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 작성일 2023-09-15
  • 조회수 560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야 했는데, 그러한 노력은 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진구가 아닌 형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형민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고, 그러한 책임의 감당 속에 스스로 자신에 대한 윤리적인 평가를 해야 했다.

   형민은 아버지 없이 술집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민의 어머니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그 보상금을 차린 술집”(윤성희, 2019:11)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형민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게에 오는 것을 싫어했고, 그는 빈집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그러다 형민은 어머니의 술집에 들른 김피디의 눈에 띄어 드라마에 출연해 진구가 되었다. 진구가 되었을 때 형민은 아홉 살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어린 초등학교 1학년 진구가 되어 드라마에서 어린 동생을 늘 업어야 했던 늘 힘들었다. 업어야 했던 동생 민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 민지를 죽을 걸로 처리해서 민지가 드라마에서 하차했을 때, 형민은 촬영장에 가기가 싫어졌고 드라마에 흥미를 잃었다.

   그 후 삼십팔 년이 흐른 뒤 대담에 출연한 형민은 43세가 된 민지, 즉 정민지를 화면으로 만난다. 민지는 열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결혼한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삼년 전에 캐나다로 옮겨왔다. 그런 민지를 화면으로 만난 형민은 자신이 어린 민지의 목소리를 듣던 것을 좋아했음을 알고서 화면으로 민지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 역할을 하던 때 할아버지 역할을 했던 배우에 대한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배우가 폐암으로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 갔던 때를 회상한다.

   그러한 회상을 통해 형민은 잊고 있던 기억들이 혹은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가득 소환됨을 경험한다. 이를 통해 형민은 과거를 소환하는 기억들이 상당히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의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식한다. 아울러 과거의 사건 경험들에 기억 중 많은 것들이 진구의 것인지 형민의 것인이 헷갈린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일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구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새로 산 운동화를 이불 속에 넣고 잠을 자던 기억, (중략). 이 모든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진구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애써 맞춘 퍼즐조각이 흩트려진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전학생의 발을 밟은 것도, 꿈속에서 발을 밟고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도 가짜였을까?(윤성희, 2019:69~70)


   이처럼 형민의 기억이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진구로서의 정체성과 형민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는 조형적 힘으로써 망각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망각의 과정을 제대로 거칠 수 없었던 것은 진구로서의 삶과 형민으로서의 삶이 혼재되는 십 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진구로서의 삶과 형민으로서의 삶이 혼재되는 십 대에 형민은 진구로서의 삶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 이후 왜 드라마를 찍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망설이다가 자신은 “드라마를 찍지 않은 게 아니라 찍지 못했어요. 더 이상 기회가 없었거든요.”(윤성희, 2019:26)라고 말한다. 그가 기회를 못 받은 것은 건방지고 배다 불렀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방송국에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었고 연속극도 컬러로 방영되자, 드라마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모두 생기가 있었다. 그 생기는 형민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형민은 실제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형민은 “방송국에서 필요한 것은 형민이라는 아이가 아니라 진구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윤성희, 2019:27)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도 아무도 형민을 형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또한 형민은 자신이 배역을 맡았던 진구의 성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은 형민이 드라마에 그저 소모품처럼 쓰여졌을 뿐, 그가 갖고 있던 형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시당했음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형민으로서 자신이 고유하게 갖는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 자체의 혼란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혼란은 형민이 드라마에서 성도 없이 그냥 진구라고 불렸던 상황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상황을 뒤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에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살았던 시절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형민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성찰하면서 점차 답을 찾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박진구라는 이름을 가진 담임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그냥 형민이 아니라 박형민”이라고 답을 한다. 이런 대답은 그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든다. 그러한 노력은 형민이 어머니 몰래 영화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형민은 “사람들이 자신을 진구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막상 아무도 진구라고 부르지 않게 되자 단짝 친구에게 절교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진구가 되는 것은 싫었지만 진구가 잊히는 것은 무서웠다. 그는 당황스러웠다.”(윤성희, 2019:32~33)

   형민이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한 진구로서의 삶에 대한 양가감정을 갖게 된 것은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리었던 것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진구로 불리지 않게 되어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구로서의 삶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형민은 오랫동안 형민으로서 가져야 할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형민으로서 사는 동안에도 항상 진구로서 ‘기특한 아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학교 복도를 걸을 때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혼자 저녁밥을 먹을 때, 그는 뒤통수 뒤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나를 몰래 엿보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생각했다. 혹시, 진구는 아닐까 하고. 그가 오디션을 보러 다닌 것은 그래서였다. 어린 진구가 아직도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윤성희, 2019:36)


   어린 진구가 아직도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에 대한 인식 속에 언제나, 어디에나 진구의 시선이 느껴지는 형민의 삶은 그가 자기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야기했다. 그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형민은 자신이 진구가 아닌 형민으로서 가져야 할 자기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해야 함을 인식한다. 그 과정에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가 아닌 형민이며, 자신의 행위는 형민으로서의 행위임을 인식한다.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 형민은 다른 사람의 개입이 필연적인 삶의 과정에서 진구가 되었던 형민이 되었던, 자신이 경험한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삶의 경험과 감정, 사고, 사건 등을 일관성 있는 하나의 서사로 종합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진구로 살았던 과거의 삶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형민에게 “진구는 동구국민학교에 다녔고, 1학년 1반이었고, 3번이었고, 반장이었다. 그리고 딱지왕이기도 했다고. 다시는 의젓한 아이라거나 기특한 아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윤성희, 2019:62) 의젓한 아이거나 기특한 아이가 아닌 그 나이 때의 보편적인 아이로서의 진구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진구면 어떻고 또 형민이면 어때요.”(윤성희, 2019:80)라고,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인 진구로서의 삶과 형민으로서의 삶을 모두 받아드린다. 이처럼 진구로서의 삶과 형민으로서의 삶을 통합시켜 자신의 일관성 있는 삶의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형민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의 삶을 종합하여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삶의 내력을 정체성과 관련짓고,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다. 이런 답을 찾아가면서 형민은 현재의 자신을 과거의 진구가 칭찬해 주기를 바란다. 그 칭찬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모두 수용하면서, 그것들을 종합하여 삶의 내력을 계속 만들어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형민이 자기 이해와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 애도하기


   이 소설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리고 기억도 잘 나지 않은 과거의 시간과 경험들에 대한 회상과 평가를 통해, 과거의 회상에서 생겨나는 애착 대상의 상실에 대한 형민의 애도하기를 적실하게 표상한다. 특히 아주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실감과 슬픔의 애도하기가 표상되어 있다. 그 애도하기는 달리기를 드러난다.

   주인공 형민은 자신이 삶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를 애착 대상이었던 아내, 딸 등이 자신을 완전히 떠나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고, 그 자책을 형민은 달리기로 풀어간다.


      아내의 좋은 점을 떠올리기보다 흉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친 뒤에도, 딸을 캐나다에 사는 처제에게 떠나보낸 뒤에도, 그는 편의점에서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혼잣말로 아내의 흉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내의 흉을 볼수록 아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그 사실만 선명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 그 사실만 선명해졌다.(윤성희, 2019:48)


   이혼한 아내와 가끔 만나 술을 먹고 지내던 어느 날, 형민은 여느 때처럼 “그날 형민과 아내는 막걸리 세 병과 녹두전 두장을 먹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윤성희, 2019:176~177) 결국 아내가 죽자 형민은 자신이 아내에게 얼마나 형편없던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죽은 아내 때문에 딸 마저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지를 후회한다. 아울러 아내가 생전에 자신이 긴장하면 말없이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토닥여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말없이 달래 주었음을 뒤늦게 인식한다. 그러나 형민에게 아내는 완전히 상실되어 회복될 수 없는 애착 대상일 뿐이다. 이 때문에 형민은 근본적인 슬픔과 우울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 그는 멈추었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단어도 아내를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내를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는 슬퍼졌다. 아내를 전혀 모르고 사랑했고, 아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떠나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윤성희, 2019:49)


   어떤 단어로도 아내를 설명할 수 없고, 아내를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속에 형민은 완전히 상실된 애착 대상에 대한 애도하기를 쉽게 하지 못한다. 아내를 전혀 모르고 사랑했고, 전혀 모르는 상태로 떠나보냈다는 자책감이 애도하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그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형민은 “늘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윤성희, 2019:56) 그의 이런 인식은 “중간이라는 말 앞에 붙은 ‘어’자는 무엇인가. 어중간, 어정쩡, 어수룩…… 어로 시작되는 말들을 찾아보다가 그 모든 단어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윤성희, 2019:85~86)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민은 아내가 죽고, 딸을 떠나보낸 후에야 자신처럼 상실감으로 슬픔과 우울을 겪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형민은 타자 지향의 윤리를 갖게 된다.


      사회자의 말을 듣자 형민은 시청률이 1퍼센트를 겨우 넘는 이 프로그램에 나온 것이 자신의 현재와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지상파 방송국에서 메인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심야방송의 프로그램 하나를 겨우 맡은 그런 사회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녹화를 끝내면 사회자와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윤성희, 2019:81~82)


   한때는 메인 프로그램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심야방송의 프로그램 하나를 겨우 많은 사회자는 ‘잘 나가던 한때’를 그리워하는 애착 대상의 상실 상태에 있다. 그런 사회자에 대한 타자 지향의 윤리를 가졌기 때문에 형민은 “녹화를 끝내면 사회자와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 지향의 윤리를 통해 형민은 어머니에 대한 이해도 확장한다.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이지만, 뒤늦게라도 자신 때문에 힘들었을 어머니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이 서툰 행동을 할 때마다 주변에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중략) 모든 것은 술을 따라줄 아버지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실수들이 용서가 되었다. 그가 자기연민에 빠져 지내는 동안 그는 어머니가 얼마나 지쳤는지, 얼마나 외로움이 깊어졌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윤성희, 2019:99~100)


   형민이 어머니의 힘듦과 외로움을 깨달을 때, 그것은 이미 늦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형민은 아내, 딸, 어머니 등에 대한 후회와 자책을 하지만, 그것은 모두 이미 늦었다. 그들은 형민의 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상실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착 대상의 상실에서 형민의 근본적인 슬픔과 우울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은 “뒤통수가 뜨거워지자 한없이 쓸쓸해졌다. 외롭다. 형민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불쑥 떠올랐다. 그 단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단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윤성희, 2019:126) 그런 외로움 속에 형민은 상실된 애착 대상들과의 과거 시간을 회상하면서 애도하기를 수행한다. 형민의 애도하기는 아내나 딸과 함께했던 공간들을 일부러 찾아가거나 그곳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과거의 시간들을 들추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형민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지금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시간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런 과정을 통해 형민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과거의 행복했었던 때를 곱씹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민의 애도하기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형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내나 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 속에 뛰는 것이다.


      형민은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공원을 뛰었다. 아이가 멀리서 뛰어오는 자신을 보며 아빠, 하고 말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몇년이 지난 뒤, 형민은 뛰었다. 저 멀리 딸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저 멀리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윤성희, 2019:228)


   아내나 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환상 속에서 뛰는 행동으로 슬픔과 우울을 애도하던 형민은 과거 시간, 즉 애착 대상이었던 아내, 딸, 어머니 등과의 시간을 첫 번째 삶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이런 생각은 홀로 남겨진 그의 현재 삶이 괜찮았던, 행복했었던, 즐거웠던 첫 번째 삶의 흔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그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문패를 발견했다.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나무가 꽤 커서 감이 열리면 근사할 것 같았다.(중략) 어머니는 늘 같은 시간에 아침밥을 지었고, 그래서 그는 압력밥솥에서 증기 빠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밥 짓는 소리가 그에게는 자명종이었다. 세수를 하고 나오면 어머니는 그의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착한 아들, 벌써 일어났어.” 그때를 생각하자 그는 지금이 두 번째 삶처럼 느껴졌다. 기억에서 지워진 첫 번째 삶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았다. 첫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박형민은 잘 해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며 그는 천천히 문패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보았다.(윤성희, 2019:307~308)


   기억에서 지워진 첫 번째 삶의 흔적을 끄집어냄으로써 형민은 애착 대상이었던 아내, 딸, 어머니 등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과 우울을 조금이나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힘은 과거의 시간들을 첫 번째 삶의 시간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첫 번째 삶을 자신이 잘해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인식에서 온다. 그리고 이 인식은 형민이 힘들지만 조금씩 상실된 대상들에 대한 애도하기를 통해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시간들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


추천 콘텐츠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lsqu

  • 관리자
  • 2023-11-08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 관리자
  • 2023-11-08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선주원 1) 기억하기를 통한 슬픔과 애도 우리의 삶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 모두 슬픔이라는 고통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서도 안 되는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괜찮은 척, 센 척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언제나 우리를 적시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곳곳에서 배어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서 기원하는 슬픔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동반하면서, 우리를 홀로 섬에 있게 한다. 홀로 섬에 남겨진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 즉 외로움에 치 떠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툴고 어색한 채 어떻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생겨나는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누군가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데서 오는 슬픔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의 실체를 깨달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를 통해 슬픔의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말을 걸면서 그저 순정하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짐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홀로 미쳐가거나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애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슬픔에 젖거나 세상과의 단절을 도모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작용하지 못한 채 과도한 기억을 낳는다. 과도한 기억은 혼자만의 섬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부추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슬픔의 고통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을 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양상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사랑하던 연인 ‘구’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담’이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과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과잉,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건으로 값이 매겨지는 삶을 살아갔던 ‘구’의 고통, ‘구’의 죽음 뒤에 작용하는 ‘담’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었던 ‘구’를 증명하는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아울러 너무나도 사랑한 존재였던 ‘구’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구’를 먹는 ‘담’의 식인 행위를 통해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자 인물 &l

  • 관리자
  • 2023-09-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