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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의 다음

  • 작성일 2017-10-01
  • 조회수 3,591

빙하의 다음

강혜빈


울상을 짓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눈송이를 모아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우산을 잊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잃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접었다 펼치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해서는 안 됐어 기지개 켜는 법을 떠올리려고 걸었어 얼어붙은 풀장처럼 뚱뚱해진 거리에서 속옷 위에 겉옷을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진다 옆 사람의 목도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보라색 아침이었어 보타이를 맨 쥐들이 다락까지 몰려왔거든 나는 아무도 입지 않은 웨딩드레스처럼 잔뜩 구겨져 씨 없는 포도를 껍질째 삼키고 있었지 쪽창 밖으로 파리한 나무들이 둥둥 떠다녔어 남의 집 티브이 속에서 누가 대신 울어 주길 기다리면서 지금 울리는 전화벨은 여기의 것인가, 저기의 것인가 눈알을 굴려 봤자 눈보라가 지나가면 기억하는 채널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 전파를 지우면서 내리고 날개를 지우면서 또 내리는, 저것들은 다 뭘까


하얀 지점토로는 지구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 수 있다


정말이지? 손바닥 두 개를 모으면 둥근 방이 되니까 수도꼭지에 대고 깨끗한 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의 손 안에서 북극곰이 태어난다면······ 작았던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마당에 심은 나무보다 커다래져서 울타리를 부수고 다닌다면 나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래 부드러운 건 어쩐지 무섭지 오늘의 놀이는 모두 끝났단다 우리가 만든 덩어리는 대답이 없고 너는 차라리 입 속에 더 따뜻하고, 더 두꺼운 솜을 넣어 주겠지


손등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송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


오늘은 기분을 잃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잊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당겼다 놓으면 날아가는 화살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하지는 않았어 우는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더 추웠던 날과 덜 추웠던 날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경처럼 두리번거리며 우리는 자꾸만 몸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껴입고 하얗게 질린 도시보다 비대해져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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