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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사진

  • 작성일 2023-09-27
  • 조회수 348

감정사전

은정


   1교시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는데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교실은 아이들의 수다로 시끄러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다. 짝꿍은 아예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다. 고개를 숙이다 의자가 조금 밀렸다. 뒷자리 책상을 쳤다. 연필이 굴러떨어졌다.

   “이정우, 조심해.”

   뒤에 앉은 애가 인상을 쓰며 노려봤다.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과 들어왔다. 옆에 어떤 아저씨와 남자아이가 따라왔다.

   “전학생인가 봐.”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도 따라왔어.”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오늘따라 예쁘게 차려입고 상냥한 목소리로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뒤에서 누군가 ‘우웩’거렸다. 마귀할멈이 별명인 선생님 목소리가 성우처럼 들렸다.

   “중요한 프로젝트에 우리 반이 선택되었어요.”

   선생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자기소개를 했다.

   “여러분 저는 사이보틱스사의 연구소 책임 소장인 김도균 박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에서 휴머노이드를 개발한 사실을 뉴스를 통해 들었을 거예요.”

   사이보틱스사는 로봇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에 인간을 닮은 로봇이 완성되었다면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로봇에게 인간을 닮은 정밀한 모습을 담기 위한 실험 프로젝트를 시행하게 되었다는 거다. 바로 12살 평균 어린이의 행동 양식을 학습하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거다. 휴머노이드는 인공지능을 가졌고 기본적인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들과 생활하면서 자율적으로 행동과 감정을 세밀하게 배운다고 했다. 한 달간 학교와 집을 오가며 우리들과 교류를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로봇으로 완성된다는 거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 일부가 로봇을 이룬다고 하자 좋아했다.

   “정말 저 로봇이 내가 다리 떠는 것까지 따라 할까?”

   한 아이가 다리를 떨면서 말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의 춤을 보여 줄 거라고 했다. 공부 천재 반장은 공부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줘서 똑똑한 로봇을 만들 거라고 했다.

   “똑똑한 어린이가 아니라 평균 어린이라잖아. 너는 평균 이상이니까 너야말로 탈락이야.”

   누군가 쏘아붙이자 반장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지 생각해봤다. 떠오르는 모습이 없었다. 모두 자신이 없었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휴머노이드는 프로그램되어 있는 다양한 행동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쓰고 행동하는지, 또 어떤 감정을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이론이 아니라 실전에서 배웁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돼요.”

   박사님 설명에도 아이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장기를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 또한 평소 같으면 벌써 열 번은 더 소리쳤을 텐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로봇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전학생이라고 생각하세요. 휴머노이드의 이름은 희망이에요. 잘 대해주고 학교 마치면 돌아가면서 같이 집에서 잘 거예요.”

   박사님과 교장 선생님이 나가자 희망이는 미소를 지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 전학생 같았다. 하지만 희망이 가슴에 붙어 있는 네모난 모니터는 녀석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모니터에는 그래프가 물결쳤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수치화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오늘따라 선생님은 친절하게 수업했다. 아이들도 덩달아 얌전한 아이들로 변했다. 맨 뒤에서 졸거나 떠들던 영민이 패거리들도 얌전했다. 자신들의 모습이 로봇을 통해 입력되고 그 모습이 다시 로봇의 성격과 행동을 만든다고 하자 아이들은 얌전하게 있었다. 저마다 자신들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나는 평소에도 말이 없어서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첫 교시 다른 날과 너무나 다른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서류를 들고 나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로봇 주위로 몰려왔다.

   희망이는 큰 눈과 매끄러운 피부, 까만 머리카락에 코가 오뚝했다.

   “너무 잘생겼다. 이건 평균이 아니라 평균 이상이잖아. 아이돌 가수 해도 될 것 같아.”

   여자아이들이 소곤거렸다. 

   “저리 비켜.”

   아이들을 밀치는 영민이 모습이 보였다.

   “잘 봐. 내가 바로 우리 반 짱이야. 내 모습을 잘 보라고.”

   영민이가 말했다.

   여자애들 몇몇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짱이 뭐야?”

   희망이가 아주 예의 바르게 물었다.

   영민이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웃었다.

   “바로 대장이란 뜻이야.”

   희망이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이는 희망이 옆에 앉아 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설명했다. 친구들이 싸우면 자신이 심판을 봐주고 판결을 한다는 둥, 급식은 항상 먼저 먹는다는 둥, 자신을 반 친구들이 다 좋아한다는 둥 쉬는 시간 내내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모든 아이들이 다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희망이가 거짓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화가 났다. 나는 영민이가 싫고 밉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영민이 눈 밖에 나서 아이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영민이가 명령을 내리면 말없이 할 수밖에 없다. 

   저녁에 모처럼 아빠가 일찍 왔다. 형은 학원 가서 보이지 않았다. 맛있는 반찬이 가득했지만,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아빠가 한 번씩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 가슴이 철렁했다.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형을 쳐다볼 때면 부드러운 눈길이 된다. 하지만 나를 쳐다볼 때는 차갑게 변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변하기에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오늘 기사에 정우 학교가 나왔더군. 휴머노이드 희망이가 정우 학교에서 아이들 행동을 관찰해서 프로그램 된다는 거야. 정우도 그 휴머노이드를 봤니?”

   모처럼 아빠가 친절하게 물어봤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또다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게, 그 휴머노이드가 우 우리 반에 왔어요.”

   아빠가 일순 눈을 찡그렸다.

   “아이들의 모습이 반영되겠구나. 그런데…….”

   아빠가 나를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아빠가 말을 안 해도 안다. 형이라면 휴머노이드한테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말했을 거다. 

   형은 어렸을 때부터 영재원에 다녔고 현재는 제일 어려운 특목고에 다니고 있다. 전교에서 항상 1, 2등을 다투고 있어 엄마 아빠의 자랑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말도 더듬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아들이다. 가끔 아빠는 내가 없었으면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빠 뒤를 이어 의사가 될 형이야말로 진정한 아빠의 아들이다.

   “덜떨어진 행동이나 보이지 마라.”

   아빠가 맛없는 반찬을 집었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저녁밥을 대충 먹고 방에 들어와 문제집을 풀었다. 한 시간 후에는 수학 과외 선생님이 온다. 그때까지 문제집을 보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엄마 눈 밖에 나지 않는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희망이를 생각했다. 희망이 앞에서 나도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내게 근사한 모습이 과연 있을까. 아니 그냥 희망이랑 딱지치기를 하거나 같이 좋아하는 만화, 게임,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몸이 약해 축구도 잘 못 하고 운동에도 흥미가 없다.

   학기 초 반 대항 축구 시합에서 내가 건네준 패스가 잘못되어 영민이는 골을 넣지 못했다. 그러자 1반과의 축구 시합에서 진 게 나 때문이라며 화를 냈다. 그 뒤 심심하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나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을 조금 더듬어도 그럭저럭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쉬는 시간에는 레슬링 심판도 했었는데. 이제는 영민이의 노려보는 눈길 때문에 다른 남자애들이 나를 놀이에 끼워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여자애들하고 놀 수도 없다. 

   나는 희망이와 하루만이라도 재미있게 놀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해보았다. 벌컥 문이 열리고 엄마와 과외 선생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그런 내 모습에 엄마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난 뭘 해도 안 된다. 그렇게 지루한 수학 과외를 했다.


   희망이는 누구보다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여자애들이 먼저 희망이를 앉혀 놓고 수다를 떨었다. 여자애들은 뭐가 그리 웃긴 지 까르륵 웃느라 바빴다. 그럴 때면 나도 여자애들 사이에서 같이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더 덜떨어진 놈 취급을 당할까 봐 그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넌 태사자 드라마 몰라?”

   우리 반 드라마 덕후 예지가 눈을 빛내며 말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이 그 드라마 너무나 재미있다며 어제 남주랑 여주랑 드디어 만났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희망이는 예의 바르고 침착한 얼굴로 주변에 있는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관찰하듯이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영민이가 또다시 희망이한테 오더니 남자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남자애들이 교실 뒤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잘 봐. 이렇게 레슬링을 해서 이기는 사람 두 명이 최후의 결투를 하는 거야.”

   영민이는 힘이 세서 항상 힘으로 하는 게임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남자애 둘이 뒤엉켰다. 희망이는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영민이가 희망이한테 달라붙었다.

   아마 희망이가 얼마나 힘이 센지 궁금했던 것 같다. 희망이는 영민이와 레슬링 하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둘은 한참 힘겨루기를 했다. 영민이가 조금씩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희망이는 힘이 아주 세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영민이를 이기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이놈들, 아침부터 싸움박질이야. 영민이랑 희망이… 아 희망이구나.”

   희망이를 알아본 선생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친절해졌다. 희망이한테 다가가더니 희망이의 가슴에 달린 모니터를 흘낏 곁눈질했다. 

   “혹시 지금 내 모습도 녹화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모니터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분석해서 밤에 데이터로 분류합니다. 그다음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삭제합니다. 행동 패턴을 익힐 뿐이에요.”

   선생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또다시 고운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도 대체로 조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소와 똑같아졌다.

   화장실 갈 때 희망이가 나를 따라왔다. 

   “화장실에 같이 갈래?”

   희망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군가 급식실이나 체육관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냥 아이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무리 지어 다닐 뿐이었다.

   “어, 어 그래.”

   “네 이름은 뭐야? 반 아이들 모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내게 말을 시켰는데 너와는 말을 하지 않았어.”

   희망이가 물었다. 

   “그, 그런가. 나는 이정우라고 해.”

   “정우. 정우야 만나서 반가워.”

   희망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순간 희망이가 로봇이어도 상관없었다. 로봇이라도 나와 함께 학교에서 친구로 지내며 같이 생활하는 친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꿈꾸었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자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희망아 이런 찌질이 행동 데이터는 필요 없을걸.”

   영민이가 씩 웃으며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숨이 막혔다.

   희망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의 표정과 행동 패턴을 분석 한 결과 이건 전형적인 괴롭힘이라는 데이터가 출력되었어.”

   희망이 말에 영민이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아니야. 우린 아주 친해. 이건 남자애들이 친하면 하는 행동이라고. 그렇지 정우야.”

   영민이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죄며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고개를 숙이더니 나한테 귓속말했다.

   “야 웃어.” 

   영민이가 내 목을 조른 채 흔들었다. 나는 웃고 싶었지만, 머리가 흔들려 표정이 일그러지려 했다. 다시 영민이가 희망이한테 등을 돌린 채 내 얼굴을 보며 무서운 눈짓을 보냈다.

   “그, 그럼. 희망아. 영민이랑 나는 친한 친구야.”

   희망이가 말이 없자 영민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모니터를 탕탕 내리쳤다.

   “야, 너 방금 이 행동 데이터에 혹시 내 이름도 들어가?”

   “아니. 난 개별 행동을 입력해서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데이터에 반영해. 개개인이 아닌 사람들의 행동을 파악할 뿐이야.”

   “고자질하지 않는다는 얘기지?”

   희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희망아. 우린 화장실 갔다 올게. 넌 교실로 들어가. 어차피 넌 화장실 안 가잖아.”

   영민이가 씩 웃더니 나를 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조금 전 상황이 희망이한테 어떻게 분석될지 궁금했다. 희망이는 기계니까 영민이의 행동이 친구를 괴롭히는 못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당하는 내 마음이 괴롭다는 건 모를 것 같았다.

   “야 이정우, 희망이 있을 때 내 눈앞에 되도록 보이지 마라. 너 보는 거 재수 없거든. 괜히 희망이가 너 같은 찌질이를 괴롭히는 아이로 나를 데이터에 입력하면 안 되잖아. 나는 축구 잘하고 힘세고 짱이란 말이야. 희망이에게 짱이 뭔지 알려 줄 거란 말이야.”

   그러고서 희망이가 연구소로 가면 국물도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모두 희망이 앞에서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희망이가 나라는 아이를 찌질이로 입력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화장실에 나오는데 누군가 영민이 목을 뒤에서 껴안았다. 

   “켁 켁, 숨 막혀.”

   영민이 얼굴이 빨개졌다. 희망이가 한 팔로 영민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희망이가 나를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영민이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희망이가 손을 놓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친하게 지내자.”

   희망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모여 있던 아이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민이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입을 꾹 다물더니 교실로 가버렸다. 희망이가 내 팔을 잡아끌더니 교실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너 코 찡긋거리네.”

   희망이가 말했다. 나는 코를 슬쩍 만졌다. 

   교실에 오자 아이들이 돌아가며 희망이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보여줄거라며 시끄러웠다. 나도 희망이랑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나는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 학원 가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그 어떤 아이도 집에 놀러오지 않았다.

   다행히 아빠가 선생님께 적극적으로 요청해서 내 순서는 다섯 번째가 되었다. 

   전날 미나 집에 초대되어 미나는 희망이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장품 세트를 다 보여줬다고 한다. 희망이가 화장품 바르는 자신의 모습에 아주 감탄했다는 거다. 


   드디어 오늘 학교 끝나고 희망이가 집에 온다. 학원을 대충 마치고 다른 학원 스케줄을 조정해서 모든 가족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엄마는 식탁에 촛불을 밝히고 예쁜 꽃다발로 장식했다. 맛있는 스테이크에 샐러드를 예쁘게 올려놨다. 바쁜 형까지 식탁에 앉았다.

   엄마랑 아빠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평소 스마트폰 보며 밥을 먹던 형도 오늘은 얌전히 스테이크 고기를 썰며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모두 형 자랑뿐이었다.

   “우리 정헌이는 두 살 때 한글을 읽더니 학교 들어가기 전에 구구단을 외웠지. 하하하. 내가 어렸을 때 공부를 좀 잘했거든. 그 머리를 똑 닮았지 뭐니. 그리고 지금은 특목고에서 1등이란다. 운동신경도 뛰어나서 스키도 잘 타고 스케이트도 잘 타고 축구도 에이스라니까.”

   아빠는 형 자랑에 바빴다.

   “정헌이가 어렸을 때 희망이가 있었다면 아마도 희망이의 롤모델 일 순위는 정헌이가 되었을 텐데 아쉽구나.”

   희망이는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말끔히 쳐다보며 아빠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우는 뭘 잘해요?”

   갑자기 희망이가 나에 대해 물었다. 아빠는 희망이 물음에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캑캑, 그게 우리 정우는…, 그렇지 정우도 성실하고 착하고 또 예의가 바르단다.”

   아빠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우는 역사 과목을 좋아해요. 특히 근대 역사를 좋아해요.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선생님이 강의할 때면 눈을 반짝거려요. 그림을 잘 그려서 쉬는 시간에는 조용히 그림을 그려요. 좋아하는 음식은 돈가스, 싫어하는 음식은 묵무침이에요. 긴장하면 말을 더듬고 기분 좋으면 코를 찡긋거려요. 이렇게.”

   희망이가 코를 찡긋거렸다. 

   아빠가 내 얼굴과 희망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빠는 헛기침하더니 이번에는 지난겨울에 놀러 갔던 괌 휴양지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자상한 아빠인지 자랑을 했다. 자랑할 때 보면 형과 아빠 얼굴은 닮았다. 무사히 저녁을 먹고 희망이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네가 집에 오니까 좋다. 너는 마법사 같아. 주변 사람들을 다 변화시켜.”

   “마법사? 마법의 힘을 이용,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사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카드 꾸러미를 꺼냈다. 그중 한 장을 뽑았다.

   “자 이 카드가 바로 마법사 카드야. 이 카드를 내면 상대의 카드 패를 세 개나 보여줘야 해. 상대의 패를 알면 이기기 쉽겠지.”

   나는 희망이랑 카드놀이를 하고 컴퓨터 게임을 했다. 희망이는 로봇이라 그런지 게임을 무척 잘했다. 오늘은 게임을 해도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희망이는 자신이 아는 개그도 알려줬다. 백 가지도 넘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개그를 알 수 있어?”

   “나는 로봇이잖아. 입력한 데이터를 불러들이기만 하면 돼.”

   “아 편하겠다. 나도 공부 잘하고 싶은데 자꾸만 까먹거든.”

   우리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같이 침대에 누웠다. 

   “이건 비밀인데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같이 잠을 잔 적은 네가 처음이야. 너무 좋다.”

   나는 한참을 희망이와 얘기를 했다. 점점 잠이 와서 의식이 가물가물하고 눈이 감기려 했다. 실눈 사이로 희망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희망이의 모니터에 단어가 떠올랐다.

 

      -외로움


   “나도 비밀을 말해줄게. 나는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서 감정 사전을 만드는 중이야. 너의 감정 상태는 외로움이야.”

   희망이가 말했다.

   “그래도 너랑 이렇게 하룻밤 같이 보내서 오늘은 외롭지 않아. 고마워.”

   희망이의 모니터가 물결쳤다. 

   나는 옆에 누운 희망이를 가만히 안았다.

   “따뜻하다.”

   희망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로봇이라 차가워.”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희망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졸려서 점점 눈이 감겼다. 희망이의 모니터에서 빛이 밝게 빛났다. 어렴풋이 감은 눈 사이로 단어가 흐릿하게 보였다.

 

      -우정


   희망이가 코를 찡긋거렸다. 나는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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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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