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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뿌리에 대한 상상 – 임고은의 <아키펠라고 맵>(2021)

  • 작성일 2023-08-18
  • 조회수 566

새로운 뿌리에 대한 상상 – 임고은의 <아키펠라고 맵>(2021)

이하림


1. 뿌리내림 : 인종주의와 기후 위기에 관하여


   코로나 19 이후로 새롭게 그어지는 경계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전망 속에서 인종주의와 기후 위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종은 더 굳건히 뿌리내리고 어떤 종은 더 속절없이 뿌리 뽑힌다. ‘뿌리’는 위기의 상황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메타포다. 뿌리가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정체성을 의미하는 은유라면,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는 식물의 생명을 의미하는 실재이다. 인간의 정체성과 식물의 생명에 대한 은유와 실재 사이에서 인종주의와 기후 위기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고 사실은 같은 논리로 심화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이 두 문제 앞에서 고정된 뿌리에 대한 믿음은 또다시 어떻게 인종주의와 자연-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양산하는가?

   시몬 베유는 <뿌리내림>에서 사회적 고통의 원천을 ‘뿌리 뽑힘’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인간은 각자의 뿌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뿌리가  언제나 단단한 땅 위에 ‘내리’거나 ‘뽑힐’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더 많은 경계의 탄생과 더불어 그 경계를 횡단하는 수많은 주체의 삶은 결국 뿌리 뽑힌 삶으로 밖에 여겨질 수 없는 것인지 그 한계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 한계의 지점에서 인종주의와 기후 위기의 문제, 그리고 그 두 문제를 심화하는 자본주의와 프런티어의 논리를 비춰볼 때 새로운 뿌리의 형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특히 임고은 작가의 <아키펠라고 맵> 연작을 사례로 새로운 뿌리에 대해 상상해보고자 한다.



2. 임고은, 아키펠라고 맵 연작,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 <모래-정원 3부작>, <모래알 속 정원들>, <실재하는 두꺼비가 사는 상상의 정원>


   임고은 작가의 아키펠라고 맵 연작은 퍼포먼스인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와 영상 작업인 <모래-정원 3부작>, 설치 작업 <모래알 속 정원들>, 워크숍 <실재하는 두꺼비가 사는 상상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1) 약 40일에 걸쳐 진행된 해당 전시는 약 열흘의 간격을 갖고 각각의 연작을 연이어 관람 및 참여해야 하는 구성이다. 아키펠라고 맵 연작 중 하나의 작품을 관람하게 되면 전시의 일부이기도 한 종이로 된 지도를 받게 되는데, 해당 작품의 칸에 해당 작품에 맞는 도장을 찍어준다. 마치 관광지에서 만든 여행 코스에 따라 여행을 하게 되면 해당 관광 명소에서 도장을 받는 모양새인데, 여기서도 전체 연작에 다 참여하게 되면 지도에 도장을 채우고 자신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삶과 죽음이 전하는 기호를 얼마나 감각하고 사유하며 이에 반응하고 있을까? 그들과 맺어왔던 우리의 폐쇄적인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열어 놓을 수 있을까? 경계를 흐리거나 무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어떻게 우리의 관계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을 찾기 위해 비움과 채움이 만나는 작은 동그라미 속으로 고래와 인간의 시간이 잠수한다.”2)



   우선,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 퍼포먼스는 35분의 러닝타임 동안 두 명의 관객과 한 명의 안내자가 함께한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두 명의 관객이 안내자의 인솔을 따라 걸어 들어가게 되는데, 안내자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전등으로 길에 빛을 비출 뿐이다. 어둠 속에서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빛과 바다 한가운데 혹은 태초의 어디에서인가 들려오는 듯한 음악 소리뿐이다. 35분 동안 관객은 빛을 따라 어두운 극장 안을 돌아다니며 쉽게 잡히지 않는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의자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고, 책상에 앉아서 오래된 책을 읽고, 소파에 누워 거울 너머를 보고, 큰 지도 앞에 서서 지도를 읽는다. 그동안 고래가 인간에 의해 착취되어온 역사, 그리고 고래와 인간이 사실은 얼마나 닮아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증거, 그리고 고래의 뱃속과 인간의 탄생이 하나의 과거로 교차되는 이야기들이 파편적으로 수집된다. 그 동안 많은 문장들과 이미지들이 쏟아지지만, 관람 방식은 자율적이고 정확히 주어지지도 않는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직조되지 않는다. 그저 주술적인 음악과 바다의 소리, 동굴의 울림, 과거의 음악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서 흐르고 있다. 

   열흘쯤 지나 다른 공간에서 <모래-정원 3부작>을 볼 수 있었고, 이 작품은 과거 오일탱크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문화비축기지 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세 개의 스크린의 세 편의 영상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낯선 정원의 찰나>, <명월주 : 그림자의 연못>, <다른 정원 : 조엘의 정원>이고, 모두 지난 퍼포먼스처럼 마름질되지 않는 이미지들과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원이라는 공간을 공통된 메타포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퍼포먼스에서의 고래와의 연결 위에서 정원과 연못과 정원사의 이야기를 인간과의 관계 속 타자화되고 착취된, 하지만 그것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린다. 여기서 정원은 타자의 공간이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 사이의 “갈등이 조화롭게 반복되고 질서와 무질서, 삶과 죽음이 새로운 경계를 끊임없이 그어가는”3) 공간이다. 지난 퍼포먼스에서는 밀폐된 시공간으로의 인간과 고래의 잠수를 통해 둘의 시공간이 같은 곳으로, 하지만 좌표화할 수 없는 곳으로 동화되었다면 이후 그 시공간은 다음 <모래-정원 3부작>의 이동하는 스크린 속 영상 작업들을 통해 ‘정원’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정원은 안이면서 밖이고, 개인이면서도 공동체를 만나게 하는 ‘경계 경관’적 공간이다. 이곳에서의 시선은 정원을 보는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이 모든 일련의 인간-비인간을 보는 ‘정원’의 시선이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다른 정원 : 조엘의 정원>은 그러한 시선을 ‘우리’라는 공동체에게 비교적 직관적으로 연결시키는데, “또 다른 정원이 나무숲 사이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곳의 정원지기 조엘은 연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정원에 머무는 다양한 생명체를 돌보는 인물이다. 그의 조용한 꽃들은 이 낯선 정원에 말없이 씨를 뿌리고, 개구리와 박쥐, 새, 달팽이, 돌고래가 풀잎과 함께 자라난다.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조엘의 한 해는 지금을 뒤엎고, 모퉁이를 돌아 다시 시작한다.”라는 말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 중간자, 혹은 경계적 위치의 정원지기 조엘은 정원의 주인이라기 보다는 누구의 것도 아닌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다.

   세 개의 영상을 보고 문화비축기지의 야외극장으로 나오면 돌로 된 의자들이 다른 높이로 열과 행을 맞춰 나열되어 있고, 그 의자들 위로는 쌀가루와 모래가 섞인 ‘거북이의 무덤’이 있다. 곤충과 새들은 이 무덤에서 쌀가루를 나눠먹는다. 이 무덤의 정원은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흩어지지만, 쌀가루를 먹은 동식물과 곤충으로 확장된다. 사람 없는 빈 야외극장은 마치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생각나는 모양새였는데, 미처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 거북이들의 무덤–새 모이들 사이를 걸으면서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된다. 이곳의 위치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거북이의 뭍인 것인지, 새들이 잔뜩 날아다니는 하늘 위인 것인지, 고래와 함께 있는 바다인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과 생,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후 보름쯤 지나 1시간 동안 세 명의 참여자가 함께하는 워크숍 <실재하는 두꺼비가 사는 상상의 정원>이 이루어졌다. 임고은 작가의 안내에 따라 바구니를 받아 지하 공간에 내려가면 어둠 속에는 각각 벽을 보고 혼자 앉는 책상 세 개가 있다. 그 위에는 멸종 위기의 동식물에 대한 사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림책이 하나 있고 세 명의 관객은 혼자 그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남는 존재 몇 개를 작은 종이에 옮겨 적는다. 이 책의 왼쪽 장에는 여러 동식물의 이름과 생김새를 묘사한 그림이 있고, 오른쪽 장에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와 관련한 용어와 설명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왼쪽) 수리부엉이 – (오른쪽) 개발 : 경제 성장의 패러다임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과 사회 속 생명이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학과 경제학은 모두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에서 파생되었으며 두 단어 모두 일종의 집안일을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학이 생태학에 반하여 작동할 때, 그것은 우리의 집인 지구를 잘못 관리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왼쪽) 얼룩새미꾸리-(오른쪽) 넥엔트로피적인 생산 : 지속가능성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 지속가능성은 다양한 문화적 존재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 거주하는 방식에 의해 행해지는 넥엔트로피/엔트로피 과정이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지속가능한 미래의 구축은 우리에게 ‘생명의 넥엔트로피적인 잠재성’을 기반으로 하는 (...) 대안적 세상입니다.”4) 세 명의 관객이 각자 벽을 보고 혼자서 책을 읽고 멸종 위기 동식물의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거기에는 적어도 세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른다. 그리고 이 시간 후, 종이에 멸종 위기 존재들을 적고 나면 작가가 그 종이를 물에 적셔 바구니 안에 넣고 그 위로 야생화 씨앗 한 컵과 진흙을 부어준다. 그 바구니를 들고 위로 올라가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책상 위에서 녹은 종이, 씨앗, 진흙을 뭉쳐 씨앗 폭탄(seed bomb)을 만든다. 이 야생화 씨앗 폭탄은 겨울 내내 보관했다가 봄에 원하는 곳에 던져 틔울 수 있다. 여기에는 멸종 위기 동식물의 기억과 야생의 미래가 함께 있다. 



3. 자연-인류


      “모두 ‘놓친 고래’다.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가 ‘놓친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의견이 ‘놓친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지닌 종교적인 신념의 원칙이 ‘놓친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남의 말을 훔쳐 허세를 부리는 웅변가들에게

      철학자들의 사상이 ‘놓친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 거대한 지구 자체가 ‘놓친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당신, 이 글을 읽는 당신, 그대 또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허먼 멜빌 <모비-딕, 혹은 고래>(1851) 중에서5)



   <아키펠라고 맵> 연작이 마지막 워크숍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내듯 해당 작업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곳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대립 관계 혹은 이항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관계로 다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임고은 작가의 작업은 끊임없이 인간과 자연은 같은 과거를 공유했다는 기억을 회복시키면서 언젠가는 같은 미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데, 거기에 균열을 내는 것이 있다면 ‘자본’과 프런티어의 논리이다. 퍼포먼스 중 고래에 대해서 ‘오히려 석유가 고래를 살렸다’는 말은 석유 이전에 고래가 어떻게 자원으로 착취되어왔는지를 의미하는 문장이며, 그 이후 석유가 다시 공해로 고래를 어떻게 죽여왔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또 다른 프런티어의 논리로 연결된다. 여기서 자연-인간은 자본주의와 환경오염의 복잡한 논리 속에서 같은 기원을 잊고 이항 대립 속에 위치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영상 작업, 설치 작업, 그리고 워크숍에서 이어지면서 확장되듯 자연과 인간의 시공간은 애초에 다른 곳에 다른 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물처럼 이어진 ‘연결’을 공유하고 있어왔다. 여기서 새로운 뿌리의 모양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새로운 뿌리는 기후 위기와 인종주의를 ‘자본’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질문해보는 것, 그 후에 자연과 인간을 새로운 관계로 그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 참고할 만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제이슨 무어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세계생태론이다. 그 배경에는 기후 위기에 대한 인류세라는 용어의 등장이 있다. 2002년 <인류의 지질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화학자 파울 크리천은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구분으로서 ‘인류세(Anthropocene)’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인간의 활동이 온실가스 배출, 산림벌채, 핵실험 등의 형태로 자연환경을 크게 변화시켜, 지구 곳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그것이 기후 변화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6) 인류가 ‘지구’로 대변되는 ‘자연’에 발자국을 남겼고, 그 흔적들로 인해 ‘자연이 인류에게 복수’하고 있다는 은유가 ‘인류세’라는 용어 안에는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와 자연 사이의 이러한 도식이 오늘날의 위기를 잘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세계생태론의 관점이다. 제이슨 W. 무어는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는 오래된 개념,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자연과 인류의 오래된 도식에 관해 문제 제기한다. 인류세라는 용어 안에서 자연은 비역사적이고 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는 ‘자본세’라는 용어로 기존에 그려진 자연/인류의 도식을 지우고 새로운 상상을 제안한다.

   무어에 따르면 오늘날의 가장 큰 두 가지 위기인 기후변화와 부의 불평등 문제가 모두 자본 축적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우리 시대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로 불려야 한다. 자연을 통한 자본주의의 운동,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한 자연의 운동이라는 이중 운동을 ‘이중 내부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운동은 자연과 사회의 이항적 구조를 해체한다. 경제와 환경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자본주의는 경제적 체계, 사회적 체계가 아닌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자연을 외부적인 것으로 상상하는 관점이 기본 조건이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착상, 즉 자연은 사회의 외부에 있고,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위해 코드화되고 수량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때의 자본주의는 일종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로서의 자본주의가 “외부적이고 제어 가능하며 환원될 수 있는”(Moore, 2015/2020, 20) 자연으로서 ‘대문자 자연’을 구성할 때, 역사적 과정 안에서 “생명의 그물은 자본주의 과정의 생물학적 조건과 지질학적 조건을 정돈하느라고 바쁘다”(Moore, 2015/2020, 20). 대문자 자연이 인간과의 관계에 바깥에 순수한 형태로 있는 관념으로 자연은 우리 바깥에 있고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이 우리에게 복수한다는 감각을 낳는다면, 여기서 ‘생명의 그물’이 의미하는 것은 ‘소문자 자연’으로, 자연은 우리이고 우리 내부이고 또 우리 주변이다. 인간은 환경을 형성하고 환경은 인간을 형성한다. 무어는 이러한 관계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전체론에 기반하여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계생태론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세계생태론적인 관점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자본과 권력과 자연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로서 세계생태를 구성한다(Moore, 2015/2020).

   사회/자연이라는 데카르트적 이항 구도는 근대성의 특성으로서 자본주의를 뒷받침해왔고, 여기서 자연은 자본과 인간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자원의 원천으로서 ‘수도꼭지’와 쓰레기 처리장으로서 ‘개수대’ 역할을 한다”(Moore, 2015/2020, 65)고 여겨졌다. 이때 자연은 근대 문명으로서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자기 재생산 비용을 외부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사회/자연이라는 오래된 데카르트적 이항 구조의 세계관을 넘어서기 위해 무어는 용어를 엄밀하게 사용하고 새로운 언어 사용 안에 새로운 상상의 형태를 기입한다. 예를 들면, 이항적 실재 구조를 반영하는 접속사 ‘및’과 ‘사이’의 자리를 변증법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전치사 ‘속’과 ‘통해서’로 대체한다. 따라서 ‘자연 및 인류’는 ‘자연(인류)-속-인류(자연)’이 되고. ‘자연과 자본주의 사이의 운동’은 ‘자연(자본주의)을 통한 자본주의(자연)의 운동’이 된다. 이 표현들 속에서 각각의 존재는 대문자로서 실체의 존재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만드는, 과정의 존재이다(Moore, 2015/2020).

   무어는 이항적 구조가 근대 세계의 거대한 불평등과 억압, 불평등에 직접 기능한다는 이유로 이 구조를 통한 사고를 지양하면서, 자연(인류)-속-인류(자연)의 다양한 배치를 공동생산하는 관계들의 ‘다발적 역사적 전개’에 주목한다. 이 관계가 앞서 말한 오이케이오스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실제의 역사 안에서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 비인간 자연과 인간을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생명의 그물과 자연이 모두, 이미 연결되어 있다.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을 모두 아우르는 변증법적 통일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세계생태’이며 이때 자연-속-인류, 인류-속-자연이 공동생산한 것으로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 그는 “사회와 자연이라는 근대성의 가장 신성한 대립쌍을 기피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위기-권력과 생산의 체계적 조직의 전환점으로 해석되는 위기-를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의 다발로 이해한다.”(Moore, 2015/2020, 62)7).


      “어떤 일/에너지가 가치가 있음의 조건은 대부분의 일/에너지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Moore, 2015/2020, 310)


   모든 문명은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자본주의는 그 과정에서 가치 체계를 토지생산성에서 노동생산성으로 전환한 사건이다. 그리고 자본 축적은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생겨나는 잉여자본을 확보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크게 자본주의는 자본 축적을 위해 자연(인간)-속-자연(인간)이 행하는 대다수 일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착취당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유상 일, 즉 임금 노동을 받는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자본을 축적하는 ‘유상 일’의 착취는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의 ‘무상 일’의 전유를 동반한다. 자본주의는 무상 일을 전유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재생산 비용을 외부화하고, 임금노동을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다(Moore, 2015/2020).

   따라서 자본주의의 가치 법칙은 다름 아닌 ‘저렴한 자연의 법칙’이다. 전유의 대상이 되는 무상 일의 원천은 ‘저렴한 자연’ 프런티어인데, 이는 전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구축되며, 무어는 이렇게 구축, 전유되는 자연을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관점을 취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밝히듯, 여성, 자연, 식민지가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의 구체적인 예이고, 자본주의는 이러한 프런티어를 전유하는 가부장제와 개발주의, 제국주의를 동반한다8). 세계생태론적 관점에서, 1450년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된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 과정과 위기의 해소 과정은 자본주의가 미상품화된 ‘저렴한 자연’ 프런티어를 소진하고 새로 구축하는 과정과 맞물려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다름 아닌 세계생태적 프로젝트다(Moore, 2015/2020).

   세계생태론은 인간의 뿌리가 비인간의 뿌리와 닿아 있는, 각각의 뿌리들이 서로 촘촘히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모양을 상상하게 한다. 다만, 무어가 ‘-속’과 ‘통해서-’라는 표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인간과 자연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각각의 위치성에 대한 사유까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기후 위기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의 ‘프런티어’ 논리에 따라 머지않은 곳에 있다고 할 때 각각의 문제에서 가해는 무엇이고 피해는 무엇인지를 꼼꼼히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조엘이라는 정원지기가 정원 소유자들도 아니고 정원의 동식물도 아닌 상태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죽임당하고 또다시 새로운 해를 꿈꾸며 동식물과 살아가는지, 그 중간자적 위치는 프런티어의 논리를 가시화하는 데에 유의미하다. 인간이 자연 ‘-속’에 있으면서 가해자가 아닐 수 있는 그 위치에서, 인간은 정원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정원과 함께 하는 ‘정원지기’라는 그 위치성은 무엇일까? 여기서 저렴한 자연 논리는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원지기가 자본주의의 착취 논리 속에서 자연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인간 안에서의 다른 위치들이 섬세히 드러나고, 이때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은 무어의 논의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해체될 수 있다.

 


4. 새로운 지도


      “메르카토르도법의 북극, 적도, 회귀선, 자오선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종잡이가 외치면 선원들이 대답하곤 했다. 

      “그건 단지 틀에 박힌 기호일 뿐이다!”

      ...

      “그가 우리에게 최고의 해도를 주었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백지!”

- 루이스 캐럴, <스나크 사냥>(1876) 중에서9)



   <아키펠라고 맵> 연작은 주어진 지도에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전시되지만 각각의 작품을 섬#1~섬#5로 명명한다는 점에서 지상 위의 대륙에 대한 지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바다 위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섬에서 섬 사이를 항해하는 셈이다. 동시에 이 지도는 ‘지도’라는 이름을 하고 각각의 섬을 방문하면 도장을 받는 모양새이지만, 펼쳐보면 뒷장은 동서남북만 표시된 백지이고, 앞장은 별자리가 그려진 우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전시는 성좌를 그리는 여정이기도 한 셈이다. 물결치는 바다 위에서의 위치성이라는 것은 무엇일지, 그것을 넘어 진공의 우주 속 나의 위치성, 정체성이라는 것은 무엇일지, 그것의 고정된 의미를 끊임없이 뒤흔들거나 무화시키는 과정이다.

   바다와 우주에서 우리는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바다-우주에서 항해-비행하는 ‘나’의 시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이때 정박되는 기원이란 가능할까? 애초의 뿌리라는 것은 정박해야만 하는 것일까? 여러 질문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우리는 현재-땅에서의 삶, 불변하는 땅 위에서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뿌리내림’만을 믿는가? 이 논의는 바다와 우주에서의 삶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종주의의 문제를 가로지르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제주2공항의 건설을 위해 비자림의 삼나무들이 숱하게 베어질 때, 그 삼나무는 일본에서 건너온 외래종이지만, 그 삼나무는 스스로 걸어온 것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10)은 어떤 종이 외래종으로 ‘취급되고’ 다시 또 착취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삼나무와 외래종은 비인간에만 해당하는 분류법이 아니다. 앞서 무어가 지적한 ‘저렴한 자연’이라는 것이 꼭 자연만 얘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 

   <아키펠라고 맵> 연작에서 배와 바다와 별과 우주, 고래와 인간의 과거, 야생화의 씨앗과 멸종 위기의 동식물들, 그리고 정원지기와 관객인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부유하며 정원 밖과 정원 안,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여기서 공간과 시간의 경계는 끊임없이 전복된다. 워크숍에서 만든 야생화의 씨앗과 멸종 위기의 존재들이 내 손으로 빚어지고 함께 겨울을 나고, 봄으로 이동할 때, 지하의 어두운 극장에서 지상으로 이동할 때, 그리고 그것들이 각각이 던져져서 다른 곳에서 싹을 띄울 때, 그 뿌리는 고정된 곳에 있지 않다. 그 뿌리는 과거의 위기와 미래의 적응 전략을 동시에 품고 있다. 여기서 씨앗은 공간을 이동하며 꿈꿀 뿐 아니라 시간을 가로질러 ‘뿌리내린다’.

   제이슨 무어의 논의가 경계를 넘어 연결되는 뿌리의 형태를 상상하게 한다면 소니아 샤가 <인류, 이주, 생존>에서 이주를 재해석하는 관점은 경계를 넘나들며 뿌리내리는, 이를테면 ‘이동하는 뿌리’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이주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의 오랜 적응의 방법이자 ‘숨쉬기 만큼이나 필수적인 생물학적 원칙’이며, 이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그를 통한 이주민, 외래종 등에 대한 차별적 태도마저도 역사적으로 프론티어 논리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소니아 샤는 18세기 유럽의 탐험가들이 새로운 인류와 접촉할 때, 이질성을 기반으로 한 인종주의의 논리를 만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 과학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동일한 기원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와 함께 과거와 미래의 이주 가능성은 신빙성을 잃었다”(Shah, 2020/2021, 93).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한 근대과학은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하며 프런티어 착취에 가담한다. 이러한 논리가 굳건해지면서, 신체적, 문화적으로 이주하는 인종은 ‘순수하지 않은’, ‘열등한’, ‘오염된’ 인종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니아 샤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 사회의 다양한 예들을 통해 제시하듯 이동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본성이며, 위기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며 또 나은 세상으로의 기회이다. 특히나 거대한 기후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이주와 이동은 특수한 자연과 인류의 이야기가 아니며 더욱 더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이동하는 뿌리’에 대한 상상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늘 이동을 꿈꾼다”(Shah, 2020/2021, 11).


1) 이 글은 2021 옵/신 페스티벌에서의 전시를 바탕으로 한다. 2021년 10월 29일부터 2021년 12월 1일까지 시간과 장소의 간격을 두고 퍼포먼스, 영상 작업, 설치 작업, 워크숍을 따로 신청해서 관람 및 참여해야 하는     형태였다.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는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모래-정원 3부작>은 문화비축기지 T2 실내공연장, <모래알 속 정원들>은 문화비축기지 야외극장, <실재하는 두꺼비가 사는 상상의 정원>은     옵/신 스페이스에서 진행되었다. 다만, 많은 전시가 그렇고 특히 설치 작업의 경우 매우 장소 특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전시 공간과 시간에 따라 매우 다른 관람 경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해당 작품       의 관람/참여 경험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2) 아키펠라고 맵 가이드(도장을 찍는 지도)에 적힌 작품 설명 중
3) 아키펠라고 맵 가이드 중
4) 해당 책은 의 텍스트를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한다.
5)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 관람 후에 받은 쪽지에 적힌 글 재인용
6) Paul Crutzen, “Geology of Mankind”, Nature, volume 415, 2002, 23p
7) 이러한 맥락에서 무어는 인터뷰에서 인류세라는 개념이 지닌 폭력성에 대해 지적한다(https://jasonwmoore.com/). “저는 인류세가 자본가들에 의해 초래된 문제가 인류 전체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오래된 부르주     아 수법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지 매우 우려합니다. 그것은 일련의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인류 전체의 책임으로 제시하는 대단히 인종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이며 가부장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인류세가 보기에,     깊은 철학적 층위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합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그것은 당신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개념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미합중국에서 인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말     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웃음을 받고서 무대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세 관념이 빠져나가는 것의 일부는 ‘자연’/‘사회’ 이원론입니다.”
8)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김상민 《문화과학》 97호, 2019, 162~173쪽
9) 임고은, 아키펠라고 맵 중 인용된 부분
10) 김성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섬이 없는 지도>(2021) 중


참고문헌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김상민, 문화과학 97호, 2019, 162~173쪽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손덕수·이난아, 창비, 2020

소니아 샤, 『인류, 이주, 생존』, 성원, 메디치미디어, 2021

시몬 베유, 『뿌리내림: 인간에 대한 의무 선언의 서곡』, 이세진, 이제이북스, 2013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갈무리, 2020

Paul Crutzen, “Geology of Mankind”, Nature, volume 415, 2002, 23p

제이슨 W. 무어: 인터뷰-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사물의 풍경 (29 March, 2020). (https://jasonwmoo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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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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