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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효과

  • 작성자 식빵연필
  • 작성일 2024-02-12
  • 조회수 151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을 아십니까? 의무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작품입니다. 저는 진달래 꽃을 사랑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달래 꽃이라 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에게 웃으면서 "아는 시가 그것밖에 없긴 하겠다."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유명한 작품을 사랑하면 자주 듣는 말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뭉크의 절규를 이야기해도 같은 반응입니다. 유명한 것은 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그 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러한 평가는 조금 야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특별한 것을 좋아해야한다고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쉽게 접해서, 친근해서, 배운적이 있어서일까요. 사실 배운다는 것도 타인의 감상을 습득한 것은 아닐까요. 문학에 대한 해석도 관찰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저 역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적인 타인의 해석을 습득중입니다. 이게 길이라면 걷는 것이 맞으나 제 발자국 하나는 선명히 찍으며 걷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저는 이런 유명한 작품을 좋아한다 외치면 그렇게 말한 화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을 '김소월 효과' 라고 이름 붙여놓았습니다. 분명 이에 대한 다른 용어가 있을테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건 익숙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안다는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이 될 무렵 누군가 저에게 좋아하는 그림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외치고 있었지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탓에 '레이디 고다이바' 와 '병든 아이' 를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품을 알리가 없었고 그덕에 저는 '서양 미술을 잘 아는 사람' 으로 비춰져 보였습니다. 저는 그저 신기했습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의 작품인데도 뭉크하면 오직 "절규!" 하고 외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저 유명한 작품처럼 자신도 모르게 속을 찌그러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세속적인 것이 그들 위에 있는 듯한 우쭐함에 기뻐하며 스스로를 그들의 시선대로 변화시켜나가게 되었습니다. 해바라기,절규,레이디 고다이바 점점 난해한 곳으로 가자 마라의 죽음,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 작품을 전부 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반갑습니다. 하지만 모른다하여도 괜찮습니다. 토를 품은 위는 항상 해바라기와 진달래 꽃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속의 것들을 전부 토해내면 제 속에서는 꽃향기가 날듯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는 사람일뿐입니다. 억지로 가르쳐주려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는 것이 적다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가 큽니다. 그렇기에 저는 기본적인 것을 말할수록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 내가 참 좋아하는 시야" 하고 말한다면 아마 저는 눈에 불을 붙이고 밤을 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겁니다. 타인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도 참 재밌는 일입니다. 그러나 화자와 청자가 동일한 타인의 해석을 습득해버렸다면 그것만큼 애석한 일도 없는겁니다. 가급적이면 좀 더 새로운 견해를 덧붙이고 과장하더라도 상상해보는 것을 즐겨보라고 문학을 싫어하는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또 하나 같이 모여 무지한 약자에게 김소월 효과를 나타내니 다시금 뭉크의 유명함을 떠올리며 답답한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타인의 해석을 습득했더라도 그것조차 자신의 것이라 인식한다면 스스로의 해석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억지로 창조를 애쓰는 것이 미련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학은 누구의 개입도 허가하지 않고 스스로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만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참 아이러니한 점은 내가 빠져든 작가의 세계조차 정말 작가가 상상했던 세계와는 조금씩 다르다는 것인데 '글을 그려낸다' 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저마다의 화풍이 달라서 참 매력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이 끊임없는 사색과 감상 그리고 창작인겁니다. 글은 어떻게 보아도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한때 저는 진달래 꽃에 너무 몰입해버려서 일기장에 이런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가 진달래 꽃을 뿌릴 적에 꽃을 쫓는 벌을 보았다.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임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을 읽은 후에는 별 하나에 삶이 모두 담겨 있는 듯한 감상을 느끼게 되어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에 소원을 빌기는 커녕 두려움에 휩싸이고는 했습니다. '누군가의 세상이 또 추락하고 있구나' 별똥별에 대한 유년시절의 감상입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갈수록 밤하늘의 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저의 탄생과 함께 등장해 죽음을 알려주는 시계 같았달까요. 저는 언젠가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때서야 마지막 별똥별이 떨어지고 저의 세상이 추락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빛공해와 매연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직도 북쪽 끝의 일곱별을 보며 '내게는 오직 일곱, 그러니 떨어지지 말아라' 하고 밤마다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과해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감각적 심상도 모르던 유년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덕분에 저는 저만의 화풍을 유연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김소월 효과, 그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수많은 밤의 사색 속에서 밤보다 더 까만 활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 이제는 마음껏 음미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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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중한 벚꽃이 이내 죽어버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이 시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벚꽃이 죽어버렸다가 아니라 시들었다고 표현해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에서 일말의 저항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꽃에게는 시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죽어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고의적인 꾸밈이었다. 그 시에서 벚꽃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여서 내 뜻이 잘 해석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표현을 벚꽃을 향해 치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가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해버린 것 같아서 속으로 씩씩대며 줄을 긋다 그만 표현을 지워버렸다.여정의 끝을 의미하는 두 단어 '죽다와 시들다' 꽃에게 있어 무엇이 더 감각적인가를 두고 보아도 시들다가 좀 더 풍성한 이미지를 준다. 시들다라는 말은 소리 없이 서서히 그러나 우아하게 푸름에서 붉음으로 가다 끝내 어둠으로 장식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진다. 그러나 죽다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육체로서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동족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외롭게 또 누군가는 행복하게...그리고 결말은 백골과 썩은 살덩이라는 다소 씁쓸한 잔해를 남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 탓에 죽다라는 말이 시들다라는 말보다 감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행형으로 바꾼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들고있다는 푸름에서 붉음으로 죽다는 활력에서 침묵으로, 전자는 감각적이지만 후자는 추상적이다. 그리고 죽다의 추상을 시들다는 함께 가져간다. 죽다의 장점은 꽃의 끝맺음과 동물의 마무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것 진달래가 죽었다던가 지구가 죽어간다던가 어느 사물에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 죽다는 시들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꽃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시들다라는 표현을 쓰기로했다. 꽃에게 있어서 죽다는 섬세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꽃을 이용해 글을 쓸 때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싶어' 다소 오글거리는 발상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 함축하고 싶은 의미가 많기 때문이다.좋은 글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이해 되기 쉽게 쓰는 것, 둘째는 풍부한 표현을 쓰는 것, 셋째는 문장을 짧게 짧게 쓰는 것, 작가가 이것을 어기고 위험부담을 감수할 때는 그만한 가치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 시를 잘 쓰기 어려운 이유다. 내 의도를 드러내려 힘쓰다보면 이해 되기는 쉽지만 그만큼 표현상의 결점도 쉽게 남는다. 표현을 풍부하게 하려 힘쓰다보면 의도는 감춰지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져 이해가 어려워진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의 중용을 지키는 것인데 이 중용이라는 것이 참 애매한 부분이라 시를 씀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5년 전 기억 속에서 그 답을 찾아 낸 듯하다. 중용이란 작가에게만 중용이면 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어버렸다고 표현했다가 함축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으며 시들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서는 되려 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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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빵연필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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