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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피」외 1편

  • 작성일 2023-11-03
  • 조회수 808

곰피

박금아


   이른 봄, 포구는 숨비소리로 가득하다. 겨울을 넘어온 파도들은 바위틈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고, 먼 길을 달려왔을 곰피*는 너울을 타고 몸을 푸는 중이다. 북해도 곤부박물관에서 보았던 홍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원시의 난바다를 향해 돌진하던 수백 척의 통통배들. 키를 몇 곱절 넘겨 자라난 곰피를 건져 올리느라 있는 힘을 다해 용쓰는 어부의 일그러진 얼굴이 오버랩된다. 곰피가 갑판에 오르는 순간, 필름은 멈추었다. 검은 화면에는 거친 심장 박동만이 큰 울림으로 남았다. 그 속에서 귀에 익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집 부엌 모퉁이에는 오지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 보면 곰피가 몸을 풀고 있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바다에서 곰피를 캐다가 말려서는 그물 망태기에 담아 걸어 두고 사시사철 반찬으로 상에 올렸다. 물에 불려 멸치 젓국과 함께 쌈으로 내놓거나 고추장과 식초를 넣어 무치면 온 식구가 좋아했다.

   아침이면 곰피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가 이불 밑으로 들려왔다. 발막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뒷등 ‘새미’에서 길어 온 물을 새 물로 가는 소리였다. 섬에는 먹을 물조차 부족했다. 너울이 심해 섬에 하나밖에 없던 그 샘마저 파도에 잠겨 곰피에 부을 물조차 없는 날이면 항아리 바닥에서 숨비소리가 올라왔다. 

   깊은 산골 처녀였던 어머니는 열아홉에 섬 색시가 되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섬이었다. 홀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에게 외할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편히 살라”며 보낸 시집이었다. 어머니는 혼례를 마치자마자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고조부모님을 모시며 아버지를 도와 어장일을 했다. 집안일에 밭일에 끝이 없었다. 

   깜깜한 새벽이면 섬 외딴곳에 있는 발막으로 염포를 하러 갔다. 아버지가 죽방에서 잡아 온 멸치를 삶아 몽돌밭에 너는 일도 힘들었지만, 염포에 쓰인 도구들을 간수하기란 가늠하기 어려운 노역이었다. 멸치를 담았던 대소쿠리를 바닷물로 씻으면 시린 물이 허리까지 차오를 때도 있었다. 성사(聖事)였을까. 어린 어머니는 매일 새벽, 곰피처럼 바다에 육신을 담그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하루를 열 수 있었다.

   십여 척이나 되는 뱃사람들의 먹거리를 감당하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다. 반찬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 마당은 늘 부식공장 같았다. 어머니는 조선소로 어판장으로 음식을 해다 날랐다. 배들은 고기잡이를 떠나면 보름 정도를 바다에서 보냈다. 배 한 척에 십여 명의 선원들이 탔으니 층층시하 식구에 일꾼 아재들까지 얼마나 많은 음식을 장만해야 했을까. 

   김장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물과 소금을 아낄 방편이었을 거다. 집 앞 갱변**에 그물을 쳐 놓고 수백 포기의 배추를 쪼개어 담가 두면 바다는 노란 꽃밭이었다.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날 때면 뉘누리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였다. 너울이 밀려올 때마다 파도는 배추 잎 갈피에서, 어머니의 무르팍에서 흰나비 떼가 되어 하르르 날아올랐다. 

   푸른 물이랑 가에 앉아 거친 바다 밭을 매시던 어머니.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면 유년의 바다를 아름다운 수채화 한 점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 속 바다는 선연한 멍 빛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바위를 부딪는 파도의 멍 같은. 제 몸을 부수며 길을 열어 가는 파도처럼, 어머니도 당신의 몸 하나로 한 번도 닦인 적 없는 바다에 길을 내느라 멍투성이가 되었다. 

   초봄, 배들을 바다로 보내고 나면 어머니는 먼바다로 곰피를 따러 갔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순해지고, 파도 갈피에서는 연둣빛이 설핏했다. 물 길러 가거나 육지에 있는 장에 갈 때를 빼고는 섬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며칠 곰피 캐는 날은 해방이었다. 섬 여인네들과 집 앞 갱변으로 조개 잡으러 갈 자유조차 없었다니…. 긴 장대를 들고 마당을 나서는 어머니의 볼에는 광채가 돌고 분내가 났다. 동동구리무를 바르고 박가분이라도 두드렸을까. 

   곰피가 자라는 곳에 이르면 너울이 심한 날에는 배 안으로 파도가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다른 손으로는 장대 갈퀴로 곰피를 캐다 보면 바다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날 밤이면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잤다. 몇 번이고 어머니를 불러 젖히던 고조할아버지의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도 어머니를 깨우지 못했다. 이튿날이면 집 안팎 곳곳에 곰피가 널렸다. 담장에서, 마당에서, 바닷가 비렁에서 곰피 마르는 소리가 해풍 속에서 달았다.

   곰피 캐기가 끝나면 집 안에서는 더 큰 너울이 일었다. 어장일을 몸으로 한다면, 집안일은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두 시동생과 세 명의 시누이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장남을 남편으로 둔 아내 자리였으니 어머니의 속내는 너울 속이었을 거다. 어머니의 몸에도 파도가 저장되었던 모양이다. 드팀없던 겉모습과는 달리 섬을 도망칠 궁리만 했었다니. 또바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단다. 그러나 달 없는 밤이면 깜깜해서, 달 뜨는 밤이면 달빛이 밝아서 배를 띄우지 못했노라 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곰피 항아리의 물을 갈며 하루를 젓는 순간부터 늦은 밤, 그물바늘을 쥐고 쪼그려 잠들기까지 한시도 마음에서 노(櫓)를 놓은 적이 없었을 테다. 

   산골에서 잉태된 포자(胞子)씨 하나가 깊은 바다에 속절없이 떨어졌을 날을 떠올려 본다. 뿌리내림의 시간이었을 거다. 한갓 바다 식물인 곰피에게나 사람에게나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란 무수한 흔들림을 견뎌 내는 고행이었을 터. 포자는 간신히 바닷속 바위를 열어 흙 한 줌 없는 그곳에 뿌리를 심었을 거다. 

   옹기 가득 물을 채워 여행지에서 사 온 마른 곰피를 담근다. 고물고물 오그렸던 심사를 풀고 보니 구멍이 숭숭하다. 쉴 새 없이 드나들던 파랑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던 흔적이다. 해대(海帶)라는 또 다른 이름이 말하듯 곰피에는 바다의 한 생(生)이 담겨 있다. 


   섬 각시가 된 지 육십 년, 어머니는 몸 여기저기에 구멍 숭숭한 한 포기 곰피가 되었다.


* 다시마목 미역과의 여러해살이 해조류.
** 바닷가 마을에서 작은 해안가를 이르는 말.









묵주와 발판



   혼인하고 시가에 첫인사를 다녀온 딸아이가 사돈댁에서 보냈다며 선물 보따리를 꺼내 놓았다. 사부인이 직접 구슬을 꿰어 만들었다는 팔찌 묵주와 나무 발판이었다. 

   그런데 둘 다 내가 사용하기에는 마뜩잖았다. 묵주는 남자 버금갈 정도로 굵은 내 손목 탓이었고, 발판은 너무 작아서 어린아이가 딛고 서기에도 옹색했다. 높이와 둘레 모두 한 뼘을 조금 넘는 데다 중심부에서 바깥쪽으로 살짝 뻗은 네 다리는 너무 가늘어 무거운 내 몸을 감당할 성싶지 않았다. 앉은뱅이 의자로 쓰기에도 너무 낮았다. 묵주는 손 묵주로 사용하면 되었지만, 발판은 소용을 알 수 없어 난감했다. 

   사돈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용도를 물어보기는 어려웠다. 발판으로 사용해도 되냐고 물으면 너무 작은 걸 보냈다는 말로 들릴 수 있겠다 싶고, 장식용이냐고 묻자니 스스로 생각해도 실없었다. 누가 장식용으로 발판을 선물할까 싶었다. 

   발이 닿는 부분에 연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꼬리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빨간 목줄을 하고 잠든 모양이 영락없는 새끼 고양이였다. 가슴에 파묻고 있어 그렇지 빨간 나비넥타이가 매어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눈을 뜨고 쳐다볼 것 같은 생김새가 장식용이 분명했다. 

   거실 한 귀퉁이에 세워 두고 오가며 보니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한 듯했다. “야옹아!” 하고 부르면 꼬리를 풀고 사푼사푼 걸어와 안길 것 같았다. 거실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 때면 세모진 검정 귀가 쭝긋쭝긋해지면서 살짝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리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쥐 울음을 듣기라도 한 양 몸을 털고 일어나 괴발디딤으로 서붓 발을 뻗어 공격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면 나도 일을 멈추고 쥐가 들었나, 숨죽여 집 안을 두리번거렸으니 그새 정이 들 만도 했다. 방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도 발판을 보러 거실로 나갔던 적도 있다. 

   세탁한 커튼을 창에 매달려니 키가 모자랐다. 갑자기 평소에 쓰던 식탁 의자는 너무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 받은 발판에 눈이 갔지만 대번 포기했다. 천생 식탁 의자를 옮겨 와야 하는데 또 눈이 게을렀다. 다시 고양이 발판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혹시? 슬그머니 모험심이 생겼다. 발판을 들고 와 불안한 마음으로 한 발을 올리고 서 보았다. 멀쩡했다. 절로 질끈 눈이 감겼지만 이번엔 두 발을 딛고 섰다. 깨끼발을 하고 기연미연 한쪽 팔을 뻗어 보았다. 놀랍게도 손끝이 천장에 닿는 게 아닌가. 거실과 온 방을 돌며 커튼을 다 달았다. 

   그때부터 포기하고 말았던 집 안의 공간이 다 내 안으로 들어왔다. 책장 맨 위 칸에 올려 둔 책을 내릴 때도, 베란다 나팔꽃에 실을 매달아 올릴 때도, 새로 들인 초대형 통돌이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낼 때도 구둣주걱을 사용해야 했지만 고양이 발판이면 만사형통이었다. 까치발로 물건을 꺼내려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한 후로는 아예 비워 두었던 싱크대 맨 꼭대기 칸도 살아났다. 어린 날 찬장 높은 곳에 있던 원기소 병에 손을 닿게 하기 위해서라도, 할머니가 살강에 올려 둔 꿀단지와 홍시를 내리려 했을 때도 무언가를 딛고 올라서야 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거다. 모든 대상에 다다르자면 발디딤이 필요했었는데 말이다. 

   사람의 마음에 닿는 일도 그랬던 것 같다. 금세 가까워지는 사이가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매양 처음 그대로인 사이가 있었다. 어떤 만남은 만나면 만날수록 아득해져서 까마득해진 거리도 있다. 내겐 너무 높다고, 너무 멀다고 판단하여 미리감치 포기해버린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지레 겁먹고 포기했던 거리란 작은 나무 발판의 높이에 불과했던 것을.

   심지어 어떤 만남은 의도하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사돈지간이 그렇다고 했다. 자식이 품에 있을 때는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했는데 나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애초 내 깜냥을 알아보아 묵주만으로는 모자랄 거라 여겼을까.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삼십 센티미터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라고 한다. 자로 재어 보니 고양이 발판이 꼭 그 높이다. 발판을 보고 있으면 멀게만 느껴지던 마음의 거리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 없다. 묵주에 발판까지 받았으니 이제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다다르지 못할 거리란 없겠다. 

   고요히 나무 발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묵주를 손에 든 듯하다. 그런데 옛말에 “사돈네 봉송(封送)은 저울로 달아야 한다”고 했는데 귀한 선물을 받고도 삼 년이 다 되도록 답례를 못 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래저래 요즘 나는 발판을 사돈 모시듯 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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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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