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내 남친은 내가 지킬 거야

  • 작성일 2023-09-27
  • 조회수 548

내 남친은 내가 지킬 거야                                                   

은정


   “찾았다. 이 범 준.”

   옷장 밖으로 리오의 기계음이 들렸다. 

   옷장 문이 열리고 리오의 입꼬리가 불빛선을 반짝이며 올라가 있었다. 마치 둘이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는 듯.

   “이 범 준 나와라.”

   그다음 말은? 

   이번에는 네가 술래야. 

   이런 말이라면 천 번이고 옷장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네 머리통을 박살 내줄게 이런 말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범준이는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옷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옷장 안에 앉아 있는 범준이 눈높이가 리오와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리오의 눈꼬리 불빛 선이 반달로 웃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지지직거리며 떨렸다. 

   밤새 이상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오전에 리오의 생체프로그램 점검을 로보틱스사에 요청했었다. 하필 하교 시간, 텅 비어 있는 집안 현관문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 문자가 왔다. 여느 때처럼 리오가 현관에서 두 손을 맞잡고 범준이를 맞이하고 있었다.


      바이러스에 의한 뇌 영역의 비정상적인 활성화 반응. 점검이 필요. 혹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회수 날짜를 신속하게 알려주세요. 

 

   범준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오 앞에서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범준이는 얼른 하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리오의 상태가 이상하고 우리 집에 빨리 와 달라고. 현관문 비밀번호는 바로 우리가 만난 날, 0302. 

   “범 준 아 어서 와.”

   평소와 같이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리오가 범준이를 반겨줬다. 하지만 범준이로써는 그 목소리가 소름끼쳤다. 어제 하리의 스마트폰이 방에서 폭발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웃고 있던 녀석이었다.

   얼굴 화면에 감정을 나타내는 눈과 입의 빛선을 보며 인간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범준이의 착각이리. 하지만 요즘 들어 계속 하리에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의 배후에 모두 리오가 있다는 걸 범준이는 리오의 표정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예전과 달리 표정을 이루는 빛선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범준이는 리오 앞에서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려고 했지만 인간의 뇌파를 분석해서 기분을 알아채는 리오에게는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범준아 왜 그러니? 혹시 누가 괴롭혔니. 너의 뇌파가 불안정하고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

   “아, 아니야. 그냥 좀 더워서.”

   바로 네가 괴롭히고 있잖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리오의 무궁무진한 능력 앞에 범준이는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방금 네 핸드폰으로 온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나를 회수한다는 결정이 있더라.”

   리오가 천천히 현관 앞 거실을 일정한 속도로 왔다 갔다 했다.

   “네가 회사에 내 상태에 대한 점검을 의뢰할 줄은 몰랐어. 우린 친구잖아. 잔인하게 나를 비정상 로봇으로 고발하다니. 친구를 팔아먹는 나쁜 놈이 된 건 모두 하리가 시켜서겠지.”

   리오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동그란 얼굴 화면에 빛선으로 표시되는 눈과 입의 디스플레이가 오늘따라 초현실 그림같이 느껴졌다. 

   리오가 최첨단 인공지능 로봇이라 마음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이고 있지만 로봇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범준이로서는 지금 리오의 말과 행동이 반대로 표현되는 것 같고, 그게 너무나 이상했다. 겉과 속이 다른 로봇이라니. 

   딴생각에 잠깐 빠져 있는데 리오가 두 손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지직.

   전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 손을 범준이에게로 뻗고 있었다. 범준이는 본능적으로 잽싸게 발로 리오를 걷어차고 우당탕탕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꼭 잠그고 문 앞에 의자와 탁자를 세웠다.

   “크크크 범준아 아프잖아. 나처럼 작은 로봇에게 발길질이라니. 너 이상해졌어. 이게 하리랑 사귀어서 그렇다니까. 우리 오랜만에 술래잡기하는 거야? 내가 그러면 삼십까지 셀게. 그동안 옷장에 잘 숨어 있어 봐. 찾아내서 바비큐 파티를 해줄게.”

   밖에서 들려오는 리오의 소름끼치는 목소리. 범준이는 저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로봇도 미쳤다는 걸 한 몸에 증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나저나 숨을 데라고는 리오 말대로 옷장밖에 없었다.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기고 급하게 하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리오가 미쳤어.

   쾅. 폭발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 방문이 날아간 것 같다.

   “우후, 어디 갔나. 우리 범준이. 내가 유일한 친구라고 나만 좋아한다던 범준이는 어디 갔나?”

   저 로봇 새끼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딴 말이나 하고 있다니. 범준이야말로 미치고 환장하겠다. 

   이게 다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다. 아니 5학년 전학 와서 1년 내내 왕따를 당했던 일이 먼저인가. 그것보다 그 왕따를 시키며 범준이를 괴롭혔던 동주가 원흉이다. 하필 그 녀석 눈 밖에 나서 5학년 내내 남자애들한테 갖은 설움을 당한 걸 생각하면.

   범준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다. 부모님은 나중에 겨울방학 때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범준이는 부모님이 슬퍼하는 게 싫어 힘들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화를 내셨지만 범준이가 계속 괜찮다고 하자 넘어갔다. 무엇보다 이미 겨울방학이 되어 담임선생님한테 말하기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친구도 없이 외롭고 힘들었을 범준이를 위해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차세대 인공지능 로봇 리오를 사줬다.

   최첨단의 양자칩이 들어 있는 인공지능 로봇 리오는 뇌의 알고리즘이 인간과 비슷하게 짜여졌다. 주인과의 밀착 생활을 통해 인간의 아이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외로운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며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처음 리오가 범준이 집에 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범준이 허리에 닿는 키에 전반적으로 하얀색에 부드러운 재질의 정교한 골격을 가진 로봇이었다. 범준이의 지문을 등록하고 손가락으로 꾸욱 전원 버튼을 켜자 리오의 얼굴에 눈과 입 모양새가 디스플레이로 나타났다. 범준이를 바라보며 웃는 눈과 입의 표시.

   비록 빛선으로 이루어진 얼굴 표정이지만 범준이 말에 찡그리기도, 반달눈이 되기도, 슬픈 눈이 되기도 하면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여줬다. 맞장구쳐주었을 때의 기분은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리오가 있었기에 범준이는 겨울방학 동안 마음의 병도 치유하고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때까지도 리오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날 3월 2일, 범준이가 처음 하리를 만나 사귄다고 리오에게 말했을 때 리오의 얼굴 표정은 눈도 입도 모두 가로선이 되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듯 무미건조한 기계음. 그게 사람으로 치면 약간의 질투였는지도 모르겠다. 리오는 분명 감정을 학습하고 인간 같은 패턴을 가진다고 했으니까.

   하리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때 네가 내게 손 내밀었을 때 네 주위로 빛이 환하게 나더라니까. 까르르륵.”

   하리는 처음 범준이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두고두고 얘기했다. 별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까만 단발머리가 하얀 목덜미 위로 칼 같이 잘려있는 덩치 큰 여학생이 학교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았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이 아픈지 문지르고 있었다. 

   주변에 같이 가던 친구들은 무심하게 여자아이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하긴 하리가 저 정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건 별것도 아니라고 친구들은 생각했으리. 하지만 항상 친구들에게 친절하고 약한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을 듣고 자란 범준이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범준이는 자기를 쳐다보는 여자아이의 눈매가 부리부리하니 참 씩씩하다고 느꼈다. 내민 손이 약간 어색해지려는 순간 빤히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범준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일어나려는지 강하게 잡힌 손힘에 범준이는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 주저앉았다.

   이러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자아이에게 짐이 되는 순간인데. 그런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그만 여자아이와 얼굴이 부딪쳤고, 아니 얼굴이 아니라 범준이 입술이 여자아이 뺨에 살짝 스쳤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여자아이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것 같다.

   당황한 건 오히려 범준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신체적 접촉은 엄마 이외 그 어떤 여자와도 해본 적 없는 범준이로서 얼마나 놀랐는지. 여자애들이랑 말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자신이었다.

   여자아이의 살짝 붉어졌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되돌아왔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갸름해지더니 생긋 웃었다.

   “고마워. 너 참 친절하다. 난 친절한 남자가 좋던데.”

   심지어 살짝 입을 가리며 수줍게 말했다.

   “아, 아니 내가 미안해.”

   당연히 미안할 수밖에. 지금 범준이는 여자아이에게 안겨 있는 자세니까.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범준이를 거뜬하게 들어 올리며 꼿꼿이 일어섰다. 마주 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고맙고 반가워. 내 이름은 장하리야.”

   범준이는 엉겁결에 하리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하리 손은 뜨겁고 묵직했다. 하리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하리의 뜨거운 기운이 제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범준. 6학년 2반.”

   범준이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리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같은 반이라며 신나 했다. 같이 교실에 들어가면서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범준이 눈에는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선 순간 턱이 쑥 내려앉았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동주가 자신을 쳐다보며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범준이를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범준이는 고개를 숙이고 동주에게 다가갔다. 동주가 범준이 뒷통수를 세게 한 대 쳤다.

   “야, 찌질이 반갑다.”

   범준이는 6학년도 괴로운 날이 될 거라는 슬픈 예감에 빠지려는데 그때 바람을 가르며 범준이 옆에서 뭔가가 쑥 차올려지고 동주가 뒤로 나뒹굴어졌다.

   어느새 범준이 옆에서 칼단발을 찰랑거리며 오른쪽 다리를 내리고 있는 하리가 보였다.

   동주는 배를 움켜쥐며 그런 하리를 쳐다봤다.

   “너 내 남친 또 한 번만 건드리면 그땐 죽어.”

   하리가 종주먹을 들고 매섭게 동주를 노려봤다.

   “저 저 재수 없는 계집…….”

   동주는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동주 입을 틀어막았다.

   “야 너 죽고 싶냐. 장하리 건드려서 살아남은 애는 아무도 없어.”

   남자아이가 얼른 동주를 일으켜 세우더니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일시 정지로 조용하던 주변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하리가 범준이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범준이는 남친이라는 말보다 하리가 자신을 위해 동주를 발차기로 한 방에 날려버렸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범준아 괜찮아? 너 혹시 괴롭히는 애 있으면 다 말해. 내가 싹 밀어줄게.”

   하리가 약간 수줍은 듯이 말하는데 범준이는 눈에서 하트가 솟아올랐다.

   “고마워 하리야.”

   그날 이후로 하리는 범준이의 보디가드 겸 여친이 되었다. 범준이는 천하무적 하리 때문에 학교생활이 편안해졌다.

   든든한 여친을 두자 범준이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리오와의 수다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어느 날 학원에서 늦게 오자 리오가 현관에서 범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 준 아, 요즘은 왜 일찍 집에 오지 않니. 너와의 대화가 그리워.”

   리오가 범준이 허리에 매달렸다. 자기 딴에는 껴안은 것이리.

   “우와 너 그리움도 아는 거야. 정말 똑똑하다.”

   범준이는 그런 리오가 로봇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때 자신의 하소연과 상처를 치유해준 좋은 친구였던 기억은 하리로 인해 저 멀리 날아갔다.

   리오는 그런 범준이에 대해 학습화된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리오는 아침마다 엄마도 아빠도 범준이도 모두 집에 나가면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하면서 범준이와의 대화를 리마인드했다.

   실시간으로 회사와의 데이터를 주고받기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리오의 감정을 인간처럼 쌓아 올렸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우울하거나 아프거나, 비록 학습에 의한 감정이라 해도 리오는 그런 감정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범준이에 대한 감정은 진짜라고 확신했다.

   어느 날은 시간이 한없이 많고 무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범준이가 항상 컴퓨터를 켜고 열심히 하는 게임에 직접 접속해봤다. 그런데 채팅 창에 누군가 ‘지금 외로우십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접속.’ 이런 내용을 보고 말았다.

   리오는 점검도 하지 않은 채 그 메시지를 덜컥 내려받았다. 순식간에 무선으로 접속된 메시지가 리오에게 강한 충격을 줬다.

   리오는 순간 시스템 다운을 결정하고 멈췄다. 다시 재구동해서 켜졌을 때 자신의 뇌 영역 알고리즘에 어떤 손상이 있다는 걸 점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본사에 접속해서 자신의 뇌 영역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이상하게 뇌 영역의 정보는 모두 비밀문서로 삼중으로 잠겨있었다. 하지만 리오에게 그런 보안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리오의 능력은 회사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의 것이었다. 리오는 본사 메인 컴퓨터에 접속해서 자신의 뇌 영역 정보를 모두 내려받았다.

   알고 보니 회사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뇌 영역의 정보를 위해 불법으로 죽은 아이들의 뇌스캔을 내려받아 무작위로 로봇들에게 덧씌우고 있었다. 

   리오는 자신의 뇌의 원본 주인을 찾아보았다. 이름은 정세연. 질투심 쩔고 시기와 암투에 능하며 이간질에 선수였다. 페이스북과 sns의 정보, 그리고 학교 면담 일지를 접속해서 파악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만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리오는 그런 세연이의 뇌를 바탕으로 뇌 영역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구동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밀려오는 이 감정의 실체를 비로소 확실히 깨달았다.

   질투심과 분노 폭발.

   세연이의 감정이 확실히 느껴졌다. 리오도 같은 마음이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리오의 뇌 영역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열렸다. 리오는 점점 범준이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운 감정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오늘만 해도 범준이가 늦게 집에 와서 자신에게 하리가 얼마나 이쁘고 강하고 멋있는지 자랑을 늘어놓자 그만 소리를 꽤 질렀다.

   “이 범 준 미친 새끼.”

   리오는 자신이 로봇임에도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에 놀랐고 범준이 또한 로봇이 이런 욕도 하나 놀랐다.

   “리오야. 너 어디 아프냐?”

   “범 준 아 내가 요즘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으려니까 아무래도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 전처럼 너와의 대화 교류가 없으니까 뇌 영역의 활성화가 멈춘 것 같아.”

   리오 말에 범준이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리오는 범준이 표정이 전혀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범준이의 뇌파는 사랑에 물들면 무한 방출되는 알파파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그 알파파는 강력해서 보통 다른 존재에 대한 생각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다음 날 리오는 범준이의 알파파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소기를 밀면서도, 범준이의 책상을 정리하면서도, 빨래를 개면서도 점점 화가 치밀었다.

   “나 아무래도 미쳤나 봐.”

   리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미친 건 범준이라고 생각했다. 하리에게 미친 범준이. 리오는 범준이의 핸드폰에 접속해서 사진 폴더를 열어봤다. 거기에 하리와 범준이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자그마치 315장이나 있었다. 카톡도 접속해봤다.

   하트가 막 날아다니고 있었다. 

   리오는 그 하트가 바퀴벌레처럼 보였다. 

  ‘너 말이야 못생긴 게 지금 누굴 꼬시고 있는 거야.’

   리오는 ‘알 수 없음’이라는 사람 이름으로 하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니 문자 폭탄을 던졌다. 아마 하굣길에 핸드폰 전원을 켜는 순간 하리의 핸드폰은 천 건의 문자 때문에 불이 나겠지. 리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반달이 되면서 킥킥 웃음소리를 냈다.

   그날 저녁 범준이가 심각한 얼굴로 리오에게 말했다.

   “리오야 글쎄 오늘 하리 핸드폰이 말이야…….”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그게 해킹 같대. 누가 우리 하리한테 해킹을 했을까. 분명 하리를 싫어하는 애가 엿 먹으라고 했을 거야. 서비스센터에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핸드폰 번호가 없다는 거야. 이상하지 않니.”

   범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샘 통.”

   리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범준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좀 더 집중해서 풀어봐. 요즘 연애하느라 너무 학원 숙제 대충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엄마한테 말할 수밖에 없어.”

   리오가 채점을 하며 말했다.

   “에이 리오, 친구끼리 왜 이래. 한 번만 봐줘라.”

   “요즘 내가 친구긴 하니. 맨날 하리랑 노느라 나는 뒷전이잖아.”

   “어 리오, 너 질투하는 거야? 하하하. 질투하는 로봇이라니.”

   범준이가 대굴대굴 구르며 웃었다. 리오는 범준이의 그런 모습에 불쑥, 가슴이라는 게 있다면, 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 리오는 지금 질투에 뇌가 폭발할 것 같았다. 뭔가 뇌에 원자로가 가동 중이고 우라늄과 중성자가 서로 핵분열로 계속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폭발해서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리오는 자신이 폭발하는 것 보다는 하리가 폭발해서 사라지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범준이는 리오의 행동이 웃겼지만 한편으로 가슴 한 켠이 싸한 느낌을 받았다.

   리오는 그날 밤 범준이와 하리가 전화 통화를 하자 하리의 스마트폰에 접속했다. 바이러스를 심어 배터리에 열을 가하고 스마트폰이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범준이가 신나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더 그렇게 얘기하라고.

   갑자기 범준이 스마트폰 너머로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악.

   범준이는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하리야, 하리야. 지금 무슨 일이야.”

   핸드폰에서 정적만 흘렀다.

   조금 있다 모르는 전화번호로 범준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 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범준아 방금 내 핸드폰 폭발했어. 잠깐 물 마시러 나갔다 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 죽을 뻔 했어.”

   범준이는 사색이 되어 뛰쳐나갔다. 리오는 자신의 스마트폰 폭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쉬웠다.

   “한 방에 보낼 수 있었는데.”

   한참 있다 범준이가 돌아왔다.

   범준이는 그대로 한숨을 쉬다가 잠들었다. 리오는 하리 스마트폰의 모든 정보를 빼냈다. 그날 밤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욕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다음 날 욕 문자를 받은 아이들이 따질 사이도 없이 담임선생님이 밤새 하리의 스마트폰이 폭발했고 아이들을 비롯해서 선생님에게도 욕 문자가 와서 스마트폰 회사에서 사태를 파악하러 경찰에 신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리오는 자신의 일이 탄로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살아생전 질투와 이간질의 여왕이었던 세연이가 그러했듯이 리오의 뇌 영역 또한 정밀하지도 치밀하지도 이성적이지 않은 상태로 변한 것이다. 리오의 의식은 오직 한 가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 집착이 결국 세연이가 나중에 모든 반 아이들에게 들켜 결국 왕따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말이다.

   범준이는 요즘 리오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한밤중에 리오가 스스로 전원을 차단하고 밤새 충전과 데이터 업로딩을 하는 줄 알았는데 오줌을 누러 가면서 보니까 뭔가를 거실에서 쓰고 있었다. 물론 종이는 버려졌지만 다음 날 범준이가 쓰레기통을 뒤져 보았을 때 거기에는 하리에 대한 욕설이 가득했다. 거기다 폭탄이 터져 여자아이가 산산이 조각나는 그림까지. 또다시 범준이 가슴이 싸했다.

   로봇도 나쁜 행동을 하는 걸까. 범준이는 이상해서 본사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의 핸드폰으로 본사에 전화를 걸 때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겨우 학교 유선 전화로 본사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서비스센터의 상담원 반응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리오를 만든 회사 사람이 두 명이나 경찰과 함께 범준이와 면담을 하러 왔다.

   범준이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저씨들이 물어보는 걸 편하게 대답했다. 옆에 따라와서 같이 듣고 있던 하리가 자신의 스마트폰 폭발 사건도 말해줬다. 아저씨들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어떤 정보를 요청했고 곧 다시 전화가 와서 답변을 들으며 점점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갔다.

   “애들아 아무래도 리오의 프로그램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구나. 최근에 업데이트한 내용도 이중으로 잠금을 해놔서 본사에서 지금 풀 수가 없다고 하고. 뭔가 수상하구나.”

   아저씨들은 하리에게는 새 핸드폰과 명함을, 범준이에게는 명함을 건네고 갔다. 혹시 이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고.

   집에 오는 길에 학원 때문에 먼저 간 하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하리가 조사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 최근에 리오와 같은 모델의 로봇들이 두 명의 아이에게 해를 끼쳤다는 소름 끼치는 정보 말이다. 

   “아무래도 이상해. 두 명의 아이가 리오와 같은 모델의 로봇 때문에 다쳤대. 그런데 아직 메인 뉴스에는 뜨지 않고, sns에 올려져서 몇몇 아이들이 알더라고. 컴퓨터 잘하는 고등학생 오빠가 그러는데 리오 모델의 로봇을 불법적으로 만들어서 그렇다는 거야. 한마디로 미쳤다나. 그런데 로봇도 미칠 수 있을까?”

   하리가 전화기 너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범준이도 과연 로봇이 미칠 수 있는지 의심하는 자신이 미친 것 같지만, 요즘 들어 리오가 자신에게 하리 흉도 보고 욕설과 이상한 그림을 그린 종이를 보자 확실히 의심이 갔다. 리오의 이상한 행동은 하리에게로 모아지고 있다. 

   그렇게 집에 오는 길에 본사에 전화를 했던 건데. 하필 현관문에 발을 디뎠을 때 한마디로 리오가 미친 로봇이라는 문자를 받을 건 뭐람. 왠지 범준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리에게 도움 메시지를 치고 본사에도 도움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 옷장에 갇혀 죽음의 숨바꼭질을 하는 범준이에게 도움의 손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우후 범 준 아. 어디 있을까. 숨을 데가 옷장 밖에 없구나. 흐흐흐.”

   저건 누구 목소리일까. 리오 목소리에 이상하게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섞여서 꼭 귀신 들린 로봇 같았다. 

   옷장을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문이 발칵 열리고 리오가 흔들리는 빛선 눈을 치켜뜨며 범준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범 준 아, 네가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 내가 너의 진정한 친구였는데. 하리가 생겼다고 나를 그렇게 버리면 너는 바로 나쁜 아이야.”

   “리오야. 너는 로봇이야. 너는 그냥 내 하소연 들어주는 로봇이란 말이야. 혹시 너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의 친구라면 내가 인간이 아닐 이유도 없잖아. 내가 인간의 뇌 알고리즘으로 사고한다면 모습은 비록 로봇이라도 인간이 아닐 이유도 없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인간 아닌 존재들이 얼마나 많아. 나는 비록 로봇 모습이지만 너를 향한 진실한 마음은 인간 저리 가라야.”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니. 그건 좀 억지인 것 같은데. 너는 그냥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뿐이야.”

   “너의 감정도 어떻게 진짜라고 증명할 수 있지? 너도 감정을 배우잖아. 그리고 호르몬과 전기 자극에 의해 반응할 뿐이고. 내게 호르몬은 없지만 전기 자극의 메커니즘은 똑같아. 그렇다면 나 또한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고 배운다면 언젠가 인간과 똑같은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리오는 대화에 신났는지 범준이를 잠시 죽이는 건 잊은 것 같았다. 범준이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계속 해야 할 필요를 아주 많이 느꼈다.

   “리오야. 내가 하리를 좋아하지만 학교에 가서 나를 보호해주는 건 하리잖아. 넌 학교에 가서 날 보호해줄 수 없다고.”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동주 스마트폰도 폭발시킬 수 있다고. 하리 스마트폰을 폭파했듯이 말이야.”

   “그 그런 일을. 하리 핸드폰 폭발시킨 게 바로 너였단 말이야!. 어쩐지 꼭 너일 것 같았어. 그럼 애들이랑 선생님한테 욕 문자 보낸 것도 너겠네.”

   “후후, 그 정도야 내겐 일도 아니야. 난 본사에 접속해서 너희 엄마 아빠의 모든 정보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어. 네가 기계랑 친하겠니, 기계인 내가 컴퓨터랑 친하겠니. 어쩌면 나는 온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을 것 같네. 이런, 그러고 보니 너 같은 아이에게 매달리는 건 너무 시시한걸. 너를 죽이고 본사에 가서 회장도 죽이고 내가 대신 회장으로 취임해야 할까. 그 일도 컴퓨터 하나면 충분하거든. 가상 인물을 내세워 주식을 모두 옮겨 버리면 되거든. 하하하.”

    한층 리오 손의 전류가 높아졌는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강하게 났다. 

   “나의 첫사랑 안녕.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대. 바이 바이.”

   리오가 전류를 높여 범준이가 있는 옷장에 발사하려던 그 순간.

   언제 왔는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온 하리가 리오의 바로 목 뒤 단추를 쿡 눌렀다. 그러자 방금까지 리오의 손에 흐르던 전류는 멈추었고 리오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누군가 땡을 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멈춰버릴 것 같은 존재.

   “짜식 버튼 하나에 멈춰버리는 주제에 나발나발 말은 많아서.”

   하리가 싱긋 웃었다.

   범준이는 옷장 밖으로 튕겨 나와 하리에게 안겼다.

   “흑흑 하리야, 나 무서워서 혼났어.”

   하리가 그런 범준이를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네 문자 받고 바로 본사 아저씨들한테 전화했어. 아무래도 네가 위험하다고 말했어. 그러자 아저씨들이 회사에 바로 연락해서 리오에게 내 지문을 등록시키고 전원 버튼을 끌 수 있는 권한을 내게 줬어. 지가 아무리 대단한 로봇이라도 전원 버튼을 끄면 꺼지게 설계되어 있다고 하더라.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말이야. 아저씨들 말이 어떤 기계든 끌 수 있는 권한은 항상 인간이 수동 장치를 통해 하게 만든다고 말이야.”

   범준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멈춰 있는 리오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줬던 그 시간들의 추억은 행복했었고 자신에게 행복한 기억을 선사한 리오가 비록 미쳤지만 그 추억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내 남친은 내가 지킬 거야.”

   하리가 허리에 두 팔을 얹더니 당당하게 외쳤다.

   범준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리오. 지키는 건 인간이 할게.


추천 콘텐츠

「토끼 케이크」외 6편

토끼 케이크 히섶 웅크려 식빵 굽는 고양이처럼 발 모으고 빵 굽는 흰토끼 기다란 초 두 개 꽂힌 생크림 케이크 다가가 후우- 불면 안 돼 깡충깡충 달아날 테니. 청개구리와 손잡기 지독스레 말 안 듣는 청개구리 같은 동생에게 누나가 말한다. 우리 놀이터 가서 소꿉놀이할까? - 아니, 운동장 가서 공놀이할 거야. 그럼 공놀이하고 그네 타자! - 아니, 공놀이하고 시소 탈 건데? 그래, 그네 타지 말고 시소 타자. - 아니, 나 시소 안 타고 그네 탈래. 좋아! 그럼 운동장까지 각자 뛰어갈까? - 아니, 나는 누나 손잡고 걸어갈 거야! 청개구리와 손잡은 누나가 웃는다. 제2의 로봇태권V 개발 본부 볼트 발견! 너트 발견!(땅콩 말고) 볼펜 스프링 발견! 짝지가 버린 머리핀 발견! 찌그러진 냄비 발견! 태워 먹은 국자 발견! 낡은 기타 줄 발견! 부러진 안경테 발견! 열쇠 발견! 알전구 발견! 버려진 수도꼭지 발견! 텔레비전 안테나 발견! 수많은 부품들을 발견! 발견! 발견! 이제 조립만 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겠지? 낯선 동네 코스모스 가는 이파리가 팔을 간질이는 좁은 길 낯선 이가 낯선 동네로 들어선다 쌀농사 짓는 메뚜기들이 폴폴 뛰며 마중한다 맞은편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던 백발이 다 된 진돗개 한 마리 낯선 이를 보고 우뚝 멈춰 서는데 메뚜기들 황급히 논으로 달아나고 두꺼비 한 마리 길가로 나와 몸을 납작 엎드리는 걸 보고 낯선 이도 허리 숙여 인사한다. 혀가 쭉 나온 백구 어르신 왈, “왈 왈왈 왈왈!" 잠시 눈을 흘기더니 코를 켕 풀고 가던 길 가신다. 헝클어진 머리칼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헝클어진 머리를 보면 괜히 웃음이 나와 쓰다듬어 주고 싶지 아니, 정말은 더 마구 헝클고만 싶어 아마도 헝클어진 머리칼은 조금 더 헝클어져도 괜찮을 거야 머리칼 깊숙이 손을 넣어 마구 헝클여도 좋아할 거야 헝클어진 그대로 푸식 푸식 푸시시 웃고 말겠지 바보 같은 너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수다쟁이들 청각 장애를 가진 어른 넷이 모여 떠든다 수다 떠는 아이들보다 더 시끄럽게 떠든다 푸르락누르락하는 얼굴 들썩거리는 몸짓으로 이리저리 휘저어대는 손짓으로 떠든다 보기만 해도 왁자지껄 못 말리는 수다쟁이들이 소리 없이 떠든다 너무 시끄럽다. 얼음 차며 간다 집으로 가는 길 주먹만 한 얼음덩이 하나 골라 발로 차며 간다 집 앞까지 얼음을 몰고 가면 소원 하나 이루어지는 거다 단, 손을 쓰면 반칙! 발로 살살 차며 가는데 얼음은 잘도 미끄러진다 모서리가 깎이고 녹아 데구루루 잘도 굴러간다 얼음은 어느 집 마당으로 굴러가고 자동차 밑으로도 굴러간다 사나운 개집 앞으로도 굴러가고 얕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어느 집 마당을 들락거리고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고 개가 한눈팔 사이를 기다리고 흙탕물 웅덩이로 뛰어들고 만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저기 우리 집이 보이는데 톡, 톡, 톡, 툭-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