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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

  • 작성일 2007-06-29
  • 조회수 6,581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

                       


                                                                          이현수



                                  

창문을 열자,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방 안 공기를 밀어내듯 가르고 들어와 빠르게 서로 뒤섞인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은영은 막힌 코로 짧고 세게 훅훅, 소리 내어 바람을 들이마신다. 봄바람은 상쾌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혹시나 했다.


고등어를 졸이는 비리고 달큰한 냄새, 달래를 넣고 끓인 쌉쌀한 봄 된장 같은 밥 때면 흔히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냄새가 바람결에 맡아질까 괜한 기대를 했다. 반찬 냄새 대신 웬 새소리만 요란하게 귓전을 두드린다. 한쪽 감각이 막히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더니 후각을 잃은 대신 청각이 발달한 건 아닐까. 이제 은영은 자신의 몸 어떤 기관도 신뢰하지 않는다. 겨우내 은영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뭐야, 불감증에다 냄새까지 못 맡는다고? 정말 가지가지 하누만. 우리 은영 선배 불쌍해서 어쩌냐.”

불치의 겨울을 나는 동안 뭐가 그리도 좋은지 유정호만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감기는 질기고 느리게 진행되다가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발전했다. 감기라고 우습게 여긴 걸 후회하며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나 후각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끝내 종무소식이었다.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면서 생의 활기도 부쩍 줄었다. 후각을 잃으면 미각도 따라 상실한다는 걸 예전엔 몰랐다. 후각과 미각은 큰집과 작은집처럼 우리 몸에 그렇게 긴밀하게 얽혀 있나 보았다. 집안에 갑작스런 대소사가 발생하면 삐리릭, 제일 먼저 울리게 되는 전화벨처럼. 그 삐리릭이 끊기면서 커피맛이 없어졌고 다음엔 국, 쥐포나 오징어 따위의 말린 생선의 맛이 아득히 멀어지더니 낚지볶음의 맵고 짠맛까지도 사라졌다. 치아나 혀에 닿는 말랑하고 쫄깃한 느낌은 여전했으나 맛만 실종되었다. 단맛과 쓴맛, 비린 맛과 신맛이 무정한 연인처럼 차례차례 은영을 떠나갔다. 냄새와 맛이 사라진 세계는 건조하고 심심했다. 인간이 느끼는 오감 중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각인되는 후각을 잃었으니.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게 이렇게 큰 고통인 줄 몰랐어요. 이건 불구도 보통 불구가 아니에요. 차라리 팔이나 다리가 없는 게 낫죠.”

은영은 늙은 이비인후과 의사를 붙잡고 자신의 병증을 하소연했다.

“콧속이 부어서 그래요.”

늙은 의사는 은영의 콧속에 칙칙, 분무기에 든 약을 두어 번 뿌리고 처방전을 내렸다.  

“언제쯤이면 냄새를 맡게 될까요.”

“좀 더 치료해봅시다.”

“무슨 소견이 있으실 거 아녜요.”

동굴 탐사대원처럼 여러 기구가 달린 띠를 이마에 둘러쓴 의사는 돋보기를 눈 가까이 내리고 은영의 콧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경우 섣불리 장담하기가 어려워요. 후각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돌팔이 보듯 하는 은영의 시선을 읽었는지 의사는 겁부터 주었다.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는 동안 유정호가 집에 올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은영이 맡지 못하는 실내의 퀴퀴한 냄새를 맡게 될까봐 거실과 화장실에 방향제를 잔뜩 뿌리고도 모자라 싱크대 구멍이나 베란다 하수구에도 락스를 부어놓았다.

“사람 잡겠다야. 매워서 눈도 못 뜨겠어.”

유정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앞뒤 베란다의 창문부터 열었고 무자비하게 들이치는 겨울바람에 은영의 감기는 나날이 깊어졌다. 막힌 코로 짧고 세게 숨을 들이쉬는 은영을 유정호는 뒤에서 종종 껴안았다. 코가 막혀 불감증까지 간 상황인데 이러고 싶냐,면서도 은영은 대책 없이 몸을 맡겼다.

“냄새와 맛이 사라지니까 내가 마치 달걀의 흰 속껍질처럼 생긴 얇은 막에 감싸인 것 같아. 어떨 땐 두터운 천이 눈과 코를 지그시 누르는 것도 같고.”

“갑갑하겠다.”

“말이라고.”

“전자코를 하나 사 붙이면 어떨까.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국내에도 전자코가 나와 있어. 요놈이 얼마나 신기한지 오직 냄새로만 햅쌀과 묵은 쌀을 가려내고 중국산 인삼과 국내산 인삼도 귀신 같이 집어낸대. 그뿐만이 아니야. 유전 탐사용으로도 쓰여.”

은영은 새벽마다 맡던 조간신문의 잉크 냄새를 기억한다. 냄새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게 잉크 냄새였다. 무용지물로 변해가는 코를 가끔씩 안부 묻듯 톡 쏘던 눈물겨운 그 냄새.

“내가 체험한 바로는 세상의 모든 냄새 중 석유 냄새가 제일 독하고 강해. 유전 탐사용으로 쓴다는 건 맞는 말일 거야.”

“히죽히죽 웃고 다니니까 이거 영 사람 말을 못 믿는 눈치네. 지금 전자코가 어느 정도 발전했냐 하면 냄새만으로 암세포를 찾아낼 단계까지 와 있어. 이제 암 정복은 시간문제라고.”

“와아, 대단하네.”

“전자코 모델이 뭔 줄 알아? 개코야. 개는 인간보다 100만 배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대, 선배.”

“그럼 개는 인간보다 오르가슴을 몇 만 배쯤 더 느낀다는 말도 되네. 후각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개새끼한테 물어보질 않아서 거기까진 모르겠어. 적어도 개가 지금의 선배보단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지.”

“있잖아. 그거 얼굴에 붙이고 하면 볼 만하겠다. 개코 닮은 인공코를 붙이고 헉헉대는 거……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게 싫으면 불치인 채로라도 느껴봐. 올록볼록, 희고 얇은 난막을 갑갑하게 건드리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몸이 위로 확 솟구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거야. 그때 바로 내게 말해줘.”

“왜? 섹스에 관한 논문이라도 한 편 쓰게?”

“선배 말대로 전공을 아예 이쪽으로 바꿀까. 불감증 치료 사례 어쩌구 하며 소제목에 힘을 팍팍 주면 먹힐 것도 같은데. 히히히. 이론도 이론이지만 선배 보기엔 나 어때? 현장에서도 소질 있는 거 같지.”

“벗은 너의 몸을 객관적으로 좀 살펴보고 말해라. 그게 서른한 살씩이나 먹은 남자의 몰골이냐. 몸이라고 비리비리 말라가지구선.”

“은영 선배보단 낫다, 뭐. 자긴 나올 데는 들어가고 들어갈 데는 나왔으면서…….”

그러나 등뼈의 마디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는 유정호의 손길은 다정하고 유연했다. 입을 연 그와 입 다문 그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그의 손길에 나른하게 풀어져 있다가도 무찌를 듯 입술을 열고 들어온 그의 혀가 빨판상어처럼 변하면 재채기가 터져 나왔고, 그의 검지와 중지가 코끝과 인중을 수줍게 쓸고 가면 대번 콧속이 간질거렸다. 잠깐만. 은영은 유정호의 동작을 끊고 손수건으로 코를 팽팽 풀었다. 독한 약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에 말라버린 콧속에선 콧물의 어떤 기미도 비치지 않았다.   

“이거야 원, 도대체가 그림이 안 되누만.”

유정호는 자주 툴툴거렸다.

“그러게 누가 하랬어.”

“코를 풀 때마다 선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거 모르지. 젖은 눈에 허스키한 목소리, 죽이게 섹시하다고.”

“이 추접이 네 눈엔 섹시로 보이냐. 너 혹시 변태 아니니?”

“히히히,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불감증인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네 눈빛이 요상해지면서 나 선배랑 하고 싶어, 무지무지 하고 싶어, 떼쓰듯 그럴 때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고. 선배가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나이로서 의무감이 마악 용솟음치는데 어쩌겠어.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파도고, 회오리이고, 지진이고, 쓰나미였어. 나도 날 말릴 수가 없었다고.”

아우 말이나 못하면. 널 언제 키우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린 운명이야, 선배애.”

“촐싹거리지만 않으면 넌 참 괜찮은 앤데.”

“선밴 같은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더라. 거 왜 발랄경쾌라는 좋은 말도 있잖아.”

눈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유정호가 밉진, 않았다. 유정호를 만나면 이상하게 은영도 히히모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작정하고 히히거리며 나오는 데야 별 수 없었다. 어쩌겠냐. 히히거리는 채로라도 쭉 가야지, 뭐. 

“은영 선배. 우리 누나 좀 만나주라.”

유정호는 느끼한 표정을 하고 은영을 졸랐다. 너, 그 표정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지? 일단 태클부터 건 은영은 왜? 그 누나에서 이 누나로 옮겨 앉게, 이죽거렸다.

“키키키, 운명이 날 부르네.”

“멀리 내다봐라. 네가 마흔이면 난 쉰 문턱에 가 있어. 네가 쉰이면 난 환갑노인에 가깝고.”

“나이가 뭔 대수겠수. 요새 환갑노인들은 요염하기만 하더라. 구청 문화센터엘 가봐. 등때기 확 파진 드레스 입고 밤마다 사교춤 추는 여자들 알고 보면 전부 환갑노인들이야.”

그가 그럴 때마다 에라 모르겠다, 엎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이건 생물학적인 나이를 떠나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세상을 보는 관점부터가 차이 나잖아, 우린. 넌 단순하고 난 복잡하고, 니들 표현대로 하자면 넌 명쾌하고 난 구리고.  

“솔직히 난 네가 맹맹해. 귓소금 안 치고 담근 새우젓처럼 요렇게 맹맹한 마음인 채로 너랑 맹맹하게 살아야 속이 시원하겠냐.”

변죽을 울려봤자 유정호의 귓구멍은 막혀 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은영도 알았고 유정호도 알았고 그 결과가 우리 누나 좀 만나주라, 였는데도 버틸 만큼 버텼다. 모양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나 사회적인 관습을 떠나 왠지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자꾸만 목덜미를 낚아채는 기분이었다. 이 찜찜함은 뭐지? 자그마치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늙다 못해 쇤 여자의 심란함으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미진했다. 

막힌 코로 짧고 세게 숨을 들이쉰 은영은 창문을 닫는다. 봄바람은 포근해 보여도 엄동의 찬 기운을 씨앗처럼 품고 있어 어느새 맨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기왕이면 귀엽고 예쁘게 입고 나가. 유정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은영은 그럴 생각이다. 그는 귀엽다는 말 대신 어리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왕이면 어리고 예쁘게 입고 나가, 라고. 아무리 아닌 척 비벼대도 여덟 살의 나이 차가 주는 지뢰밭은 곳곳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포진해 있었다.   

지뢰밭을 뛰어넘어야 하는 쪽은 왜 항상 네가 아니고 나니?    

  

이번 주 계속해서 입었던 정장슈트는 젖혀놓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지만 마땅한 게 눈에 띄질 않는다. 망설이다가 리본 달린 흰 블라우스와 네크라인이 시원하게 패인 진회색 반소매 카디건, 인디언핑크색 주름치마를 꺼내든다. 몸에 대보니 맞선 자리에 딱 맞아떨어지는 컨셉이다.

“생각보다 어려보이네요.”

무신경하거나 지나치게 솔직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말을 정호 누나는 거리낌 없이 한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은 남동생의 연인을 보는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 은영은 고맙습니다, 로 넉살 좋게 받는다.

“사실 우리 정호 얘길 듣고 많이 복잡했어요.”

정호 누나, 너무 쉽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어쩌지? 목주름은 블라우스의 리본으로 감췄다곤 해도 이제 서서히 콤팩트로 숨긴 눈가의 주름이 드러날 텐데.  

“제가 뻔뻔해 보이죠.”

정호 씨가 하도 졸라서, 라는 말은 열두 폭 치마 속에 감춘다.

“어, 그런 건 아니구요.”

저쪽이 오히려 당황하는 눈치다. 겨우 두 테이블만 손님이 있을 뿐, 카페 안은 한적하다. 무심코 카페의 원목 바닥에 눈길을 떨구던 은영은 탁자 밑으로 비어져 나온 정호 누나의 겨울구두를 본다. 철 지난 구두가 쌀에 섞인 뉘 같다. 옷에 핸드백에 딴엔 빼입고 나왔어도 구두까지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호 누나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초등학교 교사의 부인이랬다. 밥은 있지만 식후에 먹을 후식이 없고 아이들 학원은 보내지만 과외는 시킬 수 없는, 늘 이가 하나 정도 빠진 살림을 꾸려왔을 것이다.

“주말에 전주 집에 인사 가기로 했다죠.”

둘이서 짜고 치는 화투판에 내 허락이 뭐가 필요하냐, 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남편 눈치 봐가며 동생 거둔 티를 내는 것 같지도 않다.

“우리 집이 좀 그래서요.”

은영도 안다. 시골집에선 등록금만 달랑 올려 보내는 터라 정호 누나가 밥 먹이고 용돈 줬다는 걸. 그래서 은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간강사인 그를 뒷바라지 할 아내로는 전문직 여성이 알맞다고, 시간강사 벌이나 농촌 총각 벌이나 그게 그건데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신부는 보면서 나이 많은 순혈 토종신부 못 볼 것도 없다고, 유정호의 집에선 득과 실을 따져 일찌감치 계산 끝냈을 것이다. 아, 이럴 땐 유정호의 집이 가난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가 보면 알겠지만 우리 집안이…… 다른 집과는 좀 달라요.”

이 무슨 말씀? 집이 아니고 집안이란다. 그럼 가정사? 아니, 가난 얘기가 아니었잖아. 유정호 이 인간 또 미꾸라지처럼 혼자만 빠져나갔네. 아랫배에 힘을 줬더니 눈이 자동적으로 동그래진다. 평소 유정호의 행실로 봐선 누대로 애정사가 난잡할 확률이 가장 높다. 큰어머니에 작은어머니, 죽을 날 먼 뒷방 할머니에 과거 행적이 수상한 작은할머니까지…… 캐면 캘수록 배 다른 형제나 삼촌들이 감자줄기처럼 주렁주렁 달려 나오겠지. 잘못하다간 결혼생활 내내 불우이웃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달이 멀다하고 목돈 드는 자선바자에 숱 적은 눈썹을 휘날리며 부리나케 뛰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주스 잔의 테두리를 검지로 훑던 정호 누나가 매듭짓듯 말한다. 

“처음이 힘들지 살다보면 그럭저럭 적응될 거예요.”

저 말처럼 무서운 게 어디 있나.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노예나 검투사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 사형수도 다들 처음에만 힘이 들지. 점점 뒷골이 당긴다. 

“선배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그렇다고. 서른 하나, 꽃 피는 인생인데 김빠진 사이다처럼 요렇게 맹맹한 채로 선배랑 살아야겠어.”

곰곰 생각해보니 유정호의 요 말도 수상하다. 노예나 검투사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할 사형수 형편이면 당연 결혼은 못하는 거지. 은영은 키위주스가 반이나 남았는데도 토마토주스를 한 잔 더 주문한다. 정호 누나가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은영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 유정호나 정호 누나나, 유씨들이 단체로 무섭다. 설마 잠깐 조는 틈에 꾸는 어지러운 낮꿈은 아닐 테지.


인줏빛 불꽃이 눈알을 파고들 듯해 은영은 거푸 눈을 비빈다. 동아시아 최고의 불꽃 문양으로 일컬어지는, 6세기경 중국 운강석굴에서 발견된 벽화 가운데 하나인 화염문(火焰紋). 무덤 속 습기와 암흑, 그 오랜 세월의 부침에도 화염문은 상한 데 없이 오롯하다. 꽃대궁 모양의 속불꽃을 심지 삼아 괄하게 타오르는 겉불꽃은 흡사 또아리를 튼 열 마리의 뱀들이 붉은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하늘로 기어오르는 것 같고 옆으로 번진 잔 불꽃과 점점이 튀는 불티까지 선명하다. 포스터 위에서 한참을 머뭇대던 은영의 손이 날렵하게 움직인다.

“이대로 가. 컬러 톤도 좋고 핀도 잘 맞잖아. 대체 뭐가 문제란 거지.”

은영은 포스터를 앞으로 쭉 밀다가 눈살을 찌푸리곤 다시 제 앞으로 끌어당긴다. 이제야 알았냐는 듯 학예사 김이 어깨를 으쓱한다. 벌써 노안이 온 모양이다. 포스터의 배경으로 찍힌 해태상이 영 아니다. 빛이 과다노출 됐는지 석상이 밋밋한 게 볼륨감이 적다. 광화문 해태상의 사진을 쓴 게 잘못이리라. 이래가지고서야.

“부조의 양감이 시원치 않네.”

해태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라 하여 궁궐이나 불교건축의 장식물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옳고 그름과 선악을 구분한다 여겨 조선시대 대사헌의 흉배에도 수놓인 영물이다. 풍수설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에 해태상을 세운 것처럼 이번 화염문 특별전 포스터의 배경에도 해태상을 넣었다. 화기가 승하면 눌러야 한다. 독사의 혀처럼 널름거리는 화염의 기운을 누르는 건 오로지 해태상의 몫이다. 애당초 광화문 해태상 대신 온양 민속박물관이 소장한 해태도를 쓸 예정이었으나 조선후기에 그려진 민화여서 유아스럽다는 게 흠이었다.    

“아쉬운 대로 온양 민박의 해태도라도 갖다 쓸 걸 그랬나?”

은영의 말에 대뜸 김이 반박하고 나온다.

“포스터가 뭔데요. 관습적인 합의가 바탕에 깔린 표적이잖아요. 특별전 포스터는 불이 훨훨 솟구치며 기운 충천인데 온양 민박의 해태가 배경으로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세요. 김이 팍 새고 말죠.”

“그렇지? 온양 민박의 해태는 눈에 독기가 없어.”

“그냥 광화문 해태상으로 가요. 약간 무식해 보여도 풍채 좋고 근엄하잖아요.”

“시간도 없는데 그래야겠지.”

특별전 날짜는 다가오는데 도록은 때맞춰 나오질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포스터까지 속을 썩인다. 홍보회사에 전화를 해봐도 포스터 담당자는 자리에 없다. 핸드폰도 꺼진 상태다. 도록 때문에 아침부터 출판사가 있는 파주와 신촌 인쇄소까지 뛰어다녔더니 눈은 뒤통수까지 들어갔고 점심으론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포스터 수정 작업은 요기나 한 다음에 하자고.”

“그래요, 까짓것. 안달복달한다고 디자인 담당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별동대를 자처한 보존과학실 막내가 밖에 나가 사 가지고 온 피자와 순대, 떡볶이가 회의실 탁자에서 식어가고 있다. 순대와 떡볶이가 든 비닐봉투의 주둥이가 벌어진 걸로 봐선 아까부터 냄새를 피웠을 것이다. 은영이 맡지 못하는 매옴하고 콤콤한 그런 냄새. 일층인데도 외부에서 보면 반지하 같은, 지대가 낮아 벚나무 둥치만 보이는 창에 눈을 두고 은영은 입안의 음식물을 맛없이 씹는다. 꼽아보니 생리 하루 전이다. 후각과 미각이 사라진 데다 생리까지 신호를 보내니 입맛이 있을 리 없다. 내일이면 덩어리가 진 검붉은 생리혈이 뭉텅뭉텅 흐를지도 모르겠다.  

조계종 산하 불교박물관은 덩치만 컸지 학예직이라고 해봤자 학예관인 은영과 학예사 두 명이 전부다. 보존과학실 직원 두 명과 총무과 직원 한 명, 경비와 청소부까지 도합 열 명 남짓한 인원이 불교박물관에 상주하고 있다. 관장인 지원스님은 대외적인 일만 맡아서 할 뿐 박물관을 꾸리는 일은 학예실장인 은영이 한다. 이번 특별전도 처음엔 사리전으로 갈까 하다가 화염문으로 바꿨다. 화염문은 부처의 광배로 쓰이기 때문에 불가에서는 친숙한 문양이다. 사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눈에 익기는 하지만 화염문을 제대로 아는 불자들이 적다는 게 막판에 뒤집어진 이유였다.

“불사에도 어두운 땡중이 뭘 알 리 있소이까. 화염문이면 어떻고 사리면 어떻습니까. 나야 아무래도 좋으니 야근이 끝나면 곡차나 한 잔들 하고 가시지요.”

사리보다는 화염문이 어떻겠느냐고 은영이 물었을 때 지원스님은 회식비가 든 봉투만 건네고 한 발 뒤로 빠졌다. 허나 특별전이 열리면 지원스님의 빛나는 활약이 시작된다. 시종 하회탈 같은 미소를 띠고 장삼자락 펄럭이며 관람객 유치부터 문화계 인사들과 보살들의 접대까지 자신의 업무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것이다. 서로 입 열어 말하지 않았는데도 지원스님과 은영은 여태 그런 식으로 손발을 맞춰오고 있다.

“정호 선배, 들를 때도 됐는데.”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찍어먹던 학예사 김이 흘긋 은영을 본다. 한 사람의 손도 아쉬운 형편이니 유정호 생각이 날 만도 하다. 불교박물관 개관 무렵, 유정호는 촉탁직원으로 1년가량 일했다. 강의가 많아지면서 박물관을 그만둔 뒤에도 무료로 일손을 빌려주었고 은영 옆에 덤으로 낀 주제에 주인 행세하며 직원들과 잘 지내고 있다. 은영을 불교박물관에 추천한 박 교수는 유정호의 지도교수다. 굳이 가르자면 유정호는 박 교수의 직계 제자이고 은영은 방계쯤 되는 셈이다. 학예사 김과 유정호는 대학 선후배로 스스럼없는 사이기도 하다. 이렇듯 국박이나 사립 박물관 직원들은 학연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정호와 서은영의 연애담은 그런 연줄을 타고 민들레 갓털처럼 퍼져나가 이젠 전국 박물관과 대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특별전 때문에 주말과 휴일도 반납하고 일한 지 3주째. 전주에 간다는 말이 은영의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이번 주말과 휴일에도 직원들이 출근할 게 뻔한데 학예실장이 개인적인 일로 빠진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질 않는다. 특별전이나 마치고 전주에 가자고 했더니 유정호는 단번에 은영의 말을 잘랐다. 선배 내가 급해서 그래. 은영은 뭐가 그리 급하냐고 물을 수 없었다. 보나마나 19세 이하 청취 불가의 노골적인 대답을 할 게 분명했다. 며칠 전 은영을 보러 온 유정호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지하 수장고 불상실까지 졸래졸래 따라왔다.    

“난 이상하게 부처들만 보면 흥분되더라. 핏속 호르몬들이 장난치나봐.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의 수치가 팍팍 오르는 게 느껴져. 선배 나 어떡하냐. 더는 못 참겠어.”

불상들을 지나치며 제풀에 얼굴이 벌게진 유정호가 은영의 귓속에 뜨거운 숨을 후후 불어넣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노상 헷갈리게 하는 인간이지만 그 말만으로도 불경의 극치를 향해 치닫고 있는 셈이었다.   

“저 금동 보살좌상 앞에서 선배랑 함 하면 안 될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공덕 아래 우리 한 번만 하자, 응.”

유정호가 가리킨 금동 보살좌상은 불상실 한쪽 구석에 있었다. 번쩍거리는 수많은 금불상 중 그것만 시커멓게 녹이 슬어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녹 제거를 위해 보존과학실로 옮기려고 대기 중인 불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유정호의 취향은 기괴망측했다.   

“미쳤어! 공과 사도 구분 못하니. 여기가 어디라고, 내 밥줄까지 끊고 싶어.”

“너무 그러지 마. 내가 부단히 몸을 닦아 선배 몸에 길을 내면 혹 알아. 천문이 쫘악 열려 중박에서 못 푼 석가탑 중수기 비밀 푼다고 나설지. 난 순전히 국가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으로다…….”

“중박에서 퍽이나 반가워하겠다. 중박 문턱도 못 넘고 쫓겨 올 주제에.”

“킬킬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웃느라 밑으로 촉 처진 유정호의 눈을 보자 은영의 몸이 탄소동화작용을 일으킨 듯 푸릇푸릇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거듭 제어장치를 가동시켜도 그를 향한 갈망이 덩굴손처럼 쭉쭉 뻗어나갔다. 사랑의 충만함을 다스리는 호르몬이 감정 뒤에 숨어서 수렴청정을 시작한 모양이다. 은영은 이 조짐이 떠난 몸의 감각이 되돌아오려는 반가운 신호라고 생각했다. 유정호는 하루 먼저 전주에 내려가 있겠다고 했다. 국가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의 거사는 전주에서 진하게 치르자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못 본 지 겨우 사흘인데 유정호가 그립다. 짜글거리는 기묘한 웃음소리도. 


고향집을 보는 건 그 사람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런 이유로 이번 전주행은 은영에게 기대가 반이고 근심이 반이다. 전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 희고 동그란 유정호의 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런데 뭔가 좀 달라졌다.

“이 대명천지에 웬 머슴인가 했어.”

“선배, 이 옷 어때? 나한테 어울리지.”

“아니, 엄청 웃겨.”

천연 염색을 한 생활한복이라니. 게다가 구색 맞춰 흰 고무신까지 신었다. 수염을 기르고 댕기머리를 하면 예술가를 지향하는 문화애호가 행색이 나올 것도 같다. 지금이라도 인사동 사거리에 서 있으면 이런 복색을 한 남자들이 적어도 십 분에 한 명씩은 지나갈 것이다. 낮은 건물들이 어깨를 잇댄 한적한 구시가지를 지날 즈음 은영이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비온 뒤에 나온 희끗한 햇살이 은영의 손바닥에 서름하게 내려앉는다. 서름하긴 옆에 앉은 유정호나 전주천도 마찬가지다. 일 때문에 몇 번 왔는데도 전주가 초행길처럼 낯설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로 가는 길의 차이가 그런 건가 보다. 비슷해 보여도 맛이 다른 비빔밥과 볶음밥의 차이처럼. 유정호는 전주 한옥마을 앞에서 택시를 세운다. 남은 이벤트가 또 있나 보다. 

“집부터 가야지, 어딜 들렀다 가려고.”

은영이 뒤에서 구시렁거리는데도 유정호는 짐을 들고 내처 걷더니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한옥 보존 지역으로 지정된 후 이 동네를 전부 버려 놨다. 너도나도 함부로 집을 지어 조잡한 티가 폴폴 난다. 공장에서 막 찍어낸 싸구려 기와에 황토로 담을 쳐서 올리긴 했지만 서툰 미장 솜씨가 봄볕에 확연히 드러난다. 새로 리모델링하는 집이 있어 넘겨다보니 인부 셋이 마루와 대청의 나무기둥에 달라붙어 검게 그을린 세월의 때를 쇠칼로 북북 긁고 있다. 저만치 앞서 가던 유정호가 골목길에 서서 은영을 기다린다. 키가 허리께에 닿는 조팝나무가 울타리 삼아 조록조록 늘어선 골목의 끝머리, 유정호의 등 뒤론 3칸 솟을대문이 보인다. 적벽돌로 촘촘하게 쌓아올린 담의 윗면엔 지푸라기 섞인 흙벽에 네모진 나무판자가 박혀 있고, 날아갈 듯 솟은 팔작지붕의 처마가 솟을대문 너머로 은근슬쩍 걸렸다. 가짜 속의 진짜를 보는 기분이랄까. 날림으로 지어 한옥 흉내만 낸 주변 집들과 대조적이어서 그 집은 한결 위엄 있어 보였다.

“여기가 어딘데?”

“우리 집이야.”

“오오, 그래. 우리 집에 비하면 새발의 피군. 경복궁이 우리 집이거든.”

웃음을 깨문 은영은 목을 길게 빼고 유정호가 등으로 가린 표지판을 읽는다. 이 집은 전북 민속자료 제8호로 조선 말기에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전승받아 지은 상류층 주택으로 대지 152평에 건평 69평. 일류 도편수와 목공 4280명이 동원되어 2년 6개월에 걸쳐 지었고, 공사비용만 백미 4000석을 들인 7량 가구 곱은 자 집이다. 남유당의 현판은 당시 명필 김돈회가 썼으며 택호는 고종에게 하사받았다고 씌어 있다.   

“들어가지.”

유정호가 제 집처럼 솟을대문을 밀자 비스듬히 열린 문으로 ㄱ자형 집이 쑥 들어온다. 숫막새와 암막새로 된 기와며 처마가 맵시 있게 들린 부연추녀와 배의 선창 같은 이국풍의 삼각형 창문이 지붕 위로 세 개나 뚫린, 팔작지붕의 우람한 위세만으로도 은영의 기가 꺾인다. 팔작지붕을 일별한 은영이 추녀 밑, 활달한 필체로 쓴 남유당의 현판을 훑고 있는데 유정호는 대문 옆 사랑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형수님.” 

유정호는 이 집 주인과도 형제처럼 지내는 모양이다. 워낙 유들유들하고 비위가 좋아 은영이 아는 유정호의 형수님만도 한 다스가 넘는다.

“어머나, 도련님 오셨네.”

사십대 후반이거나 오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오더니 유정호의 가방을 받아든다. 순간 일이 야릇하게 되어간다는 생각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은영을 덮쳤다. 다행히 사랑채는 전통찻집으로 꾸며져 있다. 마음이 놓인다.

“오느라 힘들었죠. 편하게 앉아요.”

여자 역시 회색과 황토색의 천연염료로 물들인 생활한복을 입고 있다. 여자가 입은 한복은 치마가 아닌 바지여서 편해 보이고 오래 입어 그런지 몸에 착 붙는다. 이 동네는 생활한복을 입는 게 유행인 모양이라고, 옷 입은 꼴로 봐선 유정호네 집도 이 근방 어디쯤일 거라고 짐작한 은영은 그제야 실내를 둘러본다. 찻집은 한지 바른 벽에 나무탁자와 화각장 같은 고전적인 집기들로 장식되었고 축음기가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 축음기는 60년쯤 된 거야.”

“이런 집에서 그쯤이야. 근데 이 집 참 대단하다.”

유정호가 입은 생활한복도 수상하고 하는 짓도 전에 없이 낯설어서 은영은 차나 마시고 어서 집으로 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여자가 차를 내오며 이상한 말을 한다.

“도련님 차부터 마시고요. 식사는 어머님이 일어나시면 하죠.” 

여자의 말에 은영이 입술만 움직여서 “뭐야?” 하고 유정호에게 항의하는데,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던 여자가 “내가 유정호 씨 형수예요” 한다. 이 찻집만 세를 냈나, 하는 생각이 은영의 머리를 스칠 때쯤 “여긴 우리 집이고요. 도련님이 태어난 생가이기도 하고요.” 눈을 내리깐 여자가 야물게 제 할 말을 다 한다. 그러고는 차와 곁들일 다식 접시도 잇따라 내려놓는다. 투박한 도자기 접시에 노란 송화다식들이 나란나란 놓여 있다. 그림 같다.

“일부러 만든 거니까 먹어봐요.”

은영은 형수가 안 보는 틈을 타, 이따 보자는 투로 유정호에게 눈을 흘긴다.  

“어머님과 저, 여자 둘만 여기 살아요. 도련님과 아가씬 가끔 내려오고요.”

“아…… 예.”

“우리 집은 민속자료로 지정은 됐지만 내부 개방을 안 해서 비교적 조용해요. 차 마시러 오는 손님들도 많지 않고요. 내년엔 전부 개방하려고 합니다. 도련님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종가는 쇠해도 향합은 남는다는 말이 있지요? 한 집안의 영고성쇠는 무상해도 전통이나 가풍은 길이 전해진다는 뜻이에요. 은영 씨라고 했나요. 결혼을 하게 되면 주말마다 여기 내려와야 할 거예요. 어머님과 난 이 집을 지키는 사람에 불과하고 엄연히 14대 종손은 도련님이니까요. 집을 개방하면 일주일에 하루 정돈 종손 노릇 해야죠.”

“어?…… 그런 말은 차차……

당황한 유정호가 형수를 막아선다.

“형수, 은영 선밴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어머님이 깨시면 바로 들이댈 텐데 그보단 나한테 듣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서도…….”

유정호는 난처한 얼굴로 은영을 보더니 괜스레 입맛을 쩝쩝 다시며 “엄만 무슨 낮잠을 이리도 길게 주무시나. 또 반주 드셨어요?” 형수에게 묻는다. “어련하시겠어요.” 미간을 좁히며 말을 받은 형수는 은영의 아래 위를 뜯어본다. 몇 그램이나 나가나, 저울 눈금을 읽는 듯한 저 눈길. 카페에서 은영을 훔쳐보던 정호 누나의 눈과 비슷하다. 은영은 단체로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들어와 앉은 것 같다. 옆에 앉은 유정호도 은영이 알던 그 촉새 같은 남자가 아니다. 유정호, 너 죽었어.  


“이 집이 자기 집이었어?”

안에서 형수가 듣거나 말거나 뒤따라 나오는 유정호에게 쏘아붙인다. 지금 은영은 형수에게 체면을 차릴 기분도, 그럴 형편도 아니다.

“그래봤자 일개 아전 집이야.”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날 속였잖아. 뭐? 가난한 빈농의 자식이라고?”

“선배, 우리가 가난한 건 맞아. 집만 멀쩡하지 완전 빈털터리야. 형수가 전통찻집을 해서 근근이 생계를 꾸리니까.”

“니 말은 안 믿어. 가난한데 사랑채의 주추가 호박주추냐? 호박주추는 창덕궁에나 놓인 거야. 일개 아전이 궁궐에서 놓던 주춧돌을 놓고 살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안채의 저 등내리 문(문살의 등이 볼록하게 되도록 대패로 밀어 만든 창살)하며, 보면 볼수록 닐니리 기와집이다야.”

남유당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건너가려면 정원을 지나야 한다. 정원 한가운데 작은 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동산에는 둥치가 휜 소나무들이 어른어른 호랑이 무늬의 그늘을 드리우고 소나무 아래 그늘진 곳엔 키 작은 관음죽들이 자란다. 바람이 불면 양지에 선 줄기 가는 나무들이 팔랑팔랑 잎을 뒤집으며 사방에 빛을 흩뿌린다. 그늘은 깊고, 햇빛 비치는 쪽은 명랑하고 나른하다. 은영은 답사를 통해 수많은 고택들을 두루 봤지만 남유당처럼 호화로운 집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개인 소유의 주택이라 한들 민속자료로 지정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남유당을 몰랐을까. 왜 문헌에서 본 적도 없었을까.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 그 해 우리 증조부는 전주 감영의 아전이었어.”

그러고 보니 유정호에게선 아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도 같다. 종가는 쇠해도 향합은 남는다는 형수의 말은 맞다. 백년이 지났어도 아전의 촐싹거림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아전의 이미지가 호도되거나 폄하된 구석이 없진 않지만, 어쨌거나 한 번 경망한 핏줄은 대대로 경망하고나. 은영은 새삼 핏줄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아전이었지만 전라 감사의 인사권을 쥐고 있을 만큼 세력이 대단했지. 대원군은 충청도 양반과 평양 기생, 전라도 아전이 조선의 세 가지 큰 폐라고 했지만 고종의 생각은 달랐어. 남쪽에서 믿을 만한 자로는 유씨 성을 가진 아전이 유일하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남유당이란 택호도 고종이 직접 지어준 거고. 그렇게 되기까지 궁궐에 갖다 바친 재물이 얼마겠어. 내 증조부가 어떤 방법으로 축재를 했냐 하면 돈 많은 지주나 토호들을 불문곡직 잡아들여 물고를 내. 그러곤 당신도 농민군과 한패지, 그들 뒤를 봐줬지, 그 말 한 마디면 곡식과 피륙이 바리바리 들어 와. 그랬으니 진짜 농민군은 얼마나 잡아다 죽이고 가뒀겠어. 이재에 밝은 증조부는 농민군과 지주, 양쪽에서 재물을 뜯어낸 거야. 동학혁명이란 틈새시장을 제대로 활용한 케이스지.”

무더기로 핀 영산홍 옆에 좁쌀을 엎지른 것처럼 희끗희끗한 게 눈에 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잘한 잡풀들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다. 물에 불린 엿기름을 체에 문지르면 삐질거리며 나오는 녹말분처럼, 반쯤 눌린 흰 꽃망울들이 연두색 줄기에 오보록다보록 매달려 있다.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이렇게 예쁜 오월인데, 유정호 저 인간은 낯빛도 붉히지 않고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다.

“저기 우물 보이지? 요즘도 저 우물로 돌멩이가 날아들어.”

안마당에 우물 있는 집이 흔치 않은데 남유당의 안마당엔 아주 깊고 넓은 우물이 있다. 우물 속 물이 고인 곳까지 사람이 걸어들어 갈 수 있게끔 돌계단이 돌아가며 둥글게 빙빙 놓여 있어 위에서 보면 우물이 아니라 로마시대에 지어진 지하 동굴 같다. 선대가 백년 전에 경치 삼아 저런 우물을 안마당에 파고 살았을 정도면 후손된 도리로 그깟 돌멩이 세례쯤 받는다 한들 크게 억울할 건 없겠다, 싶다.  

“최제우가 세운 천도교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간신히 명맥을 잇는 정도지만, 전주 모악산 밑 구리골에서 강증산이 일으킨 후천개벽사상인 증산도는 그 세가 날로 번창하고 있어. 물론 두 종교의 뿌리는 동학이고. 그게 농민군의 후손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여기 살고 있다는 증거야. 내 조부와 아버지는 그들에게 돌멩이를 맞아가며 이 집을 지켜냈어. 백년도 더 된 세월을 일러 사람들은 과거나 흘러간 역사라고들 하지만 과거가 현재인 사람도 있어. 흘러 간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게 아니라 그때 그 시간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 빼도 박도 못하고 한 자리에 붙들려서 빠르게 흐르는 현재를 망연자실 바라만 보는 사람들. 종택을 지키는 종손이나 종부들이 그렇고, 나 역시 그렇고, 지금도 심심하면 돌멩이가 날아오는 이 집도 그런 셈이지.”

“그래서? 나란히 돌 맞아가며 같이 살자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지은 이 집에서? 학예관 서은영이 남유당의 종부가 되면 어물쩍 덮을 것도 있을 것 같아서 오라, 그래서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구나. 여덟 살이나 어린 네가 결혼하자 그러면 내가 입이 해발쪽 벌어져갖고 칠렐레팔렐레 미친년처럼 덥석 결혼할 줄 알았니?”

은영의 강펀치에 식식거리며 대들 줄 알았던 유정호는 뜻밖에도 차분하다. 풀이 죽을 대로 죽은 유정호를 보자 모성애와 흡사한 또 그놈의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걸 느낀다. 언제 눈에 불을 켰던가 싶게 은영은 오지랖을 넓디넓게 펼친다.    

“넌 왜 역사학도가 됐니? 엔지니어나 항공기 조종사, 청과물 경매사나 남자 미용사, 뭐 그런 직업을 택했으면 골치 아픈 이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억하려고. 내 나라, 내 집안,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모든 걸. 옳은 것만 역사는 아니잖아, 선배. 남유당의 내부까지 완전 개방하려는 건 이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농민군의 후손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야. 본래 그들 거니까. 자 봐라,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이 집이 온전한 형태로 여기 남아 있다, 라고. 그때쯤이면 엄마와 형수는 뒤꼍 별채로 들어가실 거고.”

삶이란 까발리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내 알고 지 알고 하늘이 알지만 살짝 속아줄 수 있는 틈을 여투는 것, 지금 유정호가 하는 말의 고갱이는 그런 것이다. 그 틈을 여투는 데 은영을 보태고 싶다는 뜻이 내포된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어지러운 마음도 다스릴 겸 다리쉼을 하려고 우물턱에 걸터앉는 은영, 벌써부터 이 집에서 하룻밤을 지낼 일이 걱정이다.


“불을 끄시오…… 부르을…….”

녹슨 칼을 사포에 문대는 듯한 뻑뻑한 쇳소리가 누마루 쪽에서 날아왔다. 형수가 빠르게 형광등을 끈 사이, 먹빛 어둠 저편에서 한 아름 가량 되는 풀뭉치 같은 게 돌돌돌 굴러온다. 그게 사람이라는 걸 어둠이 눈에 익고 나서야 알았다. 꽉 쥐어짠 행주처럼 주름진 얼굴과 궁상맞게 옹송그린 등, 가슴에 접어붙인 빼빼 마른 다리. 사람의 형상이 어째 저럴까 싶어 은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안채에선 밤에도 전등을 못 켜요.”

형수는 공처럼 굴러온 노인의 겨드랑이 속으로 양팔을 집어넣고 번쩍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자리에 앉힌다. 노인을 다루는 형수의 손놀림이 퍽 익숙해 보인다. 대청에서 유정호가 켜든 초의 둥근 불빛이 흔들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안방 문이 이중으로 된 갑창(미닫이 안쪽에 덧끼우는 미닫이)이어서 방은 여전히 어둡다. 누가 집에 불을 지를까봐, 식구들이 실수로 불을 낼까봐, 불이라면 기겁을 해서 밤에도 전등을 켜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노인이 빛바랜 단추 같은 눈으로 은영을 쏘아보고 있다. 이건 은영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남유당 종부의 모습이 아니다. 경주 최 부자 집을 비롯해 은영이 아는 여러 종가의 종부들과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다.   

밤엔 불 단속을 하느라 풋잠을 잔다는 노인의 낮잠은 그래서 더욱 깊었다. 노인을 기다리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설거지가 끝나도록 깨질 않아 은영은 형수와 남유당 안채를 둘러보려 나섰다. 유정호는 흰 고무신의 뒤꿈치만 잘라낸, 희한하게 생긴 슬리퍼를 신고 은영을 따라다녔다. 여러 방들과 대청, 누마루를 연결하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마루를 걷다 보니 남유당에선 왜 저런 슬리퍼를 신는지 이해가 되었다. 슬리퍼의 바닥이 골마루에 착착 붙으면서도 소리가 전혀 나질 않았다. 남유당의 구조나 역사에 관해 설명하는 형수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넘쳐났고, 유정호는 형수가 말하는 족족 옆에서 판을 깼다.   

“조부 때부터 내려오는 남유당의 가훈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돈 벌지 마라, 야. 이 집 뒤로도 만 평가량 되는 후원이 딸려 있었어. 울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야금야금 죄 팔아먹었지.”

“아이 은영 씨, 왜 그거 있잖아요.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분위기. 그래서 가훈도……

안색이 변한 형수가 방과 마루의 모든 천장에 다락 형태의 통로가 있고 그 통로는 팔작지붕으로 뚫린 삼각형 창문과 연결된다는, 이 집을 지은 증조부의 과학적인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내며 천재지변에 대한 대비라고 설명하면 유정호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인재에 대한 대비, 라며 형수의 말을 끊었다.

“언제 농민군이 쳐들어올지 몰라, 빨리 내뺄 수 있는 비상통로를 천장에 만들어둔 거라고. 생각하면 불쌍한 양반이지.”

은영은 두 사람의 말다툼을 귓등으로 들으며 다락으로 올라갔다. 과연 툭 트인 비상통로가 보였다. 다락에서 비상통로로 연결되는 나무계단과 벽은 매일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반들반들했다. 은영은 날마다 이 집의 구석진 곳까지 닦는 손이 궁금해졌다. 유정호도 유정호지만 형수도 대단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사사건건 옆에서 훼방 놓는 유정호에게 열을 받았는지 이번엔 음식을 들고 나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남유당의 밤떡이란다. 삶은 밤을 절구에 찧어 소금과 설탕을 친 것으로 접시 가운데 무로 심지를 박아 탑신처럼 쌓아올린 것이다. 모양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먹어봐요.”

형수는 스푼을 쥐어주며 느긋하게 은영의 평을 기다렸다. 한 스푼 입에 떠 넣자, 혀에 닿기 무섭게 사르르 녹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별미였다. 슈크림 같기도 하고 굳기 직전의 초콜릿 같기도 했다. 그때 은영은 후각과 미각이 소리 소문 없이 돌아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떠난 것은 귀신같이 알아도 돌아온 것에 대한 반응은 그토록 느린 모양이다. 득의에 찬 형수의 얼굴을 보며 은영은 밤떡을 만든 손이 또 궁금해졌다. 딱딱한 껍질을 까고 물에 불린 밤의 속껍질을 일일이 벗긴 그 손의 임자는 누구인가.

“엄마, 막둥이 색시감이 왔는데 무슨 낮잠을 그렇게 자. 어디 아파?”

안방으로 들어온 유정호가 초를 촛대에 꽂으며 응석을 부리자 노인의 입이 흐물쩍 벌어진다. 

난 암시랑토 안 혀. 샥시, 이리 가차이 와 안거.”

형수가 가져온 저녁상을 찌그렁한 눈으로 보더니 노인은 은영을 손짓해 부른다. 은영과 유정호, 형수가 저녁 반찬으로 먹었던 것 중 고기와 생선을 뺀, 나물로만 이루어진 간소한 밥상이다. 노인은 무른 나물을 밥에 얹어 쪼물쪼물 몇 숟가락 떠먹곤 숭늉으로 남은 배를 채우고 상을 밀어 낸다.

“종부는 하늘이 낸다지만 시방 시상엔 얼척도 없는 얘기여. 이것저것 개릴 것도 없이 우린 기양 토종이면 되야. 암만 그리도 동남아 샥시를 14대 종부로는 못 들잉게. 내 봉께…… 샥시는 장딴지도 조선무시겉이 뚜껍고 허리도 절구통마냥 튼실한 거이 종부로는 딱이여.”

유정호가 모처럼 살판난 얼굴로 킥킥 웃고, 형수는 고개를 푹 숙인 품이 웃음을 참는 눈치다. 노인이 손을 들어 형수를 가리킨다.

“쩌기, 쩌것은 유씨 집안 13대 종부여. 손 맵씨도 있고이 아조 음전한 거시 태생이 양반이여.”

그때야 비로소 은영은 노인의 손을 본다. 은영이 궁금했던 그 손은, 앙상하게 마르고 안으로 오그라들 듯이 굽어 이젠 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손이다. 그 손으로 밥풀이 묻은 주름진 턱을 쓸어내리더니 웅얼웅얼 말을 이어간다. 바짝 웅크린 몸 안에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쌓여 있는 것인지, 노인의 얘기는 끝이 없다. 

“숭이 있다문 허리가 얍실헌게 뒷심이 부족햐. 뭘 한나 하면 대건한지 주둥이가 부르터서 똑 표시를 내. 그 숭만 빼면 종부로야 일등인디 끝꺼정 종부할 팔자는 못 되는 갭이여. 자석도 없이 이태 전에 서방마저 저 시상으로 보냈응게. 삼신할미가 무심치 앉아 끝물에 우리 쟁호, 저거 하나 건진 거이 천운이여. 막둥이라 철이 쪼깐 없어 글치. 그랴도 쟈가 대학 선상 아니여. 샥시 생각은 으쪄? 여기꺼정 니러온 걸로 봐선 생각이 있제이? 날 잡자. 더 볼 것도 없당게. 조선무시겉이 뚜껍은 다리 한나만 봐도…….”    

왈칵 비애가 밀려온다. 사람들은 왜 장딴지가 두껍고 허리통이 튼튼한 여잔 꿈이나 장래희망도 겸손할 거라고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편견이나 착각인 줄 알면서 그 늪에 빠지는, 허방인 줄 알면서 빠지는 허방이 인생의 가장 큰 위험요소 아니던가. 깃털처럼 보드라운 신부든, 풀 먹인 옥양목처럼 뻣뻣한 신부든, 신부의 꿈은 다 같다는 걸 왜 모르는가.

“본시 우리 문중은 손이 귀햐. 그 거이 묏자리 탓이여. 증조부 묏자리가 자손은 영달허지만 손이 귀한 속칭 ‘날나리 자리’여. 샥시, 날나리가 뭔 중은 알제? 남으 새끼 데려다가 날 닮어라, 날 닮어라, 헌다는 그 빌어묵을 새 말이여. 그것도 해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여서 이날 입때꺼정 우리가 옴짝달싹 못허고 요러코롬 살고 있제. 시방 생각허먼 그건 영광이 아니라 업인 텍이여. 영광과 업은 언제나 한통속으로 온당게.”

노인은 편하게 앉으라고 했지만 무거운 공기에 눌려 무릎을 꿇은 채로 얘기를 듣던 은영은 날나리 묘지고 뭐고, 한시바삐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 어둠의 그늘이 짙게 깔린 이 집도 싫고, 허리끈을 불끈 졸라 묶질 않아 벙벙하게 부푼 한복바지가 옆으로 뺑 돌아가서 하체가 비틀린 것처럼 보이는 유정호도 싫고, 그런 유정호가 형수와 팽팽하게 설전 벌이는 걸 지켜보는 것도 싫고, 남유당의 그 모든 날랄랄, 들이 은영은 싫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포스터 속 불꽃 같은 인주 빛 불길에 휩싸인 남유당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는 소리, 나무 타는 소리가 문 가까이에서 들리고 뜨거운 화기가 느껴져서 은영은 다락을 통해 비상통로로 탈출했다. 삼각형 창문 앞까지 무릎걸음으로 오긴 했는데 창문의 고리가 말썽이었다.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녹슨 고리를 풀고 기어 나오니 팔작지붕 꼭대기다. 이젠 살았구나 싶은데 이번에는 발에 밀린 기왓장이 지붕 아래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불은 지붕까지 넘보며 기세 좋게 타오르고 맞은편 지붕은 널름거리는 불길에 기우뚱 주저앉고 만다. 은영은 하늘을 나는 따위의 현실과 동떨어진 꿈은 꾸지 않는 터라 별 수 없이 지붕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니까 꿈속에서도 꿈이란 걸 알았던 셈이다.

불꿈이 좋은 징조인지 포스터 작업 때문에 꾼 개꿈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진 은영은 우물물에 얼굴을 담근다. 안마당의 우물물은 생각했던 것만큼 차갑지 않다. 은영이 하루 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노인과 형수, 유정호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며 남유당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다. 냉소적인 유정호는 주로 남유당의 비리를 까발리고 형수는 남유당의 영광만을 말한다. 노인은 집이 잿더미가 될까봐 평생 불을 멀리하며 해태처럼 남유당을 지킨 사람이다. 꼭짓점이 아니라 변으로 본다면 마땅히 삼각형의 밑변이 노인의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당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형수다. 집과 사람이 서로에게 젖고 스미어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해 보인다. 형수보다 어울리는 남유당의 종부는 더 이상 찾기 힘들 것이다.

노인은 아침에도 무른 나물을 얹어 밥을 먹고는 막걸리를 숭늉삼아 마시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유정호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형수가 시장을 보러 나간 뒤 은영은 가방을 챙겨들고 안채를 나왔다. 이런 식의 작별인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길고 긴 봄날의 특별한 하루였으니. 

“어이, 은영 선배.”

솟을대문을 나서려는데 유정호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딱 달라붙는다.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기껏 사랑채의 전통찻집이다. 반쯤 열린 사랑채 문으로 목을 자라처럼 뺀 유정호가 빙글거리며 웃고 있다. 정말, 반갑지 않다.   

“특별전 때문에 바빠서……

속이 빤히 보이는 말 같아 은영은 유정호를 따라 웃고 만다.

“유정호, 남유당 버리고 나한테 올 수 있어?”

무안해진 은영은 곧장 본론으로 치고 들어간다. 예상했던 대로 유정호는 고개를 외로 꼰다.

“선배…… 꽃은 말이지…… 나무째 봐야지 꺾으면 사흘도 못 가…….”

그 동안 은영이 알게 모르게 유정호에게 끌린 데는 분명 남유당의 몫도 있었을 것이다. 유정호 말마따나 경망이 발랄경쾌하게 보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은영은 남유당이 싫다. 종부로 폼 잡는 덴 단 십 분이요, 그 십 분의 폼을 위해 평생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산다는 걸 은영은 안다. 폼도 윗종부나 잡지, 아랫종부는 폼은 고사하고 시제나 제사에 비해 일도 아니라는 설날 아침에도 쫄바지나 입고 떡국을 200 그릇씩 끓여내야 하다는 것도 은영은 잘 안다.

“드라이플라워도 있잖아. 말려 두면 오래 갈걸.”

유정호는 말이 없다.

“너무 잘 알아서 못하는 것도 있는 거야. 남유당? 포기하긴 아까운 집이지. 요즘 전원주택이 대세인데…….”    

유정호야, 세상을 살다보면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도 꽤 생기는 법이란다. 너도 아깝고 집도 아깝지만 어쩌겠냐. 일주일 상관으로 전주에 내려와 무수리를 연상시키는 저 괴상한 생활한복을 입고 남유당의 밤떡이나 전수받는 내 모습,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그게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면 보기 좋다고 말하겠지. 보기 좋으라고 인생을 사는 건 아니잖냐. 

가짜 한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에 이르자 은영은 비로소 안도한다. 조악하고 싼 티가 폴폴 나는 골목에서 숨다운 숨을 깊게 들이쉰다. 진짜가 주는 기괴함과 무서움, 숨통을 죄는 듯한 불안한 마음은 간 곳 없이 스러지고 은영은 빠르게 현실감을 회복한다. 이 골목으로 들어선 지 불과 하루 전인데 그 새 십년은 흐른 것 같다.문장 웹진/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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