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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목소리를 듣기 – 제13회 광주 비엔날레의 감각

  • 작성일 2023-08-18
  • 조회수 600

폐허의 목소리를 듣기 – 제13회 광주 비엔날레의 감각

이하림


1. 들어가며


   지난 4월 말 광주에서의 하루는 나에게 ‘어떤 감각’이라는 말로만 남아 있다. 그날 나는 광주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수서역에서 아침 일찍 SRT를 타고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광주를 목적지로 한 여행은 처음이었는데도 그리 낯설거나 설레지는 않았다. 기차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을뿐더러 다른 도시를 간다는 마음보다는 전시를 보러 간다는 마음이 컸다. 심지어 빠듯한 일정인 탓에 가는 기차에서 노트북으로 급한 일을 처리하고, 비엔날레 전시관에 도착해서도 전시장 맞은편 카페에 들어가 친구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부터 갖고 온 일들을 해치웠다. 친구를 만나 비엔날레 전시관에서 보고 싶었던 작업들만 서둘러 보고 이내 구국군광주병원으로 이동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 동안 비엔날레 본관, 구국군병원, ACC, 광주극장 등 광주 내 여러 장소에서 열리는 전시를 최대한 많이 봐야겠다는 마음이었고, 이번 제13회 광주 비엔날레의 일환으로 구국군병원의 옛터에서 진행되는 <메이투데이> 전시는 코로나19와 공간의 사정으로 사전 예약이 필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계획한 시간에 맞춰 각각의 ‘작품’들 앞에 잘 도착하는 것이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지도에는 광주국군병원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 1028’이라는 도로명 주소를 검색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큰 회사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대로변 중간에 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갑자기 고요해졌다. 골목길 양쪽에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 걸어 들어가니 비엔날레 현수막과 함께 국군병원 옛터의 입구가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감각’이라고 우물대고 있는 ‘어떤 감각’은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곳에서 내게 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정확히는, 귀가 입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그곳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를 비집고 넘어서 내 귀에 닿아오는 작은 소리들이 가득 있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했다. 오래된 폐허와 그 안에 남겨진 녹슨 침상, 군데군데 붙어 있는 낡은 이름표, 부서진 창과 문들, 그리고 그 녹슬고 스러진 틈 사이로 우거진 담쟁이와 온갖 풀들, 울창한 나무들, 그 주변을 맴도는 벌레와 새들은 나에게 잔뜩 소리 내고 있었는데, 나는 내 귀가 들은 것들을 웅성웅성, 재잘재잘, 혹은 슬픔의 말, 애도의 목소리 같은 것으로밖에 포획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내 귀에 닿아오는 것들에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입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고 그럼에도 귀로 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위안 받았다. 이 ‘어떤 감각’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나의 몸과 자리가 ‘귀의 언어와 입의 언어’, ‘죽음의 언어와 살아 있음의 언어’, ‘과거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광주의 언어와 서울의 언어’, ‘인간 아닌 것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그 사이의 경계가 ‘되어 있고’, ‘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어떤’ 감각 안에는 ‘되어 있는 경계’와 ‘되고 있는 경계’ 사이의 마주침 혹은 충돌도 분명히 존재했다. ‘어떤 감각’이 부딪힌 것은 그 어떤 ‘나’도 아닌 2021년 4월 말 광주 구국군병원에 있었던 그날 그곳에서의 구체적인 ‘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 ‘어떤 감각’에서 ‘어떤’이라는 말주변에 얹고, 덧붙이고, 밀어 넣고, 세우고, 눕혀볼 수 있는 말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날의 ‘나’를 그동안 이원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들이 부딪히고 마주치는 ‘경계’로 본다고 할 때, 경계는 분명히 장벽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방법으로서의 경계』1)의 저자 산드로 메자드라(Sandro Mezzadra)와 브렛 닐슨(Brett Neilson)은 “경계가 장벽이면서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은유하면서 경계가 지니는 접촉, 이행, 교류, 혼종화와 같은 ‘다리로서의’ 기능에 집중한다2). 이 글은 경계를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경계의 생산과 재생산에 주목하면서 경계 주변에서 역동하는 주체들을 포착하고, 경계가 지니는 지배의 기능 뿐 아니라 전복의 가능성을 상상해보고자 한다. <방법으로서의 경계>는 ‘경계 없는 세계’라는 것은 ‘이상적인 세계에서나 가능한 규범적인 표현’이며, 오히려 ‘세속적인 세계, 실제 세계’의 전지구화 시대에 증식하고 있는 수많은 경계들과 경계 변이를 둘러싼 투쟁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계는 영토적 경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시공간을 가로질러 내적으로도 공고화되는 것이다(Mezzadra&Neilson, 2013/2021)3). 언제나 접경지대를 구분할 뿐 아니라 연결하기도 하는 ‘경계’라는 관점에서 나의 자리를 사유할 때, 공유와 연대를 상상하고 우리의 ‘공통’을 꿈꿔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4). 이 관점을 참고하면, 경계는 내부와 외부 사이에, 포섭과 배제 사이에 그어진 불안정한 선이면서 동시에 그 주변의 정치적 주체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과 경합을 가시화한다. 여기에서는 주어진 경계 위에서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던 ‘경계 경관’에서의 경계 횡단자들의 주체성을 볼 수 있다. 경계를 계기로 경계 주변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좇으며 자신들의 힘을 증식’하여 정치적 주체가 되고, 경계는 투쟁의 장이 된다(Mezzadra & Neilson, 2013/2021). 그리고 “경계는 정확히 그것이 투쟁의 장으로서 생각되는 한에서 방법”(Mezzadra&Neilson, 2013/2021, 46)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투쟁의 장으로서 ‘나’라는 ‘경계 경관’에서 ‘귀로 들은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서 생기는 ‘번역하기’의 가능성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2. 폐허와 식물과 나

 

      “내가 느낌(feeling)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자명한 것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요소의 한 사례이다. (…) 느낌은 절대적으로 단일하며 부분을 갖지 않는다-분명한 점은 느낌이 다르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따라서 전체가 아닌 그 어떤 부분과도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Perth, 1992 ; Kohn, 2013/2018 재인용)


   내가 구국군병원 옛터에서 ‘느낀’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병원의 모습, 그리고 그 자리에 살고 있던 식물, 그리고 나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군광주병원은 5·18 사적지 23호로 1965년 광주시 서구 화정동에 세워져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약 300여 명들의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도 이곳에 파견된 계염군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07년 국군병원이 함평으로 이전한 후 이 병원은 오랜 세월동안 그저 빈 곳으로 남겨져 있었고, 2018년부터 광주비엔날레커미션 전시를 통해 일반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5·18 사적지 중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얼마 남지 않는 건물이지만 2022년부터는 트라우마 센터로 재건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방문한 올해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의 모습은 구국군병원이 과거의 시간과 사건들을 품은 채로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곳에 주거하고 있는 담쟁이와 온갖 풀들도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다. 콘이 카자 실버만의 말을 인용해서 말했듯, 폐허가 되어버린 병원 건물, 그리고 그곳에 자리 잡은 식물들, 그리고 그곳에 방문한 인간인 나, 우리를 모두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로 인해 서로 연결(Kohn, 2013/2018, 19)되는 것 같았다.

   구국군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리 중 가장 큰 소리는 식물들로부터 나왔다. 빈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풀들, 환풍구, 깨진 창문 사이로 건물을 비집고 들어간 나뭇가지들, 잎사귀들, 그리고 사람보다, 건물보다 한참 컸던 울창한 나무들이 그곳의 주인 같았다. 나무에 앉아 있는 새와 잡초 주변의 풀벌레들이 내는 소리들도 분명히 들렸다. 에두아르노 콘이 <숲은 생각한다>에서 보여준 태도는 건물과 식물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하는 내게 용기를 줬다. 콘은 아마존의 루나 족이 비인간적 창조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주목하며 인간과 비인간적 창조물들의 소통을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인간이 생명인 것처럼, 숲 역시 하나의 생명이며, 기호는 인간적인 것 너머에서도 존재하고, 생명은 구성적으로 기호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 과정의 산물이다”(Bateson 2000c, 2002; Deacpn 1997; Hoffmeyer 2008; Kull et al. 2009 ; Kohn, 2013/2018 재인용). 국군병원에서 내 귀에 외쳤던 이 소리들도 분명히 기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국군병원의 옛터에서 전시되고 있던 작품 중, 임민욱 작가의 <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2014-2020) 작업을 보았던 순간에는 그 식물들과 내가 어떤 기호를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업은 장소 특정적 작업으로 고 채의진 작가가 만든 천 개의 지팡이를 국군병원의 넓은 공간에 눕혀 놓았다. 고 채의진 작가는 1949년 12월 24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아홉 명의 가족을 모두 잃고 총에 맞은 친형 아래에 깔리면서 혼자서 생존했는데, 그는 그 고통을 안고 201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 평생 죽은 나뭇가지를 주워와 지팡이를 깎았다. 그 수많은 지팡이들은 마치 재난 후의 시체들처럼 기다란 파란 천 위에 하나하나 누워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지팡이들은 서로 다르게 생겼고 울퉁불퉁한 모양이 무언가 절규의 몸짓 같이 보이기도 했다. 임민욱 작가는 그 지팡이들이 햇볓을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전시 공간의 창들을 다 열어두었고, 그 창들로는 날 것의 나무와 잎사귀와 풀들이 들어와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도 아무것도 거치는 것 없이 그대로 보였다. 희생자로 죽은 사람들과 채의진 작가, 그리고 나라는, 멀어 보이는 이 경계 너머의 존재들 사이에서 지팡이라는 죽은 나무와 그 건물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나무들이 나와 죽은 자들을 연결해주는 듯 했다. 기호는 우리를 우리로서 존재하게 한다고 할 때, ‘우리’ 안에 인간 아닌 것 역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때의 감각 안에 들어 있었다.


      “모든 기호 과정은 기호들이 미래를 가능한 사태로 표상한다는 사실을 둘러싸고 조직된다. 미래는 살아 있는 사고를 좌우한다. 미래는 모든 부류의 자기가 갖는 구성적 특징이다. (…) 모든 종류의 기호는 현전하지 않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전시킨다(re-present).나아가 모든 성공적인 표상에는 그 밑바탕에 또 다르 부재가 있다. 즉 성공적인 표상은 그 무언가를 그만큼 정확하게 표상하지 못한 다른 모든 기호 과정의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하나의 기호학적 자기로 존재하는 것은 구성적으로 그 자신이 아닌 것과 연관되는 것이다. 자기의 미래는 부재하는 역사들의 특수한 기하학과의 관계 속에서 그로부터 창발한다. 살아 있는 미래들은 자신을 에워싼 죽은 자들에게 항상 ‘빚져 있는’ 것이다.”(Kohn, 2013/2018, 49-50)


   식물과 나는 폐허,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빈터라는 어떤 기호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녹슬어 있는 갖가지 철의 모양새, 헐어 있는 여러 이름표들, 부서져 있는 건물의 구석들, 더 이상 아무도 돌보지 않는 듯한 이미지들이 나로 하여감 그곳이 폐허라는 사실과 더 이상 쓰지 않는 국군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기호였다면, 그 기호는 그곳의 담쟁이와 나무들에게도 공유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이 마음 놓고 그곳을 점거하고 터를 잡고 마음 놓고 주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인적이 드문 곳의 온도와 습도, 미생물들의 섭생, 인간이 더 이상 밟고 베지 않는 것들이 식물들에게도 기호가 되었을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의 끝에 있는 ‘폐허’라는 이미지에서 나와 식물들은 실제로 만나고 있었다. 나는 그 식물들이 국군 병원에서 스러져간 인간들을 은유하거나 대변한다고 말하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여기서 ‘풀’, ‘식물’, ‘잡초’라는 가장 연약하고, 아래에 있고, 하지만 질기고 생명력 강한 존재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이다. 그것들은 실제하는 힘으로, 그 공간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힘으로 은유가 실재로 나라는 경계의 주변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로 들리는 것을 말로 포획하지 못해 은유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언어의 테두리가 조금은 물렁해지는 순간이었다. 


3. 경계 경관에서의 주체성


   광주국군병원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국군병원에서는 식물들이 주인이었고, 나는 식물들의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떤 기호의 공유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외로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느끼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은 죽은 자와 녹슨 건물, 그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적 상흔으로부터 거리 두는 안전한 감각이 아니었다. ‘우리가 희생자/난민이다’라고 외치면서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감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히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말대로, 나의 말은 나의 말대로 분리되어 있는 감각도 아닌, 내가 역사적 장소에서 거의 처음 경험한 불편하지 않은, 스스로 외면하지 않게 되는 감정이었다. 이방인의 감각에서 멈추지 않고 연쇄되는 연결 감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나라는 경계 경관에서 경계 안팎의 다리를 만들어보려는 식물들의 힘이 너무나 생명력 넘쳐서 내가 인간이기에 지니는 유한성을 절감했다. 경계를 넘고자 말을 거는 식물들의 기호들로 알아차린 것은 연결감각뿐 아니라 내가 그들의 기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는 나 자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 언어는 말을 걸고 있지만 다시 말을 걸 수 없는 채로, 연결하고 있지만 분절되어 있는 채로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이기에 유한성을 인식했다는 것은 상대가 완전히 단절된 존재, 이를테면 말 걸기가 불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할 때 오는 거리감이라기보다는 연결되어 있고 닿을 수 있으나 나보다 크거나 깊은 존재라고 느껴서 오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 감정 안에는 나와 관계 맺는 비인간의 존재들도 있었지만, 비인간적 존재들과 관계 맺는 새로운 ‘나’도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서의 나, 손님으로서의 나, 초대받은 자로서의 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나였다. 다만, 이 마음에서 식물을 인간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이 경험을 나의 이야기 안에 봉합되어 버리는 사건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다. 고정된 뿌리에서 가지와 잎사귀로 이동하는 누적된 시간성, 그리고 자라나는 것, 그것의 의미가 식물들에게 깃들어 나에게 손님의 감각을, 초대받은 자의 감각을 준 것 같다. 방문하는 자와 지키는 자, 자라나는 존재와 이동하는 존재 사이의 시간성, 운동성, 공간성의 충돌도 그 자리에 분명히 있었다. 국군병원의 오래된 터에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도, 그곳을 지키면서도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식물들이었다.

   여기서는 인간이 아닌 것이 자연이 아니라 자연이 아닌 것이 인간인 나였다. 심지어는 비자연인 것은 나뿐이라는 감정이 들었고, 그리고 그것은 그 전에 국가권력 반대에 나를 위치시키며 희생자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오히려 그 국군병원에 남겨져 있는 국가권력의 흔적과 같은 영역에 위치시켰다. ‘나’의 경계 경관 안에서 새로운 경계 짓기가 운동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예측과 세계의 습관이 충돌했던 이 순간에 “세계의 습관이 스스로를 노출한 것”(Kohn, 2013/2018, 116)은 아닐까? 그리하여 여기서 내가 ‘나는 그저 방문객에 불과했다’는 한계, ‘공간이 죽지 않은 채로 식물이 주인이 되어 살고 있었다’는 세계의 새로운 습관을 알게 되고 내게 시련이 주어졌다면 나무가 아닌 나, 자연이 아닌 나, 주인이 아닌 나는 일종의 ‘자기성selfhood’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새로운 자기성과 함께 찾아 온 ‘분리되어 있는 느낌’, ‘현실의 곤경’으로서의 감각이 국군병원과 나의 경계 경관에서 나를 새로운 주체성으로 구성했다.

   경계는 이 순간에 주체성을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Mezzadra&Neilson, 2013). 이 주체성은 인종화되고 성별화된 것이다. 경계 주변에서 주체 혹은 정체성의 범주들은 주어진 것 혹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 순간에 맥락 특수적(context-specific)으로 구성된다. “정체성의 범주가 역사적이며, 맥락에 따라 특수성을 띠는 역동적인 것이자,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달리 이해되고 동일시될 수 있는 ‘다의적(polysemic) 사회구성물”(Gopaldas & Fisher 2012; Yuval-Davis, 2015 : 김수미, 2018, 37 재인용)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경계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계 짓기는 나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시화한다. 경계는 주권적 논리가 줄어드는 현장이 아니라, 주체성이 생산되는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경계라는 장소에서의 다양한 신체들은 “잠재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태도들의 정수”로서 “주체성은 권력이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전장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잠재성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출구 전략과 탈출 전략의 다수성을 위한 공통의 기반으로서 그 잠재성을 전유하는 것 사이에서 그려지는 투쟁선을 창조하는 전장이다”(Mezzadra & Neilson, 2013/2018, 301).

   ‘비자연인 나’, ‘광주의 이방인’으로서 새로운 주체성이 생산된 경계 주변에서 나는 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계속해서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곳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던 나무들이 나를 바라볼 때, 그곳을 책으로만 읽고, 서울의 자리에서 상상하기만 하다가 단 하루 그곳을 방문한 나, ‘나무가 보았을 나’를 나는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나는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우카이 사토시(2008)가 말했던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일 것이라고 믿고, 그러기를 소망한다.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은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문제시 삼지 않고도 “부끄럽다고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인간으로의 귀속을 오히려 재확인하고 강화”(鵜飼哲, 2008, 70)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표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은 인간이라는 영역 안에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저항감을 지니고, 이 영역선과 그 귀속을 문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표현은 “마치 부끄러움에서 도망가려면 인간으로부터 탈출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鵜飼哲, 2008, 70-71)이 들어 있다.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이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과 달리 ‘나’ 안에 새롭게 경계 짓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다른 자리에 위치시키는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날의 ‘이방인 됨의 감정’이 스스로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 역시 깃들어 있었다.


4. 번역으로서의 경계 짓기, 경계 짓기로서의 연대하기


      “예를 들어 이주민을 보자. 국경과 나라, 사막과 바다를 가로지르고, 게토에서 불안정하게 살면서 생존을 위해 가장 굴욕적인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며, 경찰 폭력과 이주에 반대하는 군중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이주민들은 번역 과정과 '공통화'의 경험 사이의 핵심적 연관들을 입증한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다중은 이동할 때나 정지했을 때나 서로 소통하는 새로운 수단, 같이 행동하는 새로운 양태, 서로 마주치고 모이는 새로운 장소들을 발명한다. 요컨대 이들은 특이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특이성과 번역 과정을 통해 함께 다중을 형성한다. 이주민은 장차 도래할 공동체이며, 가난하지만 언어가 풍요롭고, 피곤에 짓눌리지만 신체적, 언어적인 사회적 협동에 열려 있다. 오늘날 정당하게 말을 잡으려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성은 이주자들처럼 말하는 (그리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Hardt & Negri, 2017/2000, 272).


   이방인으로서의 나, 비자연으로서의 나를 대상으로 국군광주병원의 자연이 나와 관계 맺는다고 감각하고 나서 이 감각이 ‘피해자’라는 소수자성, ‘광주’라는 소수자성, ‘식물’이라는 소수자성과 연대할 수 있는 끈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국군병원에서 귀가 들은 소리와 말로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있던 경계 경관으로서의 ‘나의 자리’ 위에서 ‘주어져 있던 경계’들은 ‘경계 짓기’의 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경계 짓기의 실천이 바로 귀로 들은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 식물의 기호와 인간의 기호, 광주의 언어와 서울의 언어,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를 번역하는 것에 있었다.

   경계는 배제, 차별, 거부의 행위를 내포하며 사회적 관계 뒤쪽에 있지만, 경계 이전에는 ‘경계 짓기’의 행위가 있다(사카이 나오키, 정지혜, 2011). “경계를 하나의 제도로 정할 수 있는 곳은 ‘경계’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경계 짓기는 언제나 경계에 선행한다”(사카이 나오키, 정지혜, 2011, 16). 이런 의미에서 <방법으로서의 경계>는 공통적인 것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번역의 가능성을 찾는다. 번역의 정치는 노동과 투쟁에 참여한 주체들의 공통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책은 <번역과 주체>(1997)에서 사카이 나오키가 번역을 균질언어적 말 걸기와 이언어적 말 걸기,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을 이어받아 논의한다. 번역에는 균질언어적 말 걸기와 이언어적 말 걸기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이 있는데, 균질언어적 말 걸기는 “말 거는 자/ 발신자가 균질언어로 추정되는 사회의 대표자적 입장을 수용하고 또한 동등하게 균질언어적 공동체의 대표자이기도 한 일반적 수신자들과도 관계를 맺는 언명 속에서 자기 자신과 타자들을 관계 짓는”(Sakai 1997, 4 : Mezzadra & Neilson, 2013/2018, 408 재인용) 행위이다. 이러한 말 걸기 양식은 공동체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동시에 그 언어 공동체를 “분리된 것으로 그리고 동질적인 것”(Mezzadra & Neilson, 2013/2018, 408)으로 구성한다. 주체들은 여기서 조형적 도식을 구성하는데,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자본은 인간 활동을 추상 노동 수단에 근거해서 부호화하고 그것을 교환가치와 가격의 복합체 속에 삽입하는 식으로 번역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본의 번역은 다양한 삶의 형태와 언어의 성질을 동질적인 가치 척도로 환원해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Mezzadra & Neilson, 2013/2018). 

   반면, 이언어적 말 걸기는 자본의 작동과 그것의 균질언어적 말 걸기를 훼방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이종성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러한 말 걸기 상황에서 말 걸기의 듣는 자는 균질언어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다른 배경의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 간의 의사소통 수단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말 거는 자 역시도 계속해서 번역과 대항번역을 요구하는 또 다른 외국인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이 상황 속에서 언어들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생성될 수 없다. 이것은 사카이가 “외국인의 무집합적 공동체”, “외국인 다중”이라고 부른 것을 만들어낸다. 사카이에 따르면 “무집합적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함께이고 우리 자신들을 ‘우리’로서 지칭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우리의 함께함은 어떤 공통의 동질성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Sakai, 1997, 7 : Mezzadra & Neilson, 2013/2018, 409 재인용). 이언어적 말 걸기는 “상호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의 정상성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 대신에 어떤 언어적 혹은 다른 종류의 매개체이든 간에 그 안에 이종성이 내재하기 때문에 모든 발언은 의사소통에 실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Sakai, 1997, 8 : Mezzadra & Neilson, 2013/2018, 409 재인용).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공통적인 것이 구출될 수 있는 지반으로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종적인 말 걸기의 불안정한 언어 형태는 문화적 특징이 본원적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복수 일인칭 대명사를 통해 서로의 차이들이 “새롭고 우발적인 방식”(Mezzadra & Neilson, 2013/2018, 409)으로 서로를 탈구하면서도 연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연대는 만들어가야만 하는 목표, 구축해가야 하는 어떤 것으로서, 당연한 것 혹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번역’을 통해 구성해야 하는 하나의 도전일 것이다.

   번역은 그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언어적 실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이다(Mezzadra & Neilson, 2013/2018).. 번역의 과정은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Hardt & Negri, 2017/2020)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번역은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기존의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정치적 투쟁을 산출해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쓰는 정치적 어휘들을 통상적 용례들과 결별시키고 재정의해서 우리의 새로운 현실 속으로 위치시켜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특이성을 공통적인 것 안에 위치시키는 공통화 과정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질성을 위한 플랫폼이며, 구성적 차이들 사이의 공유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Mezzadra & Neilson, 2013/2018, 271).

   특히 이러한 번역 실천은 주체 구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실천인데, 말 걸기에 관한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번역적 언명이 사회적 관계를 정립하고 수정하는 실천이 되는 방법을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재현하는 기본적 용어“(Sakai, 1997, 3 :  Mezzadra & Neilson, 2013 재인용)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경계를 식별하는 것 역시도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나는 지난 4월 국군병원에서 자연, 폐허, 과거의 자리에 야만, 비문명, 죽음, 과거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밀어 넣게 되면서 그날 ‘어떤 감각’이 앞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투쟁에 대해서 꿈꾼다.



5. 나가며를 대신하는 문장들

 

   광주에서 서울에 돌아와서 발견하고, 마주치고, 내 말로 번역하려고 하지만 아직 번역을 하지 못한 채로 머뭇대고 있는 문장들을 이 글의 한계 자리에 맞대어 놓고 싶다.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그가 말했다. 볼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곳이겠지. 그때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내가 쓴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나는 ‘볼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문장에 줄을 그었다.”(김연수, 2021).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12세기 신비주의 철학자 생 빅토르 위고의 문장이다.” (Said, 1991)


   경계는 두 기호계가 마주쳐 만든 ‘이중언어 지대’라는 점에서 각각의 주변이 공유하는 공통 공간이다(김수환, 2020). 이 각각의 언어 지대과 맞붙는 경계 경관에서는 많은 것들이 미결정된 채로 “완벽히 번역(가능성”이 아니라 “번역 불가능성의 상황에서의 번역”(김수환, 2020, 16)을 가동하고 있다.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순간, ‘어떤’이라는 말 주변을 맴도는 이 운동에서 번역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1) 지구화는 경계를 마모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많은 경계를 확산하고 있다. 전지구화로 말미암은 무역전쟁, 민족주의의 부활, 다양한 전염병의 대유행이 매우 중요해진 오늘날 <방법으로서의 경계>는 현대사회       를 보는 프리즘으로서 ‘경계’를 제시하는 일종의 학문적, 인식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계는 그동안 장벽의 이미지로 묘사되며 그것의 배제 역량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장벽의 이미지는 내부와 외부     간의 분명한 분할이라는 생각과 내부의 완벽한 통합에 대한 욕망을 고찰시킬 수 있을뿐더러, 생산적인 질문들을 낳지 못한다. 그동안 경계를 영토의 가장자리, 혹은 주변부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위로부터 아래에서     봐왔다면. 이는 경계를 아래로부터 보는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경계를 삶의 중심과 토론의 중심으로 끌고 와서 그를 통해 영토의 내적 경계뿐 아니라 그 너머를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Mazzadra &             Neilson, 2013/2021).
2) 『방법으로서의 경계』 저자 산드로 메자드라, 브렛 닐슨 전 지구 인터넷 화상 강연(https://youtu.be/A3zBzRhKD_M) 중
3) 저자들은 강연에서 팬데믹과 관련해서, 특히 2020년 우리는 많은 경계들의 공고화를 마주했고 그중에서도 내적 경계가 놀랍도록 증식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록다운으로 인해 가정이 새로운 경계가 되기도     하고 마스크와 살(신체)이 경계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4) “경계를 연구 ‘대상’으로뿐 아니라 ‘인식의’ 관점으로 여기는 것은 포섭과 배제 간 구분선을 흐릿하게 하는 긴장과 갈등에 대한, 그리고 엄청나게 변화하는 현재의 사회 통찰 규칙에 대한 생산적인 통찰을 제공한         다”(Mazzadra & Neilson, 2013/2021, 16).


참고문헌

산드로 메자드라·브렛 닐슨, 『방법으로서의 경계』, 남청수, 갈무리, 2021

Crenshaw, K. (1989).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 The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140 , 39-167.

에두아도르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사월의책, 2018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인간사랑, 2013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이학사, 2001

______, 『어셈블리: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 이승준·정유진, 알렙, 2020

김연수, <거울이 아니라 창에서 글쓰기>, 《사물함》 5호, 2021

김수미 <정체성, 권력, 교차성>, 《한국언론정보학회》 5호, 한국언론정보학회 학술대회, 2018, 29~42쪽

김수환, <이중언어 (번역)메커니즘으로서의 경계>, 《한국고전연구학회 학술대회 발표집》, 한국고전연구학회, 2020, 6~17쪽

문재원, <경계 횡단하기의 수행적 실천과 사이 정체성 - 경계지대의 문화번역으로서 이주민 영화와 공감장 ->,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 12호, 2018, 71~97쪽

임국희, <여성주의 정치 패러다임 전환의 이론적 모색: 차이와 연대를 포괄하는 윤리의 정치로>, 《페미니즘 연구》 11권 2호, 2011, 119~152쪽

사카이 나오키·정지혜 <경계 짓기로서의 번역>, 《아세아연구》 54권 4호, 9~27쪽

정진희, <‘교차성’은 차별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인가?>, 《마르크스21》 16호, 2016, 36~50쪽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그린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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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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