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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를 전복하는 평행우주의 사건들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1,448

진위를 전복하는 평행우주의 사건들

―손보미의 소설1)

김효숙




2000년대 우리 문단에는 문화 현상을 서사의 바탕으로 삼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1980년대생으로, 문화 소비 시대의 주체들을 초점화하면서 이전의 주요 경향과 일군으로 묶이지 않으려 했다. 이들의 창안물을 탈(脫)구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벗어난다는 뜻의 ‘탈’은 기존의 ‘있음’을 전제해야 하고, 있음의 이유인 경향성도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1980년대에 태어나 20대 후반에 등단한 작가에게는 이전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탈’ 개념이 아닌, 2000년대 사회문화 현상을 안고 돌출한 독자적인 성향으로 파악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들 작품에는 탈리얼리즘이나 탈서사성 등을 의식하지 않는 창안물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이 실려 있다. 1980년생 손보미가 등단작 「담요」(2009)를 시작으로 2010년대까지 약 10년간 발표한 작품들이 여기에 걸맞다. 손보미는 그 모든 선형의 역사성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체화할 만한 사회적 조건 아래 청소년기를 보내지도 글을 쓰지도 않은 세대다. 버려야 할 것, 빠져나와야 할 것, 청산해야 할 것들은 1990년대 우리 사회의 대중들에게 ‘매몰되어선 안 될’ 구습이었다. 되돌아가선 안 될 시대라는 인식에는 진보거나 퇴보인 양대의 흐름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정황에 후퇴 또는 전진이라는 개념 없이 당대의 사회문화 현상을 담아낸 작품들이, 그것도 아주 낯선 모습으로 2000년대 후반에 우리에게 도착했다. 경향을 놓고 작품을 운위하거나 판별할 수 없고, 오직 작가의 개성과 독특한 상상으로 개체성을 확보한 작품들이다.
손보미가 등단한 2009년의 문단 상황을 보면 20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특히 시 장르에서 온라인 게임과 접속한 상상력이 우세했다. 분열하는 아바타는 살아남아 무한 증식하고, 합체물들은 영원한 삶에 도취하며, 고독한 전사는 한 점 먼지 같은 우주의 고아가 되거나 패망하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가상 공간은 그 무렵 대중에게 온라인 기반의 초연결 환경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청소년은 물론 기성세대의 여가에까지 틈입한 온라인 게임은 대중의 놀이 공간을 급격하게 가상 세계로 전환케 했다. 뿐만 아니라 대중 가수의 장내 공연은 물론 야외 콘서트까지, 즉 당대의 대중문화를 일상 속에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이러한 변화에는 이데올로기의 패망, 유일한 진리로 등극한 세계자본의 유동성, 온라인 네트워크의 글로벌 환경 등이 당대 일상의 뚜렷한 양태라는 점이 내재한다. 따라서 2000년대 현상을 문화 코드로 압축할 때 이전 시대의 이념이나 양식들로부터의 해방은 혈투 없이도 가능한, 인간이 가장 바라는 자유로운 삶의 양식과 연결된다.
손보미는, 등단작은 물론 그 후 10년간 발표한 작품에서도 2010년대 현상을 자기식 어법으로 형상화한다. 최근에 발간한 『작은 동네』에서는 역사 상상력으로 회귀하는데, 선형의 역사관을 가진 자는 이러한 태도를 다분히 의외로 받아들일 만하다. 리얼리즘 문학과 역사성을 동궤에서 사유해온 방식으로는 이러한 역류의 미학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의 문화 안에서 발화해온 작가 상상력의 급선회만으로도 여하한 이유를 떠나 많은 궁금증을 안기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작가는 2020년대에 들어 자신의 글에 비로소 ‘탈’ 개념을 얹을 만한 창안물을 내놓은 셈이다. 이전 것에서 벗어나는 보폭을 보여준 이러한 문학 수행이 전하는 바는, 이제껏 그의 작품이 기반한 세계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 외에도 이야기를 과거로 회귀하고 있어서 더욱 의외성이 있다. 과거형 인물을 내세워 이전 방식의 삶을 되살려내지는 않는 작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만큼 손보미는 철저하게 2000년대 이후의 감수성으로 당대 문화를 반영하면서 미래의 시간을 더 고민하는 작가로 우리의 의식에 새겨져 있다. 그러던 작가가 전변의 미학을 보인 작품이 『작은 동네』다.
작가의 상상력이 이렇게 선회한 데에는, 회고 형식의 글쓰기로부터 계산된 거리를 유지해온 그간의 사정을 물려야 하는 이유가 개입해 있다. 회귀 방식의 말하기가 아닌, 선형의 시간 위에서 말하기가 이뤄지고 있는 것. 그것은 이 세계가 영혼 없는 사물 또는 상품의 형태로 표면화하는 물질과 다를 바 없음에도 끝내 사물일 수 없는 인간의 윤리, 삶이 과연 명백하고 투명한 ‘진짜’만으로 구성되는 것인지, 오히려 ‘가짜’의 그럴싸한 반영, 진위를 따질수록 진실은 왜곡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질문들과 결부된다. 하여 이 글에서는 등단작인 「담요」에서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작가가 반복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반복하는 말의 진의는 많은 경우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미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 반복 어법이며, 이것은 핵심을 보존하면서 다양한 방향성과 연결성 안에서 발화한다.
손보미 소설에서 반복되는 상황들, 두려움의 감정, 문학(문화) 텍스트의 상호 교차, 영화·인물·사물이나 상품 등에 담긴 작가의 지향이나 의도는 어느 것 하나 일의적이지가 않다. 텍스트를 통틀어 편재하는 몇 가지의 반복 요소들, 즉 초인종 누르기, 여하한 상황에서 파생하는 두려움이나 거짓말 등은 어떤 경우에도 특별하지가 않다. 작가는 이것의 사용자들이 처한 상황을 수평적으로 전할 뿐 그 의미를 캐묻거나 특화하려는 의도가 없다. 유사한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그 일은 앞으로도 부단히 발생할 것이므로 초인종을 누르는 행위를 개별화하여 상이한 지평을 열어놓을 뿐이다. 이렇게 세계와의 동일성을 깨나가는 인물에 대하여 써온 작가가 2020년대에 들어 발표한 작품에서 역사의 공간으로 보폭을 바꾼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손보미식 2010년대 현상들로부터 벗어난 이 탈구조물의 존재감만으로도 이전에 그가 창안한 구조물들을 반사하는 효과를 얻는다. 손보미 소설의 경향을 몇 가지로 좁혀 그 현상을 조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2020년 작 탈구조물인 『작은 동네』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지점, 그러한 선회가 의미하는 바를 추정할 수 있다.


1) 본문에서는 책 제목을 명시하지 않고 번호로 표기한다. ①『그들에게 린디합을』, 문학동네, 2013.; ②『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2017.; ③『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문학과지성사, 2018.; ④『작은 동네』, 문학과지성사, 2020.



대중문화: 쇄도하는 낯선 것들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손보미의 첫 작품집이다. 2010년대 손보미 소설에 담긴 낯선 상황들이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분산할 것인지 예감케 한다. 두껍게 읽히는 손보미 소설은 처음부터 만만찮다는 인상을 안긴다. 어떤 이에게는 고단할 뿐만 아니라 현실감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동안 누려온 삶의 방식을 배반하는 내용들로 가득 찬 손보미 텍스트에는 ‘나’의 것이라 할 만한 고유성이 희박하다. 생경한 고유명사들이 튀어나오고, 온갖 가능성을 섞어 비벼 그 무엇이라고도 확정할 수 없는 혼종의 체질을 가졌다. 이러한 요소들이 평등한 지평에 놓여 있고, 그 어느 쪽의 지위도 우세하지가 않다. 주요 인물과 주변부 인물 간 중요도를 매길 수 없으며, 책 한 권의 이름과 등장인물은 무게가 동급이다. 해결의 기미 없이 미진하게 종결되는 서사는 독자를 망연케 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이러한 낯섦과 불편함이 소설 읽기를 중단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글을 떠날 수 없다는 일종의 강박은, 일단 떠나면 맥락을 찾아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손보미 소설의 구조가 유발한다. 알 수 없는 세계가 두려워 텍스트를 붙드는 기이한 현상을 ‘사로잡힘’이라고 의미 규정할 수 있다면 얼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낯선 것이 우리를 붙든다. ‘매혹’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손보미 텍스트에서 반복하는 감정 중 두려움은 매우 지배적인 정조다. 작가는 심지어 이러한 감정을 표명할 때마다 고딕체로 두려움이라고 강조해둔다. 그만큼 끝맺을 수 없고 상쇄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 낯선 세계와 대면하는 이들의 의식을 짓누른다. 등장인물들이 곧 ‘나’일 수는 없다는 비동일화 감정이 작품을 읽는 내내 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굳이 표명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독자의 반응 때문에 저절로 조성된다. 작품 읽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좀처럼 동일화 감정을 품을 수 없는 손보미 텍스트에는 생소한 장면들이 빼곡히 배치된다. 게다가 작가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아주 당연하게 “서로 다른 우주”라고 명명한다. ‘다름’을 불순하고 온전치 못한 것으로 갈래짓는 통합의 윤리는 손보미에게 생경한 것이다.


이 작품집은 「담요」로 시작해서 「애드벌룬」으로 끝난다. 이 두 소설은 서로 다른 우주를 살아간 등장인물―‘장’과 ‘장’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우주 너머의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다른 우주에서 열심히, 전력을 다해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된다. 이곳에서 내가 게으름을 조금 부려도 괜찮을 테니 말이다.(①, 「작가의 말」)


첫 작품집에서 작가는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배치한 작품 두 편을 양손에 들고 읽어보게 한다.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인 작품들은 텍스트 내 텍스트, 자기 텍스트 인용, 진위 여부가 모호하지만 그것을 가려내는 일마저 큰 의미가 없게 만든다. 첫 작품을 기원으로 이것을 쪼개기‧확산하기‧연결하기‧중첩하기‧변용하기‧전이하기 등으로 자기 원본의 고유성을 부숴 나간다. 등단작 이후의 작품집과 장편소설에서도 이어지는 이러한 전략은 2010년대 한국소설이 전개되는 양상 중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통합된 세계를 조각내어 그것을 원용하면서 또 다른 서사로 확장하는 작법은 팽창하는 우주와 유사하다. 자신의 등단작을 텍스트의 기원으로 명명할 수 있다면 대체 그것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물으면서 문학 수행을 해나간다. 이렇게 손보미 텍스트는, 텍스트의 기원을 사유한 후기 구조주의 이론가들이 참고한 문학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 같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첫 발화를 보존하는 순수성의 텍스트가 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 고유성을 운위하는 일이 과연 무엇을 지켜내려는 의도인지, 고유성이라는 것은 오히려 부단히 말을 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위에서, 발화되지 않은 것은 그 고유성조차 애당초 물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손보미는 ‘우주’ ‘우주 너머’ ‘다른 우주’로 자신을 타자화한다. 자기 분열로부터 생긴 거리감과 광막함에 되레 안도하는 자세도 보인다. 이는 작가로 분열한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안도감이다. 서사 창안자의 직능을 또 다른 우주에서 사는 일과 결부시키는 발언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상은 단지 두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작(全作)에 걸쳐 파편으로 존재하고, 이러한 지원 방식으로 또 다른 한 편의 서사가 발생한다. 이를 몇 가지 경우로 나눠 예시할 수 있다. 먼저 첫 창작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실린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을 보자. 두 작품의 공통 항은 아래 예문에서 보이듯이 아버지 ‘장’과 ‘장의 아들’은 록그룹 ‘파셀’의 공연장에 가 있다. 느닷없이 총격 사고가 발생하고, 이것이 아들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담요가 떨어지는 일과 연루된다.


장은 아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대신 장은 아들의 어깨 위에서 담요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들의 어깨 위에서 떨어지는 담요는 장에게 몹시 중요한 물건이 되었다. 그후 장은,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게 된다. 담요를 가지고 출근했고,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담요로 자신의 무릎을 덮었다.(①, 「담요」)


그의 아버지는 중경상을 입은 열세 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입은 부상의 여파로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만 했다. (중략) 아버지 바로 옆에 있었던 그는 멀쩡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몇 주 후 아버지가 퇴원하던 날, 그는 아버지가 절뚝거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제야 그는 공연장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덮어주었던 담요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①, 「애드벌룬」)


「애드벌룬」은 중첩 텍스트다.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을 중심으로 소년기에 관람한 록밴드 ‘파셀’의 공연에서 겪은 사고, 이후 청년기에 이르러 작중 소설 『난, 리즈도 떠날 거야』를 영역하는 일 등을 전이·확장·변용한 서사다. 그러니까 작중 번역물 『난, 리즈도 떠날 거야』는 손보미의 첫 작품 「담요」의 첫 줄을 기원으로 하여 이후에도 자기 텍스트 인용의 방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 출현하면서 허구 속 사건이자 주석 달기의 문학적 수행의 증표가 된다. 저러한 번역물이 허구 속 허구로 환기되는 사정은, ‘필립 말로, 존 치버, M.나이트 샤말란, J.J.에이브럼스’ 등이 소설을 쓰는 데 영감을 주었다는 작가의 고백에서 이해의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추리소설 속 탐정·영화감독·팬덤(열광자) 들로, 손보미가 미국의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 경도되었었다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살피면 좋을 요소들이다. 이때 추리소설, 할리우드 영화, 대중문화, 열광적인 관중이라는 키워드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미국문화와 연결된다. 서구 이론과 문학작품의 번역물, 더빙한 영화 또는 자막이 번역을 거쳐 문화 대중의 언어 영역을 잠식하기에 이른 2010년대 당대 문화의 흐름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손보미 소설이 번역체 문장이고, 국적을 모르는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평가는 작가 이전의 손보미가 누린 미국문화의 영향을 의식한 때문이다. 한국인이 마주하는 무대가 미국식일 때 그 공간은 의당 낯설지만 신비한 비현실로 다가든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외국어 명사가 난립하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별할 수 없게 되면서 독자들은 이 명사들의 무게에 짓눌려버린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독서 대중이 경험한 내용과는 판이하다. 외국어 고유명사가 돌출하면서 공간마저 외국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손보미 소설의 공간은 대체로 한국이다. 이렇게 손보미 텍스트가 왜 공간의 착시를 유발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그것을 문화 현상으로 해명할 수 있다. 첫 창작집에 모아놓은 작품들을 보면 록가수의 콘서트, 미국의 대중음악 강연을 들으러 다니는 여자, 포르노 영상 번역자, 스윙 댄스 소재의 영화, 스트립 댄서,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 번역자 등이 미국문화와 접속해 있다. 작가가 청년기를 보낸 2000년대에 우리 사회의 대중이 누렸을 정신문화가 이렇게 많은 부분 미국발 콘텐츠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것은 대중에게 순수 상태의 자연스러운 정신문화이기보다, 자본을 투여하여 그것의 재생산을 꾀하는 문화산업의 주체가 구매와 소비를 촉발케 한 물적인 양식이다. 로열티나 쿼터제 등으로 계급화한 자본이 문화 상품으로 포장되어 대중의 여가에 침투한 것이다. 이러한 교환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손보미 소설은 태어났다.
이러한 경로를 거치면서 작가는 첫 작품에서 사용한 작품 속 텍스트를 변용하고 확장한다. 이것은 써 없애는 소비의 방식이 아니며, 자기 발화를 어떻게 변주하느냐는 문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품 속 텍스트’와 저자의 이름,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아티스트들은 많은 경우 진짜임 직한 가짜들이다. 실재하는 텍스트와 허구 속 인물의 창안물인 텍스트를 중첩하여 가짜와 진짜의 존립 구분을 무화하기도 하고, 이를 뒤섞어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판명할 수 없게 만든다. 진짜 저자의 등장이 되레 예외로 여겨질 만큼, 가짜들의 세계에서 진짜 텍스트의 지위라는 것은 조금도 특별하지가 않다. 가짜 같은 진짜와 진짜 같은 가짜를 구별하는 일이 쓸모없게 여겨질 때 양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공평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보면 손보미는 미국 주도의 문화를 안티 감정 없이 수용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문학작품을 구매력 높은 상품으로 가공할 줄 아는 생산 주체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은 당대성을 체질로 엮은 하이브리드 창안물이다. ‘당대’라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가능성을 혼합할 뿐만 아니라, 경험의 직·간접성을 가상의 영역으로 팽창하는 작법을 구사한다. 과학 현상과 접속한 상상력을 펼친 「애드벌룬」, 「과학자의 사랑」(①)이 그 증거다.
첫 작품집에서 하나 더 짚어둘 것이 있다. 수식 없는 문체로 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가 실어낸 온기, 그리고 작중 인물들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진위 여부다. 화자가 어린 부부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담요」)게 된 사태 이후에 ‘거짓말’은 가짜와 진짜가 우로보로스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 심리의 저변을 암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것은 사실(fact)과 허구, 진실과 거짓, 드러내기와 숨기기를 부단히 전복한다. ‘어린 부부’의 마음도 진정성과 거짓 중 어느 쪽인지 수시로 의심하는 정황을 보인다. 「여자들의 세상」에서 ‘어린 커플’이 마주 잡은 손을 목격한 화자의 상상은 곧바로 피아노 치는 남자의 손등을 문지르는 아내의 손으로 전이하면서 의심이 증폭한다. 이렇게 손보미 소설에서 ‘거짓말’의 파문은 심상치가 않다. 「담요」에서 화자가 “당신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일 거”라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만, 이에 반응하는 어린 부인의 “우린 인간쓰레기”라는 화답은 거짓 없는 고백이다. 인간관계의 지평은 이렇게 진위를 따질 수 없는 표면의 말로 무한 팽창한다.
이렇게 볼 때 두려운 감정에 침윤당한 인물,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 등도 기원을 변형하고 파괴하면서 생성하는 손보미 텍스트의 변이체들이다. 작가는 첫 작품에서 선보인 일화들을 이후의 작품에 전이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변이체를 만드는 일을 부단히 실험한다. 낯선 세계만이 새롭고, 상상에 그치지 않는 다가가기·걸어가기만이 인간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간다. 첫 작품에서 보았던 어떤 정황들은 이후 다른 작품에서도 출몰을 반복하면서 우리를 다시금 어딘가로 끌고 간다. 그곳은 무수한 가능성이 잠재하는 지평이며, 손보미 텍스트가 팽창하는 우주의 어느 구석이다.


과학-픽션(Si-fi)의 가능성


예시했듯이 손보미는 유사한 인물, 유사한 삶의 방식들을 평행선상에 배열한다. 비슷한 인물들이 반복 출현하지만 동일 인물은 아니다. 이러한 작법의 원리를 명시하는 문장이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에서 눈에 띈다. 이 문장 외에도 문학 텍스트와 과학 개념을 중첩한 내용은 제법 있지만, 손보미 소설의 지향을 압축한 것이므로 봐둔다.


만약 여러분이 평행우주론이나 상대성이론 혹은 초끈이론이나 양자장론, 이도 저도 아니면 시간여행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어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한 번쯤은 그를 봤을 것이다.(16쪽)


평행우주론·상대성이론·초끈이론·양자장론·시간여행 같은 상징 개념들로 할 말은 다 해버린 듯하다. 청자인 독자와 화자 사이에 있는 ‘그’를 본 적은 없으나, 화자는 독자가 ‘그’를 봤을 것으로 추정한다. 더구나 그와 독자의 만남이 미디어 기록물인 ‘다큐멘터리’의 매개로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정은, ‘그’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얼마만큼의 통제력에 의해 유일한 실재 인물 그 자체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 특성을 표명하려고 가져온 과학 개념들로 보이고, 이와 관련한 우주 상상력을 첫 창작집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이때의 우주는 일원성으로 해석할 만한 여지가 조금도 없는 개념이다. 위에서 작가가 쓴 양자장론은, ‘물질의 최소 단위인 양자(quantum)가 갖는 물리적 특성인 중첩·얽힘·불확정성을 정보처리나 통신에 활용하는’2) 양자정보기술이다. 작가는 문학과 과학의 중첩·얽힘·연속성·불확정성 등으로 소설의 특성을 대리 발언한다. 내용을 보면,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운명이 비슷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디어 랄프 로렌』에서 랄프 로렌·조셉 프랭클·미츠오 기쿠 박사의 삶에 게재한다. 이것을 과학픽션(Si-fi)의 한 형식으로 개념을 좁혀서 ‘평행우주’를 상상하면 될 듯하다.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일회성으로 단선의 리얼리티를 구축하기보다, 다층의 시공간에서 유사하게 실존하는 자들을 얽어서 우주적 마주침으로 현상하는 작법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랄프 로렌은 유명 의류 ‘폴로’의 기원의 디자이너다. 작가는 여기에 가공인물 하나를 맞세운다. “러플이 잔뜩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까만 무용 바지를 입고”(37쪽) “아이스링크장을 누비는 박사”(20쪽), 즉 과학자 미츠오 기쿠다. 그는 지적인 능력이 쇠한 ‘늙은 여우’라는 평가에 반발하고, 자기 영역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을 발산하는 기행의 인물이다. 이러한 파격은 디자이너인 “랄프 로렌에게 창조는 조합에 가까운 것”, “그는 무엇이든 가지고 와서 변형”(64쪽)할 때처럼 그가 자발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과학자에게 요구하는 파격과 의류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그것이 달라야 한다면, 어느 지점이어야 하는지를 묻게 만드는 행위다. 따라서 인용문에 쓴 과학 개념을 본질적인 기원을 말하기 위해 문학 형식 안에서 공유하는 일은 상당한 파격이다. 마찬가지로 의류 디자인이라는 예술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같은 차원에서 파격이다. 과학과 예술의 관계항에 대한 질문도, 예술적 상상이 과학을 자칫 신비의 영역으로 몰아간다는 진단도 해묵은 것이기는 하나, 예술/과학의 접경에 대한 질문은 한층 심화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인용문을 손보미 소설의 지평에 비춰보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우주의 중심은 단 하나가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균등하게 연속적으로 공간이 놓여 있다는 상대성이론도, 물질의 특성을 중첩·얽힘·불확정성으로 정의하는 양자장론도, 이 모든 이론의 한계를 초끈이론으로 보완한 것도 그의 텍스트에서는 과학자의 유치한 복장처럼 파격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문학 외적인 질료들이다. 과학자의 정체성을 내·외면의 근엄함으로 재단해온 인식을 뒤엎고, 유치 발랄한 어리광쟁이로 둔갑한 과학자가 스케이트를 타도록 장치해 놓고서 작가는 예술과 과학의 접촉면에서 이 세계의 의미를 더듬는다. 그리고 이것은 랄프 로렌 패션의 단순성과 정확함의 기원을 찾아내려는 극렬한 탐구욕과, 흙바닥에서 구르며 일을 하더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이 되”(102쪽)도록까지 물품을 구매하겠노라는 소녀의 꿈이 추동한다. 그녀는 이 패션에서 “탄생? 창조?” 같은 기원의 의미와 순수 창작품의 염결성을 탐닉할 수는 있어도 다량 “생산”은 거부하는 애호가다.
그렇지만 시계가 자신의 패션을 완성해줄 거라고 믿고 이미 사망한 랄프 로렌에게 영문 편지를 쓰는 그녀에게는 이 모든 기대 자체가 불가능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다. 이미 죽은 자도 그렇거니와 그녀의 부족한 영어 실력도 패션 완성의 가능성을 곧바로 철폐하는 기제들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시계를 소유하려 고투하는 것일까. 상품 구매자의 요구와 관련한 이 문제는, 랄프 로렌 패션의 창발성을 따지는 또 다른 인물의 욕구와 중첩된다. 새롭고 발랄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욕망대로 좇아가본 기원 캐기에서는 무수한 거짓말, 진실 호도, 진심을 누설하지 않으려는 계산된 발화, 부정확한 해석·진단·추정, 무수한 개인들의 사정을 들춰내야 하는 난처함, 그럼에도 끝내 알 수 없으므로 기원은 노출되지 않고 신비로 남는다. 랄프 로렌의 기원은 오직 첫 창조물에서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을 테지만, 그곳으로 거슬러 가는 탐사자에게 기원의 창안물이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영향 관계에서 그것을 적발해 내려는 시도였다.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려운 난경, 드러냄과 노출 사이에 포진한 거짓과 사실을 배합하는 그곳에 랄프 로렌은 다만 가상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화자는 침묵하는 이들에게 아무 말이나 하라며 녹음기를 들이대고, “생략과 강조를 통한 전형적인 거짓말”(240쪽)을 보탠다. 어떤 이는 진심을 말할까 봐 두려워하며 거짓말을 내심 지원하고, 이 모든 일들이 “정말로 잘 모르겠”는 어떤 파동 안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213쪽) 연쇄적으로 심상하게 발생한다. 랄프 로렌 마니아인 수영이 영어를 제법 잘하는 화자에게 편지 쓰기를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쓴 이름이 “디어 랄프 로렌”이다. 이 호명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일한 영혼이며 정신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화자는 무수한 타자를 만나 목소리를 녹취하고, 타자의 연대기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가 시대를 선도한 디자이너가 아닌 그저 시대에 끌려간 사람이라는 혹평이 이야기를 소비하는 일에 열중하는 자에게서 발설되기까지 화자는 그렇게 한다. 랄프 로렌의 창발성을 증명하기 위해 벌인 이 모든 굴착 작업들은 무수한 인용과 주석 달기처럼 배열되었을 뿐이다. 그 어느 것도 정곡을 들추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2) <뉴시스> ‘양자정보기술’ 기사. 2021. 4. 1. 참고


그녀의 편지는 완성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정말로 잘 모르겠다.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편지가 완성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 편지의 가장 첫 문장은 온전히 수영의 문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디어 랄프 로렌.(352쪽)


작가는 「과학자의 사랑」(①)에서도 증명 행위에 개입하는 이야기 본능을 따져본다. 이는 과학 현상을 증명하는 일을 허구의 서사처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발언이자, 과학자의 증명 행위가 이야기 행위로 표명된다는 점과 관련한다. 자신이 연구한 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던 과학자인 ‘고든 굴드’에게 가정부는 다음 같은 ‘자세’에서 유일한 여자다. 이해 불능의 과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는 “이 세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굳게 믿”(174쪽)는 사람이다. 여기에 의심을 보태자면, 이 여성이 과학자의 난해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하는가라는 점이다. 이해 불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를 과연 ‘청취’라고 할 수나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이러한 듣기 방식이 진리를 경청하는 윤리적인 자세인지, 그렇다면 무지가 무지를 유발하는, 의심하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 경청의 자세만으로 듣기의 외형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경청인지를 다시금 묻는다.
독자의 예상은 적중했을 것이다. 굴드의 이야기 본능은 자신이 규범을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었다는 방증이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가정부가 사랑에 빠졌다는 가설 아래 굴드는 그 마음을 증명하려고 반복 질문과 확인을 이어간다. 사랑의 감정도 과학적 이성도 이렇게 끝없는 회의와 질문 속에 존속한다.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 거짓은 아닌지 하는 사소하고 조잡한 질문들. 이것은 굴드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유일하게 경청한 가정부가 거짓으로라도 “선생님을 좋아했어요”라고 고백하게 하여 사랑의 감정을 과학처럼 증명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참값 또는 거짓값을 대입하면서 그녀의 대답이 거짓인지 참인지 증명하려는 듯 “정말이오? 그건 거짓말이 아니오?”라고 거듭 의심을 중첩하면서 말이다. 종교 편향의 가정부도, 과학자인 굴드도 사랑의 자세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증명을 위한 기본 전제가 그녀의 경청 자세이며, 이것만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상수여야 한다. 의심할 때만 사랑도 과학도 증명의 형식으로 답이 돌아온다. 그래서 굴드는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라면서 그녀에게 “음탕한 여자가 아니”(189쪽)라고 결과값을 제시했던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믿는 신의 음성을 담아 과학자는 그녀에게 신비로운 언어로 축복을 내린다. 필생의 연구 과업인 중력의 절대성을 파괴하면서 한 여성 앞에서 신비주의의 사도로 전변해버린 그에게 과학은 무엇이었던가? 저 무거운 개념들이 일방향에서 오는 소리에 그친다면 과학을 과연 ‘참’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 축복하는 말 한마디보다 과학이 과연 얼마나 더 정확할 것이며, 당신은 음탕한 여자가 아니라는 말보다 더 윤리적이기나 할 것인가? 사랑의 감정보다 정확하다는 과학이 사랑보다 더 분명하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저 멀리, 공중에 접시 모양의 물체가 떠 있었다. 애드벌룬인가?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이, 저 멀리 떠 있는 것이 딸을 마지막으로 데려다주었던 날 간선도로에서 보았던 바로 그 물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물체는 그때처럼 붉은빛을 발하지도 않았고, 일곱 개도 아니었다. 그건 단 하나였다. 그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눈(眼)으로 이 세상 위에 묵직하게 떠서 움직이지도 않고, 영원히 중력을 거스른 채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①, 「애드벌룬」)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란 지구 부착자인 인간에게는 잠재적인 해방구, 자유로움, 꿈의 영역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삶의 바탕이 애당초 부동의 조건이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미확인 물체가 출현하여 그것의 가능성을 역으로 증명할 때만 성립한다. 애드벌룬인가?라고 자문해본 미확정 물체를 유에프오로 확정하기까지 저 물체는 끝내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인간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작가의 발견은, 퇴각 없는 삶에 대한 찬사로 이어진다. 직면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한쪽의 진격은 다른 쪽에게 ‘노출당했다’는 지각을 안기지만, 이것은 실상 쌍방향의 인식이다. 앞서 걸어가는 자는 후발자에게 노출되기 마련이지만, 걷는 사람은 예외 없이 타자에게 노출된다. 그리고 이 세계는 걷는 사람에게만 노출된다. 이 세계의 지평에서는 유사 현상들이 끝없이 발생하고 파생한다.
하지만 인용문에서처럼 지배적인 “하나의 눈(眼)”이 있다는 가정하에서는 노출당했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상시 열려 있는 공간에 작동하는 시선은 일원적인 지배력의 표지다. 하여 손보미 소설의 인물들이 이웃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어린 부부를 숨어서 바라보고, 거짓말을 하고, 두려운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일들은 개체의 삶이 하나의 끈에 연결된 채 이웃과 함께 진동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 끈은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어떤 이는 운명이라고도 신이라고도 하는 현상이라는 것. 수시로 느끼는 두려움, 마음과는 다른 거짓말, 초인종 누르기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의 떨림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단독자들은 무수한 열림의 공간에서 만남의 가능성을 지향하지만, 타자에게는 이것이 난입하는 행태로 보인다. 이렇게 손보미가 그린 인물들은 타자에게로 나아갈 때 발생할 것은 모두 발생하는 삶의 조건을 하루하루 심상하게 살아낸다.


실존 장소로의 선회


손보미가 『작은 동네』 이전에 가공한 세계는 거짓말 제조기를 거쳐 나온 것 같았다. 타자에게로의 지향이 거짓말의 씨앗을 퍼뜨리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③)처럼 소리 없이 타자의 영역에 침투한 자들, 초인종을 누르는 자들의 행동 지향을 여러 편의 작품에 담았다. 「산책」(③)에는 혼인신고만 한 어린 부부의 이야기를 엿들으려 몰래 밤길을 산책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를 바람난 사람으로 오해한 딸은, 예전에 할머니 집의 초인종을 누른 일이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 되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하여 그녀는 초인종 누르기를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라며 두려워한다. 아버지는 딸이 불쑥 집에 들어오자 불청객의 내방인 듯 ‘쳐들어왔다’고 나무라고, ‘염탐했니?’라며 혐의를 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취미생활’을 인정해달라는 하소연에서는 엿듣기가 활성화하지만, 피차 예의의 거리라는 것을 유지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같이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자에게는 “우아하게” 초인종을 누르는 배달부일수록 두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다(③, 「고양이의 보은」). 문을 두드리면서 이방인에게 “종수, 혹시 죽은 거야?”라고 묻는 이웃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어정쩡하게 깃든 불안감의 주체에게 소통의 신호를 타전하는 따뜻한 사람이다(②).
『작은 동네』는 결코 반감되지 않는 ‘있음’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사랑의 공간이다. 오랜 시간 암장되었던 흑역사를 거슬러 가는 이 작품은, 마을 공동체에 거주하는 가족에게 발생한 두 개의 사건을 축으로 서사를 펼친다. 하나는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섬에서 일어난 간첩 조작 사건, 다른 하나는 화자가 7세 때 마을에 발생한 큰 산불이다. 미혼 부부의 딸에서 이혼 부부의 딸로 자격이 변경되는 화자에게 두 개의 사건은 가족과 시대의 흑역사를 은폐한 거대한 비밀이다. 초인종을 누르는 타자에 대해 말해왔던 화자가 여기서는 소나무 숲속에 있는 낯선 집으로 가 직접 초인종을 누른다. 화자는 숲속 외딴집에 방치된 여성을 질문하기 위해 그 일을 했다면, 어머니는 남몰래 그 여성과 우정을 나누면서 온갖 구설수를 감내한다. 이 숲속 여자는 관객이 가공한 이미지대로 가치가 매겨지는 유명 가수 출신이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노크하지 않아도 그녀는 투명하게 노출되는 시절을 살았었다.
때문에 노출되지 않으려 하고, 진짜 알맹이를 지키려 하는 그녀의 심리는 사실을 가공하여 숨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자살한 그녀의 사정을 경찰에 제보하지 않는 어머니의 심리, 그리고 미혼으로 아이를 낳아 언니에게 맡긴 진짜 엄마에 대해 함구한 마을 공동체도 진짜를 노출하지 않고 보호하려는 전략 아래 집행된 것이다. 가짜 되기와 거짓말하기로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두 어머니가 한 그 공모”(309쪽)가 실감 나지 않고, 기록물이 없으므로 화재 사건과 사라진 사람에 대한 사실도 증발하고 말지만, 오랜 시간 침묵해온 마을 공동체에서 일어난 저러한 흑역사 속에서 한 생명체는 건재할 수 있었다. 죽기까지 비밀을 가져간 어머니의 침묵과, 기록물이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은 사건이 되어버린 큰불은, 끝내 노출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이며, 화자의 후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진짜처럼 화자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역설로 증명한다.


나는 그림자를 지켜봤어.
그건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놀이예요. 우우우
그건 이 우주에서 가장 슬픈 놀이예요. 우우우
우리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뛰어서 다시 만날 거예요. 우우우
우리들의 그림자, 그림자, 그림자(262쪽)


편평한 지평에 무수히 배열한 것 같은 텍스트들을 경유하여 이 소설 『작은 동네』에 이르자 우주의 조각은 다른 모습으로 현상된다. 전작(前作)의 질문들을 다시금 변주하고 있으나, 그 내면은 이전 방식을 벗어나 있다. 거대 우주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끈들이 구축한 고차원을 벗어나 삶의 현장인 3차원으로 복귀한다. 기원을 알고자 하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지향성은 광대한 우주를 알고 싶은 만큼까지 상상력을 쏘아 올릴 수 있다. 끝없이 안부를 묻는 방식으로 그간 타자의 삶에 개입해온 손보미 소설의 인물은,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가족들이 침묵과 거짓으로 안전을 조성했음을 알게 된다. 진짜는 발설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진짜가 있었던 시·공간에서만 그것은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모든 가짜들은 그 이후 발생하면서 상상력이라는 형식으로 번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미혼 동생이 아이를 낳는 시간에 함께한 유일한 증인이자, 미혼으로 아이를 떠맡아 엄마가 된 여자에게는 오직 거짓말과 사실 은폐만이 시대와 가족의 흑역사를 숨기는 방편이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를 제외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함구해야 한다면 거기에 가짜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짜와 가짜를 혼합하여 모호하게 만들어놓는 소설은 필경 누군가가 ‘진짜’ 하고 싶은 말로 채워진 매체가 아닐까. 소설은 누군가의 진짜 삶을 거짓인 듯 발설하는 거짓 고백의 법칙을 따르기도 한다. 진짜를 누설할까 봐 가슴 졸일 이유가 없는 독자는 남몰래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짜 장치를 걸어놓고 허구를 기입한 작가는 전략가의 내면을 숨긴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글을 쓰는 것일까. 거짓말을 해놓고 안도하는 인류가 창안한 소설의 진실은 진짜와 가짜를 중첩하고, 연결하고, 분산과 결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언뜻 노출되는 한 조각의 진실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은 반드시 사실일 이유가 없다. 이것만이 명백한 진실이다.
소설은, 진짜임 직한(가짜임 직한) 가짜(진짜)라는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우주적 언어다.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썼듯이 “굉장히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과 비슷한”(②) 존재, 즉 타자가 갈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여 세계를 조망한다. 모순되게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을 ‘진짜’라고 규정한다 해도 그것이 가짜가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소설이 그런 것은, 발설하는 순간 언어가 이 세계를 가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오직 침묵함으로써 진짜를 보존할 수 있으나, 언어의 생애는 가짜를 만들면서 시작한다. 손보미는 평행우주처럼 열린 텍스트를 제작한다. 기원만이 진짜라고 믿으며 그것을 찾으려 기꺼이 헛되게 사는 자, 가짜 감정에 매몰되어 의심하지 않는 자, 계량 가능한 과학 현상만을 진짜로 아는 자에게 무한 열려 있는, 벅찬 텍스트다. 이것만큼 명백한 진실은 없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만이 진짜다. 소설가는 누군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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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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