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당신을 위한 서바이벌 키트 ― 윤고은론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643

당신을 위한 서바이벌 키트

― 윤고은론1)

황유지




1. 사는 게 모험


한 사회의 거대 서사를 함께 체험하고 그로 인한 공통감각을 형성한 청년 집단을 ‘세대’로 정의한다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세대는 굵직하게, 전쟁 세대와 민주화 세대 그리고 그 민주화의 주축이던 386 집권 이후 세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 후로는 문화 향유의 습속에 따라 X 세대, 세기의 변화에 따라 밀레니얼, 그로부터 뉴노멀에 대한 새로운 감각세포를 지닌 최근의 세대를 아우르는 MZ 세대가 있다. MZ라는 세대 용어가 고안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곤두박질치는 사회적 조건은 88만 원, N포 등의 세대를 생산해냈는데, 1997년의 경험은 이 세대들의 중심축에 있다. 주지하듯, 국가부도 이후 사회 체제는 전면 개편되었다. 세대는 카를 만하임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변동의 주체라기보다는 사회변화에 따라 구성되는 주체 위치들의 집합”2)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어떤 세대들은 명칭만 달리하며 쌓여간다. 말하자면 많은 밀레니얼들은 88만 원 세대이자 N포 세대이기도 하다. 3포는 4포를 낳고 4포는 숫자를 거듭하더니 ‘N’이란 자연수의 대명사로 그 누적을 표시한다. 이제 사회적 통과의례를 수행하지 못한 청년기는 지연된다. 우리가 한 시대를 ‘IMF 시기’ 혹은 ‘IMF 시대’로 회자하는 것은 국제기구로 대변되는 체제가 어떻게 한 국가 집단의 특정 시절을 지배하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IMF는 한국 사회에 파국적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리며 국가나 체제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결별함을 목도케 하였다. 어떤 시기든 ‘세대’란 위기의식의 산물이어서 이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해당 세대의 그림자이며 상처이기도 한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기지로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실패할 때 그리고 우리의 많은 이야기들이 SF를 향해 건너갈 때도 여전히 그것은 청년들의 문제를 담고 있다. 박민규나 김애란, 황정은 또 장강명, 조남주 같은 작가들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문학이 시간의 궤적에 따라 한 땀씩 순차적으로 수놓일 필요도 없지만, 어느 쪽에서도 아직 어떤 세대들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세대의 지칭어는 자못 통계적이고 명명에는 추상화의 힘이 있어 마치 사회가 비정규직을 소모하고 새로운 인력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과 같이, 청년은 그다음 세대의 청년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청년 세대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규정하는 일이 세대론의 핵심 문제”3)라고 할 때, 윤고은의 글들은 거대 서사라는 공통의 체험 뒤에 압사당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런 시절의 허리에 IMF라는 둔중한 몽둥이를 맞은 한 세대의 생존 서사이다. 이는 살아남기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맥락이자 증거로 제출되며 더욱 세계와 결별하는 청년들의 잉여와 그 누적을 암시하는 한편으로 다음 세대들의 생존에 경광등을 켠다. 그러니까 이 작가의 이야기는 한 세대의 잃어버린 세대론이자 앞으로 올 세대의 전사(前史)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이미 사회는 MZ로 그 관심을 옮겨갔지만, 이 사회에는 노쇠한 청년들이 고단하게 생존해 있다.
지금 청년의 당면 과제는 ‘생존’이다. 생존은 사회적 변동에 의해 궁지에 몰린 청년들의 삶의 방법론이자 ‘마음의 레짐’이다. 그것은 철학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냉혹한 서바이벌의 테제이다. 이전 세대의 성공주의와 결별한 이들의 모토는 “더 아래로 추락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자세, 피로와 체념의 은폐된 감정, 화려한 삶이 아니라 소박하고 평범한 보통의 삶에 대한 소망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결합”된 이른바 평범성의 유토피아에 닿는다.4) 그것은 로맨스 푸어, 하우스 푸어, 베이비 푸어 등과 같은 각종 푸어, 루저나 잉여와 같은 단어를 흔하게 양산하고 그것을 평범함으로 둔갑시킨다. 이런 사회의 속임수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생존배낭을 잘 꾸려야 한다. 이제 사회는 서바이벌, 즉 살아남는 이가 승자라는 게임의 규칙을 삶의 규율로 바꾸어 놓았다. 이른바 ‘생존주의 세대’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영웅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던 모험은 이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안간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긴장, 불안과 함께 청년의 삶에 잠복해 있다. 윤고은의 소설은 생존을 목적이자 목표로 살아야 하는 세대의 특징을 함축하는 한편, 경제 논리가 삶의 세계관으로 둔갑하는 과정을 내포한 한 시대의 문학적 재현이라는 생존 서사이다.


1) 다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무중력 증후군』, 한겨레출판, 2008.; 「달콤한 휴가」, 「로드킬」, 『1인용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0.; 『밤의 여행자들』, 민음사, 2013.; 「P」, 「요리사의 손톱」, 『알로하』, 창비, 2014.; 「Y-ray」, 「다옥정 7번지」,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한겨레출판, 2016.; 『해적판을 타고』, 문학과지성사, 2017.; 「양말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문학동네, 2019.; 「블루투스는 내 마음」, 《문학동네》, 2021년 봄호.
2) ‘생존주의 세대’라는 용어와 정의는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마음의 사회학 관점에서」를 참고, 《한국사회학》 49집 1호, 2015, 184쪽.
3) 박동수, 「페미니즘 세대 선언」, 《한편-세대》 1호, 민음사, 2020, 19쪽.
4) 김홍중, 앞의 글, 196쪽 참고.


2. 로맨스의 정치경제학


생존게임은 이미 우리 생활에 코드화되었다. 수강 신청, 상대적 학점 평가, 계약 연장, 승진에서부터 아파트 청약이나 미디어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이른바 서바이벌 생태계를 조성하고 노출시킨 다음 서바이벌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느슨하게 만든다. 재난 현장에 교훈을 덧입혀 전시 판매하는 ‘다크투어리즘’을 소재로 한 『밤의 여행자들』은 그 자체 여러 겹의 생존게임이다.
퇴출 위기를 극복하고자 재난 현장으로 들어간 ‘요나’는 거대 자본 ‘폴’의 다크투어리즘 프로그램에 원주민 살상 서사가 설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요나는 ‘럭’이 희생양이 될 것을 알고 그를 살리기 위해 손을 쓰는데, 재난 상품 개발에서 재난으로 몸을 옮겨가며 직장 내 생존에서 실제 목숨을 건 문제로 존재론이 이동하는 이 소설에 덧입혀진 사랑의 서사는 요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서바이벌 무대에서 불필요한 그것은 감정이다. 운명을 피해 달아나지만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지고 되돌아오는 구약의 인물처럼, 요나는 이 생존게임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관광 상품의 서사로 기입되어 자본 창출에 재투입된다. 재난관광이라는 상품은 타인의 불행과 죽음까지도 오락 수단으로 삼는 ‘관음의 향락’이며, 우리 세계가 이를 다시 삶의 자양분으로 이용하는 정글과 같은 양식으로 구성됨을 보여주는 냉혹한 자기관찰 시스템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으로 이전되어 소모되는 요나의 죽음은 한껏 축소된 형태의 존재론이면서 죽음까지도 생산을 위해 투여하는 자본의 잔혹한 속성을 보여준다. 요나의 서바이벌 키트였던 최소한의 양심과 사랑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그것은 럭에게 전달되어 몇몇의 무고한 희생양을 구하는 것으로 되살아난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조직에서 낙오된 자, 자본이란 세계의 각본에 희생된 자를 영웅으로 삼기에 그런 인물들이 너무도 흔하다는 것에 앞서 이 세계가 더 이상 그런 영웅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청년들에게 ‘결혼-내 집 마련’은 얼마나 불투명한 미래인가? 집 없는 세대의 현실 로맨스를 그린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이하 「부루마불」)의 ‘곽도일’은 ‘이생집망’5)이 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문제는 늘 ‘예산’이다. 부루마불 게임 보드에 평양이 있어도 선뜻 투자하기 어려울 마당에 나의 신혼집이 거기 있다니. 그것은 평양이라는 장소가 주는 거리감인가, 결혼-내 집 마련이 주는 비현실성인가?
도일에게 투자는 너무도 먼 미래다. 당장의 생존이 시급한데, 불확실한 미래 그것도 북한에 투자를 하라는 건 이 사회가 정녕 한 청년을 조롱하는 것인가? 그에게 이 투자는 도박 곧 모험이다.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개성 신도시 모델하우스가 용인에 있다는 소식에 걸음한 건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생존, 즉 북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팀장에게 흥밋거리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의 미래를 향해 도박을 하려면 지금 당장의 주관적 확신이 있어야 할 텐데, 개성 투자는 영 거북스럽다. 그마저도 전액 납부가 원칙이라는데, 도일에게 그것은 지금 당장 목숨을 건 모험을 하라는 말과 같다. 이만한 지위 상품의 구매도 여의치 않은 그의 사정은 점점 궁지로 몰리는 것 같다. 통일은 당장 오지 않더라도 동아줄인 줄 알았던 팀장마저 좌천되고, 여자친구 ‘선영’은 개성에 신혼집을 마련하자는 얘기를 “결혼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부루마불」, 48쪽)로 받아들인다. ‘대동강 페어에일’까지 슈퍼에 깔린 마당에 북한 땅 분양이 안 될 건 없다 싶으면서도 여전히 모험은 생존을 위협한다.
근대 이후 온갖 낭만화된 상품들로 가속화되던 사랑은 이제 부동산이라는 거대 더미로 청년의 사랑을 압박한다. 로맨스의 과정에 영화관, 레스토랑뿐 아니라 ‘내 집 마련’까지 들어가야 하니 방법이 없다 싶은 그때에 사회는 ‘신혼부부 대출’과 같은 상품을 만들어 권하고 있지 않은가. 두 생산력이 합심하여 빚을 창출하고 그것을 동기 삼아 사회를 가동하라는 이 겁박과도 같은 메커니즘 앞에 지금 청년들의 사랑은 조금 더 지연되는 것 같다. 한때 이데올로기의 디스토피아와 같이 규정되곤 했던 군사분계선 너머의, 그럼에도 결코 간단히 넘을 수 없었던 그 땅이 투자 가능성이라는 자본의 게임에 쉽게 유토피아로 둔갑하고 마는 이 소설을 ‘현실 로맨스’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동산 앞에 무너지는 로맨스의 비정함은 「블루투스는 내 마음」에도 있다. 대형 평수의 빌라에 세 든 ‘나’는 301호 남자와 연애 감정을 느끼지만, 부동산으로 자수성가한 ‘판교엄마’는 나를 자본의 산술로 거부한다. 판교엄마의 부동산은 ‘조물주보다 건물주’라는 한국 사회의 최고 자본권력이고 301호 남자, 판교엄마의 아들은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 급기야 이 소설에서는 집마저도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판교엄마의 부당행위를 은폐하는데 공모한다.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주파수에서만 작동범위를 얻은 블루투스처럼 자신의 머리를 수그려가며 ‘수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라는 판교엄마의 승리로 끝나는 이 소설은, 북한 투자라도 해야 겨우 내 집 마련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싶은 청년 도일의 처지와 함께 “소비영역의 경제적 관행 내로 로맨스를 편입시키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계급 관계”6)를 확인시키는, 로맨스의 정치경제학이다.7)


5) 신조어, ‘이번 생은 망했어’를 줄인 ‘이생망’은 이른바 ‘수저계급론’과도 결부되는 포기와 절망의 자조적 농담이면서도 망해도 삶은 계속된다는, 즉 망한 상태의 삶이 반복된다는 고단함의 정서를 내포한다. 게임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청년들은 이제 더 이상 열정을 담보하는 것이 승리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망한 이번 생에서는 겨우 살아남기도 버거운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청년의 노력만으로는 내 집 마련이 어림없다는 고단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번 생에 집 사기는 망했어’라는 뜻의 ‘이생집망’까지 파생시켰다.
6) 에바 일루즈,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사랑과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박형신 외 역, 이학사, 2014, 123쪽.
7) 윤고은의 ‘현실 로맨스’는 최근작에 이르러 결혼 의례의 허위를 보험약관사례집이란 우화로 폭로하기도 한다. 『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2021.


3. 이토록 말랑한 생의 이물감


윤고은의 인물들은 말하자면 ‘잉여’에 가깝다. 청년은 계속해서 만들어지니 사회는 쓰고 난 이들을 잉여로 떨군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MZ 세대는 문화 즉 소비 주체로 겨냥되고 그것은 마치 이들을 사회 중심 주체로 상승시키는 것과 같은 착시를 만든다. 그런 청년들에게 밀려 이전 청년들은 더욱 왜소해진다. 과연 누가 이 잉여의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제 너무 많아진 잉여들은 외부에서 가한 압력만큼 내부로 촉수를 뻗어낸다. 세계가 달라지면 삶의 양식도 달라진다. 이 청년들이 찾아낸 생존의 방법, 그것은 ‘환각’이다. 환각은 권태롭고 출구 없는 삶에 행하는 주체의 감미롭고 적극적인 향유이자, 세계를 감각하려는 노력이 빚어낸 오해이기도 하다. 세계로부터 밀려난 청년은 감각의 촉수로 세상을 감지한다. 그것은 공통감각을 체득할 기회조차 상실한 이들의 서바이벌 키트나 다름없다.
달이 제 몸을 복제하고 분양과 투기의 대상화를 거쳐 종국에는 우주쓰레기로 밝혀지는 『무중력 증후군』(이하 『무중력』)의 서사는, 문제를 만들고 해결해나가는 방식에 대한 한 사회의 성향과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중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은 과학적 진실과 함께 이 사회를 지탱하던 모든 믿음에 배반당한 개인들의 상처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당시 사회가 실체 없는 가해자 대신 모든 문제를 서바이벌 형식으로 대체하며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미는 식의 강제적 자유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가해자 없음’의 사회적 공언 앞에 속수무책으로, 개인의 모든 역량들은 서바이벌을 위해 관리되고 개발되어야 하는 자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이란, 관찰자에게는 동물적 생태계를 관찰하는 관음의 오락과 같지만 행위자에게는 하나뿐인 목숨을 건 잔혹한 게임이다.
청년 ‘노시보’는 늘 아픈데 “원인이 확실하지 않다.”(『무중력』, 47쪽) 그가 보기에는 모두가 병든 것 같다. ‘추함’과 같은 성품의 문제나 ‘외로움’, ‘신경질’과 같은 감정 또는 신경계의 문제를 모두 병든 상태로 진단하는가 하면, ‘노동’마저도 젊은 피를 혹사시키는 바이러스이자 질병이라는 식이다. 완전히 농담도 아닌 것이, 질병을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면, 사건 발생의 장소와 상태가 사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더군다나 몸은 외부든 내부든 항상 공격을 받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그가 이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틀렸음을 예견하게 한다. 사회는 이런 이를 쉽게 부적응자라고 진단하지 않던가.
‘노시보’는 ‘플라시보’의 반대어이기도 한데, 부정적인 암시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한다는 이 이름은 급기야 없는 병도 만들어낸다. 이른바 ‘무중력 증후군’이다. 회사에서는 달에 납골당을 만들어 분양한다는데, 노시보가 달의 분화를 기다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함께 기이한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에서 잠시나마 소외를 잊고 안정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떤 해괴한 변화와 일탈도 달이 늘어났다는 공통분모를 깔면 무난한 것이 되”(『무중력』, 44쪽)고, 실적 같은 것에 대해 “지나친 강박관념을 해소하는 역할도”(『무중력』, 44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생존배낭에 담긴 서바이벌 키트는 환시와 환통이라는 ‘환각’이었던 셈이다. 생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증후군은 차라리 ‘중력 증후군’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누구나 겪는 일상의 통증들을 가리키고 있다. 통증만이 생의 증거이고 그것의 확인 없이는 중력이 나를 당겨준다는 것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의식 속에서 거짓말 같은 달의 분화는 없고 고단한 생만이 지속된다.
그의 병은 궁극적으로 불안에 닿아 있다. 불안이라는 정서는 승산이 없을 것만 같은 단단한 환경에 대한 위축심리이자 생존의 확인이라는 얄팍한 안심으로 이어지는 삶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인물들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불안은 생존의 문제를 매일같이 고민해야 하는 지금 청년들의 세계 인식 그 공통감각일지도 모른다.
몸은 조건이자 맥락이다. 나는, 몸으로 살고 체험하는 현상으로 몸은 나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몸은 나의 의도나 의지를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나를 세계에 자리매김하게 해주는 시점이나 지평이다.8) 그런데 이 몸속에 무엇이 들어가 나를 지켜본다는 이물감은 내 몸을 낯설게 만들어 나와 육체의 거리를 벌린다. 외부의 시선이 나를 지켜본다는 불안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감각이지만 내부에서 나를 관찰하는 타자가 있다는 것은 더욱 서늘하다. 그러니까 ‘P’라는 세계에서는 내 몸도 나와 불화한다(「P」). 실적에 쫓기는 회사원이 자기 존재를 잃고 변신하고 만다는 이 기시감은, 불안이 낳은 증상의 발현이 한 존재를 압도하고 말살하는 것을 넘어 육체가 존재와 세계 내 새로운 위치를 찾아 제 발로 소멸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존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배출되지 않고 남은 캡슐내시경에 대한 내장(인물의 성도 장(腸)과 동음이다)의 이물감은 조직 내 위치에 대한 불안의 자각과도 같다. 건강검진 때 삼킨 캡슐내시경을 배출해내지 못하자 ‘장’은 이물질이 되기 시작한다. 공공의 시선에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던 그에게 결국 병가가 주어지는 과정은 어빙 고프먼의 ‘낙인자’와 겹쳐진다. 한 집단의 구성원에서 유해물을 거쳐 병자로 변모하는 장은 P라는 세계에서 공공의 재산으로부터 배척되며 환경에 부담을 주는 존재로 취급된다. 이제 세계는 그에게 벌금의 성격인 환경부담금을 과도하게 청구하고 이를 체납하면 범죄자라는 프레임을 씌울 것이다. ‘정상인’의 속성에 맞지 않게 오염되었다는 수치심과 함께 언제든 격리, 추방될 위험을 떠안는 것이야말로 낙인 ‘찍힌 자’의 숙명이다.9)
동료 ‘송’ 역시 캡슐내시경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그는 체납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하는 와중에도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려 한다. 장은 그런 송의 계획을 밀고한 대가로 복직한다. 그러니까 조직의 생존게임에서 임원들의 담배 냄새 따위에 예민한 개인적 감각, 모범 시민으로의 규범정신과 영웅적 정의감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한 세계에 불만을 갖는 것은 내장까지 관찰당하는 감각으로 결국 조직에서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장은 “땅 아래로 뚫린 둥근 문”(「P」, 191쪽)으로 들어가 타이어의 품에 안긴다. 그의 실존은 한없이 아래로 침잠한다. 왜소한 존재라는 선택이야말로 ‘먹고살기 위한’ 서바이벌 키트였던 셈이다.
세계에 불화하는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세계라는 질서가 가장 경계하는 일일 것이다. 전복의 의도를 품지 않도록 선수 치고 통제하는 힘은 탈마법의 세계에 신비주의를 입히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Y-ray’로 몸속에 가위의 그림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몸 안팎의 모든 것이 멋대로 편집되고 재단되”(「Y-ray」, 124쪽)는 기분을 느끼는 식인데, 이런 Y들은 싹을 잘라야 할 위험인자로 관리된다. 설명되지 않는 낯선 것에 대한 통제는 차별을 낳고 분류는 혐오를 자라게 한다. 이들은 이물질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실직과 고립은 수순이다. Y들의 태아가 자국을 가지고 태어나자 낙태를 하고, Y 신분증, Y 전용 화장실 등으로 공간이 분리되는 일화들은 약자를 향한 사회적 배제의 과정을 복제하고 있다. 기존의 질서를 의심하는 것, 돌출된 행동을 하는 것, 코드에서 벗어난 것들이 발견되는 것은 생존에 위험하다. 애초에 Y-ray가 불량품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세계가 오류라는 비밀을 함구하는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서바이벌 키트도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인물들은 경제적으로 기댈 만한 형편의 부모를 두고 있는 경우가 드문데, 인물들의 연령대도 그렇지만 이들은 우리가 알 듯 1997년 체제를 온몸으로 관통한 청년과 그 가족들이다. 여러 세대들이 함께 그 시기를 건너왔지만, 학창 시절 부모의 파산을 경험하고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발 디디며 ‘푸어’한 N포가 된 이들은 이제 애매하게 청년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데, 제도적 지원조차도 이들을 더 이상 청년의 범주에 묶지 않는다. 기댈 곳 없기로는 ‘정’도 마찬가지인데, 지역신문 기자인 그는 ‘chef’s mail’을 ‘chef’s nail’로 혼동해 잘못된 광고 기사를 싣는다. 기자에게 활자의 혼동이란 좋지 않은 징조다. 이를 시작으로 버스노선 혼동, 지문인식 실패 등이 이어진다. 「요리사의 손톱」은 착각으로 시작된 작은 균열이 환각으로 연장되며 세계에 면하는 자아감각을 잃어가는 한 인간의 소멸과정을 보여준다. 회사가 그의 지문을 외부의 것으로 인식할 때 그는 실업자와 동시에 홈리스가 된다. 기다렸다는 듯 연애도 끝난다. 그는 자연스레 파트타임 노동자가 된다. 지하철을 타고 적당히 책 제목을 노출시키는 아르바이트는 애초에 정보의 진실성보다는 이미지로 추상화되어 개인의 무의식에 침범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콘텐츠를 생산하던 그는 이미지로 추상화되며 스스로 광고로 전유되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인물은 서서히 소각된다. 방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하루 연명은 시급하고 전세금까지는 너무 먼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표들을 오류로 인식하는 생의 감각은 애초에 발 디딜 곳이 녹록지 못했던 청년의 현실 지표인 셈이다. 끝내 선로로 미끄러져 들어간 정의 결말은 사회가 만든 숱한 잉여들의 선택지 끝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과 자꾸만 포개어진다.
환각은 일상의 균열을 읽어내는 촉수이자 주체성의 마지막 보루이다. 존재를 묵살하지 않는 방식으로의 환각은 끝내 어떤 방식으로든 제 존재를 움켜쥐겠다는 극히 소극적인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환각을 치유할 구원의 서사는 적어도 생존게임에서는 드물다. 일상적 삶은 구원에 대한 전념10)이기도 하지만, 이때 구원은 생존 세대의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해석될 것 같다. 그것은 평범한 삶으로의 진입이거나 반대는 고단한 생의 쉼일 수도 있다. 생존이란 단어는 그 외부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만큼, 아슬하다.


8)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지성사, 2002, 692쪽.
9) 어빙 고프먼, 『스티그마』, 윤선길 외 역, 한신대학교출판부, 2009.
10) 서동욱은, 구원은 일상 안에 미리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모험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모험은 삶의 균열을 통해 이루어지며 일상을 규정하는 많은 파편의 요람은 문학이라고 말하며 하이데거의 구원에 대한 전념으로서의 일상적 삶을 빌려온다. 『일상성의 모험』, 민음사, 2005.


4. 구멍의 존재론


미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가 시공간의 표상이라고 할 때, 윤고은은 ‘구멍’을 그 표상으로 종종 제시한다. 구멍은 공간의 내부이자 외부이다. 구멍을 본다는 것은 시선 주체가 구멍의 외부에 있다는 말이고 반대로 구멍 안에 주체가 존재한다면 이때 구멍은 시선을 넘어 존재를 압박해온다. 구멍의 존재론이란 그 자체가 ‘텅 빔’이기 때문이다. 구멍이 있는 한 그것은 비어야만 한다. 만약 내가 세계의 구멍이라면 내 존재는 삭제를 향해 나아간다.
공간을 ‘빈대’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인물이 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그’에게 난데없이 빈대가 이슈로 떠오른다. 실업급여를 받아 커피와 카메라를 즐기는 달콤한 휴가를 빈대 같은 것에 뺏길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빈대에 집중한다. 빈대는 “숙주의 공간에 서식하며 밤이 되면 기어 나와 숙주를 뜯는다. 그래서 빈대를 퇴치하려면 자신의 영역을 먼저 지켜야 하는 것이다.”(「달콤한 휴가」, 50쪽) 마치 얼굴 없는 자본이 거대 국가로부터 한반도에 상륙했듯 뉴욕발 빈대는 서서히 인물의 삶으로 스며온다. 빈대에 대한 불안이 삶에 틈, 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커피콩은 몸을 웅크린 빈대로 보이기도 하고 감미롭던 그 향은 빈대의 냄새를 덮어버리므로 그는 과감히 커피라는 취향에 구멍을 낸다. 빈대를 추적하기 위해 낮의 생활도 구멍 낸다. 종국에 숙주로 채택되어 얼마간의 돈과 자신의 육체성을 오롯이 교환한 그는, 빈대를 유인하려 향을 들이붓는데 그것은 공교롭게 “바람의 냄새”(「달콤한 휴가」, 80쪽), 즉 무(無)다. 고립과 자발적 퇴출의 수순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소멸과정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가차 없이 버려지는 한 인간의 사회적 종말을 은유한다.
이 소설에서 빈대를 둘러싼 주민들의 인식과 행동 절차는 우리 사회 질병이나 장애, 바이러스와 같은 주제어들이 어떻게 혐오를 생성하는지를 보여준다. 빈대라는 공공의 적을 예의주시하며 입주민들은 대동단결한다. 미세먼지 지수와 코로나19 감염자 수 파악이 일상이 된 것처럼 사람들은 빈대에 대한 소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빈대를 옮겨오는 것으로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것은 ‘개’다. 공공의 위기 앞에서 동물과 약자를 우선순으로 삭제해버리는 일은 안타깝게도, 흔하다. 입주민들은 302호 남자를 빈대에게 내어줄 공간으로 삼고자 하지만 302호의 갑작스런 취직으로 그것은 실업 상태인 그로 대체된다. 존재는 철저히 물질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입주민들의 태도는 “사회가 타락했거나 부당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도발해주는 은유”11)로서, 실직자나 무직자를 가정이나 사회의 빈대에 빗대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이 ‘달콤한 휴가’라고 믿은 한 인간의 커다란 착각은 그가 빈대 취급받고 사회에서 탈락될 수밖에 없었던 냉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눈치’라는 것도 이 사회의 서바이벌 키트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구멍이 되어버린 남자는 이제 텅 비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사회적 부고를 짐작할 수 있다.
앞선 「P」에서도 ‘장’은 토출해내지 못한 캡슐내시경을 “자신을 엿보는 구멍”(「P」, 170쪽)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은 점점 자랐는데, 이는 존재라는 구멍에 대한 표상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거대한 타이어 모양의 회사 부지와 시설들은 그 안에 있을 때 소속감을 주는 한편 끝내 실존을 삼키는 거대한 구멍이기도 했다. 구멍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다는 감각이 구멍의 존재를 만든다. 이 세계의 협잡이 내 집 마당에 묻혀 있다는 감각, 『해적판을 타고』에서 구멍 안에 있던 것은 한 사회의 모의, 비윤리와 이해관계였다. 오염된 실험용 토끼 사체는 내 집을 낯설게 하고, 집은 세계의 위협이 되며 그것은 자체로 구멍이 된 것이다. 원본의 해피엔딩 대신 해적판 생의 마무리가 다르더라도, 그 구멍이야말로 생의 잔인한 진짜 얼굴일 수 있다. 구멍은 비기 위해 존재를 삼키고 다시 구멍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실존들이 구멍의 존재를 위해 복무할 것이다.


11)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역, 이후, 2002, 106쪽.


5. 당신의 생존배낭에는 무엇이 있나요


‘위키’의 배낭에 들어 있던 것은 물이나 초콜릿바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감싼 사진과 추억을 담고 묵직하게 놓인 미용가위였다(「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진짜 재난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살고 싶어질 것이다. 생존배낭의 물품들은 3일간 목숨을 연장하며 그 후에 좀 더 나은 생을 지속할 것에 대한 의지적 표상이고, 기억의 물건들은 일상 속에서 생존의 의미와 존재의 두께를 불리는 상징물들이다. 어느 것도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생의 지속에 대한 욕구와 생존에 대한 희망을 껴안고 있기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인물들은 자주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노선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노선들은 왠지 지구에 난 미세한 틈처럼 보인다. 그 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의 소설에 들어가 청년의 고단함을 짊어진다. 그들은 세계를 감각하려 애쓰지만 그것은 안간힘에 가까워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게임의 상부에 오르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서처럼 걷고 또 걷다 보면 허공에 누군가 걸어둔 신발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신발이 고마웠던 누군가는 또 다음 사람을 위해 따뜻하고 질긴 양말을 걸어둘지도 모른다. 우리가 걷다가 그런 양말을 발견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따뜻한 양말을 신으려면 실은 구멍을 통해 진입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일상성에 숨어 있는 생의 구원을 누구든 자신만의 감각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고단한 생존게임에서 오감을 뻗어 감각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세계감각이기도 해서 죽음, 부음, 부고, 자살과 같은 말들은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그럼에도 감각과 환각의 지평을 확장해 더듬는 것은 그것만이 자존의 마지막 촉수이기 때문이다. ‘생존주의 세대’라는 말이 자못 신랄하면서도, 거듭 지연되는 우리의 청년기를 구조적 이해를 바탕으로 호명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한 세대표현이기도 하다. 작가의 인물들에게서 왜소한 개인의 찌질함, 비겁과 불안, 소외, 포기, 불능 등을 보았다면 그것은 마땅하다. 이것은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닌 억눌린 청년의 문학적 재현이 윤고은식 리얼리티를 만나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응전과 초과가 죽음으로 청년을 밀어뜨리고 열악한 환경을 조건으로 내걸며 패배주의 프레임을 씌울 때, 환각으로나마 현실을 버티어내려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청년들은 끝내 백 년의 시차를 짊어진 소설가처럼 이 생존게임에 잘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상이 느끼던 가려움은 이들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생의 감각으로 옮아갈지도 모른다(「다옥정 7번지」). 때로 자기소멸이라는 선택이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타살이라는 궁지에 몰린 지금 청년들의 타나토스적인 고백이라고 한다면 이토록 말랑한 생의 감각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자, 역설적으로 존재의 죽음을 지연하는 최소한의 생존 아이템인 셈이다. 평범성의 유토피아에 결코 닿지 못하는 이들의 환각 체험이나 오류의 삶은 매일 생존이라는 모험을 하고 있는 당신을 위한 서바이벌 키트가 기꺼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부디 “살아서 만나요.”12)


12)“가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 ‘살아서 만나요’라고 해요.”,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실린 작가 대담 「생존배낭에서 나온 소설가들」 중에서.

황유지

추천 콘텐츠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lsqu

  • 관리자
  • 2023-11-08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 관리자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