아저씨가 기동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기동이가 ‘맞아, 맞아’ 하며 아저씨를 향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저도 기동이만큼은 아니지만 이야기책이 정말 좋거든요.”
아저씨가 아이스께끼를 들고 루다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아저씨 있잖아요…….”
루다는 아까부터 준비한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고 이렇게 말해 버렸다.
“글자 읽을 줄 모르죠?”
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긴 침묵이 이어졌고, 아저씨 손에 들린 아이스께끼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아저씨 눈치를 보느라 조용했다.
“그래, 나 한글 몰라.”
한숨 소리와 함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글자 몰라도 돼.”
곰비가 아저씨 눈치를 보며 말했다.
“글자를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임비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엄청 불편하지.”
이모부가 조용히 껴들었다.
“울 아부지가 글자 알면 가난하게 산다고 공부를 안 시켰어. 맨날 지게 지고 밭에 가는 게 일이었지…….”
아저씨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기동이는 공부 열심히 시킬 거야.”
루다는 이때다 싶었다. 그래서 덤으로 받은 아이스께끼를 얼른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슬그머니 아이스께끼를 받았다. 그리고 못 이기는 척 이렇게 말했다.
“기동아, 이야기책 읽어도 좋아.”
아저씨가 두 번째 포장지를 벗기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모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기동이는 아이스께끼를 물고 입을 다문 바람에 입술이 아이스께끼에 붙어 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너무 좋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고집은 좀 세도 딴소리하는 사람은 아니지.”
아저씨가 말했다.
“대신 공부 게을리 해면 얄짤없다.”
기동이가 알았다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모부가 이제 됐다며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데 저기 있는 책들 조금만 치워 주면 안 돼요?”
기동이가 아저씨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동이 손은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을 가리켰다.
“그건 안 돼.”
아저씨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기동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그것까지는 양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곰비와 임비가 루다를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궁금한 것이 아주 많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수로 고집불통인 저 양반 마음을 돌린 거야?”
“별거 없어.”
루다가 짧게 말했다.
“별거 없다고?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루다야, 아무도 못 한 일을 네가 했어.”
“그게 말이지…….”
루다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아저씨도 어릴 적에 하고 싶은 걸 못 했잖아. 그걸 살짝 건드린 거지 뭐. 그리고 이건 특급비밀인데 말이야.”
“그게 뭔데?”
“맛난 걸 먹다 보면 닫힌 마음이나 화난 마음이 열리기도 하고 마음이 풀리기도 하는 법이거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흠, 별거 아니네.”
곰비가 콧방귀를 핑 꼈다.
“별거 아니라니. 그렇게 어려운 걸 알고 있다니. 루다, 짱.”
임비가 엄지손을 추켜세웠다. 곰비와 임비의 의견이 처음으로 엇갈렸다. 둘은 실과 바늘처럼 늘 한 묶음이었는데 이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워진 루다가 이렇게 물었다.
“둘이 이렇게 갈라지는 거야?”
“갈라지기는!
“도깨비도 자기 생각이 있거든.”
루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또 그러잖아.”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사이 이모부는 기동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들인 이모부를 향해 ‘선생님, 잘 가시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이모부도 아저씨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만 갈까?”
이모부가 루다 곁으로 오며 말했다.
“가야지.”
“지금도 늦었어. 서둘러야 해.”
루다가 앞장서 고물상을 나왔고 맨 마지막으로 이모부가 뒤따라 나왔다. 이모부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손을 흔드는 기동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비탈을 내려오자 고물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넷은 실개천을 따라 걸었고 곧 공터가 나타났다.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폈다. 그리고 임비가 랩을 아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공기동 미래로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공기동 늙은 시절로


곰비가 도깨비부채를 흔들었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두 번 다시 올 일 없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언제든지 올 수 있지


임비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자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루다와 이모부가 ‘악’ 소리를 내며 홀로그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재로 돌아가는 길은 소라 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구불거렸다. 먼 듯 가까운 듯 파도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그러다 파도 소리가 딱 멈췄고 루다와 이모부가 또다시 툭 떨어졌다.
“착지감이 아주 나빠.”
착지감은 그렇다 하더라도 도착한 곳은 사방이 어둠이었다.
“투덜대지 마.”
“투덜대면 국물도 없다.”
곰비와 임비가 다시 한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야?”
이모부가 묻자 곰비가 도깨비부채로 뭔가를 툭 치는 소리가 났다. 이모부가 윽 소리를 냈고 동시에 파바박 하고 불이 들어왔다. 루다가 눈을 비볐다. 점점 시야가 밝아 오고 있었다. 다행히 다시 돌아온 곳은 행사장이었고, 행사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행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때 행사장 구석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가짜 이모부였다.
“설마, 우리가 늦은 건 아니지?”
“절대 그래서는 안 되지.”
“진땀 났잖아.”
가짜 이모부는 몹시 지치고 화난 얼굴이었다.
“미안, 미안. 이제 쉬어.”
“그래, 그만 쉬어.”
곰비가 가짜 이모부 곁으로 다가가 머리카락 한 올을 쏙 뽑았다. 그러자 ‘푸시시’ 소리와 함께 가짜 이모부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저런 인간 안 부를 거지?”
루다 뒤에 숨어 있던 이모부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자신의 분신을 본 이모부의 기분은 별로인 것 같았다.
“꽁청장 하는 거 봐서.”
“맞아. 그건 꽁청장 하기 나름이야.”
곰비와 임비의 말에 이모부가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이렇게 말했다.
“루다야, 이제 피자 배달은 그만해도 돼. 그동안 안 준 용돈도 챙겨 줄게.”
“정말요?”
루다가 큰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책도 잘 빌려줄 거고 또…….”
“또요?”
“우리 남구에 어울릴 만한 아니, 아니 아이들에게 딱 알맞은 어린이 전용 도서관도 지을 생각이야.”
이모부에게 제대로 복수를 한 모양이었다. 루다와 곰비, 임비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자 이모부가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때 곰비가 머리카락 한 올을 들고 이모부 곁으로 다가섰다. 그걸 본 이모부가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얼굴이었다.
“공기동, 여기 네 머리카락.”
“괜찮아, 됐어.”
이모부가 돌아서 뛸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임비가 암팡지게 팔을 붙잡는 바람에 이모부는 꼼짝하지 못했다.
“얼른 심어 버려.”
곰비가 머리카락 한 올을 이모부 정수리에 팍 꽂았다. 이모부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깨물고 이모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구청 마당에는 차갑게 식은 가로등이 여름밤을 밝히고 있었다. 이모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차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우와, 차벌레다.”
“차벌레 내장 속은 진짜 편하고 좋아.”
“타!”
이모부가 흔쾌히 말했다. 처음 타 보는 이모부 차는 피자 배달용 미니 봉고차와 비교 불가였다. 루다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곧이어 곰비와 임비가 차에 탔고 이모부가 시동을 걸었다.
“루다야, 핫불피자 어때?”
이모부가 물었다.
“공짜로요?”
“그럴 리가!”
이모부가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루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콜라 좋아.”
곰비가 입맛을 다셨다.
“얼음도 가득 들어 있으면 좋겠다.”
그러자 임비도 입맛을 다셨다. 루다는 곰비와 임비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화들짝 놀랐다. ‘피자가게 콜라는 평생 공짜’라는 그 말이! 루다는 어쩐지 기분이 찝찝했다.


공짜 콜라 아주 좋아
생각만 해도 찌릿찌릿
평생 공짜 너무 좋아
생각만 해도 짜릿짜릿


그러거나 말거나 곰비와 임비는 발을 굴러 장단을 맞췄다. 루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조만간 아빠 가게 콜라가 통째로 동이 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루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스르르 답이 떠올랐다. 답은 ‘아빠한테 물어보고’였다. 루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모부 차가 미끄러지듯 밤공기를 가르며 피자가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해윤
작가소개 / 정해윤

2017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09년 광주일보 동화당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토끼 케이크」외 6편

토끼 케이크 히섶 웅크려 식빵 굽는 고양이처럼 발 모으고 빵 굽는 흰토끼 기다란 초 두 개 꽂힌 생크림 케이크 다가가 후우- 불면 안 돼 깡충깡충 달아날 테니. 청개구리와 손잡기 지독스레 말 안 듣는 청개구리 같은 동생에게 누나가 말한다. 우리 놀이터 가서 소꿉놀이할까? - 아니, 운동장 가서 공놀이할 거야. 그럼 공놀이하고 그네 타자! - 아니, 공놀이하고 시소 탈 건데? 그래, 그네 타지 말고 시소 타자. - 아니, 나 시소 안 타고 그네 탈래. 좋아! 그럼 운동장까지 각자 뛰어갈까? - 아니, 나는 누나 손잡고 걸어갈 거야! 청개구리와 손잡은 누나가 웃는다. 제2의 로봇태권V 개발 본부 볼트 발견! 너트 발견!(땅콩 말고) 볼펜 스프링 발견! 짝지가 버린 머리핀 발견! 찌그러진 냄비 발견! 태워 먹은 국자 발견! 낡은 기타 줄 발견! 부러진 안경테 발견! 열쇠 발견! 알전구 발견! 버려진 수도꼭지 발견! 텔레비전 안테나 발견! 수많은 부품들을 발견! 발견! 발견! 이제 조립만 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겠지? 낯선 동네 코스모스 가는 이파리가 팔을 간질이는 좁은 길 낯선 이가 낯선 동네로 들어선다 쌀농사 짓는 메뚜기들이 폴폴 뛰며 마중한다 맞은편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던 백발이 다 된 진돗개 한 마리 낯선 이를 보고 우뚝 멈춰 서는데 메뚜기들 황급히 논으로 달아나고 두꺼비 한 마리 길가로 나와 몸을 납작 엎드리는 걸 보고 낯선 이도 허리 숙여 인사한다. 혀가 쭉 나온 백구 어르신 왈, “왈 왈왈 왈왈!" 잠시 눈을 흘기더니 코를 켕 풀고 가던 길 가신다. 헝클어진 머리칼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헝클어진 머리를 보면 괜히 웃음이 나와 쓰다듬어 주고 싶지 아니, 정말은 더 마구 헝클고만 싶어 아마도 헝클어진 머리칼은 조금 더 헝클어져도 괜찮을 거야 머리칼 깊숙이 손을 넣어 마구 헝클여도 좋아할 거야 헝클어진 그대로 푸식 푸식 푸시시 웃고 말겠지 바보 같은 너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수다쟁이들 청각 장애를 가진 어른 넷이 모여 떠든다 수다 떠는 아이들보다 더 시끄럽게 떠든다 푸르락누르락하는 얼굴 들썩거리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휘저어대는 손짓으로 떠든다 보기만 해도 왁자지껄 못 말리는 수다쟁이들이 소리 없이 떠든다 너무 시끄럽다. 얼음 차며 간다 집으로 가는 길 주먹만 한 얼음덩이 하나 골라 발로 차며 간다 집 앞까지 얼음을 몰고 가면 소원 하나 이루어지는 거다 단, 손을 쓰면 반칙! 발로 살살 차며 가는데 얼음은 잘도 미끄러진다 모서리가 깎이고 녹아 데구루루 잘도 굴러간다 얼음은 어느 집 마당으로 굴러가고 자동차 밑으로도 굴러간다 사나운 개집 앞으로도 굴러가고 얕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어느 집 마당을 들락거리고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고 개가 한눈팔 사이를 기다리고 흙탕물 웅덩이로 뛰어들고 만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저기 우리 집이 보이는데 톡, 톡, 톡, 툭-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