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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골찬 바다

  • 작성자
  • 작성일 2024-02-18
  • 조회수 288

지난 시월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바쁜 중간고사와 곧 시작될 기말고사 사이에서 가쁜 호흡을 내쉬던 우리에게는 너무도 달가운 일이었다. 모두가 한 데 모여 요란하게 보내던 삼박 사일의 일정 중에도 나는 손쉽게 고요한 아름다움 앞에 섰다. 이것은 아마도 제주도가 가진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공항에 내려, 늦가을 답지 않게 따뜻한 바람 앞에서 우리는 외투를 벗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살갗이 트도록 춥더니. 끼인 계절은 변덕스럽구나. 캐리어를 끌고 얕은 오르막을 힘차게 걸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앞뒤로 한국과 어울리지 않고 제주와는 꼭 맞는 야자수 나무가 즐비해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관광객들의 대화, 줄지어 늘어선 수학여행 버스에 쉽게 들떴다.

이동하는 길에는 모두가 각자의 채비를 했다. 체력을 비축하겠다고 어설픈 잠에 빠져드는 친구도 있었고, 한나절 동안 찍은 사진을 빠르게 정리하고 업로드 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죽 이어지는 직선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분초마다 빠르게 창밖 모습이 바뀌던 길만 달리다가 매끄러운 한 폭의 그림처럼 늘어선 오름과 갈대밭, 귤밭과 산등성이를 보는 일에 생경한 행복을 느꼈다. 이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탁월한 음악이다. 비틀즈와 장필순, 노영심, 정밀아와 루시드폴의 음악을 들었다. 제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노래에는 갈대를 흔들리게 하는, 귤을 농익게 하는 제주의 모든 숨결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도 보드라운 음악을 들으면 순식간에 사위가 잦아드는 기분이 든다. 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음악에 기대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커다란 호텔에 도착했다. 가족끼리도 가본 적 없을 만큼 크고 좋은 호텔이었다. 웅장한 건물의 모양새와 빼곡한 차들에 놀라고 감탄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던 무렵이었다. 

일몰이 하늘을 가득 채울 때 즈음 주상절리 앞에 설 수 있었다. 해와 우리의 발걸음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만 같았다. 주상절리의 가장자리를 타고 선명한 주황빛의 빛무리가 번졌다. 바다 위를 유유히 떠가는 보트인지, 낚싯배인지 모를 것은 새까맣게 실루엣만을 남겼다. 꽁무니의 햇빛은 파도의 결을 만나 새하얗게 부서졌다.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친구들의 틈에 끼어 역광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바다를 등지고 웃고 있는 사진을. 

입장 팻말이 붙은 곳 밖에서는 닭꼬치 같은 조악한 간식들을 팔고 있었다. 나는 주린 배를 무시하고 Y와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주상절리 매표소가 나오기 전에 가파른 내리막이 하나 보이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손을 꼭 붙잡고 내려갔다. 콩콩콩. 발걸음에 스피드가 붙었다. 내려간 곳에서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주상절리 사이트 스팟과는 다르게 한산한 바다가 펼쳐졌다. 금발에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민소매를 입은 외국인 하나가 병맥주를 마시며 계단참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바다 앞으로는 해변이 아니라 크고 작은 돌들이 육지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Y와 그 돌 중 평평한 곳에 앉아 저물어 가는 해와 황혼녘의 유일무이한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휘청휘청 걸었다. 돌 하나를 밟으니 몇 백 마리의 갯강구가 동시에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다 앞 육지의 주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앉아 있을 자신도 없었을 뿐더러 우리의 무심한 발길에 그들이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Y의 손을 이끌고 순백색의 계단에 앉았다. 

Y와는 침묵의 순간을 온전히 공유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만큼 우리는 입을 꼭 다물고 멍하니 바다를 응시했다. 멀리서 밀려오는 바닷바람이 짰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서툴고 재미도 없는 농담 같은 것이 불필요한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에 깨지는 벽이 있다. 관계의 외곽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 나는 왠지 Y와 이번 여행을 내내 함께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엄함과 세심함을 동시에 가진 그날의 바다 앞에서 종종 Y의 옆통수를 바라보고, 가끔 눈물을 훔쳤다. 집합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쯤 Y는 말했다. 이번 수학 여행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든, 지금이 가장 소중할 것 같아. 나는 그 순간 Y의 옆에 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다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마음에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이제는 오르막이 된 길을 뜀박질로 오르면서 장필순의 애월낙조를 들었다. 우리가 본 낙조도 장필순이 벤치에 앉아 본 낙조만큼 황홀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호텔로 돌아가서는 텔레비전이 딸린 욕조에서 한참을 씻고 룸메이트였던 S와 이게 무슨 호사냐고 한참을 떠들며 귤을 까먹었다. 알알이 터지는 귤의 향, 널부러진 짐더미를 보니 그제서야 정말로 떠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실감은 뒤늦게 나는 법이지. 좋은 것 앞에서는 더 그렇다. 

둘쨋날은 기형적으로 더웠다. 민소매를 입어도 등줄기로 땀이 흐를 정도의 날씨였다. 나는 야심차게 입은 가죽자켓을 짐짝 취급하며 짧은 크롭티 한 장만을 남겼다. 배를 타고 우도에 가는 날이었다. 배를 탄다고 하니 들뜨고 두려웠다. 슬픔이 밀려왔다. 제주로 수학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무시할 수 없었던 명백한 슬픔이었다. 미묘한 죄책감도 함께 들었다. 우리 모두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지 포켓에 노란 리본을 달고 우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서서히 나는 그들과 동갑이 되었다. 찬란한 단원고 친구들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무력해진다. 마음으로 또다른 애도를 하고 유가족 분들이 모인 합창단의 노래를 한 곡 들었다. 이 날 만큼은 눈물을 참고 즐겁기로 했다. 미안함과 기억을 안고. 

우도 사랑이라고 파란 궁서체로 적힌 배가 부두에 든든하게 정박해 있었다. S와 철제 계단을 타박타박 오르면서 배를 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안전한 감각이라고, 이토록 커다란 선체가 우리를 담고 가는데 이 앞에서 어떤 불안을 예측할 수나 있었겠냐고 말하는 것에 우리는 입을 모았다. 의심할 세 없이 벌어진 일들은 얼마나 거대한 공포를 동반하는 일인지, 우리는 감히 가늠해보았다. 나는 Y에게 기억하자고 이야기했고, Y는 네 덕에 기억이 났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쨍쨍한 해를 받아 바닷물이 눈부시게 빛났다. 모터의 힘으로 선체의 양쪽에서 파도가 쳤다. 세모꼴로 올라오는 파도 위로 무리진 햇볕이 아롱아롱 춤을 췄다. 배의 이층 난간에 배를 대고 기댄 채 눈이 아프도록 밝은 바다를 바라봤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금세 뻣뻣하게 엉켰지만 그것조차 기분 좋았다. 나는 서둘러 항해 앨범을 들으려고 했지만 미처 이어폰을 가져 오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S의 사진용 세컨드 폰을 빌려 항해 앨범을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꾹꾹 참아오던 자유가 단숨에 터지는 것만 같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자유하는 법을 안다는 찬혁도, 지금의 파도를 본다면 자유를 다시 정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도 한 바퀴를 도는 버스를 타고 덜컹이는 길을 달렸다. 구멍이 숭숭난 돌로 구획 지어둔 밭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등과 표정은 단단해보였고 그래서 무척 아름다웠다. 여러 군데에 서서 구경을 하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산호 해변. 기사님의 말은 빠르고 말투는 투박해서 설명해주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힘겨웠다. 하지만 그 말만은 명확히 기억난다. 산호 해변에 도착하면 꼭 신발도 양말도 벗고 걸어보라던 말.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니 새하얀 해변이 펼쳐졌다. M과 자리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로 까끌까끌한 조개의 잔해를 느꼈다. 종종 보이는 분홍빛, 초록빛의 투명한 조각들을 줍기도 했는데 그것이 쪼개진 유리병의 결과라니 신비롭게 느껴졌다. 투명한 푸른빛의 물을 손으로 얼러 보기도 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물빛처럼 파도의 소리도 조용하고 솔직했다. 문득 M과 Y가 못 참겠다며 바지를 걷어올리고 바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아는 사람 팔십 명 중 어느 누구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애들은 그렇게 했다. 나는 속으로 대략 오만 번 정도 갈등했다. 저 물을 종아리로, 정강이로, 발가락으로 느끼고 싶은데 뒷일을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축축할 바지와 양말, 망가질 지도 모르는 신발을 떠올리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 순간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지금 눈앞의 말간 풍경에 뛰어들지 못하는 내가 무모해지는 힘을 배우지 못한 내가. 

무모해지는 것에도 시작은 꼭 필요하다고 했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을 내려두는 편을 택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숭덩숭덩 바짓단을 걷어올리기 시작하자 생각의 굴레는 힘을 잃었다. 더운 날에도 바닷물은 시원했다. 매끈하고 평평한 돌 위에 서서 발가락을 꼼질거리니 멀리서부터 도착한 바닷물이 내 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비로소 바다를 느낀 것만 같았다. 쳐다보기만 하는 것과는 다른 기쁨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물론 찐득거리는 종아리를 견디며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했고, 하루 종일 발가락 사이로 달라붙은 모래가 성가셨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재밌었으니까.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래서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려준 M과 Y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그날의 일정 내내 나는 스스로가 무모함의 기쁨을 배웠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피로한 몸을 끌고 잠에 들던 순간까지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남은 날들 동안 두 번의 바다를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가 보이면 선생님들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달려가 잠시라도 보고 오는 식으로. 내가 발견한 고요한 아름다움은 바다에 있었다. 제주의 바다는 잔잔하고 평화로웠지만, 으레 모든 바다가 그러하듯 광막했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이토록 너른 바다를, 수영하는 사람 하나 없는 바다를 오래토록 응시한 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그 가을이 처음이었고 나는 바다 앞에서 수많은 것을 배웠다. 솔직해지는 법, 겸손해지는 법, 숱하게 스치는 아름다움에 무심해지지 않는 법, 무모해지는 법, 자유하는 법까지. 고등학교 생활은 작은 일에도 쉽게 생채기가 나는 때이다. 나는 그 날들의 바다로부터, 매초 얼굴이 바뀌는 그 바다로부터 얻은 힘으로 여직 호흡하고 있다. 지난하고 거북한 입시가 끝나는 날 어느 누구도 없이 혼자 바다에 가자고 다짐한다. 먼 바다가 가까운 나의 것이 된 것만 같다. 그런 것이 시월의 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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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지대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유튜버는 비정기적으로 영상을 업로드한다. 그 주기는 꽤 길어서 나는 그의 영상을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알림이 뜨면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간만에 마주한 오래 전의 단짝과 손을 마주 잡는 기분으로 영상을 클릭하고 음악을 듣는다. 삼십분에서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나는 그가 선물한 세상 안에 깊숙이 들어간다. 취향이 섬세하게 엮여 만들어낸 뜨개 이불 같이 나의 고단한 등을 받쳐주는 음악들이다. 그 음악들은 전부 비슷한 템포로 이어진다.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같은 템포 다른 노래인' 것이다. 변함 없는 음악의 결. 나는 단조와 장조 하는 음악 용어는 알지 못하지만 그 음악들이 어떤 템포를 가지고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는 안다. 그것은 늦봄 해변 한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온 풀포기, 한여름 저녁 석양 너머로 부는 선선한 바람, 초가을 은행들이 익어가는 무던한 풍경, 한겨울 자정녘 교회 십자가 위에 쌓이는 소복한 눈의 템포다. 내게 음악의 템포는 삶의 템포다. 환절기 어느 날, 해가 뉘엿해지는 오후에 친구와 동네 카페에 마주 앉는다. 각자의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속삭이듯이 이야기한다. 그럴 때 나는 탁자를 일정한 속도로 가볍게 두드린다. 그것은 눈앞에 놓인 식은 아메리카노의 템포이기도 그 순간 내 삶의 템포이기도 하다. 내가 듣는 음악들은 이런 삶의 템포와 나란히 걷고 뛰고, 또 종종은 넘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질주의 속도가 맞닿는 순간 내가 듣고 있던 음악들을 모두 모아 보았다. 한 장르로 묶이기에 충분한 모임이었다. 인디 음악. 내가 사용하는 두 가지의 스트리밍 어플 중 하나는 나에게 '인디 애호가' 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릴렉싱 뮤직을 추천해준다. 나는 문득 내 삶과 자주 맞닿아 있는 인디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애용하는 초록색 검색 엔진은 '인디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 타인의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직접 앨범을 제작하고, 홍보 역시 자신의 돈으로 하는 등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을 인디 뮤지션이라고 하고, 이들의 음악을 인디 음악이라고 한다'. 거대 자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 대중을 겨냥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것을 용감하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디는 작은 것, 주류와 일치하지 않고 조금 빗겨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달리 큰 애정을 받기 마련이다. 독립영화 에는 모두가 가진 것들을 고유하게 아끼는 미소가 나온다. 가만 보면 미소는 인디의 마음으로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스키는 그냥 술의 한 종류일 뿐이고, 담배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기호 식품이며, 남자친구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거나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회자되기 쉬운 이름들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미소의 위스키는 하루의 고된 일과 끝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박한 사치이고, 미소의 담배는 친구들과의 방탕하고 자유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간편한 타임머신이며, 미소의 남자

  • 2024-03-28
꿈과 사랑

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

  • 2024-02-25
K에 대해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K 얘기를 많이 해놓은 페이지들을 읽었다. K는 나의 가장 힘든 시절을 오랫동안 수호해준 사람이다. K 덕에 내가 누리게 된 사랑이나 갖게 된 마음이 어색하고 신기하다. 그건 여전히 그렇다. 떠올려보면 나의 한 시절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 때 내 옆에 있던 사람. 그 사람의 행보로 나 역시도 이해되는 사람 뿐이다. 구체적인 사건들보다 마음을 빚졌던 사람이 나에게 시절로, 한 때로, 유년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 나의 얼굴 뼈가 달라지고 어제와 오늘 종종 다른 사람이 되는 때. 그 언제보다도 교차가 잦은 때.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는 마음이 커져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하고 싶어지는 때. 나는 이런 순간에 K를 사랑해서 아마 K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자주 떠올리게 될 나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에 K가 있다. 아주 커다란 상흔처럼 있다. 사랑을 유보해둘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거다. 나의 마음이 모자라다고 느껴질 때면 K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때, 지금보다 조금만 더 성숙할 때, 어떤 마음이 잘 주는 마음이고 어떤 마음이 그렇지 않은 마음인지 알게 될 때. 그럴 때로 사랑을 미뤄두고 싶다고.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의 마음은, 그래도 매끄러워진 사랑만 주고 싶었다. K가 가진 윤택함 사이사이로 나의 거칠거칠한 마음이 끼어드는 일을 견딜 수 없었던 것도 같다. 해본 적 없어서 껄끄러운 것이 K 앞에서 드러난다는 게 어딘가 나를 벌려놓는 것만 같았다.어느 날의 나는 내가 K를 좋아한다는 것에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썼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원래 뭣도 모르고 피할 수 없이 시작되는 것이 대체로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장 크다는 것도. 꼭 상투적인 말에 진심을 담는 것이 가장 쉬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음을 시작하느라 K를 마음대로 짐작하고 좋아했다. K와 이야기를 하고 그 애를 조금 파악한 것처럼 착각하는 지금은, 그 모든 짐작 마저도 오산이었다는 것을 안다. K는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유치했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나는 꽤 자주, 어느 어른에게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을 아직 아이 같은 K에게서 배운다. 이를 테면 용서하는 법, 나를 믿는 법, 타인의 미움에서 나를 지키는 법 같은 것을. 그 당연하고도 어려운 것을.차를 타고 길을 달릴 때면 K가 연주하고 녹음한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목소리를 겹친다. 뻔한 낭만과 고유한 호칭들로 점철된 가사 앞에서 나는 무력해진다. 그리고 속절 없이 충만해진다. 낯선 대중교통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K의 음악을 듣는다. 떨어지는 노을, 저물어 가는 빛깔, 성에로 눈에 보이는 계절. 그 옆에는 항상 K가 있다. 무너질 때도, 숨이 떨릴 때도,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할 때도, 환상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생각을 할 때도, K가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자랐다면,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안전히 여기까지 온 것이 맞

  •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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