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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지우기

  • 작성일 2022-09-23
  • 조회수 1,521

얼룩 지우기


이원희






작품 배경


초라한 무덤. 비석에 얼룩이 있다. 이를 지우기 위해 능역 관리인 박씨와 황씨는 세제로 박박 닦는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 두 사람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세찬 매미 소리가 더 덥다. 이거 왜 이래? 더위를 피해 그늘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두 사람.

<꼭두무대> 유치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내민다. 청바지 차림의 유치원 교사 들어온다. 아이들이 이 왕릉은 왜 이렇게 작고 못생겼냐고 묻자 얼버무리는 교사. 아이들의 질문에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이라고 한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쁜 왕이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교사가 만류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후다닥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버린다. 박씨와 황씨, 몇 번 시도하다가 세제가 아닌 양잿물로 씻어 보자며 나간다.
달빛 혼곤히 고인 능역. 혼유석에 앉은 두 여인. 광해군 부인 유씨와 광해군 모친 김씨다. 아이들이 까불거리며 자신들의 묘를 가리키면서 손가락질했던 낮일을 떠올리며 쓸쓸해 하는 김씨. 그녀를 위로하는 유씨. 광해는 소나무에 매단 그네를 타며 어떤 것을 기다리는 듯 마음은 저쪽 어디. 능역이 납덩이처럼 차갑고 무겁다.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덜 쓸쓸하다. 난데없이 말 울음소리.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가 팔십 노객의 모습으로 들어온다. 근처에 있는 사릉의 주인, 정순왕후가 석마를 타고 왔다. 애원성인 듯 밤마다 김씨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자신이 살아왔던 신산스러운 삶을 들려주며 이들을 위로한다. 정순왕후의 말이 <꼭두무대>와 <앞무대>에서 재현된다.
수양에 놀아나는 대신들, 수양 숙부의 왕위찬탈, 단종의 영월 유배와 죽음 그리고 정순왕후의 삶이 무대를 구성한다. 단종은 군주가 아니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수양과 그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관료들에 의해 철저히 농간당하면서 단종이 죽어야 할 왕으로 만들어져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정비인 정순왕후의 삶 역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세월이 무려 80여 년. 그 버려진 세월 동안 정순왕후는 쪽물을 들이며 산다. 연명도 연명이지만 쪽풀처럼 파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얼룩으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세상이길 꿈꾸면서.
광해군 모친인 김씨는 왕비에서 폐서인으로 전락해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왔던 정순왕후의 말을 듣고, 자신의 아들 광해 또한 주변인들이 새겨놓은 얼룩에 갇혔다며 그의 삶을 풀어낸다. 광해군 시절, 신하들이 작당하여 광해를 모함하고, 임해군이 반란하는 등 역사적 사건들이 <꼭두무대>와 <앞무대>에서 재현된다.
임진왜란을 겪고 광해는 철저히 대외정책을 실리적인 데 두었다. 명나라와 이제 막 발흥한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라는 잣대로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거리재기 외교를 한다. 하지만 새로움은 언제나 이미 있는 것의 저항을 받는 법. 대명의리론에 감금된 대신들의 강력한 반발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점차 광해의 뜻이 허물어진다. 급기야는 어린 영창군과 형 임해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감금한다. 권력을 향한 복잡한 궁중 인물들의 역학관계와 주변인들의 작당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 욕망에 사로잡힌 타인들의 얼룩으로 지워져버린 광해. 그의 혼백은 그네를 탄다.
달빛제의는 타인의 얼룩에 들씌워진 자신의 얼룩을 말끔히 정화하는 제의의 춤이다. 달빛이 가루처럼 뿌려진 능역 그리고 <꼭두무대> 영상에 긴 띠처럼 흐르는 강. 시간의 흐름 같기도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끈 같기도 하다. 흰 가면을 쓴 인물들이 달빛제의를 한다. 나를 씻는 정화의 의식. ‘나를 나이게 해주오.’ 주술에 걸린 언어의 독백이 강물처럼 쉼 없이 이들의 입에서 나온다. 주술언어가 나오는 동안 가면은 차츰 녹아 없어지고 민얼굴들이 나타난다. 인물들은 자신의 민얼굴을 만져 보고 상대의 얼굴도 만져 본다. 막 솟아오른 해처럼 맑은 얼굴. 달빛유희가 끝난 무대는 태고처럼 고요하다.
정순왕후가 능역을 거닐다 구멍을 발견하고 귀 기울여 소리를 듣는다. 강물 소리. 김씨도 들어 본다. 땅속에서 흐르는 강물 소리. 주검이 된 우리들은 모두 땅속에 있는 것이니 강물 소리는 결국 우리들의 소리가 아니겠냐며 달빛에 반짝이는 강물의 물비늘 영상을 바라보는 정순왕후. 그러자 광해, 김씨, 유씨가 모두 강물을 말없이 본다. 우리는 모두 강물이라고, 계곡과 평야의 굴곡진 길을 열고 흐르는 강물이라고 말하는 정순왕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는 광해와 김씨, 유씨의 눈빛에서 비로소 회한이 사라진다. 빙그레 웃으며 말 울음소리를 남기며 떠나는 정순왕후. 광해와 김씨, 유씨가 <꼭두무대> 쪽으로 사라지자 능역 앞 장명등 불꽃이 또렷해진다. 희미했던 묘역은 그 불꽃으로 흰 기운이 어른거린다. 마치 막 태동하는 생명이 미세하게 움직이듯이.
맑고 투명한 아침. 청소도구를 들고 들어온 박씨와 황씨, 비석을 보고는 놀란다. 비석의 까만 얼룩이 말끔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간밤에 내린 비가 때를 지웠나? 그러자 황씨가 무슨 귀신 들린 소리를 하냐며 핀잔을 준다. 박씨가 다시 비석을 본다. 이럴 수가, 도깨비장난인가? 거짓말같이 말끔하게 지워진 얼룩. 재차 보는 두 사람. 정말 귀신 곡할 노릇이다. 비석에 귀신이 산다고 믿는 박씨.
노래를 부르며 <꼭두무대> 위로 솟은 유치원 아이들. 아이들이 왕릉을 보면서 호빵같이 생겼다며 낄낄댄다. 긴 치마를 입은 교사는 임금님 무덤이니까 엄숙해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여기 계신 분은 임진왜란 때 무진 애를 쓰신 임금님이라고 설명하고는 모두 묵념한다. 아이들이 빠져나가자, 황씨와 박씨가 절이나 하고 내려가자며 역시 묵념한다. 능역은 점차 어두워지면서 어스름한 흰 기운이 어릿거리고 영상에는 달빛과 한 몸이 된 강물이 작은 빛 조각들을 만들어내며 긴 띠를 이룬다.



등장인물


정순왕후 - 단종의 비
광해군 - 조선 16대 임금
공빈 김씨 - 광해군 모친
부인 유씨 - 광해군의 비
황씨 - 왕릉 관리인
박씨 - 왕릉 관리인
유치원 교사
(황씨, 박씨, 교사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꼭두무대> 인형 - 수양, 임해군, 대신들, 아이들, 갑남을녀



무대


이 작품은 현실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교차하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삶과 죽음의 세계가 양립하지 않는 동양적 죽음관을 통해 삶이 죽음과, 죽음이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죽음의 세계에서 지나간 역사 현실이 환상으로 재현되고 그 환상 세계에 죽음의 인물들이 개입하기도 한다. 환상은 <앞무대>에서 실연으로 재현된다. 죽음의 세계는 무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음을 비석의 ‘얼룩’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므로 죽음 세계와 현실 세계는‘얼룩’으로 매개된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며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역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공간 분할은 현실 세계와 죽음의 세계, 역사재현 공간으로 실연되는 <앞무대> 그리고 보조 공간인 인형극과 영상으로 구성된다.



장면별 타이틀


1장. 진땀 흘리는 침묵
2장. 의문 없는 소리
3장. 불림소리
4장. 그해 어전
5장. 청령포 자규새
6장. 쪽물 세상을 그리며
7장. 춤추는 혀
8장. 외로운 배로 누워
9장. 달빛제의
10장. 강이 되다
11장. 신생의 아침



1장. 진땀 흘리는 침묵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빈약한 능역.
무대 중앙에 혼유석 그리고 왼쪽에 장명등.
혼유석 앞에, 때 절은 비석.
무대 오른쪽 <꼭두무대>, 영상막으로도 쓰인다.
청정한 소나무 한 그루.
소나무에 그네가 매달려 있다.
잔디 촘촘한 능역.
달빛 앉은 능역에 묵직한 침묵.
침묵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
흐느낌인지, 달빛 숨소리인지, 야릇한 소리.
거무튀튀한 얼룩이 뚜렷한 비석.
말을 망설이듯 몇 번 명멸하는 비석.
능역 다시 밝아지면
황씨와 박씨, 청소도구를 들고 비석을 살핀다.
비석에 물을 들이붓고는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는 두 사내.
여전히 짙은 얼룩.
두 사내,‘왜 안 지워져?’하는 표정.
황씨가 얼룩을 손으로 만져 본다. 갸우뚱하는 황씨.


황 씨박가야? 여기 계신 분 광해군이라 했지?


박 씨광해군하고 그 부인이랴.


황 씨왕 노릇하다가 쫓겨난 임금이 맞제?


박 씨그렇다 하데, 세상에 제 노릇 못하고 맥없이 죽은 사람 수태 많어! 연산군인가 그 양반도 그러고. 그 양반 개차반이라 안 혀?


황 씨그럼 둘 다 개띠인가? 왈왈!


황씨의 말에 박씨, 입맛을 다신다.
매미 소리가 덥다.


박 씨아따, 아침부터 푹푹 찌네. 후딱 하고 얼른 내려가자고.


황 씨허, 이거! 얼룩이 지워져야 말이지. 참 지랄이네.


박 씨얼룩도 오래 묵으면 돌이 되는가 어쩐가 원. 아따 이거 질기네.


황씨, 비석을 찬찬히 살펴본다.


황 씨이것 보게. 이건 바깥에서 더러워진 게 아녀. 잘 보라구. 이 거무잡잡한 거 말여. 비석 안에서 나온 거 같지 않어?


박 씨그려?


얼룩을 찬찬히 살피는 박씨.


박 씨참 지랄이네. 뭐여, 이게?


황 씨낸들 아나? 박박 문질러도 말짱 도루묵이여.


박 씨거참, 희한하다. 속에서 얼룩이 자라다니.


황 씨송진이 스며든 것도 아니고, 틀림없이 속에서 탈이 난 게야.


박 씨(투덜) 쳇, 속에서 탈이 나? 이 사람아, 이건 돌이여. 돌덩이가 탈은 무신.


황 씨좌우간 얼룩을 지우긴 지워야 할 것 아닌가? 젊은 소장한테 퉁 먹기 싫네.


박 씨닦는다고 될 일이 아닌 성싶다. 아, 아무리 닦아도 어디 표가 나?


황 씨(비석을 살피며) 피딱지 같기도 하고, 참 모를 일이다. 어디 한 번 더 해 보자고.


두 사람, 얼룩을 벗기느라 안간힘을 쓴다.


박 씨해 봤자 헛일여! 에이! 참, 지랄이네!


더위를 두껍게 하는 매미 소리.


황 씨(땀을 훔치며) 아이구, 정말 지랄이다. 아침부터 왜 이리 더워? 좀 쉬세.


황씨, 청소도구를 들고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박씨, 뒤따른다.



2장. 의문 없는 소리


<꼭두무대> 위로 노란 모자를 쓴 아이 인형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로 능역은 금세 사람 사는 세상 같다.
청바지 차림의 유치원 교사가 들어온다.
신나게 노래 부르는 아이들. 유독 한 아이만 징징 운다.


아이들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교 사자, 여러분! 이제 쉿! 여기는 임금님 계시는 왕릉이에요. 그러니 조용히! 여기가 어디라고요?


아이1왕릉요!


교 사그래요. 지금부터 조용! 민국이 너! 왜 자꾸 울어? 왕릉 오니까 슬프니?


아이3유라가 제 옷에다 콜라를 쏟았대요. 옷도 젖고 얼룩도 졌다구요!


교 사유라 너! 장난할래?


아이4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교 사유라가 실수로 그랬다잖아. 그만 울어, 민국아!


아이3이거 새 옷이란 말이에요. 잉잉, 난 몰라!


교 사날이 더우니까 금세 말라, 민국아! 그러니 눈물 뚝!


아이3이 얼룩은요?


교 사얼룩도 졌니? 괜찮아. 그것도 점차 없어져. 걱정 말아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든다.


교 사응, 서범아! 질문 있니?


아이1진짜 왕릉이에요?


교 사그렇다니까. 근데 왜 그러는데?


아이2우리 할아버지 무덤보다도 작아서요. 왕릉이 그래도 되나요?


아이3그러게. 여기는 왜 이렇게 작아요? 어? 여기다 누가 오줌 쌌어요!


교 사(비석을 살피며) 뭐, 오줌이라고?


그늘에 앉은 황씨가 끼어든다.


황 씨거, 오줌 아녀. 물이여, 물!


아이2여기 참 웃긴다, 작고 못생겼어! 선생님, 왜 그래요?


교 사(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어? 그러니까, 여기 계신 분은 광해군이신데,


아이2광해군?


아이1임금 이름이 광해군이래.


아이3<역사는 흐른다> 노래에 안 나오는데.


교 사얘들아! 노래에 안 나온다고 임금님이 아닌 건 아냐!


아이3왜 안 나오는데요? 네? 왜요?


교 사응, 그건 말이야. 돌아가실 때는 임금님이 아니라서 그래요.


아이1그럼 나쁜 왕이네?


휴대폰 소리 울리자 전화를 받는 아이3.


아이3엄마! 여기? 무덤! 그게 아니고, 왕릉! 근데 되게 웃겨. 쬐그만 한 게 햄버거 같아!


소 리오, 예! 아들! 시인이다, 얘. 어쩜 왕릉을 보고 그런 생각을 다 하니? 호호호. (사이) 혹시 너, 배고프니? 아들! 소풍은 뭐니 뭐니 해도 먹는 재미다, 얘! 엄마가 사준 김밥이랑 햄버거 잘 먹어. 알았지?


아이3알았어, 엄마. (전화 누르고) 우와! 나는 시인이다.


아이들이 생뚱맞다는 듯이 아이3을 본다.


아이2야, 왕릉을 햄버거라고 하니까 그러시지!


아이3저 봐! 햄버거랑 닮았잖아!


교 사얘들이! 여기서는 조용히 하라 했잖니!


아이1(킥킥거리며) 진짜 작다! 그치 얘들아?


아이2바보야, 임금이 아니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맞죠, 선생님!


교 사아냐! 얘들아! 다른 임금님하고는 좀 달랐을 뿐이야.


아이2아, 사람을 많이 죽였구나! 맞죠?


교 사어? 암튼 착한 왕은 아니었어요.


아이들, 손가락질하면서 까불댄다.


아이들나쁘대요! 나쁘대요!


교 사(깜짝 놀라) 어머? 얘들아? 왜들 이러니? 다른 데로 가자. 자, 모두 앞으로!


아이들, 노래를 부르며 하나씩 <꼭두무대> 밑으로 사라진다.
왕릉을 다시 보고는 후다닥 나가는 교사.
황씨와 박씨가 청소도구를 들고 다시 비석으로 간다.


황 씨허허. 그놈들! 참새 떼마냥 시끄럽네. 짹짹짹!


박 씨짹짹짹? 내 보기엔 병아리 새끼들 같다. 노란 병아리. 삐약! 삐약! 삐약!


두 사람, 질세라 각자 흉내 내며 우기다가 실없이 웃는다.


황 씨그나저나 이 얼룩 어쩐다냐? 아, 지워져야 말이지.


박 씨그러게. (생각) 그렇지! 좋은 수가 있다, 황가야!


황 씨뭔데?


박 씨양잿물! 고것이면 요런 얼룩은 직방이지! 양잿물! 허허허


황 씨양잿물? (크게 웃는다)


박 씨이 사람이 양잿물을 퍼마셨나. 갑자기 웃고 자빠졌어?


황 씨미련한 곰탱아, 생각해 봐. 이 양반들, 양잿물 마시면 두 번 죽는 거 아녀? 깐 이마 또 까는 거 아니냐구?


박 씨에라이. (머리통을 친다) 안 깐 이마 골라 깐다, 이놈아!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쫑인디 두 번이면 어떻고 세 번이면 어뗘?


황 씨(갸우뚱) 근데 박가야? 한 번 죽는 것보다 두 번 죽는 게 더 억울할까?


박 씨자네 한 번 죽어 봐. 내가 맛있게 죽여 줄팅게. 그러면 알겄지!


박씨가 황씨의 목을 조른다.


황 씨이 사람이 갑자기 미쳤나? 아, 왜 이려! 이거 안 할 참여? 아, 치우라니!


박씨가 황씨에게서 떨어진다.


박 씨내 말만 들어! 이거 양잿물 앞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은 게!


황 씨내 보기엔 암만해도 속이여! 양잿물이 속 안까지 씻을 수 있을까 모르겄다. 저승꽃여 뭐여?


박 씨뭐? 저승꽃? 이 사람아 이건 돌덩이여! 글고 저승꽃은 죽을 때나 피는 거제, 죽은 사람이 뭔 저승꽃? 요런 건 양잿물 한 방이면 끝나! 속고쟁이 찌든 오줌 얼룩도 말짱하게 없어지잖여!


황 씨그려, 자네 말대로 해 보세.


박씨, 휘파람으로 <역사는 흐른다>를 부르며 나간다. 황씨, 그 뒤를 따른다.



3장. 불림소리


달빛 고인 능역.
혼유석에 앉은 소복의 여인, 광해군 모친 공빈 김씨.
광해군과 그의 비 유씨가 김씨 옆에 서 있다.


유 씨또 나오셨습니까? 이슬 자주 맞으면 넋도 젖는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겁디무거운 넋.



김 씨…….


유 씨어머님!



김 씨우리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어디 있습디까? 수백 년 세월 동안, 그래도 그네를 뛰며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밤마다 넋을 달빛에 녹이면 뭐 합니까? 답답한 가슴이 응어리져 도저히삭여지지가 않는데.


유 씨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달빛 가루처럼 혼곤히 녹은 넋을 이 세상에 뿌리고 편안하게 떠날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습니까, 어머님.



김 씨오늘 낮에 보고도 그러시오?


유 씨아이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그래도 요즘엔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기시지요.



김 씨해도 있고 달도 있는데, 어쩌자고 세상은 이리 어둡고 아둔하기만 한지. 육신이 가루가 되었지만 넋이 엉켜 무겁기만 하고…….


광 해어머님! 이미 죽어 명부에 들었으니 이제 이승의 끈을 놓으십시오. 소자가 죄인일따름입니다.


아이들, <꼭두무대>에서 두더지 게임처럼 고개를 쏙 내밀고는 까불거린다.


아이들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


아이1광인? 하하하. 광인이래.


아이들하하. 미쳤다! 미쳤다! 하하.


유씨,‘네 이놈!’소리에 쏜살같이 사라지는 아이들.
소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타는 광해군.
유씨, 김씨 옆에 앉는다.
안개 위로 내려앉는 달빛이 수심처럼 파랗다. 한숨 소리로 달빛 흔들리고.
능역에 깔리는 무거운 침묵 잠시.
난데없는 말 울음소리.
두리번거리는 김씨와 유씨.


김 씨말 울음소리가 아니오?


유 씨누가 오나 보옵니다, 어머님! 누굴까요? 이 깊은 밤에.


정순왕후 들어온다, 단아한 팔십 노객.


유 씨뉘시온지요?


왕 후나는 사릉에 있지요.


유 씨사릉이라면?


왕 후여기서 멀지 않아요.


김 씨사릉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왕 후그렇습니다.


왕후에게 다가가는 광해.


광 해그럼? 단종대왕의 정비마마가 아니시옵니까?


왕 후저쪽 세상일이오. 그대는 선조대왕의 보위를 이으신 광해가 아니시오?


광 해부끄럽사옵니다.


왕 후만나서 반갑구려.


광해와 김씨, 유씨가 예를 갖추며 큰절을 하려고 한다.


왕 후넋의 세상입니다. 그냥 앉으세요.


김 씨그래도 어찌 그럴 수가 있사옵니까? 저희를 받아주시옵소서.


왕 후허어. 그러니 여태껏 넋을 내려놓지 못하는 겝니다. 자, 그냥 앉으세요.


왕후, 혼유석에 앉는다.


왕 후밤마다 그대들의 한숨이 나를 깨우더이다. 그래 석마 타고 왔지요.


김 씨저희들이 왕후마마를 귀찮게 했다니 송구하옵니다.


비석을 어루만지는 왕후.


왕 후쯧쯧! 이 얼룩진 넋, 수백 년 달빛으로도 씻을 수 없다니…….


김 씨열성조 조상님들이 멀잖은 곳에서 달빛을 같이 마시건만, 어느 한 분도 저희들을 찾지 않았사옵니다. 그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하와 밤마다 한숨만 내쉬고 있사옵니다.


왕 후오죽하면 갱엿처럼 굳었겠소. 허나 우리는 이미 죽은 몸. 지난 세월은 발뒤꿈치의 일이라오. 어찌 돌릴 수 있겠소?


김 씨광해는 막된 마음으로 막된 일을 한 군주가 결코 아니옵니다.


왕 후여기는 보는 곳이 아니라 보여지는 곳이라오. 죽은 자는 그저 산 자들의 기억에나 남아 있을 뿐이지요.


유 씨하오나, 산 자들의 기억은 닫혀 있고 아둔하기만 한지라…….


왕 후덥고도 추운 곳이라서 그렇답니다.


유 씨예? 송구하오나 다시 말씀해주소서. 덥고도 추운 곳이라니요?


왕 후인간 세계가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러니 사람 또한 덥고 춥고 할 수밖에. 그래서 저쪽 세상을 염량 세계라 한답니다. (사이) 나나 그대들이나, 저쪽 추운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으로 추운 것이니 어찌하겠소?


김 씨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왕 후(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또한 그대들만큼이나 분노와 슬픔으로 수백 년을 견뎌왔소. 하지만 아닙디다. 연산은 그렇다 해도, 우리 임과 그대 광해는 해를 자처하는 자들이 그리 만들었으니, 세월로 녹일 수밖에요.


광 해이미 단종대왕마마로 복위되지 않았습니까?


왕 후이백 년이 지난 세월이랍니다. 그 세월 동안 (한동안 쓸쓸한 표정) 나는 없었지요.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를, (사이) 나는 어찌했겠소?


광 해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너무 억울하옵니다.


김 씨반정이라는 이름으로 군주를 몰아내고 그 뒷날 나라는 어찌 된지 아시옵니까? 온 나라가 되놈들에게 도륙당하길 두 번, 어디 그뿐입니까? 북쪽에서는 이괄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켜 궁으로 쳐들어오기까지 했습니다.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도 반정이라 할 수 있습니까?


왕 후얼룩이지요. 마음의 땝니다. 철없는 욕망과 불쌍한 무명이 얼룩을 만드는 씨앗이지요. 그것이 시간을 타고 앉으면 얼룩이 된다오. 감추려야 쉽사리 감출 수가 없답니다.


유 씨밤중에 호두 까는 소리처럼요?


왕 후(웃으며) 그렇지요. 다른 이의 얼룩으로 내가 얼룩이 지고, 내 얼룩이 다른 이를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세상은 한시도 조용하지 않으며 뜨겁고 차가운 게 아니겠소?


김 씨우리 광해는 남들이 들씌운 얼룩으로 저리 슬퍼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마마. 일러주소서.


왕 후사는 동안은 생긴 얼룩을 지우고 지워서 이 달빛처럼 하얀 고요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이제 그것도 다 지닌 때의 일이지만.


김 씨알려주시옵소서. 땅속에서 무엇을 해야 편안해지겠습니까?


왕 후우리는 입도 눈도 귀도 잃었다오. 허니 묵연히 내려놓고 돌장승처럼 있어야 합니다. 된 비 맞은 돌장승이 꿈틀 움직입디까? 그렇지가 않지요.


광 해그럴 수 없습니다. 눈먼 자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수백 년 고통이 너무 힘이 드옵니다. 보시옵소서.


<꼭두무대>, 아이들이 까불대며 킬킬거린다.


김 씨마마!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사 여기까지 오셨으니 도와주십시오.


왕 후우리 임께서나 광해 그대나, 어두운 자들의 욕심으로 그리되었소. 내가 석마 타고 여기를 온 까닭이 그대들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라오.


유 씨백골이 난망이옵니다.


김 씨도와주십시오. 마마!


왕 후내살이가 남살이라고 했소. 앞서간 수레바퀴가 자국을 남기는 건 남살이를 위한 거랍니다. (눈을 잠시 감는다) 생각해 보면, 참 모질고도 험한 세월. 그러나 한바탕 꿈이더이다. 서 푼어치 욕망으로 버무린 헛꿈 말이오.


광해와 김씨, 유씨가 고개 숙인다.


왕 후(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다) 그해 어전, 숙부는 광대들과 용상 앞에서 비사치기 놀이판을 벌였답니다.


왕후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먼 옛날을 불러낸다.
무대 어두워지고, 영상엔 강물이 긴 띠처럼 보인다.
커다란 대문 열리는 소리.



4장. 그해 어전


<앞무대>
단종(유치원 교사), 단아한 자세로 앉은 채 한동안 말이 없다.
그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빛, 조명에 갇힌 단종.
빠른 박자의 북소리 점차 잦아들면.


단 종숙부의 눈빛은 그물. 용상을 차지하기 위해 던진 그물. (사이) 그 그물 안에 인륜은 없었소.


황씨와 박씨가 궁중 대신1, 2가 되어 단종 앞에서 비사치기를 한다.


대신1이조판서! 그자를 바꾸라 하셨소.


이름이 적힌 세 개의 판돌을 멀리 세워 놓고, 대신2가 돌을 던져 판돌 하나를 쓰러뜨린다.
대신1, 쓰러진 판돌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 점을 찍는다.


대신1김후겸이라.


대신2에, 그러구설라무네. 병판, 그자도 나으리의 맘에 안 들겠지?


대신1이 돌을 던져 판돌을 쓰러뜨린다.
대신2, 쓰러진 판돌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 점을 찍는다.


대신2서재명이라. 어디 보자. 이자들이라면?


대신2가 종이를 보여주자 대신1이 끄덕거린다.
대신1, 2가 단종에게 종이를 가져가 보인다.
단종, 보는 듯 마는 듯 잠자코 있다가,


단 종그리하도록 하오.


<꼭두무대>
불쑥 나타나는 수양대군 형상.


수 양군주가! 신하된 자들에게 희롱되다니! 왕권이 이러고서야 어찌 종묘사직을 보존한단 말인가!


단 종수양 숙부! 제발 나를 나이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까? 신라적 충담이라는 자는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백성이 편하다 했습니다. 헌데 숙부는 왜 그리 엇짜로만 보시면서 과인을 억누릅니까? 과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이 올린 자들이 숙부의 안에 있는 사람임을 말입니다. 과인을 과인으로 내버려두면 정녕 아니 됩니까? 무섭습니다, 숙부!


수 양이제 고작 열두엇! 애송이에게 조정을 맡길 수 없소!


단 종그러니 숙부께서 도와야지요. 숙부의 경륜으로 이 나라를 옳게 이끌어주셔야지요. 제발 과인을 허물지 마세요, 숙부!


수 양허물다니요? 누가 누구를 허문답니까?


단 종허면 어찌 숙부께서는 모눈으로 과인을 노려보십니까? 숙부의 눈빛은 과인을 옭아매는 그물이고, 마음을 내리누르는 맷돌입니다. 아시옵니까?


수 양허음!


단 종숙부! 어린 나이지만 다 압니다. 숙부보다 먼저 왕이 돼서 그러지 않습니까!


수 양(돌아서서) 흥! 알고 있구만! 허면 용상에서 나앉으면 될 터!


혼유석에 앉은 정순왕후, 옛일을 기억해낸다.
부분조명에 갇힌 정순왕후, 단종과 대화하듯 한다.


왕 후그날 전하께오선 중궁전에 납시었지요? 납덩이처럼 무겁고 초췌한 용안으로 말입니다. 떠는 건 전하의 입술만이 아니었습니다. 옥음 또한 받자옵기 민망할 정도로 떨지 않았습니까?


단종의 부분조명, 역시 빛의 감옥이다.


단 종세상은 이를 황표정사라 한다지요? 과인이 어리고 무능하여 신하들에게 휘둘렸다구요? (고개를 가로젓는다) 과인은, 무서웠습니다.


왕 후전하! 보령 비록 열두 살 어린 나이지만, 전하께서는 마음이 가득 차신 분이십니다. 세상 소문이 어디 백성의 소리입니까? 다 그 사람 입에서 나온 날개 달린 말들이 아니옵니까?


단 종숙부이신 영의정이 이미 낙점한 사람들, 조카가 어찌 숙부를 거스를 수가 있겠습니까? 무서웠습니다. 그 부릅뜬 눈빛은 주살이며, 짧고 굵은 목소리는 과인을 짓누르는 맷돌이니, (사이) 일마다 무서웠습니다.


왕 후(손을 뻗으며) 전하!


<꼭두무대>, 떠오르는 수양.


수 양종사가 위태롭다. 요망한 간당 김종서를 베어라!


왕후, 수양에게 서슴지 않고 말을 던진다.


왕 후세종대왕님의 고명대신을 죽이다니! 친친지정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수 양종서를 베라! 궁을 파수하라!


복면한 인물(박씨), 철퇴를 내려치자 고목처럼 쓰러지는 김종서(황씨).


왕 후수양 숙부! 당신은 참으로 용기도 없는 반지기 사내일 뿐이오! 노골적으로 용상을 내놓으라고 할 일이지, 비겁한 핑계로 사람들을 그리 많이 죽이시오! 하늘이 가만두지 않을게요.


수 양(위협적인 말투) 주상!


여전히 고요하게 좌정하고 있는 단종 한동안 침묵, 이윽고 입을 연다.


단 종과인은…… 숙부이신 영의정에게…… 양위…… 하노라.


단종의 부분조명 흔들리다가 이내 소멸.
그 빈자리에 수양의 거만한 웃음소리.


왕 후(울음을 삼키며) 그리하소서, 전하! 논밭 뜸부기 소리가 전하를 편케 할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전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소서, 전하!


왕후, 단종을 향해 애틋하게 손을 내밀고는 오열한다.
침울한 김씨와 유씨.


왕 후그날 달도 떨어지고, 별똥도 무수하게 떨어졌소. 세상은 온통 검은 침묵뿐이었다오. 허나 오직 한 사람만이 웃음을 하얗게 뒤집어쓰십디다.


장엄한 궁중음악을 뚫고 수양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꼭두무대>, 왕관을 쓴 수양.


수 양나라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주상 전하께서는 내가 아니면 이를 진정시킬 수 없다 하여 나에게 대위를 물려주시고자 했다. 허나 나는 굳게 사양했다. 그러나 여러 종친과 대신들이 물리칠 수 없다 하여,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을 높여 상왕으로 받들겠노라.


왕 후흥! 상왕으로 받들어요? 열성조가 내려보고 계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근정전 앞 품석을 지킨 수많은 충애지사들이 듣고 있음을 모르시는군요. 부끄러운 줄 아시오!


수 양중전을 노산군 부인 송씨로 강등하고 궁에서 몰아내라!


왕 후두렵지도 서운하지도 않습니다. 온 날 온 적 없으니 간다고 가겠습니까?


허공에서 긴 두루마리 상소문이 내려온다.
대신 복장의 박씨 들어와 읍하며 외친다.


박 씨신, 아뢰옵니다. 노산군을 없애 후환을 막아야 하옵니다.


또 다른 두루마리 상소문이 내려온다.
대신 황씨, 들어와 역시 읍하며 외친다.


황 씨옛말에 이르길, 항우도 댕댕이넝쿨에 넘어진다 했사옵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옵니까? 뿌리를 뽑아 싹수를 없애야 하오이다!


<꼭두무대>, 뒤돌아선 수양.


수 양옳은 말이로다. 그래야지! 그래야 뒤탈이 없지, 암!


박씨, 후다닥 들어온다.


박 씨모반이오!


수양, 냉큼 돌아선다.


수 양모반? 모반이라 했느냐?


박 씨금성대군이 노산군의 복위를 꾀하였소!


수 양무엇이라? 복위를 꾀했다고? 그 어린것이 불씨로다! 고이얀지고! 노산군을 당장 청령포로 원찬하라!


김 씨(끼어든다) 아이구! 원찬이라니요!


왕 후용상에 미친 눈! 무엇인들 못하겠소?


수 양청령포에 금표비를 세워라! 새들도 못 들어가게 하라!


수양에게 따지듯.
혹은 독백하듯.


왕 후열두 살 어린 조카가 그리도 무서웠습니까? 그 외진 산간에 금표비까지 세우다니! 어린 조카의 그림자까지도 그렇게 두려웠냐 이 말입니다!


매서운 바람 소리.
사내 갑(황씨)과 사내 을(박씨)이 허공에서 내려온 밧줄을 땅에 고정시킨다.


사내 갑이거 흉지 중에 흉질세.


사내 을자네가 뭘 안다고! 어여 끝내고 가세. 어, 바람 한번 징허게 분다!


사내 갑삼면은 강물이 흐르고, 뒤쪽은 절벽이니 이거야말로 물이 흐르면서 산을 가두어버린 꼴이 아닌가?


사내 을(둘러보며) 듣고 보니 그렇구먼. 어따, 많이 알어!


사내 갑이걸 보고 왈 산수수류(山囚水流). 천년 고립이라고 허는 거야! 알어?


사내 을추켜주니까 아주 배때지까지 보이고 자빠졌네!


사내 갑어찌? 더 알려줘?


사내 을이 잘난 체하는 사내 갑에게 눈을 흘긴다.
바람 소리.


사내 갑한양 구중궁궐에서 이 숭악한 곳을 어찌 알았을까?


사내 을대군 때부터 내로라하는 국풍들 데리고 명당 보고 다녔다대.


사내 갑어린 조카 왕 묻어주려고? 아따 숙부 노릇 제대로 했구먼그랴.


사내 을헛, 이 사람이 이거. 자네 목이 몇 개여?


사내 갑알았네. 이런 말은 이불 속에서나 해야지.


사내 을어, 살 떨려. 어서 하고 가세나.


바람 소리.
밧줄을 재차 확인하고는 옷깃을 움켜쥐며 나가는 두 사내.


그네를 타는 왕후.
애절한 눈빛이 담장 밖에 있다.
여인의 애원성 나오는 동안
소복한 왕후가 천천히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이별이야. 이별이야.
님과 날과 이별이야.
이제 가면 언제 오리오.
오만 한을 일러주오. 새벽 서리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럭아.
이별이야. 이별이야.
님과 날과 이별이야.


왕 후(북받쳐) 마마! 마마!


실신하는 왕후.
광해와 김씨, 유씨가 왕후를 부축한다.


김 씨마마!


유 씨마마!



광 해정신이 드시옵니까?


왕후, 힘없이 일어나 앉는다.
영상에는 도도한 강물 흐르고.


왕 후(무연히) 넋을 놓았다 이었다 하며 수십 년 세월을 보냈소.


유 씨(울먹인다) 마마!


왕 후(손가락으로 영상을 가리킨다) 저 강…… 광나루에서 미사리로, 미사리에서 다시 이포나루로, 이포에서 단강나루 건너 청령포까지. 저 강이 우리 임의 길이었소. 저 강이 전하의 눈물을 모셔다가 청령포 소나기재에 뿌렸다오.



5장. 청령포 자규새


청령포.
장대비 소리.
박씨와 황씨가 각각 사내1, 2가 된다.


사내1어, 이놈의 비! 죽자고 퍼붓는구먼!


사내2상왕께서 비를 타고 오셨어.


사내1비를 타고 와?


사내2눈물로 삿대 삼아 강물 타고 오셨어, 이 사람아.


사내1그 강물이 일어서서 거꾸로 쏟아진다. 이 퍼붓는 눈물 좀 봐.


천둥과 번개가 무대를 가른다.


사내2음마야! 놀래라. 하늘님!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사내1(주변을 둘러보며) 진즉 상왕을 관풍헌에 모셨어야지, 이게 뭔가? 뒤는 절벽이요, 앞과 옆은 강이니 이게 천상 감옥이 아니냔 말여! 하늘님도 노하실 만하구먼. 암튼 이제라도 모셨으니 됐네.


사내2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뭔가. 이 무시무시한 비 좀 보게. 조금만 늦었어도 상왕은 청령포 물귀신이 됐을 걸세.


사내1이 사람아, 큰일은 이미 났어!


사내2무신 소리여? 태백산이라도 무너졌다 이 말여 뭐여?


사내1이런 벽창호 같으니라구! 계유년에 닭 우는 소리 들리던가? 왜 그랬다고 생각혀?


사내2오라! 용상 가로챈 저 암특한 숙부 살쾡이?


사내1그려! 왕 노릇하겠다고 그 살쾡이가 죄다 잡아먹었으니 닭이 울 까닭이 없지. 닭이 울지 않으니 아침부터 검은 해가 떴고! 그게 큰일 아니고 뭔가?


사내2허긴 그렇네. 고게 태백산 무너진 거제.


더욱 세찬 빗소리.


사내1청령포가 물에 잠기네. 물귀신 되기 전에 어여 나가자구!


사내1과 2, 하늘을 쳐다보고는 나간다.


<앞무대>
망연히 앉아 있는 무명 저고리의 단종(교사).
사내(박씨) 들어온다.


사 내전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침소에 드시옵소서.


단 종…….


사 내전하! 옥체를 보존하셔야…….


단 종그리 말게. 해는 하나뿐일세.


사 내(울먹이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니까? 에고 살다살다 이게 원.


단 종너무 수선스럽구먼.


사 내전하!


사내, 어깨울음.
허공을 조각내는 자규새 울음소리.


단 종가만! 저 소리 좀 듣자꾸나.


처연한 자규새 울음소리.
단종이 시를 읊는다.


단 종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니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가 내 시름인 걸 어찌 모를까.


사 내전하!


흐느끼는 사내.
금부도사 복장의 황씨 들어온다.


도 사상왕 전하!


단 종…….


도 사어명을 받자와…….


사 내(깜짝 놀라) 어명이라구요?


단 종죽는 건 두렵지 않소. 다만 어머니와 누이동생 그리고 가련한 왕비…….


사 내전하! 전하! 어찌! 어찌!


오열하는 왕후.


도 사전하! 신을, 이 못난 신을 부디 용서하소서.


도사, 단종에게 사약을 건넨다.
사내, 어쩔 줄을 모른다.
단종,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사약 사발을 들고 마신다.
절규하는 사내.
자규새 울음소리 짧고 굵게 하늘을 찢고.
도사, 숙배를 한 채 오열한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 마치 여러 사람이 웅얼거리는 듯
도사의 시조창이 무대에 가득 차오른다.


도 사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 임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왕 후(절규한다) 전하! 어찌 혼자 가십니까! 소첩도 데리고 가소서! 전하!


김 씨마마!


김씨와 유씨가 오열한다.
<꼭두무대>, 수양 형상 떠오른다.


수 양죄인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라!


왕 후(발악하듯) 세상천지에 이런 경우는 없소! 나이 어린 게 죄요?


칼바람 소리 무대 휘젓고 나면
왕후가 일어나 <앞무대>로 간다.


왕 후전하! 홑이불 한 장 덮어주지 못한 이 사람을, 전하는 용서치 마소서!


왕후, 흐느낀다. 김씨와 유씨가 왕후를 혼유석에 앉힌다.
무대는 이내 달빛 고여 괴괴하고
점을 찍듯 이따금씩 풀벌레 소리만 한두엇.
왕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다.
침울한 김씨와 유씨.


왕 후인간 세상에 여름이 있는 건, 그쪽에 추운 슬픔이 있기 때문인가 보오.


김 씨(연민) 참으로 추운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왕 후(고개를 가로젓는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주고 하늘이 거두거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소. 헌데도 사람이 하늘인 양 그러하니 사람 세상이 추운 것이오. 그렇지 않소? 광해?


광해, 말없이 소나무 가까이서 허공만 바라본다.
나작나작 풀벌레 소리가 광해 대신 대답하듯 운다.



6장. 쪽물 세상 그리며


교사가 시녀 복장으로 들어온다.


시 녀마마! 마마!


왕 후또 그 소리냐?


시 녀하오나, 마마!


왕 후이미 서인의 몸이라 했느니! (사이) 구했느냐?


시 녀엄동설한인지라 쪽풀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저잣거리엔 바람만 사납게 불어대지, 사람 그림자는 눈 씻고 봐도 없는걸요?


시녀가 훌쩍훌쩍 운다.


왕 후갑자기 왜 그러느냐?


시 녀궁궐이라면, 소주방이나 생과방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잔뜩 나왔을 텐데, 이게 뭡니까요? 중전마마께서 쪽물이라니요.


왕 후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느냐! 네 아무리 아기나인이었기로 그리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모르고 입을 놀리느냐!


시 녀원통하고, 분통하고, 애통하고, 절통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왕 후그만!


시 녀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쪽풀이 없어 쪽물도 들일 수가 없으니, 이제 무엇으로 연명을 해야 하옵니까요?


김 씨아니, 정궁마마께서 쪽물을 들여 연명하셨사옵니까?


왕 후나라가 내다 버린 몸, 누가 쌀을 주겠소.


시 녀쇤네는 나가 보겠습니다요.


시녀, 나간다.
왕후 독백한다.


왕 후먹고살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내가 쪽물이고 싶어 그런단다. 너도나도 쪽물이면 세상이 쪽물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더 이상 억울한 죽음도 없고 자기 얼룩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일도 없지 않겠느냐. 내 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광해와 김씨, 유씨 감읍한다.


광 해마마!


김 씨마마!


왕 후큰 빛은 보이지 않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했소. 얼룩은 누구나 있지. 하지만 남의 얼룩을 보면서 자신의 얼룩을 찾아내 그걸 지우고 또 지우면, 이처럼 큰 사람이 어디 있겠소.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가 어쩐가.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얼룩만 키워대니 그게 아쉽소.


광 해마마!


김 씨한 치 앞을 못 보는 청맹과니들이옵니다. 간악한 혀를 놀려 그리된 것이오니, 불쌍히 여기소서.


왕 후자신을 옭아매는 건 결국 자신입디다. 여든 해 동안 나는 나를 문지르고 닦으며 세상에 눈을 두지 않았다오.


김 씨참으로 숭앙할 만한 삶이셨습니다. 하오나, 이 땅에서 우리 광해는 여전히 더러운 이름입니다. 그것이…… (운다) 서럽고 원통하와…….


왕 후이미 땅속에 갇힌 유혼(幽魂). 무엇을 어찌할 수 있겠소.


김 씨그러니 더욱 애절하고 슬픈 일이 아니옵니까?


대나무 지팡이에 삿갓 쓴 행려객(황씨), 시를 웅얼거리며 나온다.


행려객세상이 나의 뜻과 어긋나니
시 외에는 즐거움이 없구나.
술 취한 즐거움도 깜짝할 사이의 일
잠자는 즐거움도 다만 잠깐 사이라.


영상에 강물 흐르고.
행려객, 삿갓을 들어 먼 눈빛으로 강물을 본다.


행려객세상은 두루물물이 왜각대각하건만,
저 강물은 제 몸을 엎드려
소리 없이 천년을 사는구나.


행려객, 강물을 한동안 본다.


행려객(지팡이를 들며) 가자꾸나, 지팡아! 너 아니면 길을 어찌 열어가리.


왕 후저 대나무 지팡이를 보시오. 대나무는 스스로를 비워 그것으로 마디를 만든다오. 비우지 않으 면 새 마디가 생기지 않는 법. 대나무가 쑥쑥 자라는 건 스스로를 비우기 때문이 아니겠소?


광해와 김씨, 왕후의 말을 곱생각한다.
시녀의 호들갑 소리가 침묵을 허문다.
시녀가 웃으며 대광주리를 들고 들어온다.


시 녀이것 좀 보시와요.


왕 후웬 채물이냐?


시 녀흥인문 밖에 채전이 섰지 뭡니까요? 아이, 좋아라!


왕 후채전이라니? 거기는 채전이 없지 않느냐?


시 녀누가 아니래요? 마마께 채물을 드리려고 애오개장터 사람들이 흥인문 밖까지 와서 채전을 열었다지 뭡니까요. 에그, 고맙지고! 고맙지고!


왕 후저런! 그러다 경을 팥다발같이 치겠구나. 우리를 감시하는 걸 모르고 어찌 그런단 말이냐!


시 녀(운다) 오죽하면 채전장수들이 예까지 와서 마마님을 도와주겠습니까요?
(돌연 재미있다는 듯) 채전장수들이 담장 안으로 채물을 슬쩍슬쩍 던지면, 쇤네는 그걸 꼴깍 꼴깍 받고, 그리하고 그리하고 해서 마마님께 드리랍니다요. 헤헤. 재밌지 않사옵니까?


왕후, 시녀에게 눈 핀잔을 준다. 자라목으로 오그라드는 시녀.


왕 후나가 일러라! 고마운 일이나 그리하지 말도록 전하라. 착한 백성 다칠까 두렵구나.


시 녀그래두, 마마! 그것마저 없다면 어찌하려구 그러시옵니까요.


왕 후냉큼 나가지 않고 무에 꾸물거리느냐!


시 녀알겠습니다요 마마.


왕 후쪽풀이나 구할 방도를 찾아보게.


시녀, 힘없이 나간다.
왕후, 대광주리를 들고 무대 앞으로 나온다. 병들고 노쇠한 걸음.


왕 후전하! 비록 풀죽으로 연명을 할망정, 여든두 해 내내 소첩은 전하를 한 번도 여의지 않았습니다. 영도다리 건널 때, 영영 이별할 줄 꿈에나 생각했습니까? 그동안 무척 외로우셨지요? 이제 소첩도 임 곁으로 갈 때가 되었나 보옵니다. (사이) 불쌍한 우리 임께서 소첩을 단박에 알아보실 수 있을는지요. 외롭고 불쌍하신 분!


왕후, 비틀거리더니 쓰러진다.
광해와 김씨, 유씨가 왕후를 들어 올린 채 무대를 한 바퀴 돈다.
요령 소리와 함께 <꼭두무대>에 상여 나온다.
여인(교사)의 구슬픈 상두가가 길을 밀자, 상여가 천천히 움직인다.
여인의 뒤를 따르는 황씨와 박씨.
어둡고 눅눅한 무대.
왕후를 혼유석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광해와 김씨, 유씨가 큰절을 올린다.
요령 소리 처렁처렁 무대에 차오른다.
능역을 차츰 점령하는 안개.



7장. 춤추는 혀


안개 깔린 능역.
황씨와 박씨가 싸리비로 안개를 쓴다. 쓸어도 쓸어도 도로 그 모습.
서로 얼굴을 보다가 나가버리는 두 사내.
꼿꼿하게 앉은 왕후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김씨.
광해는 소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걸 도와주는 유씨.


김 씨마마!


왕 후그리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소?


김 씨어찌 마마를 마마라 하지 말라 하시옵니까?


왕 후삼도천 건너 저승안개에 이미 넋을 씻었소. 시절 인연은 이제 없소이다.


김 씨참으로 슬프고 또 슬프옵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시다니요.


왕 후아무리 세상이 살천스럽다 해도, 하늘이 거둘 때까지는 살아야지요.


김 씨여기까지 왕림해주셨으니 저희들의 답답하고 한 맺힌 말을 들어주시겠사옵니까?


왕 후그대들의 넋이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 어찌 마다하겠소.


김 씨저는 임해와 광해 두 아들을 낳고 스물일곱 나이에 수의를 입었습니다.


왕 후이생의 삶이 너무 짧구려. 하지만 어찌하겠소. 그 또한 하늘의 뜻일진대.


김 씨여든두 해를 사신 마마에 비하면 저의 이승 인연은 보잘것이 없답니다.


왕 후인연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오.


김 씨단종대왕께오선 복위되셨지만, 우리 광해는 아직도 아둔한 저쪽 세상에서 패륜 왕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김씨, 그네 타는 광해를 본다.


김 씨광해가 저리 세상을 기웃거리는 건, 엉킨 넋이 풀어질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옵니다.


왕 후하늘은 목숨을 거두고, 땅은 우리를 받아들였소.


김 씨어렵사옵니다.


왕 후광해는 자신부터 닦아야 하오. 제 형을 죽였고, 이복동생마저 목숨을 거뒀으니 이는 광해의 씻지 못할 얼룩이오. 허니 살아서 씻지 못했다면 여기서 달빛 가루라도 모아서 자신을 씻고 또 씻어야 하오. 그래야 산 세월과 살 세월이 덜컹거리지 않고 이어져서 저 강처럼 흐릅니다. 또한 산 세월이 장차 살아야 할 세월에게 덕을 주는 거라오.


김 씨광해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할 뿐이옵니다. 저기 광해를 보십시오. 광해가 저리 진땀을 흘리며 억울함이 풀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지를 않사옵니까? 그러니 저희들이 어찌 땅이 되고 달빛이 될 수가 있겠사옵니까?


왕 후(김씨를 잠시 보더니) 어찌 그대는 한쪽 접시에 놓인 것만 보시오?


김 씨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이시온지…….


왕 후임해와 광해 똑같은 아들인데 어찌 광해만 생각하시냐 이 말이오.


김 씨임해는 어릴 적부터 욕심이 많고 모든 걸 제 눈 밑에 두려던 아이였습니다. 오죽하면 에미가 그 아이를 내놓았겠사옵니까? 하지만 광해는 그렇지 않사옵니다. 판단이 명석했고 또 효행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팔이 굽지 않겠사옵니까?


왕 후(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오! 이제 보니 광해만 씻어서는 안 될 일이군요.


김 씨무슨……?


왕 후자식이 흠이 있다면 낳고 기른 부모 또한 흠이 없지 않겠소?


김 씨부끄럽고 송구스럽사옵니다.


침통한 김씨를 토닥여주는 왕후.


왕 후말은 주술이라 했소. 말이 소리가 되면 뜻도 이루어질 수 있는 법. 애탄한 마음을 풀어놓구려.


김 씨섬나라 왜놈들이 파죽지세로 나라를 도륙하던 그해였습니다.


조총 소리, 말발굽 소리, 또 조총 소리.
매캐한 화약 냄새와 연기, 혼돈의 세계.
<앞무대>
선조(교사) 등장한다. 광해군, 전립 차림으로 선조 앞에 무릎을 꿇는다.


광 해아바마마! 소자가 한양을 파수할 테니 아바마마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소서.


선 조몽진을 하란 말이냐!


광 해그렇사옵니다. 조정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아바마마의 행궁으로 하고, 또 하나는 소자가 이끌어 왜적을 물리치겠나이다.


선 조음.


광 해아바마마! 사세가 급하옵니다.


선 조세자는 진력을 다해 나라를 수호하라!


빗소리, 선조에게 숙배하는 광해.
조총 소리.
매캐한 연기로 어수선한 무대.
각 도의 깃발이 용기 좌우로 후면에 나타난다.
전립을 쓴 광해군, 중앙에서 칼을 뽑는다.


광 해팔도 의병이여! 구국 충정으로 일어나라! 나라를 구하라!


함성.


광 해군량을 모으고, 백성을 보호하라!


남루하고 초췌한 부부(황씨/교사)가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눈빛이 불안하다.
광해가 다가간다.


광 해어디로 가는 길이오?


사 내어딘 어디겠소? 왜놈들 피해 몸 숨길 곳이지.


광 해행색이 말이 아니구려.


사 내행색이나 마나 난리통에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우. 이제 어찌해야 할지, 에이 빌어먹을 세상!


광 해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으나 잘될 것이니 너무 상심 마오.


사 내부모 죽고, 자식놈까지 죽었는데, 또 무슨 상심헐 게 있다고 그런 말씀을 헌다요?


부 인어찌 그리 왜놈 왔쌌고, 오랑캐 왔쌌고 그런가 모르겄어요. 이놈의 세상은 난리 세상인가 워쩐가 원.


광 해온 백성이 힘을 합쳐 막아내야 합니다. 힘을 내야 하오!


사 내이게 다 제 노릇을 못 해서 그렇소!


광 해제 노릇이라니요?


사 내아, 생각해 보우. 나랏님이나 벼슬아치들이 다 제 일을 못 해서 그러는 거 아니우! 이게 다 저들이 저가 아니라서 그렇다 이 말이우.


광 해(깊은 한숨) 힘을 냅시다! 힘을 합치면 이 어려움을 반드시 이겨낼 것이오.


부부, 힘없이 걸어 나간다. 사내 넋두리를 한다.


사 내흥, 힘을 합쳐? 조정이 진작 힘을 합치지 왜! 허긴, 석 달 벼슬살이로 평생을 먹고사는 작자들인데 무얼 바래! 에이! 개 같은 놈들!


부인이 사내 입단속을 시킨다.
광해, 하늘을 보고 탄식한다.
무대 한쪽에서 박씨, 사관이 되어 실록을 기록한다.


사 관광해는 궁지에 빠진 백성을 위문하고 병폐를 보완, 제거했으며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모든 행동이 사리에 맞았고, 시든 것을 기름지게 소생시켜 무위를 크게 떨쳤다. 선조실록, 기해년 팔월 스무하루.


빗소리.


광 해새들도 장마가 오면 보금자리를 다시 보거늘, 나라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꼬.


깊게 탄식하는 광해.
<꼭두무대> 위로 떠오르는 병사들.
그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는 광해.


광 해병사들이여!
죽음으로 삶을 보전하라! 나라가 패망의 위기에 있을지언정
그대들의 마음 마음이 충으로 채워진다면
나라와 그대들 또한 온전하리라!


영상에 이순신 장군의 글귀가 큼지막하게 떠오른다.
‘必生卽死 必死卽生’
둥둥둥 북소리.
승리의 환호 한껏 솟구쳤다가 징 소리 끝판처럼 서서히 잦아들면
환한 무대.
박씨와 황씨가 두 대신으로 나와 실뜨기 놀이를 벌인다.


대신1지긋지긋한 전란도 지나갔고, 이제 용상의 주인을 가리는 게 급선무요. 자, 이건 어떻소?


대신2어디 보자. 아, 이거야 식은 죽 먹기지.


대신2가 얽힌 실을 거뜬하게 풀어 다른 모양을 만든다.


대신1어랍쇼? 그렇다면 이것도 풀어 보시지.


대신2가 실을 풀지 못해 쩔쩔맨다.


대신1나라를 수습할 분은 영창대군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적통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 영창대군이 보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소?


대신2(생각에 잠기다가) 아, 이런 수가 있었군. 여러 수를 봐야지요. 허허허.


대신2가 실을 풀어 또 다른 모양을 만든다.


대신2영창이라? 허허허. 대감! 설마 강보에서 나랏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나라가 왜놈들에게 도륙당해 풍비박산이 되었소이다. 나랏일은 강보가 아닌, 용상에서 해야 하오! 자, 이것은 어떠시오?


이번에는 대신1이 실을 풀지 못해 끙끙댄다. 대신2의 거만한 표정.
<앞무대>
선조(교사) 들어와 있다.


선 조이혼은 자질이 영명하고 학문이 정밀하며,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오래전부터 백성들의 기대가 컸다. 이에 과인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노라.


<꼭두무대>
여러 대신의 형상들이 일제히 솟아 구시렁거린다.


선 조저 왜란 때 과인은 나라의 한쪽 모퉁이에 붙어 있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바로 세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여러 말 말라!


궁중음악이 엄숙하게 나오고
왕관을 쓴 광해
성장(盛裝)한 김씨와 유씨
대신1, 2(박씨와 황씨)가 들어온다.


광 해무엇이오?


대신1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영상은 아무래도…….


대신2그렇사옵니다, 전하! 영상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수이온데…….


광 해그럼 잘된 일이 아니오.


대신1전하!


대신2전하!


광 해(대신1에게) 경!


대신1예, 전하!


광 해소북파 정승이 영상에 앉기를 바라오?


대신1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광 해(대신2에게) 경!


대신2예, 전하!


광 해경은 대북파일 게고.


대신2전하께오서 잘 헤아리셨사옵니다. 저희 대북파야말로 지금의 전하를 보위에 옹립한 일등공신이 아니옵니까?


광 해과인은 보았소.


대신2(착각) 예, 전하 그렇사옵니다. 영상은 대북파가…….


광 해(큰소리) 백성들의 통곡이 계곡을 덮고, 그 피가 강물의 색을 바꾼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 말이오! 그리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들 하오?


대신들, 대답을 못한다.


광 해당파 때문이오! 우리나라는 큰소리치는 자들 때문에 나랏일을 망치고 말 것이오. 물러들 가오!


대신들 나가면서 투덜거린다.


대신1흥, 소북도!


대신2대북도 아닌 이원익이를 영상에 앉힌다고? 그자는 박쥐로세.


대신1박쥐가 샌가? 쥔가?


대신2새?(도리질) 쥐?(도리질) 그냥 박쥐!


대신2, <꼭두무대> 앞으로 간다.
<꼭두무대>에 대신들의 형상이 나타난다.


대신2이참에 소북파를 옴짝달싹 못하게 꽉 눌러놔야 합니다.


형상들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대신2이리하십시다.


대신2가 <꼭두무대> 가까이 가서 소곤거린다.
형상들, 얼굴을 가까이 모은다.


대신2어떻소이까? 이만하면 교활한 승냥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허허허.


대신2, 껄껄대며 나간다.
대신1, 광해 앞에 선다.


대신1전하! 참으로 하늘이 깨지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광 해또 무슨 일이오?


대신1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조령에서 도둑 무리가 창궐해 토벌을 했사온데,


광 해잘했구먼.


대신1하온데, 그 배후에 김제남이…….


광 해뭐라? 김제남?


대신1그러하옵니다. 김제남이 누구입니까? 인목대비마마의 아비가 아니옵니까? 그자가 소북파를 꼬드겨 끔찍한 일을 벌이려 했다 하옵니다. 전하!


광 해끔찍한 일이라니? 소북파가 영창을 보위에 앉히려 했다, 이 말인가?


대신1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는 명명백백한 역모이옵니다.


광 해뭐라? 역모! 나라는 아직도 포화의 연기가 가시지 않았거늘, 전란으로 백성들의 살과 뼈가 부서졌거늘, 역모라니! 김제남을 당장 잡아들여라!


대신1예, 전하! 하옵고……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인목대비 또한…….


광 해김제남이 역모를 했다면 인목대비 역시 무관하지 않을 터.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출입을 엄금케 하라!


<꼭두무대>, 대신들 낄낄댄다.
대신2 나타나 호기 있게 웃는다.


대신2옳거니 되었다! 계모도 모친이거늘, 천륜을 어기고 모친을 가둬? 이건 패륜 중에 패륜! 주상, 그대는 끝났소! 흐흐흐.


대신2, 사라진다.
대신1, 빠르게 들어온다.


대신1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사옵니다, 전하!


광 해그게 무슨 말이냐?


대신1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의도가 명명백백 드러났사옵니다. 전하! 훗날을 위해 결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광 해그 어린것을? 아니 된다! 절대 아니 돼!


대신1전하! 왕권의 지존과 엄중함을 위하고, 후환을 없애려면 죽여야 하옵니다.


광 해아니 된다 했지 않았는가!


<꼭두무대>, 대신들 일제히 소리친다. 죽여!
대신1, 광해의 표정을 살핀다.


광 해(단호히) 과인은 살인자가 아니다! 영창은 어리다!


<꼭두무대>, 대신들 일제히 ‘으잉?’광해에게 눈화살을 퍼붓는다.


대신1전하! 늙었다면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영창대군이 어리기 때문에 앞날을 걱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전하! 통촉하소서!


광해,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말한다.
대신1은 광해의 뒤를 따르며 부채질을 한다.


광 해영창이 파당의 씨앗이 된다면, 또다시 이 나라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 자명한 일.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야! 용서할 수 없다!


대신1(부채질을 하며) 전하!


<꼭두무대> 대신들, 한목소리로.


대신들전— 하―.


광 해아, 이 자리가 ‘나’를 ‘나’이게 하지 못하는구나. 굴비 엮듯 죽음을 엮어야 용상이 용상이로구나.


대신1전하!


광 해알았느니. 나라가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되지. 영창군을 원찬하고 둘레에 가시를 둘러라! 바람도 출입해서는 안 되느니라. 당장 시행하라!


<꼭두무대>, 의기양양한 대신들.
대신1, <꼭두무대> 앞으로 간다.


대신1날도 참 물큰하구려. 과하주나 한잔하십시다.


<꼭두무대>, 대신들 낄낄거리며 사라진다.



8장. 외로운 배로 누워


장사치 행색의 박씨 들어온다.


박 씨전하!


광 해알아보았느냐?


박 씨누르하치의 기세가 날로 비등하와 조선이 언제 그들의 말발굽에 밟힐지 모르옵니다.


광 해전쟁만은 피해야 한다. 너는 다시 가라. 가서 누르하치의 동향을 계속 주시하라. 세 끼니 먹을 때마다 보고하고 또 보고하라!


박씨, 읍하고 나간다.
비변사 도제조(황씨)가 들어온다.


도제조신 비변사 도제조, 아뢰나이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당도했사옵니다.


광 해명에서 사신이?


도제조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했다 하옵니다.


광 해그건 그들의 일, 명나라 사신은 왜 왔단 말이오?


도제조원병을 보내달라고 하옵니다.


광 해원병? 불탄 집에 무엇이 남아 있다고. 왜란으로 피폐해져서 그런 여력이 없다 하오!


도제조조선은 명나라와 부자의 의리가 있고, 또한 지난 왜란 때 우리를 도운 은혜가 있사옵니다. 하와, 원병을 보내심이 마땅하다고 보옵니다.


광 해이보시오! 도제조! 지금 우리가 수천 명의 군사를 조발할 수 있소?


도제조하오나, 전하!


광 해불가하오.


도제조전하!


광 해(큰소리로) 명분만 따질 게 아니라 현실을 보라 이 말이오!


도제조하오나, 의리를 지킨 명나라입니다, 전하!


광 해도제조! 수천 명이나 되는 군사는 농사짓는 백성들을 조발해야 할 터. 맞소?


도제조그렇사옵니다.


광 해누르하치의 기마병은 능하다 들었소. 알고 있소?


도제조예, 전하!


광 해허면 우리 농민들이 그들과 대적할 수 있겠소?


도제조…….


광 해개죽음일 뿐이오. 양 떼들이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도제조하오나…….


광 해하오나! 하오나! 하오나! 지금은 말보다는 손이 필요한 시기오! 알겠소? 혜민서에 가서 보시오! 그들이 왜 신음하는지를 똑똑히 보라 이 말이오!


도제조전하.


광 해도제조는 누르하치의 침략에 대비책이나 세우라!


도제조, 못마땅한 모습으로 나간다.


광 해남쪽은 왜적이 여전히 시끄럽고, 북쪽에서는 오랑캐가 말 울음소리를 내는데, 어쩌자고 구름같은 명분만 좇는단 말인고! 어쩌자고!


남루한 노파, 남루한 조선의 얼굴.
세월에 지친 듯, 혹은 미친 듯
한바탕 제멋으로 타령하면서 나간다.
타령은 슬픔의 소리면서도 놀이적이다.


노 파박서방은 오골쪼골 바가지고, 진서방은 한 짐 가득 지었고
강서방은 삐쩍 마르고, 권서방은 한 잔 두 잔 권하고
배서방은 욕심 많게 제 배만 채우고
염서방은 소금 팔고, 조서방은 (킥 웃는다) 고추가 크고
이서방은 씨잘디기 없이 서캐가 많고
후유 대근허다. 써글 녀르 세상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에그, 세월은 닭똥구멍처럼 벌어져 바람만 숭숭 드나들고.


<꼭두무대>, 아이들 까불대며 흉내 낸다.


아이들닭 똥구멍에 바람만 숭숭, 닭 똥구멍에 바람만 숭숭.


대신1, 2 들어온다.


대신1뭐? 닭 똥구멍?


대신2넥키놈들! 네놈들이 닭똥집 맛을 알기나 해? 고얀 놈들 같으니.


대신2 소리에 인형들 쏙 들어간다.
광해, 어느새 용상에 앉아 있다.
조명 한 가닥 외롭게 용상의 광해를 비춘다.


대신1전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명 황제가 노발대발하여 조선을 그냥 (주먹으로 내리치는 시늉) 이런 다는데,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광해 말이 없다.


대신1전하? 어찌해야 하오리까?


대신2도원수 강홍립 장군의 죄과를 물어야 하옵니다. 그자는 누르하치와 싸우지도 않고 팔짱만 끼고 있다 하옵니다.


대신1아니? 싸우지도 않고 (팔짱을 낀다) 이러고 있단 말인가? 허면 둘이 사귀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런 작자를 당장!


광 해허면, 과인부터 징치하오!


대신2(깜짝 놀라) 전하?


광 해과인이 그리하라 했소. 다들 물러가오.


대신1전하! 이 문제는 수습을 해야…….


광 해그만!


대신1허, 이거 참, 전하! 어찌 명나라를 적국으로 만드시려 하옵니까?


광 해과인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양쪽 눈에 넣고 지켜보겠소. 어느 한쪽만 보는 외눈박이는 하지 않겠다 이 말이오! 아시겠소들?


대신2아, 그러니까 그 한쪽 눈으로 명나라를 보셔야지요. 누르하치는 변방의 오랑캐일 뿐이옵니다. 어찌 대명국과 나란히 할 수 있사옵니까?


광 해명나라는 이빨 빠진 호랑이, 청국은 바람에 날개를 편 독수리요. 언제까지 명분 타령만 하고 있을 작정이오들!


대신1열성조가 통곡할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전하!


광 해왜란을 당하고도 모르오? 눈만 있지 망울이 없는 자들 같으니라구!


교사가 대신 복장으로 <꼭두무대> 쪽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꼭두무대>, 임해군 형상.


대 신나리! 임해군 나리!


임해군망울이 없는 자는 오히려 광해다. 나 임해군은 명한다. 광해는 주변 분간도 못 하는 어두운 군주이니라. 준비하라!


대신이 주변을 살피고는 바람처럼 빠져나간다.


광 해임해군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대신이란 자들은 한결같이 명분에 빠져 눈을 뜨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하도다.


광해, 하늘을 우러러 수심에 잠긴다.
가체머리의 중전 유씨, 어느새 광해의 옆에 있다.


유 씨전하! 들었사옵니까?


광 해무슨 말이오?


유 씨임해군이 전하를…….


광 해알고 있소.


유 씨어찌하시겠습니까?


광 해법도대로 할 것이오.


유 씨허면?


광 해어린 영창을 죽였소. 이제 형마저 죽인다면, 백성들이 과인을 뭐라 할 것인지…… 슬프오.


유 씨강건하시소서. 왜란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수습하시느라, 전하께오서 얼마나 힘이드신 줄, 소첩은 아옵니다. 나라와 백성만 눈앞에 두소서.


광 해밤이 늦었소. 그만 들어가시구려.


유씨 나간다. 생각에 잠기는 광해군.
<꼭두무대>, 임해군 형상.


임해군너는 어둡고 미친 왕이니라! 네가 얼마나 패륜적인 일들을 벌인 줄 아느냐? 흐흐흐.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이제 다 되었다. 너 잡을 올무가 다 되었다 이 말이다. 흐흐흐.


광해, 허공을 향해.


광 해형님! 어찌 형님은 사사건건 모눈으로 보십니까? 그리도 용상이 탐나십니까?


임해군용상이 탐이나? 그렇다! 너는 패륜을 저질렀고 의리를 버렸다. 너로 인해 용상은 추락했다 이 말이다!


광 해형님!


임해군부르지 마라! 난 너 같은 미친 것을 둔 적이 없다. 흐흐흐. 너는 가장 부끄러운 이름으로 천세만세 남을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광해.


광 해(고개를 숙인다) 시행하라!


둥둥둥 북소리 울리다 뚝 그치면
임해군, 사라지고 웃음소리만 무대를 휩쓸고 사라진다.


희미한 능역.
풀벌레가 이따금씩 몇 개의 소리 점만 찍는, 적막한 무대.


김 씨광해는 슬펐을 겁니다. 왕은 조선이라는 큰 배의 사공. 헌데도 사공의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왕 후궁이란 그런 곳이오. 대궐의 기와만큼이나 검은 욕심이 많은 곳이라오.


왕비 유씨, 급하게 들어온다.


유 씨전하! 어서 피하십시오.


광 해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오?


유 씨능양군이 군사를 일으켜 궁으로 들어오고 있답니다.


광 해뭐? 능양군이?


유 씨훈련대장 이흥립이 궁문을 열었다 하옵니다.


광 해이럴 수가! 능양군이 이럴 수가!


유 씨(다급하게) 전하!


유씨가 광해를 떠밀다시피 데리고 나간다.
군사 복장의 황씨 들어온다. 이마에 ‘義’를 쓴 머리끈을 둘렀다.


군사1우리는 의를 위하여 일어났노라! 우리 거의군은 잘못을 바로잡고 새 왕을 옹립해 비틀거리는 이 나라를 바로잡겠노라!


또 다른 군사2, 3(박씨와 교사) 들어온다.


군사2광해는 천륜을 어기고 인륜을 허물어버린 어두운 자다!


군사3위로는 명나라 조정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원한을 사무치게 했다!


군사2미친 광해를 먼 섬에 가두고 눈을 가려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자!


군사1바로잡자!


군사2, 3바로잡자!


군사1거의군 만세!


군사2, 3거의군 만세!


능역에서 지켜보던 김씨.


김 씨네 이놈들! 무얼 바로잡는단 말이냐! 이놈들아! (분개한다)


유 씨(눈물을 닦으며) 어머님!


김 씨북방에서는 이괄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켜 임금이 줄행랑을 치고, 정묘년에는 오랑캐들에게 또 얼마나 혼쭐이 났느냐? 그러고도 너희 거의군들은 거들먹거리며 백성의 등골을 빼먹으니 백성들이 뭐라 하는지, 귀가 있으면 열고 들어 보아라!


<꼭두무대>, 갑남을녀, 고개를 내밀고 소리친다.


갑남1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을녀1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갑남2그의 말을 타며.


을녀2그의 일을 행한다면.


다같이너희들과 그 사람들이
다른 게 뭐가 있느냐.


각설이 여인(교사)이 바가지를 치면서 춤과 노래.


여 인논다 논다 하니까
파장에 칠 푼 주고 산
장병아리 놀듯 하네.
논다 논다 하니까
구정물 통에 호박씨 놀듯 하네.
얼룩이가 덜룩이를
어절 어절 어절. 에~ 취!


<꼭두무대>
갑남을녀 인형들 솟아 외친다. 인형들 에~ 취! 에~ 취! 에~ 취!
말발굽 소리가 굉음을 울린다. 무대는 삽시간에 포연에 휩싸이고.
그물로 된 샤막.
그 안에 갇힌 인조(교사) 팔 색 깃발을 등에 꽂은 청나라 군사(박씨), 기세등등하게 들어온다.


군 사청국 대황제께 조선 왕은 신하의 예를 갖추라! (버럭) 냉큼 행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머리 푼 맨발의 인조, 무릎을 꿇는다.
통곡하는 <꼭두무대>의 대신들.
무대에 차오르는 거만한 웃음소리.


유 씨(절규한다) 전하!


김 씨우리 광해라면! 우리 광해라면! 병자년 그 죽음의 소리가, 그 숱하게 끌려간 백성들의 눈물 발자국이, 우리 광해라면 없었을 것을!


파도 소리.
무명 두루마기 차림의 광해, 그네에 앉아 있다. 파도 소리.
처절한 구음 소리.


그 소리들이 무대를 붉게 물들이면
한 줄기 조명에 갇힌 인조, 이마에 피가 선연하다.
희미한 실루엣으로 광해, 인조를 본다.


인 조아, 나라란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걸 이제야 알았도다. (흐느낀다)


김 씨(쏘아붙인다) 통곡은 멀었소! 서 푼어치 자존심 때문에 환향녀의 통곡이 홍제원의 강을 이룰 것이오!


김씨의 조명 점차 좁아져 사라진다. 파도 소리.


광 해왜놈들에게 당한 치욕보다 더 지독한 부끄러움. 조선은 어디 있는가? 왜놈이다, 오랑캐다, 얕잡아 보던 자존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 낯 붉어 마음만 타는구나. 나를 나이게 하지 못하는 세상, 얼룩으로 도저히 아름다움을 만들지 못한 세상. 내가 나였다면, 우리가 정녕 아름다움이었다면…….


파도 소리에 바람 소리가 포개지며.


광 해바람 불고 빗발 흩날린다. 창해의 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빛은 가을을 이고 있구나.
제주의 밤은 꿈으로 자주 깨고
한양 소식 끊어진 곳에
외로운 배로 누웠도다.


파도 소리 크게 차올랐다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암전.



9장. 달빛제의


<꼭두무대> 영상에 달빛이 가루처럼 뿌려진 강.
어둑한 강물, 달빛 조각이 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흰 가면1이 능역을 순례하듯 돈다.


가면1누구시오?


흰 가면2, 3, 4, 5, 6, 7 계속 ‘누구시오’라고 묻는다.
탈색된 소리.
서로 어긋나기도 하고, 대면하면서 능역을 맴돈다.


가면2누구시오?


가면3사릉.


가면4성릉 아니 한때의 성릉 지금은 그냥 묘.


가면5누구시오?


가면1왕후.


가면6대부인.


가면7정궁.


가면2지친 노구의 몸.


가면4누구시오?


가면3왕비.


가면6국모.


가면7누구시오?


가면5, 문득 선다.


가면5임금.


가면들, 가면5에게 말한다.


가면들누구시오?


가면5그냥 영감.


가면들누구시오? 누구시오? 누구시오?


가면1풀.


가면6지천으로 떨어진 풀씨.


가면5풀씨 하나.


가면4둘, 셋, 넷, 다섯…….


가면3강, 저 어둑시니한 강물.


가면7강물 한 방울.


가면2방울, 방울, 방울…….


가면1누구시오?


가면들광대!


가면3가면의 놀이.


가면3놀이의 꿈짓.


가면1, 2놀이짓.


가면3, 4꿈짓.


가면들달빛. 있는 듯 없는 듯 이 달빛.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 달빛.


점차 커지는 쇠북종 소리.
달빛이 금색 실 가루가 되어 이들에게 내린다.


가면2나를,


가면3나이게 해주오.


가면4나를, 나이게, 해주오.


가면들나를, 나이게, 해주오.


가면5나이게 해주오.


가면6나이게 해주오.


가면들, ‘나를 나이게 해주오.’ 하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나간다.
가면들이 차츰 허물어지면서 민얼굴이 드러난다.
인물들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 보고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만져 본다.
국악기 박 타는 소리가 ‘탁탁’ 두 번 나온다.
빈 무대에 금색 달빛 가루 흥건하고, 쇠북종 소리 은은하게 내려앉는다.
(이 장면은 업보를 털어내는 정화의식처럼 보이면 된다. 달빛, 금가루, 강물의 영상, 쇠북종 소리가 이 의식에 참여하면서 시청각적 의미를 만들어내면 좋겠다.)



10장: 강이 되다


달빛 교교한 능역.
김씨와 왕후가 혼유석에 앉아 있다.


김 씨흙 밟았던 저쪽, 눈물 밟고 산 세월이었습니다.


왕 후하늘을 잊어서 그러하오. 욕심이 흉한 얼룩을 만들지요. 하늘은 어디 그럽니까? 맑디맑지요. 날마다 밤으로 얼굴을 씻고 아침에 다시 뜨는 해를 보았지요? 아주 깨끗합니다. 그래서 해맑다고 하잖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아침마다 씻는 건 얼굴이 아니랍니다. 내 안에 있는 얼룩을 씻는 일이니까요. 탕 임금이 날로 날로 새롭다는 건 이를 두고 한 말이라오. (사이) 아침마다 제대로 얼굴을 씻었다면 슬픔을 낳은 얼룩은 없었을 겝니다. 하지만 저쪽 세상이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래서 저쪽은 슬픔이 살지요.


김 씨손바닥으로 가렸으니 하늘을 어디 볼 수나 있겠사옵니까?


왕 후마음속에 하늘 하나씩은 가지고 있소. 허니 그걸 믿읍시다.


김 씨믿으라구요? 돌에 꽃이 피고, 무쇠소의 울음소리를 차라리 믿겠습니다.


쇠북종 소리, 안개처럼 능역에 깔린다.
광해가 너울너울 가면의 춤을 춘다. 나비처럼 가벼운 춤.
황씨, 박씨, 교사가 각기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춘다.
이들은 광해를 밀어내듯 멀리하며 그들끼리 춤을 춘다.
왕후와 김씨, 유씨가 이들의 춤을 본다.


왕 후한세상이 가면의 춤입니다. 우리 불쌍한 임도 그렇고 그 우악스런 수양도 욕망의 탈을 뒤집어 쓰고 한바탕 춤을 추었지요. 그들을 따랐건 저항했건 그 역시 그들의 가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가면은 제 욕망의 탈이니까.


왕후, 춤추는 광해를 본다.


왕 후광해도 가면들의 춤 틈바구니에서 외로웠을 겁니다.


잠시 침묵.


왕 후가면은…… 얼음의 벽에 찍힌 흉한 얼룩일 뿐이라오. 그래서 인간 세상은 춥고도 흉한 곳인가보오.


김 씨여기에서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넋은 무겁고, 그 무거운 넋이 검은 벽 속에 갇혀 답답하기만 합니다.


왕 후이제 가벼워질 겝니다. 아무리 침침한 그늘이라도 그 그늘 속에는 어릿한 흰 기운이 있기 마련이라오. 그걸 보기 위해 애달아하는 게 아니겠소? 그걸 볼 수 있다면, 춥지 않을 겁니다.


김 씨흰 기운이라고요?


왕 후어스름이라고나 할까. 쨍쨍한 빛도 아니고 그렇다고 검은 그늘도 아니지요. 빛과 그늘이 만나는 곳, 깊은 어둠 속에 감춰진 흰 어둠이랍니다. 그리되면 넋도 무겁지 않아요.


김 씨하오나 이미 저승의 몸, 어둠에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흰 기운을 볼 수 있겠사옵니까?


왕 후(고개를 흔들며)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해 속에 검은 까마귀가 살 듯, 어둠 속에도 흰 것이 산다오. 어둠이 짙을 대로 짙으면 흰 기운이 어른거리지요. 슬픔 역시 마찬가지라오. 슬픔이 짙고 또 짙어 결국 바래지면 슬픔 속에서 슬픔 아닌 마음이 우러나온다오.


김 씨그것이 흰 기운이옵니까?


왕 후(고개 끄덕인다) 흰 기운은 어둠 속에서 밝음을 틔우는 씨앗이지요. 우리 모두 그리될 것이오. (얇은 웃음) 죽어서야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다오. 그리되면 저 강물, 이 땅 그리고 달빛이 죄다 내가 되는 거라오.


왕후, 일어나 풀밭을 거닌다.
능역 한 곳에서 작게 파인 구멍을 본다.


왕 후이 쑥부쟁이 굴헝. 어둠의 구멍. 빛이 태어나는 곳.


구멍에 귀를 가까이 대는 왕후.


왕 후아, 강물 소리!


김 씨예? 정녕 땅속에서 강물 소리가 들리옵니까?


왕 후(미소 지으며) 와서 들어 보구려.


김씨가 구멍에 귀를 댄다.


김 씨땅속에서 강물 소리가 들리다니. (유씨에게) 들어 보오.


유씨, 구멍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다.


유 씨아, 들리옵니다.


광해도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다.
<꼭두무대> 영상에 도도한 강물이 흐른다.


왕 후바로 우리들 소리라오.


김 씨처음 들었사옵니다, 이 소리!


왕 후저 수많은 소리들을 끌어안고 흐르는 강물을 보시오. 저 강물이 왜 저리 몸을 낮추고 흐르는지 아오?


김 씨…….


왕 후높낮이를 숱하게 지나왔기 때문이라오. 따지고 보면 우리네 굴곡진 생도 그런 것이지요.


<꼭두무대> 영상에 파란 물결이 흐른다.
김씨, 강물을 한동안 본다.
광해와 유씨도 김씨 옆에서 강물을 바라본다.


왕 후(빙긋이 웃는다) 이제 가야겠소. 부디 달빛 내린 강처럼 편안하길 바라오.


왕후, 일어나 나간다.
광해와 김씨, 유씨가 예를 갖추고 배웅한다.
말 울음소리 길게 두어 차례.


무대 어두워지고,
부서진 달빛에 물비늘이 빛 조각처럼 반짝거리는 <꼭두무대> 영상.
광해와 김씨, 유씨가 그 속으로 사라지자 장명등에 또렷한 불꽃이 일렁이고
무대는 흰 어둠만 자작하게 깔린다.



11장. 신생의 아침


황씨와 박씨, 청소도구를 들고 능역으로 들어온다.
투명한 아침볕이 새뜻하다.


황 씨어따! 날씨 한번 죽인다.


박 씨비가 좋기도 혀.


황 씨좋기는 뭐가 좋아? 몸은 눅눅하고 마음은 무겁고 나는 영 싫네!


박 씨이 죽이는 날씨가 간밤에 내린 빗님 덕인 줄 몰라?


황 씨암튼, 아침 햇빛이 좋긴 하네. (비석을 본다) 어랍쇼?


황씨가 비석 가까이 간다.


황 씨아니, 이거?


박 씨(비석을 만져 본다) 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이거! 어제 그거 맞제?


황 씨아, 맞제!


박 씨(무릎을 탁 친다) 옳거니!


황 씨왜 그려?


박 씨달빛! 달빛이 내려와 한바탕 논 모냥이여!


황 씨참, 지랄헌다! 뭐? 달빛이 한바탕 놀았다고? 너 시방 시 쓰냐? 귀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를 허고 자빠졌어!


박 씨귀신? 맞다! 여기 귀신이 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요렇코롬 말짱해질 수 있냐 황가야? 이거 귀신이 조화 부린 거여! 암, 확실혀!


두 사내, 신기한 듯 비석을 만져 본다.


박 씨자네, 그 양잿물, 소용없게 되았네.


황 씨자네, 목마르지?


박 씨왜? 그거 마시라고? 에라이, 나쁜 놈아!


황 씨버리기 아깝잖여!


박 씨나이 어디로 처먹었어? 저기 애들 오니 쟤들에게 좀 배워 이 사람아!


<꼭두무대>
파란 모자를 쓴 아이들이 까불거리며 <꼭두무대> 위로 솟는다.
두 사내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긴 치마를 입은 유치원 교사 들어온다.


아이들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아이들, 일제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교 사자, 여기서부터는 조용.


아이1와! 깨끗하다.


교 사새싹유치원 햇님반!


다같이네!


교 사여기는 광해군 임금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누구라고요?


아이들광해군 임금님요!


교 사참, 잘했어요.


교사가 능역을 살펴본다.


아이2광해군 임금님은 좋은 일 많이 했나요?


교 사그럼, 나라에 전쟁이 났을 때, 왕족 가운데 유독 이분만 우리나라를 지키며 싸우셨지. 참 용감하시지?


아이들네!


아이3다 싸우지 않나요?


교 사다 싸운다고? (검지손가락을 가로젓는다) 그건 아니지.


아이들말씀해주세요. 왜요?


교 사얘들아, 들어 볼래? 우리 집에 힘센 도둑이 들어왔어요. 그럼 집주인은 어떻게 해야죠?


아이1도망가요!


아이2아냐! 도망가는 건 비겁해! 싸워야지! 선생님, 그쵸?


아이1아참! 119 신고!


아이2싸우자!


아이3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아이2이런 바보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가만히 있어?


아이3그래도 맞으면 아프고 또 죽을 수도 있는데…….


아이1맞아! 맞아!


아이2너네들, 정말 바보야!


교 사얘들아! 도둑이 들어왔다면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 정도 돼.


아이1그게 뭔데요?


교 사첫째는 철수 말대로 도둑과 맞서 싸우는 거. 너 일루 와! 하고 막 싸우는 거예요.


교사가 발로 차고 싸우는 시늉을 한다.


아이들선생님!


교 사어? 너무 실감 나게 했나? 에, 그리고 두 번째는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망가는 거지, 뭐.


아이3에! 비겁해요! 싸우는 거 하나, 도망가는 거 하나. 또 하나는요?


교 사도와달라고 해야지.


아이1신고하는 거 맞죠? 선생님!


교 사그렇지! 근데 119가 아냐. 경찰은 112야. 알았지? 도둑 몰래 신고하는 거야. 자, 여러분! 이 중에 누가 가장 용감한 주인이죠? 도둑과 싸우는 주인인가요? 신고하는 주인인가요? 아님 도망가는 거?


아이들도둑과 싸우는 주인이요!


교 사그래요. 여기 계신 광해군 임금님이 그랬어요. 훌륭하시죠?


아이들(박수 치며) 네!


아이1그런데 왜 이름이 광해군이래요?


교 사어? 그건, 임금님의 뜻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이2임금님 뜻이 뭔데요?


교 사아유, 얘들이 현장학습은 제대로 하네. 그건 말이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거지.


아이2신하들은 왜 싫어했는데요?


교 사좀 복잡한 문젠데, 아무튼 나를 나답게 하려고 했어요. 너네들도 그렇잖아! 영수도 철수도 민지도 다 영수이고 철수이고 민지이고 싶지 않니? 그렇지?


아이들네!


교 사바로 그런 분이셨어! 자, 그럼, 우리 인사할까요? 모두 차렷! 묵념!


교사와 아이들, 묵념한다.


교 사바로! 친구 손잡고 앞으로!


아이들, 노래를 부르며 <꼭두무대> 밑으로 사라진다.


교사, 하늘 올려다보고는 나간다.
박씨와 황씨, 혼유석을 닦고는 나가려다가,


황 씨이 봐!


박 씨저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개차반이 아니었구만 그려!


황 씨그러게 말여. 개띠가 아니었는가비어. 여 봐?


박 씨왜?


황 씨얘들 하는 거 안 봤어?


박 씨무얼?


황 씨기왕 왔으니 우리도 절이나 하고 가자구.


박 씨그러자고. 아이구, 임금님 몰라봬서 지송합니다요!


황 씨이하동문이구만요.


황씨가 모자를 벗고 묵념을 하자, 박씨가 어색한 모습으로 따라 한다.
영상에 달빛 가루 내린 강물 흐르고
환한 아침의 능역에서 장명등의 불꽃이 또렷하다.


막.











이원희
작가소개 / 이원희

국립극장 장편 가무악극 및 창극 공모에서 당선된 이래 꾸준히 희곡 창작을 함. 주로 역사를 통해 현대성의 문제를 다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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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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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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