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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인의 초상

  • 작성일 2023-11-03
  • 조회수 492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는 구조가 반듯하고 색감이 온화한 느낌이라 의아하던 차였습니다.

도발적이라…

대호

인물화에서는 매혹적인 느낌과 섬뜩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붓 터치로 성글게 표현한 여인의 표정에선 아이러니가 느껴졌고 온도의 차가 느껴지는 색들의 배치에서는 위트가 느껴졌습니다.

아이러니와 위트라… 실례지만 전공이 미술인가요?

대호

미학과입니다. 

그렇군요.  

대호

학생 때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인재시네요. 

대호

선생님은 국내 미술가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십니다. 

이거 영광이네요. 

대호

그러니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제가 좋아하던 선생님의 그 특유의 개성이 최근작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평단의 호평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론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저도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대호

아직 40대 후반이면 무척 젊으시죠. 

교수직도 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죠. 아무래도 미술학이라는 게 화풍을 정형화시키는 작업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제 화풍도 좀 정형화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꾸 기본적인 부분들을 강조하게 되거든요. 학교 때는 저도 그런 교수가 싫었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네요. 여하튼 평가는 새겨듣겠습니다. 


한쪽에서 또각또각 힐 소리가 나며 미현 들어온다. 


미현

여보. 

어. 왔어?

미현

미안 내가 늦었지? (현의 팔짱을 낀다. 대호를 본다.)

한국신문 문화부에…

대호

이대호 기잡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현과 미현에게 한 장씩 건넨다.)

미현

우리 남편 기사 나가나요?

대호

광복절 특집 기사로 나갈 예정입니다.

미현

(웃는다) 와 감사해요. 이 사람 잘 부탁드려요. 

오늘 반가웠습니다. 제가 아내랑 약속이 있어서…

미현

식사라도 함께 하실래요? 

여보, 요즘 김영란법 때문에 기자님께 식사 대접은 안 돼요. 

미현

그럼 더치페이로 하죠 뭐. 

그건 또 실례고.

대호

아닙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도 일정이 있어서요. 

제가 오늘 선물을 해주기로 한 게 있어서 함께 쇼핑을 가야 합니다. 

미현

전시회보다 중요한 일이죠!

안 지켰다간 지구 종말이죠. 

대호

네. 좋은 선물 하시길 바랍니다. 

반가웠습니다. 

미현

(대호에게 명함을 내민다.) 전시 기획사에 있어요. 이 전시도 저희 기획사에서 한 거죠. 혹시 연락 주실 일 있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미현과 현, 나간다.

대호,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대호

어. 상우야. 나 대혼데. 김현 작가 지금 이혼소송 중이라고 하지 않았냐? (사이) 확실해? (사이) 얌마, 뭔 고급 정보야. 방금 와이프랑 같이 봤어. 사이 완전 좋아. 뭔 이혼소송. 야. 그거 물어봤음 나 어쩔 뻔. 알았어. 새끼. (사이) 끊어라. 토요일 여섯 시? 알았다. 교대역 거북이곱창? 현서도 온대? (표정 밝아지는) 알았어. 그때 봐. (전화를 끊는다.)


대호의 뒤로 한 여인 다가온다. 

긴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오프숄더의 붉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아름답다. 

대호, 무심코 뒤 돌다 여인과 마주친다. 

놀란다. 


여인

안녕하세요. 

대호

안녕하세요. 

여인

혹시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으세요?

대호

네?

여인

제가 딸이에요. 

대호

아. 김현 작가요?

여인

(고개 끄덕인다.)

대호

알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여인

특집 기사 쓰신다고요. 

대호

들으셨어요?

여인

네. 

대호

어디 계셨어요?

여인

네?

대호

방금요. 이야기를 들으신 것 같아서요. 

여인

저쪽에요. 

대호

왜죠? 

여인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아요. 

대호

아. 

여인

알려드릴 게 있어요. 

대호

(여인에게 명함 건넨다.) 한국신문 문화부에 이대호라고합니다. 

여인

(명함을 슬쩍 보고 돌려준다.) 제가 지금 지갑이 없어서요. 명함은 다음에 받을게요. 

대호

(살짝 불쾌해진다.) 아. 네.



사이


대호

어디 커피숍 같은 데로 자릴 옮길까요?

여인

잠깐 걸으실래요?

대호

네?

여인

답답해서요. 답답해 죽을 것 같아요. 걸으면서 얘기하죠.

대호

네. 그러죠. 


여인, 앞장서 나간다. 대호 뒤따른다. 



2장

한강



한강 고수부지 강 건너 불빛이 가득하다. 두 사람 천천히 걷는다. 


대호

(여인의 눈치를 본다.) 걷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여인

꼭 그렇지도 않아요.

대호

아무 말씀 없이 여기까지 걸어오셔서. 

여인

여길 오고 싶었어요. 동호대교 옆 유람선처럼 생긴 식당. 서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강 건너 저 불빛들이 꼭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아름다워요. 서울에서 산다는 게요. 실제로는 냉혹한 현실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면 장난감처럼 그저 작고 예쁘게만 느껴지거든요. 

대호

평소에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오랜만에 자세히 보네요. 


사이, 어색한 침묵 


여인

아버지의 그림이 왜 최근에 풍경화인지 알고 싶으신 거죠?

대호

네. 

여인

까미유 끌로델 알죠?

대호

네?

여인

로댕의 연인. 

대호

네 물론이죠. 

여인

까미유 끌로델이 정신 질환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세상은 그 이야기를 페미니즘으로 엮어내요. 난 그게 너무 뻔한 스토리라고 생각해요. 창의력이 그렇게 없나?

대호

네? 

여인

저는 그녀가 여성이었던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나약했어요. 그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왜 남자를 사랑해요? 멘탈만 조금 강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까미유 끌로델의 이름을 알고 있겠죠. 자기 영감을 빼앗긴 것도 자긴데 누굴 탓해요? 그건 무능해서지 여성이라서가 아니에요. 사회성도 능력이에요. 사랑은 예술을 망가뜨려요. 공과 사를 구분하면서 자기 작품을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거예요.

대호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여인

아버지의 작품은 다 어머니가 그린 거예요. 

대호

네?

여인

어머니가 그린 거라구요. 

대호

어머니라면. 아까 그 전시 기획자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다.) 오미현? 

여인

아뇨. 제 어머니는 임선예예요. 

대호

네?

여인

임선예라고요. 제 어머니 이름이요. 

대호

하지만 아까 그분이 아내라고 했는데요?

여인

불여시가 하나 달라붙었죠. 그간 어머니가 해온 모든 업적을 훔쳐 갔죠. 어머니가 없인 아버지는 손발이 다 잘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혼자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대호

저. 

여인

제가 좀 흥분했죠.

대호

정말 따님이 맞습니까?

여인

제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 

대호

아까부터 이상했던 게요. 김현 작가는 이제 40대 후반인데 이렇게 장성한 따님이 있다는 게. 

여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만났어요. 아버지는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염색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죠.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이 살았어요.

대호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건 완전 특종인데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시나요? 네. 제가 기자 정신이 조금 떨어지는 걸 수도 있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건 완전히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얘기라. 

여인

제가 충동적으로 이런 말씀 드린다고 생각하세요?

대호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분이 아버지를 무지 싫어하는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연을 끊을 게 아니라면. 내일이 되면 이런 말 한 걸 후회할 수도 있어요. 

여인

싫어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화가로서는 싫어하는데 인간으로서는 사랑하고. 그래요. 아버지가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면 본인이 인정해야죠. 본인 그림이 본인 게 아니라는 걸. 

대호

정리해보죠. 그럼 기존의 인물화들이 다 어머니 그림이다? 

여인

(고개 끄덕인다.)

대호

아버지가 어머니 그림을 자기 걸로 발표했다?

여인

(고개 끄덕인다.)

대호

그럼 새로 그린 풍경화들은?

여인

그건 아버지 작품이죠. 댁도 느끼셨잖아요. 잘은 그렸죠. 그런데 그 이상의 뭐가 없잖아요. 

대호

글쎄요. 

여인

아버지가 어머니랑 사이가 벌어지면서부터 어머니 도움을 거부했죠. 까미유 끌로델을 잃어버린 로댕이 몇 년이나 갔을 것 같아요? 사실 그때부턴 로댕은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요. 하지만 그 이름은 영원히 남았죠. 아버지도 그러겠죠. 뭐 아쉬울 게 없는 눈치예요. 교수에 돈도 많겠다. 그 전시 기획잔지 불여시랑 붙어 다니면서 아주 행복해 죽으려 하죠.

대호

따님의 속상한 마음 이해합니다. 

여인

전 할 말 다 했어요.

대호

어머니가 그림을 그렸다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나요?

여인

네?

대호

아.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여인

어머니가 그 증인이죠. 지금 소송 중이에요. 

대호

아! (무언가 생각난 듯) 

여인

(한강을 바라보며) 저도 그림을 그려요. 제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아세요?

대호

아뇨. 

여인

세상의 소모품처럼 살다가 그림을 그릴 땐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 같거든요. 

대호

소모품이요. 

여인

어머니도 그랬을 거예요. 

대호

그렇군요. 

여인

아! 숨통 트이고 좋다. (대호에게 손 내민다.) 오늘 반가웠어요. 덕분에 이 쓸쓸한 길 동행자가 생겨서요.

대호

(악수에 응하며) 한 번 더 뵐 수 있을까요?

여인

(웃는다.) 왜요? 저한테 반하기라도 하셨어요?

대호

네? (사이) 솔직히 이런 분한테 반하지 않는다는 게 힘든 일이라. 

여인

이런 분?

대호

미인이요. 

여인

농담이시죠?

대호

농담 반 진담 반이요. 

여인

뭐 하러 한 번 더 봐요. 그냥 지금 좀 더 보면 되죠. 

대호

네? 


여인, 무대 밖으로 걷는다. 

대호 무언가에 홀린 듯 여인 따라 나간다. 


암전



3장

화실



상인이 운영하는 화실 겸 미술 학원

곳곳에 이젤이 놓여 있고 벽에는 학생들이 그린 듯한

아마추어적인 소묘와 수채화 그림들이 걸려 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상인은 귀에 붓 하나를 꽂고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상인의 그림은 추상화다.

대호, 들어온다. 상인의 옆으로 다가가 그림을 본다. 


상인

(계속 그림을 그리며) 왔냐?

대호

열심히네?

상인

거기 앉아.

대호

기다릴게. 천천히 해. (의자로 가 앉는다.)

상인

다 끝났어. 

대호

멋진데?

상인

시립 미술관에라도 걸릴 대단한 예술작품이면 좋겠다만 기껏 티셔츠에 들어갈 도안인걸. 

대호

야 그것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 어딨냐. 잘 팔린다며?

상인

그것도 옛말이다. 

대호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옛말이야?

상인

처음에나 반짝 반응 좋았지, 짝퉁 시장 너무 잘 돼 있어서 다 갖다 베끼더라. 

대호

야, 당하고만 있었어?

상인

뭐 해봐야 얼마나 번다고 그걸 대응하고 그러냐. 나도 그림이나 그릴 줄 알지 그런 쪽엔 젬병이잖냐. 그냥 귀찮아서라도 뒀다. 

대호

야 씨. 그걸 참냐.

상인

내 본업도 아니고. 애들 가르치는 거나 신경 써야지.

대호

그건 잘 되지?

상인

(붓을 물에 씻는다.) 그것도 잘 안된다. 

대호

왜?

상인

(물통을 비운다.) 입시에 실기 비중이 줄어서 그렇지 뭐. 

대호

난 개인적으로 그거 이해가 안 가더라. 

상인

시대의 흐름 아니겠냐. (앞치마를 벗어 건다.)

대호

시대의 흐름? 

상인

(이젤을 접으며) 그림 그리는 기술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할 때잖아. 

대호

기술도 중요하지!

상인

너랑 나랑 미술 학원 다니던 때나 기술이 중요했지. 지금 그건 컴퓨터가 더 잘해. 디자인 뿐 아니라 회화도 기가 막히단 말이지.  

대호

난 컴퓨터로 그린 건 좀 어색하고 딱딱하게 보이던데.  

상인

그건 니가 편견을 가지고 봐서 그래. 이번 미국 대형 공모전에도 AI가 그린 그림이 수상했어. 심사위원들은 그게 사람이 그린 건 줄 알고 심사했지. 무서운 게 뭔 줄 아냐? 컴퓨터는 이제 인간의 빈틈까지 담을 줄 알아. 인공지능은 진화하고 있어. 매일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그래서 이젠 아이디어가 중요한 시대야. 대학도 그걸 아니까 실기 비중을 낮추고 공부 잘하는 애들로 뽑겠다는 거지. 아. 그런데 언젠간 아이디어도 걔네가 뛰어넘을거야.

대호

걔네?

상인

컴퓨터.

대호

가능한가.  

상인

대호야. 그래도 아직은 미대 가고 싶은 애들 많아서 나 먹고는 산다. 기자 월급보단 나을걸?

대호

당연하지. 쥐꼬리 박봉이랑 뭘 비교하냐. 

상인

뭐 먹을래? 

대호

고기?

상인

어이쿠.

대호

농담이고!  

상인

한우집 가자. 

대호

진짜?

상인

등심 먹을래?

대호

완전 좋지.

상인

양대창도 사줄 수 있어. 

대호

야. 너 잘 안 되는 게 이 정도면. 

상인

알아, 알아. (물감을 정리하며) 외근이었다며 일은 끝났고?

대호

응. 

상인

뭐 쓰냐, 요새?

대호

김현 특집. 

상인

김현?

대호

응. 

상인

그 김현?

대호

당연하지. 

상인

이야. 만나봤어?

대호

응. 

상인

어떠냐? 점잖지?

대호

응. 

상인

와 대박이네. 짜식, 많이 컸네? 

대호

요즘 그림 봤냐?

상인

슬쩍 봤지. 기사 떴길래. 

대호

어떠냐?

상인

뭐가?

대호

뭐 달라진 거 못 느꼈어?

상인

뭐가 달라졌는데?

대호

인물화 그리던 김현이 풍경화 그리잖아. 

상인

아 그거? 김현도 늙긴 늙었구나 싶었는데? 나이 들수록 자연이 좋잖아. 

대호

느낌이 미세하게 달라졌단 말야. 

상인

그런가? (휴대폰을 검색한다.) 좀 차분해졌네. 

대호

그지?

상인

너무 안정적이고. 

대호

인물화에 비해선 어때?

상인

확실히 매력은 떨어졌네. 내면을 재구성한 느낌이 아니야. 있는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거 같은, 그냥 사실적인 느낌? 상상력 고갈?

대호

역시 너는 솔직하구나. 

상인

평단에선 뭐래?

대호

그냥 좋다고만 하지. 

상인

거기도 카르텔이 있으니 못 건드리겠지. 

대호

분명 다들 느낄 텐데 아무 말을 안 해. 

상인

거기가 원래 그렇다. 그래봐야 주류로 들어가지 못한 내 변명거리처럼 들리겠지만. 

대호

근데 그동안의 그림을 누군가가 대신 그려줬다면?

상인

응?

대호

만일 그동안의 그림을 누군가가 대신 그려줬고 그 사람과 결별한 뒤에 본인이 그린 그림이 이거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 수 있을까?

상인

그건 무슨 엉뚱한 생각이냐? 그동안 누가 국내 최고의 화가 김현의 그림들을 대작을 해줬다 이거냐? 너 혼자 생각인 거야? 아님 음모론이라도 있는 거야?

대호

그냥 혼자 생각. 

상인

니 생각이 엉뚱하긴 하다만 그런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니까?

대호

이를테면?

상인

(대수롭지 않게) 마가렛 킨 월터 킨 사건 알지?

대호

빅 아이즈?

상인

그래. 그거 영화로도 나왔잖아. 월터 킨이 마가렛 킨 그림을 제 이름으로 발표해서 유명세를 탔지. 마가렛 킨이 소송을 걸었고 결국 판사가 법정에서 두 사람에게 각자 그려보라고 해서 들통났지. 법정에서 그림이라도 직접 그려보게 해야 하나? (웃는다.) 


상인, 미술 학원 뒷정리를 하며 나갈 채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대호, 혼자만의 생각에 잠시 빠진다. 


상인

나가자. 

대호

(일어난다) 그래

상인

밥 먹으면서 더 얘기해줘. 

대호

뭘?

상인

너의 그 음모론을 말야. 너무 재밌는걸?

대호

이게 다야. 더는 없어. 

상인

뭐냐. 말을 꺼내다 말면 안 되지. 

대호

혹시 나중에 뭔가가 정리되면 더 말해줄게. 

상인

싱겁네. 차 가져왔어?

대호

아니. 

상인

그럼 소주 한잔 가능?

대호

당연히. 

상인

가자. 


상인, 화실의 불을 끄고 대호와 함께 나간다. 



4장

선예의 집



선예의 아파트 거실. 간소한 살림살이지만 꽤나 고급스러운 소품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디자이너의 시계, 대리석 티 테이블, 고급 브랜드의 디퓨저 등. 벨이 울린다. 화면을 확인하고 문을 연다. 대호. 들어온다. 


대호

안녕하세요. 

선예

안녕하세요… 기자님?

대호

네. 한국신문 이대호 기잡니다.

선예

들어오시죠. 


대호, 들어오며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집을 살핀다.


선예

앉으세요. 

대호

네. 감사합니다. 

선예

커피 드세요?

대호

네. 좋습니다. 

선예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린다. 드르륵 소리)

대호

집이 참 멋집니다. 

선예

작죠. 혼자 살긴 딱 좋아요.  

대호

감각이 느껴집니다. 

선예

(웃는다.)

대호

전 이런데 꽝이라. 

선예

(커피를 테이블에 놓으며) 문화부 기자시면 감각이 있을 것 같은데. 예쁜 거 좋은 거 많이 취재하실 테니까요. 

대호

지식이 있는 것과 실제 감각은 다르더라고요. 미학과를 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공부하긴 했지만 왜 내 집은 아름답게 꾸밀 수 없는 걸까요. 

선예

(웃는다.) 별개의 문제이긴 해요. 

대호

저도 한때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저에겐 그 타고난 재능 같은 게 없는 걸 깨달았죠. 

선예

오래 그리셨어요?

대호

원래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론 중학교 때부터 그렸어요. 예고 입시에 실패하고 나니 미술 학원에서도 더는 권하지 않더군요. 넌 머리가 좋으니 그냥 공부 쪽으로 가라. 그게 부모님의 뜻이었죠. 

선예

왜 남의 말에 신경 써요. 재능이라는 게 누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믿으면서 끈질기게 붙잡고 가는 거죠. 

대호

아.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구요. 


잠시 사이. 어색하다. 


대호

여튼 이렇게 취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예

얼결에 허락하긴 했지만.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대호

전 그저 김현 작가의 그림에 대한 특집 기사를 쓰고 있어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사적인 부분은 기사에 넣지 않을 거니 걱정 마십시오. 

선예

다행이네요. 

대호

이혼소송 중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왜 쉽게 합의가 안 된 겁니까?

선예

그건.

대호

기사에는 적지 않겠지만 불편하시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선예

아니에요. 사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저흰. 그림에 대한 소유권 분쟁 중이에요. 

대호

아!

선예

제가 도저히 포기 못 하는 그림 한 점이 있어요. 그건 남편도 포기 못 하구요. 

대호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선예

제가 들고 있어요. 

대호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선예

(일어난다.) 죄송하지만 보여드릴 순 없어요. 

대호

아.

선예

그림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자기 혐오감이라고 해야 하나. 

대호

자기 혐오감이요? 김현 작가 그림에 자기 혐오가요?

선예

여튼 그랬어요. 

대호

아… 따님이….

선예

네?

대호

아닙니다. 왜 이제야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거죠?

선예

네? 

대호

그림을 대신 그렸다면. 

선예

네?

대호

그림을 대신 그려주신 것 아닌가요?

선예

그건 무슨 말이죠?

대호

(의아하다.)

선예

누가 그래요? 전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대호

하지만 그림을 대신 그리신 것 아닌가요?

선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대호

아. 제가 잘못된 정보를… (사이) 그런데 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거죠?

선예

그 그림 속의 인물이 저니까요. 

대호

네? 


사이


대호

그렇다고 그림이 본인 소유가 되는 건 아니죠. 

선예

전 25년간 현이의 모델이었어요. 이젠 이렇게 늙어버려 소용없게 되었지만요.  

대호

아직 아름다우신데요. 

선예

그리고 그림에 대한 그 아이디어들이 다 저에게서 나왔죠. 

대호

아이디어가요?

선예

둥지 그림 아시죠?

대호

아! 여인의 머리에 둥지가 올라간 그림 말씀이시군요. 둥지 연작 시리즈요!

선예

네. 둥지를 그리자고 한 것도 저였죠. 전 아주 어릴 때부터 가끔씩 내 머리 위에 둥지가 하나 올라가 있다고 상상하곤 했어요. 그 때문에 가짜 두통에 시달리긴 했지만요. 

대호

슬픈 여인의 표정 위로 생동감 넘치던 그 둥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었죠. 인상적인 연작이었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임선예님의 것이었군요. 

선예

네. 이 정도면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가요?

대호

애매한 문제군요. 

선예

사실 모든 그림이 그랬어요. 현이가 데뷔한 후 20년간 거의 인물화만 그린 건 아시죠?

대호

네. 평단의 주목을 받은 것도 그 신비로운 여인의 얼굴과 표정 눈빛과 입매. 모나리자에 견줄 만한 알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죠. 

선예

작품을 그릴 때마다 제가 옆에 있었어요. 현이는 제가 시키는 대로 그렸죠. 색도 늘 제가 만들었죠. 

대호

색을요?

선예

(한숨 쉬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전 숨은 조력자였죠. 무척 많은 영향을 행사하던 조력자요. 지금은 고작 이런 신세지만요. 

대호

이런 신세라뇨. 

선예

보시다시피요. 저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현이는 모든 부와 명성을 다 얻었죠. 

대호

아쉬움이 남으십니까? 

선예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렸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대호

원래 그림을 좋아하셨습니까?

선예

완전히 미쳐 있었죠. 사실 현이보다 제가 더 미술에는 미쳐 있었어요. 우리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를 했던 적이 있어요. 현이와 그곳엘 갔죠.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여인이 마치 저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울었어요. 창밖으론 도시가 펼쳐지고 그 함축적인 세계가. (사이) 그 느낌은 충격이었죠. 그 뒤로 전 전시란 전시는 다 다녔죠. 하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몰랐어요. 배우기도 힘들었고요. 

대호

김현 작가는 쭉 미술을 하셨나요?

선예

현이도 저처럼 미술을 배울 형편이 안 된 건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큰아버지가 재력가였어요. 큰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었는데 거기서 도움을 받았어요. 늦게 시작했는데 스펀지처럼 모든 걸 빨아들였죠. 현이가 워낙 머리가 좋아요.  

대호

대단하군요. 

선예

좀 괘씸하기는 해요. 

대호

네?

선예

현이의 옆에 그 여자. 보셨어요?

대호

네… 사실. 몰랐습니다. 이렇게 법적인 부인이 계실 줄은요. 

선예

뭐. 떨어져 산 지 3년째라. 

대호

그림이고 뭐고 빨리 이혼하시지 그랬어요. 

선예

네?

대호

저 같으면 더러워서라도 빨리 갈라설 것 같은데요. 

선예

(웃는다.)

대호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이입을. 

선예

이혼을 안 해주는 쪽은 그쪽이에요. 

대호

왜죠?

선예

내가 원하는 건 붉은 여인의 초상 하나거든요. 다른 둥지 연작 시리즈는 모두 본인이 가지고 있는데도 고집을 부려요.  

대호

이해가 안 가네요.

선예

저도 알고 싶어요. 그냥 이것만 주면 깔끔하게 헤어져줄 텐데. 그 여잘 생각해서라도 빨리 서류정리가 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죠.  

대호

그렇긴 하죠. 

선예

현이의 그림에서 색은 무척 중요했어요. 거기 제 역할이 컸죠. 한때 제가 염색 공장에서 일했거든요. 

대호

네. 알고 있습니다. 

선예

생각보다 저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전 한 번도 인터뷰를 한 적이 없는데요. 

대호

그건 따님이. 

선예

자꾸 따님, 따님 하는데 그건 무슨 소리예요?


초인종 소리, 


선예

미안해요. 기자님을 무리해서 부르는 바람에 약속이 겹쳤어요. 

대호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갑자기 전화를 드려서. 

선예

변호사예요. 이혼소송을 맡고 있죠. 잠시만요. (현관으로 가 문을 연다.)


정장 차림의 변호사 들어온다. 선예와는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모양새로 손에 쇼핑백을 들고 들어온다. 


변호사

한남대교에서 많이 막혔어요. 사고가 났는지 한참을 수습하고. 

선예

사고가요?

변호사

졸음 운전을 했는지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본네트가 완전히 박살이 났더라고요.   

선예

사람은 안 다쳤나요?

변호사

보질 못했어요. 그 정도 사고면 사람도 다쳤겠죠. 전 한참 뒤에 있었어요. 

선예

뒤에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이게 뭐예요?

변호사

한남동에 유명한 샌드위치집인데 선예 씨 샌드위치 좋아하시는 거 생각나서 사 왔어요. 에멘탈, 브리, 또 하나 뭐더라. 여튼 뭐 치즈가 세 개가 들어갔대요. 

선예

고마워요. 완전히 취향 저격이에요. 

변호사

아. 고다요. 고다 치즈. (한참을 얘기하다 뒤늦게 대호를 본다.) 손님이 계셨네요?

선예

아. 제가 깜빡. 여기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님이세요. 

변호사

안녕하세요. (명함을 꺼내 대호에게 건넨다.) 이혼소송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변호사입니다. 

대호

안녕하세요. (명함을 받아 보고 자신도 명함을 건넨다.) 제가 두 분 약속에 괜히 방해가 되었습니다. 

선예

아니에요. 기자님 계셔도 괜찮아요. (변호사 눈치를 보며) 괜찮죠?

변호사

그럼요. 오히려 더 좋습니다. 전 사실 조금은 언론에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선예 부엌으로 간다. 


대호

소송 이야기를 기사에 적지는 않을 겁니다.

변호사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는 뉘앙스라는게 있으니까 기자님이 조금 더 진실을 쫓아가시길 바랍니다. 김현 화가는 늘 언론과 함께죠. 호의적인 쪽으로요. 선예씨 가 공격적인 포지션은 원치 않으셔서 저도 언론과 접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게 생각보다 많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대호

가진 거요?

변호사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 기계적으로 그것을 기술로 구현한 사람. 과연 어느 쪽이 그림의 주인일까요?

대호

거기 정답이 있나요? 

변호사

4차 산업혁명 시대 아닙니까. 기술은 기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죠. 

대호

아이디어도 나오던데요. 컴퓨터가 쓴 소설 읽어보셨습니까? 꽤 그럴듯하죠. 

변호사

알고리즘의 배합으로 만든 소설은 아무런 영혼도 가지지 못합니다.

대호

글쎄요. 영혼이 있다, 없다는 누가 판단하죠. 

변호사

종교가 없으십니까?

대호

무신론자입니다. 

변호사

영혼은 구현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거죠. 

대호

존재하는 것과 구현되는 것의 차이가 뭐죠?

변호사

존재한다는 건… (잠시 머뭇거린다.) 탄생하는 겁니다. 인간처럼요. 

대호

예술이 탄생한다… 흔한 말인데 이렇게 들으니 새롭네요. 변호사님은 종교가 있으십니까?

변호사

종교는 없습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건 존재한다고 봅니다. 신을 믿는다는 건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는 걸 용이하게 해주죠. 

대호

어떤 가치판단이죠?

변호사

진짜 예술과 가짜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이요. 신을 믿듯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이 있죠. 세상 밖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틀을 깰 수 있는 겁니다. 김현 작가에게는 그게 없었어요. 삶이라는 틀에 갇혀 더 나아가지 못했죠. 나아가는 건 선예 씨 몫이었습니다. 

대호

(웃는다.)

변호사

왜 웃으시죠?

대호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변호사님이 이토록 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게 흥미로워서요. 

변호사

선예 씨 변호를 하면서 저도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대호

(부엌에 있는 선예를 바라본다.) 

선예

(둘의 대화를 무심코 듣고 있다가 대호와 눈 마주친다.)


사이


대호

전 김현 화가가 이혼소송 중이라는 사실은 친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요. 

변호사

친구가요? 

대호

잡지 쪽에 있는데 그 녀석이 원래 마당발이라 소문에 밝죠. 

변호사

소문이… 무섭군요.


사이


대호

지난번 전시 때 옆에 계신 분이 사모님인 줄 알았습니다. 

변호사

쭉 그렇게 공개적으로 함께 다니고 있죠. 선예 씨에게 예의가 아닌 거죠. 


자른 과일과 함께 변호사가 사 온 샌드위치를 세 조각으로 잘라 가져온다. 


선예

드세요. 

변호사

혼자 드시지. 

선예

너무 많아요. 같이 먹어요. 

대호

감사합니다. (과일을 하나 집어 먹는다.) 가지고 있다는 게 궁금합니다. 

변호사

보시면 아실 겁니다. 우리가 왜 유리한지요.


사이


선예

(노트를 가지고 온다.) 현이 초창기 작품부터 모든 색은 제가 만들었어요. 그건 색을 배합한 저만의 비법을 정리한 노트예요. 모두 제 자필로 적었고요. 제가 염색 공장에서 일했다는 건 알고 계신다고 했죠?

대호

네. 

선예

전 그때 색 공부를 많이 했어요. 천을 염색하는 일이 저에게는 하나의 예술 작업이었죠. 현이는 무척 전형적으로 물감을 배합해요. 그런데 전 독창적인 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죠. 

대호

이를테면요?

선예

물감 이외의 색이죠.

대호

물감 이외의 색이라는 게?

선예

기자님이 무언갈 바라보는 그 눈동자. 이 샌드위치 속의 세 가지 치즈의 조합. 변호사님의 재킷. 이것들이 물감으로만 표현된다면 너무 단순하잖아요. 우리가 눈에 담는 건 그 이상의 것이죠. 우리가 보고 느끼는 걸 더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색을 찾아야죠. 누구도 쓰지 않은 색이요.

대호

그런 걸 어떻게 찾죠?

선예

그냥 일상에서요. 

대호

일상이요?

선예

네. 제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하던 일이 그걸 찾는 거였어요. 하지만 현이는 거기 큰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색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작 본인은 몰랐죠. 그 애가 평단에서 주목받았을 때 거긴 두 가지 포인트가 있었어요. 하나는 독창적인 사람의 표정,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색! 색이었죠. 

대호

기억나네요. 평론가들도 어떤 배합인지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게요. 

선예

고흐도 늘 색을 만들어 썼죠. 전 색이 진실을 담는다고 생각해요. 

대호

진실을요?

선예

기자님도 진실을 취재하는 것 아닌가요?

대호

그렇죠. 

선예

그림도 진실을 전해야 해요. 색만이 온전히 그것을 전할 수 있죠. 저는 자연 재료를 이용했어요. 

대호

자연 재료라면? 

선예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재료였죠. 방부처리는 제 전문이니까 작업이 쉬웠어요. 둥지 연작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둥지를 직접 보기 위해 산엘 갔어요. 둥지 밑으로 새가 떨어져 있었죠. 아기 새였어요. 그것을 안아 들자 아직 따뜻했어요. 난 그 새를 내 스카프로 싸서 집에 데리고 왔어요. 그것으로 색을 만들고 싶단 욕구가 솟구쳤어요. 결국 그것으로 나만의 붉은색을 만들었죠. 


사이


대호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림이 김현 작가의 손에서 그려진 이상 어떤 이유로든 임선예 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선예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현이가 그 뒤로 그런 그림을 또 그릴 수 있던가요? 보셨죠? 요즘 그리는 그림들이 얼마나 흔해 빠진 삼류 풍경화인지. 

변호사

지금 이 기나긴 소송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둥지 연작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붉은 여인의 초상 한 점입니다. 

대호

왜죠?

선예

네?

대호

수많은 그림 중에 왜 하필 그 한 점을 놓고 싸우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예

나의 젊을 때 모습이 가장 정확히 표현되기도 했고. 그래선지 꼭 내가 낳은 자식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꼭 양육권 싸움을 하는 기분이에요.  

대호

혹시 그 그림이 그 그림입니까?

선예

네?

대호

그 아기 새 말입니다. 

선예

네. 맞아요. 


침묵


선예

아직도 기억나요. 그것을 품에 안았을 때 내 손으로 전해지던 그 체온. 아직 남아 있던 체온. 죽었지만 남아 있던 그 따스함. 그래서일까요. 그 그림에서도 체온이 느껴져요.  


침묵

변호사, 헛기침을 한다. 


대호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일어나보겠습니다. 

변호사

(불안한지 일어서며) 기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대호

제가 쓰는 기사는 김현 작가님의 화풍에 대한 거지 개인사에 대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변호사

….

선예

그런데 왜 자꾸 개인사를 취재하시는 거죠?

대호

네?

선예

그림 자체를 보고 평가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림에 모든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굳이 절 찾아오신 거죠?

대호

….

선예

기자님도 알고 계신 거죠. 그림과 삶을 떼어놓고 얘기할 순 없죠. 그게 우리와 컴퓨터가 다른 점이에요.

변호사

정확합니다.

대호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으며) 누가 그러더군요. 까미유 끌로델이 자신의 영감을 빼앗긴 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요.

선예

절 까미유 끌로델에 비유하시는 건가요?

대호

따님이 그러더군요. 

선예

누구 딸이요?

대호

두 분 딸이요. 김현 작가님과 임선예 님 사이의 딸 말입니다. 

변호사

딸이요?

선예

전 딸이 없는데요. 


셋,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암전  



5장 

교대역 거북이 곱창



원형 알루미늄 테이블에서 곱창을 구워 먹고 있는 상우와 현서.

상우는 소주병을 뒤집어 팔꿈치로 친 뒤 뚜껑을 딴다. 


상우

(현서에게 소주 부어주며) 대호 요즘 연애하냐? 

현서

왜?

상우

애가 요즘 얼이 빠졌어. 

현서

정확히 어떻게?

상우

말할 때 약간 겉도는 거 있잖아. 전화도 빨리 끊으려고 하고. 

현서

아닐걸. (소주 들이킨다.)

상우

니가 어떻게 알아?

현서

있으면 말했겠지. 

상우

어 이것 봐라. 너 설마 아직도 대호한테 마음 있냐?

현서

(상우 뒤통수 때린다.) 미친. 잔 비었어. 

상우

(뒤통수 잡으며 소주 따라준다.) 아, 말로 해. 

현서

마음 있으면 왜? 니가 도와줄래?

상우

너 진짜야?

현서

그럴 리 있어?

상우

아니지?

현서

넌 내가 그런 한가한 인간으로 보이냐?

상우

응. 아니지. 근데 너 학교 때 엄청 좋아했잖아. 우리 연극반에서 눈치 못 챈 사람 없을걸? 아! 딱 한 명 대호 빼고

현서

강력계 맛 한번 볼래? 강력계가 만만해 보이냐?

상우

전혀. 너 보면 알지. 안 그래도 거친 인간이 야생의 들개로 변신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고 있거든. 

현서

들개?

상우

너무 까칠해졌어. 너. 

현서

사람 죽는 거 하루에 한 번씩 본다고 생각해봐. 

상우

아직도 적응 안 됐어?

현서

평생 못 하지. 적응. 

상우

계속 그 일 하게? 야. 외모는 이래도 너도 연약한 여자다. 상관한테 잘 좀 말해봐. 좀 편한 쪽으로. 

현서

(뒤통수 때린다.) 연약한 여자? 연약한 니 뱃살이나 걱정해라. 

상우

아, 말로 해. 


대호, 들어온다. 


대호

미안, 늦었다. 

상우

왜 늦었는데?

대호

인터뷰. 

상우

그 특집?

대호

응. 김현.

현서

꼬라지 보기 힘들다 요새?

대호

미안. 넌 잘 지냈냐?

현서

나 강력계로 옮긴 거 알지?

대호

알지. 근데 니가 자원한 거라며?

현서

응. 

대호

그게 적성에 맞냐?

현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상우

아직도 적응 중이란다. 

대호

(소주잔을 흔들며) 뭐가 제일 힘들어?

현서

사람 죽은 거 보는 게 제일 힘들지. 

상우

어휴. 난 진짜 못할 것 같아. 

현서

그것만 아니면 뭐. 

대호

(현서에게 소주 따라준다.) 정말 대단해. 너. 

현서

(잔 받으며 대호 쳐다본다. 눈빛 조금 반짝인다.) 김현이 누군데?

상우

화가 몰라?

현서

나 강력계에 있다고. 사람이 죽고 사는 와중에 그림 같은 거 볼 시간이 있었겠냐고. 

상우

아. 그래. 미안, 미안. 

대호

일반인은 잘 몰라. 전공자나 알지. 

현서

니들 사이에선 유명한 사람이냐?

상우

완전 유명하지. 그림이 얼마나 비싼데. 뉴욕 메트로폴리탄에도 들어가 있다고. 몇 억씩 하지?

대호

몇십 억. 

상우

컥. 

대호

니 말이 맞았어. 

상우

응?

대호

지난번에 갈궈서 미안해. 이혼소송 중인 것 맞대. 

상우

그지? 야. 내가 진짜 너한테 욕 얻어먹고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잡지 쪽으로 흘러들어오는 건 거짓이 없어요. 얼마나 고급 정본지 알고 있냐?

대호

오늘 만났어. 그 와이프. 

상우

대박이네. 연락처는 어떻게 알고?

대호

누가 가르쳐줬어. 

상우

누가?

대호

그 딸이. 

상우

딸이 있어?

대호

아니. 딸이 없대. 

상우

그게 무슨 말이야?

대호

(생각에 잠긴 듯.) 아냐. 

상우

이 새끼 이렇다니까. 요즘. 얼빠진 것처럼. 

현서

내 눈엔 정상으로만 보이는구먼. 

상우

너 연애하냐?

대호

(자기 잔에 소주 따른다.)

현서

연애는 개뿔. 

대호

….

상우

봐. 부정을 안 하잖아. 누구 만나는데?

현서

(대호를 바라본다.)

대호

물어볼 게 있는데. 

상우

응. 말해봐. 

대호

어떤 사람을 만났어. 그리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 그 사람은 무척 진실돼 보였어. 

상우

오 재밌어지는데?

대호

그런데 그게 다 거짓이었다면?

상우

뭐가 거짓인데?

대호

그 사람이 말했던 게 다 거짓이었다면 어쩔래?

상우

뭐, 학력 위조 같은 거 한 거야? 아님 나이를 속였나?

현서

꽃뱀한테 걸렸구만. 

대호

그런 건 아냐. 자기랑 상관없는 거짓말을 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준 정보가 도움이 되었어. 

상우

뭔 소리야. 야. 술이나 마셔. 

현서

꺼지라 그래. 속이기 시작하면 지구 종말이야. 

대호

(웃는다.) 지구 종말?

상우

일단 전화를 해서 따져. 따져 물어.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대호

(웃는다.) 걸었더니 다른 사람이 받아. 

상우

뭐?

현서

내 그럴 줄 알았다. 꽃뱀. 

상우

돈이라도 뜯겼냐?

대호

아니. 

상우

그럼 됐어. 그냥 잊어.

대호

잊히지가 않아. 


사이


상우

좋아하냐?

대호

그런 건 아냐. 


사이


현서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야. 허구한 날 사람이 죽는 걸 보지? 연애고 사랑이고 돈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돼. 

상우

(대호에게 술 따른다) 또 시작.

현서

내 별의 별 시첼 다 본다. 너네 이 주 동안 부패한 시체 본 적 있냐? 

상우

고독사?

현서

이 주가 되도록 아무도 그 죽음을 몰랐다는 건 그 사람이 정말 외로웠단 거잖아. 그 외로움의 냄새. 그거 맡아봤냐. 그 냄새는. 그건 악취가 아니야. 그건 그냥 슬픔이야. 그건 평생 못 잊는 거야. 

대호

(술 들이킨다.) 외로움의 냄새. 퍽 공감각적이다. 

현서

목을 매단 사람은 왜 항상 눈을 안 감는 거야?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그 눈동자에 담겨 있어. 난 그걸 봤어. 

상우

시를 써라 시를 써. 

현서

그림 나부랭이? 우리가 겪는 이 사소한 감정들? 연애?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대호

얘 은근 말이 감각적이지 않냐? 

상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연극반에는 왜 들어온 거야? 나는 너 통계학과 나와서 경찰 된 것보다 통계학과에서 연극반 들어온 게 더 미스테리야. 너 은근히 예술적 감성 있지? (놀리듯) 솔직히 말해봐.  

대호

몰랐어? 얘 감성 있어. 얘 연기 제법 잘했어. 처음엔 스태프로 참여할 줄 알았지. 그런데 딱 주인공! 

현서

그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역할이었다. 

대호

진짜 잘했어. (현서의 어깨를 토닥인다.)

현서

(몸 움찔하며 대호 쳐다본다.)

상우

그러게 얘 2학년 때 그거 하고 바로 연극반 나갔네. 난 얘가 연극반 리더 될 줄 알았는데. 

현서

(술 들이킨다.) 며칠 전엔 말야. 한강에서 어떤 여자 시체가 떠올랐지. 와 익사한 시체는 처음 봤네.  

상우

아 이제 시체 얘기 좀 그만해.

대호

어땠는데?

현서

(상우를 쳐다보며 놀리듯 말한다.) 물에 퉁퉁 불었지. 그리고 지금 여름이잖냐. 나머진 상상에 맡길게.   

상우

어휴. 어? 얘 봐라. 너 일부러 그러지? 나 그런거 끔찍해하는 거 아니까 그러는 거잖아.  

대호

(술 들이킨다.) 야. 이것들아. 지금 이게 장난칠 소재냐. 응? 누군지 몰라도 안됐잖아. 가족들도 안됐고. 

현서

그래. 맞아. 정말 안된 일이야. 아직 신원도 몰라서 가족한테 인계도 못했어. 조사 중. 

대호

자살인가. 

상우

기사 났냐?

현서

아니. 타살 의혹도 있고 해서 언론은 막았어.  

상우

막기 힘들었을 텐데? 한강 어느 쪽이었는데?

현서

너네 기사 쓰지 마라. 

대호

네네. 

상우

야. 난 패션잡지에 있거든요. 

대호

난 문화부거든요. 

현서

동호대교 앞 커다란 유람선 같은 레스토랑 있지?

상우

대박. 거기 사람도 많이 다니잖아?

현서

근데 옷이 매우 특이했지. 일반적인 복장이 아니었어. 

대호

(곱창을 입에 넣으며) 무슨 옷인데?

현서

엄청 튀더라고. 

대호

왜?

현서

아주 깊게 파이고 새빨간 블라우스였는데.

대호

그게 언젠데?

현서

며칠 전에. 너 기사 쓰려 그러지?

대호

응?

현서

쓰지 마라. 

대호

응. 안써. 근데 며칠 전 정확히 언제?

현서

(묘한 느낌으로 대호 바라본다.)


암전



6장 

선예의 집 



거실에 걸려 있는 붉은 여인의 초상. 머리에 둥지를 이고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오묘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림 속 여인은 앞서 현과 선예의 딸로 소개된 여인과 모습이 같다. 여인이 쓰고 있던 모자와 그림 속의 둥지는 그 색감과 디자인이 닮았다. 


변호사

사무관이 그러는데 오늘 변론이 정말 괜찮았다고 기대해도 되겠다고 하더군요. 

선예

감사해요. 변호사님 덕분이에요. 

변호사

삼 년이나 함께했지만 꽤 큰 수임료를 받고 선예 씨에게 고작 그림 하나 얻게 해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그래요. 

선예

그런 걱정 마세요. 저게 우리 작품 중엔 최고예요.  

변호사

그림은 어떻게 하시게요?

선예

그냥 가지고 있을 거예요. 

변호사

지금 당장 팔아도 괜찮을 텐데요. 

선예

돈으로는 못 매겨요. 

변호사

저희 집에도 조선 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병풍이 하나 있었거든요? 어릴 때 기억이지만, 호랑이도 거북이도 나오고 꽃도 있었고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멋지고 화려했죠. 우리 집 가보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집이나 땅은 팔아도 병풍은 팔지 마라. 

선예

당연한 거 아닌가요?

변호사

하지만 IMF 때 아버지가 빚을 갚기 위해 다 팔았죠. 엄청난 헐값에요. 우스운 얘기죠. 

선예

안타깝네요. 

변호사

그때 생각했어요. 아무리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소중한 걸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선예

소중한 걸 알아보는 눈….


초인종 소리. 선예, 화면을 본다.


선예

현이에요. 

변호사

네?


현, 비번 누르고 들어온다. 


선예

(놀란다.) 뭐야. 니 맘대로.

손님이 있어?

선예

비번이….

그대로잖아. 

선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변호사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댁이 상관할 바 아니구요. 선예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변호사

어쩔까요?

선예

(고민한다.)

변호사

옆에 있어드릴게요. 

선예

아녜요. 잠깐 비켜주세요.  

변호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왜요? 내가 뭐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아서요? 나 아직 이 사람 법적 남편이고 이 집 주인이에요.

선예

술 마셨어?

변호사

어쩌실 거예요?


선예, 망설인다. 


선예

잠시만 비켜주세요. 

변호사

정말 괜찮습니까?

선예

네. 괜찮아요. 

변호사

근처에 있을게요. 아니. 바로 앞 복도에 서 있을게요. 

선예

걱정 마세요. 

변호사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선예

네. 


변호사, 현을 쳐다보는 시선을 유지하며 나간다.


혹시 변호사랑 특별한 사이라도 된 거야?

선예

그런 거 아냐.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러 왔어?

아니. 내 그림 찾으러 왔어. 

선예

(그림을 막아선다.) 니 그림?

응. 내 그림. 

선예

어이가 없네. 

내 손으로 그린 내 그림이야. 

선예

다른 그림 다 가져갔잖아. 왜 이거에 집착하는 거야?

그러는 넌 왜 집착하는데?

선예

내 평생에 내가 원하는 뭘 가진 적이 있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 하나 가지고 싶다는 것뿐야. 



현, 그림 앞으로 걸어간다. 

사이


선예

그만 가.

싫어.  

선예

니 애인도 이거 가지고 오래? 

응.

선예

양심도 없다.

(선예를 슬쩍 보며) 얼굴 좋네. 오늘은 커피 몇 잔이나 마셨어?

선예

오늘은 안 마셨어.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넌 늘 커피로 각성되어 있거나 술에 취해있거나. 둘 중 하나였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서.

선예

술은 니가 마셨으면서 나한테 시비 걸러 온 거야?

아니. 그림 찾으러. 

선예

그럼 그림 얘기만 해. 



현 그림을 바라본다.

사이


선예

니가 날 불안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거 알아.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색을 정확히 보고 싶었어. 똑같이 깨어 있는 것 같지만 정말 확실히 깨어 있어야 색이 정확히 보이거든. 그래서 난 늘 깨어 있어야 했어. 그래서 커피를 마셨고, 그림 작업이 끝난 뒤에는 그 그림이 내 것이 아니라 니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지. 그때 술을 마셨어. 

니가 너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가 스케치부터 가르쳐준다고 했지만 니가 거부했잖아. 

선예

너와 협업하는 게 좋았어. 너와 나 사이의 끈을 가지고 싶었거든.

그거 알아? 우리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그 아이가 끈이 됐을 거야. 

선예

말도 안 돼. 그건 또 다른 생명일 뿐이야. 

그림도 우리의 끈이 되진 않아. 

선예

그건 달라. 너랑 나를 조금씩 녹여서 만든 거니까. 

난 예술을 위해 날 녹이지 않아. 

선예

(그림을 가리키며)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매번 매 순간 그림을 위해 날 녹여. 이게 내 삶의 이유거든. 

삶을 위해 다른 길은 가보지도 않았잖아. 아이가 있었다면 달랐을 거야. 

선예

아직도 그 얘기야? 대체 언제까지 그 얘길 들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그린 그림 얘기만 하자. 

자꾸 우리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선예

다 내 아이디어였어. 네가 평론가들에게 극찬받았던 것들은 다 내 감각에 대한 거였어.



긴 사이


언제부턴가 나도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선예

지금 그리고 있잖아? 아무런 특별할 게 없는 그 고요함 그 평화. 그게 좋아?

응.



사이


난 니가 너무 힘들었어. 너의 그 어두운 내면을 견뎌야 했지. 아니. 일정 부분 난 그걸 나눠 가졌어. 

선예

….

왜 넌 행복을 못 느끼는 걸까. 

선예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야?

맛있는 국수 한 그릇에도 금세 행복해지지. 난 그게 신기해. 

선예

잘됐네. 

신기해.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오랫동안 무기력했었나 봐. 삶이 회복되는 느낌이야. 

선예

알았어. 니 말 무슨 말인지. 하지만 그림은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선예

이제 나가줘. 

(그림을 막아선다.) 가져갈 거야. 

선예

잊었어? 우리 오늘 재판하고 왔어. 판결에 따라 가져가든 양보하든 해. 이런 억지 부리지 말고. 

억지 아냐. 니가 양보해줄 거라 생각해서 온 거야. 인간 대 인간으로 얘기해보려고. 

선예

너도 오늘 재판이 절대적으로 나에게 유리했던 걸 아는 거구나. 

니가 비겁한 방법을 썼으니까. 넌 그림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한 게 아니야. 넌 그저 재산 분할을 적게 받는 수법으로 동정심을 얻었지. 재판부에서 인정해준다 해도 그건 재산으로 인정하는 거야. 그림에 대한 네 공을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고.  

선예

어떤 방법이면 어때. 

대체 왜.

선예

너는 왜 그렇게 이 그림에 집착하는 거야?



현, 거실을 서성거린다. 


나한테 왜 그랬어?

선예

뭐가?

알잖아. 나에게 왜 그랬냐고?

선예

갑자기 그 얘긴 왜 또 하는 거야. 

정신과에서 그러더라. 잊을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그 일을 직면하라고.  

선예

정신과 다녀?

오래됐어. 


사이 

현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응. 조금만 더 기다릴래? 얘기 중이야. 어떻게 그래. 기다려. 응. (끊는다.)


선예의 카톡 메시지 오는 소리. 선예는 확인하지 않는다.

현, 불안한 듯 그림 앞을 서성거리다가 소파에 앉는다. 


요즘 생각을 많이 하거든. 그런데 알 것 같아. 니가 왜 그렇게 어두운 사람이 되었는지. 네 어린 시절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설명되진 않아. 그런 걸 극복하고 잘 사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 

선예

인정할게. 내가 부족한 사람이란 거.   

넌 표현 욕구가 너무 많아. 그것을 빠져나가게 할 통로를 찾아야 해. 어떤 예술적 통로 같은 것 말야. 

선예

그게 미술이었어. 

미술은 아니야. 나와 협업해야 했기 때문에 미술은 널 더 고통스럽게 했어. 다른 걸 찾아. 뭐든 말야.  

선예

그러고 싶지 않아. 


사이


너무 끔찍했어. 

선예

뭐가?

니가 죽어가는 새의 몸을 가를 때 말야. 

선예

아냐. 죽은 새였어. 

숨이 붙어 있었어. 손에 쥐었을 때 못 느꼈어? 그 희미한 맥박 말야. 

선예

무슨 소리야. 체온은 남아 있었지만 분명 죽은 새였다고. 

이젠 기억마저 왜곡하는 거야? 죽어가는 불쌍한 새였어.

선예

(혼란스럽다.)

새를 가를 때 네 표정이 생각나…. 네가 우리 아이를 지웠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선예

그만….

근데 미치겠는 건 네가 만든 붉은색은 내 그림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단 사실이야.  


사이


제발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선예

내가 무슨 표정을 했다고 그래?

그 만족감. 그림에 도움이 되면 니 삶이고 니 주위 사람이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그런 표정 말야. 

선예

자꾸 날 괴물 취급하지 마. 나도 고치고 싶어. 정확히 얘기해줘. 그렇게 추상적으로 얘기하지 말구.

날 괴롭히는 뭔가가 있는데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어. (아주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한다.) 그 파괴적인 웃음…. 

선예

….

너는 너 자신마저 파괴하려 했지. 그것도 두 번이나. 


현, 일어나 다시 서성거린다. 사뭇 불안한 몸짓. 자세히 보면 떨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애써봐도 잊히지질 않아. 수조에 첨벙거리던 그 붉은 피. 하얗게 질려 있던 네 얼굴. 팔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 무슨 정신이었는지 그런 너를 안고 뛰었지. 하필 그날 난 흰 셔츠를 입고 있었어. (눈을 질끈 감는다.) 

선예

….

나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현, 심호흡을 한다. 


선예

괜찮아?

의사가 나에게 가르쳐줬어. 이 호흡법 말야. 


현, 전화가 울린다. 


어. 벌써 그렇게 됐어? 금방 끝나. (사이) 왜 안 되는데? 일단 끊어. (다소 신경질적으로) 금방 나갈게. 금방. 미안해. 그래. 


사이


저 사람. 너랑 합의하고 오래. 재판 너무 피곤하다고. 

선예

이런 식으로 나랑 계속 연결되는 게 싫겠지. 나라도 그럴 거야. 

그래. 맞아. 아직 너한테 신경 많이 써.  

선예

그냥 그림 줘. 그럼 끝나. 

포기가 안 돼. 

선예

대체 왜 포기가 안 되는거야? 다른 둥지 연작은 다 니가 가져갔잖아.    

그래. 맞아. 근데 저건 포기가 안 돼.

선예

대체 왜?

나도 모르겠어. 니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겁이 나.

선예

뭐가?

니가 행복해지는 거.  

선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 풍경화 봤니? 풍경화에 붉은색이 없어.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색이 되어버렸거든. 너 때문에. 


사이


니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사이


선예

뭔데?

그림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색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니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거 알아. 근데 말야. 이 그림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내 창조력이 들어 있어. 

선예

(비웃는다.) 창조력? 

니가 하라는 대로 한 건 온전히 너를 담고 싶어서야. 넌 절대로 이렇게 그릴 수 없을거야. 난 널 사랑했는데 넌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거든.  


선예, 감정이 요동친다.  


우리 같이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갔던 날 기억나?

선예

응. 

그림 속 한 여자가 나체로 침대에 앉아 있었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그 여자가 널 닮았더라. 좁은 세상이 너무 답답하다는 듯 곧 그 창으로 뛰어들 것 같았어.  

선예

….

그건 너였어. 

선예

….

언젠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걸 알면서도 니 옆에 있었어. 니가 삶을 사랑할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어. 근데 결국 넌 뛰어내렸어. 


사이


(그림 곁으로 다가가 그림 속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그러더라. 그림 속의 여자가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하다고.


현의 전화가 울린다. 현, 받지 않는다. 


너를 용서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현,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그림에 불을 붙인다. 


선예

뭐 하는 거야!

내가 이 그림을 가지려는 이유 알고 싶어? 태우고 싶었어. 이걸 태우면 너한테 화가 좀 풀릴 것 같았거든. 

변호사(목소리)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죠! 냄새가!


선예, 비명을 지르며 싱크대에서 컵에 물을 담아 그림에 뿌리지만 불길은 순식간에 그림을 태운다. 


니가 괴로웠으면 좋겠어. 


현, 그림이 소강되는 것을 다 보고 문을 열고 나간다. 선예 주저앉는다. 변호사 들어온다. 


변호사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쳤어요?

선예

아뇨… 아뇨… 괜찮아요….

변호사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선예

안 돼요. 


암전.    



7장 

성동경찰서 앞



대호, 초조하게 서 있다. 

현서, 헐레벌떡 뛰어온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현서

천하의 이대호가 무슨 일이냐? 여길 다 찾아오고? 

대호

현서야. 

현서

(시계 보며) 나 너랑 밥 먹을 시간 없는데. 지금 나가봐야 해서. 

대호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거야?

현서

가다가 샌드위치 하나 사 먹으면 돼. 내가 하는 게 그렇지 뭐. 

대호

끼니는 거르지 마. 

현서

알았어. 안 어울리게 웬 걱정. 근데 너 설마 뭐 취재하러 온 거야?

대호

아니. 나 문화부라니까. 

현서

알아. 알아. 근데 진짜 웬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왔을린 없고. 

대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현서

(대호의 눈치를 살핀다.) 뭐?

대호

있잖아. (뜸 들인다.) 그….

현서

뭔데? (사이) 너 설마….

대호

응?

현서

그 익사 사건 때문에 그래?

대호

어떻게 알았어?

현서

내가 처음 얘기했을 때부터 계속 관심 가졌잖아. 

대호

눈치 챘구나. 

현서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대호

아는 사람 같아. 

현서

누가? 그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대호

현서

그럴 리 없어. 

대호

왜?

현서

신원 나왔어. 

대호

뭐?

현서

중국 사람이래. 

대호

중국 사람?

현서

불법이민자인데, 건너온 지 얼마 안 돼서 한국말도 잘 못 했대. 

대호

아!

현서

아는 사람 맞아?

대호

혹시 그 블라우스 볼 수 있어?

현서

절대 안 되지. 

대호

….

현서

알았어. 잠깐 기다려. 


들어간다. 대호, 초조하게 기다린다. 현서, 나온다. 


현서

(사진을 건넨다.) 빨리 봐. 누가 보면 나 모가지야. 

대호

(사진을 뚫어져라 본다.) 

현서

아니지? 

대호

응.

현서

(사진 뺏는다.) 대체 누굴 찾는 건데?

대호

누굴 찾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현서

뭔 소리야?

대호

누굴 찾는 거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답할 게 없어.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거든. 그림을 그렸다는 것밖에. 

현서

근데 왜 그렇게 집착해?

대호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현서

그럼 찾지 마.  

대호

그러기엔….

현서

니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야?

대호

중요한… 그런 건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강렬한….

현서

강렬한…. (다소 상처받은)

대호

표현이 좀 그랬나. 

현서

기다려 봐. 내일이나 모레도 계속 강렬하지? 그럼 내가 찾는 거 도와줄게. 

대호

정말?

현서

근데 그 감정이 점점 옅어지면 그냥 잊어. 

대호

….

현서

알았냐. 새꺄. 빨리 들어가라. 이대호. 직장 잘리지 말고. 나 간다. 


현서, 들어간다. 


대호, 현서의 뒷모습을 보고 한참을 서 있는다. 



8장

신문사 문화부 



대호, 감기에 걸렸다.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훌쩍거린다. 

열도 나는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부장, 불만 섞인 표정으로 대호를 바라본다. 


부장

이 기자. 이게 뭐야?

대호

(코를 풀며) 기사입니다. 

부장

아니 누가 그걸 몰라? 기사가 평론 같아. 왜 이렇게 어렵게 썼어?

대호

평론 아닌데요. 평론은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데요. 인용도 많이 들어가고. 

부장

(혀를 차며) 잘난 척은. 여튼 이거 다시 써. 


부장, 원고를 대호 책상으로 집어 던진다. 그중 몇 장은 대호의 얼굴에 맞는다. 


대호

(원고를 쓸어 다시 부장에게 가져다준다.)

부장

뭐하는 건가?

대호

다시 안 씁니다. 이대로 나갑니다. 

부장

뭐라고?

대호

저는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부장

아니 내가 김현 작가 사생활 취재 좀 해서 재밌게 버무려보라고 했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철학적인 얘기를 쓰라고 했어?

대호

미술은 미술로 감상을 하셔야죠. 

부장

아니 누가 그걸 몰라? 그렇게 치면 자네 기사도 미술에 대한 얘긴 별로 없고. 이 뭐 쓸데없는 소리만 씨부려놨는데 말이야. 

대호

쓸데없는 소리 아닌데요. 

부장

이딴 식으로 개길 거야? 부장한테?

대호

네. 

부장

뭐?

대호

개길 겁니다. 

부장

지금 뭐 하자는 건가? 회사 그만두고 싶어?

대호

네. 

부장

뭐?

대호

근데 안 그만둡니다. 

부장

이 기자 오늘 왜 이래 무섭게?

대호

더 이상 부장님 소모품으로 안 살고 싶거든요. 

부장

뭐라고?


대호, 나간다. 


부장

이거 봐, 이 기자! 이 기자! (사이) 어디가! 진짜 그만두는 거 아니지?

대호

화장실 갔다 올 겁니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같은 장소. 


혼자 야근하는 대호, 휴대폰으로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튼다. 

음향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원고를 읽는다. 


대호

김현 작가가 최근 그리고 있는 풍경화는 기계의 영역처럼 반듯하고 색이 화사하다. 물감을 배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돈된 색채가 색색마다 대조를 이루며 우리의 눈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편안한 마을이 있고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으며 동물은 그들의 곁에서 아무런 경계심 없이 걸어 다닌다. 김현의 풍경화는 컴퓨터가 그릴 수 있는 그림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김현 작가가 기존 인물화에서 가지고 있던 특유의 위트나 도발적인 아이러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행보에 큰 우려를 낳는다. 최근 미국의 대형 미술전에서 AI가 그린 그림이 당선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예술 분야에서도 경쟁하는 시대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현의 그림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성을 내보이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로 자리하고 있는 김현의 그림이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다면 대한민국 미술에도 위기가 닥친 것은 아닐까.  


대호의 카톡이 온다. 대호, 메시지를 보고 놀란다. 

음악을 끄고 일어나 가방을 급히 챙긴다. 사무실의 불을 끈다. 

무대 밖으로 나간다. 빈 무대 잠시 보여진다. 

무대 앞쪽으로 신문사 로비에 조명 인. 선예가 찾아왔다. 


대호

갑자기 연락 와서 놀랐습니다. 마침 오늘 퇴근이 늦었는데 어떻게 아시고. 

선예

마감이 임박한 것 같아 그냥 도박해봤어요. 제가 맞았네요.  

대호

어디로 자리 옮길까요?

선예

아니에요. 여기서요. 잠깐이면 돼요. 

대호

그래도 이렇게 서서 얘기할 순 없으니. 잠깐 여기라도. (로비의 간이 의자를 가리킨다.)

선예

(의자에 앉는다.)

대호

자판기에서 음료라도 뽑아 드릴까요?

선예

아니예요. 


사이


대호

하실 얘기라는 게?

선예

현이가 모르는 걸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대호

그게 뭔가요?

선예

기사로 써주셨음 해서. 

대호

두 분에 대한 건가요? 

선예

아뇨. 그림에 대한 거예요. 붉은 여인의 초상이요. 

대호

(수첩을 꺼내고) 뭐죠?

선예

제가 그 그림을 가지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그 그림이 현이의 그림 중에 유일하게 미완성이기 때문이에요. 

대호

미완성이요?

선예

네. 마무리를 짓지 못했어요.

대호

뉴욕 전시회 출품작이고 평가도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완성이라는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선예

오랫동안 현이는 정체됐었어요. 전 현이를 나아가게 도왔죠. 근데 그 그림을 그릴 때쯤 현이는 하나의 틀을 깼어요. 성숙함, 기술적 단련, 그리고 인물에 대한 이해까지 모든 게 충만해서, 그 그림 속의 인물은 나였지만 사실 내가 아니었어요. 나를 넘어선 그 무언가였어요. 그건 상상력이 아니라 창조력이었어요. 현이의 그림에 내가 들어갈 곳이 없었어요.

대호

그럼 그 그림은 임선예 님의 도움 없이 그린 건가요?

선예

네. 어쩜 그 그림을 혼자 그렸다는 걸 본인은 모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조언 따윈 필요 없이 그 앤 날아올랐어요. 매일 무섭게 매달렸죠. 그림은 하루하루 완벽해져 갔어요. 하지만 어떤 일 때문에 그림을 완성시키진 못했죠. 

대호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일이라는 게 뭔가요?

선예

전 현이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손목을 그었어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내 피를 희석시켰어요. 현이는 제가 저를 파괴했다고 하는데 전 사실 현이를 파괴하고 싶었던 거예요. 전 알았어요. 진짜 죽기 위해서는 내가 한 것보다 동맥을 더 깊게 그어야 한다는 걸요. 

대호

왜….

선예

현이의 정신을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대호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선예

나 없이도 완전해진 현이가… 떠날까 봐 두려웠어요. 

대호

떠나다뇨?

선예

사람이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이유는 그 존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불완전을 채우려고요. 현이도 나에게서 그것을 채우려 했던 것이구요. (동의를 구하려는 듯 대호를 본다.)

대호

(이해가 가지 않는) 네? 

선예

현이는 생각보다 더 처절하게 파괴됐어요. 한동안 그림을 아예 그리지 못했고 지금도 붉은색을 쓰지 못해요.

대호

(일어난다.) 정말이지… 너무 끔찍하군요. 

선예

현이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면 미친 사람 같나요. 전 얼마 전까지도 현이가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근데요. 아니더라구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끝내 채워 넣지 못한 그 그림의 빈틈들이 어쩜 그림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고요.  

대호

그림의 빈틈이라는 게 뭔가요?

선예

비교하자면 눈썹 없는 모나리자 같은 거요. 난 바보같이 현이를 망가트리고 그림을 방해했는데. 이상한 건 결과적으로 더 완벽한 여인이 탄생했다는 거예요. 그건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그림이었어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해 보이는 신비로움을 보았어요. 우리 사람처럼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는 존재요… (눈물이 흐른다. 그것을 닦는다.) 어, 미안해요.  


대호, 선예를 말없이 바라본다. 

한동안 침묵


대호

(혼란스럽다.) 죄송하지만 마감 때문에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예

기사로 써주실 건가요?

대호

글쎄요. 뭘 써달라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선예

붉은 여인의 초상에 대해서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그 그림을 한 번만 언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림이 세상에서 이대로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요.  


대호, 얼이 빠진 듯 아무 대답 없이 나가다가 뒤돌아


대호

그런데요. 사람이 사람의 곁을 지키는 이유는 불완전을 채우기 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예

그럼요?

대호

나 자신이 완전해야 상대를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완전하다는 것은 누가 평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눈썹 없는 모나리자는 당당하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외람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대호, 나간다. 선예 혼자 남겨져 한동안 관객석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암전



9장

한강



현서와 대호가 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각자 손에 빨대가 끼워진 팩 소주를 하나씩 들고 있다. 


대호

촛불을 켜놓은 것 같지 않니. 

현서

상우랑 맨날 나 갖고 놀리더니 오늘은 니가 퍽 공감각적이다?

대호

현서야. 나 오늘 우리 부장한테 개겼다. 

현서

뭐? 그 개부장?

대호

응 그 개부장. 사표 쓸 각오로 개겼어. 그 인간 평소랑 똑같았는데 갑자기 가슴팍에서 뭐가 욱하고 올라오더라고. 

현서

너 더 괴롭히면 어쩌려고. 

대호

모르겠어.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거든. 나 그냥 확 사표 낼까?

현서

응, 까짓것 확 그만둬버려. 니가 뭐 아쉬울 게 있냐. 있나? 아니. 좀 많이 아쉬운가? 

대호

버텨야지. 내가 이 애매한 커리어에 어디가서 재취업을 하냐. 

현서

그래. 버텨라. 버텨. 누군 뭐 가슴팍에서 뭐가 욱하고 안 올라오는 줄 아냐. 그 뜨거운 불덩이를 매일 냉수 먹고 진화시키는 거지.


사이


현서

나 경찰 공무원 준비할 때 공부하다가 진짜 답답하면 꼭 여길 왔거든. 

대호

맞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도전할 때. 그때 너 엄청 예민했는데. 

현서

연극반 시절 생각나지? 

대호

흑역사지. 

현서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았어. 

대호

맞아. 세상만사 걱정 없고. 

현서

1학년 때 우리 동아리 첫 엠티 갔을 때 니가 요리했잖아. 

대호

그랬나.

현서

니가 요리에는 자신 있다고 막 잘난 척하면서 부추전이랑 계란찜 했지. 동기들은 고기 굽고 선배들은 찌개 끓이고.

대호

야. 너 기억력 되게 좋다. 

현서

니가 만든 부추전은 속에 밀가루가 안 익어서 축축했고 계란찜은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소금 소태라고 선배들이 너 막 구박했었는데. 

대호

하나도 기억 안 나. 

현서

니가 만든 거 아무도 안 먹고 너는 미안해하고. 선배들이 벌주로 너 막 소주 먹이고 그랬었어. 근데 말야. 그때 딱 한 명 니가 만든 거 맛있게 먹었는데 기억나냐?

대호

야. 요리한 것도 기억 안 난다니까. (사이) 그게 누군데?

현서

나!

대호

진짜?

현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 

대호

왜? 

현서

니가 만든 거라서. 


현서, 대호를 말없이 쳐다본다. 

어색한 침묵


현서

나 말야. 

대호

응?

현서

상우 만나보려고. 

대호

뭐?

현서

상우

대호

만나본다니?

현서

사귀어본다고. 

대호

뭐?

현서

놀랐냐?

대호

그럼 안 놀라냐. 둘이… (숨을 들이쉬고) 근데 왜?

현서

사귀는 데 이유가 있어? (사이) 상우가 나 좋아한대. 좀 됐대.   

대호

몰랐어. 전혀.  



사이


현서

얼마 전 니가 경찰서로 날 찾아왔을 때 나 너무 설레고 좋았거든. 근데 니가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날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으로 내 자신이 가엾단 생각을 했어.  

대호

현서야….

현서

나 상우랑 진짜 잘해보려고. 

대호

그런 이유라면. 그건 아니잖아. 

현서

있지. 그 여자. 왜 죽었는지 알아?

대호

그 여자?

현서

그 붉은 블라우스의 여자 말야. 

대호

왜 죽었는데?

현서

중국에 같이 살던 남자가 있었대. 빚이 너무 많은데 여자가 빚 갚아주면서 살았나 봐. 힘들게 힘들게 일하면서. 남자는 도박까지 손대고, 여자는 허드렛일하고. 그러다 애를 낳았는데 애가 죽었나 봐. 여자가 반쯤 미쳐서 도망쳤대. 결국 한국까지 온 거야. 근데 그 남자가 쫓아왔대. 

대호

죽였어?

현서

아니. 다시 합쳤대. 그리고. 

대호

그리고?

현서

동반 자살.



긴 침묵


현서

무섭지 않냐. 

대호

뭐가?

현서

그런 감정…. 

대호

그런 감정?

현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그 감정 말야. 



사이 


현서

강력계에 있으니까 이런 평범하지 않은 것만 보고 살잖냐. 평범한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겠더라고. 상우 재밌고 착하잖아. 그냥 이렇게 친구처럼 계속 같이. 지금처럼 살면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영화도 같이 보고. 딱 거기까지만 같이해도 행복할 것 같아. 

대호

(현서를 바라본다.)

현서

그리고 너 때문에 다시 힘들고 싶지 않아.



사이


대호

그 여자 말야. 신기루였어. 신기루라는 게 결국 내 환각이잖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안 찾기로 했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건 너야.



사이


현서

(대호를 보지 않은 채) 예쁘다. 야경. 다시 보니까 진짜 촛불 켜놓은 것 같네. 

대호

(현서를 빤히 바라본다.)

현서

안주 없는 팩 소주. 야 이거 괜찮다. (소주를 쭉쭉 빨아 먹고 빈 팩을 대호의 손에 쥐어준다.) 잘 마셨다. 친구야. 



현서, 비틀거리며 무대에서 나간다. 

대호, 혼자 남겨진다.

야경을 비추는 강물이 쓸쓸하게 흐른다. 

무대 어두워진다. 


무대 한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현이 돋보기를 끼고 종이 신문을 들여다본다. 


신을 믿는 습성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완벽을 평가하는 기준은 너무나 높아 그것이 삶 너머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불완전함을 스스로 깨달은 인간은 완벽함에 대한 갈증으로 예술을 구현해왔고 현대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한 기술적 존재에게 예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이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가설을 내려본다. 오류값을 걸러내는 컴퓨터와는 달리 인간이 입력하는 사랑이라는 오류값은 엉뚱하게도 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쓰는 이유는 김현의 인물화와 풍경화의 가치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김현이 인물화 그리기를 중단한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다. 김현의 인물화와 풍경화 사이, 그곳에 인간만이 재현할 수 있는 완벽한 미완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대호 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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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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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The foundation 이정수 등장인물 존 스콥스 25세의 열의에 찬 젊은 데이턴의 한 공립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과학 교사이자 시간제 미식축구 코치. 뿔테 안경 너머 소년의 얼굴이 학구적이지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이 숫기가 없지만 협동심이 강해 호감형이다. 켄터키대학교 재학 시절 총장이 해당 수에서 반진화론 법안에 맞서 싸운 이력이 있는데, 이런 이유로 총장을 존경하는 그이다. 스콥스의 아버지는 이민자 출신의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조합 조직책을 맡은 자타 공인 사회주의자 겸 불가지론자로, 미국의 정치제도와 종교 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몇 시간씩 큰 소리로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스콥스는 정부와 종교에 대해 부친과 생각을 같이 하지만 그보다는 느긋한 자세를 취한다. 노라 테일러 중년 여성. 미국의 법조인으로, ACLU(미국시민자유연합)의 선도적 회원이었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평등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의 지공주의 경제개혁의 강력한 옹호자이다. 10대 쾌락 살인자 레오폴드와 로에브 재판과 아내를 살해한 시카고 승마 교사 소송에서 피고 측 변호사로 활약하며 감형을 받아내 유명해졌다. 두 사건 모두 피고가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결정주의를 근거로 사형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주목할 점은 레오폴드와 로에브 재판에서 호르몬이 킬러 본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전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감형을 받아, 과학에 능통한 변호인으로 유명해졌다. 멜빵과 파스텔색 셔츠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노년의 남성. 원고 측 검사 중 한 명. 네브래스카주 제1구의 하원의원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역임한 인물이지만, 국무장관을 지낸 것보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여러 번 나와 3번이나 낙선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1890년대의 미국의 금본위제에 대한 화폐개혁부터 1920년대 반진화론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대의를 위해 힘썼고 성패와 관계없이 끝까지 싸웠다. 워낙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좋아하고 신념과 열정이 강했기에 법조계로 돌아가는 것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그였지만, 스콥스 재판의 화제성을 생각해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재판의 검사로 나선다. 더들리 필드 말론 30대 후반의 남성. 젊은 피고인 측 변호인. 뉴욕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이혼 전문 변호사로 한때 국무부 차관으로 브라이언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브라이언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는 인물. 1920년 농민-노동당 후보로 뉴욕 주지사에 출마를 하였지만 처참히 패배한 이후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게 되었다. 톰 스튜어트 테네시주 출신의 30대 초반의 검사로 스콥스 재판의 검사. 철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아니지만 법치주의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인물이다. 테네시 주의 반진화론 법안에 대한 보존을 위해 원고의 주장을 설계하며, 재판의 내용에 대하여 확장된 범위의 문제가 아닌 법률적인 문제로만 유지하고자 하며, 재판 내 과학적인 증언을 도입하려는 변호

  • 관리자
  •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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