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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915번지」외 1편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391

좌천동 915번지

김현지


   휑하니 빈 공터다. 파헤쳐진 땅이 토해낸 흙과 돌멩이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 이곳은 어릴 적 내가 살던 집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이끌림에서인지 드문드문 이곳을 찾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스란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던 집이 있었다. 동네 주위에도 낡은 집들이 몇 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재건축을 했거나 다듬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익은 집들은 이제 소실되어 연립주택이나 새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앞에 있던 작은 언덕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변화의 바람이 휩쓸어갔건만 이곳의 집은 흉가처럼 남아 있지 않았던가.

   얼마 전 다녀갔을 때만 해도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지만 굳건히 형태를 지니고 있던 집이었다. 사람은 살고 있지 않은 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괜한 호기심에 낡은 벽을 디디고 담을 넘은 기억이 있다. 그랬던 그 집이 사라져버리고 빈 공터로 남아 있는 것이다.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 사이에 우두커니 공터로 남아 있는 이곳으로 내 그리움의 전율이 전해진 탓일까,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떠나야 할 열차가 승객을 태우지 못해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태운 옛집은 액자 속에 채집된 기억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 집은 크고 작은 장단지들을 끌어안은 거대한 장독대와 마르지 않는 깊고 맑은 우물이 있었으며, 갖가지 꽃들이 피고 지던 화단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도 있었다. 번들번들한 대청마루를 끼고 열 개의 방들과 다섯 개의 정지가 우람한 기왓장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소복하게 모여 살던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컸다.

   분가해 살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병이 차츰 깊어지면서 이곳 본가로 짐을 옮겨왔다. 우람한 기왓장을 벼슬처럼 이고 살던 이 집 주인은 나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호랑이 할머니로 불렸다. 어른들의 말로는 외모도 행동도 범의 틀을 지니고 있다고들 했지만 내게만은 사슴 같았다. 내 손을 잡고 마실 나가기를 즐기셨는데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존경심이었는지 비굴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넓은 마당이 있는 우리 집에서는 사시사철 먹거리가 넘쳤으며 드나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마을의 모든 행사는 우리 집에서 이뤄졌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부자의 대명사였다. 내 어린 시절은 할머니를 배경으로 마음껏 풍요로움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병이 악화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의 무지개빛 꿈도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커다란 가방을 챙겨 집을 떠나 버렸고, 우리 남매는 오롯이 할머니의 보호 아래 남겨졌다. 엄마는 너무 젊었고, 우리는 아직 어렸다. 할머니의 지쳐있는 어깨는 든든한 위로가 필요했다.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지친 어깨는 든든한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은 고종오빠였다. 오빠는 할머니의 곁을 빈틈없이 지키며 할머니의 신뢰를 쌓아갔다. 우리 집에는 오빠의 객식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먼저 오빠 가족이 자리를 잡더니, 과부가 되어버린 오빠의 여동생 가족들까지 불러들였다. 하나 둘씩 패망한 자손들은 할머니의 보호 아래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할머니의 재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누가 가장 재빠르고 영리하게 할머니의 주머니를 털어갈 것인지 호시탐탐 눈치싸움이었다. 그것은 자식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슬픔에 더께 진 업보 같았다. 

   언젠가 그 집의 불운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았던 우물을 메꾸고 부터라며 땅을 치며 후회하던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수도가 생기면서 할머니는 오래된 우물을 메꾸어버렸다. 틀기만 하면 펑펑 쏟아지는 수돗물은 온 동네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두레박의 정겨운 소리가 멎어지자 그 집에는 서서히 액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이 악화되어 가면서 할머니는 좋다는 약재들을 무수히 들여왔다. 하루종일 끓이고 달이던 약의 기운이 온 집을 누렇게 퇴색시켰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친정을 찾은 고모가 느닷없이 연탄가스로 실려 나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옆집 새댁이 시름시름 아파 신 내림을 받은 것도 모두 수도 때문이라며 할머니는 한동안 수돗물을 받으러 오는 동네사람들에게 원풀이를 해대기도 했다. 

   그 집에서 죽어나간 것이 사람 뿐은 아니었다. 창고에서는 주기적으로 할머니의 관절염 약으로 고양이를 삶아대기도 했으며, 동네사람들이 약으로 구해 온 민달팽이들은 무화과 나뭇가지에서 주리를 틀며 죽어갔다. 그 이후 무시무시한 두 번의 집달리를 경험하기도 했다. 서서히 어둠의 그림자가 기왓장 지붕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 새 식구들은 다정한 척 했지만 친절하지 않았고, 웃고 있지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두 얼굴이 나에 대한 견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갔다. 

   내 영혼의 진통이 시작될 즈음, 나는 할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나와 동생들을 보호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 욕망의 구렁텅이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때, 할머니는 집을 떠나면 유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며 단언하셨다. 그 이후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단 한번 그 집을 다녀왔을 뿐이다. 

   때때로 할머니의 골수까지 빨아먹었을 그들이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 집에 드리워 있던 어둠의 액운들 때문인지 제각각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먼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다.

   그 집을 떠나오면서 다시는 그곳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깡그리 잊고 싶었던 옛 기억은 나의 삶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문득문득 일어나는 애틋함 속에는 늘 그 집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그리움 한 자락을 몰고 그 시절의 풍경 속으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변해가는 주위의 풍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던 그 집이 신기해 ‘이 집을 사버릴까’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추억보다는 냉정한 현실은 더 애절한 그리움을 남겼다.

   그렇게 몇 차례 다녀 온 동안에도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흉가처럼 그렇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던 집이 휑하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움은 부재로 인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인가, 늑골이 결린 듯 아파온다. 유리파편처럼 모든 존재들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다. 

   공터는 생각보다 작고 고요하다. 이 작은 공터 위에 그렇게 크고 무거웠던 그 집이 있었다. 이곳에도 곧 반듯하게 새 집이 지어질 것이다. 그 간발의 시간에 나의 옛집에게서 내게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이제 마지막일터이니 한 번 더 다녀가라고, 그 시절의 아픔에서 그만 벗어나라 말하는 듯하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빈 공터 위에 옛집을 지어본다. 도자기처럼 반짝이던 대청마루를 지나 길게 연결된 정짓간 끄트머리, 이곳에 내 작은 골방이 있었다. 아마도 여기쯤이겠다. 한참동안 그 집터을 더듬어 걸어본다. 이곳은 좌천동 915번지, 어린 시절 나의 옛집의 지번이다.











시들지 않는 꽃



   화면 가득 빨간 베고니아꽃이 활짝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엄마를 뵙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해진 딸을 꾸짖는 안부 문자다. 연락 없는 딸이 보고 싶은 엄마의 순수한 염려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 괜한 심통이 인다. 메시지를 보내온 마음과 그것을 받아든 마음이 괜한 엇박자를 놓는 까닭은 엄마에 대한 나의 오래된 앙금 때문이다.

   엄마는 꽃을 좋아한다. 엄마의 정원에는 항상 꽃들이 만발했다. 한겨울에도 갖가지 꽃들이 계절을 잃어버린 채 피어 있다. 곧 죽어가던 화초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신기하게도 다시 꽃봉오리를 피워 올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소질이 있다고 한다면 엄마는 꽃을 잘 키우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 우리 삼 남매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커다란 가방을 챙겨 우리 곁을 떠났었다. 직장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이었지만 엄마는 어린 세 자식들을 책임질만한 용기도, 더더욱 능력도 없었다. 자식들의 양육 부담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 부자 할머니에게 맡겨 두는 것이 자식들을 위한 길이라 자신을 위로했을 터이다. 

   막 사춘기에 들어선 나에게 부모님의 부재는 메꿀 수 없는 상실이요 그리움이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철천지원수 대하듯했다. 아버지의 병을 방치한 것은 순전히 엄마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할머니에게 엄마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자식들까지 내팽개친 엄마를 할머니는 거침없이 화냥년이라며 욕을 퍼붓곤 했다. 우리는 할머니로부터 늘 나쁜 엄마라는 세뇌를 당하며 지내야 했다. 그것은 엄마가 더더욱 우리에게서 한 발 더 물러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일체 집과의 인연을 끊어 버린 엄마를 그나마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방학 때였다. 방학이 되면 우리는 할머니를 조르고 졸라 짐을 꾸렸다.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지 할머니는 일체의 여비도 주지 않고 완행열차표 석 장만을 끊어 보내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 시절 서울까지 가는 완행열차는 말 그대로 ‘엄마 찾아 삼만리’였다.

   먼 길을 달려 찾아간 엄마 집에는 엄마보다 화초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도 화초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엄마를 따라 다녔다. 반지하방 작은 창가의 귀한 햇볕도 엄마는 꽃 화분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면서도 우리를 환하게 반기지는 않았다. 그런 엄마가 미워서 일부러 꽃모가지를 뚝 꺾어 버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꽃봉오리가 피어나기도 했다. 그즈음에 엄마는 우리보다 꽃을 더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도 엄마는 좁은 방으로 화초들을 들여놓았다. 겨울 추위를 걱정한 탓이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화초들을 이고 잠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흡이 가파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묘한 느낌은 분명 화초들이 산소를 마구 먹어버려서 일어나는 현상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화초 때문에 자식들 다 죽일 거냐며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화초들을 부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 부엌으로 쫓겨나는 화초들에게 나는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우리를 더 사랑하는 거라고. 

   엄마는 우리가 있든 말든 열심히 회사를 다녔고, 야근을 했으며, 수시로 출장을 빌미삼아 집을 비웠다. 짧은 방학기간 동안, 우리는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도 내내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는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다. 그 아름다움으로 아버지를 황홀지경에 빠뜨렸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겠다. 명문여고를 졸업하고 대학물을 먹은 여자였다. 용모까지 단정했던 엄마는 그 시절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넘치는 혼처자리를 마다하고 하필이면 유부남인 아버지를 선택한 무모함에 어느 누구에게도 축복 받지 못한 채 조촐한 결혼식을 치러야 했다. 

   두 분의 결혼 소식을 전해들은 큰엄마는 지팡이를 짚고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다고 한다.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인가 보다. 그 비난과 모멸의 소굴로 걸어 들어갔을 엄마의 신조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문득문득 이해되지 않는 엄마의 대담한 선택이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식구들의 원망과 시기 속에서 세 아이를 출산하였지만, 엄마는 호적상 아버지의 아내도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배 아파 낳은 자식 또한 큰엄마의 자식이었다. 그까짓 법적 문제쯤이야 엄마에겐 허례허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남의 남자를 욕심낸 죗값으로 스스로를 사면하였던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 하나만으로 충분한 엄마였다. 그럼으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엄마는 아직도 미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지 않아 시들시들 생기를 잃어갔다. 건강을 챙기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인지 큰엄마가 퍼붓는 저주의 형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병은 무수한 약들로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꽃처럼 짧은 사랑이었지만 엄마는 아버지에게 평생 받을 사랑은 다 받았다고 말한다.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엄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했다.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시들어 버린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엄마는 ‘꽃처럼 살다가라’ 운명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엄마는 그 많은 유산 한 푼 탐내지 않았다. 남의 남자를 사랑한 죗값으로 가난을 선택한 당당함은 우리 삼남매의 삶을 다소 고달프게 했지만 엄마는 자신의 도도한 아름다움을 지켜낸 셈이다.

   엄마의 꽃에는 수없는 벌과 나비들이 드나들었다. 꽃은 때론 흔들거리며 나비와 댄스를 즐기기도 했고, 벌들에게 꿀을 빨리기도 했지만 기어코 꺾이지는 않았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꽃을 좋아하는 엄마에 대한 반항심 때문만은 아니다. 꽃이란 시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시든 꽃처럼 추한 것이 또 있으랴. 짧은 시간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혹하지만 무엇보다 초라하게 시들어버리는 게 꽃이다. 나는 잠깐의 아름다움에 유혹당하지 않는 편이다. 짧은 시간 시들어버릴 것을 알고 있기에, 일찌감치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엄마를 찾았다. 작은 베란다에는 온통 꽃들이 만발하다. 

   “금방 시들어 버릴 꽃이 뭐가 그리 좋아.”

   엄마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꽃은 꺾지 않으면 시들지 않지. 그저 지고 다시 피는 거야.”

   꺾여진 꽃은 금방 시들지만 화초의 꽃은 지고 다시 핀다는 사실을 엄마는 혼자만 아는 비밀처럼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화려한 꽃다발보다는 꽃이 피우고 있는 화초를 좋아했다. 엄마는 알고 있었던 거다. 꺾은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은 절대 꺾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쓰며 살았을까. 지쳐 쓰러져도 다시 꿋꿋하게 피어났을 엄마의 인생이 가슴 짠하게 전해온다. 

   꽃이 만발한 베란다 귀퉁이에 의자 하나가 있다. 꽃을 감상하는 엄마만의 공간이다. 하염없이 꽃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엄마가 거기에 있다. 욕심없이 도도하게 살아온 엄마의 삶이 어찌 꽃처럼 아름답다 하지 않을까. 꽃처럼 살다가길 소망했을 엄마의 인생을 나만이라도 응원하고 싶다. 

   시들지 않는 꽃이여,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날 꽃이여, 그대는 진정 아름다운 나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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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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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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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박정옥

    작가님의< 좌천동 915번지> 제목에 이끌려 글을 열어보았습니다. 부산에 좌천동이 있거던요. 정말 오랫만에 단숨에 읽으면서도 이해가 잘되는 그러면서도 가슴 찡한 글 감사했습니다.

    • 2024-01-25 16:28:53
    박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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