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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롤」외 6편

  • 작성일 2023-08-30
  • 조회수 445

헤어롤

박지영


축 처진 마음

납작해진 마음

헤어롤로 말아요

동그랗게

     

구겨진 마음

헝클어진 마음

헤어롤로 말아요

매끈하게

     

쳐다보지 말아요

이해하려 하지 말아요

괜찮다는 말도 말아요              

     

삐져나가려는 마음까지 달래서

헤어롤로 말아요

한 올도 빠짐없이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헤어롤을 풀어도

축 처지지 않게

선생님 잔소리에도 끄떡없게

체육시간에 달려도 헝클어지지 않게

온몸 흔들며 웃어도 흐트러지지 않게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주문을 외며 학교로 가요






주사위의 꿈



공중에서 그대로 스톱!

     

또는

     

모서리로 착지한 채

그대로 스톱!

     

다들 입 벌리고 쳐다보겠지

놀라서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겠지

꿈인가 생시인가 팔을 꼬집어 보겠지

     

휴대폰을 꺼내 사진 찍고 난리 나겠지

SNS 올리고 댓글 다느라 정신없겠지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신이 나겠지

안 믿어 주면 어쩌나 걱정도 하겠지

     

그러는 사이

이기려는 마음은 새까맣게 잊겠지

    

오늘도 주사위는

장딴지 힘을 기르고

공중부양 연습 중입니다






그런 말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요

- 그런 말하면 아줌마 기분 나빠 해 

    

와! 아저씨 배가 남산만 해요!

- 쉿! 그런 말은 실례야

    

엄마는 내 말을 그런 말로 바꿨다가

- 그런 말 하면 못써

못 쓰는 말로 바꿔 버린다

      

저 공부 못해요

-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어떤 말은 잘못도 없이 부끄러운 말이 된다

    

나는 원래 말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자꾸 없어진다

없어진 말들은 모두 어디 있을까

     

비밀번호 걸어 둔 일기장에

친구에게 속삭이는 귓속말에

문자 보내느라 바쁜 엄지손가락 끝에

     

꼭꼭 숨어 있지






쉼표



언제부터였을까, 쉼표가 좋아졌어요


예전엔 느낌표와 말줄임표만 있으면 됐는데, 말이죠

느낌표를 두 개 이상 쾅쾅!! 찍어야 내 말이 들릴 것 같았고

말줄임표가 있어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말하기 좋았죠


느낌표처럼 목소리가 크지 않는, 쉼표

물음표처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쉼표

많이 찍어도 말줄임표보다 덜 슬픈, 쉼표

혼잣말 같은, 쉼표

     

쉼표가 왜 좋아졌는지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말하면 또, 사춘기라서 그렇다고 할 거예요

     

지금 내겐, 쉼표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마음이 또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일단 마침표 대신 

쉼표,






점점 돼지가 되지



저금통으로 태어난 토끼는 생각했대


열쇠고리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베개도 아니고

하필이면 저금통이라니


가방에 매달고 다니지도 않지

놀이터에 데리고 가지도 않지

친구들한테 자랑도 안 하지

뺨에 뽀뽀도 안 하지


나랑 같이 자지도 않지

꼭 껴안고 울지도 않지

그래서 내가 눈물 닦아 주며 달래 줄 수도 없지


그냥 혼자서 많이 먹기만 하면 돼지

투정 부리지 않고 맛있게 먹으면 돼지

배가 불러도 귀를 팔랑팔랑 흔들며 계속 먹으면 돼지


배가 꽉 차면

내 둥근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겠지

나를 꼭 껴안고 즐거워하겠지


그렇게 점점

진짜 돼지가 되지






거북이 그리기



가로선 죽-죽 

세로선 휙-휙 그어 만든 

거북이집 거북이는

신나게 달려요

제멋대로 달려요

     

육각형 기와

사다리꼴 기와

촘촘 쌓아 놓은

거북이집 거북이는

아슬아슬

조심조심 걸어가요

     

삐거덕,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한참을 다시 지어야 하니까요






헛스윙



야구배트가 말했어

공 맞추는 일도 이제 시시해


야구화도 거들었어

똑같은 길 뱅뱅 도는 것도 지겹고


주자도 슬쩍 마음을 털어놨지

홈으로 꼭 가야 하는 걸까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거야


떨어지는 해를 맞췄어

웅성웅성 누런 먼지를 맞췄어

운동장 서성이는 바람을 맞췄어


2루로 달리는 대신

터덜터덜 벤치로 돌아오는데

누런 배트가 속삭였어


넌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타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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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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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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