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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 작성일 2023-09-15
  • 조회수 492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선주원


   1) 기억하기를 통한 슬픔과 애도 


   우리의 삶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 모두 슬픔이라는 고통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서도 안 되는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괜찮은 척, 센 척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언제나 우리를 적시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곳곳에서 배어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서 기원하는 슬픔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동반하면서, 우리를 홀로 섬에 있게 한다. 홀로 섬에 남겨진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 즉 외로움에 치 떠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툴고 어색한 채 어떻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생겨나는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누군가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데서 오는 슬픔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의 실체를 깨달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를 통해 슬픔의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말을 걸면서 그저 순정하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짐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홀로 미쳐가거나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애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슬픔에 젖거나 세상과의 단절을 도모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작용하지 못한 채 과도한 기억을 낳는다. 과도한 기억은 혼자만의 섬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부추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슬픔의 고통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을 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양상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사랑하던 연인 ‘구’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담’이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과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과잉,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건으로 값이 매겨지는 삶을 살아갔던 ‘구’의 고통, ‘구’의 죽음 뒤에 작용하는 ‘담’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었던 ‘구’를 증명하는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아울러 너무나도 사랑한 존재였던 ‘구’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구’를 먹는 ‘담’의 식인 행위를 통해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자 인물 ‘구’와 여자 인물 ‘담’의 너무나 아픈 사랑 이야기를 ‘구’의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구’와 ‘담’의 서술을 교차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구와 담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항상 함께했었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이모와 함께 살았던 담,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부모 때문에 철들었을 때부터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구는 슈퍼를 운영하는 부모님이 사채 빚을 쓰고 갚지 못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해 이자를 갚아야 했다. 그러다 구는 도망치듯 군대에 갔고, 제대 후에 공장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다가 구을 안쓰럽게 생각하던 30대 누나를 만나 잠시 동거를 하기도 했다.

   담은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살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구니였던 이모와 단 둘이 살며 그녀의 사랑을 받았다. 이런 담은 구의 구부러진 등을 통해 세상의 힘겨움을 깨닫는다. 그러다 구가 자신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와도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사랑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담과 함께 살던 이모마저 갑작스럽게 죽자 구와 담은 진정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구와 담은 자신들이 정을 주었던 노마의 죽음, 구에게 유일한 어른이자 담이 사랑하던 이모의 죽음 등을 겪으며 상실의 슬픔을 겪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해도, 함께하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는 부모님이 물려 준 빚을 감당하기 위해 온갖 일을 해야 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고, 구와 담은 사채업자들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떠돎의 끝은 구의 죽음이었고 구는 우주의 세계로 향했다.

   담은 길바닥에 죽어 있는 구의 옆에 앉아 구에게 말을 걸지만 구는 말이 없었다. 담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죽은 구를 택시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를 깨끗하게 씻기고 죽은 그의 몸을 손발톱부터 성기까지 야금야금,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 담이 이렇게 한 것은 구를 쫓는 사람들에게 구를 내어줄 수 없으며 살아서도 보호받지 못했던 구를 죽어서라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담은 자신이 최대한 오래도록 살아남아 자신의 몸속에 있는 구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담이 구의 시체를 먹는 식인 행위는 통상적인 세상의 잣대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담은 살아서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구가 죽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담은 자신의 몸 안에 구를 넣음으로써 구가 이 세상에 살았었음을, 존재했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런 담의 노력은 구에 대한 그의 절절하고도 슬픈 사랑, 그리고 구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구를 넣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담의 행위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넘어서서,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불행할지라도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괜찮으며, 그러한 괜찮음을 통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삶과 사랑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담의 이런 행위는 혼자만의 섬에서 구와의 과거에 집착하는 기억의 과잉 결과이며, 그에 따라 담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담에게 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슬픔은 구의 죽음 자체보다도 더 힘겨운 고투였기 때문이다. 그런 고투 속에 담은 구의 삶이 거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결코 그 존재가 부정될 만큼의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담이 죽음 때문에 구의 존재성이 부정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여기에 마침 네가 있어 이제야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설레고도 기뻐하는 마음이.(최진영, 2015:27)”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기뻐하는 마음은 담에게는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최진영, 2015:30)”이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였던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과 부재는 엄청난 슬픔의 무게를 남긴다. 그 무게를 견디면서 사랑하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슬픔의 차원이 아닌 고통의 차원에서 비통함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자신이 ‘구’를 따라 죽는 것은 것은 ‘가장 좋지 않은 방법’임을 인식한다. 살아 있던 ‘구’도 구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죽은 ‘구’를 감추어 그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담’은 “나는 너를 먹을 거야.”(최진영, 2015:20)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담’은 자신과 ‘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최진영, 2015:20)라는 다짐을 되새긴다. 아울러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날에야 비로소 ‘구’의 존재도 없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담’의 말하기는 비통함 속에서도 ‘구’의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구’의 죽음조차도 값으로 매기려는 사채업자들로부터 ‘구’를 지키기 위한 처절함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구’를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구’가 자신을 따라 죽게 만들어야 함을,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구’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함을 깨닫는다. ‘담’의 이런 깨달음은 ‘구’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을 넘어서서, ‘구’의 죽음에 대한 정직한 대면을 통한 애도의 과정과 관련된다. 

   ‘담’의 이런 애도 과정은 ‘구’의 죽음에 대해 어떤 애도도 표하지 않는 ‘괴물’ 같은 사람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표상한다. ‘담’이 이런 적개심을 갖게 된 것은 ‘괴물’ 같은 사채업자들이 ‘구’의 삶을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냐고, 답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도 구를 찾고 있을 자들이 구의 죽음을 안다면, 분명 구의 몸을 팔려고 할 것이다. 구의 몸을 당당히 가져가서 닭고기 팔 듯 팔 것이다.”(최진영, 2015:37~38)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담’은 ‘구’가 죽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다. 이러한 견딜 수 없음은 괴물 같은 사람들이 “구를 미친 듯 찾게 만들고, 찾지 못하여 미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담’을 끌고 간다. 그렇기 때문에 ‘담’에게 ‘구’는 살아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사망신고를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담’이 이런 생각과 인식을 하게 된 것은 비록 슬픔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구’의 몸이지만, ‘구’의 몸이 자신의 눈앞에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만지고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담’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살아서 사람대접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구’의 날들을 생각한다. 그런 생각 속에 ‘담’은 ‘구’의 부재로 인한 슬픔의 무거움을 참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참아야 하고 짊어져야 할 무거움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 슬픔의 무거움 속에 ‘담’이 선택한 것은 자기 방식의 애도, 즉 ‘구’의 몸을 먹어서 영원히 ‘구’가 자신의 몸에서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구’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감당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코, 결코 ‘구’를 잊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담’은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는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최진영, 2015:80~81) ‘구’를 뜯어 먹으면서 절반쯤 미쳐가면서도 ‘담’은 지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슬픔의 무게에 젖어 있다. 그 무게에 젖은 채 ‘담’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어 부재하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담’의 이야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던 ‘이모의 마지막 눈빛’이 있고, “할아버지도 이모도 죽고 이제 구마저 없고, 나만 살아 있”(최진영, 2015:124)는 시간이 있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담’은 자신만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매일 생각하면서, 자기연민을 다스린다. ‘담’의 자기연민은 혼자만 더러운 넝마장에 남겨진 삶의 의미와 사랑했던 존재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기에 ‘담’은 죽은 존재들이 자신을 먼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담’의 감정은 삶의 의미를 기억하기로 인식하는 데서 생겨난 것으로, 망각 속에서도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일지라도 기억되어 존재가 증명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구’의 몸을 뜯어먹는 애도하기를 통해 ‘구’의 존재성을 증명하고 ‘구’를 기억하고자 한다. 또한 이모처럼 이미 죽은 자들도 “내가 일단 잘 가라고는 하는데, 그러는데, 그래도 아주 가지는 마. 쉬엄쉬엄 가, 자주 돌아봐. 여긴 너무 흉하잖아. 이모도 잘 알잖아. 이모가 나를 먼저 잊으면 안 돼. 가는 건 이모가 먼저 했으니까 잊는 건 내가 먼저 할 거야. 그 정도는 괜찮잖아.”(최진영, 2015:140)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하기를 하면서도 ‘담’은 ‘구’에 대한 자신의 애도하기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한다. ‘구’의 몸을 뜯어 먹는 자신이 사람일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담’은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담’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의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정상이며 미개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아울러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최진영, 2015:164)가는 세상의 미개함을 비판한다. ‘담’이 사랑했던 노마, 이모, 구 등의 죽음은 돈이 없어서 죽은 것으로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담’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무게를 홀로 감당할 수 없다. ‘담’은 슬픔의 무게에 짓눌린 채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최진영, 2015:163~165)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담’의 이런 생각은 자기연민과 슬픔에 도취됨을 드러낸다. 그러나 ‘담’의 이런 자기연민과 슬픔에 도취됨은 결코 주저앉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담’은 자기 방식의 애도하기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러한 사람들이 없이 살아야 하는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러한 말하기를 통해 ‘담’은 ‘구’와 노마와 이모를,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자신의 시간들에 대한 애도를 완성한다. 아울러 그렇게 완성된 애도하기를 통해 ‘담’은 살아남아야 할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만들어질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서는 ‘담’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만이 ‘담’이 원하는 것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2) 타자의 기억하기를 통해 드러나는 지극한 사랑


   ‘담’에 대한 ‘구’의 사랑 이야기는 ‘담’의 기억하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담’에 대한 ‘구’의 사랑은 삶 혹은 세상 그 자체의 의미를 표상한 것이었다. ‘구’는 “희망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 때문에 생겨난 빚을 죽어라고 갚아감에도 불구하고 사채 업자들의 노예가 된 희망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구’가 “살게 하는 힘은 사랑하는 존재였던 담이었다. 구에게 희망은 담이었고, 구의 미래는 담이고 미래는 희망이었으니까.”(최진영, 2015:143) 

   ‘구’의 세상에서 “몸뚱이…… 몸은 인격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고기, 사람이라는 물건, 사람이라는 도구.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영혼 값은 달랐다. 돈 없는 자의 영혼을 깎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없으므로 깎이고 깍인 그것을 채우기 위해 돈에 매달리고, 매달리다 보면 더욱 깎이고…… 뭔가 이상하지만, 그랬다.”(최진영, 2015:144) 그런 세상에서 ‘구’에게 남은 희망은 오로지 ‘담’이었고, ‘담’은 사랑이자 희망 그 자체였다. 사채업자들의 “계산대로라면 평생 돈을 벌어 그들에게 줘야 했다. 노예가 된 것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최진영, 2015:144~145)기 때문이다. ‘구’는 그런 세상에서 살다가 죽었지만, ‘담’의 기억하기와 애도하기를 통해 ‘담’에 대한 ‘구’의 지독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담’에게 남아 있고 ‘담’을 향한 마음은 여전히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의 마음은 ‘담’에게 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는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최진영, 215:63)라고 생각한다. ‘담’에게 닿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구’는 자신과 ‘담’이 함께 만들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담’과는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한다. ‘담’과는 다른 우주에서 ‘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억뿐’이었기 때문이다. ‘담’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 속에 ‘구’는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담’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담’이 있는 곳은 “적막과 공(空)의 세계. 벌판도 바다도 하늘도 아닌…… 그저 공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끝없는 공허……”(최진영, 2015:34)였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구’는 실체 없는 자신을 느끼면서 “눈이 아닌 온몸, 온 마음으로” ‘담’을 본다. 하지만 혼자서 ‘담’을 충분히 느끼고 있어도, ‘담’이 자신의 옆에 있어도, ‘담’이 자신의 세계에 없음을 ‘구’는 인식한다. 이런 ‘구’의 인식은 자신과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있는 ‘담’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만든다. 그러기에 ‘구’와 ‘담’의 “겹치지도 포개지지도 않고 미끄러지는 세계”(최진영, 2015:35)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담’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

   ‘담’이 없는 세상에서 ‘구’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너를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최진영, 2015:173) 바랄 뿐이다. ‘구’가 그런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자신과 ‘담’이 몸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 만날 수 있을는지, 다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될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중요한 것은 이승에서 자신과 ‘담’이 만들었던 지독한 사랑의 기억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구’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최진영, 2015:173) 하기를 바랄 뿐이다.

   ‘구’가 이런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이승에서 ‘담’과 함께 만들었던 사랑의 시간들과 이야기들은 희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구’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최진영, 2015:166~167)기 때문이다. ‘구’에게 ‘담’과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들은 삶이었고, ‘담’이 없는 세상은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구’는 ‘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담’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자책한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처음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 지난날 모두,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이 널 괴롭혔고, 괴롭히고 있”(최진영, 2015:170)었다고 자책한다.  이런 자책 속에 죽은 ‘구’는 ‘담’이 자신에 대한 애도를 끝내고서 현재를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랑이란 살아서의 일이고, 죽은 뒤에는 알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살아서의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담’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안이 아닌 밖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일이란 그저 ‘담’의 곁에서 담을 지켜볼 뿐이고, ‘담’이 살아야 자신도 살아가는 ‘담’을 지켜보면서 살아서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에 대한 ‘구’의 사랑은 죽음 때문에 직접 말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담’의 기억하기와 애도하기를 통해 드러난다. ‘구’와 ‘담’의 우주가 아주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결코 사그라들거나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음마저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하고, 언제나 ‘구’만을 생각하는 ‘담’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담’은 아주 오랫동안 살고 살아야 한다. “담이 아주 오랫동안 살고 살아 죽은 후에도,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고요와 암흑 속에서 구는 담이 자신과 함께하기를 소망”(최진영, 2015:7)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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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8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 관리자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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