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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을 짓지 않기로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2,207

헤어짐을 짓지 않기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 『소년이 온다』1)

김효숙


1. 의사(儗似)증언자가 흑역사를 말하는 방식 : 『작별하지 않는다』


획일화한 이성을 강고한 정신으로 등극시킨 헤겔주의 역사관을 숭앙하는 체제에서는 불순분자를 양산한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이하 『작별』, 2021) · 『소년이 온다』(이하 『소년』, 2014)에 여전히 말해야 할 지난 시대의 흑역사를 담았다. 여기서 시간은, 제거와 절멸의 기획에 성공을 거두려 한 때로 돌려져 있다. 단선적으로 시대를 평정하려 하고, 거짓된 평화로 획일화를 달성하려 한 이성의 시대가 그때다. 이성 정치 역사관의 주체는 기억을 단절시켜 그것을 과거로 되돌리는 일을 엄폐한다. 생존자조차 말의 죽음을 내면화해야 하는 시대의 폭압 주체는 불순분자 생산에 능력을 투입한다. 그러나 기억마저 봉인되는 형국에도 불순분자 절멸의 기획은 결코 일방 종료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는 기어이 행불자의 암흑 시간으로 들어간다. 폭압 주체가 그간 기억을 조작하고 은폐하면서 거짓 평화를 연장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강은 두 편의 작품에서 어느 날 홀연 사라져 비어버린 이들의 자리를 찾아 나간다.
지난 시대와 소통하려는 자는 『소년』에서 형상화한 증언 방식처럼 직접 발로 뛰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취재를 하거나, 논문 쓰기·연극 공연으로 진실을 발설하거나, 소설 쓰기로 접근한다. 그렇다 해서 문학이 증언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강은 『소년』에 이어 『작별』에서도 문학의 자리에서 소통의 계기를 열어나가는 방법을 고안한다. 수직적 시간의 지층에서 작가가 캐내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말하려 했을 이들의 목소리다. 증언이 불가능한 것을 발설하려 할 때만 당사자는 증언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런 차원에서 모든 증언은 결국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이다.2) 그것을 말하는 문학은 다음 문장에서처럼 꿈 언어로 되살아난다.


그 꿈을 꾼 것은 2014년 여름, 내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11쪽).


악몽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별』에서 작중 작가(경하)는 한강의 전작인 『소년』과 자의식이 연결되어 있다. 두 작품의 화술 주체가 작가임을 알리면서, 무의식의 잔존물인 악몽에 “그 도시의 학살”과 연관된 군인의 얼굴, 예비군복, 저격수 같은 실제들이 조각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 도시의 학살 사태가 현대사에서의 5월을 환기하는 동시에 『소년』의 문학적 실행을 지칭한다면, 근현대사의 4월은 『작별』에서 작중 작가가 수행할 과업을 함축한다. 근과거의 5월을 재현했던 작가에게 잦은 악몽의 형태로 개입하는, 4월에 대한 언표 불능의 부채감이 그것이다. 불가능한 말하기로서의 증언은 말하기의 유보로 증언의 불능을 그간에 증명해온 셈이다. 그래서이겠지만 한강은 이 소설에서 저러한 부채감이 말할 필요를 촉발하고, 산 자의 생명 기능 때문에 악몽을 꾸고, 그러한 현몽으로 역사의 시간에 잇대는 의식적인 실존재가 작가임을 암시한다.


1)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1판 7쇄).; 『소년이 온다』, 창비, 2016(초판 26쇄).
2)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정문영 역, 새물결, 2019(1판 4쇄), 98쪽.



매개자들


한강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으로 먼저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서사에서 최적화한 시적인 감수성은 이러한 역량에 기반한다. 이 작품에는 시네포엠을 제작하기 위한 서사시 한 편으로 보아도 좋을 만큼의 이미지 효과가 선명하다. 그중 ‘새’와 ‘눈(snow)’은 상징적 동일화, 무거움을 걷어낸 가벼움의 미학을 견인하는 대표 이미지다. 무기나 둔기가 방출하는 무력으로 대학살의 참상을 그리기보다, 섬세한 감수성과 서정화로 심연의 무게를 덜어낸다. 꽃잎처럼 여리고, 어린 새의 몸을 더듬어 심장을 찾을 때처럼 조심스러우며, 손바닥을 오므려 받은 싸라기눈이 녹는 광경을 감각할 때처럼 안타까운 고통이 서사에 침윤한다. 거대한 이성을 가로지르는 감성의 분할선들은 상징을 결코 나약한 기표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한 보여주기이며, 상징적 암시가 우리의 시지각을 자극하면서 거대한 슬픔을, 닫힌 시간의 적층을, 사멸할 수 없는 정신의 현전을 전한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작별』, 95쪽)


상징은 기억의 매개물이어서 사멸을 모른다. 말을 해야만 하는 자가 상징에 기대어 기억을 견인 중이다. 죽은 어머니의 말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매개자 자격인 인선과, 새·눈 상징이 기억을 매개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이 예시문은 딸인 인선의 회상 속에서 어머니가 말을 하는 장면이다. 앞은 인선, 뒤는 인선 어머니의 목소리다. 여자애였던 어머니 자신의 과거를 딸에게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보듯이, 어머니 죽음 이전의 언어는 매개자의 청취를 거쳐 복기하는 방식으로 이 시대에 복원된다. 청취자가 근친이어서 어머니는 입을 열 수 있고, 과거사의 진실이 인선에게로 이동하여 그대로 엄폐된다. 이후 다큐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인선이 자기 인터뷰로 증언하기까지 어머니의 말은 그대로 봉인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매개물인 ‘눈’은 선형적인 시간의 표상이면서도 동시대성을 가시화한다. 죽은 어머니와 살아 있는 인선을 매개하기도 하지만, 인선과 눈은 지금 이곳의 현상이다. ‘눈’이 어머니와 ‘그 생각’을 매개하면서, 소개령이 발효된 후 학교 운동장으로 피신한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밟았던 눈의 기억은 되살아난다. 그것은 말을 함으로써 봉인을 풀어내는 언어의 제의이며, 언어의 제단을 쌓아야만 위로가 가능한, 죽은 자 앞에서의 윤리다.
『작별』은 1948년 11월부터 그해 겨울 동안의 제주 암흑사를 재현한다. 과거와 현재 간 매개물로 부각되는 몇 개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작가가 자신의 시-소설에서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3) 이라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단연 ‘눈’이 부각된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죽은 자와 산 자, 지난 시간과 현재 시간을 매개한다. 그해 겨울에 제주의 중산간에 발생한 사건과 눈 이미지에는 시간의 절단면들이 비대칭으로 놓인다. 연결 불능의 시간을 재현하는 일은 기억을 탈환하여 그것을 조립해보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행불자들의 흔적을 찾아내어 아카이빙하려는 기획이 ‘인선’의 다큐 영화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이러한 기억 탈환 방식을 작가는 『작별』에서 텍스트 내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작별은 부정되는 것, 완성될 수 없는 것, 미루는 것이다.
『소년』은 죽은 자의 ‘혼’이나 생존자의 말하기로 기억을 소환한다. 『작별』은 이미 죽은 자, 소재 확인이 불가능한 인물의 행방을 추적·추체험하면서 기억을 구성한다. 암매장된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이나, 생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장면은 고스란히, 불명의 유골이 행불 처리된 이들일 수 있다는 강력한 암시다. 살아 있는 자의 증언은 육성이나 녹취물로 들려줄 수 있으나, 죽은 자의 증언은 인쇄물(신문 기사·사설·진상조사서·사진·논문 등)이나, 생전 구술 내용을 기억하는 자의 재-구술로 재발화한다. 따라서 증언을 문학으로 변환하는 방식의 차이는 화술 주체가 죽은 자인지 생존자인지에 따라 갈린다. 『작별』은 죽었거나 늙은 자는 물론이고 그들과 동시대를 공유했던 인물의 말 못 함의 사정들을 열어놓는다. 입을 닫아야 했던 내용들이 말문 트기의 요건이 되면서, 암매장·갱도·수장(水葬)·구덩이·봉분 같은 은폐의 표징들이 지표면 위로 침묵을 깨고 나온다.
『작별』은 죽은 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생존자, 즉 대리 증언자에 의해 구성된다. 보았거나 들은 자는 그것을 다시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은폐나 침묵은 결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풍문처럼 떠도는 조각 이야기들이 지난 시대 흑역사의 진상 중 하나라는 점을 구덩이와 봉분에 묻힌 사람들, 수장으로 유실된 신체들, 총살당해 암매장되거나 갱도에 묻힌 행불자들이 죽음의 이유를 유골로 몸소 증명한다. 이것이 한강 소설에서 이름 모를 신체들이 발굴되는 구덩이나 땅 밑, 봉분들이 개봉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체험 당사자나 피학살자를 희생자나 피해자로 지정하여 위안과 위로, 화해와 상생을 도모하는 서사의 대단원은 신파조의 정감을 자아낼 수 있다. 흑역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이해보다 강자의 윤리에 흡수·동화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약자의 윤리를 무화할 수가 있다. 일방적인 피해의식은, 희생의 감도, 당한 자는 입을 닥쳐야 한다는 시대적·사회적 함구령이 획일적일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러나 침묵은 방관자의 의식 속에서 사멸 일로에 있는 말의 잔존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침묵을 목숨과 동급으로 내면화하지 않는 한 말이 침묵을 공략한다. 말 못 함의 기율이 팽창하는 시간은 광주의 경우처럼 짧거나, 제주의 경우처럼 길 뿐, 그래서 증언자가 늙었거나 죽었을 뿐, 피해자의 체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말하지 못했던 자가 비로소 말문을 연다. 그들이 ‘의사(儗似)증언자’(아감벤)다.
『작별』에서 자술(自述)은 당사자의 말을 청취한 의사증언자의 재구술 방식으로 나타난다. 피해자는 죽어 사라졌으므로 의사증인들이 대신 말을 하고, 그들은 직접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잃은 자들이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 대하여 말을 하므로 의사증언자다. 당한 자는 재가해가 두려워 증언을 삼키고, 침묵의 이유가 전적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만도 아니다. 현실 사회에서 삶을 지탱하는 근거로 두 개의 노선만이 존재할 때, 하나의 근거는 다른 하나에 대한 대립각으로 피차 위치가 고정된다. 내부의 안전을 지키고, 갈등을 봉합하여 화평을 조성하면서 침묵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라면 증언자는 사회적으로 사망한 자다. 때문에 증언 형식이 문학이 되는 곳에 피해자·희생자가 아닌 의사증언자가 놓이는 것이 위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생존 지형이다. 말할 수 있는 자만이 의사증언자이고, 그는 결코 죽지 않는 증언자다.
한강 소설에서 의사증언자의 감정은, 잃어버린 자에 대한 피해의식에 기반한다기보다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버린 불상의 이유 때문에 생긴다. 그런 이유로 피해의 진상을 파헤쳐 죽음을 증언하는 자는 피해자와 구별해야 맞다. 한강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피해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를 증언자로 지정한다. 이렇게 볼 때 피해자는 죽은 자의 다른 이름이고, 증언자는 피해의 이유와 진상을 의사증언하는 자다. 인간의 말을 미메시스하는 앵무새 ‘아미’, 벙어리인 ‘아마’가 허밍을 흉내 내다 죽은 일도 말하기의 불능과 불가능성에 밀착한 비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이미지에서 분산하는 풍성한 환유들로 이별이 아닌 작별은 어떤 상태의 헤어짐인지 생각게 한다. 헤어짐을 짓지 않기. 이것은 헤어질 수 없는 이유가 어떤 감정에 의한 것도, 계산에 따른 것도 아닌, 스스로 헤어진 적이 없기에 헤어짐을 만들 수 없는 정황을 말한다. 더구나 헤어짐은 자타 간 말의 불능을 현실화하는 사건이어서, 말하기의 불가능성을 조성하는 이유와 원인이기도 하다.


3) 한강, 『흰』, 난다, 2016, 63쪽.



여성의 말과 온도


말할 수 있거나 행동으로 보이는 기제들이 진실에 근접할 때 그는 증언자가 된다. 친구 사이인 경하와 인선이 주인공이라는 관념을 초과하여 인선 어머니의 존재감을 인지할 때부터 이 서사는 증언의 구성물이 되어간다. 대학살 후 사라진 가족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캐릭터인 인선 어머니(강정심)를 말하기 위해 그녀의 딸인 인선을 화자의 협업자로 설정한 데서 작가 전략은 여실히 드러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작가이기도 한 화자가, 제주 출신이자 프리랜서 사진가인 인선에게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제안하면서 둘 사이에 친분이 생긴다.
이렇게 여성을 증언의 주체로 설정한 경우는 작품 속 작품(works in works)인 장편 다큐 영화 <삼면화>나 경하의 전작 소설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구현된다. 다면 취재를 근거로 작품을 설계하는 창작자나 기획자들이 만나는 대상이 여성이라는 데서부터 한강 증언문학의 특성은 드러난다. 인선이 기획한 ‘삼면화’의 취재 대상, 경하의 소설에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두 인물의 공감 범위는 물론, 수행으로서의 문학인 『작별』이 어떠한 지향성을 갖는지 가늠할 수 있다. <삼면화>부터 보면, 이 장편영화를 구성하는 단편 세 편에서 공통 요소가 여성과 섬이고, 그중 세 번째 단편이 인선 자신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4·3 미경험 세대인 인선이 경험 세대인 모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거를 견인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기 인터뷰는 의사증언의 의미를 보충한다. 그런데 모친도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인선과 마찬가지로 의사증언자다.
굳이 말하자면, 소설은 의사증언의 구성물이다. 증언이 인선의 영화 제작에 필수 동기로 작용하는 것처럼, 죽어 지상에서 사라진 어머니의 말을 인선이 구술하는 방식으로 지난 시대의 진실을 이야기로 변환하는 것이 소설이다. 살아 있다면 말을 할 것이나, 산 자가 죽은 자의 침묵을 발굴하지 않는다면 그의 생전 발언은 영영 복구가 불가능해진다. 인선이 자기 인터뷰로 어머니를 말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결국에 의사증언의 방식으로 구술하고 채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선의 자기 인터뷰가 갖는 의미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희박해지고 불가능해진 증언을 가능성으로 바꿔 나가는 방법이 한강의 서사 전략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재현한 전작에서도 작가는 비밀스런 역사의 집행을 형상화하였다. 진실을 암장한 채 조성되는 거짓 역사의 내면, 시간의 흐름으로 진실을 덮으면서 침묵을 강요한 정치적인 기획들을 깨나간다. 자기 증언으로 진실을 전할 자는 죽었거나 사라진 마당에, 대리 증언으로나마 진실을 보존하려는 기획의 절박함이 대두하는 건 작가에게 시간이 무심하게 흐르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어서다. 한강은 피해 당사자의 말을 기억의 형식으로 보존 중인 의사증언자의 말을 듣는 방식으로 이 작품을 쓴다.
『작별』에서는 인선의 작업인 장편영화 중 세 번째 섹션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4·3의 인물들로 접근하는 서사 전략을 펼친다. 죽거나 행불된 인물을 싸안고 흘러가버린 시간이 그대로 적층을 형성하는 지점을 파고든다. 어떤 이의 마지막 말은 그것을 듣고 기억의 방식으로 보존 중인 또 다른 이에 의해 과거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등재된다. 한강이 재현하는 흑역사는 이렇게 몇 겹 시간의 적층에서 발굴한 말들로 채워져 있다. 기억에 보존된 말이 그 역사를 담지하고 있으나, 오랜 시간 봉인당해야 했던 억압의 시간을 몇 장의 떼(turf)를 차근차근 떼어내듯 하면서 들춰낸다. 한 장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로, 4·3과 보도연맹 사건을 대학살의 기획으로 한데 묶은 것. 다른 한 장은, 피학살자 가족 모임과 유해 찾기를 진행한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다. 그 후 ‘입’이 봉쇄당하고 진실은 함몰되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관련한 시민단체의 활동과 언론 보도로 이 사건은 다시금 지표면을 뚫고 나온다.
좁혀서 볼 때 이 작품에서 4·3은 인선의 외가 인물들이 사라진 사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족 소집단의 슬픔이 말 못 할 사연을 품은 채 기구한 가족사로 붙박인다. 선량한 이들이 일망타진된 대학살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 시대인까지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거시사에서 4·3, 6·25, 보도연맹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자매간인 인선 어머니·인선 이모의 남편들, 즉 4·3 발발 당시 산에 숨었다가 매복 경찰관에게 붙잡혀 무장대로 오인, 수감되거나(인선 아버지), 결혼 다음 날 6·25가 발발하자 빨갱이 오명을 씻으려고 해군에 입대하거나(인선 이모부) 하는 사건들의 맥락은 하나다. 강정훈(인선 외삼촌)이 마을 소개령 때 마을 창고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군경에 의해 대구형무소 등으로 이송하던 중 보도연맹 피학살자로 총살당하는 사건, 불량한 시대의 포획물인 인선 외가 남성들의 동선은 교묘하게 얽힌다.
산에 몸을 숨겼던 남성들이 4·3 피해자가 아닌 위해자로 전말이 바뀌고, 인선 이모는 서북청년단의 강간 등 무법 행위를 피하려고 결혼을 서두른 여자다. 인선 어머니는 4·3 당시 13세로 남매 중 최연소자였기에 증인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장 나중까지 유지하게 된 인물이다. 입을 닥치고 살아오다가 입을 열 수 있는 시대와 접촉면을 가장 많이 갖게 되었다. 인선이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것을 재현하는 자기 인터뷰가 그녀가 제작하려 한 <삼면화>의 세 번째 섹션이다. 이들이 시대의 피해자로 봉인되었던 참상도, 보도연맹 피학살자의 색깔론에 의한 피해도 국가 주체의 명령 체계 혼란과 불순분자 일망타진의 기획이 야기한 것이다. 소수의 불순분자를 색출하려는 살인 기획이 빗자루로 싹쓸이하듯 확대되었다.
“결국 엄마는 실패했어.”라는 인선의 고백은, 인선 어머니의 노력을 실패로 보는 관점이다. 인선 어머니는 자기 오빠의 유골을 찾아내지 못한 유족이다. 영화화하려고 별렀던 소재를 인선이 부인하는 이유에 화자는 심정적으로 공감한다. 4년 전에 자신이 써낸 책에서도 누락한 것이 있었고 그것은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287쪽)이었다. 초과된 폭력을 제거한 채 재현한 서사에 과연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이끌어내면서 저 문장은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보존하겠다는 역설의 의지를 낳는다. 70년 전에 일어난 폭력이나, 화자가 4년 전에 쓴 책에 담아내지 못한 폭력도 동일하게 한계치를 초과한다. 그것은 화자가 끝내 재현하지 못한 ‘비무장 시민 대 무장 군인의 화염 방사기’처럼 자칫 하이퍼 리얼로 부풀어 올라 실감을 떨어트릴 만한 진실의 국면이다.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317쪽)


한계를 초과한 폭력이란 무한계의 폭력일 것이며, 무한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폭력의 체적이다. 한계치를 초과한 폭력을 영화로 재현하지 않겠다는 인선의 고백은 이 문제를 둘러싼 고통이 여전히 깊디깊고, 쉬이 종결지을 수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이렇게 작가는 작중 캐릭터를 통해서도 전작에서 누락한 것을 환기하면서 재현의 예술이 담아내는 사실성의 한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실제에 틈입하는 상상의 영역에서 작가의 지향이 남다른 방식으로 표명되는 점만 보더라도 한강에게 문학은 전적으로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이 왔구나.” 인선의 이러한 독백은 백골이 된 아이들에 대한 상상이 그녀의 재현 의지를 불러일으키면서 부단히 그녀를 들쑤신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죽어가는 어린 동생에게 피를 흘려 넣는 상상을 하면서 어머니가 인선의 입에 손가락을 물려놓은 치매 행동과, 인선을 붙들어 놓고 “구해줍서.” “도와주라. 잠들지 말앙. 나 도와주라 인선아.” “도와주라, 나 구해주렌.”(312쪽) 절규하는 모습은 생애 마지막까지 찾아내지 못한 어린 동생에게 빚진 마음을 표명하는 애잔한 구호 행동이다. 이렇게 이별을 짓지 않겠다는 작가의 작심은 “바람의 옷을 입은”(318쪽) 것처럼 가볍고 투명하지만 결코 사그라들지 않고 언제든 일어나는 기운 같은 것이다.


기억에 보존된 말


“그 시국 일이라민 아무도 입도 벙긋 안”(229쪽) 하는 때가 군사혁명 시기까지 이어졌다. 『작별』과 같은 사건을 다룬 소설 『順伊삼촌』(현기영, 1979)은 소통이 불가능한 제주민과 도륙당하는 돼지의 상징성이 강렬하다. 사건 발발 30년 후 제삿날에 벌어지는 담화는 시대적 분열이 어떻게 인간 절멸의 실행으로 표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도 그해 겨울의 소개 작전을 다루고 있으나, 한강 소설과는 다른 스펙트럼을 갖는다. 사건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사후적으로 발설하거나 상상한다는 점에서 두 편 소설의 지향은 동일하다. 현기영이 분열과 대립, 오해와 불소통에 대하여 말한다면, 한강은 한계 없는 폭력으로 인간 절멸을 실행한 시대를 재현한다. 비유하자면, 현기영 소설에서 섬은 돼지우리와 같고, 섬의 주민은 돼지다. 외부인에게 돼지로 알려진 섬사람들을 도륙하는 잔학성은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소통 부재, 지휘 체계의 분열에 기인한다. 한강 소설에서 섬은 앵무새를 가둔 새장과 같고, 섬의 주민은 앵무새다. 벙어리 앵무새의 ‘말 못 함’의 메타포에는, 언어 기능의 퇴화와 죽음이 동시 진행하는 시대가 담겨 있다.
현기영 소설에서는 단세포적인 오해가 유발한 보복이 행해진다. 그러면서 연쇄적인 ‘작전들’이 탈리오 법칙처럼 정치 부재의 시대를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들이 주도한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2020년 한정본, 85쪽) 작품 내·외적으로 섬사람들의 말 못 함의 이유가 폭력의 세습 때문이며, 그 주체들이 사건 당시의 복잡한 지휘 체계를 계승한다는 것은 이 소설이 전하는 상식이다. 예컨대 화자의 처지에서 보건대, 4·3 피난민은 고모부에게 빨갱이이면서 비무장 공비다. 해로운 사람이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혼란을 피해 산중에 은거한 주민은 폭도로 지목되고, 섬사람의 말을 해독하지 못하여 오해한 외부자는 내부자를 살해한다. 여기서 현기영 소설의 인물인 순이삼촌이 ‘도피자 가족’임을 상기해야 한다. 한강의 『작별』에서 인선 어머니가 행방을 찾아 나선 인선 외삼촌과, 현기영 소설에서 순이삼촌의 남편은 똑같이 ‘도피자’다. 군·경 가족이나 부역자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도피자 가족이거나 빨갱이로 지목되는 실존 바탕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도피밖에 없다. 도피했으나 또 다른 방식의 절멸 기획에 포획되었다고 추정케 하는 정황이 두 편 소설에는 하나의 연관으로 존재한다. 순이삼촌이 하지 못한 가족 찾기에 뛰어든 『작별』의 인선 어머니가 그러한 경우다.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된 도피자의 정체성을 행불자라고 추정할 수 있는 한 이성의 정치는 충분히 극악하고 잔학하다. 이성이 구획한 불순분자 일망타진과 절멸의 기획을 작가들이 서로 보충하면서 빈 곳을 메워가는 작법으로 증언의 공백은 메워진다.
40여 년의 간극을 두고 같은 사건을 말하는 두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알아야 할까. 문학적인 발화가 역사 기록을 초과하는 작업은 어디까지나 작가 상상력 안에서 이뤄진다. 허구를 읽으면서도 독자의 상상이 능동적으로 실제를 구성하게 되는 건, 말해야 하지만 발언할 수 없는 것들을 작가가 문학적으로 내재화하고 있어서다. 역사의 구멍을 메우는 상상을 불허했거나, 인과성을 끊어내면서 진실의 꼬리를 실종케 했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작가의 글쓰기다. 작가는 오직 씀으로써 진실의 단서를 발굴한다.
대학살의 실상을 소설에 반영할 수 있는 계기도 정치의 민주화가 동시대 현상일 때 가능했다. 1960년의 시민혁명, 즉 “4·19라는 역전의 계기가 작용”4)했기에 제도권의 불법 학살을 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시민 사이에서 일었다. 오직 말을 함으로써만 드러나는 진실을 작가가 조명한다. 한강은 호소력 강한 언어로 증언하기보다 비유와 상징으로 암장된 진실을 유추케 한다. 한강 소설의 정동은 타자에게로 이행하며, 진실이 정체되는 이유가 말을 못 하기 때문임을 알린다. 『작별』은 존재 부정과 무화의 기획을 감행한 시대의 말 못 함의 이유와 진상들을 관통한다. 부드럽고 여린 것에 부재하는 예리함의 도구가 결코 칼날 같은 것만이 아님을 입증한다. 진정 예리한 도구는 자국을 남기지 않고 목적을 실행한다. 증언문학의 도구인 언어는 떨리는 심장에서 발화하고, 한강의 문장은 그 혈맥을 짚어나갈 때처럼 떨려 나온다.


4) 이숭원,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태학사, 2015, 55쪽.



2. 죽음까지 달려가는 노래: 『소년이 온다』


파장과 파문


『작별』에서 작중 작가는 4년 전에 쓴 작품을 간간이 언급했었다. 그 책에서 누락했다는 장면 묘사를 읽노라면 자연스레 한강의 실제 전작인 『소년』으로 파장이 미친다. 죽은 정대와 동호를 놓고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두 아이의 마지막 시간을 말하는 인물들과 증언의 파문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년』을 예술미학으로 읽으면서 캐릭터들의 음악 경험을 추체험해 본다. 노래 부르는 대중은 어떠한 의식으로 뭉치는지, 소년 서사의 리얼리티와 음악 감정이 어떻게 서로 스미는지, 노래의 떨림 안에 자신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정립시키는 대중심리가 어떠한 비(非)분리의 원칙을 따르는지에 대해서다.
근대의 세계관으로는 이성은 정확하고 확고하나, 감정은 불안하고 의심스럽다는 관념이 우세하다. 『소년』에서 비장하게 울리는 애국가 표상도 이성/감성의 작용으로만 보면 ‘나라’라는 이성과 ‘노래’라는 감성이 비대칭으로 놓인다. 그러나 나라에 강세를 두든 노래에 강세를 두든 노래 부르는 자의 감정은 지향점이 하나다. 이때 노래의 파장을 단지 소리의 이동으로만 보면 감정은 소리처럼 보이지 않는 허상에 그친다. 그 노래가 추상을 넘어 어떤 실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소년』은 내적인 감정을 달리 읽고 해석해보도록 권하는 텍스트다.
감정을 구체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를 놓고 명쾌하게 ‘정동’이라고 개념 정의할 수는 없다. 이것을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보면 『소년』 서사에 담긴 애국가의 파장과 유동에 다른 의미를 매길 수 있다. 노래로 공명하고, 전파하고, 이행하면서 움직이는 몸들은 자신 너머의 타자들과 관계한다. 자연사에서의 초기 인류처럼 노래 이전에 춤, 춤 이전에 몸으로 환원하는 예술 형식에서 사람이 내는 소리를 현대적 의미의 노래로 바꿔볼 때, 노래는 몸을 매개로 다른 몸으로 건너가면서 소리의 파동을 가시화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점들이, 자극에 따른 감각적 반응, 즉 감정으로 일관해온 읽기 방식을 정동으로 바꿔보게 한다.
『소년』에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저항 중 가장 마지막 방법으로 노래를 부르는 시민이 있다. 그들 사이에 구축된 공감대가 몸의 움직임으로 가시화한다. 내·외적인 교호의 모습이 몸의 움직임으로 표면화하는 것. 한강은 이렇게 생명이 있는 몸의 사건을 다루면서 노래 부르는 자의 정동으로 현실을 읽는다. 강 대 강 구도나 적대적 관계일 수 없는 ‘우리’의 감정, ‘나라’라는 동일한 이상을 공유하는 정체성 안에서 이 서사는 발화한다. 네이션[民]과 스테이트[國]가 분리된 시국에도 같은 노래를 부르는 군민(軍民)의 감정은 하나로 공명한다. 위협하는 자와 위협당하는 자로 위치와 자격이 지정되었으나 이들의 정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명령 실행자 앞에서 온몸 저항이 불가능할 때, 사지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운동력 제로 그래프에 고착될 때 시민은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른다. 죽음 위협과 삶의 기대가 극단에서 만날 때는 위험에 대한 감응력과 안전 지향 심리를 구분할 수 없어진다. 사지가 무력해지면서 ‘입’은 출구가 분명한 ‘온몸’으로 급전환한다. 음식을 쓸어 넣어 씹어대는 게걸스러운 생존 구멍의 쓸모를 폐기하고, 사지의 무력감을 입으로 떠맡아 호소하는 커다란 출구가 된다. 키르케고르·프로이트‧하이데거·크리스테바가 두루 말했듯이, 공포는 불안과 달리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이다. 공포 어린 얼굴의 감각 기관 하나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와 공기를 찢는 현상은 상대방에게도 의외의 위협일 수가 있다.
이 작품은 위험과 공포에 노래로 반응하는 시민을 서사화한다. 노래 부르는 자는 물리적 대항자가 아니다. 노랫말의 의미가 반드시 노래 부르는 이유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노래는 리듬에 실려 탈범주하고, 좌중의 분위기를 조작하면서 한 덩어리의 힘으로 솟구쳐 흐른다. 개체들은 회의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며, 그 시간만큼 간곡한 것도 알지 못한다. 몸과 몸의 미메시스가 출렁임을 유발하고, 여기에 음악 요소를 게재하면서 공감대가 구축된다. 저항하는 시민은 상부를 향하여 몸의 활동을 가시화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비윤리와 연관되지 않으려는 자의식으로 매우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랫말에 불복종의 기호가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집단노래는 오직 가창함으로써 무리의 체적과 그 반향을 입증한다. 입에서 나온 노래는 유폐되지 않고 흘러서, 넘친다.
폭력을 ‘자연의 산물’(벤야민)이라고 한 이가 있다. 이 발언의 관점은, 부당한 목적을 위해 행사하지 않는 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여 이 폭력론은 고스란히 자연사 속으로 수렴한다. 이러한 생각대로라면 폭력 자체를 뿌리 뽑는 일은 불가능하다. 폭력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이것이 폭력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폭력에의 대항 능력도 상승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연사 속에서 똑같이 ‘운동’하는 인간도 폭력의 생존을 두고 절망만 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폭력의 자연사와 저항의 사회사는 인류 역사의 연대표에서 동급의 무게를 지닌다.


노래여, 나를 넘어가라


이 작품은 2010년대 우리 문학에 대거 등장한 소년/소녀 서사 군(群)에서 매우 개별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시 장르에서는 주로 소녀들이 분열적 생산의 주체였다. 서사 장르에서는 소년들이 자아 외부로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보여주었다. 『소년』 서사는 전통 기법을 복습하지 않고 전혀 새롭게 광주와 소년을 불러낸다. 광주 말하기에 노래를 이입하여 동시대 다른 작가들의 폭력 서사와 구별한다. 군인도 집총의 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선량한 시민은 더 빈번하게 어디서나 애국가를 제창한다. 정대와 동호가 총성에 놀란 나머지 잡았던 손을 놓치면서 헤어지고, 그때 죽은 정대를 찾으면서 동호가 공포 속을 뒤질 때에도 광장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내 가난한 노래의 씨앗”(「광야」, 이육사)이 거친 광야에 묻힌 이래 우리 문학의 저항 노래도 어두운 땅 밑에서 숨죽여 생명력을 지켜왔다. 죽음의 상태 같으나 정작 그 작은 알맹이에는 도화선이 숨어 있다. 어느 방향으로든 불꽃을 몰아갈 수 있는 노래들은 불복종과 저항의 잠재성을 품은 씨앗이다. 그것은 조건만 맞으면 발아한다. 그 조건이란 것이 공포며 두려움이며 잔인함이며 절망이다. 벽만이 유일한 버팀목일 때, 사지를 지탱할 힘을 잃고 벽에 기대어 설 때 생명의 에너지가 입으로 집중된다. 노래는 무정형·무형상으로 흘러들어 경계를 지우고, 바리케이드를 옮기지 않고도 ‘그곳’으로 이행한다. 그곳은 ‘이곳’의 외부인 폭력의 발원지다. 한강은 시민들이 부른 애국가에 정동의 지형도를 그려 넣는다.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많아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22쪽)


『소년』은 폭력 현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한 덩어리로 솟구쳐 오른 시민들을 전면화한다. 저지선을 밟고 선 시민들이, 바리케이드 밖으로 끌려 나가지 않으려 하면서 공포와 비탄에 잠겨 노래를 부른다. 흩어지면 파편화할 안전을 두려워하면서 복수 인칭 ‘우리’로 연대한다. 이때 “여자”의 애국가 선창으로 정동의 파동이 일어난다. 시민은 집단정체성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결속하면서 인접성을 욕망한다. 집단노래가 개인의 측면과 후면의 담당자가 되어준다. 외부자들끼리 모여 ‘내부’를 만들고, 일속이 된 내부에서 안전하다는 믿음을 내면화한다. 노래하는 몸들의 접합부에서 나의 노래가 너의 노래에 겹쳐 연속체가 되면서 노래는 ‘세속성’을 띠게 된다.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실천하는 음악의 속성을 세속성으로 규명해볼 수 있다.5) 이것은 삶의 장소를 연장하고, 노래의 정치화를 이루고, 노래가 실존적 리얼리티를 내포하는 곳이다. “집단을 형성하는 생명공학”(프리먼)으로서의 노래가 앞과 뒤, 옆 사람에게로 이행하면서 스며든다. “수십만 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 올리며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은 그 탑의 하부를 받쳐주는 힘이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래를 부르고, 몸이 닿을 수 없는 상층부까지 노래의 탑을 쌓아 올리려 하면서 “목이 터져라고” 목소리를 돋운다.
소설의 어디에도 애국가를 분절하여 의미 나타내기에 주력한 경우는 없다. 가사를 도막 내어 의미를 세분하지 않고, 애국가를 시민에게서 빠져나가서는 안 될 체온으로 보존한다. 그것은 한 덩어리로 서로의 온기를 지켜주는 옆구리이며 어깨다. 진화심리학자는 이러한 경우를 동물의 털 고르기가 진화한, 피부접촉으로 유대감·안온·결속·평안을 다진다는 측면에서 해석한다. ‘Hmmmm’에서 H는 메시지가 개별 단위로 쪼개지지 않는 전일성을 의미한다.6) mmmm을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연대하는 시민들로 가정한 뒤 알파벳 배열을 보면, 초기 인류의 구부정한 어깨와 서로의 몸에 걸쳐진 긴 팔들이 일렁거리는 듯한 상형문자다.
플라톤의 모방설이 대상을 흉내 낸다는 차원에 그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몸짓에서 내면 감정을 읽으면서 리듬의 요소를 찾아낸 경우는 이와 차이가 난다. 시민은 저러한 동작으로 리듬을 타면서 몸에 저장된 음악 요소를 발산한다. 몸을 움직일 때의 감각적 리듬 그 자체가 음악인 한 시민의 노래는 그들의 몸이 부르는 것이다. 몸 자체로 정동의 파동을 일으키고, 몸 자체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박준상이 정리해놓은 미메시스가 좋은 참고가 된다. 그는 시원적 미메시스와 예술의 관련을 몸의 리듬으로 해명한다. ‘몸짓으로 따라 하기’(미메, mimer), 감염 상태에서 이뤄지는 몸들의 공명, 보이지 않는 공동의 정념을 ‘리듬의 몸’으로 나아가면서 접촉하기 등. 모방이나 재현 이전의 미메시스에서 몸들의 상호 공명, 몸의 음악인 리듬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미메시스의 핵심을 구체적 감각들이 사상(捨象)된 추상의 정념으로 파악한다.7)
한강 텍스트에서 “여자의 선창으로 애국가가 시작”(8쪽)하는 5월 광장이 좋은 예다. 여자는 단호하고 높은 소리로 다중의 감정을 광장으로 이끌어낸다. 여자의 선창은 지시적 성격을 가진 언어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선창자가 높은음으로 띄워 올리는 애국가의 첫 소절은 군중의 마음을 간파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은 선창자의 지향을 거역할 의사가 없다. 이 노래가 시민의 위치와 규모·정체성 등을 입증한다. 유사한 감정의 소유자들이 위태로운 실존 공간에서 각자의 지식과 지각을 소거한 채 정동의 흐름을 따른다. 선창자에게 순응하고, 폭력에는 불복종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한 덩어리 되기’가 애국가 제창이다. 자신의 감정을 필사적으로 옆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긴급 타전 형태로 그들은 애국가를 부른다.
노랫말 몇 소절로 대중의 마음을 간파한 선창자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까. 시민의 세 배수로 군인에게 지급한 총알에 노래로써 맞서자는 그녀를 ‘감성 통치자’로 명명한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인가.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노래는 혁명처럼 낭만을 안은 엄연한 능력이라고 믿고 싶다. 감정이 뇌의 하등 부분을 관장하여 이성을 타락시킨다는 이성론자의 언술은 그날의 광장에서 폐기된다. 노래는 “경계 상실”(맥닐)의 지점에서 협력·협응하면서 한 덩어리 되기의 안전망을 구축한다. 무의도적이고, 역할 분담도 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서로 방호벽이다. 애국가는 경계를 지우며 탈(脫)-선(線)한다. 옆구리에 총탄을 맞지만 친구인 동호의 손을 놓칠 때까지 애국가를 부른 정대는 애국가가 끊겨 나가면서 ‘하나 되기’가 불가능해진 절망을 초점화한 인물이다.
다음 장면의 아포리아는 강렬하다. “도청 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114쪽)하는 상황이 히틀러가 감행한 베토벤 프로젝트를 연상케 한다. (베토벤의 음악이 흐른 뒤 히틀러군의 군화 소리가 육중한 무언의 점령가로 시민을 압박하고, 규칙화·정형화된 그 소리가 세상에 유동하는 모든 소리들을 덮었다. 세상은 공포감으로 평정되었다.) 군홧발 소리에 앞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여기에는 안전으로 위장한 위험이 은폐되어 있다. 진군하는 히틀러군은 나치 동조자인 바그너의 곡을 전쟁의 전주곡으로 연주하지 않았다. 정치로부터 예술을 분리한 전업 음악가 베토벤을 전략적으로 끌어들여 시민을 안심시키면서 애국가를 폭력과 파괴의 프렐류드로 깔아놓았다. 한강이 그린 하나의 애국가와 두 개의 감정에는 지목할 수 없는 ‘그들’이 있고, 그 일속이기를 바라지 않는 군인들도 있다. 수용소의 가스실로 가는 길에 모차르트의 곡이 흐르도록 장치한 나치의 정서 호도 전략처럼 그들도 음악 감정을 이용하였다. 살의의 충직한 하수인이어야 했던 군인이 ‘보우’ ‘화려강산’ ‘우리나라’ ‘만세’를 부르는 역설로는 모든 위장된 것들의 이면을 결코 폭로하지 못한다.
반면에 5월 광장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의 집단노래는 “숭고한 심장”들의 힘찬 박동과도 같다. 역행하는 정치와 폭압의 발생지를 향하여 낮은 자리에서 상부로 역류하는, 밀물 같은 힘이다. 하지만 군인의 “진압이 거칠고 신속했기 때문에, 한 곡이 끝까지 불리는 일은 없이”(86쪽) 노래는 도막 난다. 한 덩어리로의 결속은 더디고, 총탄은 그것을 신속히 흩어놓는다. 시민들의 애국가와 군인의 애국가가, 시민들의 나라와 군인의 나라가 동일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지점으로 총탄이 날아든다. 작가가 묻는다. 군인들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17쪽) ‘나라’라는 안전과, 군부의 명령과 폭력 사이에 숨은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그 저지선에 위치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양심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쪼갤 수 없는 생명 덩어리로서 심장과, 국가라는 집단 구성체의 상징물인 애국가를 등치시킨다. 그리고 총탄이 날아들었던 그 틈새를, 총탄을 발사한 군인이 부르는 애국가로 메운다. 군·민이 부른 애국가는 심장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조건처럼 파편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기억으로 자리 잡힌 하나의 덩어리다.
집단노래는 시민 정치적이다. 정동의 이행 과정에서 시민들은 전체성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집단노래 부르기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보다 집단의 결속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집단의 규모 그 자체가 노래의 메시지이며, 시민들은 함께 움직이면서 노래의 방향을 유도한다. “함께 소리치고 함께 노래 부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사건을 끌어와서가 아니라, 노래 자체가 군중의 정서를 움직이면서 “스크럼을 짜고” 에너지를 파급시킨다. 노래가 공포에 ‘침범’(에드워드 사이드)하는 양상은, 개인의 행위가 타인의 감정 상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조작성’을 참고할 수 있다.
한 치 앞의 정보가 불완전할 때는 무엇을 근거로 행동 방향을 정해야 할까. 그럴 때 감정이 행동을 이끈다.8) 감정의 판단력은 지성보다 신속하고, 좋은 기분이 동반할 때는 특히 그러한 행동을 지속한다. 옆 사람과 동맹하여 약하고 왜소한 자신을 부풀리면서 ‘우리’로 결속한다. 집단노래는 공명이 클수록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면서 장소 외적인 지향성을 띤다. 노래로 연대한 ‘우리’는 점점 붇는 생명력으로 거대한 공포를 넘어선다. 정대는 동호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고,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군인이 자신의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탄환을 박아 넣기 전”(59쪽)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해 5월 열흘간의 해방구는 “수십만 층의 탑” 같은 애국가와, “수십만 개의 폭죽” 같은 손뼉이 열어놓은 것이다. 공포에 대항하는 노래 처방은 주효했다. 감성의 통치자가 노래를 인도하고, 상호 미메시스로 동조·연대의 정동을 몸으로 구체화할 수 있었다. 폭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퍼포먼스와 리듬은 몸에서 발원하여 외부로 파동한다. 몸에서 터져 나왔으나 구체물은 아닌 애국가가 추상을 넘어 폭력의 발원지를 향해 간다. 군인도 시민도 한목소리로 애국가라는 추상을 자신의 유일한 몸으로 제창하는 일. 이것이 흑역사의 한복판에서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의 진실 내용이다.


5) 박홍규, 「음악은 사회성을 띠고 있어… 」,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최유준 옮김, 『음악은 사회적이다』, 이다미디어, 2008, 197~202쪽 참조. 이 글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의 태도를 사이드의 ‘세속성’으로 접근하여 해석했다. 획일화한 이념과 지식으로 국가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도, 종교처럼 국가-이성을 숭앙하지도 않으려는 시민들의 자율적인 사회 참여가 여기에 부합한다. 사이드 저술의 공동 번역자인 박홍규에 따르면 ‘세속성’의 원어는 Worldiness다. 이것을 ‘세계성’으로 오역하기 일쑤라고 지적하면서, 사이드의 ‘세속성’을 정리한다. 종교적인 숭배, 숭고 의식,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을 벗어나고, 강고한 구조를 깨면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텍스트처럼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세속성’이라고 쓴다.
6) 스티븐 미스,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3. ‘Hmmmm이론’은 초기 인류인 호미니드들의 의사소통 체계를 음악성과 몸 움직임과 관련하여 체계화한다. holistic(전일성), 조작성(manipulative), 다중성(multi-modal), 음악성(musical), 미메시스(mimetic)가 그 요소들이다.
7) 박준상, 『떨림과 열림』, 자음과모음, 2015, 40~42쪽.
8) 스티븐 미스, 앞의 책, 131쪽. 저자는 여기에서 오틀리와 존슨-레어드의 이론을 언급하면서 불확실하고 목적이 상충하는 상황(이것을 ‘제한된 합리성’의 상황이라고 한다)에서는 감정이 행동을 이끈다고 말한다. 아울러, 감정이 없다면 인간은 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무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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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lsqu

  • 관리자
  • 2023-11-08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 관리자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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