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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남성 사회

  • 작성일 2020-07-01
  • 조회수 3,517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과잉 남성 사회

- 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



최가은




1. ‘이찬휘 바이브(Vibe)’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의 특별한 계획 같은 건, 늘 그래왔듯 딱히 없었다. (…) 그래서 오랜만에 이찬휘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리 놀라지만은 않았다.


― 연말에 긴급구조 송년회 하는 거 인스타에서 봤지? 이번에 라이브 클럽 빌려서 크게 할 거거든. 공연도 하고 즉석으로 jam도 하고. 올 거지?


별로 웃을 기분은 아니었는데 ‘잼’을 굳이 영어로 타이핑한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했다. 메시지가 이어서 도착했다.


― 친구나 남자친구 데려와도 돼. 혹시 만나는 사람 있으면. 올 거지?(324)


특별한 계획 없이 조금은 무료하게 지내고 있던 어느 연말, ‘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다. 라이브 클럽과 맥주, ‘즉석 jam’이 마련되어 있다는 정체 모를 한 송년파티로의 초대장은 두 번의 같은 말로 마무리되어 있다. “(아무튼) 올 거지?” 상대의 승낙을 확신하는 자신감과 은근한 강요로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특유의 고자세. 나아가 그것을 실제 질문으로 승화해 내는 뻔뻔한 추진력까지. 문자를 보낸 이의 태도와 연말의 분위기에 동조된 ‘유지원’은 결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파티로 초대를 당한다. 장류진의 소설 「펀펀 페스티벌」1)에서 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같은 찝찝한 불쾌함 속에 가둬 두는 인물은 메시지의 송신인인 ‘이찬휘’이다. 이찬휘는 누구인가. 오 년 전, 지원이 참여했던 한 기업의 합숙 면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던 그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1) 이 글은 계간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에 실린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을 주된 분석 텍스트로 삼으며, 그 외에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작품은 모두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2019)에서 가져왔다.


세상에,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지런한 눈썹 옆, 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대칭적이고 탄력 있게 내려온 흑갈색 앞머리를 말할 때마다 찰랑거리는 이 남자애가 바로 ― 대형 기획사 연습생 출신, 『대학내일』 표지 모델 경력에, 외대 3대 미남 x, y, z 중 y를 맡고 있는 ― 이찬휘라는 것을.(327)


‘기획사 연습생 출신’스럽지만 동시에 ‘대학 잡지의 표지 모델’스러운 잘생김, 그야말로 날티와 귀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의 감각을 보여주는 미모의 남성이자, 그러한 외형적 특성과 ‘인 서울’ 대학 출신이라는 배경의 드문 조합 때문에 SNS상에서 꽤나 유명해진 인물이 바로 이찬휘이다. 이러한 찬휘의 외형 묘사는 소설에 개입하려는 독자가 곧바로 특정한 남성 인물을 상상하는 일을 방해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는 이 땅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비현실적 인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그의 모습이 점차 어딘가 낯익은 듯 느껴진다면, 나아가 일상에서 마주했던 숱한 이찬휘들이 함께 떠오르기까지 한다면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 온 그들은 대체 누구이며, 그들이 발산하는 ‘바이브’의 정체란 또 무엇인가.
질문의 해답을 위해 그날의 파티 장면을 미리 엿볼 수 있겠다. 문제의 즉석 공연에서 찬휘는 밴드의 보컬로 무대에 선다. 이찬휘의 놀라운 점은 퀸의 <Don’t stop me now>라는 부담스러운 선곡 행위 자체가 아니라, 가사를 전혀 모르는 그 노래를 직접 선택하고 또 실제로 부른다는 사실에 있다. 찬휘는 괴상한 영어로 기어이 그 노래를 완창하고야 마는데, 매우 진지하고도 과도하게 자신의 멋짐에 몰입하는 그의 이런 행동은 누군가를 ‘웃기려는 마음’ 따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매끈한 옆선을 관객에게 들이밀고 또 당기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무대를 지휘하고, 때때로 관객석으로 마이크를 양보하면서 그는 그 밤의 스타가 된다. 놀랍지만, 여전히 어딘가 낯익기도 한 찬휘의 바이브가 합숙 면접의 하이라이트였던 ‘펀펀 페스티벌’ 공연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만든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면, 문제는 조금 심각해질 수 있다.
장류진은 소설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무대 위에서 가사도 모르면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는 어떤 인물이 떠올랐어요. 틀리면서도 전혀 창피해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크게 내는, 자연스럽게 남자애가 되었고”. 뒤이어 작가는 이찬휘가 마침내 기업에 입사하는 데도 기여했을 것이 분명한 ‘그런 태도’는 노력해서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비단 승진의 문제뿐 아니라 조직 생활, 나아가서는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 그런 식의 엉뚱한 원리로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따라서 독자에게 “‘펀펀 페스티벌’이 사회생활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지길2) 바랐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들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 ‘그런’ 인물은 작가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남자애’로 연상되는 것일까. 더불어 ‘그런’ 인물의 ‘그런’ 태도가 사회생활의 원리라는 작가의 지적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작가의 말은 인터뷰어(조연정)가 주목한 부분인 성적 대상화의 성별 전환(미러링)이, 즉 기존의 문학사에서 ‘껍데기’로서 대상화되어 왔던 여성의 위치에 남성을 세운 설정이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두 인물의 전환은 일대일의 대응관계로 정확히 뒤집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위치 교체의 효과를 서사 설정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미러링’으로서도 그다지 유의미한 성과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찬휘 묘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외모’에서 발생하고, 우리 사회에서 ‘외모’에 대한 평가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작동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펀펀 페스티벌」에는 이러한 접근법으로는 놓칠 수밖에 없는 문제적인 지점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만약 이찬휘와 유지원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었다면, 지원은 우리가 ‘이찬휘스럽다’라고 하는 무언가를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뽐내는, 즉 ‘유지원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상상이 어렵다면, 찬휘와 유사한 종류의 특성을 지닌 여성 인물, 말하자면 세상의 논리에 대해 (비)자발적으로 무구하며, 과잉된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인물인 ‘빛나 언니’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2) 장류진, 조연정, 「펀펀 페스티벌」 관련 인터뷰. 《소설 보다 2020 봄》, 문학과지성사, 2020.


2. ‘빛나’와 ‘찬휘’ 사이에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면


장류진의 또 다른 단편 「잘 살겠습니다」의 빛나 언니는 “키도 늘씬하게 크고 눈도 크고 입도 큰 화려한 외모”를 지녔으나 “목소리는 묘하게 애 같은 면”(18)이 있는, 타인의 눈과 세상사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감상적이고 눈치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점은 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344) 인간을 향한 근본적인 궁금증을 일으키는 찬휘의 성격과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빛나에게는 늘 외모와 성격을 교묘하게 연결한 ‘소문’만이 들러붙는다. 그러한 소문과 소문의 성별화된 낙인 효과는 서술자인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나’는 빛나 언니의 풍성하고 고운 머릿결에 대해 당사자의 변명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디즈니 공주님 같은 긴 머리”(38)는 세상물정 모르는 빛나의 평소 이미지와 겹치며 ‘나’에게 “갑갑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제의 그 머리는 직모이기 때문에 그다지 관리가 어렵지 않다는 빛나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머리 관리가 ‘오 분 지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확신한다. 그러고는 확인한 적 없는 빛나의 작업 능력과 프로답지 못한 태도를 속으로 멸시하는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빛나를 대할 때면 ‘나’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이런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
각 인물을 나란히 대응시킬 때 오는 이 이질감은 독자에게 두 인물 사이에 어떤 공백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 공백은 「펀펀 페스티벌」을 향해 가해지는 일각의 비판, 즉 ‘남성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이 단순한 미러링이라고 착각’한다는 주장이 애초에 유용한 문제제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인터뷰에서 장류진은 여성을 껍데기로 대상화해 왔던 한국 문학사의 흔해빠지고 오래된 구도를 뒤엎은 것에 대해, “제 세대의 실제 삶 속에서는 이미 일상화되어 별로 특별하지 않은” 감각이자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특정 ‘세대’에 ‘일상화’된 감각이, 소설이 구현하는 바와 같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내어놓는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일상화된 감각이 어째서 지원에게는 ‘단순한 미러링’의 행위 양식조차 될 수 없는 것일까. 이는 장류진식 ‘회사소설’이 지닌 특유의 현실감을 상기할 때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노동현장에 놓인 ‘청년’들의 삶과 태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그의 소설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마저 통과해 내지 않았던가. “문단 밖에서 더 화제”3)를 일으켰다는 ‘청년’ 묘사의 ‘리얼함’은 ‘일의 기쁨과 슬픔’을 적절히 분리하는 노동을 향한 거리감과, ‘을’의 위치에 전략적으로 임하는 생존을 향한 열정의 아이러니를 동시에 구현하며 획득된다. 이와 함께 장류진의 현실감에 기여하는 것은 노동현장에 상주하는 신종, 혹은 변종 ‘갑’들의 묘사이기도 하다.

3) 최문선 기자, 「SNS 화제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누가 썼나 했더니….」, 2018, 10. 15, 한국일보 문화면.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어 이름 사용의 폐해는 또 있었다. 이름만 부르고 존칭을 생략하기 때문에 연장자가 말을 놓기 더 쉽다는 점이었다.(41-42)


「일의 기쁨과 슬픔」은 ‘수평성’, ‘평등’, ‘소통’ 등의 진보적 기표를 등에 업은 채로 더욱 새로워지고 교묘해진 직장 내 갑질 시스템을 묘사한다. 권위적인 시스템과 소통의 비효율성을 가장 경계한다는 회사 대표 ‘데이빗(박대식)’은 분명하게 위계적인 서열 관계는 그대로 둔 채로, 직원들끼리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게 한다. 그 때문에 본인조차 늘 “데이빗께서”라는 황당한 존칭을 듣는 상황에 처하지만 그것이 지닌 희극적인 효과에는 무감하다. 구조의 모순에 무지할 수 있는 것 또한 권력의 한 형태라서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갑들은 자신을 전형적인 ‘갑’의 위치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이 내면화된 ‘젊은 중년층’인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은 무(無)에서 시작하는 성공 신화와 안정된 자금 상태, 교양 있는 취미 활동 등을 소유할 수 있는 장년층 이상 갑들의 권리에 더해 “어떤 소셜함”(63) 그러니까 ‘힙한’ 자기 정체성과 유별난 윤리감각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물들인 것이다.
박대식의 과한 자의식은 우동마켓에서 만났던 ‘거북이알’의 회사 대표, ‘조운범 회장’의 “견고한 인스타 자아”(65)와 유사하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이십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에게 ‘루보프 스미르노바’의 내한 공연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지 못하게 한 죄로 직원 ‘거북이알’의 승진을 취소하고 일 년 동안의 월급을 포인트로 지급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 ‘갑’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결코 권력자의 만행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은 매일 아침 강강술래 대형으로 ‘스크럼’을 진행하다가도 주말이면 집에서 가족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그 와중에 젊은 감각을 놓칠세라 세상과의 열렬한 소통도 마다하지 않는데, 심지어 이 모든 활동을 기업의 이미지 향상에 활용하는 연출력까지 갖춘 ‘멋진’ 대표들이기 때문이다.
신종 ‘갑’들의 변화무쌍한 자의식에 거리를 두면서도, 알맞은 맞춤의 형태로 그것에 일일이 대응해야만 하는 신종 ‘을’들의 고투가 이곳의 일상적 풍경이다. “억압의 주체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화되고 비가시화”된4) 갑질 현장에 놓인 청년들의 이중 고충을 소설은 낱낱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간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집단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해 왔던 세대론을 점유하여, 다시 그것의 관점으로 기성을 대상화한다.
‘세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갑질의 자연화와 비가시성의 문제를 다음으로 확장해 볼 수는 없을까. 문단 ‘밖’ 화제를 일으켰다던 ‘현실감’의 중심에는 현재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를 둘러싼 담론의 피상성 역시 자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일견 공정해 보이는 「일의 기쁨과 슬픔」의 회사 시스템은 특정한 위계와 서열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고, 이 속에서 청년들은 ‘N포’와 같이 단순하게 처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각자의 생존에 몰두한다. 이 같은 서사의 설정을 거칠게나마 기존의 ‘청년세대론’에 대한 반기이자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펀펀 페스티벌」은 그것을 향한 더욱 첨예해진 방식의 비판으로도 읽어낼 여지가 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청년’이라는 추상적 집단 내부에 은둔하고, 그 추상성을 보편화하는 데 복무하는 젠더 격차를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이때, 장류진의 남성-청년 중 상당수가 찬휘, 혹은 찬휘와 유사한 남자 인물들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카를 만하임의 유동적인 ‘세대’ 개념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그간의 한국 사회가 규정해 온 ‘세대’의 의미가 얼마나 고정적이고 관념적인 형태였는지를 비판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세대론’ 자체는 진실의 층위에서 이미 그 무효함이 증명된 지 오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특정 세대를 호명하는 일이 고정된 실체를 폭로하는 작업이 아니라, 정교하리만큼 정치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기성세대로부터 실체와 무관한 방식으로 호명되어 왔던 청년세대의 기표와 그 호명의 배경을 살피는 일은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청년’이라는 기표를 통해 불안과 전망 부재의 현실을 가시화할 때, 해당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가 무시되며 기표의 동일성이 확보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5) 배은경은 “당대의 사회적 과제를 수행할 잠재적 주체들을 부르는 기대 섞인 이름”인 ‘청년’이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내에서 정치적 담론으로 부상한 배경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던 중, ‘촛불소녀’ 담론에 특별한 주목을 요청한다. 이것이 ‘촛불’(촛불시위)과 ‘소녀’(넓은 연령대의 청년 여성 배제)라는 맥락 안에서만 한정적으로 유효했던 사정을 지적하면서, 그간의 ‘청년’ 기표가 청년-시민으로서의 여성을 철저히 배제해 왔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다. 요컨대, ‘남성성’이야말로 한국 사회 내부의 ‘청년세대론’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라는 지적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거나, 가성비에 맞지 않는 옵션은 과감히 리스트에서 삭제하며, 그러다 보니 내 집 마련과 결혼, 출산과 연애마저도 줄줄이 포기해야만 한다는 의미의 ‘N포 세대’가 현재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론이 정착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내재한 ‘포기’라는 개념 자체도 젠더 격차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일각의 비판은 어떤가. 말하자면,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6)는 다분히 상식적인 지적은, 장류진의 ‘리얼한’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의 일상에서 여전히 진지하게 문제시되지 않는다. ‘청년세대’ 내부에서 성별의 위치를 단순 교체하는 것으로, 혹은 배제된 여성을 그 기표 속에 기입하는 것으로는 적절한 해석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와 같다. 장류진의 소설이 ‘리얼’을 지향하고 ‘리얼함’으로 특정한 세대의 읽기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면, 그의 리얼리티는 바로 이 ‘N포 세대’로 호명되는 청년세대 기표를 다시 읽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4) 이경, 「오늘의 밀레니‘을’들이 사는 법― 장류진, 박상영 소설을 중심으로」, 《오늘의 문예비평》, 2020, 3.
5) 배은경, <‘청년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남성성 개념을 중심으로>, 《젠더와 문화》 8(1),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2015.
6)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58, 한국현대문학회, 2019.


3. 청년 인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저희, 좀 앉아서 하면 안 될까요?”
주변을 둘러보니 서 있는 건 우리 조뿐이었고 다른 조들은 인원 정리를 다 끝냈는지 어느새 조별로 둥글게 모여 앉아 상의하고 있었다. 다들 왜 이찬휘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저희도 이제 앉으시죠”라는 그의 말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이찬휘는 앉자마자 A4 용지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방향으로 돌려서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장’이라고 적혀 있는 빈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조장을 정해야겠는데요?”
그러고는 조원들을 좌로, 우로 한 번씩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조장이 하고 싶은 분?”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때 이미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반질반질한 얼굴 옆으로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인 채 스윽 올리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애가 조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328)


한국식 ‘생존’, ‘경쟁’ 모티프와 공명하며 미디어와 취업시장 등을 장악해 온 오디션 형식의 면접 프로그램은 ‘공정성’을 표면의 가치로 내건다. 면접의 과정과 그 결과의 개방성은 참가자이자 관객인 모든 이를 동시에 면접관의 위치에 둠으로써 최후 승자의 권좌를 ‘인정’하게 만드는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면접 참여자 스스로가 내재하는 패배의식은 무엇보다 경쟁의 과정에 있어 치명적이다. 서술자 지원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작부터 승자일 것이 모두로부터 예측되었던 찬휘를 바라보는 태도의 간극은 묘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혹시 우리 사회의 승자에 관한 전형적 이미지, 오디션의 주체가 되어 서사와 감성과 승리를 모두 획득하는 자의 형상이 이미 젠더화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그러한 젠더화된 이미지는 ‘생존’ 경쟁에 참여하는 각각의 개인들에게마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 왔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사회생활의 한 축도로서 구상했다는 ‘펀펀 페스티벌’은 합숙 면접의 마지막 관문이다. 같은 조에 배정된 지원과 찬휘는 ‘펀펀 페스티벌’이라는 무대에 밴드로 등장해 면접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런데 이들이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과정 자체, 즉 밴드 내 파트를 배분하는 모습을 포함한 온갖 갈등의 서사 등이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하다는 사실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패자와 승자의 구도가 진짜 면접, 즉 본격적인 무대 준비 과정 이전에, 혹은 합숙을 위한 건물로 들어서기 훨씬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밴드의 메인인 보컬 자리를 두고 두 명의 인물이 남는다. 지원과 찬휘가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보컬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과정에서부터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지원은 어릴 적 교회 밴드도 해봤고, 보컬 동아리도 했고, 고1 때 담임선생님의 결혼식에서 축가도 불렀으며…… 무려 KBS 합창단 출신이기도 한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노래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빨리 깨달은 바 있다. 찬휘는 어떨까. 그는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 출신이긴 하지만 정작 가수로 데뷔는 못 했고, <슈퍼스타K>에 나간 경험은 있지만 본 방송에서는 통편집 당하고 탈락한 이력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인의 노래 실력이 ‘그 정도’라는 확신에 결코 흔들림이 없다.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331) 우렁차게 고음을 내지를 정도로, 지원의 ‘이상한 쪼’가 거슬린다며 보컬에 대한 훈수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제 노래 실력에 매우 당당하다. 그런 그를 보며 지원은 생각한다. “대체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걸까?”(344) 우리는 같은 질문의 화살을 돌려 지원을 겨냥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정말 그저 “마음의 차이”라면, 대체 무엇이 지원의 마음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이와 관련해 더욱 문제적인 지점이 있다면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찬휘의 믿음이 오로지 이찬휘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가 조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이미 직감”하며, 조원들의 포지션을 배치하는 A4 서식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아이의 손에 들려 있다. 팀원들은 원하는 곡의 추가를 면접관이 아닌, 찬휘로부터 허락 받으려 한다. 이찬휘가 미모 이외에도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서일까? 하지만 우리는 찬휘를 ‘응당’ 승자로 만드는 그의 압도적인 재능이 대체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 ‘합숙 면접’의 자리라는 점이다. 입사를 위한 마지막 관문인 이곳이 이력서와 필기시험 등 숫자로 보증되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얼마간 유사한 상태의 인물들이 모인 자리라고 할 때, 이찬휘가 예비된 승자로서 보여주어야 할 능력은 적당한 리더십과 배려심, 업무 진행의 효율성 등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의 업무 능력과는 크게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선호하는 우승자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웬만큼 노래를 할 줄 안다는 그는 편곡에는 무능하며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다. 그에게는 협동심은커녕 동료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듯하다. 기타리스트에게 쉴 새 없이 요란하고도 잡스러운 요구를 하여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들거나, (그런 그를 음료수로 달래어 팀으로 복귀시키는 것은 지원이다.) 팀원들의 요구사항은 “무조건” 안 되는 것으로 거절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보컬 파트너인 지원의 문제점을 공연 직전에 지적함으로써 무대의 주인공이 되려 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그에게 기본이다. 그런 그를 정해진-승자로 만든 것은 대체 무엇, 아니, 누구일까. 공연 직전 찬휘로부터 ‘쪼’를 지적당해 주눅이 들었다가 난데없는 골반 튕기기로 좌중에겐 정적을, 찬휘에게는 빛나는 존재감을 선사했던 유지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 무대를 이찬휘의 것으로 만들어 갔던 참가자들(우리들)의 집단적 무의식인가.


4. 남성 과잉 사회


한국 사회에서 ‘청년’ 담론은 단연 ‘세대’ 담론의 하위 범주로 사유된다. 어딘가 미심쩍지만 위기의 진단에는 여전히 유용한 사유 범주인 ‘세대론’이 생애주기에 기반하여 특정 세대를 집단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지적은 상술한 바와 같다. 세대론의 한계에 대한 지적, 특히 그것이 ‘남성’의 생애주기를 위주로 하여, ‘여성’을 종속변주로 사유해 왔다는 주장은 지원과 찬휘 사이에, 나아가 장류진 소설의 숱한 청년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젠더 격차’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한국 사회의 육화된 ‘청년’ 기표가 그것의 지정 성별을 줄곧 남성으로 설정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이찬휘라는 인물이 지닌 ‘바이브’의 특이성과, 그것이 청년 인재의 상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펀펀 페스티벌」은 다름 아닌 ‘남성 중심성’을 기반으로 한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사회생활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로서 사유할 가능성이 있다.
작가가 언급한 ‘제 세대’에는 생각보다 많은 진실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중 찬휘의 바이브를 묘하게 가로지르며 떠오르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극심한 성비 문제7)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90년에 그 정점에 도달했던 ‘성별 감별법’과 ‘여아 낙태’는 이 문제에 특별히 주목해 왔던 학자들의 입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풍경을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대략 이십 년 전, 중국에서 어학 과정 중이었던 저널리스트 ‘마라 비슨달’은 우연히 방문한 한 유치원에서 매우 기이한 성비 광경을 목격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 국가에 만연해 있던 ‘여아 낙태’ 문제와 그 이유를 규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8) 초음파 기술을 활용한 성별 감별법과, 이를 통한 여아 낙태의 문제는 비슨달에게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인구통계학자인 크리스토프 길모토는 이러한 현상을 “걷잡을 수 없는 인구학적 남성화”(26)라고 부르는 것에서 나아가 이 문제는 “조만간 (독자인-인용자)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28)이라고까지 경고한다. 그 영향의 일면이자 과잉된 남성화의 세계는 장류진식 노동현장에 기거하는 청년들의 세계이자 모습이기도 하다.
장류진의 소설에서 남성화된 세계는, 사무실을 일컫는 ‘오피스’의 의미가 여성인 ‘나’와 ‘나’를 둘러싼 남성들 사이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다분히 가시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드러날 때도 있고(「새벽의 방문자들」), 시작점부터 기울어진 것이 명백한 노동의 조건들을 나열하며, “젊은 ‘여성’ 사원으로서 직장 내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9)를 체감케 하는 방식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빛나 언니’에 대한 멸시의 태도는 ‘나’가 동일한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의 임금 격차를, 그 격차를 가능케 했던 업무 접근성의 차이(「잘 살겠습니다」)를 폭로하면서 더욱 복잡한 의미로 전달된다.
그중 「펀펀 페스티벌」만큼이나 흥미로운 남성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이다. 이곳의 ‘지훈’은 같은 회사의 법무팀에 근무하는 ‘지유’에게 호감이 있다. 그는 회사 내 그녀와의 모든 접촉과 소통을 직장 내 로맨스로 읽어내는 바람에, 동료이자 인간으로서 그녀가 보이는 우정과 호감을 멋대로 해석하고 ‘그녀와 잠을 자기 위한’ 계획까지 세운다. 이것을 남성-청년 사회를 구성하는 남성-청년들의 허술한 자의식의 한 상징으로 읽는 것은 과한 해석일까. 지훈은 나름의 헌신적인 노력과 애정 전략에도 넘어오지 않던 지유로부터 “애초에 이것이 연애의 판이 아니었음을 명확히”10) 지적당하자, 손상된 자존심을 받아들이지 못해 폭발하고 만다. 흐느낌과 질척거림이라는 처절한 ‘찌질’의 단계를 성실하게 통과해 낸 뒤, 분노와 좌절이 범벅된 “이 씨발년이.”(126)를 종착역으로 삼는 지훈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실체 없는 그들의 자아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여성이 지목당하고, 그것의 회복을 여성을 향한 증오심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숱한 여성혐오 범죄의 기원 서사이기도 하다. 여성을 언제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방식, 애초에 그것이 아닌 판을 굳이 “연애의 판”으로 인식하려는 방식 등은 일하는 여성에 대한 상이 ‘남성-노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기저에는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지훈(이들)의 자신감이 있다. 그의 자신감은 스스로의 “자의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족적인 해석 방식”11)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가.
청년 기표가 내재한 남성성과 그 요인 중 하나로서의 성비 문제는 ‘과거’의 성차별을 폭로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남성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분열하는 헤게모니적 기표라는 코넬의 주장12)을 참조한다면, 이상적 남성의 상이 실체가 아닌 환상으로 작동할 때 그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비남성으로 배제된다는 점 역시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해 비슨달은 흥미로운 인터뷰 사례를 언급한다. 성별 낙태를 수행하는 부모들은 이 사회에 아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지만, 자신의 아들은 특출한 남성이 될 것을, 혹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는 아들의 미래는 무조건적인 핑크빛이다. 여성의 두 배에 달하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우리’ 아들만은 짝을 찾아 가족력을 이어 갈 것이라는 굳건한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진정한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아들의 성장 과정과 아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깊게 관여한다. ‘찬휘’와 ‘지훈’의 과잉된 자의식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을 만들어냈던 가정과 사회의 오래된 교육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이들의 허술한 자의식, 즉 ‘환상’에 불과한 그것은 한국의 남성이라는 동전의 뒷면, 다시 말해 한국의 비남성들이 지닌 ‘패배의식’과 동의어이다. 이 비극의 동전은 성비 불균형을 초래한 사회가 지탱해 온 특정한 믿음의 소산이자 인구통계학자들이 경고한 바 있던 섬뜩한 미래의 한 풍경인 것이다.

7) 한국은 1984년부터 시작된 성비 문제가 자연 성비를 완전히 벗어날 정도로 궁극에 도달한 시기를 1990년으로 본다. 이 해에는 남아의 숫자가 여아의 두 배 가까운 수준에 도달했다. 이에스더 기자, 「세계 유일 ‘0명대 출산율’ 참사……시작은 80년대 초음파 검진」, 중앙일보, 2019. 11. 30., 사회면.
8) 마라 비슨달, 박우정 역, 『남성 과잉 사회』, 현암사, 2013.
9) 인아영, 『일의 기쁨과 슬픔』 해설, p. 237.
10) 이진송, 「일 잘하는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아 멋지다」, 경향신문, 2020. 05. 01. [이진송의 아니 근데], 문화면.
11) 인아영, 위의 글, p.242.
12) R. W. 코넬, 안상욱, 현민 역, 『남성성/들』, 이매진, 2013.


5. 지극히 한국적인 남성-청년, ‘이찬휘’


인구학적으로 남성화된 세계와, 남성으로 코드화된 ‘청년’의 상과, ‘펀펀 페스티벌’을 알레고리로 하는 사회생활의 원리. 이들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찬휘와 지원은 ‘펀펀 페스티벌’ 무대를 서로 다른 의미로 마친 뒤, 애프터 파티에 참가한다. 말이 좋아 파티지, 약간의 술과 안주를 사이에 두고 면접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 자리는 엄연히 면접의 한 과정이자 사회생활의 변주이다. 입사지원자들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자세로 술자리에 임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고기를 굽겠다고 나서는”(340)가 하면, 집게를 놓쳐 고기를 뒤집을 수 없을 땐 “접시와 일회용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정리하는 척”(341)에나마 집중한다. 물론 면접관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척추를 접”(341)어야 하기 때문에 주변을 살피지 않을 수도 없다. 복잡한 긴장감이 감도는 지원과 찬휘의 테이블에도 한 명의 면접관이 나타난다.


여전히 허리를 삼십 도쯤 굽힌 이찬휘가 자기 캔을 면접관의 캔에 슬쩍, 갖다 대며 말했다.
“제가 골랐습니다.”
면접관이 활짝 웃었다.
“이 친구,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음악 취향도 깊구먼. 근데 이 친구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 꼭 내 젊었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네.”
이찬휘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이 더 미남이시죠.”(341)


면접관과 이찬휘의 대화에는 그저 흔한 ‘예의’로 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사회생활의 원리를 정치적 행위와 ‘대표성’의 문제로 의미화해 본다면, 면접관이 찬휘를 향해 꼭 젊었을 적 제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그 ‘과찬’을 “선배님이 더 미남”이라는 말로 돌려주는 찬휘의 대응은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론에 가해지던 또 하나의 비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청년’세대론이 단순히 ‘남성’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기성이 한국 사회의 위기에 대한 정치적 필요와 기대로서 ‘청년’을 소환한다는 일관된 주장은 구체적인 ‘남성들’의 얼굴과 만나면서, 보다 더 문제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즉 ‘청년’(아들)은 보편이 아닌, 특정한 집단과 세력(아버지)의 필요에 의해 부각되고 제시된 담론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발화 주체이자 발화 대상이 모두 ‘남성’을 중립적인 개인으로 전제할 때, 추상성으로서의 ‘청년’ 호명은 젠더에 관한 단순한 무감함의 결과가 아니라 분명한 지식-권력 체계의 한 효과13)가 된다. 이때의 ‘위기’와 ‘정치적 전망’이 지닌 편협성과 배타성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사회생활’에도 관여한다. 이 속에서의 ‘미러링’ 혹은 여성‘도’ 청년의 일원이라는 주장, 즉 ‘청년’ 영역으로의 여성 할당은 구조적 젠더 불평등을 남녀 갈등의 차원으로 단순화하는 일시적이고도 기만적인 대처 방식일 뿐이다.
조앤 스콧은 프랑스적 ‘보편주의’의 전제가 된 ‘추상적 개인’이 중립적인 ‘무성(asexuality)’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문제시하기 위해 그것에 들러붙은 성적 특성을 끝없이 가시화하려 했던 프랑스 ‘남녀동수’ 운동의 과정을 분석한다. 스콧은 이들의 운동을 그 성과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질문의 층위에서 평가한다. 그들의 운동은 ‘다양성’에 대한 외침이 아니라, 누가 개인으로서 간주되어 왔는가를 재정의하는 방식이며, 그 자체로 급진적인 질문의 장이라는 것이다.14) ‘남녀동수’ 지지자들에게 평등이란 여성과 남성 간(between)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of) 평등이다. 이들은 남성이 과잉대표 되는 집단과 이것에 기반이 되는 기울어진 성비 현상은 비단 여성들의 비대표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비민주성에 관한 문제, 즉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시민’과 ‘인간’의 영역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남성-청년 이찬휘가 무대 위에서 가사를 모르는 팝송을 당당하게 부르는 모습은 이제 하나도 기이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뜻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를 낚아채는 수많은 권력자 남성들의 ‘젊었을 적 모습’을 여기서 본다. 위의 이미지들이 지원과 찬휘의 위치 교체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겹치며 구체화될 때, 장류진의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역시 보다 근본적인 영역의 것이 된다. 그의 소설은 ‘청년’과 ‘노동’이라는 영토를 향한 여성들의 비접근성과 이질감을 끝없이 가시화하고, 이는 독자인 우리에게 우리 사회의 ‘평등’과 ‘공정성’의 의미를 재질문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지원이 패배감 속에서 중얼거렸던 말들, “어떤 사람은 전부 알아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조금만 알아도 다 아는 것처럼 나설 수 있는 걸까.”(345)는 ‘공정’과 ‘여성 발전’의 키워드 아래 당연하게 여겨져 온 청년 범주들을 교묘한 방식으로 문제화하는 것이다. 그가 ‘펀펀 페스티벌’을 통해 사회생활이 작동하는 원리를, 즉 정치적 질문을 내재했다던 의도는 이러한 방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장류진의 소설은 ‘청년’세대를 향한 성실하고도 ‘리얼’한 재현의 결과를 넘어 그 속에서 결코 메워지지 않는 공백을 통한 질문의 자리이다.

13) 정성조, <청년 세대 담론의 비판적 재구성 :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비판사회학회, 2019, 9.
14) 조앤 W. 스콧, 오미영 외 역,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인간사랑, 2009.















최가은

작가소개 / 최가은

1990년생. 한국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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