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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 소녀

  • 작성일 2023-11-03
  • 조회수 406

홍의 소녀

박채현


   둥둥! 둥둥! 둥둥!

   북이 울렸다. 온 마을을 깨운 북소리는 세간마을의 끝 집 은봉이네까지 들렸다. 

   “어매요, 빨리, 빨리 오이소.”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정암진으로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우리 의병이 왜군을 섬멸했다는 소식이오.”

   깃발을 앞세우고 의병들이 줄지어 마을로 들어왔다. 옷은 흙투성이에다가 몸은 지쳤건만 의병들의 표정은 밝았다.

   “장군님 만세! 의병 만세!”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곡주를 들이켠 은봉 아비가 입을 열었다. 

   “왜놈들이 마른 길에 푯말을 꽂아 둔 거라. 장군님이 그 푯말을 늪으로 옮기라 했거든. 우리는 언덕 위에서 숨어서 지켜봤지. 왜놈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장군님의 신호가 떨어진 거라. 와아! 달려들어 왜놈들을 전멸시켰다, 아이가. 허허허.”

   “아부지, 참말로 신납니더.”

   은봉이가 부추기자 아비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왜놈들은 우리 장군님 붉은 옷깃만 봐도 오줌을 지릴 거라. 어찌나 날렵한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까. 그놈들 혼이 빠지지. 내 같은 무지렁이도 장군님 아래에서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더라.”

   아비의 무용담에 밤 깊은 줄 몰랐다. 

    잠자리에 누워 은봉 어미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구들 꺼지겠네.”

   “은봉이 말입니더. 가시나가 얌전하게 살림이나 배울 것이지, 동네 머스마들 이끌고 돌팔매 싸움이나 하고 걱정입니더. 오늘 낮에도 응도의 이마를 깨 놓았습니더. 은봉이 불러서 한마디 하이소.”

   “그랬나? 우리 은봉이 이길 알라가 있나? 여식아라도 우리 은봉이는 장군감이제. 허허허.”

   “아이구, 말을 말아야지.”

   은봉 아비는 싱글거리며 잠이 들었다.


   둥둥! 두둥둥! 둥둥! 두둥둥!

   이른 새벽, 은봉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은봉 아배요, 몸조심 하이소.”

   북소리를 등지고 의병들이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의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들을 보낸 함양댁 할매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은봉아, 오늘따라 마음이 이상하다.”

   은봉 어미도 느티나무 아래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은봉 어미는 깨끗한 물 한 사발을 장독대에 올렸다. 별빛 아래 무릎을 꿇어앉아 새벽까지 두 손을 모았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남강에서도 의병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했다. 

   “임금님이 궁궐을 버리고 달아났단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떡하라고!”

   “누가 우리를 지켜주겠나.”

   “오늘같이 좋을 날 무슨 걱정이고? 장군님과 의병이 왜놈을 물리쳤다는 소리 못 들었나?” 

   무쇠 솥뚜껑 위에서 전이 노릇하게 익어가고 아낙들의 이야기도 익어갔다.

   두둥! 두둥! 두둥!

   아이들이 먼저 마을 어귀로 달려 나갔다. 신이 난 은봉이는 펄쩍거리며 재주를 넘었다. 홍의장군과 기마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왔다. 보병들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남편과 아들을 찾아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우리 아부지는 어디 계시노?”

   은봉이는 눈을 비비고 다시 의병을 살폈다. 은봉이를 보면 먼저 달려와 안아줄 아비였다. 

   “우리 아부지는예?”

   병칠이 아재는 고개만 숙였다. 은봉이는 팔을 당기며 다시 물었다.

   “저기…, 맨 뒤에 올 거라.”

   뒤에 달구지 몇 대가 굴러오고 있었다. 달구지를 끄는 의병을 살펴도 아비가 없었다. 달구지 한 대가 은봉 어미 앞에 멈췄다. 미순네 아재가 흐느끼며 말했다.

   “덕삼이 용감하게 싸우다 갔심더.”

   “가다니? 가다니요? 거, 거짓말 마이소. 은봉 애비는 그리, 그리 갈 사람이 아닙니더.”

   미순네 아재가 거적을 치들었다. 아비는 잠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은봉 어미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아부지, 아부지요. 일어나 보이소.”

   일어나지 못한 의병은 은봉 아비뿐만 아니었다. 네 명이 더 있었다. 승전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마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잔치하려고 장만한 음식이 장례를 치르는 음식이 되었다. 야미산 모롱이에 아비를 묻었다. 하늘도 밤늦도록 울었다.

   하루 누웠던 은봉 어미가 일어났다. 얼굴이 반쪽이었다.

   “은봉아, 아부지가 우째 가셨는지 잊으면 안 된다.”

   은봉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울 거 없다. 은봉이 니는 의병의 딸인 기라.”

   은봉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짚신을 꿰어 신고 마을로 내달렸다. 은봉이는 느티나무에 매달린 북을 힘껏 두드렸다. 

   둥당둥당둥당!

   북소리를 듣고 의병들이 뛰어나왔다.

   “이게 누고? 은봉이 아이가. 무슨 일이고?”

   미순네 아재가 은봉이 어깨를 잡았다.

   “장군님 만나 뵈러 왔심더.”

   “야야, 장군님은 얼라들 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곁에서 지켜보던 의병들도 헛웃음을 지었다.

   “조막만 한 딸 아가 장군님을 만나겠다고?”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더.”

   “허허, 참 내.”

   은봉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금 뒤 장군이 나왔다. 은봉이에게 불호령이라도 떨어질세라 미순네 아재는 가슴을 졸였다. 

   “장군님, 지도 의병이 되고 싶습니더. 지가 머스마들보다 힘도 세고, 돌팔매 쌈도 제일 잘합니더.”

   은봉이는 팔뚝을 걷어 보였다. 눈동자에 힘도 잔뜩 주었다.

   “네 나이가 몇이냐?”

   “열한 살입니더.”

   고개를 끄덕이던 장군이 은봉이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비의 원수는 우리가 갚을 것이다. 너는 홀로 남은 어미를 돕거라.”

   “지가 여자라서 안되는 겁니꺼?”

   부들거리던 은봉이는 그만 자리에 퍼질러 앉아 울었다. 


   아침부터 매미가 귀를 찢을 듯 울어댔다. 냇가에서 물놀이하던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은봉아, 해지기 전에 산에 가서 망개이파리 좀 따 온나.”

   “그건 어데 쓸라고요.” 

   “그걸로 주먹밥을 감싸면 쉬지 않고 오래 가거든. 나가서 싸우지는 못해도 이런 건 나서서 도와야지.” 

   “예, 후딱 댕겨오겠심더.”

   은봉이는 개똥이와 함께 야미산에 올랐다.

   “은봉이 히야, 참말로 의병이 되고 싶나?”

   “하모.”

   “내는 무섭다. 왜놈들은 도깨비같이 머리에 뿔 달리고 눈알이 빨갛고 그런 거 아니가?”

   “울 아부지가 왜놈들은 덩치는 작아도 사납게 생겼다더라.”

   망개잎이 든 자루를 메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히야, 배가 살살 아프다. 똥 누고 올게.”

   아랫배를 움켜쥔 개똥이가 저만치 뛰어갔다. 그런데 이내 허둥거리며 되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히야, 히야, 저, 저기…”

   말을 잇지 못하고 개똥이는 바위 너머를 가리켰다. 은봉이는 살금살금 바위로 다가갔다. 개똥이가 손가락으로 바위 아래를 가리켰다.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둘은 납작 엎드렸다. 수상한 사람 둘이 세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마을 길을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간자다. 간자.”

   “히, 히야, 그, 그럼 우짜노.”

   은봉이는 재빨리 개똥이의 입을 막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개똥이는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은봉이도 가슴이 벌떡거리는 마찬가지였다. 

   “가자. 빨리 알려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음은 십 리 앞을 내달리는데 몸은 굼벵이처럼 더뎠다.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겨우겨우 마을로 내려왔다. 땀범벅이 된 은봉이는 북채를 들었다.

   퉁당! 퉁당! 퉁당!

   “은봉아, 또 무슨 일이고?”

   미순네 아재가 혀를 끌끌 찼다.

   “장, 장군님 좀 불러주이소. 진짜로 중요한 일입니더.”

   옆에 섰던 병칠이 아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니는 의병에 못 들어온다 캐도. 전투가 얼라 장난인 줄 아나? 어이?”

   “어매 도와서 집안일이나 배우지. 딸 아가 왜 이렇게 쏘다니나.”

   “급합니더. 장군님, 장군님 좀 불러주이소.”

   “하이고, 어린것이 고집은 쇠심줄 같구먼.”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곽재우 장군 부하였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거요?”

   “은봉이라고. 죽은 덕삼이 여식인데예. 장군님 뵙고 할 말 있다고 고집을 피웁니더.”

   “지는 곽재우 장군님께 직접 말씀을 전할 낍니더.”

   은봉이가 눈썹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은봉이의 얼굴을 살피던 장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봉이는 장수를 따라가 장군을 만났다.

   “내게 꼭 전할 말이 무엇이냐?”

   “왜놈들이 장군님 집을 염탐하고 갔십니더.”

   옆에 섰던 장수가 눈을 부라렸다.

   “거짓을 고했다가는 곤장을 맞을 것이다.”

   “스님 옷을 입었는데 왜놈 말을 썼습니더. 뭔 뜻인지는 몰라도 장군님의 함자를 똑똑히 들었심더.”

   “맞습니더, 지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두 귀로 똑똑히 들었십니더.”

   개똥이도 은봉이를 거들었다.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은 의병 진지로 파발을 띄웠다. 은봉이는 마을 어귀에서 서서 말을 탄 파발꾼이 급히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군의 집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하인은 여전히 말 먹이를 주고, 굴뚝에는 연기가 한가롭게 피어올랐다. 밤이 깊어지자 모든 방에 불이 꺼졌다. 달빛이 비치다가 구름에 가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이 담을 훌쩍 넘었다. 뒤이어 몇 명이 더 담을 넘었다. 자객들은 뒤꿈치를 들고 마루를 가로질렀다. 장군의 방을 에워싸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장군의 이부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함정이다!”

   당황한 자객들은 재빨리 빠져나와 담을 넘었다. 저쪽에서 의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객들은 급한 나머지 나뭇더미 사이에 몸을 숨겼다.

   와아! 갑자기 우레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의병들이 나뭇더미를 에워싸고 있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자객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옷에 불이 붙은 자객이 몸을 뒤틀며 뛰어나왔다. 자객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같은 시각, 의병의 진지에서도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는 남강 둑을 따라 퍼졌다. 파발이 전해준 대로 의병들은 강둑에 허수아비를 세웠다. 북소리에 맞춰 줄을 세게 흔들었다. 허수아비에 매달아둔 방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의병들은 다섯 갈래로 갈라진 횃불을 들고 행진했다. 횃불이 온 강변을 뒤덮었다. 강 건너에서 때를 노리던 왜군들은 횃불을 보고 혼이 빠졌다.

   왜군은 강을 건널 엄두도 내지 못하고 후퇴했다. 


   며칠 뒤, 미순네 아재가 은봉이네 집에 왔다. 

   “은봉 어매요, 은봉이가 큰 공을 세웠심더.”

   “그기 무신 말씀입니꺼?”

   은봉 어미는 영문을 몰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은봉아, 나와 봐라. 미순네 아재가 뭐라 하시노?”

   은봉이가 쪽마루에 앉기 무섭게 미순네 아재는 보따리 하나를 은봉이에게 건넸다.

   “은봉아, 옜다! 장군께서 상을 내리셨다.”

   “예? 장군님께서 상을 내리셨다고예?”

   은봉이는 보자기의 매듭을 급히 풀었다.

   “옴마야, 이게 무슨 일이고?”

   은봉 어미가 화들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은봉이도 놀라서 미순네 아재의 입만 쳐다보았다.

   “참모에게만 내리는 옷인데, 은봉이에게 특별히 내렸심더.”

   미순네 아재는 커다란 입을 연신 벙긋거렸다.

   “은봉아, 이 옷 입고 느티나무 앞으로 나오라신다.”

   “지가 장군님하고 가, 같은 옷을 입는다고요?”

   은봉이는 볼을 꼬집어보았다. 볼이 얼얼했다. 꿈이 아니다. 생시다. 

   붉은 옷은 은봉이의 몸에 꼭 맞았다. 은봉이는 붉은 옷을 입고 한달음에 느티나무로 달려갔다. 

   “은봉아, 전장에 나가야만 의병은 아니다. 누구든, 어디서든, 이 땅과 사람을 지키려는 자, 모두 의병이다. 하여 너는 이미 의병이다.”

   “예? 참말입니꺼? 장군님, 참말이지요?”

   “느티나무에 묶어둔 북을 네가 치도록 해라. 의로운 북소리는 산과 들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법이다.”

   장군은 은봉이 손에 새로 만든 북채를 쥐여주었다. 은봉이는 북채를 꼭 쥐고 야미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부지! 지 보고 계십니꺼?”


   투웅! 투웅! 투웅!

   은봉이는 북채를 휘두르며 외쳤다.

   “모이시오! 의로운 자들은 모두 모이시오!”

   목소리가 또랑또랑했다. 몸짓이 얼마나 야무진지 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하이고, 열 아들이 안 부럽다. 덕삼 아재가 딸 하나는 잘 낳으셨다.”

   은봉 어미는 코를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홍의장군이 사람들 앞에 섰다.

   “우리가 지키는 한 왜놈들은 남강 건너 한 발도 들이지 못할게요. 함께 갑시다!”

   합! 합! 합!

   의병들이 창과 깃대를 들어 올리며 기합을 맞추었다.

   다시 출전이다. 곽재우 장군이 말고삐를 당기자 백마가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뒤를 따라 의병의 행렬이 이어졌다. 

   은봉이는 온 힘을 다해 북채를 휘둘렀다. 

   ‘장군님, 힘내이소. 아재들, 건강하게 돌아오이소.’

   둥! 둥! 둥!

   멀어지는 의병의 등 뒤로 북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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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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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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