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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의 樂취미들] 나무를 잘 그리고 싶다

  • 작성일 2015-12-01
  • 조회수 935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나무를 잘 그리고 싶다

 

 

 

오미순

 

 

 

 

    나는 언제나 나무 곁에 있었다. 흙냄새를 풍기는 아버지는 귤나무를 키워 나를 먹여 살렸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과수원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평상 위에 모로 누워 점이 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졸곤 했다. 아버지가 가지치기하는 소리가 산새소리에 섞여 들렸다. 집에 와서도 온통 나무 천지였다. 나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주황색 나무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녹색 잎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지대를 휘감고 자라는 키위나무 옆에는 동백나무가 있었다. 그 건너편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마당 깊숙이 들어오면 주목과 향나무가 보였다. 현관문 근처 화단에는 석류나무와 금귤나무, 감나무가 자랐다. 마당의 풍경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나무가 나의 놀이 상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해가 비치는 동안 집에 혼자 있었다. 꽃이 떨어지면 꽃잎을 가지고 놀고 과일이 열리면 입안에 우물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녔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오래된 나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는 퀴퀴한 그곳에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수신인이 달가워하지 않는 편지에는 내 마음이 연필 자국처럼 번져 있었다.
    나무와 물리적으로 멀어진 것은 고향을 떠난 후부터였다. 비행기를 타던 날 나는 마당에 불을 피웠다. 유년 시절 동안 무어라 끼적인 종이들을 깡통 안에 찢어 넣었다. 글을 태운다고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나와는 거리가 먼 학과를 선택한 것처럼 나는 나무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도시에서 나는 불법체류자가 된 기분으로 살았다. 도시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어울릴 사람들과 머무를 장소가 필요했다. 어디서든 초조했고 자꾸 자리를 비워 주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글을 쓰는 대학에 들어간 것도 도시에 남기 위해서였다. 학교 밖으로 나와 어렵게 찾은 일터들은 보통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상에서 버티려면 몸에 신호가 왔다. 목에 솟아난 단단한 혹이 하나씩 늘어 가거나 오래전 병을 앓았던 가슴께가 압정이 박힌 듯 아려 왔다.
    나는 빚만 남은 도시에 머무르기 위해 건축 스케치를 배웠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꼼짝 않고 그림을 그렸다. 교실에서는 수시로 연필 깎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평평하게 들붙던 도시의 풍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올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건물을 작은 종이에 옮길 수 있었다. 도시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건물의 면(面)이 보였다. 새하얀 불빛이 쏟아지는 앞면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늠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내가 더 배우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뚜름한 다면체들을 스케치북에 그리고 난 후에 나는 조경을 배웠다. 계산된 직선으로 가득 찬 건물보다 눈에 익은 것을 그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장 많이 연습한 것은 나무였다. 스웨터의 보푸라기같이 생긴 것을 꼬아 그리면 나무의 이파리가 되었다. 이파리가 빈약하든지 너무 복슬복슬하면 어수룩한 태가 났다. 펜으로 강약조절을 해야 나무가 그럴 듯해 보였다. 내가 그린 야자수는 잎이 너무 진했고 대나무는 흐물흐물해 보였다.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펜이 엇나갔다. 제대로 그리고 싶어서 몸이 떨릴 정도였다. 거리에 나오면 온통 나무만 보였다. 나무줄기에 옹이가 얼마나 패어 있는지, 빛이 쏟아질 때 어떻게 나무가 그림자를 머금는지 빤히 바라보았다. 스케치에서는 배경처럼 서 있는 나무가 나에게는 절실하게 느껴졌다.
    건축 잡지를 뒤적이다 처음 제주 도립 미술관을 보았다. 잡지에서 보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나는 마지막 스케치로 그곳을 그리고 싶었다. 미술관 마당에 놓인 현무암 사진만 봐도 제주도란 게 느껴졌다.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 뒤로 미술관이 보였다. 무채색 건물은 자연 풍경을 휘두르지 않고 프레임 안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나는 가보지 않은 곳을 그림으로 먼저 마중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끝까지 보기 좋게 나무의 이파리를 꼬지 못했다. 그러나 색은 오묘해서 볼품없는 스케치도 색을 입히면 그럴 듯하게 변했다. 나는 비슷한 톤의 색을 겹겹이 칠해 나무를 풍성하게 만들 때가 좋았다. 밋밋한 둥치에 색을 더하면 나무가 지나온 시간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나무의 이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색들이 번져 나갔다. 그림으로만 보아도 나무는 사람의 마음을 기울게 했다.
    지난 설 연휴에 고향에 간 김에 도립 미술관에 들렀다. 미술관 앞에 있던 나무는 바싹 말라 바람에 기우뚱거렸다. 눈의 결정체처럼 잔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었다. 내가 공들여 칠했던 녹색 잎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싸늘한 교실에서 종일 나무를 그리던 때가 떠올랐다. 건축 스케치를 배우고 있을 때 나는 매일 벽에 머리를 박는 기분이었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노트북 앞을 지켰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빈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글은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몰랐다. 이름이 불리면 조금 더 도시에서 버틸 수 있겠다는 심정이었다. 나는 구겨진 종이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우체국으로 달렸다. 달릴 때마다 가로수인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신발 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 마른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은 시리얼처럼 바삭거렸다. 나는 그렇게 바스러지더라도 도시에 머무르고 싶었다.
    얼마 전 조카 손을 잡고 삼청공원에 다녀왔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숲 행사에 참여했다. 날이 쌀쌀했지만 아이들은 신이 나 재잘거렸다. 자연물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놀이를 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에 특정한 잎사귀나 열매를 아홉 가지 찾는 보물찾기도 함께했다. 나는 조카가 다람쥐처럼 숲길을 지나는 동안 도토리깍정이를 찾으려고 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고동색 나무껍질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엄지손톱만 한 깍정이를 찾았을 때 나는 혼자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다. 새벽까지 온 비 때문에 공기가 눅눅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무들이 땅에 붙박여 있었다. 마당에서 나무와 뒤섞여 바람을 맞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바람이 내 몸을 훑을 때마다 나는 어깨를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곤 했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도깨비바늘을 내 몸에 붙여 두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나무가 그리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를 대지 않고 내가 나무를 좋아해서 잘 그리고 싶었다. 나무의 낱장마다 내 몸에 아로새겨진 나무의 기억을 풀어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다시 빈 종이에 까만 보풀들을 매달아 두어야겠다.

 

오미순-본문

 

 

작가소개 / 오미순(동화작가)

-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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