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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진흙 그릇」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347

크로아티아의 진흙 그릇

김태형


   아내의 첫 시집 교정지를 보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30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 묶어내는 첫 시집이니 나에게도 교정지를 슬쩍 내민다. 파격과 거듭나려는 부정의 정신이 늘 시대를 압도하고 있으니 시에서 딱히 정석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게 시의 운명이다. 장르 자체마저 넘어서려는 게 시의 태생적인 특성이니 딱히 규범이나 문법을 들이대며 살필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읽는 사람의 감성이나 취향에 넌지시 기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평가를 바란다면 그렇다. 좋고 싫은 것이야 취향의 문제일 뿐 평가에 이르지는 못한다. 시가 꼭 어떤 평가를 받아야만 할까. 그래도 평가의 기준이 있다면 이 시가 지금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대부분 자기의 작품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과연 지금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30년 가까이 미발표작만을 모아놓고 있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살아도 부부는 결국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함께 살아오며 서로 닮아간다지만, 그래도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생각도 언어도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런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더욱 궁금하리라.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지는 진흙 도자기를/ 크로아티아 어느 좁은 골목에서 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잡이가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진흙 도자기’는 며칠 전에 내가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교정지를 읽다가 잠깐 얼이 빠진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게 뭐지? 다시 읽어보았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지는 진흙 도자기’는 식탁 뒤쪽의 커다란 서랍을 가진 인더스트리얼 가구 위에 놓였던 것이다.

   이제는 만지지 않아도, 그대로 세워만 두어도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졌다. 마치 촛불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집 안 청소를 하다가 내가 버렸다.

   식탁 주변이 비좁아서 가구 배치를 바꿀 때 싱크대 위턱 좁은 받침대 위로 옮겨놓았다. 그 자리에서는 설거지할 때마다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져 쌓이는 게 더 잘 보였다. 가루가 떨어져 부서지는 그릇을 장식용으로 놓아두기에도 맞지 않은 것 같아서 생각난 차에 그대로 냅다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직 나는 그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았다. 딸이 새 쓰레기봉투로 갈고 나서 버리지 않고 옆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달려가서(달려가기에는 거리가 짧기는 하다) 묶어놓은 쓰레기봉투를 조금 얼빠진 듯이 풀기 시작했다.

   “있다!”

   그대로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오래된 진흙 그릇. 유약도 바르지 않고 맨 진흙을 빚어서 구웠는지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졌다.

   큰일 날 뻔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이 순간에 시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두고두고 오래도록 어디 말도 못하고 남몰래 후회했을 것이다. 이제야 시를 읽게 된 것도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간 참으로 무심했다.

   예전에는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모르게 그대로 저 홀로 부서져 스러지고 있다. 이미 손잡이 하나는 떨어져나가고 없다.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으리라. 언젠가 바람이 되고 그늘이 되고 새파란 볕살이 되어 어느 찬란한 황홀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울 것이다.

   오래된 진흙 그릇은 그 자체로 시였다. 나는 그런 시를 알아채지 못했다.

   “버리는 거 알고 있었어.”

   “말리지 그랬어.”

   “그러려니 했지. 내 그릇이니 버리지 말라고 말이 안 나오더라. 다 그러려니 했지.”

   아내가 쓰러지고 나서 집안 살림은 내 몫이 되었다. 병간호를 해야 하니 바깥일도 다 접고 집에 들어앉아 수발을 들고 있었다. 정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짐을 정리하고 내다버리고 청소를 해도 뭐 하나 나아지는 게 없었다. 살림이란 그런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던 중에 아무도 치지 않는 피아노를 치웠다. 나중에 다 나아서 칠 거라고 치우지 말라고 아내는 말했지만, 그런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나는 과감하게 피아노를 치우기로 했다.

   아이들 가르친다고 들여놓은 피아노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좀체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내 혼자 피아노에 앉아 가끔 잔잔한 연주를 하곤 했다. 한 번 몸이 아프고 나서는 첼로 연주를 그만두었는데, 그래도 피아노는 조금씩 연주하곤 했다. 피아노를 팔 수 있을까 알아보았지만, 답변조차 없이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오히려 치우는 데만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그래봐야 두 사람이 와서 아파트 대형폐기물 지정장소에 옮겨놓고 가는 게 전부였다. 어느 집 거실에서 어린아이들의 맑은 손길을 받으며 잘 살기를 바랐던 것은 현실을 모르는 망상이었다. 그 무거운 피아노를 치우는 데 걸린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릇이며 컵이며 보이는 대로 내다버렸다.

   “우리집에 왜 이리 그릇이 많아?”

   찬장마다 언제 쓸 일이나 있을지 모를 그릇들이 가득했고, 네 식구 사는데 놓을 자리마저 없을 정도로 컵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갔다. 물론 내가 보기에 조잡해보이는 것들부터 골랐다.

   “내 컵 어딨어? 내 컵?”

   딸이 특유의 큰 목소리로 경악한다.

   “내가 버렸다. 없어 보여서. 우리집에 컵이 너무 많아.”

   “아빠!!!!!!”

   “왜! 내가 몇 개 버렸다.”

   “그거 르쿠르제야.”

   “그게 뭔데?”

   “아아악···”

   “······.”

   아내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칸반도를 여행하다 구해온 크로아티아의 진흙 그릇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것을 보고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뭔가 놓아주려 했던가. 대체 무엇을 놓으려 했을까.

   부끄러운 밤이었다. 그리고 찬란한 밤이었다. 뒤늦게라도 아내의 시를 읽게 되어 고마운 밤이었다.











그렇게 울어야 한다



   세상은 느닷없다. 그간 다들 어디 숨어 있었는지 안 보이던 것들이 비 갠 뒤 땡볕에 말라붙은 지렁이처럼 널려 있고, 때도 다 지났으련만 늦매미처럼 시끄럽다. 느닷없는 일들은 느닷없이 옛 생각 하나를 끈질기게 떠올린다.

   나는 군 복무를 국정원에서 했다. 그렇게 말하면 다들 믿지 않거나 간혹 놀라는 듯이 반응을 하는데, 실은 국방정신교육원을 줄여서 그리 불렀다. 이곳에서 나는 방송병이었다. 선임병이 원장 부속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몇 개월 만에 부사수에서 사수가 될 수 있었다. 맡은 임무와 별도로 소속 분대원에게 주어지는 여러 작업 사이에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힘겨울 때였다. 다행히 사수가 사라지고 나자 결정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구내방송은 사수로서 내 몫이었다.

   “알, 려, 드립니다!”

   제법 목에 힘을 주고 마이크를 켜면 교육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내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로 변조되어 울려 퍼지곤 했다.

   불시에 어떤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서 늘 방송실을 지켜야 하는 임무는 리어카에 삽을 싣고 부르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하는 온갖 작업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대원들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힘든 일을 함께한 이들만의 깊은 우애 같은 것은 바랄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책상머리에서 졸기도 하고 간혹 『노자』를 펼쳐 놓고 읽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오래전 구호를 여전히 쓰고 있었다. 이런 구호를 사용하는 부대는 당시만 해도 그리 흔치 않았다. 가끔 근처 야산에서 삐라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군사정권의 시대는 벌써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부대의 구호가 예전 그대로인 것은 이곳이 군인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인지 경례 구호가 발음이 똑 부러지게 잘 나왔다. 그런데 말년쯤 되니 나도 모르게 발음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도저히 문자로는 옮길 수 없는 이상한 발음이 나오곤 했다. 구호는 두 음절을 한 음절로, 그것도 졸로 왕을 잡는 순간의 장기판에서 호기롭게 한순간 내려치듯 장기알을 딱 내려놓을 때처럼 매우 짧고 묵직하게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 제대로 발음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혀는 이미 굳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신병 때는 딱딱 끊어서 힘주어 발음하니 제대로 나온다. 그러나 두 음절 사이의 여백은 서서히 계급이 올라갈수록 짧아지다가 급기야는 한 음절로 발음되기 시작했다. 맹꽁이 울음소리 같다고 하면 그나마 가까운 표현일까.

   그 엉성하다 못해 목울대가 숨통을 꽉 막아버리는 이상한 맹꽁이 우는 소리가 어디선가 자꾸 들려온다. 이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느닷없이 잊히고야 말았던 맹꽁이 소리가 어디선가 버젓이 대낮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제 안의 그 무엇이 두려워서, 자기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어느 고독한 존재가 있어 밤새 굳어버린 제 혀를 삼키고야 마는 그런 고통이 아니라 그저 세상 제멋대로 날뛰려는 맹꽁이 소리만 자꾸 들려온다.

   혼자 뻗대듯이 울어대면 단음절의 듣기 거북한 된소리만 반복되다 저도 지쳐 사라져버리겠지만, 함께 울면 리듬이 되고 살아갈 힘이 되어 고단한 하룻밤을 건너가게 될 것이다. 함께 부르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옛 노동요가 그랬으리라. 노동이란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끊임없이 반복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고 심지어 외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서로 호흡을 맞춰 늘어진 숨결을 다잡아 이어가는 노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리었으리라. 목탁소리도 혼자 울지는 않는다. 경전을 암송하는 낮은 목소리가 지쳐 진흙 바닥으로 늘어지지 않도록 딱딱 힘을 주어 단속적으로 힘을 실어준다.

   혼자 울 때도 있다. 깊은 밤에 홀로 주저앉아 울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들려온다. 누가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어둔 밤공기를 따라 젖은 안개처럼 퍼져 나가 온 동네 거리마다 찢어져 흩어지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넘칠 듯 목울대를 넘어 차오르다가도 그저 제 안으로만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내리고야 만다. 제 안에 차고 넘치는 울음소리가 밤새 넘쳐흐르고 나면 고요한 새벽이 오리라. 혼자 우는 그런 울음소리는 차라리 성스럽기까지 하다.

   맹꽁이라는 이름은 그 울음소리 때문에 붙여졌다 한다. 혼자 우는 소리가 아니다. ‘무엥 무엥’, ‘꾸엥 꾸엥’ 하고 여러 마리가 함께 울면 ‘맹꽁 맹꽁’ 하고 들린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함께 우는 일인지 모른다. 때로는 혼자가 되어 자신을 울어야 하겠지만, 고단한 잔등 위에 손을 얹으며 위로를 하던 어느 시구처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누가 들을까 조심조심 늦은 밤 함께 우는 소리가 맹꽁이의 울음소리다. 한여름 잔비에 젖은 느지막한 밤이면 마치 저 홀로 울 듯 함께 모여 울어대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오곤 한다. 길 건너 호수 근처나 그 호수에 물길을 대는 작은 하천 주변의 풀숲에 맹꽁이들이 산다. 여름이면 그 울음소리가 기다려지곤 한다. 내가 되려고 우는 소리다. 자기가 되려고. 너와 함께 나를 낳으려고 그렇게 운다. 나를 또 낳아서 네가 되려고. 함께 서로 다르게 하나인 듯 아닌 듯이 거듭나려고. 다시 태어나려고. 낯선 발걸음 소리에 숨을 죽였다가 또 비가 내리면 한 울음이 다른 울음을 불러내 울던 그런 울음소리가 있다. 내 방 창문 밖의 맹꽁이는 그렇게 운다. 그렇게 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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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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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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