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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371

담배 한 개비

김현지

  

   제사상에 담배 한 개비를 피워 올린다. 아버지 제사의 마지막 의례다. 그리도 좋아하시던 담배 한 개비가 제사상 모서리에서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린다. 차려진 음식들은 본체만체하고 꾸부정하게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기 속에 아른거린다.

   아마도 아버지는 저승사자가 내미는 천당 티켓을 담배 한 개비에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담배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사소한 감기가 원인이 되어 아버지의 기관지와 폐를 덮쳐 버렸다. 가벼운 감기가 폐를 갉아 먹을 정도였다면 필시 좋아하던 담배가 병에 가속도를 올리는 치명적인 원인이었을 것은 자명했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귀하디귀한 외아들이었다. 좋다는 약재들은 하루가 멀다고 앞마당을 메웠고 식구들은 온종일 약을 말리고 달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처방된 약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구해 온 별의별 한약재들로도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 약들은 온 집안을 누렇게 퇴색시켰고, 아버지는 퇴색되어가는 모든 것들을 부질없어하며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지냈다. 

   오로지 담배 한 개비가 밥이고 약이었다. 시들시들 말라가는 아들의 병간호를 자처했던 할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정성껏 차린 밥상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들을 어르고 달래던 할머니의 마지막 보루도 치마 주머니에 숨겨둔 담배 한 개비였다. 아버지에게는 어떠한 산해진미도 담배 한 개비만 못했다.

   할머니는 시시때때로 우리를 불러 앉히고는 절대로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빈틈없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어둠이 밀려올 즈음이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당신의 은신처로 몸을 옮겼다.

   대문을 나서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긴 담장이 골목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담장 너머로 아득하게 보이던 부둣가에서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들이 담배처럼 부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드나들었다. 

   나지막한 담장은 아버지가 두 팔을 걸치고 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팡이 없이도 든든히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던 담벼락은 먼발치 바다와 분주히 연기를 뿜어내던 화물선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담배 한 개비를 즐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는 작은 용암 같았다. 빨갛게 불꽃을 품고 있는 작은 용암은 모락모락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곧 터져버릴 듯 터지지 않고 꺼져버리는 용암은 지친 아버지의 욕망 같았다.

   “담배가 그렇게 맛있나?” 묻는 내게 아버지는 담배 냄새가 물씬 나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시며 “구수~하지” 하셨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손가락에서 풍기던 담배 냄새가 정말 구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아버지의 담배가 약이 될 때도 있었다. 한여름 밤 모기에 물려 온몸을 긁어대면 아버지는 침 바른 손가락에 담뱃재를 꼭꼭 찍어 발라주었는데, 담뱃재 때문인지 침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간지러움이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었다.

   때때로 아버지는 은밀히 나를 찾았다. 담배를 사다 달라고 부탁할 때였다. 할머니의 불호령이 무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담배는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한두 번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담배 한 갑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과자가 따라왔다. 초코렛의 달콤함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거북선 담배 한 갑과 쵸코볼 한 봉지를 거머쥔 채 갈등과 희열을 함께 배달하던 어린 딸의 슬픔을 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담배를 거머쥐던 아버지의 손은 싸늘했고 쵸코볼은 철없이 맛났다.

   심부름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잦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심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 할머니의 매를 벌었다. 울부짖음 섞인 매를 맞으며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더라는 구차한 변명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긴 병수발에 지쳐가던 가족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서운함에도, 말할 수 없는 통증 뒤의 고단함에도, 담배 한 개비만이 좋은 벗이었을 터이다. 그 벗의 힘을 빌려 희망 없는 나날에 하루빨리 종지부를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담배를 끊어야 할 천 가지, 만 가지 이유에 대해 어찌 그리 모른 체 할 수 있었을까. 조금 서둘러 갈 뿐 이왕 가야 할 길임을 알고 있었기에 제사상 모서리에 얹혀질 당신의 보루 하나를 남겨 주신 것이리라.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던 날, 담요 밑에는 구겨지고 쭈그러진 담뱃갑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 꾸깃한 담뱃갑은 미처 다 피우지 못하고 서둘러 가버린 아버지의 분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납작해진 절망과 꾸겨진 고통이기도 했다. 그 담배가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 담배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절대로 끊어야 했던 담배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처절한 한숨이었다. 그 한숨 한복판에는 엄마가 있었다.

   아버지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로 마음에도 없는 혼례를 치뤘다. 자유분방했던 아버지는 고지식한 큰엄마와 자주 부딪쳤다. 외아들로 애지중지 자라온 아버지에게 큰엄마의 잔소리는 불쏘시개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치러진 결혼은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엇갈리게 했다. 아버지는 밖으로만 돌았고 큰엄마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갔다. 살 부비며 살다보면 정이란 건 쌓이기 마련이라던 어른들의 덕담은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비껴가기만 했다.

   추운 겨울밤 큰엄마는 끝내 열을 토하며 쓰러졌다. 신경이 마비되는 희귀한 병으로 하체 불구가 되어 자리에 누워 버렸다. 병치레가 길어갈수록 아버지는 큰엄마로부터 자유로워져 갔다. 

   아버지는 객지로 전근을 갔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엄마를 만났다. 연애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만 갔고, 두 사람은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는 결혼식을 올리고 말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예견된 수순처럼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엄마는 담배처럼 포기할 수 없었던 집착이었다. 운명이라 여겼던 아버지의 사랑이 담뱃불처럼 맥없이 꺼져버릴 것을 미처 알지 못했을 터이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집착할수록 아버지의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할머니는 아버지 병을 악화시키는 장본인이 엄마라며 친정으로 쫓아버렸다. 쫓겨 가던 엄마에 대한 애틋함은 아버지의 길고 긴 한숨이었다.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선택은 엄마를 연기처럼 자유로이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떠나는 엄마를 붙잡을 기력도 용기도 없었던 아버지는 담배 한 개비로 그리움을 달랬으리라. 그렇게 꺼져가는 꽁초처럼 아버지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담뱃재가 제사상 밑으로 툭 떨어진다. 다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빨갛게 불꽃을 품고 있는 작은 용암은 모락모락 하얀 연기만 뿜어낼 뿐 펄펄 끓어 넘치지도 못하고 꺼져 간 아버지의 애잔한 인생 같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내려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담배 한 개비는 가망 없는 삶의 애착에서 벗어나고픈 아버지의 처방이었는지도 모른다. 먼발치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던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이 연기 속에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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