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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9,221

[단편소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운명은 뜻밖의 형태로 찾아온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황금기가 갑자기 끝나버린 것은 어느 재벌의 비자금 수사 때문이었다. 특검이 출범하고, 일가의 상속문제가 세간의 관심을 끌더니, 끝내 안주인의 미술 창고가 하나 열렸다. 기자들이 몰려갔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으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박스를 들고 나왔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소유했다는 그녀의 걸작 컬렉션이 일부나마 빛을 보았다. 그리고 팝아트 거장의 걸작 소유권을 놓고 서로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거창하게 출발해 유야무야 된 이 소동의 마지막은 미술계를 긴급 진단하는 기획기사로 장식되었는데 ‘이대로 좋은가.’로 시작되는 기획기사는 온갖 미학과 정치학, 팝아트의 역사 등등의 썰을 풀며 시작되었지만, 결국 핵심은 웃으며 눈물 흘리는 여자의 그림 가격이었고, 지금은 얼마나 뛰었을지 가격조차 알 수 없는 그 그림의 진짜 소유주가 누구인가에 대한 추측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리 읽어 봐도 이대로 좋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미술계 말석에서나마 이름을 팔아먹고 살았던 내 돈줄도 그렇게 갑자기 막혔다. 예년 같았으면 갤러리가 문 닫을 시간에 비서와 함께 나타나 트럭째 그림을 싣고 가던 큰손들이 일제히 내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는 말은 비슷했다.
“알잖아. 요즘 분위기.”
“이 사람아, 비 오는데 괜히 비 맞을 일 있나.”
“내가 바빠서. 요즘 그림 볼 시간이 없어.”
“창고가 꽉 차서…… 알잖아. 김 교수.”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제 후배라서가 아니라 진짜 물건이라니까요. 아시잖아요. 제가 이사님한테 아무나 소개 안 하는 거.”
“보장한다니까요. 딱 5년, 5년만 가지고 계시면 저한테 고맙다고 절하실걸요.”
“이럴 때가 기회라니까요. 다들 이렇게 엎드려 있을 때, 과감하게 들어오셔야 나중에 재미 보시지.”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전에는 개관 전날 밤 미리 와서 볼 수 없느냐, 도록만 보내주면 살 그림들 번호를 찍어 주겠다고 하던 이들이었다. 그들 모두 거짓말처럼 연락을 끊었고 4개월을 준비했던 후배의 첫 개인전은 그림 석 점도 채 팔지 못한 채 끝났다. 내가 나서서 기획하면 늘 완판을 해왔고 그것이 내 은밀한 자부심이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그림 창고가 한 번 열린 일로 처참하게 박살나 버렸다.


그렇다고 그 일가의 여주인에게 불만이나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그녀가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고미술품에 대한 강렬한 수집욕을 자랑했던 그 일가의 창업주를 따라 미술계에 뛰어든 그녀는 현대미술에 대한 높은 안목과 그보다 더 대단한 지갑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관장으로 있는 미술관은 좋은 작품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했다. 물론 소문에는 회사가 소유한 미술관은 표면적인 간판일 뿐이고 진짜는 일가, 특히나 그녀의 개인 컬렉션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그녀가 한 작가의 개인전에 나타나 몇 점을 찍고 지나가면 화가의 이름값은 폭등했고, 그의 작품세계는 재조명됐다. 그러면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이름이 품질 보증이었으며 가치 증명이었다. 그녀가 샀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값이 올라갔으니, 이만큼 꿀빠는 장사도 없었으리라.
그녀의 성공이 다른 재벌들에게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림은 양도세 상속세도 없었고, 보유세가 부과되는 것도 아니었다. 거래 과정이 공개되지 않으니 자금 출처도 묻지 않았고, 아무리 많이 쌓아 두어도 예술에 대한 조예로 칭송받았다. 판로만 확보해 두면 기록이 남지 않는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컬렉션을 확보하면 가격이 내려가는 일도 없었다. 공식적인 가치는 경매장에 등장할 때 한 번 매겨지고 많은 경우 보이지 않는 시장에서 은밀히 거래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의 그림을 미리 확보해 두면 몇 년 사이 두세 배로 가격이 훌쩍 뛰는 일은 우스웠다.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운이 좋다면 수십 배의 수익을 거두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1) 메디치를 운운하며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고상한 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는, 지극히 고상하고 우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재테크인 것이다.

1)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가문.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자로 명망이 높았다.


젊은 시절 나는 수도권의 한 미대에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름만 그럴듯한 모 협회 총무 명함이 있었고, 관련 잡지 한두 곳에 칼럼이나 평론을 기재해 평론가로 이름 줄이나 알려진 정도였다. 원래 그림을 그렸지만, 대학 1학년 때, 내 재능의 한계를 깨달았다. 졸업했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으므로 뭐라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사학위를 남겨 두고 있었지만 딴다고 정교수가 되긴 힘들어 보였고, 평론가로 사는 일 역시 요원했다.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인간들은 이 바닥에 정말이지 발길에 차일 만큼 널려 있었으니까. 학교 친구들은 몰랐지만, 몇 번 미술 관련 매체 기자 시험도 봤었다. 하지만 국문과나 신방과 출신들을 이길 수 없었다. 모두 물을 먹었고 어찌저찌 인맥을 동원해 들어간 곳이 협회였다. 구성원과 활동이 모호한 협회는 별 의미 없는 보고서 몇 개를 올려 정부지원금을 따먹는 곳이었다. 협회장이 귀찮은 일을 맡겨 두기 위해 앉힌 총무였고, 덕분에 협회장의 사적인 잡일들이 거꾸로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매달 나오는 푼돈과 명함에 박을 이름이 아쉬워 싫은 소리 한 번 못 하고 절절맸다.
한마디로 여기저기 걸어 둔 줄은 많았지만 뭐 하나 딱히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미술 명문으로 유명한 한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도 땄다는 학벌이 있었지만, 그 학벌로 미술학원을 하고 있는 선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동창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이들은 더 막막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터였고 내가 그 길을 가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때, 한 후배의 개인전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를 소개받았다. 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고, ‘한국’으로 시작해서 ‘협회’로 끝나는 단체 이름이 명함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음. 우리 학교 유망한 후배들과 에이전시를 소개해 주고, 적당한 구매자가 있으면 중개도 해주고, 한 마디로 유망주들이 먹고사는 거 걱정 안 할 수 있게 와꾸 짜주는 일 하지. 요새 건설사들하고도 일 많이 해.”
“아! 좋은 일 하시네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긴 설명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브로커란 소리였다. 당시 신축 건물에 조형물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막 생겨난 직후였다.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위한 공공이익 환수라는 훌륭한 입법 취지와는 달리 조형물은 정확한 가격을 책정하기 힘든 품목이었다. 조각상이 백만 원이라면 백만 원일 수 있었지만, 천만 원이라 해도 누가 아무 소리 할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림 가격 부풀리기부터 가짜 바꿔치기, 이중계약까지, 이 조형물 법은 온갖 복마전의 온상이었다. 생활비 한 푼이 아쉬운 젊은 작가들이 이 브로커의 밥이었다. 작품을 사겠다고 하고, 가격을 부풀려 이중 계약을 해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나와는 엮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붓을 마지막으로 잡아 본 지는 5년이 넘었고, 설사 그린다 해도 가격표를 붙일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다가와 눈앞의 후배의 그림이 어떤지 물었다.
“어떤 버전을 원하시는데요?”
“버전에 따라 답이 다른 거야?”
“일단 추상화지만 구도 좋고, 눈에 들어오는 색감이고, 뭘 그린 건지 모르겠지만 눈길을 끄는 면이 있죠. 꽤나 꼼꼼하게 그려서 대충 그린 것 같은 느낌과는 달리 디테일한 면들이 살아 있어요. 나쁘지 않아요. 너무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는 것만 빼면. 저 자식도 자기가 뭘 그렸는지 모를걸요. 그러니까 이렇게 떨어져서 봤을 때는 통일감이 없고, 눈에는 들어오지만 감흥은 없어요. 그냥 그림이죠. 흔한 추상화, 유화. 이게 솔직한 버전.”
선배가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더 해봐.”
“무채색 계열의 색으로 고독한 현대인의 절망을 밝은 색으로 그가 품고 있는 꿈을 대비해 그린 작품으로 역동적인 꿈과 정적인 고독을 대비해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색의 대비가 깨어져 만드는 불균형이 이러한 은밀한 내면적 불안을 보여주는데, 심리적 불완전성을 강렬한 이미지로 화했죠. 이게 뭐, 적당히 이빨 까는 버전이죠.”
“재밌네. 그런 식으로 이빨 터는 게 통하기는 하는 거야?”
“대중은 물론 이걸 사는 사람도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뭐가 아름다운지, 뭐가 좋은지 모르는 바보들이라고요.”
내 말에 선배는 크게 웃었다.
“나도 몰라. 뭐, 이런 거 팔아먹고 살지만, 실은 좆도 모르겠다고.”
멋쩍어진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어물거렸다. 그러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얼마나 오를까?”
“첫 개인전치고 그림도 많고, 그림 내에서도 비교해 보면 성장한 게 보여요. 작업실은 안 가봤지만 아마 엄청 열심히 작업하는 친굴 겁니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닌 건 선배가 더 잘 아시지 않아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선배는 악수를 청했다. 나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일할 만한 아이템이 있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바빠서.”
악수를 하는 선배의 손목에는2) 파텍 필립이 있었다.

2) 고급 시계 브랜드의 정점. 현대 손목시계의 원형을 제시한 회사로 가장 싼 모델조차 중형차 한 대 가격이다.


명함을 책상 앞에 놓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답은 뻔했다. 건축회사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협회 총무 이름을 달고 세차하는 것보다 굴욕적일까? 파텍 필립까진 불가능해도 롤렉스는 찰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세이코만 찰 수 있어도 충분히 머리를 수그릴 만하지. 그렇게 약속을 잡았다.
막상 선배가 권한 것은 뜻밖의 영국 유학이었다. 자신이 돈을 댈 테니 영국에서 박사를 달고 오라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학위를 딴다고 교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T. O.가 있는 학교들이 몇 없고, 그런 자리 교수는 아시다시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깟 선생질이나 하라고 영국까지 보내는 줄 알아?”
“그럼 왜……?”
“학교는 강사라도 좋으니 지금처럼 이름만 걸어 놓고, 영국에서 박사 따오는 게 중요해. 그런 게 그림 사는 놈이나 그리는 놈들한테 모두 먹히거든. 다녀오면 에이전시를 하나 차려 줄게.”
“차려서 뭘 하는데요?”
“뭘 하긴. 에이전시를 운영해야지. 유학 갔다 와서 우리 학교 3, 4학년 애들 중에 그림 괜찮은 애들 골라서 졸업하면 계약하고 개인전 열어 줘. 내가 너한테 그랬잖아. 애들 먹고살 수 있게 와꾸 짜줄 거라고.”
너무 좋은 제안이어서 오히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 미적거리는지 눈치 챈 선배는 웃으며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니가 젊은 유망주를 발굴해 오면 난 자산 관리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그림이 필요한 분들을 소개시켜 줄 거야. 넌 평단 선배들에게 부탁해서 애들 좀 띄워 주라고. 술도 사고, 인사도 시키고. 그렇다고 무슨 수를 쓰거나 너무 노골적으로 부탁하진 말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하라고.”
아직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제안 하는 거 아니야. 아예 약을 칠 거면 널 영국에 보낼 필요도 없지. 큰 장사 하려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게 좋아.”
“그럼 뭐로 돈을 버시려고요?”
“졸업생들 첫 개인전 하고 평단 호평 받으면 몸값 올리는 건 금방이잖아. 일단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안 팔리면 나도 좀 사고. 넌 애들 설득해서 아트페어에 내보내라고. 일단 나오면 내가 부풀려서 적당히 질러 줄 테니까. 그럼 그게 공식적인 몸값 되는 거지. 팔 곳은 걱정 마. 이 바닥에 들어오고 싶은데 그림 볼 줄 몰라서 헤매는 인간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분들 창고를 채워 드리는 거지.”
선배의 비전은 탁월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그에게 소개받은 건설사 이사님이자 사주의 아들이 내가 기획한 첫 개인전에서 그림의 절반을 싹쓸이해 갔고, 얼마 뒤 사장이 된 그 도련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들을 정리해 두 배의 수익으로 보답 받았다. 개발부지 인허가를 놓고 예술을 사랑하는 시장에게 그림도 선물하고, 회사 비자금으로 산 그림을 그가 파는 식으로 양도세도 피했다.
좋은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우리 에이전시에서 개최하는 신인 작가들의 개인전은 늘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 나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데 탁월한 눈을 지닌 에이전시 대표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 다행히 그림은 좀 볼 줄 알았으므로 유망주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중견 작가 몇과 계약할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큰손들의 자산 세탁을 위한 풀 패키지가 만들어졌다. 선배가 예측하지 못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자신의 건강이었다. 빛나는 성공이 이어지던 황금기가 끝나 갈 무렵 선배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주 좋은 콤비였다.


글쎄. 누군가는 우리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떳떳하다. 선배의 말처럼 평론가에게 우리 애들 호평을 써달라고 청탁한 적도 없었고, 뒷돈을 건넨 적도 없었다. 그저 4학년쯤 된 싹수가 보이는 후배의 작업실에 술자리를 핑계로 몇 번 평론 하는 친구들을 부르긴 했다.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 있는 친구들이고, 선배, 선배 하며 이제는 외로운 아저씨들을 잘 따르니 관계가 나쁠 리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1, 2년 뒤쯤 그 친구들의 개인전을 열어 주고 초청장을 보내 그들의 관계를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면 족했다. 나머지는 인지상정이란 단어로 알아서 굴러갔다. 가난한 무명 시절을 보내야 할지 모를 신인 작가에겐 나름의 화려한 데뷔였으며, 평론가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할 기회였고, 구매자는 돈을 벌었다. 누가 봐도 재능이 있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며, 구매욕을 자극하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만 골랐으므로 중간에 굳이 야로를 부릴 일도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고 어떤 그림이 나쁜 그림인지 알지 못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가격을 매기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미술은 감히 돈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예술이니까.
적당한 그림만 찾는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굴러갔다. 신인의 리스크가 싫다면 중견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그림 몇 점을 옥션에 풀어 펌프질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올랐다. 선배는 그저 모두가 성공하는 필승공식을 만들었고, 나는 그 공식의 성실한 이행자였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벤츠를 몰고, 파텍 필립을 찰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재벌의 미술 창고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갔다.


그리고 창고가 열렸다. 더는 선배도 없었고, 배운 도둑질도 통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잠시 패닉에 빠졌던 것도 같다. 당시 나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신생 에이전시의 대표였으며 나름 영향력 있는 평론가였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허울뿐인 것인지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대로 내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완판 신화가 깨진 것에 당황한 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껄였다.
“국내에서 신인 발굴하는 건 이제 충분합니다. 제가 영국 유학을 갔던 건, 단순히 신인 발굴에 목적이 있던 게 아닙니다. 제 꿈은 상하이, 홍콩, 베를린, 런던, 뉴욕으로 가서 그들에게 우리의 젊은 신인들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미술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생각입니다.”
그건 누구에게 했던 것이 아닌, 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모두의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으며 출국 게이트를 나섰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빠르게 잊혔다.


그렇게 망했다.


엄밀히 말하면 한 번에 망했던 것은 아니다. 거의 8년에 걸쳐 서서히 말라죽어 갔다. 매년 각 도시에서 열리는 옥션에 몇 개의 그림을 헐값에 팔고, 에이전시나 갤러리, 스튜디오 파티에 초청받아 그곳의 사람들과 면을 트는 동안에는 그래도 인맥을 넓히고 있는 중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있었다. 유찰이 된 작품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면 작가들을 만나 잘 되고 있다고, 이번 옥션에서 반응이 있었다고 열렬하게 떠들어댔다.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내 자신이 속을 정도였다.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이너 서클 안에만 들어가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고작 인맥 따위. 나는 그저 어떤 계기가, 선배를 만났던 것처럼 불이 붙을 어떤 사소한 계기가 필요할 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사이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배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났고, 그림을 맡겼던 중견 작가들 역시 실망스러운 판매 실적에 등을 돌렸다. 그림을 모아 뒀던 창고의 임대료가 버거워지고, 회사가 이름뿐인 유령 에이전시로 전락하는 동안 나는 이 모든 게 월급 사장의 무능한 경영 탓이라 확신했다.
미술계의 세계적인 흐름을 읽는다는 이유로 이 시기의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냈다. 소호 인근의 렌탈 아파트에서 시작했던 집도 미드타운을 거쳐 브롱크스에 있는 원베드 아파트, 퀸스의 한 인도인이 운영하던 건물 스튜디오, 마지막에는 사우스 자메이카 인근 차고를 개조한 집까지 차근차근 밀려났다. 소금기에 들뜬 페인트가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러지던 마지막 방은 하루 종일 들리는 비행기 소음 탓에 귀마개 없이는 잘 수조차 없었다.
그곳에서 아내가 보낸 이혼 서류를 받았다. 나는 서류를 천천히 읽어 본 후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었다. 이곳 에이전시에게 첫 초대를 받았을 때 메이시스에서 무리해서 구매한 정장이었다. 서트핀 대로를 따라 30분을 걸어 자메이카 역까지 가 전철을 타고 파티가 있는 블리커 스트리트로 갔다. 그곳에서는 새로 브랜드를 만드는 운동화 회사에서 그라피티 스프레이 업체와 제휴해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라피티 작가들과 미술계 인사들을 초청한 런칭 파티를 하고 있었다. 지난 8년간, 인맥을 다진다며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초대장 검사도 하지 않는 런칭 파티에서 초대장을 받는 정도였다.
창고를 리모델링한 매장은 사방에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고, 매장 안쪽에는 누군가의 그라피티를 벽째 잘라서 전시해 놓았다. 초대장 검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뉴욕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모두 모일 기세였고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깨까지 타투를 하고 농구화에 반바지, 그래픽 티셔츠, 스냅백을 눌러쓴 꼬맹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인 대단하신 작가님들이었다. 파티장은 DJ들이 돌아가며 디제잉을 하는 탓에 대화를 하려면 소리를 질러야 할 판이었다. 그나마 브루클린 브루어리 맥주가 공짜였으므로 나는 맥주를 들고 이제는 한두 번쯤 인사한 적 있는 사람들과 의미 없는 잡담을 주고받았다. 한때는 이 모든 것이 인맥을 쌓는 일이라고 믿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파티에서 나누는 이야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만난 지 5분 만에 10년 지기처럼 웃고 떠들어대지만, 돌아서면 5분 후엔 잊는 사람들이었다. 기억도 안 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하고 마지막에 포옹까지 했던 나는 맥주잔을 든 채 멍하니 서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애써 지난 몇 년간 이곳을 광풍처럼 휩쓸었던 중국 열풍을 떠올렸다. 우리 화가들도 불가능하지 않아. 실력만 있으면 통하는 무대라고, 여기는.
나는 이 절망감과 우울함이 모두 맥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 취한 탓에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술에서 깨야 했다.
노력이 부족한 탓이야. 내 노력이.
찬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뒷문으로 나왔다. 턱시도를 입은 백발의 신사가 먼저 자릴 잡고 있었다. 신사는 벽에 기댄 채 직접 만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다가 날 보자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어딘가에서 40년간 화랑을 운영하고 있다는 노신사였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고, 그는 대답 대신 피우던 마리화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 물건을 잠시 바라보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도 아내와 이혼을 해야 했다. 한 모금쯤은 빨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마리화나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기침이 나왔다. 다시 그에게 마리화나를 되돌려주었다.
“이제는 모르겠어.”
“네?”
바스키아키스 해링까지는 그래도 뭐 따라갈 수 있었어. 매튜 바니나, 로버트 고버부터는 이게 뭔가 싶더니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이라면 2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그는 20년이나 화랑을 더 해올 수 있었다. 어떤 그림이 좋은지도 모르며 내게 일을 맡겼던 선배가 떠올랐다. 이곳도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
“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 자네는 여전히 그림 팔려고 기웃거리는 건가?”
웃음이 또 나왔다. 그가 나를 기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었으니까.
“네.”
“돌아가. 런던에서 학위를 딴 동양인 정도는 이 바닥에선 발길에 차이는 돌만도 못하니까.”
나는 실없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아시아 미술 붐이라고요. 중국 그림들 보세요. 저도…….”
“그거야 중국인들이 옥션에서 가장 큰손들이니까. 크리스티나, 소더비에서 요즘 가장 많이 돈을 쓰는 건 중국인들이야. 그러니 그들에게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팔 그림 값을 올리려고 앞으로의 기대주들을 사는 거라고. 자네 그림을 팔고 싶어? 아트페어에서 팔 그림의 열 배쯤 질러. 그러고 나면 다들 자네가 파는 그림에 주목할 테니까. 이딴 말도 안 되는 파티를 수천 번 기웃거려 보라고. 자네가 파는 그림 따위에는 아무도 신경 안 쓸 테니까. 예술학교에서 매해 찍어내는 애새끼들이 온갖 이상한 걸 작품이라고 들고 오는 판인데. 내 비서는 우편으로 받는 도록은 보지도 않고 반송해. 편지 양식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어. 보내주신 그림은 잘 봤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어쩌고저쩌고.”
그는 손가락을 구부려 따옴표 제스처를 했다. 웃음이 나왔다. 결국 돈의 문제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하던 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서울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팔아 놓고서 이곳에선 그토록 순진하게 실력이 있으면 될 거라고, 정치를 잘해 인맥을 만들고, 그들의 이너 서클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좋은 작품으로 승부할 수 있는 기회가 이곳에 열려 있긴 했다. 여긴 기회의 땅이니까. 이곳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이곳 교수와 평론가 눈에 들어 이곳의 작가로 데뷔하는 것이다. 실력과 운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그런 작가가 나와 일할 이유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 이전의 문제였다.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나 같은 이에게까지 자리를 허용할 정도로 그 기회라는 것이 넓지 않았다. 그저 일회성 기획으로 한국 관련 기획전을 할 때 그림을 빌려줄 사람 정도로 내 위치는 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정치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게 싫다면 이 세계의 영원한 승리자인 자본으로 기회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면 되는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어설픈 돈으로 어설프게 비비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리화나를 다시 내게 내밀었다. 다시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머리가 띵했다. 이번에는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하고 또렷해졌다. 지금까지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웃었다. 배가 아플 정도로 깔깔거렸다. 그런 나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노신사는 툭 던지듯 물었다.
“미술 좋아하나?”
미대 교수가 사반세기 전 입시 면접에서 내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팸플릿을 한 장 내밀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회랑의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가봐. 안목이 트일 테니까.”
노신사의 말에 흥미가 동했지만, 이내 제목 아래 적힌 광고 문구가 의욕을 꺾었다.
‘금세기 최고의 공포 퍼포먼스.’
세상에! ‘금세기 최고’라니. 제대로 생각이 박힌 마케팅 담당자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문구였다. 이딴 팸플릿을 만드는 자들이 무언가 제대로 된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봐. 뭐가 진짜 두려운지 알게 될 테니까.”
나는 가겠다고 답하고 그에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가지 않으리라. 퍼포먼스 따위, 팔아먹기도 힘든걸.


집에서는 여전히 이혼 서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화나 탓인지, 현실에 눈을 뜬 탓인지 처음으로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아마 이 화살을 피할 수 없을 테지. 미뤄 온 빚을 청산할 시간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짐을 꾸렸다. 몇 가지 물건을 포기하고 나자 지난 8년은 슈트케이스 하나로 압축되었다. 아니, 실은 남은 물건들은 수화물 요금을 내며 항공편에 실어야 할 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다음날, 나는 뉴욕 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이 도시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몰랐으므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눈에 담아 둘 생각이었다.
네 시간쯤, 잭슨 폴록의 〈one: number 31〉 앞에서 멍하니 그림과 그 그림을 보는 관객들을 봤다. 워낙 거대한 대작인 데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미술관이니만큼 결코 그림만 볼 수는 없었다. 어쩐지 관객들조차 이 거대한 그림의 일부 같았다.
이곳에 와서 이 그림을 직접 보기 전까지 잭슨 폴록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저 이름뿐인, 명성 자체가 위대함의 전부가 아닐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3)가 만들어낸, 그저 허울뿐인 모더니티의 얼굴마담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그린 그의 그림을 보자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하게 만들어낸 걸작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4) 프랙털처럼 부분들은 아무리 작게 나눠도 전체와 유사성을 지녔고, 전체는 늘 부분의 총합보다 컸다. 동시에 어디에도 같은 부분은 없었다. 그것이 혼돈에 부여한 기묘한 질서였다. 그리고 그 질서가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시야에서 빠져나가 선과 점으로 흩어졌다. 삶이 지닌 모호함처럼 말이다. 흩뿌려 우연히 그린다는 그의 이미지는 우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야말로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흩뿌려진 물감들이 이루고 있는 층을 바라보면 이 우연이야말로 섬세한 계산에 의해 이뤄진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31은 잭슨 폴록이 유일하게 술을 끊었던 해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교함은 무언가에 의지해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불꽃이었다. 뉴욕에서 쏘아 올린 비트 세대의 축포였다.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이런 불꽃을 쏘아 올릴 수 있다면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이곳에 내가 발굴한 작가의 그림을 걸고 싶었다. 불꽃은 되지 못하겠지만, 불꽃을 쏘아 올리는 발사대 같은 것이라도 되고 싶었다. 나는 그림 앞 벤치에 앉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3) 미국의 저술가, 평론가. 전후 유럽에 독립적인 미국 미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모더니즘 회화론을 정립한다.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개념을 규정하고, 큐비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4) 기하학적으로 자기 유사성을 가지는 구조. 도형의 일부를 확대했을 때, 일부가 전체와 유사성을 가지는 형태를 말한다.


미술관 밖으로 나오자 부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팸플릿이 손에 닿았다. 노신사가 준 바로 그 팸플릿이었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금세기’를 강조하는 광고 문구 밑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위치는 첼시와 헬스키친 사이 어딘가의 포구 쪽 창고 건물 같았다. 집에 돌아가면 슈트케이스와 내일 자 비행기 표가 이륙하는 제트기 소음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바닷바람에 불어터진 쥐구멍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이곳에서 천천히 걸어가면 퍼포먼스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걷기엔 다소 멀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설사 형편없다 해도 이곳에서의 형편없는 내 실패만 할까? 아니, 엉망이라면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비참함에 어떤 완결성을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
관광객들과 뉴요커 사이에서 뒤섞인 채 8번가를 내려오는 동안 소음과 그레이비소스 냄새가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신호등에 멈춘 2층 관광버스에서는 우비를 입은 사내 하나가 내 모습을 무슨 대단한 광경이라도 되는 양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부슬비는 쉴 새 없이 흩뿌렸고 양말은 젖어 구두 안이 눅눅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바람이 마구 몰아치는 한 창고 건물 앞이었다. 첼시의 부동산 값 폭등과 맞물려 한창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거리였다. 옆의 낡은 빌딩은 한창 다시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고, 그 옆의 창고는 이미 새 단장을 해 디자이너 부티크로 변해 있었다. 허드슨 강에 면한 붉은 창고는 이 주변에서는 유일하게 낡은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그 흔한 광고판이나 공연을 알리는 걸개 하나 없었다. 리모델링 공사 직전 잠깐 임대 기한이 비는 건물에서 단기 임대로 치고 빠지는 공연 같았다. 일종의5) 아트워싱인 걸까? 기대는 더욱더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금세기 최고’는 제대로 된 장소조차 빌릴 여력이 되질 않는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모퉁이를 돌아서자 제법 긴 줄이 있었다. 대부분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었기에 드레스 코드가 있었나 싶어 팸플릿을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그런 건 없었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모인 사람의 과반은 제법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어느 파티에선가 스쳐 지나간 듯한 낯익은 얼굴도 보였고, 한 번도 누구에게 소개받은 적이 없는 탓에 인사조차 못해 본 유럽 무슨 귀족 혈통의 컬렉터가 심각한 얼굴로 주요 신문사에 평론을 연재하고 있는 대머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행렬과 어울리지 않는 몇몇 젊은 작가나 허술한 후드티를 눌러쓴 미대생 무리를 제외하곤 다들 거물들이 틀림없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에 와서야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큰손들의 비공개 퍼포먼스에 초청받은 셈이었으니까.
줄 서 있는 동안 부슬비는 그쳤다. 해가 넘어가고 젖은 옷으로 강바람을 맞자 추웠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자 적벽돌로 만들어진 낡은 창고 건물의 녹슨 셔터 문이 올라갔다. 우리는 일제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트럭을 댈 수 있는 주차 공간이 있었고, 그 앞에는 화물을 쉽게 부릴 수 있도록 단차가 있었다. 그 위에 턱시도를 입은 사내가 플라스틱 늑대 가면을 쓴 채 나타났다. 턱이 없는 그 가면은 늑대의 이목구비가 묘하게 어긋난 탓에 기이해 보였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셔터 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여대생으로 보이는 내 앞의 아가씨가 흠칫 놀랐다. 주차장 안에는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늘 퍼포먼스를 볼 사람들은 이게 전부인 것 같았다.
“이렇게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늑대 가면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한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퍼포먼스는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실현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공연입니다. 다소 무섭거나 불쾌해 보이는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어디까지나 공연의 일부임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 상황을 오인해 겁을 먹고 패닉에 빠질 경우 공연 전반의 안전은 물론 여러분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고, 침착한 대처 부탁드립니다.”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현대미술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테마파크에 있는 셈이었다. ‘금세기 최고’라는 광고 문구가 눈앞에서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늑대 가면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은 깜깜했다. 다소 느슨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차례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창고 안은 소란스러웠다. 여자 관객 몇은 복도 안으로 들어서다 비명을 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서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복도 안은 어둡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검었다. 거의 완벽히 검었다.
검다는 것은 단지 무채색의 어두운 색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검은색은 본질적으로 빛을 흡수한다는 뜻이다.6) 반타 블랙7)이나 블랙 2.0처럼 빛의 흡수율이 99퍼센트를 넘어서면 그것은 색이 아니라 그저 무(無)로 보인다. 복도 전체를 그런 색으로 칠했으니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암흑 공간에 던져지는 느낌이었다. 광장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겁을 먹을 정도로 복도는 사람을 압도하는 검은색이었다.
조금 놀랍고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경고처럼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얼마가 들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블랙 2.0이라면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서울에서 비슷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 탓에 외국에서 무언가를 빨리 수입해 와 돈을 벌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은밀한 모임 같으니 빨리 퍼질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본 것들을 가져가 뭔가를 기획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사람들은 검은 복도 안쪽으로 들어섰다. 검은 벨벳으로 뒤덮인 홀이 나왔고 그 가운데는 조명을 받으며 해체된 양이 걸려 있었다. 마치 걸개처럼 허공에 얇게 슬라이스 된 양의 박제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연상시켰다. 〈양떼로부터 저 멀리〉와 한때 우리나라에서 열광했던 〈인체의 신비전(展)〉의 슬라이스 표본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작품이었다. 역시나 관객들 몇에게서 비명과 탄식이 나오긴 했지만 실상 놀라운 작품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해체 쇼가 나온 것도 이미 20년 전이었고, 국내에 소개된 것도 10년 전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 이후 비슷한 시도는 예술적으로 동어반복일 뿐이었고, 〈인체의 신비전〉은 과학의 이름을 가장했지만 본질적으로 대중의 가학성과 관음증을 충족시켜 주는 일종의 고어 쇼였다. 금세기 최고 운운하더니 일종의 복고인 건가?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옆에선 홀린 듯 양의 장기를 구경하는 10대 아이가 있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헤드폰을 눌러쓴 그 아이에게는 제법 신기한 구경거리이리라. 나는 아이를 앞질러 다음 홀로 향했다.
홀과 홀 사이의 꺾어지는 검은 복도를 지나자 홀 입구에는 중국집을 연상시키는 붉은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발을 헤치고 들어서자 검은 돌로 된 긴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테이블에는 붉은 새틴으로 된 식탁보가 비스듬히 씌워 있었고, 그 테이블 위에는 양으로 보이는 짐승이 갈비뼈를 드러낸 채 반쯤 해체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역시나 턱이 없는 플라스틱으로 된 하이에나와 독수리 가면을 쓴 턱시도들이 생고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확 밀려왔다. 확실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몇몇 여성 관객들은 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을 했다. 양고기 육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긴 했다. 진짜 양고기일까? 퍼포먼스가 행해지는 무대와 관객들이 지나가는 위치에 구분이 없었으므로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양을 살폈다. 탁한 눈을 하고 허공을 보고 있는 양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진짜 같았다. 양의 콧잔등에는 철사로 만든 안경이 씌워져 있었고, 다리에는 양말과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배는 갈려 갈비뼈가 드러난 채 양쪽으로 피에 젖은 양털과 가죽이 말려 있었고, 장기도 생생했다. 어딜 봐도 늑대가 먹다 남긴 양을 두 턱시도가 뒤처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짜라면 충격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이것도 죽음에 대한 일종의 숭고미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겁에 질린 관객들이 먼저 지나간 탓에 남아 있는 관객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명색이 에이전시 사장이었던 만큼 이 퍼포먼스의 제반 내용이 더 궁금했다.
저 시연자들은 도대체 얼마 받고 저 일을 하는 걸까? 노동법에 걸리는 건 아닌가? 아니, 저들이 행위예술가인가? 그럼 이 퍼포먼스에 대한 저작권이 있는 건가? 이 양이 진짜라면 식품 관련 위생법 위반은 아닐까? 관련 법규가 있을 테고 누가 신고할지 모르니 걸리지 않으려면 당연히 정교한 모형이겠지. 아마 영화 특수효과 팀을 쓴 걸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실감나지? 냄새 탓인가? 피비린내가 나서 진짜같이 보이게 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네.
나는 비슷한 퍼포먼스를 국내에서 보여줄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행위예술가를 섭외해 도축장 같은 장소에서 하면 이 고상한 뉴욕의 퍼포먼스보다 더 쇼킹할 터였다. 벽에 어울릴 만한 기괴한 그림을 그릴 젊은 작가 몇을 섭외해 기획전처럼 꾸미면 돈이 될 것 같았다. 관련법을 알아봐야 하겠지만 화려한 복귀가 될 수 있으리라. 언론에선 찬반 논쟁이 뜨거울 테지만 그 덕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름값이 오를 터였다. 운이 좋다면 떠나간 고객들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앞에선 턱시도들이 우적우적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씹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개선장군을 위한 찬가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어느새 다음 홀로 건너가고 있었지만, 나는 이 퍼포먼스의 디테일을 최대한 눈에 담기 위해 꼼꼼하게 두 사람을 살폈다.
양복이 좋을까? 백정 옷은 어떨까? 아니야. 도살장용 앞치마에 하늘색이나 노란 장화를 신기는 거야. 그게 피랑 대비가 될 테지. 검은 돌 테이블이라면 도살장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스테인리스 테이블로 하는 거야. 맞춤 제작을 하면 돈이 많이 들 테니 장소를 정하고 중고를 구해야겠군. 양을 한 마리만 할 게 아니라 직장인처럼 양복을 입히거나, 드레스를 입혀서 암수 두 마리로 하는 게 좋겠어. 아니야. 꼭 양으로 할 이유가 있을까? 넥타이 같은 걸 메면 돼지도 그림 좋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홀에 홀로 남았다. 문득 걱정이 됐다. 소수 인원으로 하는 퍼포먼스였다. 늦게 가면 다른 걸 놓칠지도 몰랐다. 한국에서 팔아먹기 더 좋은 공연이 있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다음 홀로 이어진 검은 복도를 따라 달렸다. 너무 검은 탓에 복도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앞에서 미대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통로를 미로처럼 빙빙 돌게 만든 걸까. 공연장의 동선은 관람의 효율성을 위해 가능하면 짧게 잡는 게 상식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구성에 짜증이 났지만 다 보면 의미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긴 이 긴 탄광 같은 통로가 관객의 폐소감을 증폭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다음 공연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벽 쪽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검은 복도 탓에 무엇이 나타날지 몰라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모퉁이를 완전히 돌자 앞서가던 미대생의 모습이 반으로 보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복도에 숨겨져 있던 검은 문이 열린 것이다. 열린 문에 미대생 몸의 절반이 가려 마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전시회장의 가벽 사이에 여러 이유로 감춰진 문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관람객이 있는데 문이 열리다니,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눈앞의 검은 공간이 움직였다. 나는 멈춰 서서 그 공간을 응시했다. 분명 검은색이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그것이 검은 타이즈로 된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열린 문 뒤에 숨었다. 그 검은 사람은 둔기처럼 보이는 검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미대생 뒤로 다가가 그것을 뒤통수에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무언가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퍼포먼스의 일부인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열린 문 뒤에 바짝 붙어 숨을 죽였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쓰러진 미대생이 끌려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일 아닐 거야. 그래, 이것도 퍼포먼스인 거지. 정말 훌륭한 퍼포먼스네. 공포라더니. 정말 쫄았잖아.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하지만 생각과 달리 손은 어느새 주머니 안의 스마트폰을 꽉 쥐고 있었다. 911에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그저 이게 퍼포먼스의 일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실은 휴대폰을 켜면 내가 숨어 있는 곳이 들키리라는 걱정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끌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 바로 문 너머 반대쪽까지 가까워졌다. 검은 문을 사이에 두고 피비린내가 훅 밀려왔다. 몸이 떨렸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까 있던 홀에서 나던 냄새일지도 몰라.
끌리는 소리는 멈췄다. 문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의 호흡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숨이 막혔고 침묵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산소를 달라고 뛰는 맥이 빨라지며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이 흘렀다.
잠시 멈췄던 검은 옷이 움직였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다시, 나는 검은 공간에 홀로 있었다. 앞사람이 쓰러졌던 바닥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핏자국이 있더라도 검은 도료를 칠하면 보이지 않을 테지. 나는 내가 보았던 걸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안테나는 뜨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마치 끝나지 않을 악몽 같았다.
다음 홀에는 이미 어떤 관람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빈 홀의 중앙에는 유리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피부가 모두 벗겨져 근육이 드러난 시신인지 모형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양털깎기〉
나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그 근육뿐인 무언가는 헤드폰을 쓰고 있었는데, 가장 첫 홀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양을 유심히 보던 주근깨 가득한 10대 소년의 그것과 같았다.
설마, 시간이 너무 짧잖아. 아니야. 니 착각이야. 우연이라고. 흔한 헤드폰일 뿐이잖아.
흥분한 심장이 마구 박동하는 동안 스쳐 지났던 순간들이 조각처럼 맞춰졌다.
왜 다른 관람객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 왜 이곳의 복도들은 길고 빙빙 돌게 만들어졌을까? 왜 이 돈도 되지 않는 퍼포먼스를 무료로 보여주는 것일까? 왜 휴대폰은 터지지 않는 것일까? 왜 이 공연의 제목은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일까?
유리관 너머에서 풍겨 나오는 독한 포르말린 냄새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공포감조차 기획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착각이고 이 착각도 잘 계산된 퍼포먼스의 일부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기는 터지지 않았고 돌아갈 용기가 없었으므로 최대한 빨리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관람객들과 만나면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또 다른 거짓말을 하며 통로로 향하는 순간 벗겨진 인간의 피부와 마주쳤다. 출구 바로 앞에 트로피처럼 걸려 있는 그 거죽뿐인 피부의 얼굴에는 분명 주근깨가 있었다. 나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기절할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이곳에서 쓰러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갔다.
다음 복도는 더 길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검은 복도를 달리며 나는 매 순간 어디서 벽이 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 역시 도축되는 또 다른 양일까?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나는 다음 홀로 튀어나왔다. 다음 홀에는 긴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서는 턱시도를 입은 늑대 가면과 열두 명의 비둘기 가면이 앉아 있었다. 모두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열두 개의 비둘기 가면들은 일제히 날 노려보았다. 형형한 비둘기들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들 앞에는 접시가 놓여 있었고, 접시에는 블루 레어로 구운 피가 떨어지는 스테이크가 있었다. 테이블 끝에는 스크린이 있었고, 스크린에서는 8밀리 필름으로 찍은 도축장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양들이 실려 가는 동안 도살자로 보이는 남자가 인터뷰를 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인터뷰에 루프를 걸어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 반복되었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늑대 가면이 내게 곧장 다가왔다. 나는 자세를 곧추세우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가장 처음 말했던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결코 겁에 질리지 말 것. 본능적으로 나는 그 규칙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네. 제가 늦은 줄 알았습니다.”
“아니요. 다행히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안내에 따라 긴 테이블의 빈자리로 향했다. 내 걸음을 쫓아 비둘기 머리들이 움직였다. 나는 그들의 복장을 보고 그들이 다른 관람객들이었음을 깨달았다. 열두 명이 남은 거라면 다른 십여 명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문득 테이블 앞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구도로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사도에게 열네 번째 자리는 없었다.
“이렇게 모시게 된 걸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에 무지한 사람들은 이 예술적인 모임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은밀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중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랬다. 내가 했던 말이니까. 현대 미학은 개념적이고 관념적이며 통시적인 맥락이 중요한 탓에 그것을 즐기려면 학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부자들이 사랑했다. 잉여의 돈과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장벽 너머의 세계였으니까. 미학적 감수성이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냈다. 늑대는 내게 가면을 내밀었다. 비둘기 머리 가면이었다. 고무로 된 그 가면의 부리와 눈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굉장히 떠시네요.”
“비를 맞았더니 추워서요.”
프로젝터의 영상은 바뀌어 있었다. 프릭쇼라 부르는 과거의 기묘한 쇼들의 이미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흑백사진 속에는 꼽추, 난쟁이, 샴쌍둥이와 언청이, 그리고 수염이 난 여자와 종양이 몸을 덮은 아이가 나왔다. 초기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의 망령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현대미술이 말하는 초월적인 카타르시스야말로 프릭쇼의 또 다른 재현이었다. 세계가 깨어지는 충격에서 오는 미학적 쾌감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기형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신사의 말을 떠올렸다. 비로소 이 퍼포먼스란 이름의 이 쇼가 진정 두려운 이유를 깨달았다. 금세기 최고라는 광고 문구조차 이전 세기의 프릭쇼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 자리는 없는 거 같은데요.”
“알고 계셨군요.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비둘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날 지목했다. 어디까지가 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저들은 관람객일까? 공범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양일까? 비둘기들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뒷걸음을 쳤다.
추상이 회화의 경계를 지웠던 것처럼 공포와 퍼포먼스가 뒤섞이며 현실과 꿈의 경계가 지워지고 있었다. 포스트모던이 구조를 해체했던 것처럼 나 또한 제단 위에서 해체될 터였다.
비둘기들의 붉은 눈이 날 향해 다가오는 동안 등 뒤로 검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걸음, 걸음,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 때마다 소름이 몸을 따라 역병처럼 퍼졌다.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암흑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미뤄 온 운명이 비로소 날 따라잡을 차례였다. 늑대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아픈 것도 모를 겁니다.”
경고. 결코 겁에 질리지 말 것.
그리고 나는 신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쇼든 현실이든 답은 늘 같았다. 모든 건 결국 돈의 문제였으니까. 어둠이 정수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걸 라이선스 할 수 있을까요?”
칠흑 같은 침묵이 파르르 떨렸다.

5) 빈민가 부동산 업자들이 예술가들에게 스튜디오나 갤러리를 싼 값에 임대해 원주민을 쫓아내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도하는 일. 가난한 원주민을 예술가로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아트워싱이라고 한다.
6)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 탄소 구조체를 이용해 빛의 흡수율이 99.96%에 이른다. 인도 출신 건축가 아니쉬 카푸어가 반타 블랙의 예술적 사용권을 독점하고 있다.
7) 아니쉬 카푸어가 반타 블랙의 예술적 사용을 독점하자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 ‘최고는 아니지만 충분히 검은색’. 아니쉬 카푸어를 제외한 누구에게라도 사용권이 열려 있으며, 가격도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한 편이다.


팸플릿이 도착했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제목 옆에는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서울展.’

















작가소개 / 임성순

2010년 장편소설 『컨설턴트』로 《세계일보》 세계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이어 장편소설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근영은 위험해』로 ‘회사 3부작’을 완성했으며, 포경선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 투쟁을 그린 『극해』로 평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현재 영화 시나리오와 소설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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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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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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