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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

  • 작성일 2023-11-03
  • 조회수 686

그 손

박금아


   ‘그때 꼭 한번 그 손을 만져보았지’*


   이 시구를 읽고서야 아버지 생전에 손을 잡아 드린 적이 몇 번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깥쪽으로 살짝 휘어진 검지, 유난히 큰 엄지손톱, 글씨를 쓸 때면 종이 위에서 잠시 떨리던 그 손은 어른 남자 손치고는 약간 작고 하얬다. 평소에는 제자리를 지키는 단단한 손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하염없이 물러지던, 이제는 암만 만지려 해도 만져 볼 수 없는 그 손이 떠올랐다. 

   시집을 덮어 둔 채 산길로 나갔다. 사월 초이레 달빛은 막 남해 바다를 건너온 듯 시퍼런 물빛이었다. 개나리 꽃무덤 아래에서 나무둥치 하나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뭇잎으로 흙을 털어내자 희미하게 나이테가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달 물결 사이로 오래전 새벽 바다에서 돌아온 시리디시린 손이 어룽거렸다. 

   그 손은 대학 원서 쓰던 날, 기우는 집안도 나 몰라라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큰딸의 등짝을 후려치며 떨리던 손이었다. 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나던 날 고속버스터미널 그레이하운드 차창 너머에서 눈물로 흔들리던 손이었고,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 가던 때 어서 가라며 떠밀던 손이었다. 그때 알았다. 입시 원서 쓸 때 등을 갈기던 손은 그때껏 떨리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이듬해 첫 외손주를 받아 안으며 환한 웃음으로 활짝 펴 보이던 손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손바닥에 박힌 생옹이들을 처음으로 보았었다.

   나뭇등걸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손을 처음 잡았던 날이 떠올랐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집안의 어장을 도맡아 했지만, 당신 소유로 된 번듯한 배 한 척 갖지 못했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배를 건조했다. 진수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저녁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불러 축항으로 갔다. 동생들도 나섰지만 나만 데리고 갔다. 여러 척의 배 사이에서 우리 배는 오색 댕기를 나부끼며 바다에서의 첫 밤을 맞고 있었다. 

   배에 오른 아버지가 칼치**에 서서 부둣가에 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멈칫거리자 어서 잡으라는 시늉으로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그래도 나는 잡지 않았다. 여자를 배에 태우면 사업이 망한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퍼뜩 잡고 올라온나.” 

   성화에 이끌려 손을 잡고 말았지만, 배에 오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나 때문에 아버지의 어장이 기울까 무서웠다. 내 맘을 읽으신 듯 아버지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괘안타. 니는 우리 집 장남인 기라.” 

   뜻 모를 말이었다. 아버지는 이물과 고물을 돌며 해로(海路) 읽는 법을 알려 주면서 키를 잡아 보게 했고, 엔진 소리를 듣게 해 주었다. 선미로 가서는 바닥에 난 네모 구멍으로 스크루 프로펠러를 가리키며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시켰다. 소주병을 따 술잔을 건네며 바다에 붓게 했을 때는 내가 맏아들이 된 듯했다. 나를 장남이라고 한 아버지의 말이 오금을 박았던 걸까. 그날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던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정말 나를 아들로 여겼던 걸까. 딸 넷을 낳고서야 겨우 얻은 아들은 다섯 살 안쪽이었으니 아버지를 귓전으로조차 들을 수 없을 때였다. 육지 공부를 시킨다며 나를 너무 어린 나이에 집에서 떠나보낸 미안함도 있었지 싶다. 누구보다 외로움을 일찍 배운 아버지였기에 객지에서 내가 느낄 마음을 다 안 거다. 종종 니는 복이 많아 잘 살 거라며, 어장이 번창한 것도 니가 태어나면서부터라고 했던 것도 나를 달래려던 말이었을 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친정에서 며칠을 묵고 풀보기 가던 날이 떠오른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통 말이 없었다. 가끔 주시던 덕담 하나 건네지 않았다. 고모와 당고모, 숙모들이 대문 밖 한길까지 나와 배웅하며 소리쳤다. 

   “야아야, 니 복 다 갖고 가지 말고 친정에 쪼께 냉기 놓고 가그래이.” 

   전해 오는 말이 맞았던 걸까. 진수식 날 아버지 손을 잡고 올랐던 배는 내가 시집을 가고 정확히 일 년 후 어느 날, 출항을 하루 앞두고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불타는 배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허공을 휘저었을 아버지의 손이 지금도 서물거리는 듯하다.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었던 아버지. 주먹 쥐고 울던 손을 잡아 준 이 없어서일까. 청년이 되어서까지도 아버지의 두 손은 꼭 쥔 채로였다. 그래도 어장만은 성실히 지켜낸 손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열린 것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사업이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다시 움켜쥔 손은 배를 떠나보낸 뒤에는 종주먹이 되고 말았다. 술만 드시면 빈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집안을 쥐락펴락했다. 그 손은 아버지에게서 가족을 멀어지게 했고, 꽤 오래 아프게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달이 한 번도 보름달인 적 없었을 아버지의 생애인 양 떠 있고, 하늘가엔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도 맡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몸내 닮은 목련이 사월 봄 바다에 실려 온 미역귀처럼 걸려 있었다. 하늘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필시 공복인 채로 간신히 물고 있을 반달을 새벽하늘이 놓아버릴까 봐, 그러면 동이 트기도 전에 어장을 열어야 했던 아버지가 뱃길을 잃어버릴까 봐. 내 유년의 꼭지가 ‘똑!’ 하고 떨어져 내릴까 봐…. 

   새 한 마리가 비껴갔다. 봄밤, 꽃이 지천이건만 새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쉼 없는 날갯짓으로 날아갔다. 소문난 부잣집 장남이었지만, 아버지도 꽃자리에 눈길 한번 보낸 적 없이 평생 두 손을 파닥이며 살다가 새가 되어 서편으로 날아갔다.


* 이선유, 「나무는 손의 유전자를 가졌다」, 『초록의 무늬』, 시산맥사, 2020년, 94~95면.
** 선박의 맨 앞 뾰족하게 나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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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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